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1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 이러한 탄식조의 기도는, 이스라엘이 이방 대적으로 인해 오랫동안 질곳에 빠뜨려져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징계가 잠깐 동안만 가해질 것으로 보았으나, 그 기간이 오래 지속되자비탄에 빠져 버리게 된 것이다.
주의 치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 '주의 치시는 양'은 특별한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결속을 강조하는 술어로서, 예레미야에 의해서도 잘 사용되었다(렘 23:1, 2). 저자는 이러한 독특한 술어의사용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를 암시적으로 간구하고 있다. 한편, '진노'(* , 아프)는 '화를 내다' 혹은 '불쾌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아나프'(* )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콧구멍' 혹은 '화'를 의미한다. 사실 화가 나면 심리적 흥분 현상과 함께 숨을 몰아쉬게 됨으로 말미암아 씩씩거리게 되며 또한 그 결과로서 콧구멍의 팽창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연기를 발하시나이까'(* , 예으솬)는 단지 '연기'를 뜻하는 명사 '아'에서 파생된 동사로서 그 기본형이 '아솬'(* )이며, 인간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를 묘사할 때 자주 사용된다(80:4;신 29:20;사 65:5). 이처럼 하나님의 분노 행위를 묘사하는 동사가 '연기'를 뜻하는 명사에서 파생된 까닭은, 하나님의 분노는 온 세상을 순식간에 불살라버릴 것같이 너무나도 두렵고 맹렬하게 임하기 때문이다(18:8;104:32;144:5).
=====74:2
옛적부터 얻으시고 구속하사 - '얻으시고'(* , 카니타)는 노예로 팔린 친척을 일정한 대가를 주고 되사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동사이다(느 5:8). 그리고'구속하다'(* , 가알타)의 기본형은 '가알'(* )로서, 앞의 '카나'와 비슷하게 노예가 된 친척을 위하여 대신 속전(贖錢)을 지불해 주고 해방시켜주는 행위 등을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의 '카나'와 '가알'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출하시기위한 하나님의 사역을 말하고 있는 출 15:13, 16에서도 병행 사용되고 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본 문구는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민중에서 특별히 구별하시어 당신의 백성으로삼으신 일을 가리킨다(신 7:6).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기 위하여 그들을 애굽의 속박에서 건져내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와같이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입은 자들이었다. 본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이러한 각별하신 사랑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징벌이 어서 그쳐지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지파'(* , 쉐베트)는 통치권의 상징인 '홀'(笏)과 '부족'을 아울러 뜻한다.이는 '지파'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부족'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래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 이외의 다른 이방 국가나 부족에 대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한편 '회중'(* ,예다)은 '지명하다' 혹은 '약혼시키다'를 뜻하는 '야아드'(*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그 기본 의미는 '모임', '회중' 등이며,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 하나님의 약혼자로 지정된 것과 같은 특별히 구별된 신분임을 강조하는용어이다. 기자는 이스라엘을 이러한 독특한 용어로 묘사함으로써, 자신들이 마땅히하나님의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또한 보호를 간구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1:5;수9:15, 27). 또한 '기억하시며'(* , 제코르)의 기본형 '자카르'는 '생각하다' 혹은'주의를 기울이다'의 뜻이 있으며, 여기서처럼 명령형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사용될 때는, 위험으로부터의 구원을 강력히 요청하는 기원의 형식이 된다(출 32:13;삿 16:28;왕하 20:3;대하 6:42).
주의 거하신 시온산도 생각하소서 - '거하신'(* , 솨카느타)의 기본형 '솨칸'은 '임시로 거주하다'의 뜻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임재, 특히 성소에의 임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왕상 8:12;대하 6:1). 따라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인 '성막'을,바로 이 동사 '솨칸'의 파생형인 '미쉬칸'(* )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시온산'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곳, 곧 예루살렘을 뜻한다(신12:11).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중 바로 이 한 곳을 택하셔서 당신의 '회중'들의 중심지로 삼으셨고, 그곳에서 그들과 교제를 나누고자 하셨다(78:68;84:7;132:13). 바로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온산은 하나님의 보호가 있을 만한 특별한 곳이었다. 그래서 저자는 그 시온산의 특별성을 내세워 시온산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 해제되기를 소원하고 있는 것이다.
=====74:3
영구히 파멸된 곳으로 주의 발을 드십소서 - '영구히 파멸된 곳'은 바벨론 군대의공격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렸던 예루살렘을 가리킨다. 특히 '영구히'라는 표현은 복구할 수 있다는 희망까지도 '포기케 할 만큼 완전히 파괴되어버린 것을시사한다(Deltzsch). 그리고 '주의 발을 드십소서'는 천천히 혹은 가만가만히가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목격하는 가운데 크고도 당당한 발걸음으로 직접 행차해 주십사하는간구이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곳인 예루살렘이 폐허가 된 것을 직접 확인하시고(Rawlinson), 그렇게 폐허로 만든 원수들 곧 바벨론을 징벌해 달라는 것이다(Calvin).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 바벨론 군대가 '성소', 곧 '성전'에서범한 악행으로는 (1) 성전의 기명(器皿) 및 집기들을 모두 약탈해 간것(왕하25:13-17), (2) 성전을 불태운 것(왕하 25:9), (3) 성전벽을 파괴한 것(왕하 25:10)등이 있다. 사실 바벨론 군대의 이러한 악행은 만군의 여호와를 만홀히 여긴 것이라는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기에 충분하였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당신께 패역을 일삼았던 이스라엘과의 언약이 깨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하여, 이처럼 당신의 임재 장소요, 백성과의 언약적 교제의 장소인 성전을 바벨론 군대를 도구삼아 파괴하신것이다(애 2:7).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성전을 만홀히 여기고 또한 그 백성을괴롭게 한 데 대한 징벌로서 결국 그들을 멸망시키셨다(렘 51:24)=====74: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에서 훤화하며 - '회중'(* , 모에드)은 '지명하다'를뜻하는 동사 '야아드'(*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지정된 때', '지정된 장소' 혹은 '지정된 모임' 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지정된 장소'를 가리키는 듯하다. 그래서이 단어는 성경 여러 곳에서 '회막'으로 번역되었다(출 39:32;신 31:14;왕상 8:4). 이러한 번역은 3절의 '성소'와 잘 어울린다. 왜냐하면 3-7절은 한결같이 '성전'에 대한바벨론 군대의 파괴 행위에 대하여 언급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또한 '훤화하며'(* , 쇠아구)의 기본형 '솨아그'(* )는 본래 사자가 크게 포효(咆哮)하는것을 가리키며(104:21;삿 14:5;암 3:4, 8) 여기서는 원수들에게 적용되어, 승리를 기뻐하며 자만하여 크게 부르짖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기를 세워 표적을 삼았으니 - 이스라엘을 정복했다는 증거를 남기기 위한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의 정치적, 종교적 중심지였던 여호와의 성전을 파괴한것은, 이스라엘 정복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바벨론 군대의 이러한 행위는, 자신들의 신(神)이 이스라엘의 신을 이겼다는 사실을 기념키 위한 오만한 짓이었다.
=====74:5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 이것은 바벨론 군대가 성전 안에서 행한 악행이 아무런 두려움없이 그리고 거침없이 잔인무도하게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렘 46:22, 23).
=====74:6
성소의 모든 조각품 - 성전의 내외소(內外所) 사면 벽에 장식됐던 그룹 모양과 종려와 핀 꽃 형상들을 가리킨다(왕상 6:29). 그런데 이 '조각품'은 금으로 도금이 되었기 때문에 전체가 금으로 오인되어 모조리 뜯겨지거나 파괴되어졌다(왕상 6:22,32,35,Rawlinson,).
=====74: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 솔로몬의 성전은 느부갓네살의 신하 느부사라단에 의하여소화(燒火)되었다(왕하 25:9;대하 36:19). 한편 B.C. 516년에 재건됐던 스룹바벨 성전은 결코 불에 태워진 일이 없다. 바로 이 같은 사실들은, 본 시편이 바벨론 군대의 침공시에 저작되었음을 입증해 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은 하나님이 임재하시어 당신이 백성들과 교제하시는 장소 곧 성전을 가리킨다. 물론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이 예루살렘을 의미하기도 한다(신 12:11). 그러나 여기서는, 본 문맥이성전에 대한 바벨론 군대의 행악(行惡)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가 타당하다. 한편,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는 불에 소화된 성전이 땅바닥으로 무너져 내린 것을 가리킨다(왕하 25:9;렘 19:13;애 2:2). 특히 '더럽혀'는 하나님의 성전에 불을 지르고그 전에 있는 장식물들을 파괴한 일을 말할 것이다(6절).
=====74:8
저희의 마음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것을 진멸하자 하고 - 사실 인간은 대개 개인적으로는 악행을 하기에 앞서 주춤하곤 한다. 하지만 한 집단에 속하여 개인의 행위에대한 책임을 묻기 불가능한 분위기가 되고, 또한 서로에 의해서 악행이 격려되고 자극받을 때에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의 극악한 행위도 서슴없이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진멸하다'의 기본형 '야나'(* )는 '압박하다' 혹은 '부당하게 다루다'는 뜻으로서 관용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상대를 짓밟아 뭉개듯 학대하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니고 '회당'이라는 점에서 무참하게 파괴하는 것을 나타낸다.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회당을 불살랐나이다 - '회당'(* , 모에데)은복수이므로, 단수인 4절의 '회중'(* , 모에드)과는 다르다. 즉 4절의 '회중'은'성소'(3절)를 가리키지만 여기의 '회당'은 성소와는 별도로 존재했던 종교적 집회 장소를 가리킨다. 이에 따라 많은 사람들은 본 시편을 마카비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회당'은 포로 귀환 시대에 에스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존재하게되었다고 생각하는 결과이다. 물론 '회당'이 에스라에 의하여 유대 사회에 본격적으로존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회당'은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던 지방 주민들에게 종교적 편의를 제공해 줄 목적으로 포로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었다(왕하 4:23). 이러한 목적의 '회상'이 남.북 왕국 모두에 있었으며, 특히 이곳은 선지자들의 활동 중심지였던 것같다(Rawlinson). 예레미야도, 바벨론의 공격이 맹렬하게 진행되던 그 시대에 '회당'이 이미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애 2:6).
아무튼 바벨론 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정벌하면서 그들에게 민족 정기를 일깨워줄 만한 종교적 중심지에 대한 파괴를 병행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보다 완전하게 달성하려고 하였다(83:4)=====74:9
우리의 표적이 보이지 아니하며 - 여기서 '표적'(* , 오토테누)이란 4절의 '표적'과 동일한 단어이다. 하지만 그 쓰임새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총이 임하리라는 것을 예시해 주는 어떤 '징조'를 뜻한다. 사실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마치 짙은 구름이 두텁게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아서 희망을 줄 만한 단 한 줄기의 빛도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느껴졌을 것이다. 왜냐하면그들에게 소망을 줄 수 있는 통로이자 수단인 성전이나 회당이 모두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다음 문구가 말하고 있는 바 곧 선지자가 없었던 사실도, 백성들의 마음을암울하게 하였을 것이다.
선지자도 다시 없으며 - 혹자는 본 문구에 근거하여 본 시편의 저작 시기를 마카비시대로 본다. 만일 본 시편이 바벨론 침공시대에 저작되었다고 한다면, 그 시대에는다니엘과 에스겔 그리고 예레미야와 같은 '선지자'가 엄연히 살아 있었는데 왜 본문과같은 말을 저자가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바벨론의 마지막 공격이 있었던 때에, 다니엘은 이미 바벨론에 잡혀가 있었으며(단 1:1, 6), 에스겔도 갈대아 땅의 그발강가 언덕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있었고(겔 1:1), 또한 예레미야는 애굽땅에 들어가있었다(렘 44:1). 이런 일이 얼마나 오랠는지...아는 자도 없나이다 - 물론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지배될 기간이 70년이라는 사실을 예언한 바 있다(렘25:1-11). 그러나 유다 왕국이 바벨론에 의해서 처참하리 만치 일방적으로 당하고, 또한 그 바벨론은 지극히 강성하여 절대로 멸망할 것 같지 않은 듯 보였기 때문에, 비록예레미야의 70년에 대한 예언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당시 백성들은 자신의 민족 공동체가 회복 불능의 암울한 미래를 가졌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74:10
대적이 언제까지 훼방하겠으며 - 여기서 대적의 훼방은,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인이스라엘을 살륙의 대상으로 삼은 것, 그리고 하나님의 임재 처소인 성전을 훼파한 것등을 가리킨다. '훼방하겠으며'(* , 예하레프)는 '무시하다' 혹은 '비난하다'의뜻으로서, 상대방에게 인격적 손상을 가하기 위하여 조롱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능욕하리이까(* , 예나에츠) - 기본형 '나아츠'(* )는 '경멸하다' 혹은'멸시하다'의 뜻으로서, 호의적인 처분이나 봉사를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도리어 상대방에게 의도적으로 경멸로써 응대하는 것을 가리킨다(신 31:20;32:19).
=====74:11
주의 손 곧 오른손을 거두시나이까 - 이는 일시적이나마 기자가, 마치 하나님이 당신의 공의 행사를 게을리하고 계신 것처럼 생각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같은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 행사를 결코 게을리하신 것이 아니다. 바벨론은이스라엘을 징계하시려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들의 악행 자체는 결국 스스로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는 것과 같은 결말에로 몰고 가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정해진 때까지 죄악을 방치해 두시다가 그것이 관영하면 철저히 심판을 실행하시는 것이다(창 15:16;렘 50:11-16). 그런 점에서 하나님은 여전히 당신의 공의를 행사하고 계셨던 셈이다.
=====74:12
여기서부터 15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호의 역사를 펼치셨음을 회고한다. 저자는 이같이 함으로써 앞으로도 그러한 보호의 역사가 다시 펼쳐지기를 염원한다.
하나님은 예로부터 나의 왕이시라 -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 땅에서 실현하는 대리자로서, 백성들을 이방 세력으로부터 보호하는 사명의소유자로 인식되었다(삼상 9:16).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을 자신의 보호자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여기서 저자가 '우리의 왕'이 아니라 '나의 왕'이라고 한 까닭은, 하나님께 백성의 구원을 인하여 기도하는 기자가 그분께 대한 인격적신뢰를 갖고 있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인간에 구원을 베푸셨나이다 - '인간에'(* , 베케레브 하아레츠)는 문자적으로 '세상 가운데서'의 뜻이다. 이것은 '인생들이 볼 수 있는 곳에서'라는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 다시 말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암암리에 되어진 것이아니라 모든 백성들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펼쳐졌다는 뜻이다. 사실 출애굽때의 기적적 사건들은 중근동의 많은 민족들에게 엄염한 사실로서 받아들여졌고 그에 따라 그들은 하나님을 심히 두려워하기에 이르렀다(출 15:14-16;수 2:8-11).
=====74:13
주께서 주의 능력으로 바다를 나누시고 - 하나님께서 홍해를 초자연적 능력에 따라 가르셨던 사건을 가리킨다(출 14;21, 22).
물 가운데 용들의 머리를 깨뜨리셨으며 - '용들'(* , 타니님)은 문맥에 따라 '뱀'(출 7:9) 혹은 '용'(욥 7:12) 등으로 번역되었다. 또한 이 단어는, 예언서에서는 주로 애굽 왕 바로 및 그 나라를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사 51:9;겔 29:3;32:2). 그런 점에서, 본 문구는 갈라졌던 홍해가 다시 합쳐짐으로써 애굽의 추격대가 모두 수장(水葬)되었던 사실에 대한 언급임이 분명하다(출 14:27-30). 특히 '머리를 깨뜨리셨으며'는, 애굽이 회복 불능의 치명상을 입었음을 시사한다(창 3:15).
=====74:14
악어의 머리를 파쇄(破碎)하시고 - 여기서 '악어'는 애굽을 상징한다. 따라서 본절도 하나님께서 애굽을 강력히 심판하심으로써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셨던 과거 사실에 대한 언급이다. 특히 본절은, '악어'가 물 속에서 헤엄을 치다 물 위로 잠간 머리를 내밀었을 때 몽둥이 등으로 세게 맞아 죽음으로 그 죽은 몸이 뭍으로 던져지는 모습을 연상시킨다(Delitzsch).
그것을 사막에 거하는 자에게 식물로 주셨으며 - 여기서 '사막에 거하는 자'(* , 레암 레치임)는 한글 개역 성경처럼 '사막에 거하는 사람'의 뜻으로 보면 곤란하다. 히브리어 '레암' 중의 '암'이 '백성'이라는 뜻을 갖기도 하지만, 다만 '피조물'이란 의미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 30:25에서는 '개미'를 지칭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에서 '사막에 거하는 자'라는 표현은 동물의 시체를 즐겨 먹는 하이에나 따위의 짐승 혹은 개미를 의미한다고 봄이 타당하다고 볼 수 있겠다.
=====74:15
바위를 쪼개사 큰 물을 내시며 - '큰물'(* , 마으얀 와나할)은 문자적으로 '샘과 개천'을 뜻한다. 아무튼 본 문구는 (1)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호렙 산 반석에서 샘이 터지게 하신 일(출 17:6), (2) 신 광야의 반석에서 많은 물이 나오도록 하신 일(민 20:11) 등을 가리킨다.
길이 흐르는 강들을 말리우셨나이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요단 강의 물 흐름을 일시 멈추게 하신 일을 말한다(수 3:13).
=====74:16
본절과 다음절에서는, 하나님의 능력이 심지어 자연 만물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말한다(롬 1:19, 20). 특히 저자는 자연 만물속에서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깨닫고는, 그 인자와 사랑이 외적의 침공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신들에게 미쳐지기를 염원하고 있다.
낮도 주의 것이요 밤도 주의 것이라 - 이것은 주야(晝夜)의 반복적 변화가 우연적인 자연 법칙에 따른 것이 아님을 말해 준다. 오히려 완벽하게 창조하신 우주에 대한 보전적 사랑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통제하고 계심을 보여준다(창 1:14-18).
주께서 빛과 해를 예비하셨으며 - 여기의 '빛'(* , 마오르)은 '발광체'를 의미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달'로 봄이 타당하다(moon, NIV). 왜냐하면 앞 문구에서 하나님이 '낮'과 '밤'을 나누신 사실에 대해서 언급하며, 또한 '해'는 '달'과 더불어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는 두 '광명'으로 대조되기 때문이다.
=====74:17
땅의 경계를 정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 창조의 일환으로 육지와 바다를 적절하게 분리시키신 것을 뜻한다(33:7;창 1:9;욥 26:10;38:8;잠 8:29;렘 5:22). 한편 칼빈(Calvin) 등은 본 문구를,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로 하여금 각각 적절한 지역에서 살아가도록 인자를 베푸신 것에 대한 언급으로 본다(신 32:8;행 17:26). 그러나 16절과 본절의 문맥이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주장은 타당치 않다. 하나님께서 각 민족들을 적절한 지역에 흩어져 살게 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그러한 섭리는 창조 작업이 끝난 한참 뒤의 일이었다(창 10장).
여름과 겨울을 이루셨나이다 - '여름과 겨울'의 반복은 창조 질서 중의 하나였으며, 노아와의 보전 언약으로 말미암아 그 질서가 계속 지켜질 것임이 확약되었다(창 8:22). 그런데 만일 인간의 타락과 노아의 홍수로 인하여 '여름'과 '겨울'이 불규칙적으로 찾아오게 되었다면, 인간이 겪는 고통은 극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여름과 겨울'이 정확하게 그리고 질서있게 찾아오도록 하심으로써 인간에 대한 당신의 자비를 극명하게 보여주셨다.
=====74:18
여기서부터 23절까지는 본 시편의 결론 부분이다.
여호와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 다음 문구에서 언급되는 '원수'들의 악행을 그냥 방관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한 탄원이다.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 이에 대해서는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비방하며'는 10절의 '훼방하겠으며'와 같은 동사이다.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 - '능욕하였나이다'도 10절의 '능욕하리이까'와 동일한 동사이다. 본 문구의 의미에 대해서도 10절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저자가 바벨론을 '우매한(* , 나발)의 백성'이라고 한 까닭은,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으며, 또한 하나님의 성소를 파괴하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스스로 하나님의 징벌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백성임이 분명했다.
=====74:19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 '멧비둘기'는 이스라엘 백성을, '들짐승'은 바벨론을 각각 가리킨다. '멧비둘기'는 힘이 없어서 육식 조류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능력이 없는데, 바로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과 너무나유사했다. 그래서 만일 하나님의 보호가 없다면, 멧비둘기인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먹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주의 가난한 자(* , 아니예카) - '괴롭히다' 혹은 '압제하다'를 뜻하는 동사 '아나'(*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본 문맥에서는 '압제를 당하여 불쌍한'의 뜻으로 이해된다. 즉,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군대의 포로가 되어(왕하 25:11) 잔학한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74:20
언약을 돌아보고서 - 여기서 '언약'은 하나님이 대대로 아브라함 후손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는 언약을 지칭하는 듯하다(창 17:7). 그 언약 안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땅에서 살도록 하시겠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창 17:8).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가나안 땅에서 바벨론, 곧 갈대아 땅으로 끌려갔다. 그래서저자는 하나님께 언약을 생각하시어, 자기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서 쫓겨나지 않게 해달라고 간구하고 있다. 하지만 모세 언약에 따르면, 범죄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서쫓겨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였다(레 26:27, 28;신 5:28-33;왕상 8:46, 47).
대저(* , 키) - '왜냐하면'이라는 뜻으로 본 접속사에 이어지는 다음 문구는,저자가 '언약을 돌아보소서'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설명해준다.
땅 흑암한 곳에 강포한 자의 처소가 가득하였나이다 - '땅 흑암한 곳'에 대해서는(1)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 갔던 바벨론 땅을 가리킨다는 견해(Rawlinson),(2)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하여 처하게 된 비참상을 묘사한다는 견해(Calvin), (3)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군대의 학대를 피하여 숨을 만한 은밀한 곳이라는 견해(Delitzsch) 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본 시편의 전체적 분위기를 볼 때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던 곳은 여전히 팔레스틴 땅임이 분명하며, 둘째,'흑암한 곳'(* , 마흐솨크)이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난처를 가리킨다고 할 만큼 긍정적인 뜻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 등에서, 위의 세 견해 중 (2)의 견해가 가장 타당하다.
=====74:21
학대받은 자로 부끄러이 돌아가게 마시고 - '부끄러이 돌아가다'라는 말은, 어떤상대에게 무엇을 구걸하였으나 그것을 얻지 못하여 빈손으로 돌아갈 때의 처량한 모습을 연상시키며, 하나님께 대한 이스라엘의 구원 요청을 거절하지 말아달라는 뜻이다.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로 주의 이름을 찬송케 하소서 - 이것도 바벨론의 압제에서구원해 달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맛본 후 그 벅찬 감격 속에서 자유롭게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기를 소원하고 있다. '가난한 자'에 대해서는 19절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궁핍한 자'(* , 에브욘)은 주로 경제적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가리킨다(72:4).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의 침공과 그들의 극심한 수탈(收奪)행위로 말미암아 엄청난 경제적 궁핍 가운데 있었을 것이다.
=====74:22
하나님이여 일어나사 - '하나님이여'는 하나님께 대한 강력한 탄원에 앞서 흔히 나타나는 표현이다. 그리고 '일어나사'(* , 쿰)는 실질적인 기립(起立) 행위가 아니라 다만 어떤 중대한 행위에 앞선 마음의 결단을 호소할 때 빈번히 사용된다(7:6등).
주의 원통을 푸시고 - '푸시고'(* , 리바)의 기본형 '리브'(* )는 '다투다' 혹은 '논쟁하다'의 뜻으로서, 여기서는 대적들의 압제로부터 의인을 보호하거나공의를 세우는 일을 가리킨다(Robert D. Culver). 그리고 '원통'(* , 리브)은 '다툼' 혹은 '대항'의 뜻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함으로써 그분의 권위에 도전한 것을 말한다.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 - 바벨론이 실제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했었던 사실을 말할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는, 한 국가가 다른 국가에 대해서 승리하였을 경우, 그 패전국의 신(神)을 모욕하는 것이 보통이었다(Rawlinson, 왕하 19:10-13;사 10:8-11).
=====74:23
주의 대적의 소리 - 이것도 승리의 함성이다. 그런데 이 소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모욕과 자신들을 높이는 교만한 자화 자찬이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일어나 주를 항거하는 자의 훤화가 항상 상달하나이다 - 문자적 의미로는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인데, 이 상태로는 온전한 문장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앞 문구의 '잊지 마소서'가 두 개의 목적절, 즉 '주의 대적의 소리'와 '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갖는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본절은 '주의 대적의 소리와 계속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잊지 마소서', 혹은 '주의 대적의 소리를 잊지 마시고 또한계속 일고 있는 대적의 훤화를 잊지 마소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NIV. Weiser). 특히후자는 이스라엘을 정복하여 극도로 교만해진 바벨론을 징벌해주기를 바라는 바라는간절한 염원이 동의적 대구법 방식으로 잘 표현되고 있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애가(哀歌)와 같은 애처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본시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 엄청난 참상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탄원시로서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 중심부에 위치한 성전의 파괴를 목격한 시인의 슬픔을 묘사하고 있다. 본시는 저자로 표제에 언급되고 있는 아삽은 다윗 시대의 성가대 악장이었던 개인을 지칭한다기보다는 그의 후손까지를 포함하는 한 족속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스2:41;3:10;느7:44;11:22). 아삽의 후손들은 이사야 시대(대하29:30)를 거쳐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에스라, 느헤미야 시대까지(스2:4;느7:44)이어져 내려왔다. 본시는 생동감 있는 표현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언적 해명을 특성으로 하는 아삽 가문의 전형적인 시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 시의 저작 연대와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즉 1마카비 시대의 수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에 의한 예루살렘 황폐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견해(B. C. 168-165년)와 2 느부갓네살 왕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과 바벨론 포로시기에 기록되었다는 견해(B. C.568-5년), 그리고 3 이집트의 시삭(Shishnk,B.C. 940-915년)이 이스라엘 을 침략할 때 쓰여졌다는 주장(왕상14:25,26)이 있다. 이중에서 첫째 견해는 본시에 묘사되어 있는 상황이 마카비 시대와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다. 당시 성전이 수리아에 의해 더럽혀졌지만 큰 손상은 없었다. 또한 세 번째 학설은 성경에 시삭이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거나 불살랐다는 기록이 없으므로 거절된다. 그의 침범은 단순한 습격이었고 성전의 보화를 빼앗아 갔을 뿐이었다(왕상 14:25, 26; 대하 12:2-12). 그러므로 우리는 두 번째 입장에 의거하여 본시가 느부갓네살의 유다 정복 시에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본시에 나타난 유다의 비참한 상태는 B. C.586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의 상태와 흡사하다. 느부갓네살과 갈대아 군인들에 의한 침략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 침입 시에는 어린 왕 여호야긴을 사로잡고, 보물 등을 약탈하며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다(왕하24:12-16). 2차 침입 시에는 예루살렘이 완전히 멸망하여 성전, 궁전, 백성들의 집이 불에 탔고 도시 성벽이 파괴되고 성전의 보물들이 약탈당했다(왕하25:8-21;렘39:8-10). 이어 3차 침입 시엔 기술자등 약4,600여 명을 포로로 끌고 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택하신 언약 백성임에도 불구하고 성전은 황폐되었고 그 땅은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잊으셨거나 버리신 것처럼 보이는 암담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슬픔을 통탄하며 극심한 고통과 수모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고 있다.
또한 본시의 유형은 마스길, 즉 교훈적인 노래라는 표제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고통 속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교훈하기 위해 쓰여진 것으로서 비참한 상태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시'(prayer psalm)이다. 시인은 대적들의 만행을 반복적으로 고발하면서 탄식과 호소로 일관하고 있다. 이처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시인이 낙망하지 않고 계속 간구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신뢰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본시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시인은 먼저 자신들의 현재의
비극적 상황을 낱낱이 고발하며 불평 어린 탄식을 노래한다(1-11절). 그러나 시인은 곧 과거에 이스라엘에게 역사 하셨던 하나님을 회상하며 그분이 우주의 왕으로서 지금도 역사 하심을 선포한다(12-17절). 그리고 이러한 신앙고백에 힘입어 시인은 구원을 향해 열렬히 간구함으로써 본시를 끝맺는다(18-23절).
이제 이러한 내용의 본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각각의 내용적 특성을 고찰함과 동시에 주도적 사상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1. 이스라엘의 재난과 성도의 탄식(74:1-11)
이스라엘의 파멸에 대한 슬픔과 절망 어린 탄식이 잘 나타나고 있는 본연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관점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당하고 있는 재난의 근본적인 성격과 결과를 파악하고 있다. 시인은 파괴의 실상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이스라엘이 본래 주의 소유된 백성이므로 속히 구해 달라고 간절히 탄원하고 있다.
1 재난의 성격(1-3절):시인은 자신들이 당한 모든 재난들이 힘이 없기 대문이거나 우연히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진노의 손에 의해서 임한 것임을 깨닫고 하나님을 향해 그의 눈을 든다. 언약 백성에게 임한 엄청난 환난은 자연 발생적인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에 의한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현재 직면하고 있는 재난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떠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고 있다(느9:17;사54:8;눅6:35;딛3:4-7). 사실 문제의 진정한 원인을 발견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시인은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게 임한 환난의 성격을 정확히 파악함으로써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한다.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은 결코 의미 없이 발생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은밀하고 신비스런 섭리 안에서 고난이라는 회초리를 사용하여 성도의 잘못된 부분을 징계하신다(히12:5-11).
당면한 고통의 원인을 발견한 시인은 탄식과 불평 속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자녀로 택해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잊지 않는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는 가운데서도 시인은 언약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가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하게 되고, 이것을 발판으로 그는 의문과 불평 어린 탄식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의 탄식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원망스러운 태도의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정의감의 발로이다. 시인이 하나님을 향해 전적으로 구원을 요청하며 소망을 가지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과 은혜를 기억하고 신뢰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극심한 고난에 처하게 될 때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함으로써 낙망하지 않고 담대한 용기를 소유할 수 있게 된다.
2 재난의 현실에 대한 고발(4-8절):재난에 대한 서언적 애도와 탄식이 끝난 후에 시인은 진노하시지만 언약을 성실하게 수행하시는 하나님께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비극을 낱낱이 고발한다. 이렇게 상세한 보고를 드리는 이유는 하나님이 몰라서 알려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는 애절한 탄식이다. 시인은 원수들에 의해 자행된 성전의 파괴와 약탈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묘사한다. 바벨론 군인들은 정교한 기술로 다듬어진 아름다운 성전을 침범하여 도끼를 들어 살림을 베는 사람들과 같이 마구 하나님의 전을 훼파하였고(5,6절)모든 귀한 것들을 약탈하고 심지어는 거룩한 성전에 불을 질러 버렸다(7절;왕하25:9,10;애2:9). 뿐만 아니라 서로를 충동질하여 주의 이름을 부르고 가르치는 이스라엘 전역의 모든 회당까지 불살랐다. 이렇게 원수들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엄숙하고 거룩한 성전을 철저히 짓밟고 모독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찬양과 경배 대신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와 바벨론 군대의 시끄러운 갑옷 소리로 가득 차 있다. 더욱이 원수들은 성전에다가 자기들의 기(旗)를 세워 하나님까지도 이겼다고 하는 교만한 태도를 서슴지 않고 드러냄으로 주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능욕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목격하면서 시인은 뼈가 에이는 심각한 고통을 겪는다(10절). 시인은 자신이 당하는 고통보다 하나님의 이름이 악한 자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큰 아픔과 괴로움을 느낀다. 시인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참담한 아름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인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한 탄식 어린 고발로 분출되고 있다. 이처럼 자신의 고난보다도 하나님께서 오만한 자들에게 멸시 당하는 현실을 더욱 슬퍼하고 분노하는 태도는 경건한 성도의 결정적 증표라
고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도 이러한 심정으로 거룩한 분노를 느끼며 성전을 청결케 하셨던 것이다(요2:13-17).
3 재난으로 말미암은 탄식(9-11절):성전의 철저한 파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모독 받는 현실에 직면한 시인은 현재 어떠한 소망과 위로의 실마리도 발견할 수 없다는 절망에 빠져 괴로워한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전에도 모독적인 대적의 표적만이 서 있을 뿐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한 어떤 표적도 보이지 않는다(9절). 현재의 재난을 설명해 줄 선지자도, 지혜자로 없고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말해 줄 사람도 없다. 결국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괴로움을 없고 이것이 언제까지 계속될 지 말해 줄 사람도 없다. 결국 경건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괴로움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지 못하는 환경 때문에 그 괴로움이 더욱 가중되고 있을 뿐이었다. 시인은 자기들이 심히 두꺼운 흑암으로 봉쇄되어 단 한줄기의 빛도 발견할 수 없음을 탄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위로를 나누어주는 직분이 선지자들에게 위임되었다는 사실과 선지자들은 슬픔으로 닫혀진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소망으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용기를 얻게 해준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비록 대부분 선지자들의 메시지가 심판과 책망에 대한 것이었지만, 백성들이 겸손해질 때는 즉시 위로의 말을 전파하였다(렘30:1-11;암9:7-15).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연단하시는 손길 아래 있을 경우,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에 우리 눈을 고정시켜야 인내와 소망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암담한 현실 속에서 한줄기 소망도 발견하지 못한 시인은 이제 불평과 절망어린 탄식으로 나아간다(10,11절). 시인은 "언제까지", "어찌하여"라는 말을 그의 시의 서두(1절)에서와 같이 다시금 반복하며 하나님께 불만섞인 반문을 던진다. 그러나 그의 반문 속에는 여전히 이 문제의 해결자가 하나님이라는 확신이 어려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현 상황에 대해 방관하시며 침묵하시지 말아 달라고 간절히 애원한다. 여기서 시인은 철저하게 이스라엘의 재난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이해함으로써 어느 누구도 소망을 말해 주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스스로 해답을 모색해 가는 처절한 싸움을 하고 있다. 시인의 마음은 회의와 슬픔과 불평으로 얼룩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현실적 번민을 한낱 자기 연민의 탄식이 아닌 긍휼을 구하는 기도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는 비록 하나님의 진노로 자신들이 재난을 당하지만 그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이 대적들에 의해 짓밟히고 있음을 낱낱이 고백함으로써 하나님께 구원을 향한 탄원을 드린다. 우리는 이러한 유형의 기도를, 모세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모면키 위해 드린 중보 기도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출32:7-4;민14:13-20).
2.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신 왕에 대한 회고(74:12-17)
앞에서 현재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탄식으로 울부짖던 시인은 이제 분위기를 전환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속자이시며 동시에 우주의 왕이 되심을 선포한다. 불평과 슬픔으로 가득 찼던 우울한 어조가 갑자기 찬양과 선포로 바뀌고 현재의 재난에 집착했던 시각은 과거의 신실하신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다. 시인은 본연에서 먼저 이스라엘의 구속자되신 하나님의 역사를 선포한 수(13-15절)더 나아가 창조주요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한다(16,17절).
1 이스라엘의 구원자 되심을 선포(13-15절):시인은 다시 한번 왕되신 하나님과 구원의 하나님을 언급함으로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삼하7:16). 그리고 과거 조상들에게 베푸셨던 하나님과 능력과 보호와 인도하심을 출애굽 사건과 광야에서의 사건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은 언제나 출애굽의 역사와 더불어 언급된다. 출애굽 사건은 단순한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신앙 고백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신26:5-9). 그런데 후에 이스라엘의 신앙 고백
은 출애굽뿐만 아니라 바벨론에서 구원해 내신 제 2의 출애굽 사건으로 발전하게 된다(렘23:7,8). 그리고 신약에 와서 이것은 메시야, 즉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로 발전된다(렘31:1-33). 여하튼 여기서 시인에 의해 묘사되는 출애굽 사건은 놀라운 기적과 능력의 역사로 언급된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사를 회고하며 그 하나님께서 곧 자신의 신앙의 대상이란 사실을 자각하고 새로운 용기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처럼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베푸신 놀라운 구원의 사역이 세상의 어떤 유혹 속에서도 결코 성도들을 요동하지 않도록 만드는 참된 신앙의 근거요 기초가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와 물을 공급해 주신 하나님께서는 현재 위기에 처한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증하
는 대상이 된다. 이처럼 현재의 어떤 표적도 없음을 탄식하던 시인은 이제 과거의 구속 경험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신실한 구속자임을 확신하고 찬양하였다. 더 나아가 그분이 지금도 여전히 우주를 통치하고 계심을 고백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2 우주의 왕되심을 선포함(16,17절):시인은 하나님께서 전능자이심을 고백한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능력자이심을 선포한 이후에 더 나아가 낮과 밤, 빛과 해, 그리고 땅의 경계를 정하시고 섭리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모든 우주 만물을 통치하고 계신다. 사실 열방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들이 땅을 차지하고 사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총의 결과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역사의 흥망 성쇠를 결정하는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결국 시인은 이스라엘에게 끊임없는 자비를 베푸시고 위로와 격려가 되셨던 그 하나님께서 단순히 한 민족의 신이 아니라 온 인류를 주관하시는 우주의 왕이시라는 인식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시인은 본 단락에서 자기의 생각을 바꾸어 보다 적극적인 믿음으로 나아가는 전환점을 마련하고 있다. 그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체험한 첫사랑을 기억하면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우리는 여기서 모든 불평, 의심, 슬픔을 초월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은총 아래 거할 때 반드시 자신의 문제를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인은 암담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와 그의 사역의 증거들을 애써 기억함으로써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택하신 백성의 왕이요 보호자이심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는 기도 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상황에 처할 때에도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을 악의 세력에서 구원하시며 계속 보호하시는 분임을 고백해야 한다(18:2;딤후1:12;4:17,18). 아울러 하나님을 믿은 인생은 언제나 최선의 길로 인도된다는 사실을 확신해야 할 것이다(5:8;25:5;사48:17).
3. 이스라엘의 구원을 향한 기도(74:18-23)
과거에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을 명상하면서 탄식과 절망에서 벗어난 시인은 이제 보다 새롭고 명랑하며 과감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한다.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들과의 관계를 더욱 자세히 묘사함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대적들의 오만 불손한 태도를 기술함으로써 자신의 기도를 힘있게 전개해 나가고 있다. 시인은 먼저 자신들의 순결함과 연약함을 하나님께 고백한다(19,20절). 이스라엘 백성은 주님의 멧비둘기요 가난한 자요 궁핍한 자로서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요청되는 존재들임을 고백하며 긍휼을 간구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자신들이 언약 백성임을 다시 한번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호소하고 있다. 시인의 이러한 자세는 언제나 요청되는 신자의 자세이다. 이처럼 겸손한 태도로 하나님의 도움을 간청할 때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다(벧전5:5,6).
시인은 이러한 간구와 더불어 대적들이 하나님을 비방하고 능욕한다고 말하면서 이스라엘에 대한 침략이 결국 하나님께 대한 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 소극적으로 가만히 계실 때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일어나셔야 할 때라고 간언(諫言)한다. 시인은 어려움을 당하는 상황에서 그것이 자신에 대한 대적이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께 마지막 간구를 드림으로써 끝을 맺는다(21-23절).
다른 시편과 달리 승리와 감사의 고백으로 끝나지 않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시인의 계속되는 간구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시인은 상황이 전혀 호전되지 않는 위기 상황 속에서도 계속해서 인내하며 기도하는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시인의 자세를 통하여 고난에 처해 있는 성도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를 몇 가지 깨달을 수 있다.
1 고통 속에서 먼저 하나님의 관점을 깨달아야 한다. 신자가 받는 어려움은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기억하고 고난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2 신자는 어려움을 당할 때 자기 연민에 빠져 탄식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멸시받는 사실로 인하여 탄식해야 한다.
3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고 그동안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함으로 용기를 가짐과 동시에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솔직히 고백하고 긍휼을 구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4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되는 인내의 기도여야 한다.
본시에서 우리는 끊임없는 갈등 속에서도 자신있게 주어진 기도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시인의 진지한 노력을 발견하게 된다. 성도의 기도는 고독한 영적 싸움이요 전투이다. 우리는 언제나 변치 않는 용기를 가지고 기도를 하지 않는 죄를 범치 말아야 할 것이다(엡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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