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1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 이는 고대 이스라엘에서 예식 때 낭송하던 송영구이다. 렘 33:11에 근거하면 본 송영구는 포로로부터 귀환한 자들의 입을 통해 들을 수 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었으나 원문에 나오는 접속사이자 강조사인 '그는' 앞의 '키'(* )를 살려서 실감나게 본절을 재번역하면 '여호와께 감사하라 왜냐하면 그분은 참으로 선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참으로 영원히 인자하시기 때문이다'이다. 송영 시(時) 사회자가 '여호와께 감사하라'를 읽으면 회중은 '왜냐하면' 이하를 읽었다고 한다. 본 시편과 106편은 동일하게 본 송영으로 시작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이 두 시편의 연관성을 연구한다.
=====107:2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 - 동일한 표현이 사 62:12에 나타나는데 그곳의 역사적 배경이 바벨론 포로 시대 이후이기 때문에 본 구절을 근거로 하여 본시의 작시 연대를 포로 귀환 이후라고 단정하기는 힘들지만, 전반적으로 본시가 바벨론 포로 귀환이라는 벅찬 역사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찬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대적의 손에서 저희를 구속하사 - 여기서 '대적'이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이 되겠으나 추상적 영향력인 '근성'따위도 될 수 있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차르' (* ) 자체가 '대적'이란 뜻 외에 '슬픔', '곤경'등의 뜻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6, 13, 19, 28절 등에서 계속 '근심'이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볼 때, 본문의 '차르'는 '근심'을 의인화한 표현일 가능성이 높다(Alexander).
=====107:3
남(* , 미얌) - 문자적인 뜻은 '바다로부터'이다. 구약에서 이 용어는 서쪽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데 그 이유는 팔레스틴 땅의 서쪽 경계선은 바다인 지중해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에 '서'라고 하는 명사가 있기 때문에 '남쪽'으로 해석되어야만 한다. '남쪽'과 '바다'의 개념을 연결시킨다면 남쪽 지방에 있는 '아라비아 해' 정도가 연상된다.
=====107:4
저희가 광야 사막 길에서 방황하며 - 본문은 사막에서 그 갈 길을 잃은 대상(隊商)을 연상케 한다. 그런데 이 구절의 주어 '저희'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는 쉽지 않은데 '저희'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1) '저희'를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와 연결시키는 해석이다.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들은 또 두 부류로 나뉘는데 한 부류는 본 시편을 특정 역사와 연관시키는 견해로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를 예루살렘 함락 후 갈대아인을 피하여 광야로 도망친 유대인으로 보고 있다(렘 43장). 뿐만 아니라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던 중 사막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로 보기도 하고 포로지 자체에서 어려움을 겪은 유대인으로 보기도 한다. 또 다른 부류는 특정 역사와 연관짓지 않고 '저희'를 좀더 넓은 의미에서 이해하는데, 곧 바벨론 포로가 아니라 이방 여행의 위험과 역경에 노출되어 있는 모든 유대인으로 보는 견해이다. (2) '저희'와 2절의 '여호와께 구속함을 받은 자'와의 무관성을 강조하는 해석이다. 이 견해를 따라 혹자는 이스라엘을 그 선조들의 땅으로 귀환시킨 하나님의 선하심을 찬양함으로 본 시편을 시작하였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이 명백히 드러났던 또 다른 예들에 관하여 계속 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또 다른 해석자들은 바벨론으로부터의 귀환에 관한 언급을 위해 첨가된 서두의 세 구절은 그 뒤에 나오는 좀더 넓은 범위의 주제와 연결시키기 위한 서론적 구실을 할 따름이라고 말한다. 이상의 견해들이 우리를 시원하게 해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한 견해를 절대적으로 의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본 시편이 다양한 인생사를 묘사하고 있으며 포로 귀환 후의 감격적 상황을 노래한 것으로 추측하기는 하지만,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간에게 닥치는 위험들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인간을 구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를 경험한 모든 자들이 그것을 감사함으로 인정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저희'를 역사 속의 특정한 무리에 굳이 고정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거할 성(* , 이르 모솨브) - 문자적인 뜻은 '거주의 성'이다. 이는 다소 예루살렘이 의도되기는 했으나, 특정한 도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거주할 곳이 못 되는 광야와 대비되는 사람이 모여 사는 그 어떤 도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7, 36절).
=====107:5
피곤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티트아타프'(* )로서 원형인 '아타프'(* )는 의복 따위로 '덮다'(65:13; 73:6), '자신을 숨기다', '어둠이 덮다' 등을 뜻한다. 여기서는 재앙, 고통, 슬픔 따위로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상태를 가리킨다. 음식과 음료의 고갈로 인해서도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울 수 있겠다.
=====107:6
부르짖으매 - 궁핍 상태를 절실하게 느낄 때일수록 인간은 하나님께 매달려야 한다. 기도는 의인의 자원일 뿐 아니라 고통 중에 있는 모든 자의 자원이다. 그리고 건지시고에 해당하는 '이칠렘'(* )은 '나찰'(* )의 사역형(히필형)으로서 하나님이 당면한 모든 종류의 환난들로부터 구원하셨음을 뜻한다.
=====107:7
바른 길로 인도하사(* , 야드리켐 베데레크 예솨라) - 문자적인 뜻은 '그는 그들에게 곧바로 길을 만들어 주셨다'이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찾고 의뢰하는 백성에게 그들이 거하게 될 땅으로 가는 가장 안전한 지름길로 인도하셨다는 뜻이다.
=====107:8
본절에서 찬송하도록 권고받고 있는 대상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거할 성에 이르게 된 자들(7절), 혹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그리고 나아가 양자(兩者) 모두를 가리킬 수 있다. 일부 사람들에 의해 체험된 개별적 구원의 경험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구원 체험을 대표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Anderson).
=====107:9
본절은 렘 31:25을 상기케 한다. 여호와는 그의 백성의 모든 필요를 완벽하게 공급할 수 있는 분이시다. 여기서 '사모하는'은 5절의 '목마름'에 상응하는 용어이다.(사 29:8).
=====107:10
흑암 - 이것은 일차적으로 감옥에 갇힌 자의 침울하고 암담한 상태를 가리키나(사 42:7; 49:9) 절망, 비참, 혹은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현이기도 하다(사 5:30; 8:22; 9:2 등).
곤고와 쇠사슬 - 본 구절에 함축된 내용을 좀더 충분히 공개하는 구절로는 욥 36:8이 있다 : "혹시 그들이 누설에 매이거나 환난의 줄에 얽혔으면". 한편 본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내용에 대해 탈굼역(Talgum)은 시드기야와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지에서 당한 일로 번역하며, 반즈(Barnes)같은 주석가는 바벨론 포로민들의 불행과 구원에 관련짓는다. 이 구절들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확정짓기란 쉽지 않다. 다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 범죄한 자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있기까지 흑암의 고통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레 24:12; 민 15:34 참조).
=====107:11
말씀...뜻 - 후자는 '아차트'(* )로서 '권고'가 적절한 의미이다. 이 두 용어는 율법에 주어진 하나님의 계명들과 그의 선지자들을 통해 선포된 그의 권고를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본절 전체가 풍기는 뉘앙스가 이스라엘의 신정 국가적 성격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염두에 두는 대상은 좀더 넓게 확장시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에 기록된 법, 내적 계시를 통해 준 교훈(16:7)을 무작정 배제해 버릴 이유는 굳이 없겠기 때문이다. 이 같은 입장을 돕는 단서로는 '멸시 함이라'가 신정적(神政的) 차원 내에서의 신성 모독을 가리킬 때 (민 14:11, 23; 16:30; 신 31:20) 뿐만 아니라 좀더 일반적인 의미로 곧 지혜로운 권고의 거절을 가리킬 때(잠 1:30; 5:12; 15:5)에도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107:12
수고로(* , 베아말) - '아말'(* )은 수고뿐 아니라 골칫거리, 고통, 실망, 패배, 슬픔 따위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다(창 41:51; 신 26:7; 욥 3:10; 16:2).
저희 마음 - 그들의 자만심, 자기 만족성 등을 뜻한다. 그들은 하나님 없이도 모든 일을 잘 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세상적인 경험이나 자원들을 의존하며 스스로 만족해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것들이 헛됨을 보이시기 위해 그들을 비참케 만드셨다.
=====107:13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본 시편은 크게 네 부분(1-9절; 10-22절; 23-32절; 33-43절)으로 구분되는데 본절과 같은 내용이 10-22절에 또 한 차례 반복되는 것(19절)을 비롯하여 두 부분에 한 차례씩 반복되고 있다(6, 28절). 이러한 유사 구절의 적지 않은 반복을 통해 우리는 본 시편이 인간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섭리뿐 아니라 인간들의 탄원 및 간구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강조하는 시임을 알 수 있다.
=====107:14
그 얽은 줄을 끊으셨도다 - 이것은 감옥수의 해방을 그리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10절의 주해를 근거로 할 때 이 표현은 영적인 의미 혹은 실제적인 의미, 둘 모두로 해석될 수 있다.
=====107:15
문장 구조를 살필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는 커다란 하나의 절(節)의 형태로 되어 있으며 본절에 와서야 전체 구분을 대표하는 동사가 나타남을 알 수 있다. 10절의 '사람이...앉으며' (개역 성경에는 이렇게 되어 있으나 문에는 '...에 앉아 있는 사람'으로 되어 있다)를 분사적 주어로 볼 때 그 동사는 절의 '찬송할지로다'가 되겠다. 이렇게 보면 11-14절은 하나의 삽입구가 되겠는데 이 삽입구를 좀더 분해해보면 11, 12절은 주어의 이유를, 13, 14절은 분사적 주어에게 당면되어진 징벌 상태 이후의 일들을 각각 담고 있다. 이상의 주해를 놓고 볼 때 10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서 강조하는 바는 흑암과 사망의 그늘에 앉았던 자가 하나님께 '찬송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가 그처럼 부정적인 상황에 있었다가 그 상황으로부터 회복된 사실도 중요하다. 그러나 문장 구조를 살필 때(10-15절) 보다 중요한 것, 보다 강조되고 있는 바는 그가 찬양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본 시편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환난과 곤고로부터 새로이 구출받은 자들이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는 일은 너무도 마땅하고 중요한 일임을 강조해서 가르치고 있다.
=====107:16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 성경에서 '놋'은 강함과 견고함(렘 1:18; 15:20), 목이 곧고 패역함(사 48:4), 로마 제국(단 2:32, 39), 바벨론 제국(렘 15:12) 등을 상징한다. 여기서 '놋문'이 깨뜨려졌다는 말은 바벨론이 멸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벨론이 멸망했으므로 그 나라에 포로되었던 민족이 해방을 얻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에게 본문과 유사한 용어들을 사용하여 바벨론 멸망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선포하신 바 있다 :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빗장을 꺾고"(사 45:2). 이는 고레스를 사용하여 바벨론의 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예언한 내용이다. 아마 본 시편 기자는 그 냉용에 익숙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에 의하면 바벨론 성벽에는 실제로 청동으로 만들어진 문이 무려 100개 가량이나 있었다고 한다.
=====107:17
미련한 자(* , 에월림) - 육신적인 탐욕에만 몰두하는 자를 흔히 이렇게 부른다. 그는 경고에 귀가 멀고 훈계를 멸시하는 세상적이고, 육욕적이며, 이기적인 마음을 소유한 자이다(잠 1:7; 12:15).
범과(* , 데레크 피쉬암) - 직역하면 '범죄의 길'이다. 이 표현은 어떤 악한 행실의 과정, 어그러진 생활 습관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곤난을 당하매(* , 이트아누) -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이 스스로 그들에게 고난을 가져오고 있다'이다. 이는 미련한 자가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그에게 책임이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는 표현법이다. 그 의미사의 차이는 약간 있지만 동일한 동사형을 사용하고 있는 구절로는 왕상 2:26을 들 수 있다. 한편, 원문에는 현재를 나타내는 미완료형의 시제가 사용되고 있는데 그 까닭은 미련한 자의 고통당하는 모습을 좀더 강력하고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서이다.
=====107:18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구원하시되 - 이에 대해서는 13절 주석을 참조하라.
=====107:19
저가 그 말씀을 보내어...고치사 - 마치 병중에 있던 히스기야 왕에게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이 기쁨의소식, 즉 '완쾌된다'는 말씀을 들려주신 것처럼(왕하 20:4; 사 38:4) 간접적으로 말씀을 전하여 낫게 하시거나, 직접 말씀하사 낫게도 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신 권능을 지니기 때문에 말씀하신 그대로 성취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적 치유에서 보다 확연히 드러난다. 한편, 이와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 곳으로는 105:19; 147:15, 18 그리고 사 9:8; 55:11 등이 있는데 이 구절들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는 말씀을 그리스도 곧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교리(요 1:1)의 구약적 암시를 읽을 수 있다. 참조로, 어떤 학자는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 )를 '데베르'(* , 역병)로 읽어, 본절을 '그가 역병을 보내셨으나, 그들을 고치시고 악성 종기들로부터 구해 내셨다'라고 해석하기도 하나(Dahood) 무리한 해석이라 하겠다.
위경에서(* , 미쉬히토탐) - 영역본 NIV는 '무덤으로부터'(from the grave)로 번역하고 있는데 문맥이 죽음에 가까이 있는 상태를 암시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 같다(18절). 그리고 KJV나 RSV 등은 '파멸로부터'(from destruction)라 번역한다. 어떤 구약 학자는 고통받고 있는 자가 빠져 있는 고통을 은유적으로 나타내는 표현인 '구덩이들'로 이해하고 있다(Delitzsch). 그리고 또 다른 학자는 그들이 고통받는 까닭은 결국 범죄 때문이므로 '죄악들'로 번역하기도 한다(Hitzing).
=====107:21
그를 찬송할지로다 (* , 요두) - 거의 죽음의 경계에까지 갔던 자가 회복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목의 글이므로 감정을 넣어 '오! 그분을 찬송하라'로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Barnes). 이 같은 번역은 생명을 위협하던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뒤 부른 히스기야의 찬양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니 우리가 종신토록 여호와의 전에서 수금으로 나의 노래를 노래하리로다"(사 38:20).
=====107:22
감사제(* , 제바흐) - 교제 혹은 나눔의 제사를 뜻한다. 본 제사의 특징은 제물의 일부분, 예를 들면 기름 덩어리만 번제단 위에 불사르고 나머지는 제사장에게 돌린 몫을 제외 하고는 예배에 참석한 대중이 함께 나누어 먹는다는 데에 있다. 희생 제물은 암수 관계없이 소, 양 혹은 염소 등에서 취했다. 문맥상 본 제사가 기록된 핵심은 '나눔'에 있다. 죽음의 지경에까지 갔었으나 회복된 자는 개인적으로만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릴 것이 아니라 예배 공동체와 함께 고기를 나누며 자신이 경험한 바 하나님의 구원을 전해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07:23
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 - 본 시편이 그리고 있는 장면은, 사막에서 방황하는 자의 모습에서 감옥에 갇힌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본절로부터는 깊고 큰 바다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인의 모습으로 바뀐다. 저자는 본절에서부터 32절까지에서 해상 무역상들의 경험을 시의 소재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구약 당시에 이스라엘이 차지하고 있었던 가나안 땅에서 바닷가와 접하고 있었던 땅은 서쪽이었는데, 이 해안 지대의 상당 부분은 블레셋 및 가나안 민족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이 주로 정착했던 곳은 산간 지대나 트랜스 요르단 지역이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 중에 해상 무역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자는 거의 없었다. 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자들이 있었다면 그들은 이방인인 페니키아인, 블레셋인 등이었다. 그러므로 23-32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을 문자 그대로의 해상 무역인들로 볼 경우 이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볼 경우 그 해석은 난관에 봉착하고 만다. 그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대목이 나오기 때문이다(28절). 우리는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본 구절들이 특정한 직종에 종사하고 있는 자가 아닌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모든 자들을 그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즉, 23-32절은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인간의 위험 및 구원을 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07:24
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 - 파도로 하여금 하늘에 닿을 듯 뛰어오르게 하는 강풍과 그 파도를 봄날의 부드러운 공기처럼 잔잔하고 고요하게 만드는 미풍을 주관하시는, 자연계의 배후에 계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107:25
여호와께서 명하신즉 -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묘사하고 있는 창 1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105:31, 34에서도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다 물결을(* , 갈라) - 문자적인 의미는 '그곳으로부터 온 파도들을'이다. '그곳으로부터 온'의 히브리어 대명사적 접미사는 좀 떨어진 23절에 있는 명사 '바다'를 가리키는데 히브리어에서 이 같은 예는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니다.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예로 111:10을 들 수 있는데 그곳에서 '그 계명'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복수 대명사는 111:7에 있는 '법도'를 가리킨다. 어떤 의미에서 본절의 대명사적 접미사는 24절에 있는 명사 '깊음'(개역 성경에는 '바다'로 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깊음'으로 되어 있다)을 동시에 가리킬 수 있다.
=====107:26
저희가 - 이것은 휘몰아치는 파도에 휩쓸리는 배에 탄 선원들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데, 왜냐하면 본절 말미의 주어가 '그 영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깊은 곳에 내리니 - 원어상으로 24절의 '바다'(* , 메촐라)와는 다른 '깊은 곳'(* , 테호모트)이란 용어가 사용되기는 했지만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하다. 바다 혹은 대양은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다. 본문은, 인간이 마치 그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 속으로 가라앉듯 그 끝을 알 수 없는 위험과 고통의 무저갱 속으로 떨어져 버리기도 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 '녹는도다'에 해당하는 '무그' (* )는 '녹아 내리다', '부드러워지다'등을 뜻하며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그 용기와 활력을 잃은 마음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하는데 여기서 바로 이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출 15:15; 수 2:9, 24; 나 1:5).
=====107:27
이리저리 구르며(* , 야호구) - 문자적인 뜻은 '빙빙 돌며'로서 하나의 원 주위를 계혹 맴돌며 춤을 추는 모습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다. 지각이 혼돈하도다.
(* , 칼 하크마탐 티트발라) - 문자적인 뜻은 '모든 그들의 지혜는 바닥이 났다'이다. 말하자면 항해사들의 배를 조종하는 모든 기술이 무익한 상태에 처했다는 것이다. 항해사들은 지식적으로 배운 항해술과 바다를 항해해 본 경험을 가지고 능숙하게 배를 조종하기 마련인데 이제 그 능력들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파도 앞에 항새사들의 보잘것없는 지식 및 경험은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 위급한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파도를 명령하는 자이신 하나님께 호소하는 일뿐이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스스로 쌓은 지식과 경험으로 헤쳐 나갈 수 없는 위경을 만나기 마련이다. 그때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 하나님 앞에 엎드려 도우심을 호소하는 것뿐이다.
=====107:28
근심 중에서...부르짖으매 - 자신의 지식과 경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난관에 봉착할때 인간은 믿는 자건, 믿지 않는 자건 초월적 존재에 의존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의존 대상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러나 본절이 난관에 봉착했을 때만 하나님을 의존하라고 가르치는 것 같지는 않다. 우리는 여기서 위경으로부터의 탈출에서 분명히 목격한 하나님을 순탄할 때에도 의존하라고 하는 가르침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하겠다. 하나님이 위경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궁극적으로 좀더 하나님을 의존하게 만들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편 기자들은 하나님께 대한 의존, 그와의 동행에서 오는 기쁨과 평안을 주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73편 등).
=====107:29
광풍을 평정히 하사 - 이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예수께서도 이 일을 행하심으로써 그가 하나님이심을 입증하셨다(마 8:26). 말씀 한마디로 거칠게 뛰놀던 폭풍을 잠잠케 하는 능력만큼 하나님의 능력을 가시적으로 입증하는 것도 드물다 하겠다.
물결(* , 갈레헴) - 문자적인 의미는 '그들의 파도들'이다. '그들'을 '바다'로 본다면 그 '바다'란 23절의 '큰 물'을 말하며, '선원들'로 본다면 '파도들'이란 선원들을 그 위에 올려 놓고 이리저리 내던지며 위협하던 그 파도들을 말한다.
=====107:30
평온함(* , 솨타크) - 폭풍 후의 바다의 고요함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되지만(욘 1:11, 12) 다툼의 종식을 뜻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잠 26:20).
소원의 항구 - '항구'로 번역된 '메호즈'(* )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오는 용어이기 때문에 본문을 해석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원'으로 번역된 '헤프참'(* )이 '소망하는 대상'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본 구절 전체는 '바라던 그 목적지'등으로 보면 되겠다. 바라던 목적지로는 기업, 태어난 고향, 선조의 무덤이 있는 곳, 처자가 있는 곳 등을 들 수 있겠다. 본문의 항해를 일종이 인생 여정으로 보는 어떤 학자는 이것을 '죽음'으로 해석하기도 하나 다소 어색하다. 아무튼 본절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이 고난을 통해 올바른 삶의 도리를 배운 인생들을 그들의 바라던 곳,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있는 목적지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다.
=====107:31
기이한 일 - 이것은 바다의 위험 가운데서 인도하신 일을 말한다(8, 15, 21절과 비교).
=====107:32
백서의 회에서 -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개인적으로만 간직하지 말고 공개하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공개자가 경험한 일은 그의 이야기를 듣는 모든자들도 경험할 수 있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장로들의 자리에서 저를 찬송할지로다 - 여기서 '장로들'(* , 제케님)은 수염이 난 모든 성인(成人)들, 좀더 명확하게는 가정의 가장들을 의미하기도 하며(삿 20:2; 렘 26:17) 한 종족이나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급 인사들을 가리킬 수도 있다(Kraus). 본절에서는 전반절에 '백성의회'가 나오므로, 일반 백성들과 구분하여 지도자적 위치에 있는 자들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107:33
강을 변하여 광야가 되게 하시며 - '강'(* , 네하로트)은 일반적으로 그 흐름이 끊어지지 않는 긴 하수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하수를 물 한 방울 없는 바짝 마른 광야로 바꾸는 일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은 자연계를 향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암시해 준다.
=====107:34
거민의 악을 인하여 - 뒤에 이어질 불행한 결과의 원인이 제시되고 있는데, 불행한 결과를 묘사하는 대목에 '염밭'이란 용어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우리는 소돔과 고모라 도성을 녹여버렸던 징벌 사건을 회상할 수 있다(창 19장; 신 29:23; 사 1:9).
옥토(* , 에레츠 페리) - 문자적인 뜻은 '열매의 땅'이다. 말하자면 수확거리를 풍성히 내는 땅을 가리킨다. '수확거리'란 특정 품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이 낼 수 있는 모든 품종을 말한다. 염밭(* , 멜레하)은 '소금기가 많은 습지'를 뜻한다. 아마도 '열매의 땅'과 대비를 이루는, 산성이 많아 쓸모가 없는 땅에 대한 은유적 표현일 것이다. 사해 부근에는 이런 종류의 땅이 많다고 한다. 본절은 그 땅 거민의 악행을 두고 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엄정한 심판을 암시하고 있다.
=====107:35
본절을 형성하고 있는 용어들은 사 41:18, 19 내용과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준다. 어떤 학자들은 본절을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켜, 33, 34절은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로 황량해진 본토를 묘사하는 것이며 본절은 그들의 귀환으로 변경된 본토의 상황에 대한 묘사라고 한다. 이들은 이 같은 주장의 근거로 "여호와여 우리의 포로를 남방 시대들 같이 돌리소서" 라고 읊고 있는 126:4을 들고 있다. 이러한 견해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본절이 특정한 역사적 상황을 암시하고 있다고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본절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크신 은총을 나타낸다고 하는 보다 포괄적인 의미로도 이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눈으로 불가능해 보이는 것도 가능케 하실 수 있다.
=====107:36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 굶주린 자들이 비옥한 땅에 정착하여 번영을 누리며 도시를 건설케 된다는 것이다. 고대에는 특히 팔레스틴과 같은 곳에서는 식수나 용수(用水)가 잘 조달되고 토지가 비옥한 지역에 인구가 번성하기 마련이며 도시가 번창하기 마련이었다(VanGemeren).
=====107:37
소산을 취케 하시며 - 정직하게 땀흘려 열심히 일하는 자는 과거의 굶주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인 땅의 산물을 얻게 될 것이다(사 49:19; 54:1; 겔 36:30, 33-36).
=====107:38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고 - 당시 자식의 수가 느는 것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큰 축복 중의 하나로 간주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은총의 증거로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닷가의 모래같이 많을 것이라는 약속을 자주 족장들에게 하셨다(창 13:16; 22:17; 26:4; 32:12).
=====107:39
다시...저희로 감소하여(* , 얌아투) - 문자적인 뜻은 '저희들은 그 수가 줄어짐을 당하여'이다. 수동적 의미가 강한 용어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것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시고 지시 하신다. 번영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로 온것이요, 그 상황이 역전되었다 해도 그것 역시 하나님의 손 아래서 되어진 일이다. 인간은 항상 번영할 수 없다. 그의 인생 여정에는 변화와 불행과 실망과 슬픔이 있다. 하나님은 때로는 징계의 목적으로, 때로는 연단의 목적으로 환난을 허용하시는 분이다. 만일 하나님이 인류에게 항상 번영만을 주실 경우, 인간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더 나아가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 온 것을 잊고 결국엔 하나님 존재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는 위험에까지 이르게 될 소지가 다분하다. 그의 간섭과 통치가 계속되고 있음을 보이기 위하여, 그리하여 인생들로 하나님만 전적 의지케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그들에게 번영을 주기도 하시고 역경을 허락하기도 하신다. 본절을 40절의 조건절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 그럴 경우 원문상 서로 다른 주어를 취하고 있는 이 두 절의 호응 관계는 어색해진다. 따라서 본절을 조건절로 보는 견해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리어 본 시편 기자가 자주 취하고 있는 대조법의 구도 속에서 본절을 보는 것이 무리가 없다. 저자는 33, 34절을 그리고 38절과 본절을 그리고 40절과 41절을 대조시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107:40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 본 구절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를 묘사하고 있는 일련의 분사적 문장들의 일부인 욥 12:21 내용과 밀접한 연관성을 드러낸다. 여기서는 후속절에 대한 직접적 대조를 형성하기 위함뿐 아니라 36절에 대한 대조를 암시하기 위하여 소개되고 있기도 하다. 여기서 '방백'(* , 네디빔)은 귀인(貴人) 곧 지도층 인사로 보면 무난하겠으나, 본 문맥상으로는 특히 유다의 마지막 두 왕 곧 여호야긴과 시드기야를 연상하게 만든다(왕하 24:8-20). 하나님은 사회적 신분이 높은 방백들에게도 차별없이 동일한 대우를 하시며 신분이 높은 자와 낮은 자를 동시에 그의 통치권 아래 두시고 있다.
길 없는 황야(* , 토후 로 다레크) - 여기서 '토후' (* )는 창조 전 '혼돈'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던 용어이다(창 1:2; 렘 4:23). 그렇다면 본 구절은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비유할 수 있는 인생 여정의 일부를 연상시킨다 하겠다.
=====107:41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 '높이 드시고'는 '예사게브'(* )로 '높게 되다'(20:1; 69:29)를 뜻하나 본절에서처럼 강의형(피엘) 동사가 쓰이면 흔히 '보호하다', '지키다' 등을 뜻하게 된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들을 계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보호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물질적으로 부유한 방백으로 멸시를 당케 하고 앞뒤 좌우를 분별할 수 없는 난관에 넣으셨던 하나님은 대조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계속되는 빈곤으로부터 보호하신다. 본절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적 섭리가 다시 한번 강조되고 있다.
=====107:42
정직한 자는...기뻐하며 모든 악인은...입을 봉하리로다 - 하나님의 역사 개입은 항상 이렇듯 두 부류의 대조적인 반응을 낳기 마련이다.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 역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결에 두어져야 함이 마땅하다.
=====107:43
개역 성경에는 생략된 원문 초두에 있는 의문사 '미'(* )를 넣어 본절을 제대로 직역하면 이렇다 : '이 모든 것을 목도하고 여호와의 인애를 이해할 지혜자가 누구이겠는가?' 이 같은 결구적 의문문은 호세아 선지가 그의 선지서를 마감하면서 던진 말을 상기케 한다 :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에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호 14:9). 저자는 자신이 본 시편에서 밝힌 바, 온 인류의 삶을 통치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을자가 많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듯한 의문형의 결구(結句)를 사용함으로써 역으로 그 진리를 깨닫는 일에 전심을 기울일 것을 촉구하고 있다.
본 시편은 이스라엘 백성이 외국에 포로로 잡혀가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본국으로
돌아오는 역사의 현장속에서 구속받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언약 백성을 광야에서 구원하시고, 갇힌 자들의 결박
을 풀며,병자를 회복시키고, 바다의 선원들에게 능력을 보이시고, 자연과 인간사를 다
스리시는 지에 대해 묘사함으로써의 진심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
고 있다.
특별히 본 시편은 제5권이 시작되는 첫 번째 시이다. 제5권은 비탄시가 주종을 이
루고 있는 1,2권과는 다르게 환희에 찬 감사시가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전체 44개
(107-150편)의 시편중 16개는 다윗에 의해서 쓰여졌고(108-110, 120, 122, 124, 131,
133, 138-145편) 두 편은 솔로몬(127, 132편), 그리고 26개는 필자 미상이다. 본시는
작자 미상으로서 제5권의 첫 부분답게 바벧론 포로 귀환이라는 가슴 벅찬 역사적 체험
을 바탕으로 하여 구원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는 백성들을 그원해 주시는 하나님
의 긍휼과 그 김격스러은 구원 행곤을 구체적으로 재음미함으로써 날마다 하나님을 찬
양하는 삶에 대한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일반적으로 대다수의 성경 주석가들은 본시가 이스라엘이 바벧론 포로 생활
에서 귀환하게 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서 쓰여졌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견해는 주로
2, 3절에 근거한 것이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이 시편이 어떤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여 저술되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반적으로 인간 생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
을 묘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은 대략 다음과 같다.즉 이시편 전체의 핵
심적인 내용이 인간에게 닥치는 다양한 위험과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이야기이며, 또
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보호하심을 맛본 모든 사람들의 고백을 요청한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본 시편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간의 경험을 근거
로 하여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본 시편이 '감사제'를 드리는 날 성전에
서 예배를 드릴 때 불리우는 노래로 채택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본 시편은 앞의 106편
의 결론과 논리적으로 일맥 상통함을 볼 때, 분명히 드러난 이스라엘의 구원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는 이스라엘의 찬양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 시는 매우 단조로운 구조로 되어 있으며, 주고받는 형식의 노래로 불러졌
음이 분명하다. 이 시에는 같은 말씀이 두 절 또는 한 절, 건너 한 절씩 되풀이해서
빈번하게 등장한다. 첫 번째 반복은 6, 13, 19, 28절에서 살펴볼 수 있고, 두 번째는
8, 15, 21, 31절에 나온다. 다시 말해서 환난에 대한 말씀이 나온 다음에 여호와를 향
한 구원의 부루짖음을 나타내는 처음 합창이 나오고, 또 한 구절이 구원을 말한 이후
에 감사의 합창이 나오는 등, 이러한 방법으로 35절까지 계속된다. 그러나 두 번째 반
복은 앞에서와 같은 한 구절이 아니고 두 구절씩 나누어진다. 또 주의할 것은 두 번째
의 합창이9, 16절에서와 같이 때때로 상반되는 구절을 대립시켜 감정을 두드러지게 나
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한 논법(論法)은 시편 여러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교창 형식을 보이고 있는 본연은 표현 양식상 내용 구분이 매우 분명한 특
징을 나타내고 있다는 있다. 그러나 구조상 다음과 같은 논리적 구분을 통하여 세밀한
내용으로 들어가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
| A. 감사의 사실을 주신 이에 대한 찬양(1-3절) |
| B. 감사에 대한 이유(4-32절) |
| B'. 찬양에 대한 이유(33-42절) |
| A'. 지헤를 주신 이에 대한 찬양(43절) |
+------------------------------------------------+
이와 같은 대략적인 구분을 근거로 하여 각 단락을 좀더 구분하고, 주요 내용 및
핵심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바벧론으로부터 돌아옴에 대한 감사(107 : 1-3)
본 단락은 하나님의 지속적인 자비하심에 근거하여 구속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찬양을 촉구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포로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너무나도 극적인 감사가
있었다(신 8 : 10 골 1 : 12 ; 3 : 15). 이제 이 분명한 사실로 인하여 사방에서 모여
든 언약 백성들은(106 :47) 마땅이 찬양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시인은 2b절, 3절에서 바벧론 포로로부터 해방됨을 구체적으로 표현함으로
써 구원받은 은총에 대한 감사를 드러낸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한 인자하심으로
인하여(106 : 1)이스라엘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으시고 보호하시는 분으로서 마
땅히 감사와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118 : 1 ; 136 : 1). 이스라엘이 처참하게
온 땅으로 뿔뿔이 흩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동서 남북 각지로부터
자기 백성을 다시 모으셨다(3절).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이 일시적이 아니라,
신실하며 영구적임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사실 106 : 47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열방들로부터 모여질 수 있기를 기원하였다.
이제 이러한 간구는 이스라엘이 다시금 팔레스타인 땅을 회복하는 모습으로 응답되었
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이 있는 모든 곳, 즉 동서 남북에 있는 바
다든지 육지든지(사 11 : 11 ; 49 : 12) 가리지 않고 가능한 모든 지역에서 당신의 백
성을 모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본 단락은 106 : 47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찬양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106편(4권이 마지막)과 본 시편(5권의 처음)
의 전통적인 구분에도 불구하고 105-107편이 면밀한 관계(trilogy)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사실의 내용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
| 105편 | 이스라엘의 선택에 있어서의 |
| | 하나님의 은총과 이스라엘의 연단 |
+---------+-----------------------------------------+
| 106편 | 하나님의 용서와 징계 |
+---------+-----------------------------------------+
| 107편 | 이스라엘의 회복 |
+---------+-----------------------------------------+
이와 같은 포괄적인 이해와 더불어서, 각 장을 '땅'(land)의 관점에서 연결하면 다
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
| 105:44 | 열방의 땅을 기업으로 주심 |
+---------+-------------------------------------------+
| 106:77 | 죄악으로 인한 땅에서의 축출 |
+---------+-------------------------------------------+
| 107:3 | 하나님의 은총으로 땅을 회복함 |
+---------+-------------------------------------------+
2.방황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심(107 : 4-9)
바벧론으로부터의 귀환을 감사하던 시인은 이제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광야에서 방
황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음을 기억한다.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름으로
죽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안전한 곳으로 인
도하셨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사모하고(9절, NIV, thirsty) 주린
자들에게 풍부한 양식으로(104 : 28)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인하여 찬양해야 할 것이
다.
한편 본 단락은 역사적인 사건을 나열하여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반복되는 사실들
을 의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나는 40년 간의 광야 생활이요, 다른 하나는 광야의
삶과 같은 포로 생활을 지칭한다. 하나님이 멀리했던 시기에 이스라엘은 육체적인 고
난(출 3 : 7)을 겪었으며, 동시에 영혼의 방탕한 삶을 경험했다(95 : 10). 그러면 광
야는 무었을 가리키는가? 광야는 지나가는 동안 숱한 어려움과 고난이 뒤따르게 되는
곳이며, 물과 음식이 고갈된 장소이다(4, 5절) 그러므로 목적없이 이곳을 지나가는 행
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광야의 고통 중에서
신음하는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6절, 13, 19절) 필요한 모든 물품을 공급해 주신다.
곧 안전한 성(城)에 다다르도록 인도하시며, 피난처와 음식과 음료를 공급하신다(7, 9
절 ; 사 58 : 10, 11 ; 렘 31 : 25 ; 눅 1 : 53).
아러한 하나님이야말로 감사와 찬양의 유일한 찬양이 되신다. 하나님께서는 어려은
상황 속에서도 변함없이 신실한 사랑을 베푸시며 기이한 행사(deeds)들을 일으키시는
분이다. 그래서 106 : 7에서는 기사(miracles)와 인자(kindness)로 78편에서는 능력있
는 행위(mighty acts)로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은 언약 백
성들에게만 제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주가 되시기 때문이
다(8, 15, 21, 31절). 모든 피조물에게 골고루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언약 백성
에게 더욱 특별한 사랑을 허락할것이다.
@ 명백한 의무. 8절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귀중한 교훈을 얻게 된다. 1 인
간에게 행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일은 기이한 것이다.왜냐하면 '여호와의 인자하
심과 인생에게 행하신 기이한 일'은 그 자체로서도 기이한 것이며, 그 목적 또한 기이
하다. '인생'들은 하나님의 가장 작은 은혜라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자들이다. 그
런데도 하나님은 그들을 인도하시며 먹이신다. 2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베푸신 하나님
의 자비로운 행위를 간과해 버리기 쉽다. 하나님의 자비는 종종 감사하지 않은 채 잊
혀져 있고, 찬양을 받지 못한 채 죽어있다. 그러나 모든 인생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 3 사람들에게는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하신 행위를 기념해야 할 가장
신성한 의무가 있다. 하나님은 당연히 당신의 자비를 받은 사람으로부터 찬양받기를
기대하시며,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감사함을 느낀다면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
야 한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가장 몃백한 의무는 감사의 결과로 주어지는 찬
양인 것이다.
3 포로된 이스라엘을 해방하신 일(107 :10-16)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감옥과 같은 포로 생활에서 해방시키셨다. 사실 그들은
하나님께 반역한 대가로 어두운 포로 생활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 탈굼역(targum)
에서도 본 단락의 내용이 시드기야를 비롯하여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가리
킨다고 본다.
특별히 본연에서 드러나는 흑암, 곤고, 쇠사슬 같은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이 결과
로 이스라엘에 임한 절망을 가리킨다.(10절 ; 사 5 : 30 ; 미 7 : 8).이스라엘의 불행
은 우연히 발생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대한 고의적인 반역의 결과로 주어진 장계이다
(11절). 그 반역의 행태(行態)는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인 율법에
대항한 불순종이었다.바로 말씀을 무시한 결과로 선택된 백성은 원수들에게 포로로 잡
혀서 자유를 상실한 노예 상태를 경험하게 되었던 것이다(12절 ; 106 : 42). 이스라엘
이 축복으로 부여받은 땅을 유지하지 못 하였을 때 그들은 하나님없이 비틀거리는 백
성들과 다름이 없었다. 이전에 하나님은 아무도 그들을 넘어뜨리지 못하게 하시겟다고
약속하셨으나(37 : 24) 이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삶이 어떤 상
태인지를 깨닫게 하시려고 의도적으로 떠나셨던 것이다(사 3 : 8). 이제 이스라엘을보
호하고 도와줄 하나님은 더 이상 관심을 쏟지 않게 되었다(22 : 11 ; 왕하 14 : 26 ;
사 63 : 5).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을 간과하실 수는 없
었다(13절).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셨다(14
절). 이처럼 변함없는 하나님의 언약적 은혜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결정적
인 이유가 된 것이다(15절). 이제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짓누르고 있는 모든 압박과 곤
경에서 해방되어 참으로 감사가 넘치는 삶을 유지하게 되었다(16절).
본 단락에서 드러난 중요 사상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 고통 속에서의 해
방은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2 해방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 당신이다.
3 새로운 해방은 이전보다 더욱 영광스러운 것이다. 4 구원의 은총은 백성들로 하여금
감사의 표시를 요구한다.
4. 죽을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107 : 17-22)
광야에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노래한 이후에 시인은 자신의 범과(犯過)와 죄
악으로 인하여 징벌을 받으며 죽음의 문턱에 이른 이스라엘의 형편을 소개하는 동시
에, 어떠한 상황속에서도 언약 백성의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서술한다.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또 다른 측면을
서술하고 있다. 약한 무리들은 모두 '미련한 자'(잠 1: 7)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악에
대한 집착과 미련으로 인하여 결국 방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괴로움은 죽음
에까지 이르는 병이 었다. 이제 음식과 쾌락이 더 이상 즐거움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그들은 죽음이 가까와졌음을 느낄 때 좋아하던 음식조차 꺼리게 되었다(18절). 하나
님을 떠난 사람들은 결국 아무 것도 가질 수 없는 지경에 지경에 도달하게 될 수 밖게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함없이 고통 중에서 부르짖는(19절) 배역한 이스라엘을 구하
셨다. 이전에 이스라엘의 반역(11절)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저주와 책망이었으나,
이제는 약속과 위안과 회복의 말씀으로 전환되었다.(사 55 : 11 ;요 1 : 1 ; 행 10
:36). 하나님의 말씀은 죽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 것
이다.(20절). 이제 구원받은 백성은 하나님께 당연히 감사를 드려야 한다(21절). 감사
는 단순히 공허한 용어가 아니라 '감사제'를 (22절) 통하여 하나님의 주권을 구체적으
로 표현하는 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감사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
이한 행사를 선포하고 찬미해야 한다(22절).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
께 대한 기도의 응답이었다. 성도는 근심 중에서도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구해야 한
다. 2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실 만큼 권능이 있음으로(요 1 : 1)쉽게 회복
시킬 수 있다. 3 회복은 반드시 감사의 표시를 요구한다.
0 감사를 드림 구약에서 '감사를 드린다' 는 히브리어 동사는 '야다'( )이다
이말의 원 뜻은 '던지다'이며, 여기서 파생된 여성 명사 '토다'( )는 '감사'
혹은 '감사를 드림' 이라는 뜻이다. '감사를 드림'이라는 말은 시편의 특수한 표현이
지만,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다.특히 '감사드림'은 이스
라엘 자손들의 예배 의식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시온을 향한 축제의 행렬은 온통
'즐거운 소리와 감사의 노래'로 가득 차 있었다(42 : 4). 그들은 성전에 들어갈 때에
도 감사를 드리며 들어갔고(95 : 2 ; 100 : 4) 또 예배 자체에도 감사의 노래가 들어
있었다(147 : 7).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모든 지파는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올
라간 것이다(122 : 4).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 이유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
성과 맺은 언약을 언제나 신실하게 지키시며(100:3, 4), 또한 이스라엘을 대적으로부
터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이다(7 : 17).
5. 요동하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여호와(107 :23-32)
하나님께서는 마치 바다에서 곤란을 당하고 있는 선원들과 같은 이스라엘을 구원하
신다. 바다는 인간들에게 있어서 상당히 두려운 대상임에 틀림없다. 특히 선박이나 항
해술, 지리학등이 발달되지 않았던 고대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성경에서도 바
다로 나가는 것을 위험한 모험으로 여겨 몹시 꺼려했다.(욘 1 : 11-16). 더욱이 기상
의 변화가 심한 갈릴리 호수 연안에 살았던 사람들은 더욱 심각했다.(마 14 : 22-32 ;
막 4 :37-39). 따라서 시인은 바다를 험난하고 위험한 인간 세상의 삶에 비유하여 성
도의 전 생애를 걸쳐서 유일한 보호자가 되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교훈하고 있다.
사실 본 단락은 앞에서 언급한 광야에서의 방황하는 삶(4-9절)과 평행되어 앞의 단
락을(17-22절) 보충하는 역활을 한다. 바다와 광야는 대조적으로 가장 멀리 떨어진 영
역이며 가장 험난한 곳으로서,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을 드러내 주는 맥락 속에서 바다
와 광야에서의 구원을 말하는 본시는 그분의 보호가 전 우주적임을 암시하고 있다(사
42 : 10, 11).
바다에서 부(富)를 구하는 자는(23절),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행사와 기사를 목
격할 것이다.(24절 ; 104 : 24-26). 하나님의 능력은 지극하여 쉽게 풍랑을 일으키시
기도하고(25-27절;욘 1 : 4) 쉽게 잠잠케하시기도 한다(29, 30절). 하나님 말씀에 의
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25절 ; 105 : 31, 34 ; 창 1:3) 바다에 풍랑을
일으키셔서 배 위에 있는 사람들을 마치 하늘 높은 곳까지, 그리고 바다 밑 깊숙한 곳
까지 오르 내리도록 하시는 것이다(26절). 마치 배를 장난감과 같이 흔드심으로써 인
간들로 하여금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두려움과 공포에 젖게 하신다. 이러한 상황
에서는 인간들이 가진 모든 항해 기술은 효과가 없게 됨으로 절망에 빠져들게 된다.
그 가운데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께 부르짖는다(28절).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응답하셔
서 바다를 잔잔케 하시고(29절 ; 마 8 : 26). 목적지에 안전히 도착하도록 인도하신다
(30절). 이제 배에 탔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쁨을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나타낸다
(31절).
시인은 여기서 감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발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즉 예배 의식의
단순한 반복에서 탈피하여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상태가 된 것이다. 이제 배에
탔던 모든 자들은 공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행하신 기사를 공식적으로 선포한다.
더욱이 회중들을 인도하며 통활하는(스3 : 9-11;6;16-22;느8: 4-9;9 :4, 5;12 :27-
43) 자인 장로들 앞에서 하나님의 기사를 찬양함으로써, 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기이한 사적을 알게 만든다(32절)
본 단락을 통하여 우리는 성도의 인생이 마치 항해자와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
다. 그에게는 때때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위험이 뒤따르게 될 때가 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반드시 개
입하셔서 성도를 도우실 것이다.
6. 하나님의 통치(107 : 33-43)
본 단락은 전체의 결론 부분으로서 특별히 두 가지 사실이 제시된다. 즉 하나님께
서는 당신의 의지에 따라서 강을 광야로 못으로 변하게 하실 수 있는 주권과 능력을
소유한 분이시다. 또한 간교하고 힘있는 세상 권력자들을 멸하시고 연약한 백성을 구
원하시는 정의로운 분이시다. 지혜있는 사람은 이러한 사실을 깊이 주의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깨닫게 된다(1,8,15,21,31절)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본연을 1-32절에 덧붙여진 하나의 부록처럼 간주하여 각 문
장들 자체가 뚜렷한 구분이 없이 나열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본 단락은 시인이
원래 의도하였던 핵심적인 요약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여기
서 하나님께서 인류를 특별히 구원하시는 일반적인 법칙을 기술힘으로써 자신의 주도
적인 사상을 진전시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사상은 하나님의 '저주와
축복'의 대칭적인 표현을 통하여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이제 찬양의 대상은 만물을 능력으로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 돌리워진다. 하나님은
무한하신 능력을 통하여 옥토를 사막으로(33절 ; 사 50 : 2)마른 땅을 옥토로 변하게
만드신다.(35절 ; 사 41 : 18 ; 43 : 19). 그러므로 배고픈 자들이 모두 땅에 거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신다. 이렇게 땅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은 언약 백성을 다스리시
는 하나님의 주권을 나타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본적으로 모든 운명을 좌우하시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통치하심은 모든 믿는 자에게 기쁨의 근원이 된다.
그러나 땅과 집과 가족의 축복을 받은 이스라엘은(35-38절)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
하지 않고 도리어 자기들 스스로를 높이는 배역을 일삼게 되었다. 그러나 때가 이르렀
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압박과 곤난과 우환에 빠지게 되
었다(39, 40절 ; 욥 12 : 21,24). 이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데 특
별히 하나님의 공의를 바라봄으로써 위로를 얻게 되었다(42절 ; 욥 22 : 19). 하나님
께서는 당신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고, 사악한 자들의 죄악에는 보응하심으로
써 악인의 입을 봉하신다(42절 ; 1 : 6 ; 욥 5 : 16). 결국 하나님의 공의는 드러났
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행사(行事)를 통하여 참된 지혜를 배우게 된
다. 어떠한 역경에서도 인간은 하나님을 더욱 잘 알게 되고 신뢰하게 된다(43절). 그
미련한 자들은 하나님에게 대항하여 진노를 받지만 지혜로운 자들은 하나님의 최후 심
판을 믿으며 궁극적인 구원에 도달하게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정직한 자에게 종말론적인 승리와 기쁨을 부여하신다. 2 악인은 종국적으로 심판을 받고 영원한 멸망에 빠지게 된다. 3 지혜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를 신뢰하며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영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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