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며 - 70인역(LXX)은 이 부분을 '엔 엑소도 이스라엘'(* )로 번역하고 있는데 그 뜻은 '이스라엘의 출애굽시에'가 된다.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출애굽과 바벨론에서의 귀환은 쌍벽을 이루는 주요한 사건으로서 이는 그리스도를 통한 전인류의 구속을 예표한다. 따라서 출애굽 사건은 구약 신학의 주된 대상이 되고 있으며 시편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런 점에서 어떤 학자는 출애굽을 언약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의 탄생이라고까지 한다(Kirkpatrick).
야곱의 집이 방언 다른 민족에게서 나올 때에 - 전반절과 대구를 이루는 이 어구(語句) 역시 출애굽을 가리킨다. 여기서 '야곱의 집'이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키는 환유법적 표현으로서 흔히 '이스라엘 집'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방언 다른 민족'으로 번역되어 있는 히브리어 '암 로에즈'(* )는 번역된 우리말 대로라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백성'을 뜻하지만, 칼빈(Calvin)은 이를 '야만적인 백성'으로 번역하고 있다. 칠십인역(LXX)은 이를 '바르바루'(* )로 번역하여 칼빈의 번역을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애굽은 당시 최고로 번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가리켜 야만적이라고 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아마도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애굽인들의 가혹한 행위를 가리키는 것 같다(Parkhurst). 그러나 어원적으로 따져볼 때 '로에즈'란 말이 후기 히브리어로 '외국어를 말하다'란 뜻의 '라아즈'에서 파생된 것이라면 한글 개역 성경의 번역이 더 정당한 것 같다. 타방언을 말하는 민족이란 성경에서 가끔 적대적인 민족을 가리키기도 한다(사 28:11; 렘 5:15). 참고로 '아즈'(* )란 형용사는 '강한', '잔인한', '야만적인'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사야 25:3에는 이것이 '강한'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대구를 이루는 말이 '포학한'으로 번역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말에는 '야만적'이란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114:2
유다는 여호와의 성소가 되고 - 어떤이는 이곳의 유다가 솔로몬 사후(死後) 분열된 남쪽 유다 왕국을 가리키고, 다음 어구의 이스라엘의 북쪽 이스라엘 왕궁을 가리킨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출애굽 사건을 노래하고 있으므로 약 300년 후에 일어날 사건과 이것을 결부시킨다는 것은 시대 착오적인 부적절한 해석이다. 또한 어떤 이는 그 당시 유다 지파가 하나님 섬기는 일을 위임받았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어구가 다음 어구인 '이스라엘은 그의 영토가 되었도다'란 말씀과 대구를 이루며 같은 개념을 반복 표현한 내용이란 점에서 이곳의 유다를 유다 지파 하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은 부적절한 해석이다. 이는 솔로몬 이후의 북쪽 이스라엘을 가리켜 '에브라임'이라고 지칭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그 당시 유다는 모든 지파들 중에서 최고의 위치에 있었고 또 가장 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체를 대표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유다 지파의 지역에 보존되어 있었다는 점과 신약적 관점에서 메시야가 유다 지파에서 나온다는 점도 이런 관점을 뒷받침한다(Phillips). 한편 '성소'를 뜻하는 '카데쉬'(* )는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사물을 가리킬 때 흔히 쓰인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택하신 족속으로 삼아 거룩한 통치가 임하도록 하셨음을 뜻한다(Anderson, Mowinckel). 하나님은 모세에게 성막을 만들 때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휘장을 만들어 성소와 지성소를 구별하도록 명령하셨다(출 26:31-37). 그리고 예루살렘은 '거룩한 성'이라 불리웠다(사 52:1). 그런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약속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흔히 가리키는 바, 108:7에는 '하나님이 그 거룩하심으로 말씀하시되'란 말씀이 있는데 이는 약속하신 말씀을 반드시 시행하신다는 뜻이다. 따라서 유다를 하나님의 성소로 삼는다는 것에는 오래 전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신다는 개념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114:3
바다는 이를 보고 도망하며(* , 하얌 라아 와야노스) - 직역하면 '그 바다는 보았고 그리고 달아났다'이다. 여기서 '바다'는 홍해를 가리킨다는 데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보다'에 해당하는 '라아'는 직접 목적어를 취하는 타동사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빠져 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여기에 대명사 접미어를 첨가하여 이를 '라아후'(* )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럴 경우 하나님의 임재를 내포하는 언약궤나 여호와의 권능 등의 개념이 목적어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요단은 물러갔으며 - 1절의 두 평행 어구와 2절의 두 평행 어구가 동일한 내용을 재차 반복하여 표현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이것 역시 전반절의 내용을 반복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어떤 주석가는 이런 점을 들어 앞 문구의 '바다'가 사해 바다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Dahood). 수 3:14-16에서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입성을 상세히 밝히면서 '바다'를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수 3:16). 그러나 홍해를 건넌 사건과 요단을 건넌 사건은 둘 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또한 가나안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에서 이 둘이 대구를 이룰 만한 동일한 내용으로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바다를 오히려 홍해로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
=====114:4
산들은 수양 같이 뛰놀며 - 이는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주어질 때 일어난 지진(출 19:18)을 시적인 기교로 묘사한 것이다(Alexander). 여기서 '뛰놀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카드'(* )는 짐승이 '깡총깡총 뛰다', '춤추다'라는 의미이다(사 13:21).
작은 산들은 어린 양같이 뛰었도다 - 이것 역시, 하나님의 거룩하신 위엄 앞에서는 산들도 떨면서 굴복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작은 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브아' (* )는 '언덕'이란 뜻으로서 작은 도시를 가리키기도 한다.
=====114:5
바다야 네가 도망함은 어찜이며 요단아 네가 물러감은 어찜인고 - 3절과 4절에 '바다-산'의 비유가 쓰였던 것과 똑같이 본절과 6절에 다시 '바다-산'의 비유가 나타난다. 스스로 지혜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역을 망각하는 사람들은 자연의 이러한 엄청난 변화를 보고 자신의 무지를 깨달아야 한다. 비록 이 시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는 하나 하나님의 명령 없이 요단 강의 물이 저절로 물러설 수 없다는 점에서 이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재촉하는 노래인 것이다.
=====114:6
너희 산들아 수양같이 뛰놀며...어찜인고 - 4절 내용의 반복이다. 기자가 이렇듯 반복적으로 노래하고 있는 이유는 구속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위대한 섭리와 권능을 강조하여 언급함으로써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경배케 하기 위함이다.
=====114:7
땅이여 너는 주 앞 곧 야곱의 하나님 앞에서 떨지어다 - 앞 두 구절에서 시인은 산과 바다의 동요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질문하였다. 그리고 본절에 와서 그는 땅을 의인화시켜서 자신의 질문에 대해 답한다. 한편 '떨지어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훌리'(* )인데 어떤 주석가들은 고대 역본의 예를 들어 이를 과거 완료형으로 보고 '땅이 떨었다'라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거 완료형이라고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해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명령형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내용상 '떤다'는 전능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임하심을 감당할 수 없이 떤다는 의미이다(계 20:11 참조). 영역본 NEB의 경우는 하나님의 임재와 강림을 땅이 즐거워한다는 의미에서 '춤추다'(dance)로 번역하였다. 물론 히브리어 '훌'(* )은 '춤추다'는 의미도 지닌다. 그러나 문맥상으로는 오히려 '떨다'가 무난하다(Tremble, KJV, NIV, RSV). 한편 여기에는 하나님을 '주' 곧 '아돈'(* )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땅의 소유주이며 세상 만물의 주인이심을 뜻한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요단 강을 건널 때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 '아돈'이란 말로 호칭되었다(수 3:11, 13).
=====114:8
저가 반석을 변하여 못이 되게 하시며 - 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방황할 때 반석에서 물을 내신 하나님의 또 다른 이적을 찬양하는 부분이다(출 17:6). 이스라엘 자손이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이르렀을 때 백성들은 물이 없어 모세를 원망하였다.
차돌로 샘물이 되게 하셨도다 - 이것은 돌이 물로 변했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돌에서 물이 나왔음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여기서 '차돌'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할라미쉬'(* )인데, 신명기에서는 '굳은 반석'으로 번역되었다(신 8:15;32: 13).
본시는 바벨론 포로 귀환을 직접적 배경으로 하여 출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
에 들어가기까지 여호와의 능력과 은혜를 통해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해 찬송하
고 있다. 본시는 이스라엘의 구원 사를 다루고 있는 비숫한 내용의 시인 105편과 135
편보다 더욱 간결하고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힘차고 강렬한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시의 저자나 저작 배경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출애굽 사건이 간
략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묘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시인이 바벨론으로부터 돌
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능력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바벨론으로부터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확인시켜 줌으로써, 새로운 삶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위해 저작된 것임은 분명하다. 또한 본시가 이스
라엘의 선택과 구원의 역사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연례적인 절기에 사용하
기 적합했을 것으 추정된다. 몇몇 학자들은 본시를 유월절 찬송으로 간주하고 있는
데, 실제로 유월절 제8일째 되는 날에 시행된 의식에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본시는 유대교 예배에 자주 사용되던 '할렐시'(Hallel)가운데 두번째로 나오는 찬송이
다.
한편 본시는 하나님의 현현(顯現)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찬양시'라고 볼 수 있
다. 본시에는 찬양이라는 말이 한마디도 나와 있지않지만 전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에대해 특이한 과장법을 사용하여 찬미하고 있다. 그러므
로 우리는 본시를통해 하나님께서 언약 백성에게 행하신 권능과 인자하심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본시는 네 개의 날개를 가지고있는 새처럼 빠른 속도로 내용이 전개되고 있으
며, 전체적으로 균형미가 드러나고 있다. 특히 3, 4절과 5, 6절은 분명한 내적인 병행
을 이루며 이 부분들은 1, 2절과 7, 8절에 의해 둘러싸여 있다. 본시는 이러한 외형적
인 통일성과 함께 풍부한 서정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역
사를 역동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의 구조를 도표로 표시하면 다음과 같다.
1절----------------------------------------------------------------2절
| 3절---------------------------------------4절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 5절---------------------------------------6절 |
7절----------------------------------------------------------------8절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돌보실때 드러내셨던 권능과 인
자하심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실은 더욱 다란 기사와 이적, 즉 그
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구속의 은총을 예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은 출애굽이나 바벨론 포로귀환 당시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분을 섬기는 오늘
날의 모든 성도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며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실 최후의 심판의 날까
지 계속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역사에 대한 시적 묘사가 전개되고 있는 본시는 이
스라엘에 임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전반부(1-4절)와 자연계가 창조주의 뜻을 인
정하고 순종함을 표현하는 후반부(5-8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제 본시의 내용을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하여 보도록 하자.
본시는 먼저 이스라엘의 신앙과 자기이해의 근거를 되돌아봄으로써 내용 전개를 시
작하고 있다(1, 2절). 시인은 외국의 압제와 속박에서 자유롭게되어 그들 자신의 민족
성을 발전시킬 수 있을 뿐만아니라 여호와를 섬길 수 있게 된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애굽의 노예신분에서 벗어나 여호와를 전심으로 섬길 수 있는 거룩
한 백성이 되었고 여호와를 그들의 왕으로 소유하는 선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비싼
대가를 치르고 사실 백성들은 더이상 스스로의 권리를 주장할 수없는 하나님의 소유이
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들에게 자신이 거하시는 성소를 허락하시고 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가나안 복지를 선물로 주심으로써 다른 민족들보다 특별히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나타내셨다. 시인은 초두에서 이러한 민족적 구속 경험을 제시함으로
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만을 섬기고 살아야 할 의무와특권이 있음을 환기시키고 있
다.
이어서 시인은 출애굽 사건 때 나타난 이적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3, 4절). 생
생하고도 극적인 용어들로 가득 차 있는 본대목은 단순히 이적의 나열이 아니라 바다,
강, 산, 같은 무생물도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놀라움을 나타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
인은 여기서 창조주 하나님께 순종했던 바다가 그분의 이름을 높이 들리게 했으며, 요
단강은 물러가면서 하나님의 권능을 찬양했고, 산들은 흔들림으로써 하나님의 무서운
엄위 앞에 얼마나 위압당하고 있는가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게는 영광이 되고 그들의 적에게는 공포가 되었다. 시인은 대단히 기쁜 승리감을 만끽
하면서 당대의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위하여 행하신 구원의 역사를 생동감 넘치게 재현
시키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함께 피조물로서의 순종이 요구되
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시인은 독자에게 감흥을 주며 좀더 화려하고도 멋있는 피날레(finale)를 장식하기
위하여 5, 6절에서 곧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앞에서(3, 4절) 언급한 내용을 수학적
질문의 형태로 바꾸어 기술한다. 시인은 활유법을 사용하여 바다와산들을 친근하게 표
현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민감하지 못한 사람들을 책망한다. 즉 무생물인 바다, 강, 산
도 하나님께서 순종하는데,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지음받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
지 않는 인간을 향해 우회적으로 책망하는 것이다. 사실 5, 6절의 질문은 바로 7, 8절
의 대단원을 준비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다. 시인은 자연에 대한 수사학적 질문은 통해
서 하나님 앞에서 피조물이 지녀야 할 태도를 제시하며, 성도의신앙 상태에 대한 점검
을 유도한다.
시인은 마지막 부분(7,8절)에 이르러 앞에서 언급한 여호와의 능력을 상기시키면서
경외심을 갖도록 촉구한다.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샘물을솟아나게 하실 수 있는 권능
을 소유하셨다. 누가 이러한 하나님과 비교될 수 있겠는가! 시인은 만백성들에게 이스
라엘의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도록 권고한다(7절;97:4, 5). 시인은 모든 자연과 민족
의 하나님의 오심에 굴복하여야 하고 그의 주권적인뜻에 복종하여야 함을 강조하고 있
다. 이러한 내용은 본시의 최종적결론으로서 영원한 생명수이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신앙을 보여준다.
이상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통하여 나타난 이적들을 의인법적 기법을
사용하여 표현함으로써 각 장면들이 매우 생동감있게 부각되도록 만들었다. 또한 풍부
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살아있는 음악처럼 자극적인 느낌을 주게 만들었다. 그 결
과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현재화하여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처럼 받아들이게 할 수 있
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출애굽의 시작부터 가나안 입성 때까지 계속해서 인도하셨다. 오늘날도 여전히 하나님은 택한 잭성들을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지켜보호하신다. 우리 앞에 나타나는 어떠한 장애물들도 능력의 말씀으로 제거시키신다. 우리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승리에 참여하여 그분의 보호하심으로 완벽히 보존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오늘날도 동일한 구원의 역사가 펼쳐짐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본시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여호와가 천지를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유일한 절대자이시며, 우리 앞에 다가서는 수많은 장벽들을 제거시키시는 유일한 분임을 확신하고, 하나님만을 경배할수 있는 마음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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