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90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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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1
대대에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도르 와도르'(* )의 문자적인 뜻은 '세대와 세대에'이다. 신 32:7에서도 동일한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 구절은 계속되는 세대에 있어서 동일한 분으로 나타나시는 하나님의 영원 불변성을 암시한다(히 13:8).
거처(* , 마온) - 문자 그대로 처소, 거주지를 뜻하는데 하나님의 처소인 성전(26:8), 하늘(68:5) 혹은 들짐승이 거처하는 동굴(렘 9:11; 나 2;12)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여행자가 잠시 머무는 처소,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 처소를뜻한다고 보는 것이 좋다. 그 이유는 이 용어가 광야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는 대목인 신 33:27에서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라와집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이리저리 행진하는 도중에 잠시간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우물 곁 혹은 사막의 종려 나무 아래 같은 곳이 머물 처소였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하시므로 그들은 그곳에서 집과 같은 평안과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 자신이 그들의 안식처였던 것이다.
되셨나이다 - 이 말은 문맥상 '스스로를 입증하셨다'로도 받아들여질 수 있다. 즉,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은혜는 조상 때부터 구체적으로 입증된 바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은 현재 하나님이 무엇을 하고 계시다는 진술일 뿐 아니라 과거의 경험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기자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이 확정된 거처가 없이 나그네처럼 지내던 시절에 하나님의 보호로 말미암아 축복을 받았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동일한 처신을 기대하며 자신도 나그네와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있다.

=====90:2
산이생기기 전...하나님이시니이다 - 시인은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관심과 배려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출생 메타포(metaphor)를 산들의 기원에 적용시키고 있다(욥 38:8; 잠 8:22 이하). 특히 '조성하시기'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흘렐'(* )은 흔히 아기의 출생을 가리킬 때사용되고 하는데(51:5; 사 26:17; 45:10; 51:2) 본절에서도 동일한 의미를 시사한다. 신 32:18에서 여호와는 이스라엘로 하여금생겨나게하신 분으로 묘사되고 있으므로 그 유사한 묘사를 세계 창조에 적용시키는 것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분절의 가장 중요한 초점은 우주 창조에 대한 설명이 아니라 창조주로서 피조세계보다 선재(先在)하시며 그 피조물들로서는 그 놀라운 위엄을 감히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신 영원한 하나님께 맞춰져 있다.

=====90:3
사람(* , 에노쉬) - 본 문액에서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서 한번은 죽을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생이라는 의미로 보면되겠다.(8:4; 103:15).
티끌로(* , 아드다카) - '먼지로' 혹은 '멸망으로'로 번역이 가능하나, 전자가 문맥상 더 자연스럽다. 진흙으로 지은 집에 사는 사람(욥 4:19)은 흙으로 부터 왔으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창 3:19).
돌아가라(* , 슈부) - 본 구절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가지이다. 하나는 티끌로 돌아가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고(Rashi), 또 하나는 새로운 세대의 발흥, 즉 한 세대가 가고 또 다른 세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다(Westermann). 전자로 볼 경우 본절은 동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고 후자로 볼 경우는 반의적 평행법이 적용된 구절이 되는데, 계속되는 내용이 인간의 유한성, 일시성, 덧없음을 다루고 있음을 고려할 때 전자를 취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90:4
천 년 - 창세기 5장에 나오는 구약의 조상들의 평균 수명인 천 년이 하나님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면 인간 수명 70년(10절)은 얼마나 무상(無商)한 것이겠는가! 하나님에게 있어서 천년은 인간에게 있어서 밤의 한 경점(벧후 3:8)과같다. 경점이란 밤을 네 등분한 것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시간으로는 네 시간인데 잠자고 있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 시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경점'이란 용어 때문에 굳이 파수꾼의 개념을 끌어들일 필요는 없다(A.A.Anderson).


=====90:5
주께서 저희를 홍수처럼 쓸어 가시나이다 - '제람탐'(* )을 직역하면 '당신이 그들을 쓸어버리십니다'이다. '쓸어버리다'로 번역되는 용어로서 문맥상 지위 고하(高下), 나이 등을 상관하지 않고 죽음이 인간의 생명을 쓸어가버리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구절 '저희는 잠간 자는 것 같으며'는 동의적 구절로 보아 '저의는 죽은 존재와 같으며'로 번역할 수 있다.
아침에 - 어떤 랍비들의 설명처럼 이 구절을 '젊은 시절에'로 볼 수 없다. 문자적 의미 그대로 이 구절은 '인간은 아침에 신선하게 피어나는 풀과 같은 존재이다'라는 뜻으로서 단지 그 의미를 강조하기 위하여 본절 상반절 뒤와 6절 앞부분에 놓인 것이다. 근동에서 한밤중의 폭우는 마술을 부린듯 일련의 큰 변화를 만든다고 한다. 저녁 무렵 마치 사막처럼 타버린 듯한 마른 들이 아침에는 초록 풀로 가득한 그린 필드가 된다는 것이다. 또한 태울듯 더운 바람이 불다가도 마치 저녁이 되기도 전에 들판은 추운 땅이 되고 만다고 한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인생의 무상함을 풀의 이미지를 빌어 표현하고 있다. 풀은 잠시 아름다운 꽃을 피우다가도 곧 시들어 버리기 마련이다(사 40:6; 벧전 1;24).

=====90:6
저녁에는 벤 바 되어 - '벤 바 되어'(* , 예몰렐)는 수동태로 쓰일 수도 있고 능동태로 쓰일 수도 있는데 각 경우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진다. 우선 전자로 쓰일 경우는 개역 셩경의 번역처럼 (제 삼자에 의하여) '베어짐을 당하다'를 의미하게 되고, 후자로 쓰일 경우에는 '말라버리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원문상의 구두점을 고려할 때 여기서는 후자가 더 타당한 것 같다(Ewald, Hupfeld). 본 용어의 원형인 '물'(* )이 '말라버린'이란 뜻으로 사용된 또 다른 용례인 신 23:27은 이 같은 주장의 객관적 지지 구절이 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본 구절은 아침에는 아름답게 피었다가 저녁 무렵에 맹렬한 태양의 열기로 인하여 타버린 풀의 꽃을 묘사한다.


=====90:7
우리는 주의노에 소멸되며(* , 키 칼리누 베아페카) -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는 당신의 분노에 의하여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이다. 서두의 '키'(* )는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이다. 바로 앞 문맥에서 인생의 무상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스라엘 공동체가 하나님의 노를 격동하여 멸망한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범죄에 빠질 때 이스라엘은 참으로 허망하고 비참한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은 인간의 죄성과 연약성에 대한 포괄절인 진술이 아니다. 특히 1인칭과 과거 시제의사용은 기자가 자기민족의 역사와 자기 자신의 실제적 체험을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90:8
우리의 은밀한 죄(* , 알루메누) - 직역하면 '우리의 비밀'이다. 이것은인간의 속에 있는 재적 실태(요 2:25)로서 자기 동료들 그리고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숨겨져 있는 오염과 죄책을 가리키므로 '우리의 비밀스러운 죄'로 번역해도 무방하며 이 경우 분절은 동의적 평행구가 되겠다. 결국 본문은 인간 생명의 유한성 곧 죽음이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았으며 하나님의 진노는 죄 때문임을 시사한다(창 2:17; 롬 5;12). 우리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죄의 본성은 타인은 물론 심지어는 자신까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앞에서는 벌거벗은 것 같이 모두 드러날 수밖에 없다(렘 16:17; 히 4;14).
빛(* , 마오르) - 시편에서는 이곳과 74:16에서만 나오는 히브리어이다. 대개 성경에서 '빛'이라는 뜻으로는 거의 '오르'(* )가 쓰인다(27:1;창 1:3; 삼하 23:4; 욥 3;16; 잠 6;23; 전 11:7 등). 여기서는 어두운 수렁과 같은 인간의 마음을 비추어서 그곳에 숨겨진 죄악을 끄집어내어 청산하기 위한 하나님 얼굴의 빛이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가장 유리한 평행구적 표현이 잠 15:30에 나타난다.

=====90:9
우리의 모든 날이주의분노 중에지니가며 - '지나가며'(* , 파누)는 '쇠퇴하다'를 뜻하므로(렘 6:4) 본 구절은 인생의 사는 날들이 스올의 암흑을 향하여 쇠퇴해 가는 것과 같음을 뜻한다. 신자를 포함한 모든 인생은 스올로 내려가 그 육신의 몸이 한번은 썩음을 당해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모든 인생이 에덴 동산에서 범했던, 우리의 시조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 징벌 아래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일식간에(* , 케모헤게) - 직역하면 '일순간의 생각(혹은 한숨)이다. 이 문구에 대해 영역본들은 다양하게 번역하고 있다. 예컨대, KJV는 '한마디 이야기처럼'(as a tale that is told), NIV는 '외마디 신음으로써'(with a moan), LB는 '한숨으로써'(whith sighing) 그리고 RSV는 '한숨과 같이'(like a sigh)등으로 번역한다. 욥 37:2; 겔 2:10 등을 참조할 때 '한숨(혹은 소리)과 같은'으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무튼 본 구절은 '짧막한 한마디 말', '금방 귀에서 사라져 버리는 한마디 소리', '한번 내쉬는 숨'처럼 빨리 지나가는 덧없는 인생을 묘사하는 구절임이 분명하다.


=====90:10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 '년수의 자랑'이란 바로 앞 구절 '강건하면 팔십'이란 구절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때, 천부적인 힘과 정력을 지녔거나 혹은 건강의 법칙을 이해하고 준수해왔기 때문에 평균 수명 칠십을 넘어 팔십을 살고 있는 노인들의 자부심을 가리킨다. 그리고 '수고'에 해당하는 '아말'(* )은 '지키게하는 노고'를 뜻한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평균 수명을 넘어 팔십 대를 넘었다고 할지라도 노인은 노인이기 때문에 그 힘이 점점 고잘되어 늘 지치고 피곤해 할 수밖에 없다는 뜻을 나타낸다. '슬픔'에 해당하는 '아웬'(* )은 '슬픔', 이외에 '무익함', '헛됨'(사 41:29; 슥 10:2), '고통' 등의 뜻도 내포하는 단어이다. 이상의 주해를 종합해 볼 때 본 구절이 주는 의미는, 비록 남달리 오래 사는 자라고 할지라도 이를 자랑할 이유가 없는데 그것은 계속 몸이 쇠약해가는 관계로 살아 있으나 안락함을 느낄 수 없고 결국 무익한 일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인생의 무상함을 다시 한번 강조해 주는 내용이라 하겠다.

=====90:11
누가 주의 의 능력을 알며...주의 진노를 알리이까 - 문맥상 본 구절은 인간이 천상적으로 하나님의 분노의 위력과 그것의 구체적인 실현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구절이라 하겠으며 강조하기 위하여 수사학적 질문을 사용하고 있다(전 2;19; 3:21). 굳이 신학적인 논쟁을 거치지 않고 실제적인 인간의 생활사, 인간의 성품 등만을 보아도 인간의 존재가 불행으로 가득찬 이유는 죄성 때문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요약해 주는 글귀가 있다. '인간은 한번은 죽는다는 사실과 궁극적으로 죄의 사슬에 묶여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은 멋대로 악을 행하고 있다'(Weiser).


=====90:12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 문맥적으로 볼 때 이것은 우리 인생의 덧없음 그리고 짧음들을 깊이 숙고하고 인생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존재인가를 배우게 해달라는 요청으로 해석하면 되겠다(Delitzsch). 특히 하나님의 무한성과 영원성에 비교할 때, 이러한 자각은 더욱 심화되기 마련이다(VanGemeren).
지혜의 마음을 얻게하소서 - 인생의 허망함과 짧음을 깨달은 자는 영원을 사모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의 품안에서 자족함을 누리고자 하는 바, 이것이 곧 지혜인 것이다. 여기서 '얻게 하소서'에 해당하는 '나비'(* )는 추수 때에 땅의 열매를 거두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기도 한다(삼하 9:10; 학 1:6). 결국 지혜의 마음, 곧 지혜로운 마음은 신령한 가르침을 통해 얻는 영적 열매와 같다. 이 지혜의 마음은 주께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에, 지혜롭기를 원하는 자는 매순간 범사에 하나님의 뜻을 간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다(잠 1:7).

=====90:13
여호와여 돌아오소서...주의 종들을 긍휼히 여기소서 - 본절 뒤에 이어지는 내용은 선행된 묵상의 풍부한 근원으로부터 나오게 된 기도이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인간은 일시적이며 죄악되다. 인간은 심지어 하나님의 진노의 손이 그 위에 있을 때에도 그의 죄를 깨닫지 못한다. 따라서 인생에게는 그의 죄성과 그 존재의 덧없음을 알게 할 신령한 가르침이 필요하다. 이렇게 묵상을 마친 모세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인생의 실체(實體)가 그러함을 묵상을 통해 절실히 깨달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 가까이에 계속 계셔 왔을 뿐 아니라 그들의 안식처가 되심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은 죄를 벌하시는 분임과 동시에 긍휼히 여기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모세는 그와 그의 백성이 신령한 지혜에 관한 교훈을 얻을 수 있기를 요청할 뿐 아니라 그들을 징계하셨던 하나님이 그의 인애(仁愛)로 그들을 방문하심으로써 슬픔의 밤이 물러가고 기쁨의 새벽이 시작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약속된 땅에서 그들이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 임하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사랑, 그의 인격적 현시, 그리고 축복을 모세는 기원하고 있다. 영적으로 이 기도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사함을 받고 땅 위에서의 순례자의 삶을 종결하고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하나님께 드리는 겸손한 기도롤 볼 수도 있다. '돌아오소서'는 출 32:12과 유사한 의미로 보면 되겠다. "...주의 맹렬한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90:14
아침에 - 아마도 시인은 고통, 슬픔을 '밤'으로 그리고, 이어지는 하나님의 자비로 인한 기쁨을 '아침'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 같다(alexander, Barnes).
주의 인자(( , 하스데카) - 이는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사랑을 뜻한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격은 불변적인 것이어서, 그 언약에 대한 인간편에서의 의무를 다하는 성도는 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게된다. 기자는 그 기쁨이 평생 지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90:15
곤고케 하신 날수대로와...화를 당한 년수대로 기쁘게 하소서 - 문자 그대로 곤고와 화를 당한 일수만큼 기쁨의 날들을 허락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즉, 그 민족이 오랫동안 수고했고 고통을 당했으니 지속적인 축복을 허락해 달라는 기도로 보아야 할 것이다(7-10절).이것은 일종의 보상을 원하는 기도인 바 그들이 부당하게 이방 군대들에 의하여 억압을 당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암시하고 있다(Kissane).


=====90:16
주의 행사(* , 파알레카) - 이 용어는 하나님의 섭리와(사 5:12) 구원(77:12) 혹은 심판(64:9)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사역을 가리키는 말로 종종 사용된다. 혹자는 이 단어의 복합성을 고려하여 복수형으로 번역하지만(your deeds, NIV; your miracles, LB) 시편 기자가 이 용어를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단수였던 사실을감안할 때(77:12; 92:4; 95:9; 합 3:2), 여기서도 단수형으로 보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thy work, KJV, RSV). 본 문맥에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진입, 곧 약속된 유업의 계승을 암시하는 것 같다. 한편 이 용어는 신 32:4을 제외하고는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
주의 영광(* , 하다레카) - 이는 주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위엄을 암시하는 용어인데(96:6; 104:1; 111:3) 여기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가나안 땅 진입 및 정복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성실하심과 선하심 그리고 그의 능력 및 은혜를 가리킨다.


=====90:17
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임하게 하사 - 여기서 '은총'(* , 노암)의 뜻은 '아름다움' 혹은 '즐겁게 하는 것'인데 70인역(LXX),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이것을'광채'로 번역하거 있다. '아름다움', '광채', 그리고 '즐겁게 하는 것' 등은 이스라엘을 향한 주의 은혜와 관심이 가시화 되어질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화되기를 원했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모세가 가나안 땅 입성을 앞에 두고 그들의 진입이 눈에 현저(顯著)한 하나님의 개입 가운데 무난히 진행되기를 원했던 것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다. 하나님의 구체적이고 현저한 그리고 가시적인 개입을 원했던 것은 하나님이 그들 민족과 동행하심을 분명히 알기 위한 마음 때문이었다.
우리 손의 행사를 견고케 하소서 - 문자적인 뜻은 '우리 손의 일들을 이루소서'이다. 본 시편이 가나안 땅 입성을 목표로 하는 광야 여정 속에서 기록된 것을 고려할 때 여기에서 '일들을 이루소서'란 이제 광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는 일이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소원이라 볼 수 있다. 그 소원의 정도가 강렬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저자는 동일한 내의 구절을 반복하고 있다.

 

 

 

   인생의 허무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본시는  1하나님의  영원성
(1-4절),  2인간의 유약성(5-12절),  3하나님 은총에의 희구(13-17절) 등으로  구성되
어 있다.
   특히 유일하게 모세에 의해서 기록된 본 시편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긍휼
안에서만 소망이 있음을 밝히고 도움을 구하는 '기도시'(prayer psalm)로  분류할  수
있다. 또한 본시는 하나님께 대한 간구와 아울러 아스리엘의 국가적 심판에 대한 슬픔
을 노해하는 비탄시적 요소도 지니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신앙으로  인
해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모든 출애굽 1세대들이 가나안 복지에 들어갈 수 없다는
하나님의 심판 선언(민 14장)을 듣고서 그 아픔을 시로 옮기게 되었던 것이다. 특별히
본시의 직접적인 원인(原因)이 되었던 것은 여리고 성을 탐지했던 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였다(민 13장). 정탐꾼들의 비관적인 보고를 접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인 동
시에 하나님의 메신저(messenger)였던 모세는 중보자적 직책과 책임감에서 오는  좌절
과 무기력 그리고 하나님의 공정하신 심판의 엄위로우심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아무런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인생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한편 본시에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인간의 왜소함이 대조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반면(2절), 인간은 들의 꽃과(6절)같고, 하나님은 산이
조성되기 전부터 계신 분(2절)인 반면 인간의 결국은 티끌(3절)에 불과하다고  묘사되
어 있다. 이런 수학적 대조를 통하여 본시는 결국 인생의 무상함을 더욱더 극대화시켜
주고 있으며, 하나님 없는 인생이 허무하며 슬픔과 고통뿐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시는 단지 절대와 상대, 영원과 시간을 대조하여 좌절과 실망
그리고 허무만을 부각시키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여기서 모세는 아침에 피었다가  저
녁에 베처지는 꽃과 같은 인생이 영원하신 하나님께 접붙힘을 받을 수 있는 연결 고리
를 제시한다(12절). 인간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거처에 터를 잡는다면  인생의  진정한
희락과 영생을 소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이러한 시인의 노래를 세 단락으로  구분
하여 좀더 심층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영원으로 진입된 인생의 기쁨을 함께 누릴 수 있
는 계기를 마련해 보기로 한다.

        1. 영원하신 하나님(90:1-4)
   처음부터 변함없이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묘사된 본연은 특별
히 하나님의 영원성에 초점을 맞추어 전개된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세상이  조정되기
이전부터 변치않고 존재하심을 강조하였다(2절). 이처럼 모세가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해 찬미한 경우는 홍해 사건 직후(출15:2-18)와 가나안 땅 진입  직전(신32:1-43)에
부른 노래가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당시 고대 근동을 주름잡던  애
굽의 강력한 군대가 홍해에 수장되는 것을 두 눈으로 목도한 감격을,  후자의  경우는
험난한 광야 40년 방황 길을 마감하고 이제 그토록 염원했던 약속의 땅에  발을  딛기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상기하면서 느끼는 기쁨을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위의 두 가
지 경우는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보고 옳은 찬양이었던 반면, 본시는 출애굽을 단행
한 이스라엘이 지금 당장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음과, 나중에 들어갈 때에도 출애굽 1
세대들은 제외될 것이라는 선언 직후에 저술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
은 모세의 신앙적 통찰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지금 찬양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찬양을 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주되
신 하나님께서 내리신 판결은 공의로우시고 절대 착오가 없으시리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확신은 하나님께서 지금 비록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지만  여전
히 자신들의 거처(1절)가 되신다는 고백에서 획인할 수 있다. 특히 시인은 여기서 '거
처'라는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광야 생활 중 회막을 통해서 이스라엘 중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연상케 함과 동시에, 이스라엘은 거처 없이 유랑하는 순례객들이라는 분위기
를 풍기고 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지금은 죄악으로 말미암아 광야를 유리(遊離)하는 방랑객에  불
과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회막을 통해서 임재하셔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는 강력한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하나
님께서 창조주시라는 신앙적 확신(2절)에서 비롯된다. 그는 하나님께서 시간을 초월하
여 영원히 존재하신다는 사실을 거듭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간을  초월하
신 하나님에게는 인생이 누렸던 가장 긴 횟수인 천년 가까운 시간도(창5:27)자나간 밤
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있다(4절). 이와같이  시간(4절)과  공간(2절)  너머
(beyond the time and space) 계시는 영원한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에게 죽음의  선고를
(3절) 내리기에 충분한 자충족적인(self-evident or complacent)권위를 지니신 분이시
다.
   이처럼 올바른 신 지식(God-knowledge)에 기초한 모세의 신앙은 실망과 좌절을  할
법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원하심을 노래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겸허하게  탄원
하도록 만들고 있다.

        2. 유약한 인생(90:5-11)
   하나님의 영원하심에 대한 고백 이후에 이어지는 본연은 초월적이신 하나님가 대비
되는 인생의 연약함을 구상적(具象的) 언어로 절실하게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유약한
인생은 두가지 측면에서 언급되는데, 첫째는 죄된 속성과 연관되고(7, 8절) 둘째는 짧
은 인생의 년수(10절)와 관련된다.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마음에 뿌리깊게  심겨져
있는 죄된 성향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진입을 죄절시켰을 뿐만 아니라  하
나님의 진노를 촉발시킴으로써, 인행의 소멸을 초래하게 된었다(7절). 또한  인생들에
게 허락한 이 땅에서의 년수는 천년을 밤의 한 경점(4절)처럼 여기시는 영원의 하나님
에 비하면 순식간에 날아가는 화살에 불과하다(9, 10절). 그래서 시인은 이처럼  유약
한 인생을 아침에 잠깐 꽃이 작열하는 태양에 의해 곧 시들어 버리는 것(5절)에  비유
하고 있다(102:4, 11;사40:7;약1:10, 11). 즉 인생이 최대한 천수를 누리면서  움켜쥔
부귀 영화도 일장 춘몽(一場春夢)에(5절) 불과할 뿐이다.
   이처럼 인생의 유약함을 노래한 모세의 시각은 강력한 지도력을 보여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로서의 모세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의 이러한 고백은 오히려 섣부른 보랏빛 희망을 남발하는 무책임한 선동 정치인의  공
약이나 미숙한 이상주의보다 휠씬 인간의 진실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
의 이러한 시각은 염세주의자의 고백과는 다르게 불신앙적인 이스라엘의 상태를  바로
진단한 데서 오는 당연한 귀결로서, 인간의 문제점은 오직 하나님 외에는  해결할  수
없음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스라엘의 불신앙 때문에 격노하신 하나님
께서 그들을 멸절시키기로 작성했을 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변호하고 나섰던 사
실을 기억해 볼 때, 이것은 단순한 무기력과 무책임과는 상당한 괴리가  있는  신앙적
관점으로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영원의 하나님 앞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
를 고백한 모세의 비관은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살아갈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외침으로
볼 수 있다.
   사실 인간의 연약함은 더 큰 성숙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발견하게 만든다. 하나님께
서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주셔서 더러운 죄악을 근절시키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
굽 후 광야 생황에서 그토록 많은 환란을 당했던  것도  그들의  죄가  원인이었다(창
3:16, 17:레26:14-20;민26:9, 10;삿20:10;잠15:10;렘1:16;30:14). 그러므로 우리는 인
생의 허무함을 발견할 때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출17:3;민21:5;신1:27;욥7:11)더욱
하나님만을 앙망하며 살아갈 것을 다지해야 할 것이다.

        3. 은총에는 귀의(90:12-17)
   본 단락에는 전체적인 분위기는 앞 단락의 내용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 단락이 작열하는 태양 앞에서 금방 시들어가는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유약성을 나
타내었으면, 여기서는 그 분위기가 강렬한 소망으로 급전된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반
전은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 지혜에서 비롯되었다(12절). 시인은 하나님께 짧은 인생
을 의미있게 살아갈 수 있는 참된 지혜와 경건을 구비할 수 있도록 기도하였다.  사실
영원한 순간, 절대와 상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유일한 접촉점, 곧  시들어  가는
꽃과 같은 인생이 하나님의 영원에 편입되는 길은 오직 지혜뿐인 것이다.
   인생이 '입김보다 가벼운 존재'(62:9)이지만, 하나님의 영원을 공유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분양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16절).
이러한 자각은 모세로 하여금 심판 가운데 있고, 마땅한 구제책이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 담대히 긍휼을 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13절). 또한 비
록 시공(時空)의 제한을 받는 연악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영원에 대한 약속을 믿고,
희락과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14, 15절). 하나님의 백성의 담대함은 여기서  그치
지 않고 후손들의 안녕에 대해서까지 염려할 수 있는 정도로(16절)  근본적인  평안을
소유하게 된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모세는 이스라엘의 불신앙으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역사적 상황 속에서, 창조전부터 영원하신 과거의 하나님과(2절) 자신의 후손에게  임
할 미래의 하나님(16절) 그리고 자신들에게 은총으로 임하기를 기원하는 현재의  하나
님(17절)을 동시에 관통하고 있는 모세의 위용(偉容)은, 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
계에서 뿐 아니라 시대의 간격을 이어주는 중보자로서의 역할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을 감안해 볼 때, 시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는 자혜의 마음(12절)일 것이다. 이 지혜는 위로 하나님의 영원을 깨닫게  하고, 아래로 인생의 무상함을 직시하게 할 뿐 아니라 영원에로의 연결을 가능케 해 주는 산소를 공급받는 호흡기와 같다고 하겠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통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의 소망과 기업이 영광의 풍성함과 성도들에게 베푸시는하나님의 능력의 강력을(엡1:17-19)깊이 묵상하면서 광야와 같은  세상에서  절망에의 유혹을 능히 물리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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