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1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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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1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 '여호와의 종들'(* , 아브데 예화)이란 레위인들이나 제사장들을 뜻할 수도 있으나(134:1), 보다 넓게는 여호와께 예배드리는 경건한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34:22;69:36). 본문에서 '여호와의 종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 앞에 선 그들의 의무와 책임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의 놀라운 특권 또한 강조하는 것이다(Anderson).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 이간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음받았으나 인간은 그 목적을 망각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며 그 영광을 경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찬양하라는 권고가 반복되는 것은 결코 지나친 것이 아니다.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열심을 내라는 의도에서 다시 한번 찬송을 촉구하였다.

=====113:2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 이는 어떠한 상황에 봉착할지라도 항상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우리의 생애가 비록 긴 것 같으나 아침 안개와 같은 것이 사실이므로 전생애에 걸쳐 하나님만을 찬송한다고 하더라도 극히 부족한 것이다. 우리가 이곳 장막 집을 떠나 새로운 집에 거하여 영원히 살게 될 때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의무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욥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리고도 이렇게 찬양하였다.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고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 1:21).

=====113:3
해 돋는 데서부터 해 지는 데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 하나님의 영광은 이스라엘이라는 지역에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에 걸쳐 찬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66:1, 4). 율법 아래 있을 때는 하나님이 유대 민족이라는 특정 집단에게만 찬양받았으나 이제는 하나님의 행사가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고 또 모든 민족이 하나님을 찬양함이 마땅하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스라엘의 불충한 제사장을 책망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 의해서만 분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말 1:11).

=====113:4
여호와는 모든 나라 위에 높으시며 - 하나님의 영광의 높으심에 대한 노래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그 찬란한 영광을 찬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것은 불경건한 이방인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 속에는 왜 그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지 않는가하는 책망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시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일에 등한히 하지 않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113: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자 누구리요 - 이 수사 의문문은 '아무도 없다'는 대답을 자연스럽게 유도한다(35:10;출 15:11;신 3:24;사 40:18, 25;46:5). 천상 천하(天上天下)에 하나님과 비교할 만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분은 만유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에서부터 9절까지에서는 하나님의 영광과 권세가 무한히 크심과 함께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그 인자하심 또한 무한함을 노래한다.

=====113: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 하늘 위에 초월해 계신 영광의 하나님이 연약하고 미천한 인간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아버지 같은 관심으로 그들을 돌보시고 계심을 뜻한다. 하나님이 한 순간이라도 돌보지 않는다면 이 세상은 즉시로 혼란과 무질서, 범죄와 악으로 파멸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113:7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 여기서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 )은 '허약한', '파리한', '가난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부당하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셨다(출 23:3). 그리고 '진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파르'(* )는 흙이나 먼지를 가리키는 말이며 비천한 상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기도 한다. 이사야는 바벨론의 멸망을 땅과 티끌에 비유한 바 있다. "처녀 딸 바벨론이여 내려 티끌에 앉으라 딸 갈대아여 보좌가 없어졌으니 땅에 앉으라..."(사 47:1) 궁핍한 자를 거름 무더기에서 드셔서 - 하나님의 섭리는 때로 우리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 가나안을 정복한 여호수아가 그러했으며,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또한 그러하였다. 우리의 이성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기이한 사건들을 접했을 때 우리는 이를 단순히 우연으로 돌려버려서는 안 된다. 자기 백성을 위해 엄청난 사건을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와 찬양을 돌려야 마땅한 것이다. 여기서 궁핍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예비욘'(* )은 '부족한', '가난한' 등의 뜻으로서 앞 어구의 '가난한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달'과 비슷한 말이다. 그리고 '거름 무더기'에 해당하는 '아쉐포트'(* )는 '싹쓸어내다'란 뜻의 히브리어 '솨파'(*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잿더미', '쓰레기 더미'란 뜻을 가지고 있다. 예레미야는 시온의 멸망을 한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진수를 먹던 자가 거리에 외로움이여 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길리운 자가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애 4:5).

=====113:8
방백들 곧 그 백성의 방백들과 함께 세우시며 - 미천한 처지에 있던 자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최고의 권세의 자리에 앉게 됨을 찬양하는 노래이다. 우리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놀라운 변화에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섭리에 감탄할 뿐인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비천한 자의 호소를 무시하지 않으신다. 그들이 언젠가는 지배자의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방백'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느디빔'(* )은 '관대한', '귀족'이란 뜻을 가진 '나디브'(* )의 복수 형태이다. 한나의 기도에는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시키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삼상 2:8)란 내용이 있다.

=====113:9
또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 아마도 시인은 한나의 기도를 염두에 둔 것 같다(삼상 2:5).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무자(無子)함을 흔히 수치 혹은 심지어는 하나님의 저주로까지 여겨졌다(창 16:2;20:18;삼상 1:5;눅 1:24, 25). 여기서 '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하바이트'(* )는 '가정'이나 '가족'을 뜻할 수도 있다(home, NIV, RSV).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 - 부귀 영화나 쾌락보다 자손을 갖는 것이 더 귀한 일이다. 하나님은 비천한 자를 높이시는 것과 같이 잉태치 못한 여자를 어미가 되게도 하신다. 여기서 '즐거운'에 해당하는 '세메하'(* )는 '기쁨', 특히(종교적인) '환희'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사야는 전에 고통받던 사람들이 빛을 받고 추수하는 즐거움과 탈취물을 나눌 때의 즐거움같이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라고 하였다(사 9:3).

 

 

 

   본시는 여호와를 3인칭으로 찬양하는 '찬송시'로서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으므로 '할렐시'(Hallel, 113-118편)라고 불리워지기도 한다. 전반적으로  하나님의
높으신 이름과 그 능력에 대한 힘찬 찬송이 뚜렷이 부각되어 있다. 특별힌 많은  찬양
시들이 여호와의 통치나 속성에 대해 노래한 반면 본시는 '구속의 은총을 위한 여호와
의 겸손' 이라는 조금은 색다르고 독특한 주제를 택하고 있다. 시인은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셨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낮은 위치에 있던비천한 자들을  높
이셨다고 노래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발적 비하는 그리스도의 서육신과 수난으로 귀
결되어 인류를 구속하는 은총의 근거가 된다(빌2:6-8). 시인은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지상의 인간을 돌보시고 구원하시는 은혜를 즐겁고 경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본시의 저술 시기에 관해서는 포로 이전인지 혹은 이후인지 정확히 결정할  수  없
다. 다만 본시는 114-118편과 함께 절기 예배시, 즉 월삭의 축제 혹은 봉헌의 축제 등
중요한 연례 행사 때에 주로 불려졌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본 시편과 114편은 각 가정
에서 유월절을 지킬 때에 식사하기 바로 직전에 불려졌고 115-118편은 삭사가 끝날 무
렵에 불리워졌다.
   한편 본시는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구속의 은총을 노래한 '찬양시'로 분류된다.  시
인은 하나님께서 하늘보다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이 땅으로 향하여 인간을  주시하시며
돌보시고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찬양해야 한다고 노래하고 있다. 특히 시인은  여기서
여호와의 존귀와 인간의 비천함을 대조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더욱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본시의 표현은 '한나의 노래'와 연관이  있다(삼상2:8).  물론
그녀의 노래를 그대로 반복하고 있지는 않으며 오히려 한나의 경험을  자신의  언어로
일반화시키고 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본시가 하나의 노래(삼상2:1-10)와 성모 마리
아의 송가(눅1:46-55)를 연결해 주시는 시편이라고 보았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여호와에 대한 찬양이 넘치고 있는 본시의 구성은 크게 세  부
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첫째 연(1-3절)은 찬양에의 부름, 둘째 연(4-6절)은 찬양의  내
용, 셋째 연(7-9절)은 여호와의 섭리에 대한 승리의 찬양을 나타내고 있다. 이제 이런
내용의 본시를 각 단락으로 세분하여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찬양에의 부름(113:1-3)
   본 연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종들에게 하나님을 진심으로 찬양하도록 3번씩이나  반
복해서 요청하고 있다(1, 2절). 여기서 '여호와의 종들'에 관해서는 율법에 따라 하나
님을 찬송하도록 위임받은 레위인이라고 보는 견해와 모든 신실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어느 쪽의 견해를 따르든지 관계없이 결국 본시
가 말하는 근본적인 의도는 언약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삶의  태도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왕 같은 제사장'(벧전 2:9)인 성도들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온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높여야 한다.
   앞에서 피조물은 당연히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피력한  시인은  이제
시공(時空)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송할 것을 권고한고 있다(115:18;121:8;131:3). 먼
저 시인은 '이제부터 영원까지' 즉 모든 세대들이 시간을 초월하여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것이라고 선포한다(2절). 이 일은 어느 시기엔가 가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온 시간
을 통해, 즉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전 생애를 통하여 변질됨이 없이 동일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시인은, 성도들이 인생이란 짧은  순례길
을 걸아가는 동안 전신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이어서 시인은 해 돋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즉 공간을 초월하여 여호와께 찬양
해야 함을 선포하고 있다.  이 구절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류의  동일
한 구주이심을 배울 수 있다. 만약 그분의 창조하심과 통치하심이 우주 전체의 영역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분은 절대자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땅 끝까지 가더라도 여전히 여
호와가 계심을 인식하고 시간과 정성을 드려서 찬미해야 한다.

                2. 찬양의 내용(113:4-6)
   높으신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묘사가 잘 나타나 있는 본연은 모든 인간의 권세보다
우월하시고 어떤 자연보다도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감동적으로 펼쳐지고  있
다. 또한 시인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한량없으신 사랑으로 자신
을 낮추신 겸손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6절).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욱
위대하시기 때문이다(4, 5절). 여호와는 천지에 홀로 높이시며 그분과 같은 자는 아무
도 없다(35:10;71:19;7713;89:6;출15:11;삼하7:22). 사실 조그마한  나라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거대한 열방의 민족들도 위대하신 여호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또한
그들의 신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감히 비교할 수도 없다.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며
시인은 하나님만이 홀로 찬양받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주장한다.
   두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자신의 위대하심을 고수하는 데 그치지  않으시고  친히
세상에 임재하셔서 자비롭게 섭리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6절). 하나님께서는  비천한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섬세하게 보살펴 주신다. 이러한 낮추심은 그의 외아들 예수 그
리스도를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신 성육신(Incarnation)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빌
2:5-11). 만약 하나님의 이러한 자비가 없다면 우리는 그에 대하여 공포와 전율을  느
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통하여 아무런 두려움 없이 기
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찬양(113:7-9)
   앞에서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의무와 내용을 언급한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구체적
인 행동을 통하여 더욱 분명한 찬양의이유를 발견한다. 먼저 여호와께서는 자비하심으
로 비천한 자들을 탁월하고 존귀한 자의 위치로 반전시키도록 섭리하신다고 말한다(7,
8절). 여기서 시인은 은총의 섭리를 예증하기 위하여 한나의 노래(삼상2:6-8)를  인용
하고 있다. 당시 수리아와 팔레스틴에서는 사회로부터 버림을 당한 사람들이 잿더미나
혹은 퇴비 위에 누워 낮에슨 지나가는 사람에게 구걸하고 밤에는 태양빛으로 따뜻해진
잿더미 안에서 잠을 청하고 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
들을 상류층에 속하는 방백들과 동동한 위치로 격상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게 된다는 영적  의미를  상기시켜
준다.
   또한 시인은 여호와께서 잉태치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를 주신다고 말한다(9절). 이
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여인들이 등장한다(사라, 라
헬, 한나 등). 특히 본 연은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어 고통과 바난을 받는 한나에게 어머니가 되는 축복을 통해 그를 존귀케 만들어 주셨음을 염두에 두고 있다. 한나는  사무엘을 잉태함으로 슬픔과 비난을 딛고 찬양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고난받는 사람들의 상황을  섭리적으로  역전시키셔서 영광과 존귀를 소유하도록 인도하시는 자비로우신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연약한 자를 자상하게 보살피시는 분으소서 찬양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은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과 존귀와 찬양을  온전히 돌려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찬양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시며(2, 3절), 위대하신 능력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위해서 자신을 낮추시는 겸손한 분이시다(6절).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의뢰하는 사람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아니하시고 궁극적으로 존귀하게 높이신다(9절).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는 명령을 우리의 지상 과제로 삼고 끊임없이 여호와를 찬양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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