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 이 말씀은 주의 영광을 위해 우리를 구원해 달라는 강렬한 호소이다. 영광은 당연히 하나님께 돌려져야 하며, 따라서 영광이 하나님께 돌려지기 위해서는 주의 백성이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편 '영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보드'(* )는 원래 '풍부함', '부유함', '영예로움', '영광'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욥은 자신의 재물과 지위가 하루아침에 박탈당한 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나의 '영광'을 벗기시며 나의 면류관을 머리에서 취하시고"(욥 19:9). 또한 웃시야 왕이 여호와의 전에서 분향하려고 했을 때 제사장 아사랴는 그의 교만된 행동을 이렇게 책망하였다. "왕이 범죄하였으니 하나님 여호와께 '영광'을 얻지 못하리이다"(대하 26:18). 한편, 모든 영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로 돌려져야 한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으로 오실 메시야를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한다. "나는 여호와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 42:8).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 하나님의 백성이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면서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것도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시인은 앞 문구의 반어법적인 비탄의 호소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호소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선택한 이상 결코 버리시는 일이 없다고 믿은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은 모든 성도들의 신앙의 근거이며 모든 간구의 디딤돌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쉠'(* )은 '명성'(창 11:4)이나 지칭하는 대상에 대한 '실체'(사 60:9)를 가리키기도 한다.
=====115:2
어찌하여 열방으로 저희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 이 구절의 문자적 의미는 '저희들의 하나님이 지금 어디 있느냐고 왜 열방들이 말합니까 ?'이다. 그러나 '어찌하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마'(* )는 헬라어 '메포테'(* )로 번역되기도 하는데, 이럴 경우는 '...하지 않도'(lest)에 가까운 뜻을 가진다. 창 27:45에는 에서를 속이고 야곱이 축복받은 후 리브가가 야곱에게 하는 말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네 형의 분노가 풀려...잊어버리든 내가 곧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여기서 '어찌'에 해당하는 '라마'가 70인역(LXX)에서는 '메포테'로 번역되었는데, 이는 '하루에 너희 둘을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 네 형을 피해 라반의 집에 가 있으라'는 의미로 표현된 것이다. 따라서 본문의 '라마'도 '메포테'로 번역하면 '저희 하나님이 어디 있으냐고 말하지 않도록 우리를 구원하소서'란 뜻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열방'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임'(* )은 '민족', '백성'이란 뜻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때도 쓰이나(렘 5:9) 주로 이방 백성들을 가리킬 때 쓰인다(대상 14:17).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 이는 '너희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는 이방인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을 일정한 지역에 한정시켜 지역신으로 본다거나 하나님의 무한성을 반대하는 뜻으로 쓰인 것이 아니다. 다음 문구에서도 분명히 제시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인간처럼 어떤 틀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 우주를 통치하시며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방해받지 않는다. 하나님이 하늘에 계신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뜻을 나타내며 온 세상이 하나님의 뜻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 하나님은 주권적 의지에 따라 자유로이 심판도 행하시며 구원도 베푸신다는 것이다. 때로는 하나님의 개입하시는 손길이 지체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이 경우마저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달린 것이다. 하나님은 순식간에 모든 상황을 전격적으로 뒤바꿔버릴 수 있는 분이지만 때에 따라서는 가장 적절한 시기까지 침묵하기도 하신다(Calvin).
=====115: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 여기서 '우상'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차빔'(* )은 '제작하다', '만들다'의 뜻인 '아차브'(* )의 복수로서 항상 복수로만 쓰인다. 사람이 자기의 손으로 만든 것을 자기들의 신이라고 섬긴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것임을 물론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극히 불경스러운 일이다. 한편, 본절 이하에 묘사된 우상에 관한 설명들은 135:15-18;사 44:9-20;46:6, 7;렘 10:1-9;합 2:18, 19 등의 내용과 유사하다.
사람의 수공물이라 - 이 말은 문자적으로는 '사람의 손의 작품'이란 뜻이다(the work of men's hands, KJV, RSV).
=====115: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숭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며 최소한의 신성(神性) 지각 능력조차 갖추고 있지 못함을 지적한 표현이다. 비록 사람들이 금과 은을 귀중한 금속으로 여기고 있긴 하지만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그것은 신(神)이 될 수가 없다. 여기서 시인은 이들 귀금속의 가치를 떨어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에서 존경심과 어떤 능력을 찾는 사람들의 어리석과 완악한 태도를 지적하고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이 말씀은 앞 문구와 같이 우상의 무능을 지적한 것으로서 그 당시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우상에 각 지체를 만들어 놓았던 것을 연상시킨다. 한편,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에게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를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이렇게 지적한다. "그것이 갈린 기둥 같아서 말도 못하며 걸어 다니지도 못하므로 사람에게 메임을 입느니라 그것이 화를 주거나 복을 주지 못하나니 너희는 두려워 말라 하셨느니라"(렘 10:5).
=====115: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이같이 허황된 물건을 만들어 놓고서는 거기에 어떤 도움을 구하고 복을 빌지만 이는 다 헛된 것이다. 모든 생명과 능력 그리고 길흉 화복(吉凶禍福)은 다 하나님의 주관하에 있을 뿐이다.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 어거스틴은 '신의 도성'에서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와 관련된 주술적 의식에 대해 지적한 바 있다. 즉, 이방인들은 의식(儀式)을 통해 우상이 신(神)과 영적으로 결합되며 생명을 부여받아 신의 특성을 갖게 된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창세기에는 라반이 달아난 야곱을 뒤쫓아와서 '자기의 신'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윽박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창 31:30).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길을 방황할 때에 백성들은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서 그것이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외쳤던 일이 있다. 이러한 모든 일은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 무지의 소치이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불순종의 행위로서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다.
=====115: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겨 그의 계명을 지키는 이유는 생명이 하나님께 속해 있고 또 하나님께는 우리를 도와줄 인자와 능력이 풍성하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걷지도 못하며 감각도 없는 지극히 무기력한 무생물에 불과한 형상들에게 자신의 부족한 것을 간구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하반국 선지자는 유다의 죄악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새긴 우상은 그 새겨 만든 자에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스승리라...나더러 깨라 하면 말하지 못하는 돌더러 일어나라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그것이 교훈을 베풀겠느냐 보라 이는 금과 은으로 입힌 것인즉 그 속에는 생기가 도무지 없느니라"(합 2:18, 19).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 5절에는 우상이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한다는 내용이 언급되었다. 아마도 이것은 소리의 종류가 본문의 다른 것이었던 것 같다. 즉,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단어를 구사하여 의사 소통하는 것을 뜻하는 반면에, 본문의 목구멍으로 소리를 낸다는 말은 애증(愛憎)이라든지 기쁨이나 슬픔의 기본적인 감정을 나타낼 수 있는 단순한 소리를 뜻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은 최소한 짐승이라도 낼 수 있는 최소한의 반응도 나타낼 수 없는 이방신들의 허황된 모습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D. N. Freedman).
=====115: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 이는 우상을 섬기는 자는 그들이 섬기는 나무 기둥이나 돌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무기력하고 우매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이성과 판단력을 지니고 있어 최소한 생물과 무생물 정도는 누구라도 구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들 우상 숭배자들은 자신의 손으로 만든 제품을 하나님으로 섬길 정도로 미련하여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한 것이다.
=====115:9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에즈람 우마기남) - 이는 '그들의 도움과 그들의 방패'라는 뜻으로서 본절 전반절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직접 권명하다가, 하반절에 와서는 갑작스럽게 3인칭 복수형으로서 이스라엘을 지칭하고 있다. 아마도 전반절에서는 큰소리로 이스라엘을 향해 말한 반면, 하반절에서는 자그마한 소리의 독백투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Alexander).
=====115:10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 앞 구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향하여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촉구하였으며, 여기서는 아론의 집을 향하여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다음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이런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하나님은 레위인들을 특별하게 구별하사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으며, 그중에서 아론의 집은 제사장으로 세우사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게 하셨다. 따라서 이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믿음의 본을 보여야 했던 것이다.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똑같은 말이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다. 여기서 '방패'에 해다하는 히브리어 '마기남'(* )은 '마겐'(* )의 복수형으로서 창 15:1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보호자임을 약속하실 때 이 말을 흔히 사용하고 있는데, 아브람이 롯을 구한 뒤 하나님은 그에게 나타나 이렇게 말씀하셨다:"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115:11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 이 말의 문자적 번역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여호와를 의지하라'이다.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신자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말이긴 하지만 전후 문맥상 이것은 각 개체나 소그룹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시인은 점층법을 사요하여 9절에서는 이스라엘 전체를 언급하였고, 10절에서는 그 일부인 특수 계층을 지칭하는 듯하기 때문이다(Alexander). 한편 '경외하는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이르에'(* )는 '두려워하다', '경외하다'란 뜻의 동사 '야레'(* )에서 출(34:29, 30;렘 3:8) 파생된 명사이다.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 - 단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다. 예수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된 것을 내세웠으나 그들은 조상들의 바른 신앙에서 벗어나 있었으며 하나님이 돌들을 가지고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을 망각하였다(마 3:9). 하나님은 아브라함 자손의 무조건적인 도움과 방패가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115:12
여화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 여기서부터는 오직 여호와만 의지하고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주어지기를 기원하고 또 확신하는 내용이 시작된다(15절까지). 많은 주석가들은 이 문구를 과거(혹은 현재 완료) 시제로 해석하여 지난 날 하나님께서 베푸신 여러 이적과 자비를 회고하며 앞으로 동일한 축복이 있기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이어진다고 본다(The Lord hath been mindful of us, KJV). 그리고 '기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카르'(* )는 시편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말로서 사람을 주어로 가질 때는 '과거의 사건이나 사람을 마음속에 다시 떠올린다'는 뜻이다(욥 11:16). 그리고 이 동사가 하나님을 주어로 취할 경우는 흔히 '고난받는 자기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돌아본다'는 의미로 쓰인다(애 3:19).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트'(* )는 거처로서의 집뿐만 아니라 본문에서처럼 가문이나 가족을 가리키기도 한다. 소돔 성을 멸망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그로 그 자식과 권속에 명하여 여호와의 도를 지켜 의와 공도(公道)를 행하게 하려고 그를 택하였나니"(창 18:19)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에서 '베트'는 '권속'으로 번역되었다.
=====115:13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 하나님은 경외하는 자라면 가장 연약하고 멸시를 당하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간과하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보호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으시므로 인간적인 관점에서 낮고 천함이나 부하고 존귀함이 은혜받는 척도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한편 '작은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카톤'(* )은 '보잘것 없는 자', '중요하지 않은 사물'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아모스 선지자는 황충이 땅의 풀을 다 뜯어먹어버리는 이상을 보고서 이스라엘 족속이 보잘것 없는 연약한 민족임을 호소하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암 7:2). 그리고 '큰 자'에 해당하는 '가돌'(* )은 숫적.양적으로 많은 것이나 위대한 인물을 가리키는 데 쓰이기도 한다(창 4:13;삼상 25:2).
=====115:14
여호와께서 너희 곧 너희와 또 너희 자손을 더욱 번창케 하시기를 원하노라 -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위에 너희 위에 그리고 너희 아들들 위에 더하시리라'이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사람들을 축복하시면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고 하셨다. 하나님의 축복은 숫적인 증가나 재산과 명예의 증가 외에 영적인 축복도 포함한다. 또한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신령한 지혜가 증가하며 은혜와 기쁨도 증가한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후손에게도 하나님의 축복이 주어질 것임을 노래하고 있다.
=====115:15
너희를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이유 중에 하나는 하나님이 천지를 지으시고 그 안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란 사실이다. 예수께서도 사람을 두려워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고 하셨다(마 10:26 이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는 모든 만물을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떨게 된다(잠 28:1). 그리고 천지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복을 받는 자는 부러워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한편 본문의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 사용된 동사는 '아사'(* )인데, 창 1:1의 '창조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바라'(* )였다. '바라'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냄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이는 반면, 본문의 '아사'는 하나님이 자기 피조물에 대해 주권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유효 적절하게 운영해 나가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모세는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규례와 명령을 지킬 것을 당부하면서 그 이유로서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제시하였는데, 여기서도 '아사'가 스였다. "너희가 여호와 '행하신' 이 모든 큰 일을 목도하였느니라"(신 11:7). 하나님은 천하 모든 것의 주인으로서 이를 당신의 뜻대로 운영해 가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복을 받는 자는 모든 것이 형통할 것이며, 설령 고난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조차 그에게는 궁극적인 유익을 가져다 줄 것이다.
=====115:16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 하솨마임 솨마임 리화)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 하늘들, 하늘들은 여호와께 속했다'이다. 이는 해석하기에 따라 두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첫째 한글 개역 성경과 같은 '하늘은 여호와께 속한 하늘이다'(The heavens are the Lord's heavens, RSV)란 뜻과, 둘째 '하늘의 하늘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다'(The highest heavens belong to the Lord, NIV)란 뜻이 그것이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등 많은 고대 역본들은 이를 두 번째 의미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148:4의 '쉬메이 하솨마임'이 '하늘의 하늘'로 번역된 것과 비교했을 때도 후자의 번역은 타당성이 있다. 이런 번역을 취할 경우 본문은 하나님의 처소가 참으로 무한하고 광대함을 노래한 것이다(3절 주석 참조).
땅은 인생에게 주셨도다 - 하늘이 하나님의 것이고 땅은 사람의 것으로 해석하여 이 구절을 소유의 개념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인간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을 노래한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과 행복은 인간들을 위해 마련해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런 것들을 향유하고 있는 자들은 그것을 자신의 공로와 노력으로 돌려서는 안 되고 오히려 감사 찬송의 동기가 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다. 한편 어떤 주석가는 '주셨도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탄'(* )을 '맡기셨다', '위임하셨다'라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의 근거로는 신 10:14의 말씀이 제시되고 있다. 거기서 모세는 마음의 할례를 촉구하면서 이렇게 말했다:"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따라서 사람은 땅에 대한 소유권을 이전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참소유자이신 하나님을 위해 땅을 관리.보관할 책임과 권리를 위임받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히브리어 '나탄'에 내포된 '위임'의 개념을 더 설명하자면 창 39:4의 말씀을 들 수 있다. 거기서는 바로의 시위 대장 보디발이 가사 일을 요셉에게 위임하는 내용이 이 용어로써 묘사되어 있다.
=====115:17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 이것은 죽은 이후에는 영적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 땅에 살고 있는 동안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늘 감사하며 찬양하라는 권고인 것이다.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 - 이 말의 문자적 의미는 '침묵으로 내려가는 자 모두도 못한다'이다. 여기서 '침묵'은 말할 것도 없이 '음부' 곧 '스올'을 가리킨다. 따라서 산 자는 살았을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며, 인생의 밤이 오기 전에 우리의 해야 할 바를 다해야 하는 것이다. 본문의 '적막'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두마'(* )로서 '침묵', '정적', 또는 상징적으로 '죽음'을 뜻한다. 한편, 이사야 21:11에는 '두마에 관한 경고'란 말이 등장한다. 이때 '두마'는 에돔의 다른 이름인 듯하나, 이어서 계속되는 에돔에 관한 경고의 예언을 살펴보면 '두마'가 고통과 암울함을 암시하는 밤과 관련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15:18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 이를 다른 각도에서 보면 하나님의 백성이 영원히 건재(健在)할 것임을 지적한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영원히 송축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전제로 하는 것이며 또한 살아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17절). 반대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는 삶은 설령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지 않으시고 멸망할 사람들 틈에 그대로 내버려두셨다면 이 세상은 완전히 멸망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홍수 가운데서 노아를 구원하셨으며 그를 통하여 인류 보존과 생육.번성의 축복을 다시 주셨고, 아브라함을 선택하사 복의 근원이 되게 하셨다. 이와같이 세상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영원히 살아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본시는 이방 원수들의 위협을 받는 극한상황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돌리는
'찬양시'이다. 시인은 여기서 악의세력들이 교만하고 위협적으로 행동하지라도 결코두
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높이도록 요청하고 있다. 본시의 역사적 상황에 대해서 어떤
학자는 히스기야왕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앗수르 군대들을 물리친 사실에 대해 감사하
고 찬미하는 시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스라엘이 어떤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음으로 구원을 받은 후 저술되었음은 분명하다. 시인
은 이스라엘의 승리가 자신들의 어떤 의(義)에 기인된 것이 아니라 오직하나님의 긍휼
과 사랑에 근거함을 고백한다. 특히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의 주관자이심을 묘사하면서
무능한 우상들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극명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처럼 천지에 홀로 뛰어든 하나님만 영원한 찬송의 대상이 되심을 노래한 본시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때에 주로 불리워진 할렐시
(113-118편) 중의 하나이다. 주로 성전 예배를 드릴 때에 합창대의 찬양용으로 사용되
었는데, 제사장등의 선창자가 시의 앞 소절을 부르면 윗 소절을 찬양대가 화답하여 부
르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본시의 내용을 이러한 형식에 따라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
| 분 류 | 찬양의 주체 | 내 용 |
+-----------+-----------------+------------------------------------+
| 1-8절 | 모든 백성 |이방인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의 도움|
| | |을 의지하며 소망과 믿음을 가짐 |
+-----------+-----------------+------------------------------------+
| 9-11절 | 제사장과 백성 |선창자가 '...의지하라'고 외치면 백성|
| | |들이 응답함 |
+-----------+-----------------+------------------------------------+
| 12,13절 | 모든 백성 | 합 창 |
+-----------+-----------------+------------------------------------+
| 14-16절 | 제사장 | 응 답 |
+-----------+-----------------+------------------------------------+
| 17,18절 | 모든 백성 | 마무리 찬양 |
+-----------+-----------------+------------------------------------+
또한 본시는 전체적으로 강한 어조의 문체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은 이방과의 적
대적인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인한 승리의 기쁨을 좀더 감동적으로 전달하
기 위한 표현 기법이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언약 백성은
적대적인 세력에 대하여 분명히 승리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한편 본시의 운율을 참고하여 볼 때 1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릴 것을 요구함
(1-3절), 2 무능한 우상에 대한 묘사(4-8절), 3 구원자가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의뢰
(9-11절), 4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임하는 축복(12-18절)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제 이러한 내용의 본시를 각 단락으로 나누어 각각의 내용적 특성을 고찰해 보고
각 부분에 들어있는 핵심 사상에 대해 분석해 보도록 한다.
첫째, 시인은 먼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리도록 촉구하고 있다(1-3절).인간은
결코 스스로에게 영광을 돌려서는 안 된다(1절). 인간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을
때에만 선한일을 할 수 있다. 인간의 모든 자질이나 능력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시인은 언제나 여호와의 이름만 높이며 찬양하도록 권유하고 있는 것
이다.
사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는 기도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기도이다. 주님께서 가
르쳐 주신 기도문도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고 있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기보다는 나의 영광을, 나의 유
익을 더 구하는 데 열중하지 않았는가? 이제 우리는 자신의 이익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시하는 신앙 태도를 확립해야 한다(요12:27, 28). 의롭지 못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는 일을최우선 과제로 인식해야 할 것
이다.
둘째, 시인은 이제영광스러운 하나님과 대조하여 우상의 무능함과 무가치함에 대하
여 묘사한다(4-8절). 우상은 말하지도 못하며, 보지 못하며,등지 못하며, 냄새를 맡지
도 못하며, 이야기 할 수도 없다(135:15-18). 우상은 생명이나 감각이 없는 허무한 형
상으로서 전적으로 무기력하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으며,
인간에게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하니님의 진노와 심판에 처하게 될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우상을 의지하는 우매함과 과오에 대하여 적나라하게 설명함으로써
성도들의 믿음을 확고히하며 하나님 의지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시인은 열방의 신들을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으로 간주함으로써 간접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계속
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숭배의 대상은 대체로 해와 달 같은 자연물이거나 사람이 금이
나 은으로 만든 것이었다. 특히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우상은 인간의 헛된 상상력의
산물이며 사람의 수공물에 불과하다(호8:6;행19:26). 이렇게 만들어진 우상이 어떻게
신성을 지니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엘리야 시대 때 바알을 섬기는 무리가 그 앞에서 열
심히 그들의 신(神)들의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던 자도 없었던
일이 있었다(왕상18:26). 자기를 섬기는 무리가 그앞에 나아와 부복하여도 '보지 못하
는' 우상이 그들의 고통과 궁핍을 돌아볼 리가 없다.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듣지
못하며', 진하고 달콤한 향을 피워도 우상은 냄새를 '맡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자기
를 위하여 예배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은 고사하고 귀한 제물을 바쳐도 '만지지
못하며', 궁핍한 지경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고 손을 뻗지도 못한다. 아무리 다급한 목
소리로 호소해 보아도 '걷지 못하는' 우상이 움직여 구원해 줄 리가 없다. 더욱이 '목
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니' 생명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상의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보이지 않는것'에 대한 불신앙과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는 인간
의 근시안적인 형태를 여실히 발견할 수 있다.
셋째로, 시인은 다시 한번 나님만을 믿고 의지하며 절대로 흔들리지 말도록 권고
한다(9-11절), 앞에서(4-8절) 우상의 특성들을 나열하면서 생명이 없는 우상을 섬기는
무리들의 어리석음과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만 섬기는 지혜로움을 극명하게 대조시킨
시인은 이제 제사장과 백성의 교창(交唱)형식으로 하나님만이 유일한 도움이요 방패라
고 역설한다.
이러한 설명을 위해 시인은먼저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일반
적인 교훈을 하고(9절) 이어서 제사장의 직분을 맡아 수고하는 '아론의 집'에 대해서
말한 후(10절),더 나아가서 이스라엘의 후손은 아니지만 하나님을 믿고 개종한 이방인
들을 포함한 모든 여호와를 경외하는 무리들에게 권면하고 있다(11절). 이처럼 시인은
모든 백성들에게 차등을 두지 않고 공통적으로 하나님을 소망하며 은혜를 받도록 권고
한다(엡1:4-6).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은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으며 언제나 안전하게 보호됨을 부각시키며 모든 성도는 하나님께만 경배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성도는 어떠한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요동하지 말고 살아계신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넷째로, 시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에게 임하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14-18
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자손의 축복(14절)과 땅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16절;창
12:1-7)을 소유한다.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여호와를 경회하고 그축복의 대열에 들어가
기만 한다면 역시 하나님의 은혜의 수여자가 된다(수2:12,13). 이러한 축복은 사실 하
나님께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후에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1:28)는 문화 명령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신약적 관점에서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인정하고 따르는
영적 자녀의 생산과 마지막 날에 거하게 될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포함한다.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축복을 설명한 후에 시인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하
나님을 찬양하도록 유도하고 있다(17,18절). 하나님께 찬양을 드릴 수 없는 죽은 자들
의 적막함을 대조시켜, 천국의 시민이 된 우리가 하나님만을 끊임없이 찬양해야 함을
부각시키고 있다. 여기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께 대한교통이나 친교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적인 죽음과 함께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사망에 처해 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었는 기회가 완전히 상실되어 있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환기시키면서 생명이 있는 현재,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는 미래를 핑계로 삼아 찬양의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 지금 이 순간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104:33).
우리는 이상의 내용을 통해 이방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지속할 수 있었던 시인의 모습을 보면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기도와 신앙을 통하여 세상의 위협과 의문과독설을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맺고있는 성도는 세상의 미혹과 적대적인 이데올러기들에 능동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강한 저항력을 갖게 된다. 우리는 의의 궁극적인 최후 승리를 신뢰하며 어떠한 상황에 직면할지도 실망하지도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해야 할 것이다(롬5:2;8:38, 39;벧전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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