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03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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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이것은 여호와 찬양을 위한 자기 권고적 표현일 뿐 아니라(104:1) 기자에게 기꺼이 하나님 찬양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기도 하다(Anderson).
내 속에 있는 것들 - 모든 사상, 온갖 감정이 작동하는 마음, 다시 말해서 의지, 양심, 이성, 정서 따위로 표현될 수 있는 인간 내부를 구성하고 있는 전인적 실체들을 가리킨다. 기자가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경배를 거론하는 대목에서 이 같은 전인적 실체들을 강조하는 이유는 외형적인,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를 배격하기 위함이다. 물론 천상에서나 그 완전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겠으나, 이 같은 전인적 실체를 동원한 예배를 드리겠다는 결심이 있다면 어느정도 훌륭한 영적 예배를 드릴 수 있겠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 6:5).

=====103:2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 여기서 '은택'이란 3절 이하에 열거되어 있는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역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잊지'에 해당하는 '솨카흐' (* )는 단순히 기억에서 빠져 나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그 이상의 의미 곧 하나님의 선함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말이다(119:16). 이렇게 볼 때 본문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도적인 무시를 경고하는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유사한 경고를 담고 있는 구절로는 신 4:9; 8:11-14 등이 있다. 또 실제적으로 히스기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은혜를 무시함에 따라 그 교만과 배은 망덕(背恩忘德)에 대한 대가로서 하나님의 진노가 저와 유다에 임했던 역사적 전철(前轍)이 있다 (대하 32:25).

=====103:3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 기자는 하나님의 은총에 감사해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독백하듯 선포한 후 과거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은총을 하나하나 열거하기 시작하는데(3-5절), 열거 내용 중 그가 처음으로 내놓은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유 (赦宥)의 은혜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총 중 가장 큰 것은 죄 용서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땅 위에 사는 동안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둘러싸여 사는데 그중에서도 죄 용서의 귀중함을 깨닫지 못한다면 인간은 하나님의 은총에 관해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게 되고 만다. 이 사실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유명한 교부(敎父)인 어거스틴(Augustine; A.D. 354-430년)이 명확히 갈파한 바이다 : '우리 앞에 있는 우리 자신의 죄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 하나님의 은총이란 없을 것이다'.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 여기서 '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타할루아임' (* )인데 동일 용어가 사용된 신 29:22; 대하 21:19; 렘 14:18; 16:4 등의 문맥을 고려할 때 육체적 질병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며 모두 복수형으로 되어 있는 것을 중시할때 '모든 육체적 질병'으로 번역해도 무리가 없다. 저자는 자신이 육체적 질병으로부터 회복된 과거를 기억하며 이 같은 고백을 하고 있는 것 같다(Barnes). 본문에 언급된 하나님의 위대한 치유 능력에 대해서도 어거스틴(Augustine)은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 '죄 용서함 받은 후에도 인간은 여전히 온전하지 못한 신체를 이끌고 다녀야 한다...죽음(사망)이 완히 삼키움을 당하지 않은 까닭에 육체는 아직도 불완전에서 해방되지 못하였고 따라서 그 육체에 거하는 영혼은 유혹과 시험으로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질병은 완전히 치유될 수 있다. 우리는 질병들을 너무 중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되신 하나님은 그 질병보다 더 중한 (큰) 분이시다. 전능하신 그 의사에게 못고칠 질병이란 없다. 그의 손을 뿌리치지 말라. 인간의사는 때때로 실수를 범한다. 왜? 그것은 인간 의사는 자신이 치료를 수행하고 있는 그 환자를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환자를 만드셨다. 하나님은 그의 영혼을 만드셨다. 그는 그가 창조하였던 자를 재창조하는 법을 아신다. 그는 자신이 형성하였던 자를 재형성하실 수 있다. 그 의사의 손 아래 너 자신을 맡기라...그의 손을 의지하라. 모든 그의 택들을 잊지 않음으로 그분을 송축하라. 그는 모든 질병을 치료하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10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 하마스비아 바토브 에드예크) - 직역하면 '좋은 것들로 너의 입을 만족케 하시는'이다. 문자 그대로의 번역을 따르면 본 구절은 일용할 양식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세심하신 배려를 나타내는 내용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본문 해석의 초점은 '너의 입'이 아니라 '좋은 것들'에 맞추어져야 한다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 '네 소원'으로 번역된 '에드예크'(* )는 '너의 노년'(갈대아역), '너의 소원'(아라비아역, 70인역, 벌게이트역), '너의 몸'(시리아역)등의 유력한 다른 번역들이 있어서 원문의 핵심적 의미를 규정하기 힘든 반면, '좋은 것들'로 번역된 '토브'(* )는 그 근원인 하나님의 은택을 강조하는 용어로 익히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Perowne). '우리의 영혼은 좋은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좋은 것이란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 가장 좋은 것, 그것은 하나님뿐이시다. 그분만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만족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한 분만을 추구해야 한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을 기자는 본 구절을 통해 말하고자 한 것이다. 물론 '좋은 것'이란 기자가 과거의 역사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한 무엇이며, 그 경험은 하나님으로 인해 되어졌다.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 이 비유는 사 40:31의 표현을 연상시키며 그 소재는 독수리의 신속한 날개짓에서 취하여진 바 힘과 활력을 나타낸다(신 28:49; 삼하 1:23; 렘 4:13). 모든 좋은 것, 가장 좋은 것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고 그분만을 추구하는 자는 날마다 독수리의 날개침 같은 힘과 활력을 부여 받게 될 것이다.

=====103:6
의로운 일...판단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체다코트'(* ), '미쉬파팀'(* )인데 어미의 형태를 보아 알 수 있듯이(히브리어에서 복수형은 어미가 ' '혹은 ' '으로 되어 있음) 두 단어 모두 복수형이다. 이 복수형은 (1) 그 단수형의 의미를 강화하기 위하여, 혹은 (2) 그것을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이 그의 의로움을 나타내 보이셨던 '수많은 행사들'을 암시하기 위하여 사용된 것이 분명한데, 문맥상으로는 후자가 좀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
압박당하는 모든 자 - 일차적으로는 고통당했던 이스라엘 민족 공동체를 가리키지만, 좀더 넓게는 역사 속에서 계속해서 환난과 핍박을 받았던 교회를 암시한다. 지금까지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였던 기자는 (1-5절) 본절에서부터 언약 공동체에 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6-18절). 즉, 기자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해서 언약 공동체에게도 동일하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다시리시는 하나님에 대해 진술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 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은총은 온 이스라엘에 미치는 거대한 은총의 범주의 일부에 불과하다.

=====103:7
행위(* , 데라키) - 본 용어 자체는 '어떤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나 의도'(18:21; 25:4, 9; 37:34), '도덕적 성향, 성품'(39:1; 50:23) 등을 뜻하지만, 본 문맥상으로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은 자가 그 후에 땅 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규례들, 개인을 포함한 민족, 교회 공동체를 향한 전 포괄적인 하나님의 경륜등을 뜻한다. 우리는 모세의 기도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참으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었사오면 원컨대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출 33:13).

=====103:8
본절 전체는 출 34:6에서 따온 것같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 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특히 이스라엘을 향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오래 참으심을 명백히 드러내고 있는 대표적인 부분은 신 4-10장; 27-31장이라고 볼 수 있다.

=====103:9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 '경책지'에 해당하는 '라야브'(* )는 '다투다', '겨루다', '법정으로 가다'등을 뜻하는데 여기서는 정한 율법에 따라 행위를 계속해서 추궁한다는 의미로 사용된 것 같다. 하나님은 율법에 의하여 그 백성을 판단하신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죄사함의 과정을 통해 당신의 무한하신 자비를 드러내시는데 그 까닭은 죄악된 그 백성의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만일 하나님이 율법의 규례에 따라 철저히 그 행위를 따진다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다. "내가 영원히는 다투지 아니하며 내가 장구히는 노하지 아니할 것은 나의 지은 그 영과 혼이 내 앞에서 곤비할까 함이니라"(사 57:16).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 '품지'로 번역된 '이토르'(* )는 절대적 의미를 지닌 동사로서(Alexander) '기필코...을 계속해서 유지하다'라는 의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자에 대해서는 그 노를 결코 계속해서 갖고 계시지 않으신다. 레 19:18에 동일한 동사가 사용된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말며...."=====103:10 죄...죄악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각각 '헤트'(* )와 '아온' (* )이다. 우선 '헤트'는 어원적인 의미에 있어서 '표적을 벗어남', '실수'등을 뜻하며 (욥 5:24; 잠 8:36; 19:2). 함축적인 의미에 있어서는 한 사람이 그의 자의적인 선택을 따라 표적을 벗어나 길을 잃는 것까지도 포함한다(Smith). 또한 '아온'은 '구부러지다', '비틀리다' 혹은 '실수하다', '방황하다' 등을 뜻하는 어근에서 파생되었는데 따라서 이 명사는 '구부러짐', '왜곡됨' 혹은 '실수', '바른 길에서의 이탈'등이 되겠다. 많은 학자들이 후자의 의미를 더 선호한다(Anderson). 그러나 전자로 보든지 후자로 보든지 강조점은 그 같은 행위가 우연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인 행위라는 사실에 있다.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볼 때 '헤트'와 '아온'은 약간의 의미상의 차이는 있지만 주체의 의도성을 반영한다는 면에서 동일한 용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의도성을 띤 죄악을 용납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 징벌의 동기는 그 범법자를 멸망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그를 범법으로부터 돌이키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징벌조차도 그의 자비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103:11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성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36:5)와 유사한 표현이다. 하늘과 땅의 거리는 인간의 측량기로 잴 수 없을 만큼 무한하고 끝이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그분 자신만큼이나 무한하고 끝이 없다. 물론 여기의 자비와 사랑은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를 둔 것이다(26:3).

=====103:12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죄과를...멀리 옮기셨으며 - 여기서 '죄과'란 '폐솨' (* )로서 어원적으로는 신적(神的) 권위에 대항하는 행위로 말미암은 결과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본문은 그 같은 심각한 죄악을 저지른 자라도 진정 회개하면 하나님이 크신 자비를 베푸사 완전히 용서하신다는 점을 묘사하고 있는데, 유사 사상을 지닌 표현이 미 7:19에 나타나고 있다 : "다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103:13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불쌍히 여기시나니 - 자신이 숭배하는 신(神)을 아버지로 보는 개념은 고대적인 것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근동 민족들 가운데서도 발견된다. 일례로 우가릿(Ugarit)에서는 '엘'(El)이 신들의 아비였을 뿐 아니라 인류의 시조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은 단순한 혈통적 관계보다는 순종하는 자와 은혜를 베푸시는 분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Gray). 시편에 있어서도 부자(父子)관계는 혈통상, 민족상의 문제보다는 오히려 순종의 문제에 역점이 두어져 있다. 하나님의 자녀란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뜻대로 살아가는 자인 것이다(11절).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성을 언급하고 있는 곳으로는 출 4:22; 신 14:1; 32:6; 사 1:2; 45:11; 63:16; 64:8; 렘 3:4, 19; 31:9; 호 11:1; 말 1:6; 2:10; 3:17 등이 있다(Eichrodt, Ringgren).

=====103:14
체질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이츠레누'(* )로서 '구조', '형태'등을 뜻하는데 특히 이는 인간이 땅의 티끌로 만들어진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창 2:7에서 사용된 동사 '야차르'(* )에서 파생한 명사이다. 부서지기 쉬움, 연약성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을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욥 7:5). 이를 달리 말하자면, 티끌과 진흙으로써 지음받은 연약한 인생은(욥 4:19; 34:15; 전 3:20; 12:7)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써만 진정한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 된다(78:38).


=====103:15
인생(* , 에노쉬) - 히브리어 성경은 인간을 가리킬 때 '에노쉬'와 '벤 아담'(* )을 사용하는데(68:18; 신 32:26; 잠 23:28; 욜 1:12), 특히 태어나지만 반드시 한번은 죽는 존재로서의 유한한 인간을 뜻할 때 주로 '에노쉬'을 사용한다. 한편, '에노쉬'를 '최선의 상태인 인간'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으나 별로 설득력이 없다(Davies).
그 날이 풀과 같으며 - 본 회화적 묘사는 인간 존재 본질의 일시성을 강조한다. 유사 표현으로는 90:5; 욥 14:2; 사 40:6, 7; 51:12등이 있다.
꽃과 같도다 - 곧 시들어버리는 것이 특징인 꽃이 인생의 영화(榮華)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꽃'은 '치이츠'(* )로서 그 문자적인 뜻은 '빛나는 것' 혹은 '반짝이는 무엇'이며 봄철에 침울한 광경을 밝고 다채로운 색상으로 바꾸어버리는 들에 핀 꽃들을 가리킬 때 주로 사용된다.

=====103:16
그것은 바람이 지나면 없어지나니 - 사막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열풍은 들판의 화초들을 순식간에 말려버린다고 한다. 기자는 인생의 덧없음과 유한성을 이러한 열풍에 사그러지고 마는 화초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Anderson).

=====103: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 하나님의 사랑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 하나는 하나님을 몰라 그분을 경외할 줄 모르는 자들에게도 베푸는 일반적 차원의 사랑이다 : "...이는 하나님이그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마 5:45).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알고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각별한 사랑인데 본 구절의 '인자'가 바로 그 사랑을 가리킨다. 그 사랑의 내용은 자자 손손(子子孫孫)에 미치는 사랑이요, 영생을 베푸시는 사랑이다. '인자'에 해당하는 '헤세드'(* )는 언약적 용어이다. 하나님께서 한번 택한 백성과 맺은 언약에 의거해서 당신의 주도적이고도 신실하신 은혜로 말미암아 그 백성을 신실하게 사랑하심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용어인 것이다(26:3 등).
의(* , 체데크) - 이것은 어떤 행위를 하기로 결심한 두 상대의 관계성을 암시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쓰인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이 용어는 '건져냄(구원)'(22:31; 40:9; 51:14; 65:5; 69:27). '승리'(사 41:2), '변호'(103:6), '의로운 도움'(71:24) 그리고 '상급'(106:31) 등과 관련한 문맥에서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부정적인 관점에서는 악인에게 내리는 징벌과 관련하여 사용되기도 한다(119:75). 그리고 본절의 문맥에서는 언약에 명기된 율법을 준행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신실성을 의미한다.

=====103:18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 - 본절에서 기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 곧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특성을 좀더 자세히 정의하고 있는데 그는 곧 언약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이다(55:20). 단순히 말씀을 아는 자가 아니라 행하는 자라고 기자는 분명히 그 한계를 긋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자의 후손이 그 조상과 마찬가지로 의의 축복을 받는 유일한 비결 또한 오로지 하나, 하나님의 말씀에 착념하는 일이다.

=====103:19
여호와께서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 '보좌'의 히브리어 '케세'(* )는 문자적으로 왕이 앉는 자리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현왕(賢王) 솔로몬의 왕좌는 잘 장식되어지고 키가 높은 등받이가 달려 있었다(왕상 10:18). 그러나 여기서는 세상 만물과 인생을 통치하시는 여호와의 처소를 나타낸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의 통치의 개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법궤라고 하는 가시적(可視的) 처소를 통해 표출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법궤는 비가시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통치를 상징하는 보좌였던 것이다(Davies). 한편, 본문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암시하는 보좌가 하늘에 세워졌다는 것은 결코 요동함이나 변함이 없는 하나님의 보좌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세상 왕의 보좌는 사망에 의하여 그리고 반란과 혁명에 의하여 그 주인이 바뀐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좌는 결코 그 주인이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굳게 고정된 보좌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자자손손 영원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부여된다는 확신의 토대는 바로 영원히 굳게 고정된 하나님의 보좌에 근거하고 있다(11:4).

=====103: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이루며 그 말씀의 소리를 듣는 너희 천사 (* , 말라카 깁보레 코아흐 오세 데바로 리쉬모아 베콜 데바로) - 이것을 직역하면 '그의 말씀의 소리에 순종하여 그의 말씀을 실행하는 힘의 용사들'이다. 이것은 하늘 보좌를 둘러싸고 서서 여호와의 명령을 기다리다가 명령이 떨어지면 즉각 그 명령을 수행하는 다양한 계급의 천사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힘의 용사들'로 번역이 된 '말라카 깁보레'(* )는 구약 성경에 1회만 등장하는 용어이므로 그 의미를 정확히 규정하기가 쉽지 않으나, 사해 사본 등에 나오는 유사 용어 연구를 통해 볼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강력히 수행하는 '천사들'로 봄이 합당하다. 기자는 모든 축복과 영예와 능력이 하늘 보좌에 앉은 그분에게서 나왔음을 찬양하는 대열에 먼저 그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을 부르고 있다.

=====103:21
천군(* , 체바아) - 원래 이 말은 천상적(天上的) 존재인 천사들의 군사적 성격을 강조할 때 사용하는 용어인데 본 문맥에서의 의미에 대한 해석으로는 '별들'(148:3). 일반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천상적 존재'등이 있다. 그러나 본절이 서술하고 있는 '체바아이우'의 성격을 볼 때 그것은 앞절의 그것과 동일하다. 그러하다면 '체바아'는 앞절에서 그 의미가 명확히 규정된 대로 '천사들'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기자는 찬양 대열에로의 천사들의 초청을 반복 강조하고 있다.

=====103:22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 여기서 '너희'는 천사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을 함축하는 말이다. 기자는 모든 피조물을 하나님 찬양에로 초대한 후 서두처럼 자신의 하나님 찬양으로 돌아와 본 시편을 끝맺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 점에서 출발한 선이 커다란 원을 그리고 다시 그 점으로 돌아오는 그림을 연상하면서 어떤 문학적 정형성을 염두에 둔 본 시편 기자의 의중을 읽게 된다.

 

 

 

   본 시편은 시인 자신과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 그리고 모든 창조계에 베풀어진  은
택들로 인해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의시이다. 특히 본시는 전체 시편  중에서
도 문학적 가치와 예술적 구성, 그리고 내용의 심오함에 있어서 탁월한  시로  알려져
있다. 게다가 본시 전체에 흐르고 있는 밝고 힘찬 분위기는 다윗의 시편에서 느낄  수
있는 감동과 환희를 자아내게까지 한다(145편).
   이처럼 시의 어휘와 문체 속에서 표현된 시인의 내면 세계나 표제어의 언급은 본시
가 다윗에 의해 만들어졌음을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본시의 다윗 저작
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에 의하면 본시에는 아람어화된 접미사가  많이나타나는
데 이러한 언어 형태는 본시가 다윗의 저작임을 모호하게  한다는  것이다(116:7;왕하
4:1-7). 또한 어떤 학자들은 본시가 앞에 게재된 102편의 내용과  비슷하다는  이유를
들어 두 시가 바벧론 유수 말기의 한 저자에 의해 저작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8, 11, 13, 17절과 102:13).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대의 주경학자들은 본시의 저자와 저작 시기에 관한  논의를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다. 그러나 표제의 기원을 받아들이고 본시가 어느 정도 101편
에서 약속된 '자비와 공의'의 통치를 언급한다는 사실(8, 12, 19,  22절)을  생각하면
조심스럽게 다윗 저작설을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구체적인 저작 시기를 알 순 없지만
본시의 전체에 채색되어 있는 찬양과 감사의 분위기로 볼 때 다윗 통치의 절정기 때에
저작된 시로 추정할 수 있다.
   한편, 본시가 시편 분류상 어떤 유형(genre)에 속하는 지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
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주장은 크게 두 가지인데 '찬양시'와 '감사시'로의  분류
방식이다.
   1 본시를 찬양시로 보는 견해:이 입방을 취하는 학자들은 시인이 죄와 병을 고침받
고 새롭게 회복되었다는 언급(3-5절)을 감사의 제목으로 간구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
은 본시의 중반부(6-19절)를 차지하는 개인적이고 국가적인 구원의  경험들을  교훈적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감사의 형태가 가장 적당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본시에
나타난 찬송과 교훈적 요소들을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상황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주장
한다.
   위에서 살펴본 두 가지 주장은 중첩되는 부분이 많다. 어떤 의미에서는 본시를  찬
양시와 감사시로 분류하려는 의도가 이미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
면 일반적으로 감사시로 분류되었던 여러 시들이 대부분 '찬양시'의 형태로  발전했기
대문이다. 이는 '찬양시'가 구조적으로 감사의 성격과 내용을 포함하고 있음을 보여준
다. 물론 동등한 의미에서 감사시가 찬양의 요소를 갖고 있음도 분명하다. 따라서  우
리는 본시를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감사함으로 드리는 시인의 찬양으로  정의할  수
있겠다. 이러한 찬양시의 성격 때문에 본시는 가을철 축제의 예배식에 사용되어 왔다.
어떤 학자들은 본시가 히브리어 알파벱 숫자와 같은 22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예를
들어 예배용이 아닌 명시선집(anthology)용 알파벱시로 구분한다(33, 111, 119편). 그
러나 '우리'라는 예배용 찬송으로 불려졌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찬양하는 본시는 히브리 시가 공통적인 문학  기법
으로 사용하는 병행법을 교차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즉 본시는 A->B->C->B'->A'의  형
태로 병행되는 두 내용을(A, B)  교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본시는 자신에게 하나님 찬양을 권하는 서론(1-5절), 공동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는 본론(6-19절), 천군, 천사, 그리고 만민에게 찬양을  명령하는  결론
(20-22절)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특히 본론부는 인간의 연약함을 서술한 15,  16
절을 기점으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6-14절)와 하나님의 인자하심(17-19절)에 관한
내용이 대구를 이루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본시가 시인의 의도에 따라 '개인'->
'공동체(민족)'->'전체 피조계'순으로 점층적인 확장을 보이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한편, 본시 전체에 나타난 특징적인 내용과 신학적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본시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1 구원자되신  하
나님(3, 4절):시인은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죽음의 상태에서 생명을 구속하신  하나님
을 찬양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해결하셨다고  노래한다(12
절). 이처럼 죄 문제는 인류와 피조계 전체가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를 형성치  못하
도록 만들었다(창3:14-19).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인이 상한 심령으로 나아와 하나님
의 대속의 규례를 따를 때 죄를 용서받는 길을 준비하셨다(레4:27-31;5:1-13).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상한 심령과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고백한  바  있다
(51:17). 결국 하나님의 대속의 규례들은 장차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예표했던  것이었
고 이는 곧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후5:17;히9:1-26).  2  왕이신
하나님(19, 22절):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사상은 성경 전체의 맥락이지만 특별히 이스라
엘을 택하셔서 그 민족과 언약하시는 선언 속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하나님은  이스라
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셨다(출6:7).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 나라와 달리 신
정 국가의 형태로 시작했다. 이스라엘의 왕은 다만 하나님의 통치를 전달하는  청지기
와 같았다(왕하19:8-19;대하14:9-15). 이처럼 시인은 본문에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노
래하되 특히 만유와 전 피조계를 다스리는 왕으로 묘사하고 있다(19, 22절).
   둘째, 본시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특별히 강조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의 사랑을 뜻하
는 '헤세드'(      )라는 말은 '인자', '은혜'등으로 본시에서 번역되고 있다.(4,  8,
11, 17절).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께서 죄를 따라 보응치 않도록  하셨던  동기이며(10
절), 당신의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과 동일한 것이다(13절).  시인은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 그리고 선대하심 등이 결국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요  사랑  때문이었음을
회상하고 고백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삽자가의  희생
제물로 내어 주신 것에서 그절정을 이루고 있다(요3:16).
   본시에 필적할 만한 다윗의 또 다른 찬송시는 145편이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의
관심이 우주적이며 또한 개인적인 두 국면을 견지하고 있음을 노래하고 있다. 실로 하
나님은 광대하시면서도 섬세하셔서 우주적인 하나님의 통치는 개인의 사소한 부분까지
섭리하신다는 것이 그 찬양의 주제인 것이다(145:1-21). 이는 본시가  노래하고  있는
개인적이면서도 우주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그 맥을 같이하고 있다. 따라서 두  시편의
흡사한 구조나 내용은 본시의 저자가 다윗음을 암암리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는 이와 같은 본시를 통하여 다음의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성도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음은 바로 하나님이 긍휼과 인자, 대속의 은혜 때문이다(요3:16;
엡2:3-5). 2 이러한 은혜를 입고 그분의 다스림에 들어온 모든 자들은 하난미의  통치
에 순종하여 그분의 성호를 찬양해야 한다(148:13, 14).

        1. 여호와를 송축하라(103:1-5, 20-22)
   본 단락은 본시편 전체의 서론부(1-5절)와 결론부(20-22절)로서  시인이  여호와를
송축하도록 권고하는 내용이다. 시인은 먼저 자신의 영혼을 불러 찬양을 권면한  후에
(1, 2절) 이어서 천사, 천국 그리고 모든 피조계까지 찬양의  권면을  확장하고  있다
(20-22절), 특히 서론부분은 두 가지 내용을 함축하고 있는 바, 시인 개인에게 찬양을
권고하는 부분(1, 2절)과 개인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택의 내용을 언급한 부분(3-5
절)으로 나누어진다. 이러한 본 단락을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그의 성호에 집중시키고 있다(1절). 본문 서두
에서 시인은 자신의 전 인격으로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권한다. '영혼'과 '내 속에  있
는  것'이라는 히브리 어법은 인간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와 동시에 '그  성
호'를 송축하도록 요구한다. 사실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그 성호를 송축하라'는 시인의 의도는 하나님의 성품과
그 구속 사역을 기억하여 영원히 찬양토록 하려는 것이다.
   둘째, 시인은 개인적으로 받은 하나님의 은택들을 기억하고 있다(3-5절). 그  은택
의 내용은  1 사죄함(3절) 2 병을 고침(3절) 3 생명을 구속하심(4절) 4 인자와 긍휼로
관씌우심(4절) 5 소원을 만족케 하심(5절) 6 새롭게 하심(5절)등이다. 이 중에서도 시
인은 하나님의 자비(인자)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비가 다른 모든 은택의
기본적인 전체 조건이자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앞에서  언급한  '여호
와'라는 성호가 뜻하고 있는 의미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출34:6, 7에 의하면  여호
와라는 성호가 뜻하고 있는 의미를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출34:6, 7에 의하면 여호와
란 이름이 자비롭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성풍음 드러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은택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은택들은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약속에 신
실하신 분임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시인은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 은택을 잊지  말
라고 요구한다(2절).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와  구원
역사에 대한 기억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의 행사를 계속해서 기억하고있
는 것이다(3-19절).
   셋째, 시인은 결론적으로 전 피조계가 찬양할 것을 권면한다(20-22절).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6-19절)에 깊이 몰입했던 시인은 천군, 천사  그리
고 모든 피조물에 대해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천상계의 찬양
에 대한 언급은 148:1-4에도 나타나는데 특별히 피조물로서 찬양의  당위성을  논하는
문맥에(148:5)들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인이 다시 한번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찬양을 촉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2절).
   한편 서론부(1절)에서 사용된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표현은 결론부(22절)에서  반
복되고 있으며 '모든'이라는 단어의 사용도 다시 나타난다(2, 3, 21,22절). 따라서 본
시는 히브리시의 특징인 평행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성도의 찬양은
마음과 몸을 다한 전체 인격으로 드려야 한다.  2 신자는 하나님의 인자와 은혜를  잊
지 말고 언제나 기억해야 한다(엡1:3-14).  3 하나님의 지으심을 입고 그 다스림을 답
고 있는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을 찬양할 의무와 특권이 있다(148:6).
   
        2.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총(103:6-19)
   앞에서 개인적으로 받았던 하나님의 은택을 언급했던 시인은(3-5절), 본문에  이르
러 이스라엘 공동체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고 하며  찬양한다(6-19절).  특별히
하나님의 자비와 인자가 강조되고 있는 본 단락은  1 이스라엘 역사에 나타난  하나님
의 자비(6-14절)  2 인생의 덧없음(15, 16절)  3 경건한 자의 자손에게 미치는 하나님
의 은혜(17, 18절)등으로 나눌 수 있다. 시인은 본 단락에서 죄많고 제멋대로인  인간
에게 계속해서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의 부권적 사랑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
다(13절).
   한편, 시인은 본문에서 두 가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대조시키는데 그 하나는 아버
지로서의 하나님과 변덕스러운 이스라엘, 다른 하나는 제한적인 인행과 하나님의 무궁
하신 인자함이다.
   첫째,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과 변덕스런 이스라엘(6-14절). 시인은 이스라엘 역사에
서 회고와 관찰을 통해 얻은 결과들을 여기서 언급한다. 출애굽 이후에 펼쳐진 이스라
엘 전 역사를 볼 때 이스라엘은 늘 불순종하고  반역하는  망나니  자식과  같았다(출
32:1-10). 반면 하나님은 인자와 긍휼을 베푸셔서 죄를 심판하지 않으시고 용서해  주
셨다(출34:6).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의 사랑이 무분별하거나 원칙없는 것을  아니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은 '그를 경외하는 자'(11, 13, 17절)에게 인자를 베푸신다는  것이
다. 이러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며 그 언약을  지키신다(롬9:4).  시인은
결국 여기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임할
은총을 부자 관계의 이미지를 통하여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롬8:28).
   둘째, 없어질 인생과 무궁하신 하나님의 자비(15-19절). 시인은 먼저 인생의  덧없
음, 풀의 꽃과 같은 무상함 등 일반적인 주제를 언급한다(15, 16절). 모세의 시에서도
본문과 같은 인생의 허무를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비교하여 묘하하고 있다(90:2, 5, 6,
14, 17). 이것은 인간의 연약함을 강조한다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자비의 영원함을
뛰어난 시적 필체로 이미지화해서 대조시킴으로써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  곧  언약의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인자와 의가 영원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17,
18절).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인자와 긍휼을 베푸셨듯이 오늘날 성도들에게도 평안하고 축복된 삶을 베풀어 주신다.  2 하나님은 언약과 법도를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토록 인자를 베푸시는 신실하신  분이시다(31:19;신5:1-6, 28-33;눅1:50).  3 인간의 존재는 일시적이므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의 부귀 영화는 참으로 무가치한 것이다(90:5, 6, 10;약4:14).   4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 곧 피조계의 전 영역을 통치하신다(96:10;대상29: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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