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04장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104:1
존귀와 권위를 입으셨나이다 - 존귀와 위엄의 상징인 어복(御服)을 입은 왕의 모습을 연상케 하는 표현으로 왕되신 하나님을 암시한다(93:1).

=====104:2
주께서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시며 - 본 시편은 온 우주에 생명력과 기쁨을 쏟아 붓고 계시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하는 시편으로 알려져 있는데 기자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찬양케 하기 위하여 먼저 창세기 1장에 나오는 창조 기사의 내용을 자기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여기서 '빛을 입으시며'에 해당하는 '오테 오르' (* )의 문자적인 뜻은 '빛으로 두르고 있는'으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사역의 첫쨋날에 빛을 있게 하신 사실을 연상 시킨다. 일단 빛이 있은 후에 하나님은 그의 창조 사역을 계속적으로 진행하셨는데 이 사실을 기자는 '하나님이 빛으로 두르시고 계시다'라는 표현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 의해 생겨난 그 빛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만물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계속 유지, 보존시키심을 반영한다. 이 사실에 대한 근거는 '입으시며'의 히브리어 '오테'(* )가 분사형으로서 계속되는 동작을 나타낸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빛되신 하나님은 신약 시대에서도 변함없이 빛이시다(요 1:4-9; 요일 1:5). 한편 '옷을 입음같이'는 '카살마'(* )로서 문자적인 뜻은 '옷처럼'인데 빛을 옷에 비유한 본 대목에 대해 칼빈(Calvin)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기자는 빛과 옷의 비교를 통하여 하나님은 비가시적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광이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그 본질적 속성에 있어서 하나님은 접근이 불가한 빛 가운데 계시는 분임이 사실이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마치 의복을 입고 그 모습을 드러내듯이 그 영광을 온 세계에 비추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낸 하나님의 위엄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그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려고 하시는 아름다운 우주 만물에로 우리의 눈을 돌려야 하며 위험스러운 호기심을 가지고 그분의 본성의 신비를 파고 들려고 해서는 안된다'.
하늘을 휘장같이 치시며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휘장같이 하늘을 펼치십니다'이다. 사 40:22에도 동일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것은 창 1:6-8에 나오는 창조 사역 둘쨋날 행사의 약술(略述)이다. 하늘이란 아래, 위의 물을 구분하며 널리 퍼져 있는 공간인 궁창을 뜻한다(욥기 서론, '히브리인들의 우주관' 참조). 여기서의 '휘장같이'를 해석하는 견해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영광스러운 처소로서의 하늘을 강조하는 견해이며,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쉽게 하늘을 만드신 것을 강조하는 견해이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어거스틴(Augustine)과 같은 초대 교회 교부들을 비롯한 보수주의 학자들은 대체로 후자를 따르고 있다.

=====104:3
물에 - 창 1:7에 따르자면 궁창 위에 있는 물을 가리킨다.
누각(* , 알리오타이우) - 문자적인 뜻은 '그 위층의 방들'이다. 몇 개의 층들로 되어 있는 건물을 연상시키는 이 표현은 커다란 집의 위층에 있는 방, 혹은 지붕이 평평한 집의 지붕 위에 있는 방을 암시할 때 자주 사용된다(왕상 17:19; 왕하 1:2; 4:10). 본절에서는 마치 여호와의 궁전이 궁창 위에 있는 물들 위에 기초를 두고 세워진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말이다.
들보를 얹으시며 - 이 같은 비유적 표현을 감상하며 주의해야 할 한 가지 사실은 하나님이 만드신 하늘을 비롯한 그의 피조 세계는 그의 솜씨를 나타내며 그 영광을 간접적으로 계시할 뿐이라는 것이다. 거기에서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찾아낼 수 없다. 하나님의 존재를 발견하고 그분과 교제하는 가장 확실한 일은 오직 오랜 역사를 통해 계시된 그의 말씀을 묵상하고 탐구하는 것이다. 본 시편을 감상하며 지속적으로 염두에 둘 것이 바로 이 점이다(Calvin). 천지 창조를 통하여 하나님이 당신 자신에게 뭔가를 첨가하셨다는 식으로 상상해서는 안된다. 치장하듯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을 위해서 하셨을 뿐이다.
구름으로 자기 수레를 삼으시고 바람 날개로 다니시며 - 하나님은 마치 구름을 타고 다니시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하며(사 19;1; 단 7:13; 마 24:30) '날개 달린 말'과 같이 바람을 타고 다니는 분으로 묘사되기도 한다(Gunkel). 그러나 여기서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모든 자연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존재하며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아래 있다는 사실이다(148:7-14).


=====104:4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 본절에 대한 대표적인 해석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1) 하나님께서 그의 사자들을 바람이나 불과 같은 형태를 띠도록 만드셨다는 것, 곧 하나님께서 바람이나 불과 같은 강함, 민첩함, 오묘함 등으로 그의 사자들을 옷입히듯 하셨음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LXX, Briggs). (2) 하나님의 사자들(천사들)은 온갖 형태의 바람과 천둥, 불 따위의 조정을 떠맡은 비밀스러운 중재자들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구절이라는 견해이다. 이 견해를 따를 경우 우리 주위에서 느끼고 볼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자연력은 맹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천사들의 사역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바람과 물, 티끌과 불 등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본절은 이 모든 경이로운 조화가 천사들의 활약 때문이라는 것을 잘 보여준다. 이제 우리는 흔히 우연이라고 말하는 기후, 계절 따위를, 바람을 움직이고 불을 일으키는 사역을 그의 사역자들(천사들)에게 맡기신 하나님에게서 그 원인을 찾아야만 한다. 삼라 만상(森羅萬象)가운데 일어나는 모든 현상과 결과들을 볼 때마다 그 사역자들을 통해 그 같은 현상과 결과들을 낳게 하신 자비롭고 거룩하신 분 하나님을 상기 해야만 할 것이다'(Newman). (3) 하나님이 바람, 구름, 천둥, 번개 등과 같은 자연 현상들을 마치 천사들을 부리시듯이 마음대로 통제하신다는 사실을 나타낸다고 보는 견해이다(VanGemeren). 이 같은 세 견해 중에서 본 문맥이 피조 세계에 드러난 하나님의 주권과 위엄, 지혜와 영광을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3)의 견해가 가장 무난한 것 같다.

=====104:5
땅의 기초를 두사 영원히 요동치 않게 하셨나이다 - 여기서 '땅의 기초를 두사' (* , 야사드 에레츠 알 메코네하)의 문자적인 뜻은 '그가 그 기초들 위에 땅을 세우셨다'이다. 마치 지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들이 존재함을 연상시키는 본 표현 때문에 어떤 학자는 아예 '그가 지구 그 자체를 세우셨다'로 번역하기도 한다(Mendelssohn). 성경의 여러 곳에서는 본 구절의 원문적 의미와 유사한 뜻을 암시하고 있는데(욥 38:4-6; 잠 8:29) 본문의 핵심은 지구를 떠받치는 기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땅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한편, '영원히 요동치 않게'라는 표현은 지동설을 반대하던 학자 산체스(Sanchez)가 지동설을 주장하던 갈릴레오와 논쟁을 벌일때 강력하게 의존하였던 표현이라고 한다(Perowne). 성경은 오히려 지동설을 지지하는 듯한 구절을 갖고 있는데 그 구절은 욥 26:7이다 : '땅을 공간에 다시며'. 이것은 땅이 공중에서 내려온 어떤 줄에 매달려 있다는 뜻이 아니라 땅이 공중에 떠 있다는 의미이다.


=====104:6
땅을 바다로 덮으시매 물이 산들 위에 섰더니 - 여기서 기자는 빛이 창조되기 이전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는 듯한데 그 대상은 원시적 혼돈이다(창 1:2). 이방적 개념의 혼돈이란 땅과 물이 서로 뒤섞인 혼잡의 덩어리이다. 그러나 기자는 땅은 이미 형성되었고 그 형성된 모양을 물이 완전히 덮고 있는 상태를 혼돈으로 보고있다.


=====104:7
주의 견책을 인하여 도망하며 주의 우뢰 소리를 인하여 빨리 가서 - 외관상 본절의 문장 구조는 불완전한데 그것은 주어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절이 원문상 바로 앞절 후반절과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앞절의 주어를 본절의 주어로 삼는 것은 문제가 없다. 다시 말해서 본문의 주어는 물이다(70인역, 제롬역). 물이 하나님의 견책을 받고 우뢰 소리 같은 그분의 명령을 듣는다는 식의 표현은 무생물의 반(半)의인화적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기자는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여 물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정한 위치로 내려가고 그에 따라 수면 아래 있던 땅이 그 자태를 드러낸 창조 기사의 일부를 생생하고 박진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104:8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 갔나이다(* , 야알루 하림 예르두 베카오트) - 6절 하반절, 7절에서 계속적으로 주어로 인정되고 있는 '물'을 넣어 번역하면 '물들은 산들 위로 올라가며 골짜기들 속으로 가라앉기도 했다'이다. 이 번역은 대부분의 영역본들이 취하고 있는 것으로(they flowed over the mountains, they went down into the valleys, NIV) 문법적으로 수용할 만하며 땅을 덮고 있어서 혼돈 상태를 지속시켰던 물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제 위치로 향하고 있음을 묘사하던 선행절의 이미지를 계속 유지하고 있다는 면에서 긍정적 번역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이 번역은 6-9절의 주제와 연결성을 띠고 있다. 더욱이 이 번역은 107:26의 유사 문장 구조에 의하여 지지를 받는다.


=====104:9
물의 경계를 정하여 - 태고적 혼돈 상태의 물이 '정해진 지역에 함께 모아져서'(창 1:9) 땅과 바다가 분명하게 분리되었다는 말이다(욥 26:10; 38:10, 11; 잠 8:29; 렘 5:22). 따라서 이것은 절대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홍수 발생 중지에 대한 포고령이 아니다. 즉,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홍수가 전혀 발생하지 않게끔 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본 구절은 창조 때 처음으로 설정되었고 그후 노아 언약(창 9:9-16)을 통하여 확증된 일반적인 의미의 땅과 바다 사이의 경계를 암시할 뿐이다.


=====104:10
여호와께서 샘으로 골짜기에서 솟아나게 하시고 (* , 함솰레하 마아야님 바네할림) - 문자적인 뜻은 '샘물을 격류가 흐르는 수로를 따라 보내시는 분'이다. '골짜기'에 해당하는 '나할림'(* )은 격류가 흐르는 골짜기를 가리키는 말인데 흔히 알고 있는 사막의 와디(wadi)를 연상하면 된다. 이스라엘 민족의 통념에 있어서 샘물의 근원은 천지 창조 전의 혼돈과 같은 심연(深淵)이었다고 한다(Anderson). 마치 이러한 통념을 바꾸어 놓기라도 하는 듯이 기자는 그 샘물의 주관자가 하나님이신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104:11
들나귀들도 해갈하며 - 구약 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나타나는 구절인데 '들나귀들'로 번역된 '페라임'(* )은 '야생 나귀'(the asses, KJV; the wild donkeys, NIV)를 뜻하나 동의적 평행을 고려할 때 상반절의 주어에 해당하는 모든 들짐승을 대표하는 말로 보면 되겠다. 사람의 접근을 피하는 것이 그 특징인 들짐승에게도 그 필요를 공급하는 하나님의 자비의 손길은 끊이지 않는다.

=====104:12
공중의 새들이 그 가에서 깃들이며 - '공중의 새들'은 창 1:30; 2:19에서 자주 언급된 '공중의 모든 새', '공중의 각종 새'를 연상케 한다. 한편, '그 가'란 10절에서 '골짜기'로 번역된 '나할림'(* ), 곧 잎사귀들이 풍성한 나무들로 가득 찬 물이 흐르는 냇가 및 골짜기 양 옆의 '둑 위'를 가리킨다. 지켜주는 파수꾼도 없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는 사람도 없는 날짐승까지도 하나님은 먹이시고 입히셔서 그것들로 하여금 기쁜 노래까지 부르게 하신다.

=====104:13
저가 그 누각에서 산에 물을 주시니 - 3절에서 '누각'(* , 알리오타)은 궁창 위의 물 위에 세워진 것처럼 묘사된 하나님의 처소를 가리키나, 여기서는 차라리 '구름들'로 봄이 더 무난하겠다. 시인은 마치 하나님이 구름으로부터 혹은 구름 위로부터 물을 내리시고 계시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산'이 언급되고 있는 이유는 그곳 위에 구름이 있고 산들에서부터 강줄기가 발전되기 때문이다.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신 11:11, 애굽은 이와는 달리 나일강에서 물을 공급받았다). 말하자면 팔레스틴은 주로 하늘로부터 그리고 땅 속에서 먹을 물을 공급받았다(창자 49:25).
주의 행사의 결과가 땅에 풍족하도다(* , 미프리 마아세카 티스바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땅이 당신의 일의 열매로 만족해 하다'(the earth is satisfied with the fruit of the works, KJF)이다. 문자적으로 보면 여기서 '당신의 일의 열매'란 땅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그럴 경우 본문은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신 결과 온 땅에 풍성한 결실이 거두어짐을 묘사하는 내용으로 이해된다(Kirkpatrick). 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동의적 평행구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경우 '당신의 일의 열매'는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된다. 이렇게 해석해도 본절 이후 후속절에서 비로 인한 땅의 소산에 관한 묘사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Briggs, Davies).

=====104:14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시고(* , 레호치 레헴 민 하아레츠) - 문자적인 뜻은 '그가 땅으로부터 떡을 가져오시고'이다. 여기서 '떡'이란 후속절에 나오는 토지의 주요 3대 산물을 총칭하는 바 사람들의 양식을 뜻한다. 이같이 인간의 수고로 얻어지는것 같은 양식은 사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선물인 것이다.

=====104:15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 - '기름'(* , 솨멘)은 식용(민 11:8), 약(막 6:13), 향료(전 10:1), 등유(출 25:6), 화장품(룻 3:3)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여기서 특히 얼굴을 윤택케 한다고 표현한 것은 기름을 사용한 후의 그 기쁨의 광휘(光輝)가 얼굴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본절에서 기자의 시각은 귀한 비로 인한 땅의 만족으로부터 땅의 소산으로 인한 인간의 만족으로 바뀌고 있다.


=====104:16
여호와의 나무 - 이것을 '강한 나무' 혹은 '태고 원시림의 나무'로 보는 학자도 있으나(Kissane) 인간의 보살핌을 직접적으로 받지 않는 야생 수목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즉, 인간의 경작 및 관리하에 있는 포도나무나 올리브나무 따위와는 대비를 이루는 산야(山野)에서 자생하는 나무들로 본다는 말이다. 이것이 적절한 견해인 근거는 하반절이 그 나무를 산야에서 자생하는 백향목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인역(LXX)은 '평지의 나무'로 번역하고 있다.

=====104:17
학은 잣나무로 집을 삼는도다 - 여기서 '학'(* , 하시다)은 '경건한(애정있는) 새'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문맥상 보통 새보다 몸통이 큰 새라는 면에 그 강조점이 있다. 반면 12절과 본문의 '새들'이란 나뭇가지 위에서 요란하게 울어대는 몸집이 작은 새이다(Alexander, Perowne). 그리고 '잣나무'로 번역된 '로쉼' (* )은 레바논에서 서식하는 노간주나무의 일종이거나 가나안이 원산지인 전나무일것이다(IDB). 요컨대 본 구절은 하나님이 주신 비를 받아 잘 자란 수목 속에서 그 보금자리를 두고 사는 크고 작은 새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04:18
바위(* , 셀라임 마하세) - 여기서 '슬라임'은 '울퉁불퉁한 바위' 혹은 상징적으로 '요새'를 뜻하며, '마하세'는 '피난처'를 뜻한다. 따라서 본문의 '바위'는 험한 바위산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나무들이 새들이 깃드는 안식처이듯이 험준한 바위산은 야생 들짐승들이 안전히 쉴 수 있는 안식처라 할 수 있겠다(the crags are a refuge for the coneys, NIV).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을 위해 양식을 공급하실 뿐 아니라 처소도 마련하신다.
너구리(* , 솨파님) - 바위 너구리(coneys, NIV), 오소리(badgers, RSV)등으로 보고 있으나 정확히 어떤 짐승인지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되새김질하는 네발 달린 짐승인 것은 분명하다. 동일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레 11:5; 신 14:7 등이 그 증거이다.

=====104:19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 기자는 제 4일째의 창조 사역을 언급함에 있어서 밤을 주관하는 달을 먼저 소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히브리인들의 사고에 있어서 밤은 낮에 선행(先行)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기자의 저녁과 아침의 서술 배열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러한 암시를 엿볼 수 있다 :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창 1:5, 8, 13, 19등). 뿐만 아니라 본 시편 후반부에서도 먼저 밤의 광경이 서술되고(20, 21절), 후에 낮의 광경이 이어지고 있다(22, 23절). 한편 여기서의 '절기'를 문자 그대로 거룩한 절기, 혹은 대축제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인데 그 근거는 외경인 시락서(the wisdom of Jesus the Son of Sirach) 43:7에 두고 있다 : '달로부터 절기들의 신호를 찾노라.' 그러나 이곳 외에 동일한 암시를 주는 곳은 없다. 따라서 '절기'란 표현을 문자 그대로의 절기 대축제일로 못박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75:2에서는 동일 용어가 '정한 기약'(특정한 때) 정도로만 번역되어 있다.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 석양에 대한 본 언급은 후속절에서 이어질 밤의 광경에 대한 묘사의 자연스러운 배경이 되고 있다(욥 38:12; 렘 8:7).

=====104:20
기어 나오나이다 - 이에 해당하는 '라마스'(* )는 파충류나 어류의 움직임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창 1:21과 69:34의 동사형 그리고 25절의 명사형 '움직이는 것'(개역 성경에는 '생물'로 번역됨) 등도 바다 속의 피조물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되었다. 그런가 하면 창 1:24, 25의 명사형은 땅위의 '기는 것'을 뜻한다. 본문에서는 숲속의 짐승들에게 적용되고 있는데 이는 먹이를 찾거나 쫓기 위하여 짐승들이 살금살금 움직이는 모습이나 창 7:21의 '땅 위에 움직이는 생물'에서와 같이 기타 여러 종류의 동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다.

=====104:21
젊은 사자 - 이를 모든 들짐승의 대표로 해석하는 견해(Anderson)와 독자의 시선을 끌 만치 잘 알려진 짐승으로 해석하는 견해(Barnes)가 있는데 그 어떤 견해를 취해도 큰 무리는 없다. 다만 핵심은 숲속의 들짐승들도 그 생명 보존을 위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기다린다는 데에 있다 하겠다.

=====104:22
물러가서 그 굴혈(窟穴)에 눕고 - 여기서 '물러가서'는 '예아세푼' (* )으로서 직역하면 '그들 스스로 함께 모여'이다. 우리는 이러한 행동을 단순히 본능으로만 돌리기보다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게 해주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밤새 먹이를 찾아 이골짜기 저 골짜기를 헤매던 짐승들이 인솔자를 앞세우기나 한 듯 한 무리를 지어 안식처인 동굴 따위로 가서 가지런히 눕는 모습에서 우리는 저급한 동물의 본능이 아니라 자상한 하나님의 섭리, 간섭을 진하게 느끼게 되는 것이다.

=====104:23
사람은 나와서 노동하며 저녁까지 수고하는 도다 - 하나님의 섭리를 따르기 위하여 밤새 먹이를 찾아 헤매는 들짐승들의 모습을 뒤로하고, 이제 빛이 있는 하루 온종일 짐승들과는 대조적으로 열심히 일하는 장면이 연결되고 있다. 땅 위의 피조물들은 밤과 낮 할 것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섭리하에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단순히 하나님께 의지함으로써 하나님을 섬기지만 인간은 하나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의탁할 뿐 아니라 노동을 통해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섬겨야만 한다.


=====104:24
여호와의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 모든 피조물의 왕관 격인 인간에 대한 언급을 하고 나서 창조 사역 제 6일째 후의 안식을 염두에 둔 듯하다. 기자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의 다양성과 오묘함의 놀라운 경지를 토로하면서 지금까지 계속해온 천지 창조에 대한 묘사를 잠시 쉬고 있다. 즉, 기자는 본절을 기점으로 하여 지금까지 계속해온 하나님의 섭리 사역에 대한 기술로부터 그 모든 사물의 창조주이신 그분에 대한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가고 있다.
부요(* , 킨야네카) - 문자적인 뜻은 '당신의 소유물'이다. 이것은 '피조물'의 또 다른 표현으로 이해된다(your creatures, NIV).

=====104:25
대소 생물이 무수(無數)하니이다 - 여기서 '무수하다'는 것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뜻한다(innumerable, KJV; beyond number, NIV). 기자는 하나님의 피조 세계 중에는 그가 감히 말할 수 없는, 곧 알 수 없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다. 특히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바다는 땅에 비해 매우 신비로운 미지의 세계로 인식되었다(Anderson). 깊고 낮은 해연(海淵)들, 고래뿐 아니라 이름을 알 수 없는 작은 산호들이 이곳 저곳에 숨어있는 바닷속, 인간은 그 깊은 심연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104:26
악어(* , 리웨야탄) - 우가릿 문학에서는 바알의 원수로 알려진 동물이며, 70인역(LXX) 및 벌게이트역(Vulgate)등은 '용'으로 번역하고 있고, 몇몇 영역본들은 리워야단(the leviathan, KJV, NIV, RSV) 또는 고래(the whale)로 번역하였다. 그 성격을 분명히 알 수 없으나 몸집이 거대한 '미지의 괴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동물도 분명히 하나님의 통제하에 있다(74:14).

=====104:27
바라나이다(* , 사바르) - 아랍에서 더 자주 사용되는 본 용어는 일용할 양식을 갈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고 있는 145:15의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와 그 의미가 동일하다. 인간뿐 아니라 동물도 양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다.

=====104:28
취하며(* , 일르코툰) - 직역하면 '모으며'이다. 이 용어는 원래 돌멩이, 꽃, 이삭, 포도, 나무 따위를 '땅바닥으로부터 집어든다'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짐승이 먹을 양식을 얻게 됨을 가리킨다. 만나의 수확에 대한 암시로 보는 학자도 있는데(Hengstenberg) 그 근거가 전혀 없다.

=====104:29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 문자적으로는 주시하던 방향으로부터 시선을 전환시킨다는 뜻이나, 문맥상의 의미는 피조물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적 돌봄이 중단됨을 가리킨다. 본 구절은 성경 이곳 저곳에서 하나님의 분노 혹은 불쾌함을 나타낼 때 사용되고 있다(22:24; 102:2; 신 31:17, 18; 사 64:7 등).
저희가 떨고 - 원문상 동일한 표현을 30:7에서 볼 수 있다 : "주의 얼굴을 가리우시매 내가 '근심하였나이다'"(이외에 욥 23:15을 참조하라).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 흙으로 돌아가나이다 - '호흡'의 그 문자적인 뜻은 '영' 혹은 '생명의 호흡'(창 2:7)이다. '영'은 하나님께로 왔으니 결국 그분께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 '신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전 12:7). 육체 또한 생명의 호흡으로 말미암는 생기가 없을때 맨 처음 왔던 곳인 티끌로 돌아가기 마련이다(146:4; 창 3:19). 한편, '호흡을 취하신즉'은 '토세프 루함' (* )인데 이와 유사한 구절이 노아 홍수 기사에 나온다는 사실에 근거하여(창 6:17; 7:22) 본절과 노아 홍수 사건과의 연관성을 주장하는 자들도 있으나 문맥상 타당성이 없다.

=====104:30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 본 구절은 아담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기사를 적고있는 창 2:7에만 국한된 지엽적인 언급이 아니라 전체 창조에 있어서 위대한 생기 부여자로서의 성령을 묘사하고 잇는 창 1:2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생명체에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생명주입의 보편적 사역에 대한 언급으로 보아야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앞의 문맥은 생명체의 소멸을, 그리고 후 문맥은 새로운 생명체의 탄생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명의 주관자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생명체를 땅 위에 두시어 정한 기한까지 기식하며 살게 하시고 그 생명을 거두시고 또 다른 생명을 땅 위에 두시고 다시 거두시는 식으로 계속해서 새로운 생명들로 지면에 존속케 하신다. 세대에서 세대에로의 새로운 전환을 거듭함으로 땅은 새로움과 신선함을 계속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104:31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지며 - '영광'은 여호와의 현현(顯現)의 묘사로 흔히 사용된다(출 16:7, 10; 24:16, 17; 40:34, 35). 말하자면 그의 임재의 현시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것이다. 특히 본 문맥에서 저자는 창조사역 때 드러났던 하나님 임재의 영광이 영원할 것을 노래하고 있다. 하나님 임재의 영광의 영원성을 바라보는 피조물에게 요구되는 바는 순종이다. 결국 기자는 피조물의 복종, 순종을 끌어내기 위하여 임재 영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생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지로다 - 이것은 창조 사역을 마친 후 그 피조된 세계를 보고 선포하신 말씀인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31)를 연상시킨다.

=====104:32
계속해서 기자는 그의 영광 중의 엄위로우신 하나님께 대해 묘사하고 있다. 그가 한번 쳐다보면 땅은 떨 것이며 그가 한번 손을 대면 산들은 타버릴 것이며 그가 원하시면 이순간에 그가 만든 피조 세계는(無)로 돌아가버릴 것이다. 이 같은 묘사는 여호와의 능력, 그의 피조 세계에 대한 절대적 우월성을 암시한다.

=====104:33
나의 평생에 여호와께 노래하며 - '나의 평생'이란 육(肉)을 입고 있는 동안, 곧 땅 속에 묻히기 전까지를 뜻한다. 본문과 같은 표현은 "죽은 자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 내려가는 아무도 못하리로다"(115:17, 이외에 6:5을 참조하라)라고 하는 당시의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시한을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주어진 시한 동안만이라도 내내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기자는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 속에서 그의 기쁨을 발견하시고 역으로 사유가 가능한 피조물, 곧 인간은 그분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본질에 가깝고 고상한 창조의 조화이다.

=====104:34
나의 묵상을 가상히 여기시기를(* , 예에라브 알라이우시히) - 문자적인 뜻은 '나의 묵상이 그에게 달기를(즐겁기를)', 혹은 '그에 관한 나의 묵상이 달기를'로 볼 수 있는데, '여호와 앞에서 내가 즐거워한다'는 의미를 분명히 견지하고 있는 하반절과의 동의적 평행을 중시할 때 후자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렇다면 '그에 관한 나의 묵상이 달기를'이란 하나님의 품성과 사역에 대한 묵상을 통하여 기쁨을 발견하기 원한다는 말이다. 참 경건한 자의 성품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에 대해 묵상할 시간을 갖는다는 점이다. 그는 일단 규칙적인 시간을 정했으면 결코 돌이키지 않는다. 아무리 바쁜 일과 속에서도 그 시간을 생각하며 기뻐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진정한 기쁨, 행복을 발견한다. 그러나 죄인은 그렇지 않다. 묵상의 시간도 없고 그분을 기뻐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그를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사 30;11).

=====104:35
죄인을 땅에서 소멸하시며 악인을 다시 있지 못하게 하실지로다 - 진정한 의미의 가장 고상한 창조의 조화는 하나님이 그의 피조물속에서 기쁨을 발견하시고 사유 가능한 그의 피조물, 인간은 하나님을 통해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 조화는 무참히 깨지고 말았다. 마치 전파 방해로 인하여 채녈의 주파수를 맞출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죄가 세계에 무질서 불협화음을 가져온 것이다. 죄는 질서(cosmos)를 무질서로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이것을 깨닫고 있던 기자는 이제 선지적 소망을 가지고 죄인은 소멸되고 말 것이며 그리고 죄인이 없으므로 이 땅은 정결하게 되고 그 조화가 다시 회복될 것을, 그리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한번 더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선포하실 때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 속에서 기자는 자신의 영혼이 그리고 자기 주위에 있는 자들이 여호와를 기리며 찬양할 것을 권하면서 본 시편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본시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과 그 자으신 피조계를 보존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
양하는 사이다. 특히 본시는 시인이 시적 정서에 몰입하여 리듬을 맞추고 사상을 정리
하여 놓았기 때문에 그 시인의 생각과 자질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앞의 103편에서는 하나님이 특별히 그 백성들에게 긍휼과  인자하심으로  다스리는
것을 찬송하였지만, 본 시편에서는 자연계 즉 창조계 전체를  지으시고 유지하시는 하
나님의 권능이 칭송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두 시편은 하나님 나라의 두 차원 즉,은혜
의 왕국(103편)과 권능의 왕국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두 시편의 연관된 주제로 인해 어떤 학자들은 본시의 저자를 103편의  저자
인 다윗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다윗을 저자로 보는 학자들의 결정적 동기는 본시
의 서론과 결론에 나타나는 구절이 (1, 35절)앞의 103편에서 사용되었던 것과  똑같은
형태의 반복이라는 사실에 근거한다(103:1, 22). 또한 시인이 자신에게 여호와를 송축
하라고 반복해서 권고하는 표현 방법 때문에 70인역본에서는 다윗을 저자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러 학자들은 다윗 저작설을  부인한다.그들
에 따르면, 본시의 표제에 저자가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고 그리고 103편과  약간
의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더라도 두 시가 한 저자에 의해 기록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 문제에 대해 정확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다만  본시의
저자도 다윗과 마찬가지로 창조의 기사에 입각해서(창 1장) 대자연에 나타난 하나님의
솜씨를 묵상하면서 본시를 저술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비평 학자들은 본시가 자연의 신비를 묘사하는 고대 동방의 설화 형식과  관
련이 있다고 보고 특별히 애굽 창조 설화와의 연관성을 주장한다(주제 강해 참조). 그
들은 본 시편의 여러 부분이 애굽 설화의 형식, 어법 등과 비슷하다고 주장하면사 '밤
과 낮의 짐승의 묘사'(20-23절), '바다 위의 선척의 언급'(25, 26절),  '피조물의  생
(生)과 사(死)가 지은 자에게 달려 있다는 기록'(27-30절) 등을 예로 든다. 하지만 보
수 신학의 진영에서는 본 시편이 애굽 설화에서 기원을 찾으려는 시도를 일축한다. 본
시편이 애굽 또는 근동의 창조 설화와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애굽 설화가  해,  달
등의 자연 만물을 숭배하는 대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19, 24, 31절). 신학적으로도
피조된 태양을 예배하는 행위와 그 조성자를 예배하는 것 사이에는 엄격한 차이가  존
재한다. 저자가 본시를 통하여 이것을 일관되게 암시하는 이유도 바로 독자들에게  하
나님이 창조주되심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이다.
   한편 본 시편은 내용을 볼 때 '창조시'에 포함되어 있다(8, 33, 145편). 좀더 엄밀
히 분류하자면 본시는 창조의 기사를 묘사하는  '개인적  찬양시'(individual  praise
psalm)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처음과 마지막의 '내 영혼아'라는  자기  권면
(1, 35절)과 '나의'라는 1인칭 대명사의 사용(33, 34절) 때문이다. 또한 본시는  이스
라엘의 가을 절기인 초막절과 같은 때에 여러 회중들에 의해 불리워져 왔다.
   이처럼 하나님의 전 우주적 왕되심을 찬양하는 본시는 구조 자첵가 있어서도 창   
장의 창조 기사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있다. 이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                  
       |  구   분   |       시   104  편          | 창 1 장  |                  
       +------------+-----------------------------+----------+                  
       |   첫째날   |        '빛', 2절            |  3-5절   |                  
       |------------+-----------------------------+----------+                  
       |            |   '궁창으로 물을 나눔'      |          |                  
       |   둘째날   |        2-4절                |  6-8절   |                  
       +------------+-----------------------------+----------+                  
       |            |    '육지와 바다의 구분'     |          |                  
       |   셋째날   |   '식물류' 5-9절, 14-17절   |  9-13절  |                  
       +------------+-----------------------------+----------+                  
       |   넷째날   |    '일월성신', 19-23절      | 14-19절  |                  
       +------------+-----------------------------+----------+                  
       |  다섯째날  |   '물고기와 새', 25-26절    | 20-23절  |                  
       +------------+-----------------------------+----------+                  
       |  여섯째날  |   '동물과 사람', 21-24절    | 24-28절  |                  
       +------------+-----------------------------+----------+                  
   그러나 두 본문을 엄격히 대조해 보면 몇 가지 일치하지 않는 점들이  있다.  특히
창조의 순서가 일정하지 않은 것이나(11, 12절, 18절) 앞뒤 문맥과의  불일치성(32절)
등은 두본문의 연관성을 모호하게 만들기까지 한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후기에  다른
시인들이 내용을 첨가한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본 시편과  창  1장의
저자가 각각 다른 관점에서 창조의 기사를 서술했다는 사실에서 통일성을 찾게  된다.
즉, 창세기 기자는 창조 가사를 논리적이고 도식적으로 서술했던 반면 본시의  저자는
완성된 창조를 전체적인 관점에서 파악하고 풍부하고 다양한 어휘를 구사하면서  화려
한 문체를 묘사하고 있다. 이처럼 시인은 창 1장의 창조 기사에 기초하여 세상 만물을
지으시고 보존하시는 창조주의 왕권을 도자들로 하여금 찬양토록 하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앞의 시(103편)와 비슷한 A-B-C-D-C'-B'-A'의  교차  병행법(chiastic
parallelism)을 사용한다. 이러한 히브리시의 특징에 따라 본시는 1 하나님의  위엄과
왕적 권능을 찬양(1-4절)  2 땅과 바다의 창조(5-9절)  3 동물 창조의  신비(10-18절)  
4 피조 세계의 찬양(19-23절)  5 동물을 다스리심(24-26절)  6 땅의 생명을  보존하심
(27-30절)  7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31-35절)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참고하여 볼 때 본시는 다음의 두 가지 사실과 신학적  사상을
함축하고 있다.
   1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시인이 본시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 기사를  묘사
하고 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특히 시인은 '만들다'(      , 아사)라는 동사를  반복해
서 사용한다(4, 13, 19, 24, 31절). 이 단어는 본래 '무(無)로부터  유(有)를  생산한
다'는 의미로서 시인이 하나님의 창조주된심을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
다. 사실 고대 근동 국가에서는 하나님보다 오히려 자연계의 피조물들이 숭배의  대상
이었다. 사실 고대 근동 국가에서는 하나님보다 오히려 자연계의  피조물들이  숭배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자연의 존재를 객체로 보고 있다. 즉, 모든 자
연이 하나님의 창조적 힘에 의해 존재되었으며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반영한다는 사
고가 시인의 생각을 뒤덮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자연의 아름다
움을 묘사하다가 감격적인 찬양을 드리는 부분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24절).
   2 보존자이신 하나님의 은혜:시인은 하나님의 창조 사실뿐만 아니라 그 지으신  피
조세계를 하나님이 유지하시며 다스린다고 노래한다. 낮과 밤의 기한을  정한  것이나
(19-23절)생명체의 생존과 죽음까지도(27-30절)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시인이 여기서 말하려는 핵심은 하나님이 결코 창조만 하시고 방관하는  분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섭리하신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철학적  이신론(理神論)자들은  이
세상을 시계로 비유한다. 즉, 처음에 태엽을 감은 시계는 태엽이 다 풀릴 때까지 저절
로 돌아간다. 이처럼 세상도 하나님이 처음 창조해 놓은 상태로 유지될  뿐  하나님은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견해와는 반대로 천지  만물
이 하나님의 적극적 개입으로 인해 운행된다고 가르치는 것이다. 예수님도 산상수훈에
서, 공중의 새나 들의 백합화를 하나님이 기르시고  입히신다고(마6:25-32)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가르치신 바 있다.
   또한 본시와 같이 '창조시'의 범주에 들어가는 145편에서도 하나님의 창조의  기사
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시는 섭리가 나타난다. 그러나 창조의 사실을 전반적으로  조
명하여 하나님의 보논의 은혜까지 자세히 노한 시는 본 시편 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
서 본시는 창조시 중의 창조시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배우게 되는 교훈을 몇 가지로 정리해 보면 첫째, 피조물 중의 일
부인 우리 성도들은 해, 달, 자연의 생물들, 땅, 바다 등을 볼 때마다 피조물로서  마
땅히 드려야 할 영광과 찬송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148=5;엡1:3-14). 둘째, 모든 피
조물들은 절대적으로 창조주에 의존되어 있으므로 겸손하게 주의 뜻을 발견하고  순종
하면서 살아야한다(마6:33;약4:14-16).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방관자가 아
니라 피조 세계를 능동적으로 보존하시고 유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제
나 하나님의 통치와 인도를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1.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라(104:1-18)
   본 시편의 전분부인 본 단락은 하나님의 지혜로 만들어진 창조계를 묘사하는  부분
이다. 시인은 애굽의 근동의 창조 설화에 정통하였던 자로서 당시 팽배해  있던  자연
숭배의 이론을 창 1장에 근거하여 한마디로 일축해 버린다. 시인은 모든 만물은  하나
님의 피조물이므로 경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이렇게 창조주의 영광을 찬양하는 본문은, 먼저 자기 자기 영혼에게 찬양을 촉구하
는 내용(1절)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엄위하신 모습을 천체 구성물을  통해  묘사하는
전반부(2-4절), 딸과 바다의 기원을 언급하는 중반부(5-9절), 그리고 동물,  식물계의
신비를 노래하는 후반부(10-18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천체 구성물로 표현된 하나님의 창조 권능(1-4절):먼저 자신의 전인격에  여
호와를 찬양하라고 권면한 시인은 곧바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선포한다(1절).  '빛을
입고'(2절) '구름을 수레 삼고'(3절) '바람과 화염은 그의  사자요  사역자'(4절)라는
표현들은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드러낸다. 특히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인간처럼
나타낸는 '신인 동형 동성론'(anthromorphism) 적 표현법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자연계
의 관계를 그리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이 그 뜻대로 천상계를 포함한  모든  피조계를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생동감 넘치는 엄어로 묘사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생생한  표
현들은 하나님의 행동에 초점을 낮추어 독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그 피조 세계에  능
동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결국 시인은 여기서 자신이  직접
만든 창조계를 자유 자재로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왕적 권위와 창조주로서의 능력을 마
음껏 찬양하는 것이다. 신약 시대에 예수님께서 바람과 풍랑을 잔잔케 할  수  있었던
것도 예수님의 신성과 만물의 주(主)되심을 계시하는 증거라고 볼 수 있다(마8:23-27;
막6-45-52;요11:38-44).
   둘째, 땅의 기초와 바다의 경계를 정하신 하나님(5-9절):이 부분은 시인이  셋째날
의 창조 기사(창1:9, 10)와 연관시켜 노래한 부분으로 추정된다. 시인은 하나님이  물
을 한 곳에 모으시고 땅을 드러나게 하셨다는 기술에서 진일보하여 피조계가 하나님의
명령에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모습으로 의인하시키고 있다(6, 9절). 이처럼 저자가 '서
다', '도망하다', '빨리가다', '돌아오다'등의 표현을 사용한 의도는 창조주의 명령과
피조계(땅, 바다)의 변함없는 순응이라는 두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땅과  바다를
지으시고 그 경계를 지정하셨던 명령은 오직 '노아의 홍수'(창7:1-24)때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지켜지고 있었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위엄(9절)과 신실한  시행을
본문에서 감동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셋째, 동물, 식물계의 신비(10-18절):특별히 이 부분은  전반부(10-14a절)  10행과
후반부 (14b-18절)10행의 두 연이 결합되어 있다. 시인은 먼저 하가님이 생명들을  위
해 물을 공급하신다는 사실을 묘사한다. 여기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능동적인 주체자가
되시며(10, 11, 13절)그 행위의 객체가 되고 있는 '샘'(10절), '들짐승'(11절),  '새'
(12절)등은 산사이로 흐르거나 생명이 지속되는 은혜를 받고 있을 뿐이다. 그 뿐만 아
니라 시인은 사람과 동물을 위하여 식물을 자라게 하시고(14, 15절)그 나무에  적절한
비를 내려 주시는(16절) 하나님의 행위를 말한다. 그런 다음 하나님께서 하찮은  새와
짐승들의 보금자리까지도 섬세하게 예배하신다는 표현으로 본 단락을  마친다(17,  18
절). 결국 시인은 하나님의 지혜로운 창조와 아울러 피조 세계의 모든 부분을  구체적
으로 보호하시고 유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은총을 부각 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세 부분으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시인이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묘  막
측함을 노래하면서도 그 배후에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하시는 행위를  의도
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한  창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자연 속에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를 발견하는 시인의 겸허한 자세를
잘 보여준다. 욥도 빌닷의 세 번째 변론에 답변하면서 피조계에 대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언급하지만(욥26:5-14)어딘지 모르게 두렵고 엄격하신 하나님으로 묘사되는 느
낌을 받는다(욥26:5, 11, 12절). 그러나 본시에는 피조물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돌보시
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생동감있게 드러나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1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피조계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영광을 반영한다는 사실(롬1:29, 20절)과  2 성도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자연  만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이  실현되도
록 기도해야 함(마6:33)을 배울 수 있다.

        2. 창조주의 섭리를 찬양하라(104:19-35)
   앞에서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역사를 세말하고 장엄하게 묘사했던 시인은 본  단
락에서 하나님의 섭리적 은혜를 노래한다. 여기서 강조점은 '창조'에서 '섭리'로 옮겨
졌고 그 표현 형식은 앞서 논술한 A-B-C의 형태를 C'-B'-A'의 역순으로 병해시키고 있
다. 즉 시인은 창조 기사를 반복하면서 이제는 그 지은 피조계를 보존하시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초점을 맞추어 후반부를 기술하는 것이다.
   이처럼 창조주의 섭리를 부각시키고 있는 본연은 해와 달의 규칙성(19-23절)과, 하
나님의 창조 지혜에 대한 송영(24절)을 전환점으로, 바다의 동물들(25,  26절),  땅의
생명들의 보존(27-30절), 송축받을 하나님의 영광(31-35절) 순으로구성되어 있다.
   첫째, 창조계의 질서(19-23절):시인은 여기서 '달'과  '해'를  언급하며(19절)밤과
낮의 일정한 구분을 두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는 특별히 밤을 짐승들의 때로(20절),
낮을 사람들이 일하는 때로(23절) 하나님이 정하셨다고 설명한다. 뿐만  아니라  달로
절기를 정해 자연의 활동과 쉼을 반복케 하심도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가 아니고는  도
무지 불가능한 일임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송영과 바다의 신비(24-26절):시인은 앞에서 계속되어 오던 창조계의 묘사에
이어서 이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과 지혜에 대해 억누를 수 없는 찬송을 발하고 있
다(24절). 시인은 자연의 질서와 당양함을 '하나님의 지혜'라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린
다. 후에 관심을 바다로 전환시킨다. 수많은 해저 생물과 끝없이 드넓은 바다를  보면
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느끼고 경탄케 된다(25, 26절).                                    
   셋째, 모든 피조물을 보존하시는 하나님(27-30절):시인은 여기서 생명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을 묘사한다(28, 29절). 모든 피조계가 자기 힘과 본능으로 살아가는 것
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그 호흡을 붙잡고 계신다는 것이다. 특히 시인은  '주
신즉', '펴신즉'(28절), '숨기신즉', '취하신즉'(29절)등의 동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행위를 강조한다. 즉, 생명을 부여하시고 거두시는 권리가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있
다고 말한다. 결국 시인은 모든 생명체는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 아래에 있을 때만
존재와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노래하는 것이다.
   넷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결론적 찬양(31-35절):시인은 먼저  창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영원하며 하나님 스스로도 창조의 결과를 보며 만족하시를  간구한다
(31절). 이는 창 1장의 결론인 '하나님의 즐거움'(창 1:31)에 상응하는 부분이다.  시
인은 아마도 창조기사를 종결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지어진 창조계가 하나님께  영광
과 즐거움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했을 것이다. 그런 다음 시인은 결국 죄와 악의  외부
적 개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 아름다운 창조계를 유지하히고 보존하시기를  갈
망하면서 시를 끝맺고 있다(35절).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생명의 근원이 바로 여호와께 있으므로 우리는  겸손하
게 하나님의 뜻과 명령대로 살아가야 함을 깨닫게 된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떠한 일을 하든지  하나님
께 영광돌릴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고전 10:31).

   . 고대 근동의 문학과 104편의 관계.  여러 비평학자들은 본 시편이  어형.  형식,
주제등에서 고대 근동 지방의 신화 또는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유사한  점이  많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본 주제 강해에서는 고대 근동 문학, 특별히 애굽의 '아통에게 드리
는 찬미'라는 작품에 초점을 맞추어 저작 배경, 내용, 그리고 본  시편과의  연관성을
종합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에 대한 예비적 연구: 나일 강의 기적으로 유명한 애굽은
비옥한 토양과 기후 조건으로 고대 근동의 어느 나라보다도 풍성하고 성공적인 문화를
이룩하였다.특별히 종교적인 면에서 다양하고 고착되지 않은 신(神) 개념을 가지고 있
었으므로 항상 새로운 신을 추구하며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해  왔다.  태양신
'아톤'에게 바치는 노래의 역사는 이집트 왕국의 절정기의 번영을 구가하던 시대로 거
슬러 올라간다.
   당시, 전성기를 맞고 있던 황실의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는 아멘호텝     세가 종교
혁명을 주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집트 제 18대 왕조의 마지막 왕으로서 '아마르나
종교 혁명'을 단행하였다. 그는 먼저 자신의 이름을 '아멘호텝'(아몬이 기뻐하는자)에
서 '아큰아톤' (아톤에게 쓸모있는 자)으로 바꾸고 테베에 있던 수도를  텔-엘-아마르
나로 옮겼다. 그런 다음 테베의 전통적 태양신 '아몬'이 언급된 신전의  벽화와  비명
(碑銘)들을 말살시키고 새로운 태양신 '아톤'을 섬기도록 했다.
   이와 같은 '아마르나 종교 혁명'은 종교,정치, 예술,문학 전 영역에서 이집트의 전
통적이고 정체적인 인생관을 거부허던 혁명적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멘호텝4세
의 '아톤'신에 대한 경배는 찬가로 지어졌고, 왕 자신은 유일한 '아톤'의 아들로서 모
은 백성에게 숭배받는 지위가 되었던 것이다.
   2 찬가의 내용과 본 시편의 유사 표현:엘-아마르나에 있는한 무덤에서 발견된  '아
톤에게 바치는 찬미'는 약 10연이나 되는 긴 노래이다. 이  찬미에서는  주로  태양신
'아톤'의 우주적 보편성과 그의 창조와 재창조의 은혜라는 두 가지 사살이 주로  강조
되고 있다.뿐만 아니라'아크아톤'은 오직 '아톤' 신에게만 경배하기 때문에 '단일신론
'(monotheism)의 사상까지 나타난다.
   이러한 주제들은 본 시편의 내용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나고 있다.즉, 여호와의 창조
사역(1-9절)과 그분의 보호하시는 은혜(10-22절), 그리고 여호와의 주권(23-35절)  등
의 주제가 '아톤'을 위한 찬가와 비슷하다. 그래서 역사  비평학자들은사편의  저자가
이 이집트 찬가의 영향을 받아 본시를 기록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언어와
문체까지도 그 사상못지않게 유사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한다.즉, '사자가  굴  속에서
기어나온다'는 아톤찬미시의 표현은 본 시편20,21절의 묘사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
러한 방식으로 두 본문을 비교하여 보면 '동녁이 틀때 ...어둠을 몰아내고 햇살을  발
한다'(21절),'세상이 맡은 일을 해 나간다'(23절), '짐승은 풀로 만족하고, 나무와 풍
이 무성하고 새는 보금자리로 날아간다'(11, 12,14절), '배들이 북, 남쪽으로  향해가
며 강의 물고기가 뛰어오른다'(25, 26절), '당신이 만든 것이 얼마나 다양한지...세상
을 당신이 원하는 대로 지었다'(24절), '그들이 필요한 것을 제공해 준다'(27절), '하
늘에 나일강을 두고...산에 물결을 쳐서...동네 들판을 적셔준다'(6, 10, 13절),  '당
신이 떠오르면 그들은 살고 당신이 지시면 그들은 죽는다'(28-30절)등의 유사  표현을
나탄난다(Pritchard, James B.의 'Ancient Near Eastern Texts' 본문비교).
  결국 이와 같은 밀접한 영관성들 때문에 현대의 많은 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즉 본 시편의 시인은 아마도 고대 근동의 설화와 문학에 정통했던  사
람으로서 연대기적으로 이전 작품을(B.C.1300-1362)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의 영향을
받아 본 시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좀더 깊이 생각하면 두 본문  사이
에는 다음과 같은 좁힐 수 없는 상이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3 찬가와 본 시편의 차이점:'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와 본시의 가장 큰  차
이점은 전자가 피조물을 숭배하는 반면에 후자는 유일신 하나님만을 경배한다는  사실
이다. 즉,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에서 '아톤'신은 바로 태양(sun)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나 본시에서는 바로 그 태양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만을 예배한다.
   이러한 창조주에 대한 개념은 고대 근동 자방에서 발견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성
경적 사상이다. 65편에서는 대지에 임하신 하나님의 은총과 창조의  섭리를  감사하며
(65:8-13), 19편에서도 자연계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섭리하심이  묘사된다
(19:1-6). 특히 본시는 창 1장이 창조 기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으므로  창  1장을
기초로 해서 본 시편이 만들 어졌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본시는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이러한 점을 고려해 볼 때
본시는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기보다는 성경의 고유한  사
상을 전수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4 결론:고대 이집트나 근동 지방의 문화와 풍습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모세에게  수여된  십계명의  법조문은(출
20:1-24:18)주전1500년경부터 주전 700년 사이에 만들어진 '히타이트(Hittite)군신 조
약'들과 비슷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클라인(Meredith G. Kline)교수에 의해  밝
혀졌는데 군신 조약6가지 형식이 십계명의 여러 요소들과 부합된다. 그래서 고대 근동
의 '주종권 조약'은 성경을 이해하는 데 보조적인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형식이
유사하다고 해서 그 조약과 십계명의 본질적 내용이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성경이
힛타이트 조약의 형식을 취할 수는 있을지라도 십계명의 본질과 의도는 하나님과 백성
들 간의 언약이라는 독특한 의미를 함의한다.
   이처럼 '아톤에게 드리는 찬미'와 본 시편 또한 몇 부분의 형식과 표현 방법이  유
사하다고 할지라고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형식
과 문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본질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
러므로 형식과 문체의 유사성에 근거하여 내용의 연속성까지 주장하려고 시도하는  피
평학자들의 견해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최종적인 권위를 부여받는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단지  고
대 근동 지방에서 발견되는 문학 작품 중 하나로 취급함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상과 학문에 있어서 인간의 논리와 자료를 절대시하는 인본주의적 경향에서 탈피하여 절대적으로 계시 의존적 태도를 보유해야 할 것이다.


Articles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