호크마 주석, 시편 118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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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
여호와께 감사하라 - '감사하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호두'(* )는 '야다'(* )의 히필형으로서 '감사하다', '고백하다'란 뜻을 가지고 있으며 주로 행위가 수반된 감사와 고백을 가리킨다. 사 12:4에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그 이적을 선포하는 행위'와 더불어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께 죄악을 자복하고 빈다는 뜻으로도 쓰인다:"만일 저희가 주께 범죄함을 인하여 하늘이 닫히고 비가 없어서 주의 벌을 받을 때에 이곳을 향하여 빌며 주의 이름을 '인정하고' 그 죄에서 떠나거든"(왕상 8:35).
저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 어구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 이름을 인정해야 할 이유를 나타낸다. 여기서 '선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 )는 동사, 형용사, 명사 등으로 쓰이는데 '기뻐하다', '만족하다' 그리고 '유쾌한', '즐거운', '좋은'(민 24:5) 그리고 '행복', '좋은 것'(신 26:11)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한편,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란 어구는 4절까지 각 구절 끝에 연속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아마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이유가 하나님의 권능과 공의에도 있겠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으로 보인다. 하나님의 깊고 깊은 인자하심을 경험하게 될 때 신자는 자발적이며 진심에서 우러나온 찬양과 감사를 드릴 수 있는 것이다.시 118:2고난 속에서의 구원에 대한 감사인자하신 여호와께 감사하라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영원하다 할지로다 -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에 한정시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재차 언급되고 있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 )가 다시 스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 )가 다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하는 말 앞에는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다짐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나'(* )인데 '청컨대'나 '오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주석가는(Horsley) 이 말이 2인칭 직설법에 쓰일 경우는 한글 개역 성경 본문의 경우와 같이 '이제'와 '청컨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창 13:9). 반면에 '나'가 본문과 같이 3인칭과 함께 쓰일 때는 감탄 접속사로 해석하여 '오 !'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본다(삼상 9:6).

=====118:2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기를...영원하다 할지로다 - 여기서 시인은 이스라엘에 한정시켜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재차 언급되고 있는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 )가 다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란 어구 앞에는 이유의 접속사 '키'(* )가 다시 쓰이고 있다. 따라서 이곳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라고 하는 말 앞에는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라'는 다짐의 말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본문의 히브리어는 '나'(* )인데 '청컨대'나 '오 !'등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어떤 주석가는(Horsley) 이 말이 2인칭 직설법에 쓰일 경우는 한글 개역 성경 본문의 경우와 같이 '이제'와 '청컨대'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창 13:9). 반면에 '나'가 본문과 같이 3인칭과 함께 쓰일 때는 감탄 접속사로 해석하여 '오 !'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본다(삼상 9:6).

=====118:3
이제 아론의 집은 말하기를 - 시인은 여기서 대상을 더욱 한정시켜 아론의 집을 지칭하고 있다. 아론의 집은 제사장 직분을 맡았던 가문으로서 찬송을 지휘할 특권을 가졌다.

=====118:4
이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아론의 집'보다 더 포괄적인 개념일 수 있으나 한 개인으로 볼 때 이스라엘이나 아론의 집보다 더 한정된 것일 수 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방인 개종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행 10:22). 이방인 개종자를 흔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로 불렀다는 점에서 시인은 여기서 장차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 암시하고 있다고 확대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118:5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 여기서 '고통'에 해당하는 '하메차르'(* )는 '가두다', '제한하다', '속박하다'란 뜻의 동사 '추르'(* )에서 파생된 명사로 보이는데 구약 성경 전체에 걸쳐 이곳에만 쓰이고 있기 때문에 이 시의 전 문맥을 통해서 그 의미를 한정 할 수밖에 없다. 10-14절과 17, 18절에서 시인은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 사실을 고려하면 '메차르'는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는 위기 상황을 나타낸다 하겠다(Dahood). 한편, 시인은 지난날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이 그의 간구를 들으사 구원해 주신 것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회중 앞에 그 사실을 분명히 증언할 수 있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쉽게 망각해 버리는 현대인에게 크나 큰 교훈이 될 것이다(Weiser).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 , 아나니 바메레하브 야)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여호와의 넓은 곳에서 내게 응답하셨다'이다. NIV는 '그가 날 자유롭게 하심으로 응답하셨다'(he answered by setting me free)로 번역하고 있고, KJV는 '여호와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를 넓은 곳에 두셨다'로 번역한다(the Lord answered me, and set me in a large place). '광활한 곳'에 해당하는 '메레하브'는 흔히 지상의 광활한 장소를 가리키는데, 31:8에서는 다음과 같은 용례를 보여준다. "나를 대적의 수중에 금고치 아니하셨고 내 발을 넓은 곳에 세우셨음이니이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이것은 앞 어구의 '메차르'와 대조를 이루는 '자유로운 곳'을 가리킨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상의 속박된 처지와 대조를 이루는 하늘의 자유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Dahood). 한편, 우리는 여기서 그 백성의 부르짖음과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엿볼 수 있으며 성도가 고난받는 때가 오히려 기도에 더욱 적합한 시기이며 하나님께 응답받는 때임을 배울 수 있다.

=====118:6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예화 리'(* )로서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니'(The Lord is with me, NIV)란 뜻이다. 56:9에는 이를 '하나님이 나를 도우심'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칼빈(Calvin)은 이를 '나는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고 있는데, 우주의 모든 능력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가장 든든한 확신을 갖게 한다.
내게 두려움이 없나니 -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창 3:10). 요컨대 두려움이란 것은 죄의 결과 주어지는 것이며 하나님을 멀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사람이 내게 어찌할꼬 - 원문은 '마 야아세 리 아담'(* - )으로 '사람이 내게 무슨 짓을 할 수 있겠는가?'란 뜻인데, LB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무능함을 강조하기 위해 '보잘것없는 인간이...'(...mere man...)라고 번역하고 있다. 나님이 우리를 지키시고 돌보시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 우리는 두려움이 있을 수 없으며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27:1)라고 외친 것처럼 담대할 수 있다.

=====118:7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란 말은, 앞 구절과 같은 '예화 리'이다. '돕는 자 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베오제라'(* )인데 한글 개역 성경은 '베'(* )를 '...중'(among)로 해석하여 전치사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엄 복수가 뒤따를 경우에 쓰이는 강세형 '베트'(* )로 보는 것이 더 좋겠다. 그리고 다음 어구의 '나를 미워하는 자'(my enemies)가 복수형으로 쓰여 '베손아'(* )로 표기된 것과 운율을 맞추기 위하여 '베오제라'는 복수형으로 쓰였지만 의미상 단수인 장엄 복수인 것이다. 따라서 NIV는 '여호와는 나와 함께 계시며 그는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번역하며(The Lord is with me;he is my helper), RSV는 '여호와께서 나를 돕기 위해 내 곁에 계시도다'라고 번역하고 있다(The Lord is on my side to help me).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 '내가 보리로다'에 해당하는 '에르에'(* )는 6절의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이라'(* )와 음가가 비슷한 언어 유희적 방식으로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소네아'(* )로서 '미워하다'라는 뜻을 가진 '사네'(* )에서 파생된 말로서 '나의 원수들'로 번역하는 것이 무난할 듯하다(my enemies, NIV). 한편 여기서 우리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생각하는 것에 비례하여 축소되지만, 인간을 신뢰하고 인간의 도움에 의지할 때 그 의지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 커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겠다.

=====118:8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 본절과 9절은 마치 잠언과 같은 형식인데 시인이 개인적으로 경험한 것에 근거하여 일반적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즉, 흔들림없이 확실하게 서 있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 곁이란 뜻이다. 참신앙은 사람을 의지하는 것이나 지상의 권력, 즉 일시적인 권력 수단을 추종하는 것을 중단하면서부터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인간적 도움에 연연해 하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살아있는 힘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Weiser). 한편, '피함'에 해당하는 '라하소트'(* )는 '피신처를 찾다'란 뜻을 가진 '하사'(* )의 부정사형인데 사 14:32에는 하나님의 백성 중 곤고한 자들이 여호와께서 세우신 시온에 피난할 것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잠 14:32에는 의인은 죽음 가운데서 피신처를 찾을 수 있다는 용례가 나오는데 한글 개역 성경은 이를 '소망이 있느니라'라고 번역했다. 또한 칼빈(Calvin)은 이를 하나님으로 만족을 누리고, 땅에서 어떠한 도움을 얻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살 소망을 가진다는 의미로 주해하였다.

=====118:9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 '방백들'은 원어로 '네디빔'(* )인데 8절의 '사람'과 대구를 이루는 말이다.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이 내용이 바벨론 포로 이후 사마리아인들의 핍박에도 불구하고 감행했던 성전 재건 사역을 통해 유대인들이 경험하게 된 것으로 설명하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못한다. 한편, 바이저(Weiser)는 이 다음에 이어지는 10-18절에서 8절과 본절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설명된다고 보았다. 즉, 10-14절에서는 엄청난 위험과 하나님의 능력있는 도우심, 인간들이 만들어 내는 위협과 하나님의 구원이 서로 상반되는 개념으로 언급되어 있고, 15, 16절에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의 내용이 그리고 17, 18절에서는 구원받은 자의 희망찬 삶이 묘사되어 있는 것이다.

=====118:10
열방이 나를 에워쌌으니 - 이는 시인이 직접 경험한 내용으로서 수많은 무리에 의해 에워쌈을 당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고서는 결코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는 처지였음을 고백한다.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 '이름으로'란 말과 '저희를'이란 말사이에는 원문상 '키'(* )란 말이 쓰이고 있는데 이는 접속사가 아니라 긍정적 의미를 가진 부사로서 '분명히', '정말'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이것은 또한 문장 끝에 놓여 동사의 의미를 강화시키는 역할도 한다(Dahood). 그리고 '저희를 끊으리로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밀람'(* )은 '할례하다'란 뜻의 히브리어 '물'(* )의 히필형으로서 '그들로 할례받게 하겠다'는 의미인데, 이 동사의 시제는 문맥상 미래보다는 과거 시제가 더 적합하리라 본다. 아마도 시인은 여기서 다윗이 블레셋 사람 이백 명을 죽이고 그 양피를 가져다가 사울 왕에게 주고 왕의 사위가 된 사건을 암시하고 있는 것 같다(삼상 18:25-27).

=====118:11
저희가 나를 에워싸고...저희를 끊으리로다 - 10-12절은 상반된 두 개념 즉 적들이 자신을 에워쌌다는 것과 여호와의 이름으로 그들을 물리치겠다는 말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면서 아름다운 운율을 구성하고 있는데, 여기서 시인은 생사(生死)가 걸린 역경에 처했으나 자신의 배후에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특히 '여호와의 이름으로'는 자신의 능력으로는 위기에서 헤쳐 나올 수가 없었으며 오로지 하나님의 간섭하심으로 말미암았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118:12
저희가 벌과 같이 나를 에워쌌으나 - 대적들의 맹렬한 공격과 분노가 '벌'에 비유되고 있는데 이는 대적들의 수효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시인에게 큰 위기와 고통을 안겨주었음을 뜻한다.
가시덤불의 불같이 소멸되었나니 - 가시덤불의 불은 삽시간에 타오르지만 곧 꺼져 버리고 마는 것으로서 대적들의 위세가 마치 온 천지를 삼킬듯이 맹렬하였지만 금방 사그라지고 마는 것을 뜻한다. 한편, '소멸되다'에 해당하는 '도아쿠'(* )는 여기서 자동사로 쓰이고 있는데, 어떤 주석가는 이를 '태우다'는 뜻의 타동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타동사로 볼 경우 이 어구는 '가시덤불의 불같이 타올라'로 해석되며 그 다음에 '곧 꺼져버린다'는 말이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자동사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갈대아인들을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신 사실을 선포하였는데 거기서도 이 말이 자동사의 의미로 쓰였다(사 43:17).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희를 끊으리로다 -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대적들의 에워쌈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됨을 다시금 강조하는 말이다.

=====118:13
네가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 '네가 나를 밀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호 데히타니 린폴'(* )은 매우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다호'의 원형인 '다하'(* )는 '밀다', '떠밀다'(push, thrust)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데히타니'의 원형 역시 '다하'이다. 이렇게 같은 동사가 이중적으로 쓰인 것은 강조의 의미를 나타내는 것인데, 앞의 '다호'는 절대형 부정사이며, 뒤의 '데히타니'는 칼 2인칭 남성 단수 완료형이기 때문에 이 동사의 주어는 '다호'가 될 수 없다. 내용상 주어는 '사망'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Dahood). 그리고 '넘어뜨리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린폴'(* )은 '떨어지다', '눕다', '죽다' 등의 뜻을 가진 '나팔'(* )에서 나온 말로서 어떤 학자는 이를 동명사형으로 보기도 한다(Hammond). 아무튼 이 어구는 대적의 공격으로 시인의 생명이 경각에 달려있음을 가리키고 있다.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 - 사망과의 투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하였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한편,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본 시의 '나'를 '이스라엘'로 해석하여 출 15장에 나오는 '모세의 노래'와 본 시를 연관시킨다.

=====118:14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요 - 이 구절은 출 15:2에서 인용된 부분이며 사 12:2에도 유사한 말이 나온다(Keil & Delitzsch). '능력'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지'(* )의 원형은 '강한', '튼튼한'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 '아즈'(* )인데, 데베스의 성중(城中)에 있는 망대를 "'견고한' 망대"로 묘사할 때 쓰였다(삿 9:51). 따라서 이는 시인이 자신의 연약함을 솔직히 인정하고 자신의 피난처를 오직 하나님께만 두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찬송'에 해당하는 '지므라트'(* )는 악기가 동원된 '멜로디'나 '노래'를 가리키기도 한다. 암 5:23에는 노래 소리와 비파소리가 동의적 대구를 이루고 있다:"네 노래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118:15
의인의 장막에 기쁜 소리 - '의인의 장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할레 차디킴'(* )인데 문맥상 '차디킴'으르 '승리자들'로 번역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승리자들의 장막' 또는 '개선의 장막'으로 번역된다. 아마도 이스라엘 군대가 왕의 무사 귀환을 축하하면서 불렀던 것을 가리키는 듯하다. 메시야의 도래를 예언하는 슥 9:9의 말씀 중에는 이 '차디크'가 '의롭다'로 번역되어 있으나 내용상 승리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겠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나귀를 타나니..."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 '여호와의 오른손'은 16절에 2번 더 쓰이고 있는데 이런 삼중적 표현은 10-12절의 대적들의 포위를 나타내는 삼중적 표현과 대응되고 있다.

=====118:16
여호와의 오른손이 높이 들렸으며 - 하나님의 오른손은 하나님의 구원과 도우심을 상징한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참으로 너를 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그리고 높이 들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나타났으며 그래서 그 광채가 밝히 드러났다는 뜻으로 쓰였다.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는도다 - 이는 '여호와의 손이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도다'란 의미로도 번역된다(Weiser). '권능'에 해당하는 '하일'(* )은 '힘', '효율성', '부'(富), '군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다윗이...진영에 른즉 마침 '군대'가 전장에 나와서 싸우려고 고함하며"(삼상 17:20). 모세의 장인 이드로는 모세에게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을 세울 것을 충고하며 이 단어를 '재덕'(才德)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출 18:21).

=====118:17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 - 이 어구를 좀더 분명하게 해석하면 '나는 죽지 않을 것이고 살 것이며 여호와의 일을 말한 것이다'가 되는데, 시인이 여기서 '죽지 않고'라고 한 것은 사망의 위협 속에 거의 죽을 지경에 처해 있었음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그는 완전히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속에서 다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살아서 해야 할 일이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데,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단순히 그들의 삶을 즐길 수 있도록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도록 하기 위함인 것을 알아야 한다. 한편 '행사'에 해당하는 '마아세'(* )는 '만들다', '행하다' 등의 뜻을 가진 '아사'(* )에서 파생된 명사이며, 출 18:20에서는 '(마땅히) 할 일'로 번역되었고 창 46:33에서는 직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시인을 구원하기 위해 행하신 일을 가리킨다.

=====118:18
여호와께서...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셨도다 - 하나님께서 시인을 죽음에 넘겨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인생에 새로운 의미가 주어지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를 인도하기 위해 그에게 시련을 주셨다는 고백이다(Weiser). 한편 '나를 경책하셨어도'에 해당하는 '이스라니'(* )의 원형 동사인 '야사르'(* )는 '훈련시키다', '권고하다', '경고하다', '벌주다'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사 8:11;렘 31:18;호 10:10).

=====118:19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 '의의 문'은 성전 문을 뜻할 수 있다. 성전 문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상호 교통하는 장소에로 인도하는 입구이므로 의의 문이라 불리우는 것이 마땅하다(Keil & Delitzsch). 그러나 어떤 주석가는 '의'에 해당하는 '체데크'(* )가 원래 '승리'의 개념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를 '개선문'으로 번역하면서 성전 문보다는 예루살렘 문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한다(Dahood). 그리고 여기서의 문은 복수형으로 표기되어 잇는 반면에 20절에 다시 등장하는 문은 단수형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복수형으로 표기된 문들은 예루살렘 문을 가리키고, 20절의 문은 성전 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가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 이는 원수에게 쫓기면서 하나님께 약속했던 바를 실행에 옮긴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동안 시인은 대적들에게 쫓기면서 성소에 나아갈 수 없었으며 더군다나 생명의 위협을 시시 각각 느끼는 소망없는 삶을 살았으나 이제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리기 위해 성전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118:20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이 그리로 들어 가리로다 - '여호와의 문'은 성전 현관 출입구를 가리키는 것으로서 의인만이 출입할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통행권이 있다는 뜻이다.

=====118:21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 본절의 강조점은 '구원'에 주어져 있으며, 이는 여호와 안에서 피난처를 찾고(8, 9절) 또 여호와의 이름에 의존하는 자들에게(10-12절)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롭고도 완벽한 구원에 관한 주제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 여기서부터 27절까지는 대화의 주체가 '우리'로 변경된다. 이는 이 시가 회중 중심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 구절은 '건축자의 버린 돌과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라는 그 유명한 비유를 담고 있다.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란 네모로 다듬어진 것으로서 건물의 중력을 양(兩) 방향에서 받기 때문에 특별히 재질이 좋은 것으로 선택되어야 했다. 이 비유는 전격적인 상황의 변화를 체험한 구원받은 자의 처지를 설명하고 있다. 즉,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 영예롭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중대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후기 유대교는 이 비유를 메시야에게 적용시켰으며 신약에서는 예수께서 직접 이 비유를 자신에게 적용시키셨을 뿐만 아니라(마 21:42) 사도들도 그렇게 해석하였다(행 4:11;벧전 2:7, Weiser). 한편, 어떤 주석가는 '건축자의 버린 돌'을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대제국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하찮은 나라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영적으로는 대단히 중요하고 영예로운 자리를 차지하였음을 나타낸다는 것이다(Dahood). 또 어떤 이는 이 구절을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여 솔로몬 성전 건축에서 쓸데없다고 버려진 돌이 하나님의 선지자에 의해 모퉁잇돌이 된 것을 뜻한다고 설명한다(Michaelis).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배척당하였으나 날로 증가하는 교회의 초석이 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이다.

=====118:23
이는 여호와의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 - 이 구절은 시인에게 일어난 일이 사람의 능력에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총에서 비롯된 것임을 전 회중이 고백하게끔 유도하는 내용이다. 한편 '기이한 바'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니플라트'(* )는 '놀랍다', '이상하다'의 뜻을 가진 동사 '팔라'(* )에서 나온 말로서 '놀라운 행위'를 가리키는데 하나님의 구원이나 심판 등 초자연적 행위를 가리킬 때 주로 쓰인다:"내가 내 손을 들어 애굽 중에 여러가지 '이적'으로 그 나라를 친후에야 그가 너희를 보내리라"(출 3:20).

=====118:24
이 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 대부분 영역 성경들은 이를 '이 날은 여호와께서 만드신 날이라'고 번역하고 있다(KJV, NIV, RSV). 그러나 '정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사'(* )는 '만들다'(make)는 뜻 외에 '행하다'(do, act)란 뜻도 가지고 있다(창 30:31). 본문의 '아사'는 '행하다'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문구는 '이 날은 여호와께서 행하시는 날이라'가 되며 22:31과 말 4:3의 의미와도 일맥 상통한다.
이 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 '이 날에'에 해당하는 '보'(* )는 원문상 '그 안에서'라고 해석된다. 혹자는 이를 '여호와 하나님 안에서'라고 해석하기도 한다(Dahood). 또 칼빈(Calvin)은 이 날을 다윗이 왕이 되어 사무엘의 기름 부음을 받는 복되고 즐거운 날이라고 이해한다. 그런가 하면 이 날은 하나님의 승리를 기뻐하고 축하하는 축제일로서 하나님이 직접 제정해 주신 '여호와의 날'로도 해석하기도 한다(Weiser). 어쨌든 시인은 기나긴 세월을 흑암속에서 고통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승리의 날을 맞이했으므로 이 날을 하나님이 준비하신 '여호와의 날'로 불러도 마땅한 것이다.

=====118:25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 이는 미래 사건에 대한 호소로 해석할 수 있다. 즉, 과거에 이스라엘 군대를 승리로 인도하신 주께서 앞으로도 하나님의 능력을 자기들에게 보여달라는 것이다(Weiser, Dahood). 한편 '이제'에 해당하는 '나'(* )가 이 어구 끝에 쓰이고 있는데, 이 말은 '이제'와 같은 시간 부사로 해석하는 것보다는 '구하옵나니'에 해당하는 '아나'(* )와 상관적 의미로 쓰이는 간구 형식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Calvin, 창 33:14 참조). 칼빈(Calvin)은 '나'를 이런 의미로 해석하면서 이 구절이 전형적인 기도문 형식이란 견해를 제시한다.
형통케 하소서 - 이에 해당하는 '하첼리하'(* )는 '전진하다', '번영하다'란 뜻을 가진 '찰라흐'(* )의 히필형인데 '번영케 하다', '성공으로 인도하다'란 의미로도 쓰인다. 한 예로서 아브라함의 명령으로 이삭의 배우자를 선택하러 간 늙은 종이 리브가를 만나는 과정에서 이 말이 '평탄한 길을 주다'란 의미로 쓰인 바 있다(창 24:21).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바 베쉠 예화'(* )인데 '오다'에 해당하는 '보'(* )는 때때로 '통치자로 행동하다'라는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후계자로 세우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민 27:17)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출입하다'라고 번역된 '보'는 '다스리다', '통치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자를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통치자인 왕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으로' 주께 나아오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고 봄이 자연스러울 것 같다(막 11:9;눅 13:35;19:38).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 이 구절은 성전 문을 지키는 제사장들의 축복 인사로서 표현된 것으로 보이며 이 구절과 다음의 27절의 화자(話者) 역시 그들인 것 같다(Weiser). 제사장들의 의무 중 하나는 이처럼 백성들을 축복하는 것인데 민 6:24-26에는 축복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로 내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영호와의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118:27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 예화'(* )로서 '여호와 하나님'과 같이 복합 칭호로도 볼 수 있으나 이 말 다음에 오는 '와우'(* )가 강조 접사가 아니라 접속사이기 때문에 하나의 절로 보아서 한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에게 비취셨으니'에 해당하는 '와야에르 라누'(* )는 직역하면 '그리고 그는 우리에게 빛을 주셨도다'가 된다. 여기서 '빛'은 왕과 그 군대에게 있어 적들을 물리치는 승리의 영광을 말한다(Dahood). 한편, 카일-델리취(Keil & Delitzsch)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인자하심과 자유 그리고 기쁨 등을 허락하사 그들에게 빛을 주심으로 여호와께서는 당신이 하나님이심을 입증했다고 설명하는데 이 또한 가능한 해석이다.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 '희생'으로 번역된 '하그'(* )는 '희생 제물'이라는 뜻도 있지만 '거룩한 절기'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이 단어의 어근 '하가그'(* )도 '절기를 지키다', '기념하다', '춤추다' 등의 뜻이다. 더구나 희생 제물을 제단 뿔에 줄로 매었다는 증거는 찾아볼 수 없다. 따라서 최근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 단어를 '(절기의) 진행 과정' 혹은 '절기 때 추는 춤'으로 해석한다. 미쉬나(Mishnah)의 기록에 의하면, 장막절에 예배자들은 제단 주위에 모여 종려 나무등의 가지나 꽃다발로 제단을 덮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에 근거해서, 우리는 본문을, 축제시에 예배자들이 제단 주위에 모여 종려나뭇가지나 축제 꽃다발들을 제단에 장식하며 때로는 춤을 추었던 것에 대한 묘사로 해석하고자 한다(With boughs in hand, join in the festal procession up to the horns of the altar, NIV;Bind the festal procession with branches, up to the horns of the altar, RSV).

=====118:28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 축제의 진행 과정이 절정에 올랐다가 대단원으로 이어지는 것을 나타내며 시인이 드린 제사의 성격이 어떠한 것인지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애굽 군대가 이스라엘을 뒤쫓아 홍해를 건너다가 멸망당한 사건에 이어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하는 내용은 본문의 내용과 일맥 상통한다.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 내 아비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높이리로다"(출 15:2).

=====118:29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 구절은 1절과 동일한 내용의 반복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역경에서 헤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때문인 것으로서 그들은 이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과 은혜를 증거할 수 있는 것이다.

 

 

 

   본시는 할렐시(hallel,113-118편)중 마지막 노래로서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의 능력
을 찬송하고 있다. 예수께서 감람산으로 나가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부르셨던 마지막
찬양이기도 한 본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다는 사실에 대해 희열에 가들 찬
감사의 표현이 넘치고 있다. 아울러 속박과 재난과 위협으로부터의 구원을 감사하면서
약속된 메시야를 통한 구원의 완성을 예표하고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유대
인 포로들이 바벨론에서 돌아온 뒤 첫 번째 장막절을 축하하면서 이스라엘을 재건하시
는 하나님의 계획을 찬미하는 노래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본시의 표현이 포로 후 시대
의 작품과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제공한다(22-24절;스3:10, 11, 25;느1:11). 또다른
학자들은  제2전성전이  건축된  이후에  지은   시라고  주장하기도  한다(Delizsch,
Hengstenverg). 또한 전통적으로 본시의 내용과 분위기를 상고해 볼 때 다윗이 폭풍과
같은 시련을 거치고나서 마침내 전 이스라엘의 왕으로 동극한 시기(삼하2:4)에 저술하
였다고 생각한다(Talmud, Targum역,Calvin, Matthew Henry). 좀더 구체적으로는 다윗
이 자신을 죽이려고 필사적으로 추격해오던 사울에게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
릴 수 있도록  허락받은 시점에서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한 저자에 대해 알 수
없고, 다만 어떤 시인이 고난 속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인자와은혜에 대해 마음속
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와 찬양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시는 시편의 장르상 '메시야시'(messianic psalm)로 분류할수 있다. 본시에
는 메시야가 이 땅에 강림하셔서 고통받으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후 부활하여 승
귀하실 것에 대한 예언이 들어 있다. 반면에 어떤 학자들은 무수한역경 속에서도 변함
없이 인도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대한 감사와 찬양의마음을 감동적으로 묘사
하고 있는 '개인적인 감사시'로 보기도 한다.
   또한 본시는 전체적으로 반복법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다. 처음절(1절)과 마지막
절(29절)이 동일한 내용이며, 같은 후렴구가  2, 3, 4절에서 나타난다. 6,7절도 '여호
와는 내 편'이라는 어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며 10-12절은 동사가 같고('에워싸다')8,
9절에서는 '여호와께 피함', '신뢰함'이라는 동의어가 들어 있다. 어러한 반복을 통하
여 시인은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대단히 강조하고 있다.
   특히 본  시편의 몇몇  구절은 신약 성경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마21:42과 막
12:10, 11은 22, 23절의 인용이며 눅20:17과 벧전2:7는 22절만을 인용했다. 누가는 행
4:11에서 다시 그 버린 돌에 대해 비유를 언급하고  있다. 또한 모든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의 수난 기사를 언급할 때에 25,26절을 인용했고(마21:9;23:39;막11:9, 10;눅
13:35;19:38;요12:13) 히브리서 기자는 6절을 채용했다(히13:6).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우리는 시인의 감사와 신뢰의 노래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
한  개인적 간증임과  동시에 약속된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예표임을 적용시켰다(마
21:42). 따라서 우리는 본시를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변함없이 인자와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찬미해야 한다는사실을  절감할 수 있다. 더구나 본시는 출 15장의
'모세의 노래'와  유사성이 있다. 14, 28절은 출  15:2과 연관이 있고  15, 16절은 출
15:6과 비슷하다.
   본시의 구성은 내용에 의해 크게 내 부분으로나눌 수 있다. 1 먼저 시인은 어약 백
성을향해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고한 후(1-4절) 2 극심한 환난 속에서도 완벽하게 보
호하신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용기와  위로를 베풀고 있다(5-18
절). 3 이어서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게 됨을 감사하고(19-23절) 4 승리를 주신 왕께
대한 찬양과 함께 여호와의 구원을 대망하면서 시를 마무리하고 있다(24-29절).
   이제 이러한 내용의 본시를 네 단락으로 나누어서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변 다
음과 같다.

      1. 찬양에로의 초청(118:1-4)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초청이 부각되고 있는 본 대목은 시인의 신앙 체험이 배어 있
는 진실한 권고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시편의 서론부분이기도 한 본연은 하나님의 모
든 선하심에 대한 기원과 인간이 감사를 드려야 하는근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이 1절에서    찬양을 요청하면 백성들이 응답(2-4절)하는 교창 형식을 사용하고 있
다.
   1 찬양의  근거(1, 2절):시인은 찬양의 근거에 대해 전적으로 완전하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성품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님은 분위기와 시간과 능력에 따라 변하지 않고
항상 동일한 인자하심을베푸신다. 시인은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다'는 구절을 다섯 번
이나 반복해서 강조한다. '인자하심'의 온전한 의미는 '약속에 대한 신실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사람, 긍휼, 친절등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 말을 다양
한 의미로 확대해서 사용할 수  있다. 결국본연에서 시인은 언제나 동일하게 무가치한
대상에게도 사랑과 공의를 시행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며찬송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2 찬양의 대상:시인은 먼저 이스라엘과 아론의 집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한
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당시의 사상을 생각해 볼 때 이러한 생각
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시인은 곧 이러하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
도 역시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말하면서 찬양의대상을 확장한다. 여기서 시인이 제사장
직분으로서 찬송을 지휘했던 아론의 아들들을 먼저 언급한 후에 하나님을 경외흔 자들
에게로 옮겨간 것은 장차 올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해서 예언한 22절과 일치된다. 왜냐
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들 에게까지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사작의 첫 열매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이었기 때문이다(롬1:16;2:9, 10). 또한 시인은 모든 성도들에게
찬양을 요구함으로써 장차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으로 인하여 할례자나 무할례자의 구분
이 없이 함께 새 사람이 되어 구원에 동참하는 은혜의 시대를 예표하고 있다.

        2. 구원 체험을 통한 위로(118:5-18)
   여호와의 인자하심에 대한 찬양을 촉구한 시인은 본연에서 자신의구원 체험을 소개
함으로써 찬양의 노래와 믿음의 근거를 제시하고자 한다.
   먼저 시인은 과거에 자신이  처해 있던 역경과 위험을 기억하고반성한다. 사람들은
흔히 존귀와 영광을 얻는 자리에    들어가면 이전의낮은 상황을 잊어버린다. 그러나 시
인은 어떤 경우에도 고통중에 거하던 때(5절)를 회상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미
움을 당했고(7절), 존직적인 탄압과 방해를 당했던 것으로보인다. 사람들은 사단의 도
구가 되어 극심한 핍박을  통해(13절) 시인은 죄와파멸 속아으로 밀어넣으려고 안간힘
을 썼다. 또한시인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징계를 경험했다(18절). 하나님께서는 사랑과
인자로써 계획적으로 고난을 부여하셨다(히12:10,11). 이러한 시인의 고통은 거룩하심
을 증진시키려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동시에 다른사람들을 위해 예비된 그리스도의 대
소적 고난의 예표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이처럼 고난을받는 가운데서 전심으로 부르짖었고 그 결과 응답을 받았다(5
절). 하나님께서는 시인의 간구를 들으시고 대적들의계획을 좌절시키셨다(12절). 대적
들은 일시 적으로  심각한 위협을 제공하는 듯했지만 결국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전7:6). 사실원수들의 공세는 마치 우매자의 분노와 같아서 두려움의 대상이라기보다
는 오히려 동정의 대상이 될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격렬한 대적들의 공격을 막으시고
생명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셨다(18절). 그러므로 사도바울은 성도들에 대해 '죽은 자
같으나살고 징계를 받는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다'(고후6:9)라고 확신있게 증언
했다. 예수그리스도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영원히 썩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부활
하셨다. 우리도 심한경책을 받을때  결코 절망에 빠져서는 안 되는 생명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시인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후에 많은 진보를 경험했
다. 그는 먼저 인간을 의지하지 않고 철저히 하나님만을 신뢰하게 되었다(8, 9절). 하
나님만이 유일한 피난처요 안전한 구원산성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또한 시인은 하나님
께서 철저하게 자신의  존재도 위로와 도움을 베풀 수 없는 상황에서 여호와는 능력과
찬송을 공급하신다. 시인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구원의 징표요 조증으로서
간주할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하게 되었다. 또한 시인은 대적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확신한다(7, 10-12절).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신뢰하고 그분의힘을 의지하며 어두움의
권세가 철저히 파멸될 완성의 날을 대망한다. 하나님께서 권능의 오른손으로 공의로운
판결을 집행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하나님께서  권능의 오른손으로 공의로운
판결을 집행하실 것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자기를 살리시고 구원의 행사
를 선포하도록 만드실 것을 믿는다. 시인의 남은 생애는 하나님의 자비와 권세를 선포
하며 찬양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성도에게 임하는 고난의의의와 가치에 대해서 배울 수 있다. 시인
은 급박한 상황을 거치면서 성숙한 신앙과 성품을 소유하게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을 통하여 신자를 낮추시며 충성하게 만드시고 자아를 부정할 수 있도록 만드신다. 그
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징계가 일시적으로 우리에게 고통을 줄지라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는사실을 자각하고 기쁨으로 맞아야 할 것이다(벧전4:12, 13).

        3. 메시야의 비하와 존귀(118:19-29)
   자신의 고난과 구원을 소개하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드러내던 시인은이제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에 대한 현격한 예언을 선포하기 시작한다. 이 부분의 몇구절들은 4복음서
에 나타난 예수님의  수난 기사에 예외없이 인용되고 있다(22, 23, 25, 26절). 시인은
성령의 영감을 통하여  모퉁이 돌이 되기 위해 버림을 받아야 하는 그리스도의 운명과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환호하는 백성들의 모습을 미리 노래하고 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를 희망한다(19-21절). 어떤 사람들은 이 부
분에 대해 해석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한 왕이 백성을 인도하여 성문으로 들어가려고 하
는데 문이 닫혀 있으므로 열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의 문
은 '의의 문'이며 '여호와의 문'으로서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의인들만이 들어갈 자
격이 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승리한군인들의 개선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
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문이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오면 이 문은 분명하게 그
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길이요 진리요생면이며'(요14:6), '양의 문'(요10:9)
이다. 그를 통해서만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으며 구원에 동참할 수 있다. 시인은 바로
오랫동안 두드려우던 의의 문이 그리스도를통해 열려질 수 있음을 발견하고 개가를 올
린다.
   사실 당시의 성전문은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 닫혀 있었으며, 유대인들이라
고 할지라도 거룩한규례에 입가하며 겸손하게 청원해야 했다. 15, 24편은 축제가 베풀
어질 때 하나님의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으로서 율법의 요구를 제시한다. 반면에 본
연은 여호와의 구속을 강조하여 그 이름과 행사가 성전으로 들어가는 결정적인 관건이
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두부분은 결코 상치되거나 모순되지 않는다. 성경은 오직 율
법의 약속을 따라 예수님을 통해 구원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기쁨의 교
제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은총을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드
리기로 약속한다(21절). 희미하게나마 그리스도의 날을 본 그는 선지자적 전망을 통해
서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발견한 것이다.
   둘째, 시인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의 구체적인 내용을언급한다(22, 23절). 그는 하
나님의 영감을 통하여  메시야의 비하와 승귀에 대한 사실을 미리 노래하고 있는 것이
다.
   1 메시야의 비하(22a절):여기서 메시야는 '건축자가버린 돌'로 묘사된다. 메시야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성육신하여 세상에 임하셨지만, 유대인의지도자
와 군중들에 의해 철저하게  버림받았다(행4:8, 10, 11). 그들은약속된 그리스도를 주
로 고백하지 않았고 경멸하며 배척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십자가의저주를 통해서 인
간의 연약한 모든 죄를 도말하셔다(골2:14, 15). 즉 수치와 죽음가운데서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승리의  근거를 확보하셨다. 결국 메시야는  "사람의 손으로하지 아니하고
산에서 따내온 돌"(단2:30)로서 영적인 성전의 기초를 쌓는 초석이 되었다.
   2 메시야의 승귀(22b절):메시야는 이제 '버린 돌'에서 '집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신
다. 그를 기초로 하여 유대인과 이방인이 연합되어 하나의 거룩한 건축물이된다. 그리
스도는 신앙의 창시자요 완성자로서 탁월한 위치를 점유한다. 하나님은 그를인생의 희
망의 근거요 연합의 중심이며 목표로 삼으셨다. 이러한 메시야의 높아짐을 부활과승천
과 성령 강림으로 확증된다.
   먼저 메시야는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에서 불활하심으로 사망을정복하셨다. 그리고
승천하셔서 우리를 하늘나라로  인도하실 준비를 구비하셨다. 메시야는 지상과 하늘을
가로막는 거대한 문, 즉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된 인간 사이의 분리를 여호와의 이름으
로 얻은 의의 힘으로 열도록 요구하신다. 메시야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마지막 원수
인 사망으로 이기시고 굴복시키셨다. 이제 메시야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승천하셔서 하
나님의 보좌 우편에 좌정하시고 천상천하의 모든 권세의 능력을 위임받으셨다. 따라서
지상에 보혜사 성령을 보내사 교회를 설립하시고 번찬하도록 돌보신다. 오순절은 복음
이 세계 만방에 선포되도록 역사하신 하나님의경륜이다. 이처럼 메시야는 교회의 기초
로서 주의 이름으로 오는 모든 자에게 의의 문을 여시는 분이시다(20절).
   셋째, 시인은 구원의 영광을 찬미하며 기뻐한다(24-29절). 시인은 하나님께서 지으
신 구원의 날을 기쁨으로 지키는 끊임없는 축제로 이해하고있다(24절). 그는 버림당한
돌이 존귀하게 높여지는 안식을 기념하며축하한다. 이어서 높임받는 구속자를 향해 호
산나 찬송을 외치며 영접하고 따르리라고 말한다(25,26절). 왕의 대관식 때 그의 백성
들이 환호하는 것처럼 메시야의 등극은 만족과 영광과 애호로서 영접해야한다. 그리스
도가 예루살렘을 공공연히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종려나뭇가지를 흔들고 겉옷을 깔며
공개적인 지지를  표명했다(마21:9). 이처럼 모든 여호와의 백성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축복을 확신하고(엡1:3;6:24)감사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27절).

   . 그리스도의 예언에 대한 시편의 기록.  본서에는 실제로 메시야를 예언한 구절들
이 등장한다(22, 26절). 이와같은 예표적 언급은 기록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난해
한 내용이 되겠지만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매우 명료해졌다. 이제 여기서 시편의 그
리스도 예언 구절들을 신약과 배교하여 정리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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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편 |     내                 용           |  신   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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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너는 내 아들이라                       |행13:33    |
|  8:6    |만물을 그 발 아래 두셨으니                   |히2:8    |
| 16:10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행2:27;13:35|
| 22:8    |저가 여호와께 의탁하니 구원하실 걸               |마27:43    |
|40:7, 8|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히10:7    |
| 41:9    |내 떡을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발꿈치를    |요13:18    |
|    |들었나이다                           |        |
| 45:6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히1:8    |
| 69:9    |주의집을 위하는 열성이 나를 삼키고               |요2:17    |
|110:4    |너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히7:17    |
|118:22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마21:42    |
|118:26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마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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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 있어서 체험의  중요성.본 시편의 저자는 자기 구원의 경험을 "의인의 장막
에 기쁜소리, 구원의 소리가 있음이여 여호와의 오른손이 권능을 베푸시며,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의 행사를 선포하리로다"(15, 17절)라고  노래한다. 이러한 시인의
언급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는 실제로 구원 체험의 보고(寶庫)이다. 본고에서는 신
앙에 있어서 실제적인 경험이 갖는 의미와 필요성을 생각해 본다.
   1 성경과 체험:성경 말씀은 분명히 감정적 체험의강조가 이교적 신비주의로 경도될
가능성을 인식하고 경계한다. 오순절 사건은 이러한 사실을 가장극명하게 보여주는 단
적인 예가 된다. 이외에도 성경 자체는 많은 체험을 제공해주는 보고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우리가 말씀의 기능을 무시하고 천박한 감정을 주창하는 광적인 체험주의에 빠져
서는 곤란하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활속에서 역사하시는 체험들을 자유롭게 수납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결코 신자의 주관적 체험을 무시하지 않으며 이러한 체험은 말씀이 인간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자각되는 통로가 된다(행2:2-4).
   2 체험의 실례:하나님의 구원 사역은먼저 출애굽과 홍해 사건을 통해 주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큰 일을 계속해서 기억했다(출15:6, 11, 12). 이후의 모든 백성들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홍해를 육지같이 갈라 놓으신 하나님을 기억하며 절망을 극복할수 있었다. 본 시편의 기자도 자신의 기이한 구원 경험을 전반부에 상세하게 기록하였다(5-13절0. 예수님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임의체현(體現)을 목격한 후 믿음을 회복했고,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하여 능력을 부여받았다(행2:4). 그 후에 수만, 수천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몸으로 느끼게 되었다(행2:41,47;4:4;5:14;6: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믿고 따르며 신실하게 실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감각적인 사실로 구원을 경험할수록 많은 믿음의 열매들을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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