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7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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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1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 '감사하고'(* , 호디누)의 기본형 '야다'(* )는, '경배하다', '고백하다'의 뜻으로서, 특히 하나님의 위대한 성품을 공적으로 시인하는 것 혹은 찬양하는 것을 주로 가리킨다. '감사하다'의 의미는, 본 동사에서 다소 부속적인 것일 뿐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구약 히브리 단어 중에서 '감사하다'라는 독립적 개념만을 갖고 있는 단어가 없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Ralph, H.Alexander). 한편, 본 문구의 '감사함은'도 앞의 '감사하고'와 동일한 단어이다. 이처럼 저자는, 동일한 단어의 반복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자신의 감격을 강조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 '주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인격이나 성품 혹은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52:9). 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 혹은 하나님의 섭리, 보다 구체적으로는 세상의 악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54:1;사30:27). 한편, '가까움이라'는,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치하실 종말이 멀지 않았음을보여준다. 저자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며 아울러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던 앗수르의 강력한 군대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에 의하여 순식간에 전멸됨을 목도하고(왕하19:35-37), 이처럼 모든 악한 세력들은 불원간(不遠間)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절되리라는 종말론적인 영감을 받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 앗수르의 대군이 몰살 당한 것은 저자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온 백성에 의해서 확인되었을 것이다. 그 놀라운 사실을 직,간접으로 확인한 그들이 본 문구와 같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79:13;눅8:39).

=====75:2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 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어서, 본절이 1절의 이유를 설명해 주는 부분임을 시사한다.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 '주의 말씀이'는 그 다음 부분부터 5절까지가 하나님이 직접하신 말씀임을 밝혀주기 위한 삽입이다. 한편, '내가 정한 기약을당하면'은,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징벌하시기로 작정하신 시점이 되면'이라는 뜻이다(합 2:3).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처럼 즉시 악인들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정한기약'을 두시어 뒤로 미루시는 것일까 ? 그것은 (1)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를드러내시며(벧후 3:9), (2) 죄인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며(딤전 2:4), (3)의인을 더욱 연단하여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수준에 이르도록 하기 위함(빌 1:10,11)이다. 아무튼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지(全知)하신 판단에 따라 가장 합당한 시기를 '정한 기약'으로 삼으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말고, 다만 인내로써 그날을 기다려야 한다.
정의로 판단하리니 - 원문에는 '내가'를 뜻하는 인칭 대명사 '아니'(* )가 있다. '판단하리니'(* , 에쉬포트)라는 단어가 이미 '내가 판단하리니'를 뜻하는데도 이처럼 '아니'라는 인칭 대명사를 덧붙인 까닭은, 행위 주체자의 결단적 의지를강조하려는 이유 때문이다. 한편 '정의로'(* , 메솨림)는 '곧다' 혹은 '합법적이다'를 뜻하는 동사 '야솨르'(*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하나님의 율법이라는원리 원칙대로'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재판은 '공평 무사'(公平無私)하여 그 결과로 인하여 불평 불만이 있을 수 없다(9:8;사11:4). 또한 이러한 재판은 지극히 엄정하여, 모든 잘못과 죄악에 대한 죄책을 호리라도 남김없이 철저히 추궁한다.


=====75:3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 '땅의 기둥'은, 히브리인들에 의하여 이 세상의 기초로서 인식되었었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근본적인 창조주요, 또한 이 세상을 요동치 않도록 붙들고 계시는 관리자임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는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나타내는 것으로서, 하나님이 이 세상 만물에 주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실 수 있는 근거를 확실히 제시한다(삼상 2:8).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 하나님께서는 '땅의 기둥' 곧 '세상의 기초'를세우셨을 만큼 세상에 대한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악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힘든 일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보전(保全) 역사를 알지 못하고, 과학주의의 허탄한 이론을 좇음으로 인하여 하나님을만홀히 여긴다(롬 1:19-21). 그들은 하나님께서 일반 은총에 따라 당신의 자녀들에게처럼 햇빛을 비춰주시며 비를 내려주심(마 5:45)을 인정치 않고, 모든 소산이 자기들의 능력에 따라 거둬질 수 있을 것이라고 보며, 심지어는 하나님의 피조물에 지나지않는 자연계를 숭배하는 어리석음을 범하기도 한다(롬 1:22, 23). 따라서 세상의 기초를 놓으신 절대 주권자 하나님께서는, 종말에 세상 사람들에게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엄중한 심판을 가하실 것이다(사 24:19;계 6:12-17).

=====75:4
하나님께서 언제 어떻게 본절과 같은 말씀을 하셨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추측컨대 첫째,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입을 빌어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삼상 2:3)라고 하신 것과,둘째, 하나님께서 각 시대마다 교만한 세력들을 초자연적 역사에 따라 만민이 알도록징벌하신 것 등을 의미하는 듯하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최소한 후자(後者)는, 만민들로 하여금 자신을 높이지 않아야 겠다는 생각을 가지게끔 하는 충분한 경고가 되었을것이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높이는 자에게 기다리고 있는 것은 두려운심판뿐임이 당연하다.


=====75:5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 '뿔'은, 뿔달린 동물이 자신의 머리를 쳐들고 힘을 과시하며 자랑스럽게 다닌다는 점에서, '힘', '능력', '권위', '자부심' 등을 상징한다(신 33:17;삼상 2:1). 따라서 본 문구는 자기의 힘을 과시하기 위한 도전적인 태도를 의미한다. 특히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도전적 태도를 뜻한다.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 본질적으로 본 문구는 앞의 문구와 동일한 의미이다. 하지만 본 문구는, 특히 앗수르 왕 산헤립의 신하 랍사게가 대군(大軍)으로 예루살렘을 완전 포위한 후 예루살렘 거민을 협박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자신들을 결코 이기지 못하시리라는 허탄한 말을 한 것(왕하 19:10, 11)을 염두에 둔 듯하다.

=====75:6
다음절과 더불어 본절은, 한 개인 혹은 한 국가가 높아지거나 낮아지는 것은 전적으로 오직 하나님의 손에 달렸음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의 랍사게(5절)는 자신의 국가를 스스로 높이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그 하나님을 낮추려 하였다(왕하 19:10, 11). 따라서 앗수르는 오직 하나님만 높이거나 낮추실 권세가 있다는 지고(至高)의 법칙을 무시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두렵고 엄중한 징벌을 받아 완전 전멸당하고 말았다(왕하 19:35-37). 동에서나 서에서...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 저자가 이처럼 세상 어디에도 한 개인이나 국가를 높일 자격 혹은 권세를 가진 사람이 없음을 말하면서, 네 방향 중 '북쪽'만을 뺀 까닭은, 자신들을 스스로 높이고 이스라엘을 낮추려 했던 앗수르가 이스라엘의 북쪽에 위치했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북쪽'만을 생략함으로써, 북쪽의 앗수르 역시 결코 자신들을 높이거나 이스라엘을 낮출 수 있는 권세를 갖지 못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75:7
재판장이신 하나님 - 이러한 표현은, 한 개인이나 국가를 높이거나 낮추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결코 주먹구구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일일이 굽어 살피시사 그 사람의 행위대로 낮아지려는 자는 높이시고 높아지려는 자는 낮추신다(마 23:12;눅 1:52).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원리가 이 세상에서 명백하게 가시적으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세상 끝날 악의 세력에 대한 최종적 심판이 가해지는 그날에는, 그 원리가 완전하게 적용 시행될 것이다(계 21:8).

=====75:87,
22;렘 25:15, 17, 28;49:12;애 4:21;겔 23:31-33;합 2:16). 따라서 본 문구는,하나님이 악인들에게 진노를 퍼부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계심을 말한다(마 3:10).
술 거품이 일어나는도다 - '술 거품'은, 포도주에 다른 취제(醉劑)를 섞은 결과이다. 이 '취제'는 빨리 그리고 강하게 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포도주에 집어 넣곤하였었다(잠 9:2;23:30;아 8:2;사 5:22).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의미하는 말로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신속하고 극심하게 내려질 것인가를 술이 인체에 퍼지는 힘과 속도 비유해서 말한 것이다.
속에 섞은 것이 가득한 그 잔 - '술 거품'이 일어나는 술잔을 가리킨다. 앞 문구에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하나님이 쏟아 내시나니 - 하나님께서 마침내는 맹렬한 진노로써 세상을 심판하실것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이 있게 될 시기는 하나님에 의하여 이미 정해져 있다(2절).
그 찌끼까지도 땅의 모든 악인이 기울여 마시리로다 - 이것은 악인들이 하나님의맹렬한 진노를 전혀 피할 수 없을 것임을 말한다. 세상 끝날에는 실제로 이러한 일이있게 된다. 하나님을 대적하였던 악인들은, 천지 요동의 진노가 임하자 그것을 피하려무진 애를 쓰지만, 결국 그럴 수 없음을 깨닫게 될 뿐만 아니라 모두 멸망당하고 말것이다(렘 25:15;계 6:12-17;14:10).

=====75:9
저자는 여기서 세상 끝날에 대한 예언적 조망을 그치고 현재의 자기에게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악인을 철저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적 신실성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57:10, 11;58:10;64:9).


=====75:10
악인의 뿔을 다 베고 - 우리는 이에 관한 다음과 같은 해석들을 접할 수 있다. (1) 저자가 하나님의 도우심에 따라 악인들의 권세를 압도하겠다는 결의라는 해석(Calvin), (2)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져서 악인들이 어서 빨리 제거되기를 바라는 저자의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Rawlinson) 등이다. 그러나 저자가 살았던 히스기야 시대에 어떤 한 개인이 악인 혹은 악한 세력을 징치했던 역사적 사실이 전혀 없으며, 그리고 현실적으로 주의 재림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악인들이 여전히 득세할 수 밖에 없음을 감안한다면, 위의 두 해석 중 후자가 타당할 것이다.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 '악인의 뿔'이 베어짐으로써 나타날 자연스런 귀결이다. 앞 문구가 저자의 염원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듯, 본 문구도 마찬가지이다. 한편, '뿔'에 대해서는 5절 주석을 참조하라.

 

 

 

   본 시편은 종국에 있을 악인에 대한 심판과, 의인의 영광스러움에 대한 확고한  기대를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기대를 시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는데 1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 그가 정한 시기에 명백히 드러남으로써 그의 주권이 절정에  이를 것이며(1-3절),  2 심판의 때에 악인은 그들의 교만으로 인해 명망하나, 의인은 영광에 다다를 것임을(4-10절)대조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악인은  형통함'(73편)을 보고 의아해 하던 의인의 간구, "하나님이여 이러나사 주의 원통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74:22)에 대한  응답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본시는 고통 가운데 처해 있는 의인에게 궁극적인 소망을 줌과  동시에(계22:20)현재의 삶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제공한다.
   본 시편이 쓰여지게 된 역사적 상황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 많은  학자들은 본시가 왕하 19:35에 언급된 히스기야 왕 통치 때, 앗수르의 침입과 관련이 있다고 여긴다. 또 어떤 이들은 아사 왕 때 유다에 침략해 온 자들과 관련이 있다고  보기도 한다(왕하14:9이하). 고대의 어떤 주석가들은 이 시편이 다윗 시대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다윗 시대의 앗수르가 침략한 것 같은 어려운  일이 있었더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 이런 학설은 성립되기 어렵다. 이외에도 본시를  역사적 사실과는 관련없이 단순히 종말론적예언(eschatological prophecy)으로만 보려는 시도가 있는가 하면(Gunkel, Kittel), 이 시가 해마다 거행되는 여호와의 즉위식에 관한 축하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Schmidt, Edrdmans). 그러나 여기에서는  본시의 시대적 배경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역사적인 요소와 종말론적인 요소를 종합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시인은 당면한 역사적 사건을 계기로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을 조망(眺望)함으로써, 현재의 고통받는 의인들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시는 앗수르에게서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아삽  계열의 레위인이 쓴 것으로서 이사야의 예언(사37:21-29)과 한 쌍을 이루는 서정시라고  말할 수 있다.
   한편, 본시의 장르를 결정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왜냐하면 본시는  전형적인 시편의 유형(type), 즉 찬양, 애가, 왕에 대한 시들과는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시의 주제를 상고해 볼 때 하나님께서 우주의 자연 질서와 윤리적 질서를 유지하시고, 때가 이르면  공평하게  심판하실  것을  예언하는  '감사시'(thanksgiving psalm)라고 볼 수 있다. 본 시편은 전체적으로 삶으 전반에 걸쳐 의로운 섭리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본시를 면밀하게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첫째, 1절에서의 감사와 찬양자자자이 마지막 9,10절에서 반복된다. 이것은 일종의  수미쌍관법적(首尾雙關法的)인 기법으로서 내용적으로는 '하나님의 확실한  구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둘째, 다른 시와는 다르게 은유적인 표현 기법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 예들 들면 '기둥'(3절), '뿔'(4,5절), '잔')8절)과 같은 표현들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각각의 단락 속에 내포됨으로써 그 의미를 더욱 적절히 설명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각 단락의 주제 및 구성에 대하여 살펴보도록 한다. 본시는 내용에 의해서  1 과거의 구원 역사에 대한 포괄적인 감사와 임박한 하나님의 심판을  기대하는  내용(1절), 2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시간에 공의를 드러내시겠다는 단언(2,3절), 3 심판자이신 하나님께서 교만한 악인을 꺽으실 것에 대한 확신(4-8절), 4 임박한 미래에 있을 하나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한 확신(9,10절)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구분을 통하여 각 단락이 의도하는 핵심적인 내용을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의인들에게 행하셨던 다양한 기사(奇事)를 회고함으로써, 이제 머지않은 장래에 임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수7:19;렘13:16). 사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후, 얼마나 극적인 방법으로 그의 백성들을 악인으로부터 보호해 오셨는지 시인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 가운데 두고 계셨다(출20:24;신12:5,11). 그러므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은 너무나 중요한  것이다(출3:13-15).  이것은 곧 그들 가운데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가리킨다. 이 하나님은  과거의 약속에 신실한 분이시기에 시인은 9절에서 다시 한번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면서 인간의 개입없이 철저하게 하나님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근거할 공의로운 심판을 바라보고 있다(102:13;함2:3). 하
나님께서는 다가올 구원을 분명하게 선언하심으로써(2,3절)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도록 만드셨다(85:10).
   하나님의 심판을 언급한 이후에 시인은 이어서 악인에 대한  경고를  한다(4-7절). 우선 대적들의 교만한 상태가 소개된다(4,5절). 그들은 임박한 심판의 선언에도  불구하고 계속방자하게 행동하며 교만함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94:4;삼상2:3). 시인은 광란적인 위선과 오만의 뿔을 들고 있는 행악자들에게 참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공의가 임하여서 그들을 낮추실 것을 확신한다(94:4;삼상2:7). 여기서 한층 더 발전하여  8절에서는 마치 목격한 것과 같은 확실성을 가지고 악인의 멸망을 영상화(映像化) 시키고 있다. 여기서의 '잔'은 '진노의 잔'이다(사51:17). 이것은 하나님이 마시게 하려는 목적으로 직접 섞은 혼합의 포도주(60:3)이다. 하나님 자신이 거품나는  포도주를  건네 주었다. 그 거품이 가장자리에까지 가득해서 그것을 죄인들이 쉬지  않고  찌꺼기까지
마신다(욥21:20;겔23:34;합2:16).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는 그의 진노를 조금도 남김없이전부 기울이실 것이다(렘25:15이하;겔23:31-33). 시인은 이와 같은 사실을 목도하면서, 언약에 충실하신 '야곱의 하나님'을 선포하며(9절)다시 한번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한다(10절). 이제 시인은 8절에서 예언적으로 보여진 미래로부터 돌아와서 그의  현재를 유괘하게 바라보고 있다. 장차의 소망을 통하여 기쁨을 다시 소유하게  된  것이다.
   본문에 드러나 핵심적인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시편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찬양하고 있다. 1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역사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의 행하신 기사(奇事)를 볼 때  문명히  드러난다(1절). "우리에게 가까이 하심과 같이 그 신의 가까이 함을 얻은 나라가 어디 있느냐"신(4:7). 그는 이세상의 질서를 친히 세우신 분으로서(3절)결코 이 세상의 불의를  간과하지 않느실 것이다. 2 하나님의 심판때는 하나님 스스로의 지혜에  근거하여  시작될 것이다(2절). 그는 심판을 인간의 기대에 따라 행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선택에  따른다. 3 세상의 도덕적인 질서가 붕괴하기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의 능력에 의한  심판이 불가피하다(3절). 4 하나님의 심판은 공정하며 결코 두당하지 않다. 사실  하나님께서 친히 심판의 시기를 정하는 것도 죄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기 위한(딤전2:4)  하나님의 지비로운 배려이며(벧후3:9). 의인을 더욱 연단하시기 위한 은혜로운 섭리이다
(빌1:10,11).
   둘째로 이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그들의 현실적인 고통 속에서도 감사와 소망을 가지고 견딜 것을 말하고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가까이 계셔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주관적 확신(1절)과 함께,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통해 드러나 객관적인 구원의열매를 인심함으로써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낙관적 태도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셋째로, 교만한 자에 대한 엄중한 경고를 잘견할 수 있다. 교만은 하나님을 불신아하는 사고로서 온 우주의 구원자이신 그를 제쳐놓고 자신을 절대화하는 것이다.  성경은 불신앙을 저주받을 죄악으로 정죄한다(렘17:5). 거만한 자들은 종국의  심판  때에 철자히 파멸될 것이며(8절), 교만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므로 결국 그의  힘과 권세, 영광이 껸이고 말 것이다(10절).
   이와 같은 본시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의인의 확실한 구원을 바라모면서 어떤 역경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는 자세를 얻을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 행위가 불원간(不遠間)에 나타날 것을 내다본다(1절). 그로 인해 시인은 혈실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속에 내재하시어 우리를 구원하시는 사역을  감당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국적인 구원을 대망하면서 영적인  위안을  받음여 하나님의 은혜를 찬미할 수 있다(요5:24;갈6:7,8;계1:3).
   또한 신자의 현실적인 고통은 그들이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될 수 없으며, 단지 하나님의 정한 때가 오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것에 불과함을 알 수 있다. 세상은 그 전체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다스려지고 있으며, 더욱이 그가  친히 세운 교회와 성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만 유지되어진다. 모든 교회와 성도들은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참된 감사와 기쁨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명시하는 자들 속에서 반드시 궁극적인 승리를 쟁취하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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