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
내 음성으로...부르짖으리니 - 본절은 반복법을 사용함으로 현실의 문제 상황이 심각하고 절박함을 강조한다. 특별히 '내 음성'이 강조된 것은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갈망하는 가운데 '진실함'과 '간절함'을 호소하는 말이다. 여기서 혹자는 '부르짖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절망의 외침이나 기도를 못들은 체하신 것에 대한 슬픔의 하소연이라고 하지만 하반절의 '귀를 기울이시리로다'가 저자의 기도 응답에 대한 확신의 말이라고 볼 때 그것은 부적절하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기도 응답을 간절하게 바라고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인 것이다.
=====77:2
환난날에 - 본 시의 중심이 되는 단어로서 배경을 암시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즉, (1) 저자 자신이 개인적으로 겪었던 크나 큰 환난으로 보거나,(2) 국가적 차원의 환난으로 취급하는 견해이다. 그런데 국가적 환난에도 이견(異見)이 있다. 첫째는 바벨론 포로 시대 전후(前後)에 나타난 환난으로 보며(Ewald), 둘째로는 아직 성전 파괴에 대한 언급이 없고, 하박국 선지자가 이 시를 참조한 듯하기 때문에(합 3장) 요시야(B.C. 640-609년 재위) 이전 시대 곧 북왕국 이스라엘이 망한 것에 대한 고통으로 본다(Delitzsch, Hengstenberg, Caspari). 본 시의 전체적인 내용을볼 때 저자가 국가적 환난에 직면하여 기도하면서 15절 이하의 구원에 대한 기사에 희망을 갖는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배경을 밝히기란 어렵다. 물론 여기서 '환난'이란 저자의 개인적인 환난인 동시에 국가적 환난으로까지 확대된 것이다. 손을...아니하였으며 - 혹자는 '손'(* , 야드)을 '고통', '상처'로 보고 '들고'(* , 니그라)를 '흐르다'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고통과 상처로 인하여 밤새 눈물을 흘렸다'로 본다. 그러나 본래 '야드'의 1차적인 의미는 본문대로 '손'이며 '니그라' 역시 '뻗다', '펼치다'는 뜻도 지니며 본절에서는 간청이나 애원을 할 때 습관적으로 나타나는 몸짓으로서 손을 뻗치는 것을 묘사한 단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1절의 내용과 본절 초두의 '주를 찾았으며' 그리고 '거두지 아니하였으며' 등과 같은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본구절은 계속적인 기도의 행위를 나타낸다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내 영혼이...거절하였도다 - 진정한 위안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다른 어떤 위로의 말도 시인을 평화롭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거부했다는 의미이다(창37:35;렘 31:15). 또한 본문에서 위로를 거절했다는 것은 현재 기도의 응답이 절실히요청되기 때문에 그 고통은 비록 괴롭지만 감수하겠다는 뜻을 암시한다. 궁극적으로본 구절은 하나님의 침묵으로 저자가 얼마나 고통스러워 하는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77:3
하나님을 생각하고...근심하니 - '생각하고'(* , 에즈케라)라는 말은 '기억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데 본 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즉, 저자가 하나님을 기억함으로 환난날에 위로를 얻고 인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에 대한 기억이 그를 불안케 했다는 것은 전에도 구원해 주셨던 하나님께서 지금은 응답하시지 않는 것에 대해 불안하고 또 한편으로 현재 자신의 환난과 국가의 환난이 하나님의 진노 때문이라는 생각에 불안했던 것이다.
심령이 상하도다 - 본문의 '심령'(* , 루히)은 '영혼'이라기보다는 '용기','마음', '기운' 등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상하도다'(* , 티트아테프)는'쇠약해지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외부적 환난으로 말미암아 쇠약해진 심적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77:4
주께서...없나이다 - '붙이지 못하게 하시니'(* , 아하제타)는 문자적으로 '지키다', '제지하다'라는 뜻을 갖는다. 본절에서는 특별히 하나님의 침묵 때문에 저자가 잠들지 못하는 상황을 묘사한 것이며, 이것은 더 나아가 하반절에 언급된 기도의 말도 할 수조차 없는 비참한 상황으로까지 확대되었다.
=====77:5
내가...생각하였사오며 - 3절이 현재의 환난에 대해서 불안한 심경을 토로한 것이라면, 본절은 6절의 '묵상'이란 말을 고려해 볼 때 과거에 용기를 주셔서 위로해 주시고 큰 역경 중에서 구원해 주심으로 잠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회상한다고 볼 수 있다(14-19절;3:4, 5).
=====77:6
밤에 한 나의 노래 - 여기서 '나의 노래'(* , 네기나티)를 많은 사람들이 70인역(LXX)에 기초하여(EBC) '나는 묵상한다'(* , 웨하기티)로 수정한다(Tyndale).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문은 '나의 과거 일들을 밤에 묵상하고'로 해야 한다. 본 시의 전반부(1-10절) 내용과 시인의 심적 상태나 처한 상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음악적인 노래보다는 위에 언급된 해석이 타당성이 있다.
심령이 궁구하기를 - '궁구하다'(* , 하페스)는 '찾다', '온갖 수단을 강구하다'라는 의미이다. 혹자는 '심령'(* , 루히)이 여성 명사이고 동사인 '궁구하기를'이 남성이라 하여 본문을 '그는 내 심령을 찾았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Tyndale) 히브리어의 성(性) 구별이 확실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는 이것을 취하지 않는다. 한편, 본 구절은 환난이 왜 닥쳤는가 하는 시인의 회의(懷疑)에 가득 찬 의혹이 아니라 환난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가져다 줄 것인지를 찾는 몸부림인 것이다.
=====77:7,8
이 두 절은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하면서 현재의 환난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인지 아닌지에 대하여 자신과의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다. 이 과정에서 시인은 현 상황에 대해 부정적 질문을 제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이 도우실 것이라는 기대를 갖는 듯하다. 그 예로 7절의 '은혜를 베풀지'(* , 라차)는 '기쁘게 여기다', '용서하다', '받아들이다' 등의 뜻을 지니는데 그 뒤에 언급되는 부정 의문문과 결합되어 문장은 부정적인 뜻을 내포하지만 저자의 의도 속에는 은혜를 바라는 면이 암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형태는 8절에서도 반복되는데, 즉 '자비', '사랑'이란 의미를 가진 '인자하심'(* , 헤세드)과 '약속하다'란 뜻으로 사용된 '허락'(* , 오메르)이란 두 단어가 모두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견주어 내면으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희망을 가지며 또한 이스라엘과 언약 관계에 있는 하나님은 언약을 깨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믿으므로 절망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므로 본문은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하나님의 속성을 생각하면 낙망할 수만은 없는 시인의 갈등을 잘 묘사해 주고 있다.
=====77:9
하나님이 -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호칭으로 '엘'(* )이 사용된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일반적으로 '엘'이란 호칭은 초자연적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을 지칭할 때 사용되었다(7:11;85:8). 특별히 본문에 이것이 사용되었다는 것은 시인이 이제는 하나님의 위대성 혹은 권능에 의존하여 자신에게 질문을 던지며 갈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77:10
본절은 본 시에서 상황의 전환점을 나타내는 부분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와는 달리 본절을 9절의 연장으로 해석하는데 약간 무리인 듯하다. 왜냐하면 고대 전승에서나, NIV, RSV 등도 9절과 본절을 '셀라'(* )로 구분하고 있고 또한 시의 전체적인 구성과 내용 전개를 볼 때 마땅히 전환절로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의 연약함이라 - '연약함이라'(* , 할로티)는 '쇠약하다', '병들다'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데 본 구절에서는 여러 의미로 해석되어 난해 구절에 속한다. 그 가운데 세 견해를 들어보면 (1) 믿음과 연관시켜 7-9절의 고뇌가 저자의 연약한 믿음에서 나온 것임을 고백하는 말이라고 보는 견해, (2) 실제 육체적인 질병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신의 심령까지 쇠약하게 되었음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Walford), (3) 현재의 환난이 하나님의 침묵 때문이고 이것이 저자의 '슬픔'이 되었다고 생각하여 '마음의 고통이나 슬픔'으로 설명하는 견해가 있다. 그런데 1-9절까지의 시적 분위기나 시인의 심적 상태를 고려해 본다면 (2)와 (3)의 견해가 복합적으로 적용된다고 볼 수 있고 11절 이하를 생각해 본다면 (1)의 견해가 적절하다.
지존자 - 원어로는 '엘룐'(* , 가장 높은)이며 이 말이 사용된 것은 족장 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창 14:22). 원래 이 호칭은 '엘'(* )의 형용사형으로서 가나안인들의 신(神)으로 불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히브리인들은 '야웨'(* , 예화)라는 호칭과 거의 동일시하였다. 특별히 이 명칭은 주로 시에서 나타나는 용어로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을 지칭한다(18:13).
오른손의 해 -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오른손'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적 권능을 나타낼 때(사 48:13), 혹은 그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표현(89:13;신 33:2)으로 쓰였다. 그런데 학자들은 본문에서의 의미를 '기도 응답의 손' 혹은 '하나님의 개입을 나타내는 손'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Tyndale), 두 해석 모두 적절하다. 또한 '해'에 대해서도 해석을 달리한다. 어떤 주석가들은 '해'(* , 쉬노트)라는 말이 '솨나'(* )에서 유래했고 그 어원적인 뜻 가운데는 '변하다'라는 의미도 갖고 있기 때문에 본절을 '오른 손이 나의 고통을 변화시켰다'로 해석한다(Maurer, Hupfeld, Hitzig).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해'(year)로 보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이 '해'를 묘사할 때 쓰는 '쉬노트'라는 단어가 계절의 변화 등을 일컫는 순환적인 성격을 내포하며(Calvin) 또한 5절에서 같은 어휘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절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이 있다면 문장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가 있는데 (1) 본절에 '에즈코르'(* , 나는 기억할 것이다)가 생략되었다고 보는 견해(NIV, R.V., Cheyne), (2) 11절에 '에즈코르'와 동의어인 용어들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본절과 11절을 한 구절로 설명하는 견해이다. 이 중에서 첫 번째 견해가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데 그 이유는 많은 번역본들이 '에즈코르'를 삽입했으며 특히 본 시의 5절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77:11,12
본 시의 전반부(1-9절)는 하나님의 은총이 임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시인의 의문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여기서부터는 이와 대조적으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되찾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시인은 4개의 동의어(옛적 기사, 행하신 일, 모든 일, 행사)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과 구원하시는 능력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신뢰를 확고히 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묵상하며 - '묵상'(* , 하가)이란 용어는 시편에서 주로 많이 언급되며 그 어원적 의미는 '중얼거림', '명상', '한숨', '속삭임', '신음' 등이다. 히브리인들은 묵상하는 것을 습관으로 여겼으며(19:14;창 24:63), 영적인 생활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 '묵상'은 단순한 침묵 훈련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으로 주 내용은 (1) 율법(119:15), (2) 주의 증거(119:99), (3) 약속의 말씀(119:148), (4) 하나님의 권능과 업적, 기사(143:5;145:5) 등이 있다.
=====77:13
주의 도 - '도'(* , 다르케카)는 원래 '밟다', '나아가다'를 의미하는 '다라크'(* )에서 유래한 것으로 행위 혹은 행함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학자들에 따라 '하나님이 피조물을 다루시는 양식'으로 보기도 하고(Alexander),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 행하셨던 일'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전자는 너무 광범위하고 후자가 적절하다.
거룩하시오니 - 원문에는 '코데쉬'(* )로 나오는데 이 말은 '거룩'이라는 뜻과 '거룩한 곳'이란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 혹자는 '코데쉬'를 '거룩한 곳'으로 해석하여 본절 전반절을 '주의 도는 성소에 있사오니'로 보기도 하는데, 이렇게 되면 문장이 다소 어색하다. 오히려 성소의 특징 중의 하나인 '거룩'으로 보는 것이 좋다. 또한 '주의 도'와 연관시켜 볼 때 궁극적 의미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암시하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다.
=====77:14
기사를 -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성을 전능한 기사를 통해 증명하려 한다.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기사'를 뜻하는 단수 형태이지만 본절에서는 집합적인 성격을 띤 복수의 의미를 갖는다. 이 기사는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일을 통해, 특히 언약 백성을 구속사의 대장정(大長程) 가운데 이끄시는 과정을 통해 역사 속에 구체적으로 입증된 초자연적인 권능과 관련된다. 민족들 중에...알리시고 - 하나님의 전능한 행위가 그의 선민에게 뿐만 아니라 주변 민족들에게까지 목적되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민족들 중에'라는 말은 '민족들 가운데', '민족들이 보는 가운데서'(Alexander)라는 뜻이다.
=====77:15
주의 백성 - 하나님이 언약을 통해 관계를 맺으신 백성을 말한다. 시인은 이 말에서 언약 관계를 암시함으로 선민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친밀한 것임을 나타내며 또한 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고 도우실 것을 희망하며 찬양하고 있다.
야곱과 요셉의 자손 - 야곱과 요셉이 특별하게 언급된 것은 직접적으로는 그들이 이집트로부터 구속받은 민족의 조상이고 또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가 야곱에서 나왔고 이들이 애굽에 있을 때 요셉의 보호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더 포괄적인 의미, 즉 택함 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을 가리킨다.
구속 - 어원은 '가알'(* , 배상하다, 무르다, 구해 내다)이며 본래 '대가를 지불하고 되찾는 것'을 말한다(룻 3:6-13 강해, '기업 무를 자의 구속사적 의미' 참조). 본절은 애굽으로부터의 구원을 다루면서 구속 사상의 형태와 예표를 제시해 준다. 그리고 이것은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구속 받을 것을 미리 보여준 것이다(롬 3:23-25;고후 5:15).
=====77:16
하나님이여 물들이...진동하였고 - 이제 시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사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기술한다. 그 비유 중에서 '물들이 주를 보았나이다'라는 표현은 물들이 움직이는 것을 묘사하는 것으로 실제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홍해 바다가 갈라진 모습을 의인화시킨 것이다(출 14:29). 또한 이것은 자연까지도 하나님의 권능에 복종하고 있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77:17
구름이...발하며 - 폭우와 천둥을 비유하는 이러한 시적 표현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고(18:12-14), 또한 하나님이 분노를 내실 때 발생했던 상황이기도 하다(18:15). 그러나 본절에서는 애굽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벌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주의 살도...나갔나이다 - 번개치는 현상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서 이방 대적들을 파하시는 하나님의 신속한 공격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합 3:11).
=====77:18
회리바람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갈갈'(* )은 여러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그 견해가 다른데, (1) 번개와 폭풍후에 수반되는 '회오리바람'으로 보는 견해(Tyndale, Hitzig), (2) 이 말이 '갈랄'(* , 구르다)이라는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므로 '번개가 굴러감'(Maurer) 혹은 '번개가 급하게 번쩍이는 것'으로 보는 견해(Botoher, Hengstenberg), (3) '하늘'이라는 의미도 갖고 있고 또한 갑작스럽게 펼쳐지는 하늘의 상황으로 보아 본 구절을 '하늘에서'로 설명하는 견해(Alexander) 등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첫 번째 견해를 취하는데, 그 이유는 회오리바람이 마치 수레바퀴가 도는 것과 유사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세 번째 견해도 고려해 볼 수 있다.
=====77:19
주의 길이...있었으나 -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바로 알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출애굽 사건에 대한 이해가 선행(先行)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행사를 고려할 때 동사를 모두 현재형으로 이해해도 무방하겠다(KJV).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는 과거 그 당시에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항상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주의 종적을 알 수 없었나이다 - 이 구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다 건넌 후 물이 본래 상태로 되면서 뒤쫓던 애굽 사람들이 물에 덮여 길이 없어진 것을 말한다.
=====77:20
주의 백성을...인도하셨나이다 - 시인은 하나님이 그의 선민을 영광 중에 인도하신 일들을 회상하고 지금도 권능으로 인도하실 것을 확신하며 끝을 맺는다. 즉, 그의 백성을 구하시기 위해 홍해의 기적을 행하신 것처럼 현재 시인이 겪고 있는 환난과 고통 속에서도 시인을 인도해 주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무리양같이 - 전적으로 연약하고 무능하여 반드시 목자의 인도가 필요한 이스라엘 백성을 비유한 말이다. 만일 목자가 없다면 제각기 흩어져 큰 위험에 직면하기 때문에 안전하고 편안하게 지켜줄 목자가 있어야 한다. 시인은 이처럼 자신을 지켜주고 인도해 줄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본 시편은 절망적인 위기에 처한 시인이 자신의 슬픈 현실에 대해 하나님께 아뢰는 비탄시이다. 시인은 탄식에서 출발하였으나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베푸신 기적 적인 은혜를 회상(回想)함으로써 스스로를 위안하였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곧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구원 역사이다. 이 시를 통하여 우리는 환난을 당할 때에 드려야 할 기도의 일반적인 형식을 발견하게 된다. 성도들은 가장 감내(堪耐)하기 힘든 핍박에 직면할 때 과거에 베풀어 주셨던 하나님의 영원하신 은총을 기억하고 그 구원의 능력을 찬송함으로써 보다 더 생동감 있는 활력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한편 본시가 쓰여지게 된 역사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시인이 어떠한 절망적인 사건(2절)에 당면한 상태에서 본시를 저술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요시야 왕 통치 시기(B.C. 640-609년경) 때의 어떤 위기 상황으로 보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본 시편의 내용과 유사한 내용이 하박국에 기록되어져 있는(합 3장) 사실로 미루어 볼 때에, 하박국 선지자 본 시편을 참조했을 가능성이 많으므로 적어도 요시야 왕 때보다는 훨씬 이전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리고 본시의 표제어는 "아삽의 시, 영장으로 어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두둔의 법칙에 의지하여 한 노래"라는 말은 "여두둔이란 악사(樂士)가 지은 곡조에 의지하여"라는 뜻이다(대상16:41). 여기서 '여두둔'( )은 다윗 시대에 활동한 종교 음악 지도자들 중의 한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대하 5:12). 다윗이 그의 임종에 즈음하여 조직한 성가대들 중 하나는 그 명칭을 '여두둔' 혹은 '여디둔'이라고 하였는데, 아마도 이는 그 창설자였던 여두둔에게서 유래된 명칭이었을 것이다.
또한 본 시편은 전체의 유기적인 구성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의 상이한 내용, 곧 애가(lament, 2-10절)와 찬양(hymn, 11-20절)이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구분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뒤따른다. 이것은 내용뿐만이 아닌 형식의 분명한 대조에 연유하기도 한다. 곧 내용상의 구분과는 다르게 15절을 기준으로 하여서, 특히 16-19절은 3.3.3형식의 운을(metric)을 가짐으로써 나머지 다른 구절(특히 3-15절)과 뚜렷이 대조되고 있다. 이와 같은 사실 때문에 본 시편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학자들간에도 본 시편을 둘 또는 셋, 넷으로 구분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그러나 대체로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특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A. 8,9절 과거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회의와 질문
B. 10절 슬픔의 결말(하나님의 개입)
C. 11-13절 찬양의 시작(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B. 14, 15절 B에 대한 대답(하나님은 여전히 구원자이시다)
A. 16-20절 A에 대한 대답(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가운데 구원을 행하고 계신다)
이와같이 11절을 기준으로 하여서 본시는 시인의 현재의 고통으로 인한 애가와, 과거의 회상으로 인한 미래에 대한 찬양으로 구분지을 수 있다.
본시의 내용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1) 본시에 기록된 전반부(1-9절)는 개인의 사사로운 심경을 토로하는 탄식의 형식을 띠고 있다. 그러나 후반부 (10-20절)로 나아갈수록 시인의 고통은 순수한 개인적인 고통이 아닌, 모든 민족과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의 고통인 것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시인이 자신의 절망에 대해서 더불어 함께하는 공동의 고통인 것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시인이 자신의 절망에 대해서 옛날 이스라엘 민족 역사에 있었던 하나님의 기적적인 힘과 능력을 통하여 위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2) 아삽적인 내용의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이 시 자체가 마치 어떤 구체적인 역사적인 사실을 설명하다가 갑작스럽게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16-20절).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시인이 이 시편을 완성하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81편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단순히 역사적인 회고를 끊어버리는 것이 아삽의 시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15절에 나타난 것과 같이 요셉 족속을 강조하는 표현은 다른 전체적인 아삽의 노래에 있어서 하나의 특징적인 사실이다.
또한 본 시편의 내용을 대략적으로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위기에 처하여서 하나님께 부르짖는다. 그는 응답받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기도를 시작한다(1,2절). 그러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분명한 대답이 없기에(3,4절), 시인은 괴로운 심정을 토로하며 자신이 절망적인 상태에 빠져들고 있음을 언급한다(5-9절). 이전에 하나님은 은총을 베푸셨는데 지금의 위기에서는 왜 잠잠히 계시는가? 은총을 거두신 것인가? 하는 다양한 생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이제 하나님게서 과거에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행하신 일들을 살펴봄으로써 구원에 대한 기대와 확신을 갖게 된다. 사실 시인의 회의(懷疑)는 다름아닌 자신의 연약함(10절)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의 위기만 생각하던 시야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일을 상기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져 갈 때에 그는 점점 희망을 소유하게 된다. 14-20절을 통해 시인은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능력을 나타내신 여호와는 구속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창조의 하나님이심을 때닫는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창조의 위엄을 구속에 동원하셨다는 사실-홍해 사건-을 통하여서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고 있는 것이다(19,20절).
이러한 내용상의 개략적인 이해를 토대로 하여 본 시편은
1) 선인의 고난과 구원자(1-3절)
2) 고난에 처한 경건한 영혼의 생각과 질문(4-9절)
3) 지나간 과거의 은혜로 인하여 용기를 얻음(10-15절)
4) 하나님의 기적적인 인도(16-20절)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제 각 단락에 대하여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선인의 고난과 구원자(77:1-3)
시인은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괴로워하면서도 마치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신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을 향해 위기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 사실 시인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모든 위안에 사라져 버렸고(창37:35;렘31:15), 그의 영혼은 불안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게 되어 참된 평안이 상실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시인은 자포 자기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다(1절). 여기서 시인은 '내 음성으로', '브르짖는다'와 같은 동의적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더욱 자신의 간절함을 드러낸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하여 과거에 언제나 당신의 백성의 울부짖음에 주목하셨던 하나님의 응답을 확시케 된다(1b절). 그는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기 이전에는 결코 기도를 쉬지 않을 것임을 말한다(2절;창35:3;합3:16). 이 사실은 그의 행위를 통해서도 명확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손을 계속해서 펼친 상태로 놓아둘 것이라고 말한다(MT직역상). 이러한 모양은 문자 그대로 간절히 소원하는 시인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28:2;143:6). 그의 간절한 기도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위로와 평화였다. (2b절). 여기서 우리는 성도가 기도할 때,
1) 하나님께 대한 흔들림 없는 믿음을 가지고
2) 인내심있게 기도하며
3) 하나님의 응답을 끝까지 기다리는 자세로 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러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심령은 안위함을 얻지 못하였다(3절).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셨던 적극적인 개입을 지금은 취소하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을 생각할 때마다(119:52)오히려 커다란 고통을 느끼게 된다. 지나간 과거의 하나님의 도움심을 생각할 때마다 시인은 현재의 고난과 비교하여 더욱 불안이 가중된다(76:12;143:4).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게 된다. 참성도는 자신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기도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익을 위해 간구해야 한다. 동시에 습관적으로 하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의 확실한 응답을 소망하는 가운데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2. 고난에 차한 경건한 영혼의 생각과 질문(77:4-9)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하여 회의하던 시인은 이제 영적인 진리에 관하여 진지하게 묵상하고 있다. 시인은 점점 진리의 빛으로 인도되고 있다. 여기서 마치 하나님을 의심하는 듯한 시인의 물음들은 사실상 진리를 탕구하기 위한 몸부림으로 보아야 한다. 시인은 지금 자기가 겪고 있는 고난이 왜 발생하였으며 끝나지 않고 계속되는가에 대하여 예(example)가 구체적의로 나타난다. 지나간 밤에 회의했던 내용을 다시한번 기억하는 가운데 시인은 여러가지 의문들이 생겨나게 됐다(6-9절).
이러한 시인의 의문은 두 가지 사실로 우리를 주목케 한다.
1) 시인의 의문은 단순한 회의(懷疑)가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이것은 10절 이하에 서술되는 확신을 통해 더욱 분명해진다.
2) 시인의 의문은 낙심을 초래하는것이 아니라 믿음을 견고히 가져보려는 동기에서 드러난 탄원(歎願)이다. 이 두가지 사실을 온전히 인식할 때 우리는 시인이 가졌던 내적 감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문들은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들과 맺은 언약에 기초하여(창17:7-13,26:24,35:11,12)제기된 질문이다. 무엇이나 잊지 않고 기억하신는 하나님이(사49:15) 선한 자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고난받는 자에게 위로를 베푸신다는 것을 잊으셨는가?(9절)하며, 분명히 그렇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은 우선, 고난의 시기에 봉착하였을 때 성도는 그 고난이 왜 발생했는자, 그리고 그 고난을 통하여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깨닫게 하시려는 지에 대한 경건한 질문이 있어야 된다는 점을 가르친다. 또한 고난 가운데서 현실만을 바라보지 말고 과거에 임했던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에 근거하여, 현재 주어진 역사들을 바라보는 지혜가 있어야 할 것이다(89:49;벧후3:9).
3. 지나간 과거의 은혜로 인하여 용기를 얻음(77:10-15)
고난에 처한 현실 속에서 떠오르는 의문들에 대해 고민하던 시인은 이제 자기 스스로 새로운 위로와 평강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 단락을 통하여 시인은 그동안 지녀온 암울한 사고(思考)에서 탈피하여 과거의 사건에 기초한 확실한 위안을 얻고자 한다. 이것은 시인 자체의 갑작스러운 감정의 변화를 드러내 주고 있다. 시인은 극도로 환난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객관적인 측면에서 하나님의 경륜(經綸)을 생각하면서 비관적인 생각을 극복할 수 있었다. 10절에서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연약함이라"고 한 사실은 바로 자신의 비관적인 태도를 자책(自責)하는 신앙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비관하기는 커녕 오히려 '여호와의 옛적 기사'( )를 기억하면서 용기를 얻게 된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구원의 행적을 살펴보면서(12절) 하나님께서 '거룩'하시다는 점을 절감했다(13절). 하난님의 '도'는 어그러짐이 없고, 오직 공의롭고 바른 성격을 가지고 있다(창18:25;욥8:3). 그러므로 하나님만이 참 신(God))이시다(95:3;신7:21;10:17). 시인은 구체적인 하나님의 이적적인 기사(16-20절)를 소개하기 전에 구체적으로 자신이 속한 민족과 관련하여 자신의 확신을 객관화(客觀化)시키고 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과 요셉에게 베푸신 구원을 상기시킨다(15절). 다시 말하여 정능하신 창조의 하나님이 바로 시인의 조상과 분명히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볼 때에 시인은 용기를 얻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야곱과 요셉의 자손"이란 것은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 "야곱"은 12지파의 조상이며, "요셉"은 기타 두 지파 곧,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조상이기에 언급된 것이다. 반면 어떤 학자들은 지리적으로 야곱은 남쪽 아스라엘을, 요셉은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킨다고 보지만(호12:2;암5:6,15;6:6)분명한 근거는 없다.
본 단락을 통하여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인가? 성도는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실들로 인하여 용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과거의 하나님을 깊이 묵상함은 미래를 소망케 하는 원동력이 된다. 과거에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살아계서서 미래에도 역시 은혜주실 것을 아는 자는 현실의 역경으로 인하여 결국 낙담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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