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1
여호와께 감사하며 - 78편, 106편과 함께 본 시편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에 있어서 그 민족을 위하여 행하신 하나님의 경이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이 세 편의 시편들은 동일 주제를 지향하지만 그 주제를 지향하는 의도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78편은 교훈적이다. 즉, 그 의도는 한 가지 교훈을 가르치는 것인데 가르쳐 현재를 위한 경고를 삼기 위하여 과거를 회상한다. 106편은 참회적 고백을 의도하고 있다. 이 시편은 이스라엘 과거 역사를 주로 죄악의 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반면, 본 시편은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적절한 주제인 바 미래의 순종을 끌어내기 위한 일종의 토대로서의 이스라엘 민족 역사의 여명기에 그 민족을 위해 행하신 여호와의 능력의 역사를 진술하고 있다. 본 구절에서는 특히 감사를 끌어내기 위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 본 표현은 그 다양한 문맥에 따라서 다른 의미를 나타낸다. 애가(哀歌)의 문맥의 경우는 고통자가 구원을 바라며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는 것이 되겠고(116:4), 찬양시의 경우는 '여호와를 찬양하라'와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외치며 즐거워하는 것이 되겠다(104:35, Anderson). 아무튼 본절 전체는 사 12:4과 유사하다.
=====105:2
그를 찬양하며(* , 잠루로) - '자마르'(* )의 본래 의미는 악기의 현따위를 '만지다', '연주하다'이며 여기서는 '어떤 일정한 리듬을 동반해서 노래한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핵심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가 그저 노래할 것이 아니라 일정한 음악적 정형을 갖추고서 노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노래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실 뿐 아니라 엄위로운, 인간과는 구별된 신(神)이시기 때문에 찬양에도 최선의 노력과 정성을 다 바침이 마땅하다.
=====105:3
그 성호를 자랑하라(* , 히트할루 베쉠 코드쇼) - 문자적인 뜻은 '그의 거룩한 이름을 찬양하라'이다. 요점은 우리의 찬양에 있어서 주요한 주제는 하나님의 이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요점을 좀더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기뻐 찬양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에게 자신을 알리기 위하여 그분이 택하신 이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여호와의 이름이란 곧 여호와 자신이요(Anderson). 당신의 거룩하신 성품에 다름아니다(Davies). (2) 찬양과 기뻐함의 주제는 그의 마음이 거룩하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것이다. 빛이 빛을 좋아하듯이 거룩함을 지향하는 자만이 그 사실을 기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땅 위에 하나님만큼 완전히 거룩한 자는 없다. 그러므로 날마다 거룩해지기를 힘쓰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기뻐해야 한다.
=====105:4
여호와와 그 능력을 구할지어다(* , 디르슈 예화 웨우조) - 문자적인 뜻은 '여호와와 그의 힘을 구하라'이다. 그런데 여호와를 구한다는 것은 그의 전능한 힘을 구한다는 의미이다.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새로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때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의 의역, '여호와를 구하라 그리하면 강해지리라'는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 줄거리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 속에 나타났던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문맥은 강한 능력의 하나님을 초점으로 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중시할 때 본 구절은 '강하신 여호와...'로 의역함이 더타당하겠다.
=====105:5,6
아브라함의 후손 - 대상 16:12, 13에는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되어 있다. 본문은 언약의 시조라는 면에 강조점이 있고, 역대상의 경우는 언약의 후손들이라는 면이 강조되어 있다. 시편에서는 47:9외에 본 시편 9, 42절에서만 '아브라함'이란 호칭을 볼 수 있다.
택하신 야곱의 자손(* , 베네 야아코브 베히라) - 정확하게 직역을 하면 '택하신 야곱의 자손들(아들들)'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단수가 아니라 복수인 이스라엘 백성인 것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브라함의 씨들로서 하나님의 택자(擇者)들이며, 언약과 약속들의 상속자들인 야곱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하신 역사를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그 조부(祖父)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듯이 말이다(8절).
그 입의 판단 - 여호와께서 주신 율법이 아니라 바로와 그 백성 위에 내린 징벌을 암시하는 것 같다(14절; 출 6:6; 7:4; 12:12). 하나님은 애굽의 장자들을 치신 사건을 비롯한 열 가지 재앙과 홍해까지 이스라엘을 추격했던 바로의 군병들을 물 속에 수장시키심으로써, 모세를 통해 실행된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해방을 무시한 애굽을 징벌하셨다. 본문 앞에 언급된 '기사'와 '이적'은 이와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이 분명하며, 동일한 의미가 반복된 것은 하나님의 애굽 징벌 종류의 다양성 및 강조를 나타내기 위함인 것 같다.
=====105:7
그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시라 - 여기서 '우리 하나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헤누(* )로서 하나님의 언약적 품성을 암시하는 말이다. 본절로부터 본 시편의 끝절까지 계속되는 찬양의 핵심은, 여호와는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확신과 함께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언약의 수여자로 언급하신 사실은 출 20:2에도 나타난다. "나는 너를 애굽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니라.
" 그의 판단이 온 땅에 있도다 - '판다'의 히브리어 '쉐페트'(* )는 일반적으로 '재판', '판결'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의 영향력' 정도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즉,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심에 따라 이스라엘뿐 아니라 온 세상 나라들이 그 영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다.
=====105:8
천 대에 명하신 말씀 - "너는 알라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라 그를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그 언약을 이행하시며"(신 7:9)라는 말씀을 연상시키는 본 구절의 '천 대'는 한계가 없는 기한 곧 '영원'을 뜻한다. '명하신'은 '치와'(* )로서 동일한 단어가 민 27:19에도 나오는데 그곳에는 '세우다'로 되어있다. 이러한 용례는 10절의 '세우신'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결국 이 용어는 이스라엘이 받아 지켜서 그것을 든든히 유지하도록 하기 위하여 주신 말씀임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고 하겠다.
기억하셨으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자카르'(* )로서 본 문맥에서는 그 세우신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에게 적용되고 있다. 즉, '자카르'는 한번 맺은 언약에 대하여 신실하신 하나님을 묘사하는 용어이다(74:2; 79:8). 한편, 본 용어는 하나님이 신실하신 것처럼 언약의 대상인 이스라엘도 언약에 대하여 신실할 것을 명령하는 대목에서도 사용된다.
"너희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할지어다"(대상 16:15).
=====105:9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 , 아쉐르 카라트 에트 아브라함) - 직역하면 '그가 아브라함을 향하여 잘랐던 그것'이다. 문자적으로 '언약'이라는 말이 원문에 없으나 본 구절 자체에 그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카라트'(* )는 고대에 언약 체결 당시 언약 쌍방이 그 사이로 지나갔던 두 부분으로 '자른' 짐승을 연상시키는 표현인 것이다. 이스라엘을 포함한 고대 국가에서는 일정의 계약을 체결할 때 짐승을 잡아 두 부분으로 나누고 그 쌍방이 그 자른 고기 사이로 지나갔다. 그 행위 속에는 만일 체결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경우에는 잘라진 양편의 고깃덩이처럼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결심이 담겨져 있었다(렘 34:18-2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실 때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아브라함은 암소, 암염소, 수양, 산비둘기, 집비둘기를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마주 대하여 놓았는데 새는 쪼개지 않았다(창 15:9,10). 그러나 일반의 경우와 달리 아브라함은 그 쪼갠 고기 사이를 통과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나님이 그 사이를 통과하신 것이다. 성경은 타는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갔다고 하였는데 이 횃불은 다름아닌 하나님 자신이시다(창 15:17). 하나님은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 그리고 택한 후손에게 계속 전승될 약속은 자신의 생명을 바꾸어서라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그 의식을 통하여 보여 주셨던 것이다. 물론 본 의식(儀式)을 통하여 우리는 먼 훗날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성취하실 그리스도, 곧 하나님 그분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생명을 걸어가면서까지 하신 약속, 그 약속을 본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삭에게 하신 맹세 -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카라트'(* )로 표현 했던 반면, 이삭에게 주신 약속은 '쉐부아트'(* )로 표기하고 있는데 후자는 전자에 주었던 약속에 대한 확증이라는 측면에 그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창 22:16; 26:3). 대(代)를 이어 전해 주셨던 하나님의 약속의 내용은 약속한 땅, 가나안의 수여가 그 핵심이다.
=====105:10
야곱에게 세우신 율례 - 여기서 '율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크'(* )인데 주로 복수형인 '후킴'(* )이 자주 쓰인다(119:5등). 율법의 외형적 성격을 암시할 때 사용되는 본 용어는 주로 한번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문자화된 형태를 가리킬 때 사용되고 있다(18:22; 147:19). 여기서는 야곱에게 주신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등에게 이미 주었었기 때문에 이제는 글로 써서 종이에 간직한 바 된 듯한 분명하고도 명확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 얍복 강 씨름 사건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받게 되는데(창 32:24-32) 이 사건은 한 개인의 단순한 개명(改名)을 뜻하지 않고 한 국가의 탄생을 암시한다. 말하자면 야곱이 한 국가의 시조가 된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105:11
너희 기업의 지경 - 여기서 '지경'은 '헤벧'(*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이 '줄', '로우프', '길이를 측정하는 자'등이다. 본절에서는 어떤 대상, 곧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주기 위한 그 크기가 분명히 정해진 일정의 토지를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고 있다.
=====105:12
매우 영성(零星)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 '매우 영성하며'는 '키므아트' (* )인데 '한 웅큼밖에 되지 않는 숫자'로 풀어 번역하는 학자도 있다. 아무튼 숫자가 매우 적어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던 관계로 당시 이스라엘은 이곳 저곳으로 쫓겨다니는 나그네가 될 수 밖에 없었다.
=====105:13
족속...민족 - 전자는 '고이'(* ), 후자는 '암'(* )인데 전자는 주로 동일한 기원을 갖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는 일련의 공동체를 뜻하고 후자는 한 정부 아래 있는 공동체를 뜻한다.
=====105:14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 여기서 '열왕'이란 애굽의 바로(창 12:17), 그랄의 왕 아비멜렉(창 20:2) 등을 가리킨다.
=====105:15
나의 기름 부은 자(* , 마쉬아흐) - 문자적인 뜻은 '기름 부음 받은 자' 혹은 '특별히 구별하여 거룩케 한 자'이다. 기자는 특정인에게 기름을 실제적으로 부은 적이 없었던 족장 시대가 아닌 자신의 시대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사실 다윗 시대와 같은 왕국 시대에서나 왕, 제사장 혹은 선지자들에게 기름을 부었었다(왕상 19:16). 그러나 기자는 하나님께서 족장, 예를 들면 아브라함과 같은 이를 선지자로 부르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참선지자, 특별히 구별한 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사람의 아내를 돌려 보내라 그는 선지자..."(창 20:7). 나의 선지자(* , 네비아) - '나의 선지자들'이란 뜻이다. 족장들중에 실제로 '선지자'로 칭함 받은 자는 아브라함뿐이다(창 20:7). 그러나 여기서는 이삭과 야곱 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은 자들이요 하나님과 긴밀하게 교제했던 자들이라른 점에서 선지자로 지칭되고 있는 듯하다(Alexander). 한편, '선지자'에 해당하는 '나비'(* )는 아카드어 '나부'('부르다', '지명하다'란 뜻) 혹은 아랍어 '나바아'('선포하다', '언급하다'는 뜻)와도 관련있는 것으로 보인다(Anderson). 그렇다고 하면 여기서 '선지자'란 '(하나님의) 대변자' 혹은'(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자'라는 의미도 내포하게 된다. 한편, 늦은 시기에 있어서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령하는 자일 뿐 아니라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자이다. 그러나 이른 시기에 있어서, 예를 들면 아브라함의 경우 그같은 공적(公的) 기능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물론 노아 같은 사람은 '의의 선생'으로서 하나님의 방식으로 그의 가족(그리고 이들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온 세상을)을 가르쳤던 것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창 18:19에 의하면 선지자란 하나님께서 말, 환상, 꿈 혹은 내적 음성을 수단으로 대화하였던 상대였다(민 12:6-8).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읽을 때 족장들을 선지자들로 묘사한 본 구절이 의미하는 바에 근접할 수 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는냐"(창 18:17). 뿐만 아니라 소돔에 관하여 아브라함에게 준 맹세에서도 동일한 근접을 찾아볼 수 있다(창 18:22-33). 이 두 구절에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아브라함에게 붙여진 '선지자'라는 호칭은 '(하나님의 뜻의) 중개자'라는 의미이다. 한편 '하나님의 친구'란 호칭도 유사한 의미를 지닌다(대하 20:7; 사 41:8
=====105:16
그가 또 기근을 불러 - 여기서의 '불러'의 원형은 '카라'(* )인데 문자적인 뜻은 '소환하다', '청하다'이며 그 화자(話者)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절로부터 38절까지에는 그 약속의 성취 한 단계 한 단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암시하는, 애굽에서의 이스라엘의 역사가 서술되고 있다.
=====105:17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팔렸도다 - 요셉이 종으로 팔린 기사를 아비의 편애에 의한 형제간의 갈등의 결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단서가 되는 구절이다. 그 기사는 특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의 출발이라는 점에 해석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105:18
그 발이 착고(着錮)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 본 기사를 싣고 있는 창 39:20-23보다 더 혹독하게 요셉의 투옥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이 전옥(典獄)에게 신임을 얻기 전 투옥 초기 때의 모습이거나 전체 투옥 시절에 대한 강한 시적인 묘사로 추측되어진다.
=====105:19
여호와의 말씀(* , 데바로) - '그의 말'이란 뜻이다. 그리고 '그의 말'이란 (1) 요셉으로 자유의 몸이 되게 하였던 꿈의 해석, 곧 투옥 중이던 바로의 신하들의 꿈을 해석한 것(창 40:5-15 : 41:12)을 뜻하거나, (2) 요셉의 꿈을 통해 예언되었고 훗날 요셉의 영화(榮華)를 통하여 성취되었던 여호와의 약속의 말씀(창 37:5-11)을 뜻한다고 볼 수 있는데 문맥을 중시할때 전자가 옳다 하겠다. 그 자신이 꿈들을 해석하기 전까지 요셉은 감옥에서 고통받고 있었다는 것, 이것이 본 구절의 강조점이다.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 임라트 예화 체라파트후) - 70인역(LXX)이 '주의말씀'으로 번역하고 있는 '임라트 예화' (* )는 상반절의 '그의 말'과는 다른 의미이다. 즉, 이것은 하나님의 꿈 해석이 아니라 요셉의 꿈들을 통하여 그에게 전달되었던 그의 미래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창 37:5-11)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것 같다. '약속'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하나님의 말씀 '임라트'(* )는 살아있는 실제적 능력으로알려져 있다(119:50). 이 사실은 약속과 그 성취 사이 기간인 요셉의 고통과 투옥의 날들 동안 하나님께서 그의 신앙을 시험하심을 통하여 진리임이 입증되었다.
=====105:20
열방의 통치자(* , 모쉘 얌밈) - 직역하면 '민족들의 통치자'이다. 이것은 요셉을 옥에서 자유케 하였던 애굽 왕 바로는 애굽의 왕(창 41:14, 39, 40, 44)이었을 뿐 아니라 타민족까지 지배하였음을 암시한다. 당시 바로는 조공을 바치는 많은 나라들의 왕이었다.
=====105:21
그 집의 주관자 - 요셉은 애굽의 국가 제반 사무를 책임진 국무총리가 되었다(창 41:41). 이 같은 관직은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도 존재했었다(왕상 16:9; 18:3; 왕하 18:18, 37). 이 신분에 있던 자를 흔히 '집의 주관자' 혹은 '궁전의 주인'등으로 불렀다고 한다.
=====105:22
임의(* , 나프쇼오) - 문자적인 뜻은 '그의 영혼'으로 여기서는 요셉의 정신 작용에 의하여 외부로 표출되는 그의 말, 명령등을 가리킨다(창 41:40).
제어하며(* , 레소르) - 문자적인 뜻은 '묶으며'이다. 영역본들은 '묶다'(bind, KJV), '훈육(징계)하다'(discipline, NIV), '투옥하다'(imprison, LB), '교훈(지시)하다'(instruct, RSV)등과 같이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이런 번역들을 종합해 볼 때 여기서는 '통제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봄이 무난하겠다. 이 통제 능력은 권위의 증거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순종을 강요하고 상과 벌을 결정하는 권위가 본 용어 속에 함축되어 있다(Phillips). 요셉의 통제력은 창 41:40, 44에 잘 드러나 있다.
지혜로 장로들을 교훈하게 하였도다 - 요셉이 바로의 신하들에게 정치론 따위를 강의 하였다는 것으로 볼 것이 아니라 바로가 요셉의 7년 흉년 대책을 듣고 감동하였던 기사에 대한 시적인 묘사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에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 요셉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네게 보이셨으니 너와 같이 명철하고 지혜있는 자가 없도다"(창 41:38, 39).
=====105:23
함 땅에 객이 되었도다 - 성경은 애굽 땅을 흔히 함 땅으로 부르고 있는데(78:51; 106:22등) 그 이유는 애굽의 시조가 함이기 때문이다(창 10:6). 영원한 거처가 아닌 임시적으로 살 거처로 가기 위하여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땅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105:24
본절부터 38절까지는 출애굽기 처음 열두 장들에 나타난 역사, 특히 재앙들이 내려진 역사의 요약이다(출 1:7; 신 26:5과 비교하라). 여기서 다섯 번째나 여섯 번째 재앙은 함께 생략되어 있고 흑암의 재앙이 처음에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기자는 엄밀한 순서에 따라서 기술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도적인 섭리를 강조하기 위한 목적만을 충실히 전달하고자 시적인 자유를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105:25
저희 마음을 변하여 그 백성을 미워하게 하시며 - 원문대로 직역하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미워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이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미워하도록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애굽인들의 마음을 바꾸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향한 애굽인의 증오 문제에 있어서 그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이 사실을 놓고 학자들은 고민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그 증오의 원인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저희들의 마음이 변하게 되었다'로 번역하고 '하나님'이라는 주어는 생략해 버리기도 한다(갈대아역, 아랍역). 또 다른 학자들은 이 구절을 단지 이스라엘 백성의 수의 증가로 야기된 그 대적들의 증오심의 발동을 하나님이 괴로워하셨다는 의미를 지닌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한다(Grotius). 그러나 출애굽 기사중의 하나님이 바로의 마음을 강퍅케 하셨다는 식의 본 구절과 동일한 의미의 구절들이 계속해서 나온다는 사실이 난제로 대두된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곳곳에서 하나님은 증오나 죄의 원인자인듯이 묘사되고 있다(사 6:9, 10; 막 4:12; 요 12:39, 40; 롬 11:8). 하나님은 죄가 없으시다. 그리고 죄를 미워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는 그분이 죄의 원인자이신 듯 묘사하는 곳이 있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 조직 신학적 용어가 바로 '허용적 간과'이다. 하나님은 죄의 창시자는 아니지만 그의 구원 역사 속에서 죄의 작동을 허용하시는 분이시라는 것, 이것이 본 난제의 해결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본 구절의 강조점은 출애굽 기사 속에 나타나는 크고 작은 모든 요소들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수가 증가하는 것을 보고 생겨난 애굽인의 증오를 간과하심으로써 그분 중심적인 출애굽 사건의 기초를 마련하셨다.
교활히 행하게 하셨도다(* , 레히트나켈) - 문자적인 뜻은 '세밀하게 의논하였다'이다. 문맥적으로 이스라엘의 증가를 보고 염려한 애굽인의 의논임을 생각할 때 '세밀하게 음모를 꾸몄다'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겠다. 이것은 출 1:10에 기록된 애굽인의 음모를 연상케 한다. "오라 우리가 그들을 지혜롭게 다루자"(원문 직역). 애굽인이 꾸민 이스라엘의 증가에 대한 대처 방안은 이스라엘의 사내아이를 죽이는 것이었다(출 1:15, 16).
=====105:26
모세...아론 - 시편에서 이 '모세'라는 호칭이 나오는 곳은 77:20; 103:7; 106:16, 23, 32 그리고 90편 표제 등이다. 모세는 여호와의 '종'이라 불리웠고(출 14:31) 아론은 '택하신 자'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종'과 '택하신 자'는 5, 6절에서 볼 수 있듯이 거의 같은 의미를 전달한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구원을 위한 도구 역활을 담당했다(VanGemeren).
=====105:27
저희가 그 백성 중에 여호와의 표징을 보이고 (* , 사무 밤 디브레 오토타)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그들이 그들 중에 그의 표적의 말들을 놓았다'이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대언자, 곧 선지자임을 엿보게 하는 표현이다. 사실 모세와 아론은 자신들의 말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와의 말을 전하고 그분의 이적을 대행했을 뿐이다. 한편, 여기서 두 번째로 나오는 '그들'이란 이스라엘 백성과 바로 및 그 신하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대언자인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뿐 아니라 바로의 궁(宮)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이적을 행하였다(출 4:28, 30; 7:9, 10).
=====105:28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 아홉번째 재앙(출 10:21-29)이 가장 먼저 언급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알기 어렵다. 어떤 학자는 흑암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인데 그런 의미에서 처음 재앙부터 마지막 재앙 때까지 애굽은 흑암에 뒤덮여 있었다는 것을 본 구절이 암시한다고 해석한다(Hengstenberg). 한편, 출애굽 재앙 기사와 본 시편 재앙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는 십계명 기사와 주님이 인용한 십계명 기사의 배열 순서의 차이를 연상케 한다(마 19:18, 19; 막 10:19; 눅 18:20). 이런 점을 미루어 볼 때 본 시편 기자는 기사 내용의 순서보다는 그 전체 내용의 전달에만 관심을 두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 개역 성경이 생략한 주어 부분 '마루' (* )를 넣어 재번역하면 이렇다.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지 않았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을 가리킨다(They followed his instruction and..., LB). 70인역(LXX), 시리아역, 아랍역, 에디오아역 등은 '않았다'로 번역된 부정사를 생략하여 '그들은 그의 말씀들을 대항하여 반역하였다'로 번역하고 있는데(they rebelled against his words, RSV). 이 경우라면 '그들'은 애굽인들이 되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맛소라 원본(M.T.)과 배치되는 견해이다. 따라서 취할 수 없다. 본절이 모세와 아론의 순종을 언급하는 이유는 모세의 사역 초기 곧 하나님이 그를 처음 부르셨을 때 그리고 그의 사역 후기 바위에서 물을 내었을 때 각각 하나님께 불순종하였던 사실과 대비를 시키기 위함인것 같다.(출 4:10, 11; 민 20:24; 27:14 등).
=====105:29
물을 변하여 피가 되게 하사 - 첫번째 재앙을 말한다(출 7:14-25).
=====105:30
개구리가 번성하여 - 두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8:1-15).
왕의 궁실(* , 베하드레 말케이헴) - 직역하면 '그들 통치자들의 방들에'이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이 표현은 애굽 바로 왕의 신하들, 고관들의 처소를 가리킨다. 왕의 처소뿐 아니라 그 신하들의 처소에도 개구리가 들끓었다.
=====105:31
파리 떼가 오며 - 출 8:20-24에 나오는 네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
이가 생겼도다 - 출 8:16-19에 나오는 세 번째 재앙을 가리키는데 '이'란 '키님' (* )으로 오늘날의 '모기'를 가리킨다(Keil & Delitzsch). 본절에서도 출애굽기에서와 달리 셋째 재앙과 넷째 재앙이 그 순서가 바뀐 채 언급되고 있다.
=====105:32
우박...화염(火焰) - 이는 일곱 번째 재앙을 가리킨다(출 9:22-26). 여기서 '화염'은 원어로 '에쉬 레하보트'(* )로서 '불타는 불'인데 이것은 천둥이 칠 때 동반되는 뇌성을 가리킨다(출 9:23).
=====105:33
포도나무...무화과나무 - 하늘에서 우박과 벼락이 내릴 때 애굽의 대표적 나무였던 이 두 나무를 비롯한 모든 수목은 큰 손상을 입게 되었다.
=====105:34
황충...메뚜기 - 히브리어로 각각 '아르베'(* ), '옐레크'(* )이다. 여덟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출 10:1-20에는 전자인 '아르베'만 나오지만 여기서는 '옐레크'까지 언급되고 있다. 이것은 메뚜기의 일종인데 날개가 달렸다는 특징이 있다(나 3:16). 뿐만 아니라 여덟 번째 재앙을 언급하고 있는 또 다른 평행구인 78:46에서는 또 다른 용어 '하실'(* )을 사용하고 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용어로 메뚜기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실제 여덟 번째 재앙 때 나타났던 메뚜기는 한 종류가 아니라 여러 종류, 최소한 세 종류는 되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05:35
모든 채소를 먹으며 그 밭의 열매를 먹었도다 - 여러 종류의 메뚜기들은 우박으로 망가져 버리지 않은 채 남아있던 식물들을 갉아먹어 버림으로 황폐화의 정도를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105:36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 재앙은 생략되고 재앙 기사는 마지막 재앙으로 끝나고 있다. 본절에 사용된 용어들은 78:51과 거의 유사하다.
=====105:37
은금을 가지고 나오게 하시니 - 이것은 출 12:35과 관계 있는 표현이다. 출 12:35번역에 있어서 주요 영역본인 KJV에 의하면 이스라엘은 은금을 비롯하여 의복까지를 애굽으로부터 '빌린'(borrowed)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번역은 옳은 번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개념에 있어서 빌린다는 것은 다시 갚는것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애굽에서 나온 이후 이스라엘은 그 가지고 나온 것을 다시 갚은 적이 없는데 그렇다면 이스라엘은 애굽에게 사기를 친것이 되기 때문이다. KJV가 '빌린'으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솨알'(* )인데 사실 본 용어가 '빌리다'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성경에 있기는 하다(출 22:14; 왕하 4:3 등). 그러나 여기서는 '구하다', '요구하다'등의 의미로 번역됨이 더 무난하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구하다'로 번역하고 있는 NIV, RSV 혹은 개역 성경 등은 바람직하다. 이스라엘은 빌리지 않고 당당히 달라고 요구하여 당시에 귀히 쓰는 은, 금 등을 받아 애굽을 나왔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본 구절의 핵심이다. 은금은 고대에도 주요 귀중 금속이었다. 이 둘은 장식용으로, 보물로 그리고 상거래의 저당물로 사용되곤 하였다. 그런데 당시만 해도 은은 금보다 귀하였다. 그래서 여기서도 은이 금보다 앞서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약한 자가 하나도 없었도다 - 원기, 활력을 묘사하는 사 5:27을 연상시키는 표현이다. 여기서 '약한 자'란 '코쉘'(*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다리를 저는 자'이지만 '보행에 불편을 심하게 느끼는 자'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결국 본문은 여호와의 완벽하신 인도하에 출애굽이 성공리에 이루어졌음을 강조하는 구절이라 하겠다(신 8:4).
=====105:38
그들의 떠날 때에 애굽이 기뻐하였으니 - 애굽은 많은 재앙들로 큰 고통을 받았으며 그 땅도 거의 황폐화되었다. 따라서 이제 더 심한 재앙이 내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스라엘이 떠난다고 하자 크게 기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요구한 귀중한 물건 은, 금까지도 기꺼이 주어가며 이스라엘이 떠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가 아니라 그들 뒤에서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었다.
=====105:39
구름을 펴사 덮개를 삼으시고 - 여기서 '구름'은 출 14:19의 경우와 같은 대적들로부터의 보호가 목적이 아니라 태양 광선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의 머리를 보호함이 그 목적이다(Barnes). 물론 78:14; 출 13:21의 경우, 구름은 이스라엘의 안내자로도 나타나고 있다.
불로 밝히셨으며 - 밤에 이스라엘 민족을 인도하기 위함이다(출 13:21).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메타포(metaphor)는 활화산의 관측으로부터 따온 것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으나 인정할 수 없다. 구름 기둥, 불 기둥은 실제적이지 않은 현상 묘사의 소재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여정 가운데 실제적으로 존재했던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이다.
=====105:40
개역 성경에는 분명히 나오지 않았지만 원문에는 '메추라기로' 앞에 하나님을 지칭하는 '그가'가 있음을 주시해야 한다. 기자는 선행되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하는 소리를 생략한 채 여호와께서 주도적으로 메추라기와 만나를 내리셨던 사실을 강조적으로 적고 있다. 하늘 양식은 만나를 가리키는데 78:25의 경우는 이것을 '권세 있는 자(천사)의 떡'으로 부르고 있다.
=====105:41
반석을 가르신즉 물이 흘러나서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생존케 하시기 위하여 베푼 이적은 다양하지만 그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이적이 있다면 그것은 가데스(민 20:2-13)와 르비딤(출 17:1-7)에서 행하신, 반석에서 물을 나게 하신 일이다. 그런데 이 일은 단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물을 먹이신 사건으로 축소해서는 안 된다. 이 사건의 의미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는 성경 전체 속에서 이 주제가 어떻게 발전하는가를 소고(小考)해 볼 필요가 있다. 반석-물이라는 주제는 특히 시편과 이사야서에서 발전되어 나타난다. 78:15, 16, 20과 본절 및 42절에 근거해 보면 이 두 시편 기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이루어 오신 구원 역사를 서술하여 그분의 은혜로우심과 신실하심과 광대하심을 찬양하고 있다. 이러한 구원 역사적 관점에서 두 기자는 공통적으로 민 20:2-13과 출 17:1-7의 주제를 발전시켜서 '하나님께서 반석을 통해 강같이 흘러 넘치는 풍부한 물을 내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살리시며 그들을 만족케 하셨음'을 말하고 있다. 특히 본 시편 기자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로우심은 아브라함에게 이르신 언약에 근거하고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42절). 한편, 사 43:14-21의 문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이루실 크신 구원의 일을 말한다. 하나님은 이 일을 가리켜 '새 일'(사 43:19)이라고 말씀하시며 이 일에 비교가 되는 '옛적 일'(이전 일)로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신다. 이 같은 '새 일', 즉 새로운 구원 사역을 묘사하면서 하나님은 바로 본절에 나타난 '반석과 물' 주제를 크게 확대시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장차 들짐승 곧 시랑과 및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들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나의 택한 자로 마시게 할 것임이라"(사 43:19, 20). 이 말씀 안에 '반석'이란 단어는 그대로 나타나진 않지만 하나님께서 과거에 이루신 구원 사역인 출애굽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사막에 강을 내고 광야에 물들을 내시겠다'는 표현은 본절의 주제와 격리 시킬 수 없는 것이다. 또 하나 살펴볼 문맥은 사 48:17-22이다. 이 문맥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리게 될 평강'과 '바위에서 나온 물'을 간접적으로 연관시키면서 야곱의 구원을 선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이사야서의 두 문맥에서 우리가 찾아낼 수
료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내다보는 구절이다.
=====105:42
그 거룩한 말씀과 그 종 아브라함을 기억하셨음이로다 -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행하셨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약속이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말한다. 출애굽 사건 역시 그 약속 성취의 일부이다(출 2:24; 신 7:8). 39절에서부터 본절까지에서는 애굽으로부터의 출발과 약속된 땅으로의 입성(入城) 사이의 기간을 요약하는 광야에서의 주요한 세 가지 기적들을 다룬 후, 그 기적들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첨가하고 있다. 그런데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성경의 시인들과 선지자들이 자주 인용하는 주제인 홍해 도하(渡河)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105:43
그 백성으로 즐거이...노래하며 - 42절 주석에서 39-42절에서는 광야 시대의 가장 유명한 기적 중의 하나인 홍해 기적 사건이 언급되지 않았다고 했는데 바로와 그의 군대가 홍해에 수장된 후에 부른 승리의 노래(출 14:26-15:21)를 암시하는 구절이 바로 본문이 아닌가 여겨진다. 아니면 본 구절은 주의 재림 후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의 한 장면을 예언하는 내용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속량함을 얻은 자들이 돌아오되 노래하며 시온에 이르러 그 머리 위에 영영한 희락을 띠고 기쁨과 즐거움을 얻으리니 슬픔과 탄식이 달아나리로다"(사 35:10). 후자를 취할 경우 본 시편이 저변에 깔고 있는 시대와 본절이 암시하는 시대는 큰 간격이 있게 된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후자보다는 전자가 적절한 해석으로 보여진다.
=====105:44
열방의 땅 - 본 시편 전체의 문맥을 중시할 때 이것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78:55; 신 6:10).
민족들의 수고한 것 - 이것은 가나안 민족이 수고하여 일구어 놓은 경작지뿐 아니라 그들이 세운 도시들, 그들이 소유하였던 귀중품까지도 말한다.
=====105:45
이는 저희로 그 율례를 지키며 - 42-45절의 결론 부분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따라 광야에서 보호, 인도하신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 가나안을 허락하셨던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 이유 속에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나라로 만들어 세상을 대표하는 제사장 국가가 되게 하여 결국은 온 세상을 당신의 나라로 삼으려는 더 깊은 하나님의 의중이 담겨 있다.
본 시편은 이스라엘 초기 역사를 회고하며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사를 감사하는 시
이다. 전통에 따르면 본시는 시편에 나타난 다른 두 편의 시(78, 106편)와 함께 '역사
시'로 분류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는 본시가 여호와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권면(1-6
절)으로 시작하여 마지막에 '할렐루야'라는 찬양으로 마치고 있음을 볼 때 '역사시'보
다는 '감사시'의 범주에 넣고자 한다. 특히 우리는 히브리 사본상 전편(104편) 끝에
위치하고 있는 '할렐루야'(104:35)가 70인역 (LXX)에서는 본 시편 첫머리에 오고 있음
을 주목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1-5편과 106편이 '쌍동이 시'임을 주장한
다. 사실 106편과의 유사성은 '할렐루야'의 반복(106:1, 48)뿐 아니라 그 내용의 공통
된 특징에서도 발견된다. 다만 본시에서는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을 신실히 이행하셨다
는 사실이 부각되고 있는 반면 106편에서는 이스라엘의 불성실과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함께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104편 마지막의 '할렐루야'를 본시 초두
에 놓고, 이 두 시는(105, 106편) 동일한 감사와 찬양의 주제로 시편 제4권(90-106편)
을 장식하려는 편집자들의 의도를 반영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내용을 생각해
볼 때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본시의 목표가 단지 이스라엘 역사를 회고하는 것
자체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역사 배후에서 섭리하셨던 하나님의 행사를 기억하고
감사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한편 본시의 저자와 그 기록 배경을 결정하는 문제도 뚜렷한 증거를 발견할 수 없
으므로 곤란을 겪고 있다. 학자들의 주장 중 가장 근거가 있는 두 가지는 다윗 저작설
과 포로 후 저작설이다. 다윗이 본시의 자자라는 추측의 근거는 역대기 기록의 유사성
때문이다(대상16:8-22). 즉, 다윗은 일찍이 아비나답의 집에 있게 되었던 법궤(삼상
7:1, 2)를 다윗 성으로 옮겨 온 뒤 기쁨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대상 15:29). 그때 다
윗은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고, 레위인들에게는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하였으며(대상
16:1-6)자신은 즉흥적으로 시를 지어 불렀다는 것이다(대상16:7-36). 이처럼 역댁;에
나오는 다윗의 시가 본 시편과 일치하는 것을 볼 때 본시의 저자는 다윗이 분명하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반면에 포로 귀환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다. 어떤 무명의 백성이 바
벧론 포로에서 해방된 감격을 과거 조상들이 하나님의 인도로 가나안까지 들어오게 되
었던 사실과 연관시켜 노래했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포로 귀환 후 저작인 느헤미야서
에도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기초한 이스라엘 역사를 재해석하던 경향은 신정 국가의 회
복을 바라보던 귀환민들의 특징이었으므로 우리는 본시가 포로 후 어느 무명 시인의
저작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또한 몇몇 학자들은 본시가 예배 의식에 사용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한다. 그들은 본시가 단지 찬송가 형식을 채택하고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탁월한
시적 표현을 많이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하여 단순히 교훈적 의미를 담고 있
는 아름다운 시라고 말한다. 또한 쿰란 종파의 언약 갱신 의식과 유사한 점을 들어 본
시를 언약을 새롭게 하는 예식을 위해 지어졌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하지만 일반적으
로 본시는 이스라엘의 예배식을 위한 찬송이라고 알려져 있다. 왜냐하면 본시 전반부
(1-15절)의 내용이 성막을 예루살렘으로 옮긴 후 제사를 드리며 불렀던 다윗의 감사의
노래와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대상16:8-22).
장구한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를 회상하는 본시는 크게 찬양의 촉구와 함께 아블라
함부터 애굽 이주(移住)까지도 역사를 언급한 전반부(1-23절)와 출애굽부터 가나안 정
착까지의 여정을 기록한 후반부(24-25절)마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시대별로 구분해
보면 1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세우신 언약(7-15절), 2 요셉과 애굽 이주(16-23
절), 3 모세를 통한 열 재앙과 출애굽(24-38절), 4광야에서의 보호와 가나안 정착
(39-45절)등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어떤 학자는 본시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성취하기까지의 역사
로 보고 그 구조를 A->B->C->D->C'->B'->A'의 형태로 이루어진 교차 대구법으로 본다.
즉, 1 찬양에의 촉구(1-6절), 2 언약의 체결(7-11절), 3 하나님의 보호(12-15절),
4 하나님의 섭리(16-23절), 5 애굽에서의 보호(24-36절), 6 언약의 성취(37-44절),
7 결론적 찬양(45절) 등으로 구분한다.
이처럼 두 번에 걸친 구조 분석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본 시편은 우리에게 두
가지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 저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노래하고 있다. 아브라함과 세우셨던 하나님의
언약(창12:2, 3;13:14-17)은 이삭과 야곱에게서도 재차 확인된 것으로서, 가나안을 그
후손에게 주리라는 약속이었다(창15:7-21). 이 약속 이후 언약의 당사자들은 역사 속
의 인물로 사라져 갔지만 이 언약을 기억하는 후손들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 언약
을 성취해 나가는 과정을 신앙의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본 시편의 저자도 아브라함에
게서 시작된 하나님의 언약이 가나안 정복으로 이루어지기까지 그 모든 과정은 바로
하나님의 성실하심이 구체적으로 드러나 역사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님의 성실함에 대해 믿음과 성실로써 반응하도록 촉구하고 있다(45절).
또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일차적 성취는 가나안 입성과 정복이지만 그 언약의
본질적 성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게 된다(마1:1). 신약 시대 사도들은
아브라함의 약속과 예수 그리스도를 연결시켜 선포하고 있다(행 3:25, 26;7:2-50);롬
4:16-25). 결국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이스라엘 초기 역사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
언약의 결과를 예표적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
둘째, 본시에는 저자의 역사관이 나타난다. 예로부터 역사를 보는 관점들은 매우
다양했단. 혹자는 역사가 과거의 어느 시점을 계기로 계속 반복된다는 순환론적 역사
관을 말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역사가 계속적으로 발전한다는 진보적 역사관을 말했
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의도와 계획 그리고, 성취라는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한
다. 즉, 아브라함 때부터 가나안까지의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위한 발전
과정으로 본다. 그래서 '하나님'을 역사를 주관하는 원인으로 묘사한다. '기근'(16
절), '요셉을 보냄'(17절), '번성'(24절), '이적들'(28-36절), '땅을 줌'(44절) 등의
표현에서 행위자는 계속 하나님이시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역
사를 당신의 백성과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 섭리하시고 관여하신다. 그래서 시인은
역사가 반복이나 순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정하신 때, 곧 성취의 때를 향해 줄곧
나아간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관은 직선 사관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이는 하나
님께서 이 역사를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는 방향으로 진전시키신다는 의미를 함유한
다. 역사의 종궁에 이르면 하나님의 백성은 은혜와 영광을, 대적자들은 징벌과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몇 가지 교훈적 요소를 추론해 낼 수 있다. 1 역사는
우연이나 기계적 법칙에 의해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친히 행하시
는 하나님의 섭리적 영역이다. 2 하나님은 계획과 뜻,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서 자연
의 일반법칙을 초월하실 수 있다(출14:21-31;수6:15-21). 3 성도의 소망은 하가님의
신실하심에 있으므로 시험과 역경 속에서도 하나님의 의지하고 그 영원한 약속을 바라
보아야 한다(합3:17-19;롬5:1-5). 4 구원의 역사를 회상하며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
심을 찬양한 시인과 같이 성도들은 구원의 은총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엡1:3-6, 11-14).
1. 애굽 이주까지의 섭리(105:1-23)
본 단락은 찬양의 권유(1-6절)로붙터 시작해야 하나님이 족장들과 맺은 언약을 수
행하는 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이다. 특별히 여기서는 아브라함과 언약과 야곱 족
속이 모두 애굽으로 이주하기까지의 하나님의 행사를 주도적으로 서술한다.
애굽에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노래하는 본연은 크게 찬양을 촉구하는 전반부
(1-6절)와 과거 족장들의 역사를 회고하는 후반부(7-23절)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역사를 술회(述懷)하는 방식에 있어서 먼저 족장 시대(7-15절)를 말하고 이어서 요셉
의 애굽 생활(16-23절)을 서술한다. 이러한 순서는 하나님의 섭리적 행동에 초점을 맞
추려는 저자의 의도를 보여주는데, 의도 그 이면에는 시인의 하나님 중심적 역사 의식
이 숨어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 단락을 내용별로 나누어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
다.
첫째,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1-6절):시인은 먼저 찬양을 촉구하는 말로써 전체의
분위기를 예시한다. 특별히 시인은 여기서 명령형 동사들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예들
들면 '감사하라', '부르라', '알게하라'(1절), '노래하라', '찬양하라', '말하라'(12
절), '자랑하라', '즐거우라'(3절), '구하라'(4절), '기억하라'(5, 6절)등이다. 이는
모두 '찬양'에 대한 동의어로서 저자는 찬양하는 행동을 입체적으로 구성해서 예배의
아름다움과 조화로움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시인이 사용하는 동사들의 목적어를 살펴보면 주로 '하나님', '그 이
름', '그행사'(1절) 등이다. 이것은 찬양의 내용으로서 시인은 여기서 구체적으로 누
구에게, 그리고 무엇을 찬양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짧은 여섯 절의 서
두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적 기사와 구원의 이적들에 대해 전심으로 찬양하도록 요
첨함으로써 하나님의 행사(7-45절)를 살펴보기 위한 예지벅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것
이다.
둘째,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7-15절):시인은 '여호와의 행사를 기억하라'(6절)고
말함으로 찬송을 촉구한 후 이제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기사(奇事)를 회고하기 시작한
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본문의 역사 회고는 저자가 '언약'이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1 언약의 당사자(8-10절):여기서 시인은 먼저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언약을 체결하
셨다고 말한다(8, 10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셔서 언약을 체결하시고 믿음
의 조상으로 삼은 행위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과 계획의 결과였다(창12:1-3).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 이삭,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 백성의 계승 역시 협의나 의논에 의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로 결정되었다(창25:23).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언약의 당사자인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과 계속해서 언약을 갱신함으로써 처음 아브
라함과 맺은 언약을 확증하여 주셨다(창22:17;26:3, 4;28:13-15;35:12). 따라서 하나
님의 백성들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운 언약에 기초하여 살려고 노력했다.
2 언약의 내용(11절):시인은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삼는 것이 언약의 내용이었음을
언급한다. 물론 하나님의 언약의 본질은 물리적인 가나안 땅 자체에 있지 않고 하나님
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결한 삶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다. 더 나아가서
진정한 언약의 성취는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중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함으로써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된 것이다(눅1:72, 73).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특별
히 가나안 땅을 언약의 내용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시인의 역사 회고
마지막 부분이 가나안 정복에서 끝나고 있음으로 볼 때(44절), 아마도 점진적 언약의
성취를 강조하기 위함으로 생각된다.
3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보호(12-15절):여기서 시인은 언약 백성의 수가 매우 적
고 정착할 곳도 없는 객과 같았다고 말한다(12절). 창세기의 반 이상을 차지한 족장들
의 역사는 외적으로 보면 매우 처라하고 보잘 것 없었다(창12-38장). 하지만 시인은
곧 이어서 하나님이 언제나 보호하시고 지키신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14, 15절). 결국
여기서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하나님께서 힘없는 언약 백성을 보호하셨다는 사
실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실수나 부족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백성을 언약에 기초하여 신실하게 보호 하신다는 사실은(창 12:11-17;20:1-8;26:6-11)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큰 안위와 기쁨을 제공해 준다.
셋째, 요셉을 통한 섭리(16-23절):여기서 시인은 요셉의 역경과 야곱을 포함한 모
든 권속들이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특별히 시인이 사용하는
'기근을 불렀다', '양식을 끊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냈다'(16, 17절) 등의 표현은
야곱 권속의 애굽 이주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일이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기근으로부터 언약 백성을 보호하시고 장차 출애굽의 구원
역사를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정착을 계획하셨음을 간파하고 있다. 요셉
역시 총리대신이 된 후에 자신의 애굽 종살이가 하나님의 섭리적 과정이었음을 고백하
고 있는 것이다(창45:4-8).
이상의 내용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찬양의 목표는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고 감사하며 과거에 베푸신 구속 사건을 기억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모든 세상에 하나님의 행사를 증거하는 것(엡1:6, 11-14)이
다. 2하나님이 세운 언약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 그치지 않고 후세에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성도에게로 계승된다(갈3:6-9). 3 성도가 현세에서 당하는 고난은 요셉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성취하는 도구가 된다(에 4:6-14).
. 아브라함과 아식과 야곱의 여행로
+--------+---------------------------------------------------------------------+
|아브라함|갈데아 우르(창11:28)->시리아의 하란(창12:4-6)->벧엘(창12:8)->애굽(창 |
| |12:10-20)->가나안(창13:1-5)->그랄(창20-1)->브엘세바(창22:19) |
+--------+---------------------------------------------------------------------+
| 이 삭 |브엘세바(창21:2)->블레셋의 그랄(창26:6)->브엘세바(창26:33)->기럇아르 |
| |바(헤브론, 창35:27) |
+--------+---------------------------------------------------------------------+
| 야 곱 |브엘세바(창28:10)->하란(창29:4, 14 20)->기럇아르바(창35:27)->애굽(창 |
| |46:26) |
+--------+---------------------------------------------------------------------+
2.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105:24-45)
앞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으로 이어지는 언약의 역사와 요셉의 고난으로 인한
애굽 정착의 노정을 회고했던 시인은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충식할 분이심을 발견했다.
본연에 이르러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해 애굽의 기사와 광야 여정 그리고
가나안 입성까지도 역사를 기술하면서 부각시키고 있다.
특별히 본연에서는 전 단락과 다르게 하나님의 초월적인 행사와 권능의 섭리가 강
조되었는데 이러한 기적과 행사는 하나님의 언약 수행 의지가 점차 강화되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사실 애굽 재앙과 이적 등은 애굽 백성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깨닫고 두
려워하게 만들었던 반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확신하게 만들
었다(출10:1, 2;12:29-36;14:21-31). 그래서 이스라엘 후손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기억하도록 요구되어졌고 유월절이라는 출애굽 구원 기념 절기를 지키게 되었던 것이
다(출 12:1-14, 25-28).
이처럼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나타난 본 단락은 크게 1 모세와 아론
이 행한 애굽에서의 표적(24-36절), 2 광야에서의 보호와 언약의 성자취(37-45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두 부분에 대한 세부적인 고찰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표징으로서의 애굽 재앙(24-36절). 이 내용을 출 7:1-14:31)의 기사를 저자
가 나름대로 요약하고 간추린 것으로서 열 가지 쟁앙 중에서 여덟 가지만 선별하여 기
록했고 순서의 배열이 다르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출애굽기에 나타난 열 가지 재앙을 살펴보면 1 물이 피로 변함(출 7:14-25), 2
개구리 재앙(8:1-15), 3 이 재앙(9:8-12), 7 우박과 불 재앙(9:13-25), 8 메뚜기
재양(10:1-20), 9 흑암 재앙(9:8-12), 10 장자의 죽음(11:1-12:36)등의 순서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다섯째 재앙인 가축의 전염병과 여섯째 독종 재앙이 빠져 있다. 그
리고 순서에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 이 쟁앙들이 하나나님이 행하신 일이었다는 사실
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애굽 땅에서의 재앙은 언약 백성의 구원이라는 측면과 함께 당시 농경 국가인
애굽에서 신격화되고 있던 태양, 개구리, 나일 강 등의 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력한 존
재들임을 입증 하였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출 12:12).본 시편의 의도 역시 이방의
우상들과 비교할수 없는 하나님의 우월성을 강조함과 동시에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끝까지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을 드러내려는 것이었다.
둘째, 광야에서의 보호와 약속 성취(37-45절):시인은 출애굽을 이스라엘의 승리로
표현한다(37, 38절). 그런데 특이하게도 출애굽 구원 역사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홍해사건'(출14:21-31)에 대해 침묵하고 곧바로 광야에서의 일들을 언급한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39절), '만나와 메추라기'(40절), '반석에서의 물'(41절)등은 하나님
의 보호와 오래 참으심을 반영한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불평과
원망과 불순종으로 일관했다(출15:24;16:2, 3;17:2,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고, 구하는 모든 것들을 허락하셨다. 그러므로 시인은 하나님의 보호와 인
도가 백성들의 믿음과 순종의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아브라함과 언약을 신실하게 수
행하시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이라고 본다(42절).
이어서 시인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착의 진정한 의의는 하나님의 율례와 법을 자유
롭게 순종할 수 있는 실천적 공간의 수립이라고 결론을 내린다(45절). 이것은 하나님
이 이스라엘과 언약을 체결하실 때 여러 번 강조하신 말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이며,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 언약을 체결하셨으므로(출19:5, 6), 언
약 백성의 마땅한 의무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되는 것이었다(레11:44, 45;19:2).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신약의 성도들을 향하여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이라고 불
렀다(벧전 2:9). 결국 하나님의 도움으로 가나안을 소유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율법을 준행하고 죄를 배격하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할 의무와 특권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시인은 가나안 정착이 아브라함 언약의 일차적 성취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신
실하심을 나타내는 증표임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성실한 이행을 촉구
하고 있다(45절). 아울러 아브라함의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충만한
성취를 이루게 된다는 사실을 예표적으로 제시한다(마1:1;갈3:6-9, 29).
. 아브라함 언약의 신약적 성취. 모든 시편들이 언약에 대한 순종과 언약의 하나
님게 대한 신뢰라는 미덕을 반영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본 시편은
언약적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그래서 본 주제 강해에서는 성경에 나타난 언약 개
념을 '체결, 성취'라는 두 차원에서 정리해 볼 것이다. 하지만 그 분야의 광범위함을
고려할 때, 넓고 피상적인 확장은 파하고 본시의 주제가 되고 있는 '아브라함의 언약'
에 초점을 맞추려고 한다.
첫째, '언약'에 대한 예비적 고찰:'언약'이라는 용어는 히브리어로 '베리트'(
)인데 구약 성경에서 무려 280회나 사용되고 있다(25:10, 14;창6:18;신33:9;왕상
19:10, 14;느 1:5). 하지만 그 의미에 있어서는 만족할 만한 설명이 아직 없다. 다만
분명한 사실은 유대인들은 이 단어의 개념을 익히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특별히 구약의 언약 개념을 힛타이트 지방의 '군신 조약' 문서를 참고해서 당시의
언약 개념을 좀더 명확하게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약은 일방적으로 체결된
다. 이러한 의미에서 '언약'은 현대의 쌍방 계약과는 별개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도 협의나 숙의 없이 하나님의 선택과 결절에 의한 것이었다(창12:1-4). 2
언약 수납자에게는 의무적 순종이 따른다. 언약을 받아들이고 동의하고 준행한다는 차
원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적 언약 관계가 형성된다. 3 축복과 저주의 맹세가 선포
된다. 언약을 순종하여 지키는 자에게는 복이 수여되나 불순종하는 경우는 저주를 받
게 된다(신27:26).
둘째, 아브라함 언약의 내용:하나님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실 때 아
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시고(창12:1-3)계속해서 점진적으로 발전시키셨다(창15, 17
장). 창 15장에서는 짐승을 쪼개놓고 언약 체결식을 행했고(창15:7-17) 17장에서는 아
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고 언약의 징표인 할례를 명령함으로써 그 언약을
구체적으로 드러냈다(창17:1-4). 이때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의 내용은 대략 3가지로
정리된다. 1 자손의 창대함(창 12:2;15:5;17:2). 이 약속은 이삭을 시작으로 하여 애
굽 정착 이후에 어느 정도 가시적으로 실현되었다(24절;출1:7). 2 복의 근원이 됨(창
12:2;18:18). 3 가나안 땅을 얻음(창15:7, 18-21;17:8). 문자적으로는 여호수아의 가
나안 정복과 함께 성취못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삿1:27-36).
유대인들은 이러한 아브라함 언약이 선민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성취되었다고 믿는
다. 그러나 이 언약은 결토 문자적인 성취만을 의미하지 않고 좀더 궁국적이고 종말론
적인 관점으로 확장된다.
셋째, 아브라함 언약의 신약적 관점: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한 긍의 서신에서 아브라
함을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다(롬4:1). 뿐만 아니라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믿음
으로 말미암은 자이면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선언한다(롬4:16). 그래서 갈라디아 교
인들에게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녀'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
었다(갈3:7). 결국 바울이 생각했던 아브라함의 후손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
스도를 믿는 이방인까지도 포함되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가나안 땅을 얻으리라는 세 번째 언약만은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처럼 보
인다. 왜냐하면 현재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1차적 의
미로서 가나안 정착의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의 개
념은 좀더 포괄적이다. 즉 가나안 땅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약
속의 왕국을 기업으로 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한다(약2:5). 또 베드로는 부르심을 입는 것 곧 '구원'을 아브라함의 유업에 대한 상속으로 이해한다(벧전3:9).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아브라함 언약은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으며,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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