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92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92:1-3
찬양하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자메르'(* )는 '악기(특히 현악기)를 '연주하다' 혹은 '(그러한 악기를 동반하여) 노래하다'는 뜻으로 사용된다. 원문상으로는 '십현금, 비파, 수금' 등이 1-3절의 끝에 위치해 있으나 개역 성경에서 여기에 삽입한까닭은 바로 이 용어의 성격을 고려하였기 때문인 것 같다. 아침에...밤마다 - 이스라엘의 구전법(oral law)인 미쉬나(Mishna)에 의하면 본 시편은 안석일 아침에 부르도록 정해져 있는데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본 시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으로 불려지고 있다. 그날 아침 이 시편을 부르면서 이스라엘 예배 공동체는 먼저 어린양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께 드리는 존제(尊祭)로서 포도주를 부었다(민 28장). 반면, 저녁 제사 때에는 출 15 : 1-18과 민 21 : 17-20 중의 하나를 노래했다. 그리고 안식일을 제외한 나머지 6일 동안 성전에서 불렀던 노래로서는 첫쨋날 24편, 둘쨋날 48편, 셋쨋날 82편, 넷쨋날 94편, 다섯쨋날 81편, 여섯쨋날 93편 등이었다고 한다.
좋으니이다(* ,토브) - 본 용어의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란 쉽지 않으므로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규정해야 할것이다. 하나님은 창조 사역 때 피조 세계가 그의 의도와 목적에 부합됨을 보고 이를 '좋게'(* , 토브) 여기셨다(창 1 : 4, 10, 12).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지존자이신 그분의 계획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으로 이해된다( 33 : 1). 한편, 시편 기자의 정서적 측면으로 보면, 찬양을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확신에 따른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진정한 기쁨의 표현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Perowne). 본절에 나오는 악기들에 관해서는 서론 '시편과 음악'을 참조하라.

=====92:4
여호와여...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 원문에 보면 본 구절 서두에 '이유'를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따라서 본절은 1-3절에 언급된 바,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근거를 제공하는 부분(14, 15절)의 서론격에 헤당하는 샘이다.
주의 손의 행사 - 혹자는 본 시편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기념하는 안식일을 위한 시편인 사실을 강조하여 이를 창조사역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으로 국한시킨다. 그러나 본 구절의 용례를 볼 때(28 : 5 ;사 5 : 12) 그리고 본절 하반절이 다루고 있는 내용을 볼 때, 기자는 본 구절을 통하여 자신을 포함한 민족 전체의 구원 혹은 그 구원을 가져온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7-11절)를 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92:5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 이 표현 속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및 우주 통치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성, 인간의 이해를 넘는 그 계획의 방대함, 그리고 지혜의 깊이 등을 인식함과 아울러, 그 사실에 대한 인간의 망각을 탄식하는 심정이 함께 곁들어져 있다. '인간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사역을 잊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깊이를 헤아려 보는 일을 중단하는가! 얼마나 빨리 그분의 위대성을 헤아려 보기를 포기하는가'(Barnes) ! 본 구절과 유사한 표현으로는 106 : 2 ; 112 : 2 등이 있다.
주의 생각 - 인간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계획들 그리고 그 방법들을 뜻한다. 과거에 기자는 하나님의 섭리와 공의를 의심했던 적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그는 하나님의 계획들을 인간의 지혜로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며 전적으로 의지할 만한 분이라는사실을 깨닫고 있다(Anderson). 한편 주의 행사의 위대하심과 그 생각의 깊고 오묘함에 대해서는 다윗(40 : 5), 이사야(사 55 : 9), 바울(롬 11 : 23 )등도 찬탄한 바 있다.


=====92:6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 '우준한 자'의 히브리어는 '이쉬 바아르'(* )이며, '바아르' 그 자체만은 49 : 10 ; 73 : 22 ; 잠 12 : 1 ; 30 : 2 등에 나오지만 '이쉬 바아르'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만 나온다. '바아르'가 집합적 개념으로 쓰이고 '잔인하다'는 뜻의 히브리어 '바아르'에서 유래한다는 사실 때문에, 영역본KJV는 '이쉬 바아르'를 맹수처럼 '사나운 사람들'(brutish man)로 번역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시인은 기질적으로 사나운 사람에 관해서 혹은 어느 학자의 주장처럼 단순히 아이큐가 낮은 사람에 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호와 경외에 뿌리를 두는 참다운 지혜를 고의적으로 배척하는 사람에 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잠 1 : 7). 여호와 경외가 없어 참다운 지혜가 없는 자란, 이 세상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통치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자행자지(自行自止)하는 자를 뜻한다.
무지한 자(* , 케실) - 본 용어의 의미는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다른 시편의 문맥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14 : 1).


=====92:7
악인은 풀같이 생장하고 - '풀'(* ,에세브)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풀'이지만 창조시의 푸른 식물 곧 모든 수목들 그리고 각종 꽃들을 포함하는 용어이다. 팔레스틴 지방에서는 우기(雨期) 때 한차례 비가 내리고 나면 온 들이 푸른 나무들과 각종 꽃들로 아름다운 정원올 이루게 되는데, 본 기자는 바로 그 장면을 염두에두고서 묘사하고 있는 것 같다. 악인도 일시적으로는 비내린 뒤의 들의 상황과 같이 번성하여 평안할 수 있다. 그러나 의인과의 차이점은 그 시점에서 그들은 '하나님은 없다'(10 : 4)라고말할 뿐 아니라 '하나님 없이도 나는 결코 요동하지 않는다'(10 : 6)라고 교만을 부린다는 사실이다.
다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하리이다 - 이미 기자가 상반절에서 악인의 땅위에서의 번영 가능성을 언급했기 때문에 이 표현을 악인이 땅위에서 다시 망하리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숨어있는 표현으로 보면 진의(眞意)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여기에는 종말론적 성격이 숨어있는 것이 분명하다. 즉, 악인이 땅 위에서 번영하여 행복을 누리나 그 행복이 이생을 마친후에도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다. 악인도 이 땅 위에서 번영할 수 있다. 그 번영의 정도는 의인이 시험에 빠질 정도로 대단하게 나타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번영은 이 땅 위에서 뿐이요 결국 그들의 영혼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져 형벌을 받는다. 그 이유는 단 한가지, 의인과 달리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따라서 하나님과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73편).


=====92:8
지존하시니이다 - 여기서의 '지존'(* , 마롬)을 직역하면 '높은 곳에'인데, 하나님에 관한 묘사를 함에 있어서 이처럼 부사를 사용하기는 이곳이 처음이다. 70인역(LXX)은 '마롬'의 일상적인 용례와 같이 '높은 곳에'가 아닌 '높은 분'으로 번역하여 '높은 곳에 계시나이다'가 아니라 '높은 분이십니다'로 번역하였다. 본절은 비록 짧지만 시편에 담긴 모든 교리가 의존하는 위대한 중심 진리를 말하고 있다. '영원히 계시는 초월자 하나님', 이 사실이야말로 우리 성도들의 믿음의 대들보가 된다(Calvin).

=====92:9
여호와여 주의 원수 곧 주의 원수가 패망하리니...다 흩어지리이다 - 직역하면 '보십시오, 여호와여 당신의 대적들 때문입니다. 보십시오, 당신의 대적들이 소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악행자들이 흩어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이다. 이 같은 표현은 우가릿 본문(Ugaritic texts)의 한 대목을 연상시킨다.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오 바알신이여 보소서 당신의 대적들을 당신이 쪼개버릴 것입니다. 보소서 당신은 당신의 대적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Dott). 시편 기자가 이 같은 가나안 예식서에 대해 익숙해 있었다고 추측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예식서의 내용을 빌어왔다고 결론지어서는 안 된다. 기자의 관심은 이방 신 바알의 능력이 결코 아니라 오로지 진정한 능력자이신 하나님에 의하여 악행자들이 멸망당하고 말 사실일 뿐이다.


=====92:10
내 뿔을 들소의 뿔같이 높이셨으며 - 성경에서 '들소의 뿔'이란 가공할 만한 힘을 상징한다(22 : 21 ; 욥 39 : 9). 따라서 하나님이 시인의 뿔을 높이셨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활력, 힘을 공급하셨음을 뜻한다. 대비가 되는 바로 앞절에 악인의 멸망 사실이 언급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로부터 힘을 공급받음으로 말미암은 시인의 번영, 명예 회복 등으로 보면 무난하겠다.
신선한 기름으로 부으셨나이다 - 여기서 '신선한 기름'(* , 쉐멘 라아난)의 문자적인 뜻은 '푸른 기름'인데 이것은 최고 품질의 기름을 뜻한다. 원래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대제사장이나 왕으로 선택한 사실을 대중 앞에서 공개하는 의식 중의 중요한 순서이다(출 29 : 7 ; 삼상 10 : 1 ; Eaton). 그러나 문맥상 여기서는 시인이 기쁨으로 충만했던 사실에 대한 암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동방에서 축제일을 맞이하여 값비싼 양질의 기름을 서로 머리에 붓는 것은 잘 알려진 관습이다(23 : 5).


=====92:11
내 원수의 보응받는 것을 내 눈으로 보며 - '원수'에 해당하는 '슈르'(* )는 구약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단어이다. 그 유사한 분사형으로 민 35 : 32 ; 렘 17 : 13 ; 미 2 : 8 등에 나타나는 '피한 자', '(여호와를) 떠나는 자', '(전쟁을 피하여 평안히) 지나가는 자들' 등의 의미를 고려할 때, 상대를 공격하기 위하여 '숨어서 기다리는 자'로 번역하면 되겠다. '눈으로 보며'는 대적의 멸망을 분명히 목격한다는 것인데 숨어있던 대적이 누구라도 볼 수 있게 공개적으로 멸망당한다는 사실은 묘한 대비를 이루며 본절의 의미를 강조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나 본절은 대적의 징벌당하는 장면을 득의 양양하게 비웃으며 감상한다는 데 그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공의가 아주 명백하게 집행되는 것을 바라본다는 데에 그 초점이 있다.

=====92:12
종려나무...백향목 - 저자는 악인의 멸망과 대비를 이루는 의인의 승리를 말하기 위하뗘 이 두 나무의 이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두 나무의 특성과 같은 측복은 당시뿐 아니라 기자와 동일한 믿음에 참여하는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는 혜택이다. 이 두 나무는 푸르름, 무성한 생산력, 다함이 없는 왕성한 힘 및 영원성 등과 같은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어느 학자는 이 두 나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여름의 열기 속에서 뿐만 아니라 겨울의 냉기속에서도 종려나무는 연중 내내 그 푸르름을 유지한다. 그리고 백향목은 연수로 그 나이를 세지 않는다. 백향목은 세기(century)로 그 나이를 센다'(Tholuck). 기자는 늘 푸르고 늘 과실을 맺는 종려나무를 의인에 비유한 반면, 곧 시들고 말 풀을 악인에 비유한 바 있다(7절). 이외에 구약 성경에서 종려나무를 다른 무엇에 비유한 구절은 단 두 군데뿐인데 아 7 : 7은 '키가 훤칠한 신부에', 대조적으로 렘 10 : 5은 '꼿꼿하게 서있는 우상'에 각각 비유하고 있다.


=====92:13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 52 : 8에도 유사한 표현이 등장하는 바, 의인이 여호와의 집에 심기운 그리고 궁전 경내에서 무성하게 자라는 나무에 비유되고 있다. 당시 대부분의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의 집에서 받은 축복을 삶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의 물질적인 축복과도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였었다(욥 42 : 12). 한편, 본절의 묘사가 실제로 성전 뜰 안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의 모습으로부터 따온 것인지를 규명하기란 어렵다. 어떤 학자는 본절의 묘사와 애굽 의식중 신상 앞에 나무가 심겨져 있었던 사실을 연관시키려 한다(Kraus).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사실을 염두에 두고 이 같은 묘사를 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92:14
늙어도 결실하며 - 이스라엘 백성 역시 장수하는 것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소망하였는데, 그 최고의 모범은 죽을 때 그 나이가 120세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고 기력이 쇠하지 않은 모세였다(신 34 : 7). 그와 유사하게 여겨진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나이 많아 늙도록 부하고 존귀하다가 죽은 다윗이었다(대상 29 : 28). 저자는 여기서 경건한 자는 늙어서까지도 원기와 생산력이 있는 삶을 살 것을 암시하고 있는 바, 아마도 그의 마음속에는 모세와 다윗이라는 표본이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다 익으면 개당 평균 무게가 100kg, 최대로는 200kg까지 나가는 종려나무 열매를 염두에 두었을 수도 있고다(Perowne).


=====92:15
여호와의 정직하심 - '정직하심'에해당하는 '야솨르'(* )는 다른 사람을 상대함에 있어서 공평한 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기본적인 뜻은 '평평하다', '곧다'이며 기자는 하나님의 세상에 대한 통치가 공평하고 의로울 것을 밝힘으로써 본 시편을 끝맺고 있다. 범죄하는 악인의 융성은 잠시뿐이나(7, 9, 11절) 의인의 기쁨과 번영은 영원할 것인데, 그 까닭은 바로 하나님이 공평하고 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이다. 기자가 하나님을 횬들리지 않는 바위와 같은 존재로 삼고 그분을 신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진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시인은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다'는 부정의 부정을 사용하여 본 시편을 맺는다. (119 : 3).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로운 심판을 노래하고 있는 본시는  1하나님의 위대하신 행사
에 대한 찬양(1-6절)  2악인의 궁극적인 멸망(7-9절)  3의인의 영원한  흥왕(10-15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저작 배경에 관해서는 정확히 결정하기 어렵다. 다만 우리는 표제문에 근거
하여 본시가 이스라엘 백성이 안식일 아침에 즐겨 부르던 찬송임을 알 수 있다.  그런
데 어떤 학자들은 본시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왕의 감사시 혹은 이스라엘  신년
축하 때부르던 축하 노래라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증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
   한편 본시는 장르(genre)에 있어서 개인적인 감사시의 요소(4, 10, 11절)와 찬양시
의 요소(5, 8, 9절), 그리고 의인과 악인의 결말을  훈계하는  지혜시의  요소(6,  7,
12-15절)가 골고루 들어있는 복합시라고 볼 수 있다. 다만 하나님의 능력과 속성에 대
한 찬양이 감사와 지혜의 근거가 됨을 생각할 때 찬송시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본시는 '의인의 번영'과 '악인의 소멸'이라는 주제 면에서 73편과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73편에서는 시인의 감정이 악인의 형통을 바라보면서 격분하기도
하고 의기 소침해지기도 하는 등 감정의 기복이 심하지만 본시에서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을 미리 바라보는 의연한 자세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7-9
절).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한 확신이 묘사되는 본시를 세 단락으로  나누
어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찬양받으실 여호와 하나님(92:1-6)
   지존자에 대한 거룩한 찬양이 장엄히게 묘사되고 있는 본 단락에서는, 하나님을 찬
양해야 할 이유, 방법, 시기, 그리고 동원되는 악기 등에 관해서 언급되고 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성전에 나아가면서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진심으로  찬양을
드리고 있다(1-3절). 시인은 이런 진정한 찬양의 동기는 시인이 경험했던 하나님의 성
실과 인자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아버지처럼 보살펴 주시는 크신 사
랑을 깨달았으므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찬양을 드릴  수  있었다(4:7;45:15;대하
30:21;느8:17;행2:46;11:23). 이것은 지혜와 계시의 은총을 받은 사람만이 드릴 수 있
는 최고의 경배이다.
   특히 본 단락은 '안식일을 맞이하여 각종 악기를 통해 드리는 예배'를 드러내 주고
있다. 먼저 시인은 안식일에 '밤'과 '아침' 즉 온종일 찬양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
실하심'을 나타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된 도리를 다하고 있다. 안식일을 보내는  시인
의 이런 태도는 주일을 단지 세상 일에 중단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성도들에게 커
다란 귀감이 될 것이다. 안식일은 단지 생업의 중지와 휴식이라는 소극적 의미를 지니
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과 사역에 대한 찬양과 감사를  드리는  날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모든 언약 백성들에게 창조와 구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경륜을 찬양할
것을 권유하고 있다.
   여기서 시인은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이런 악기들
은 예배하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만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유익한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악기들이 스스로의 독립적인 신비한 힘을 지닌 것처럼  오친되
어 마술의 주문과 같은 효과를 조작한다면, 오히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가지 도구를 활용하여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섭리적 통치를  찬양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는 길이 올바른 성도의  마
땅한 의무이다.

        2. 악인의 궁극적인 멸망(92:7-9)
   전후 단락에 비해 현저히 짧은 본 단락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에 대한 최종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악인의 영원한 멸망(7절)을 확신하고 있다. 시인은 지금 악인이 비온
후의 풀처럼(7절)급속히 형통하고 있는 모순된 현실을 목도하면서 부러워하거나  시기
하지 않고 담담한 심정을 유지한다. 시인이 이처럼 악인의 형통에 대해 본연에서 잠깐
스쳐가듯 짧게 언급한 것은 악인의 최종적인 멸망을 의심치 않는 의연한 신앙심의  발
로라고 여겨진다. 비록 악인이 흥왕하고 있는 상황과 반대로 의인의 고통이라는  불가
해(不可解)한 상황이 지루하게 계속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챤양과 확신
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8절). 이런 시인의 믿음은 악인의 형통이 죄악의 터 위에 건
립되고, 그 죄악의 터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반드시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신앙
(9절)에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인의 자세를 통해 우리는 현재는 흥왕하지만
반드시 멸망당할 운명에 처해 있는 죄인들을 모방하지 말고 언제나 견고한 신앙을  소
유해야 한다.

        3. 의인의 영원한 흥왕(92:10-15)
   악인의 궁극적 멸망에 대한 확신을 선포한 후에 시인은 이어서 의인의 형통함을 매
우 시각적으로 형상화 시키고 있는데, 마치 에덴 동산에 있는 모든  식물의  푸르름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을 받는다.
   먼저 시인은 의인의 형통을 전 단락에서의 악인의 영원한 멸망에 대조시켜 '들소들
의 뿔'(10절)과 '종려나무'(12절)그리고 '레바논의 백향목'(12절)등으로 묘사하고  있
다. 이 같은 표현은 이스라엘 민족의 수난사에 비추어 볼 때 전혀 상방된 것이다.  이
스라엘은 많은 시간 동안 외적의 압제와 포로 생활을 경험했다. 그런데  시인이  실제
생황에서 한숨과, 눈물과, 수치를 당하는 의인의 모습을 모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인
을 종려나무로 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되고 있다.  그
래서 시인은 의인의 한숨을 찬송을 위한 호흡으로, 눈물을 에덴 동산의 나무를 무성케
하는 생명수(12, 14절)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시인의  가치가  전도(顚倒)된
현실 속에서도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궁정, 즉 진리의  터
에 뿌리박고 있다는 믿음 때문이라고 하겠다(13절). 시인은 마치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창수가 날지라도 모든 사고에서 원칙적으로 벗어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이상의 고찰에서 우리는 시인이 불공평한 현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궁극적인 공의의
실현을 바라보는 종말론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의 이러
한 종말론적인 신앙은 단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발생하는 역사의  종국적  심판에만
제한되지 않고 알곡과 가라지가 구분되는 최후의 심판이 현제에도 이미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다는 확식으로 확장된다. 이런 통찰력은 오늘날 천국을 단지 장소적이고, 물질
적인 세속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여 이 세상에서의 부귀 영화를  저  세상에서도
향유라려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 경종이 되어야 할 것이다. 최후의 심판은 정의를  하수같이, 공법을 물같이 흐르게 하는(암5:24) 날로서 부패하고 타락한  현실  속에서도 진리를 수호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보상과 위로를 주게 된다.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비록 악인의 형통과 의인의 고난을 잠정적으로 방치하시지만 결국 선악간에 심판하심을 믿고 부조리한 현실과 대항하여 승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후 심판을 하나님의 의에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드는 근거로 삼으면서 종말론적인  윤리에 입각해서 살아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지상에서의 생활은 축복과 은혜의 길이 될 것이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