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1
온 땅이여 - 93-99편에서와 마찬가지로 기자의 소망은 자기 민족, 자기 백성이라는 제한을 훨씬 넘어선 영역에까지 확대되고 있다. 그는 성령의 깊은 감동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음을 깨닫고서 온 이방, 온 세계도 구습을 타파하고 회개함으로 여호와를 인정하고 그 앞에 나와 기뻐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즐거이 부를지어다(* ,하리우) - '크게 외치다' 혹은 '개가를 올리다'는 뜻인 본 용어는 수도성에 입성하는 왕을 환영할 때 혹은 왕의 행렬을 맞이할 때 만백성과 신하들이 그에 대한 복종과 경의를 표하는 것을 묘사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66:1;98:4, 6). 비록 '여호와는 왕이시다'로 시작하고 있지는 않지만 본 시편은 그 내용상 여호와의 왕권과 통치를 노래하는 일련의 이전 시편들, 곧 93-99편을 끝맺는 송영 구실을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100:2
기쁨으로 -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드리는 일은 종교적 의무감에서 형식적으로 행해져서는 안 되며 받은 바 은혜와 축복을 기억하여 벅찬 감격 속에서 자발적으로 행해져야 함을 나타낸다(95 : 1 ; 사 51 : 11). 사도 바울은 이러한 예배를 '거룩한 산 제 사'라고 표현했다(름 12 : 1).
여호와를 섬기며 - 이것은 언약 백성과 하나님 사이의 광범위한 관계성(수 24:14 )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본절 하반절에 비추어 보건대 보다 구체적으로는 예배를 암시하는 것 같다(출 3 : 12 ; 사 19 : 21).
노래하면서 - 이 노래의 주제는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시고 계속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주권과 은총이 될것이다(107 : 22).
=====100:3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 , 예화 후 엘로힘) - 직역하면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다'이다. 이 표현은 모든 다른 신들을 부인하고 언약의 하나님 여호와 한 분에게만 충성을 다짐할 때 사용되는 잘 알려진 예식 용어이다(신 4 :35 ; 수 24 : 18; 왕상 18 :39).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유일신론(唯一神論)에 대한 확신을 엿보게 하는 용어이기도 하다(Barr).
알지어다(* , 데우) - 원형인 '야다'(* )는 단순한 지적인 경험 그이상을 의미한다. 특히 본 문맥에서는 오직 여호와께서만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 그리고 여호와의 주권에 대한 고백에 따르는 모든 요구들 및 의무들 가운데 자신을 포함시키라는 의미이다(신 4 : 39 ; 사 43 : 10 ;렘 3 : 13 ; 14 : 20).
그는 우리를 지으신 자시요 - 이것은 인간 창조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게 된것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사 43 : 1,21 ; 44 : 2 ; 60 : 21).
우리는 그의 것이니 - 원문상으로 본문은 '우리 자신이 아니라'로 읽히기도 한다. 영역 성경 KJV는 70인역(LXX)이나 벌게이트역(Vulgste)을 따라 '우리 자신이 아니라'(not we ourselves)로 옮겼고, NIV, RSV, 탈굼역(Targum)등은 개역 성경과 같이 옮겼다(we are his). KJV를 따를 경우 본문은 '우리를 만느신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요 결코 우리 스스로 된 것이 아니다'는 의미가 된다.
그의 기르시는 양(* , 촌 마리이토) - 직역하면 '그의 목장의 양'이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란 표현과 동의어로 사용된다(롑 23:2). 목자로서의하나님에 대한 비유는 신약 성경뿐만 아니라(눅 15 : 3-6 ;요 10 : 1-18) 구약 성경에도 자주 나온다(23 : 1 ; 74 : 1 ; 79 : 13 ; 95 : 7 ; 사 40 : 11 ; 겔 34 : 31).
=====100:4
그 문에 들어가며...들어가서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그의 상속자로 그리고 그의목장의 양으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이, 다른 민족은 그 동일한 특권의 혜택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도리어 모든 나라 백성은 언약 백성의 본을 좇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서 그 성전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드리도록 초청되고있다. 예언적 기대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사 2:2,3이 의미하는 바는 바로 그 같은 사실, 곧 이방인의 초대를 잘 묘사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종말론적 실제에 대한 묘사이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여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 의전에 이르자...." 하나님의 전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으므로 합당한 요건만 구비하면 누구나 그곳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곳에 들어가는자는 기대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자비가 무한하시고 그의 인애와 진실은 다함이 없고 실패가 없기 때문이다(Delitzsch).
=====100:5
본 시편의 서두는 광대한 비전으로 시작되었거니와(1절) 이제 장구한 기대와 소망 으로 끝을 맺는다(Kidner).
대저(* , 키) - '왜냐하면'을 뜻하는 본 접속사는 기자가 말하는 바 만백성이 여호와의 궁정에 들어가서 여호와께 찬양과 감사를 드려야 할 이유를 설명해 준다. 먼저 '선하시니'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내는 크신 능력과 대비를 이루는 '하나님의 풍성하신 자비'를 암시한다. 또한 '인자'는 인간의 죄를 징벌하는 하나님의 '공의'와 대비를 이루는 하나님의 '긍휼', '연민'을 암시하는데 이럴 경우 앞의 '선하심'과 본 '인자'는 그 의미가 유사한듯 보이나 그 대비를 이루는 내용들(각각 하나님의 '능력' 그리고 '공의')이 다르다는 면에서 좀더 뚜렷이 구별된다. 또한 '성실하심'은 오고가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의 선하심과 인자를 베푸신다는 점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우리는 이미 이 '성실하심'이 언약적 용어임을 주목한 바 있다.
주의 통치를 찬양하는 시들(95-100)중 마지막 결론부에 해당하는 본시는 '감사의
시'라는 표제가 붙은 시로서, 예배자들이 감사제의 예물을 가지고 성전문과 뜰을 통과
할 때 부른 노래이다. 본문에서 3점이나 박복되는 어구인 '나아갈지어다'(2절), '그
문에 들어가며'(4a절), '그 궁정에 들어가서'(4b절)등의 표현을 보더라도 본시가 성전
에 올라가는 노래로 사용되는었음을 알 수 있다. 본시는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
주변에 모여든 주의 백성들을 소집하고 예배자들이 의식에 참여하기 전에 하나님이 어
떤 분이신가를 다시 한번 마음에 떠올리면서 자발적인 감사와 기쁨의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유도하는 용도로 불리워진 노래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즐거움이 간결하고 함축적으로 표현된 '감사시'
(thanksgiving psalm)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원망이나 불평을 전혀 언급하지 않고
시종일관(始終一貫)온 땅이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본 시편은 내용에 의해서 예배에 대한 초청이 드러나느 부분(1, 2, 4절)과 예배에
동참한 사람들의 고백과 감사와 찬양이 나타나는 부분(3, 5절)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
다. 본고(本考)에서는 편의상 본시를 두 단락으로 나누어 각각의 의미에 대하여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기쁨과 감사의 고백(100:1-3)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태도에 대하여 명령적 어법으로 권고하고 있는 본연은 여호
와를 경배하고 찬양하는 즐거움을 생동감있게 묘사하고 있다. 시인은 먼저 모든 민족
이 하나님을 섬기고 사랑해야 한다고 말한다(1절). 시인은 구약 시대에 속해 있는 사
람이지만 구원이 혈통적 이스라엘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인류에게로 확산될 것임을 예
언적으로 기술한다. 예수님 승천하시기 전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고 명령하셨다(마28:19;막16:15;행1:8). 우리는 여기서 민족과 신분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특권과 의무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96:1).
시인은 온 인류에 찬양의 주체임을 분명히 한 후 이어서 찬양의 자세에 대하여 기
술한다(2절). 성도는 온전히 자발적인 마음으로 기쁘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해야 한
다. 만약 의무감 때문에 억지로 하거나 인색함으로 하면 하나님은 결코 열납(悅納)하
시지 않는다. 성도는 언제나 구원의 은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상기하면서 자
유스럽고 순전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성도는 하나님께 자신을 창조하시
고 성령과 말씀을 통해 거듭나게 하시며(벧전1:3, 23), 눈동자와 같이 보호하시는
(17:8;신32:10)것을 생각하면서 그분께 최상의 찬송을 드려야 한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께 기쁨으로 노래하고 찬양하는 삶을 요구한다(2절). 세상 사람
들이 소유하는 순간적인 즐거움과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순결하고 거룩한 영적인
기쁨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이러한 시인의 권고는 오늘날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통
찰력을 제공한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행위는 최상의 복이며 희락이다. 다른 인
간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극락(極樂)을 제공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
계를 맺고 영적으로 교제함으로써 거룩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시인은 인류를 창조하신 하나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찬미와 경배를 드리는 자세
가 피조물의 당연한 입장이라고 선언한다. 우리는 단순히 예배의 형식에 참가하는 것
으로 만족하지 말고 전심으로 여호와께 경배하기를 기뻐해야 한다.
2. 하나님에 대한 찬양(100:4-5)
모든 인간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대해 감사하고 경배할 것을 촉구한 후에 이어지
는 본연은 하나님의 성품에 근거하여 올바른 찬양을 요구하고 있다. 시인은 "감사함으
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써 믿는 모든 백성은 성전 문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찬양하고 하나님의 권위에 합당한 영광을 드려야 한다(96:8).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
의 임재 처소로서 그분의 거룩함이 가시(可視)적으로 드러나는 상징적 장소이기 때문
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서 예물을 드리고 제사를 수행하는 행위는 바로 하나
님을 섬기는 신성한 예배였다. 시인은 이처럼 엄중하고 심각하면서 즐거운 성전 예배
에 참석하는 예배자들이, 마땅히 하나님께 대한 찬미와 경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
다. 이러한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절기를 맞이하여 성전 안으로 입장하면서
예물을 드리고 은혜를 찬송하는 광경을 연상하게 만든다. 그렇지만 궁극적으로는 그리
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와 구원의 은혜를 체험한 후
감격하는 모든 십자가를 믿고 헌신과 찬양과 경배를 예표한다.
시인은 이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께 찬송할 이유로 그분
의 고귀한 속성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시며 성실하시다(5절). 하나님은 악
인과 선인에게 골고루 해를 비추시고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신다(마5:45;행14:17). 또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경외하는 모든 자녀들에게 결코 모관심하지 않으며 자상하게
보살피신다. 회개하는 자에게는 과거의 죄를 기억지도 아니하시며 용서와 사랑을 베푸
신다(86:5;사63:9). 하나님은 인색하지 않으시므로 당신의 백성에 대해 크고 놀랍고
풍성한 축복을 허락하신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인자가 영원히 지속된다
고 말하면서도 성도는 마땅히 하나님의 성하심을 기뻐하고 만족해야 한다고 말한다.
인가의 감정과 성품은 변화될 수 있으나 하나님은 영원히 성실하시다. 결코 변하지 아
니하시며 당신의 약속을 정확히 지키신다. 시인은 이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달라지지
않는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자고 소리 높여 외친다.
역기서 우리는 신앙이란 하나님과 교제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상태임을 알 수 있다. 신앙은 고리타분한 규칙을 준수하는 메마른 행위가 아니라 성삼위 하나님과 함께 친교를 나누는 충만한 기쁨이다. 만약 우리가 오랫동안 종교적 제도와 규칙을 준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오지 않고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다면 이것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전으로 올라가면서 부르는 즐거운 찬송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살아가는 성숙한 신앙인은 자연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이 흘러나와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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