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1
우리 구원의 반석 - '반석'(* , 추르)은 하나님의 별칭으로 잘 알려진 용어이다(18:2,31,46;19:14;28:1;78:35;89:26;사 2:8;합 1:3). 또한 이 용어는 하나님께 대한 의존성 및 안전성욜 시사하는 용어이기도 하다. 본 구절은 '그 반석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시는 분이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즐거이 부르자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형인 '루아'(* )는 '즐거운 소리를 내다', '개가를 올리다'는 문자적 의미를 지니며 여기서는 '신복의 예틀 표하자'란 의미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사울의 대관식 때에 그 백성의 층성의 외침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사용된 것과 동일한 동사이기 때문이다(47:1;삼상 10:24;습 3:14;슥 9:9).
=====95:2
그 앞에 나아가며 - '나아가며'에 해당하는 동사 '네카마드'(* )는 '앞을 향하여 재촉하며 민첩하게 나아가다' 혹은 '만나다'는 의미를 지니며, 본문에서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곳은 미 6:6이다.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민첩하게 나아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자세라 하겠다(Perowne) 시로 그를 향하여 즐거이 부르자 - 여기서 '즐거이 부르자'는 1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커다란 소리를 내는 것을 뜻하는데 이것을 근거로 하여 '시'를 '나팔'로 번역하는 역본도 있다(70인역). 그렇다면 나팔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자는 뜻이 되겠는데 큰 무리는 없는 번역으로 여겨진다. 실제로 '시'에 해당하는 '지므라트'(* )는'노래', '찬양' 외에도 '기악'이라는 뜻도 내포하지만, 대다수 영역본들은 개역 성경과 유사한 번역을 취한다(psalms, KJV;songs of praise, RSV).
=====95:3
대저 여호와는 크신 하나님이시요 - 여기서 '대저'는 '키'(* )로서 1,2절에 언급된 기쁜 마음과 큰소리로 감사를 드려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한 접속사이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크신 하나님'이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크신'에 해당하는 '가돌'(* )은 일반적으로 '위대한'을 뜻하지만 이상 신들이 대비되고 천지 창조(4, 5절) 및 목자 개념(7절) 등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유일한 참신 및 창조주 그리고 그의 백성의 목자되시는 자애롭고 크신 권능의 하나님을 암시하는 형용사로 보면 되겠다.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이시로다 - 이방 민족이 섬기는 모든 헛된 우상들보다 크신 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출 15:11;18:11). 주의할 점은 본 구절을 표면적으로 이해하여 기자가 이방 신을 어떤 실제적인 힘을 지닌 실재(實在)적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고 판단하는 일이다. 기자는 '이방신들도 어느 정도 힘이 있지만 하나님이 더 힘이 세다'라는 식의 상대적 비교 차원의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다만 하나님의 절대적 우월성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95:4
땅의 깊은 곳이 그 위에 있으며(* , 아쉐르 베야도 메흐케레 아레츠) - 직역하면 '그의 손들 안에 땅의 깊은 처소들이 있으며'이다. 여기서 '손들 안'이란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제 아래'를 뜻한다. 그리고 '찾다', '탐색하다'의 뜻을 지닌 '하카르'(* )에서 온 '메흐케레이'(* ), 곧'깊은 처소'란 외관상으로는 알 수 없고 파보아야만 그 내용을 알 수 있는 땅 속 가장 깊은 곳 따위를 가리킨다. 결국 본 구절은 인간의 일상적인 관측 능력 밖에 있는 모든 것들도 하나님의 다스리는 영역 안에 있다는 것, 곧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95:5
바다가 그의 것이라 그가 만드셨고 - 여호와의 자연에 대한 통치는 그가 그것을 만드셨기 때문에 논쟁의 여지가 없이 그것의 주인은 바로 그분이시라는 사실에 근거한다.
=====95:6
오라(* , 보우) -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들이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자들임을 상기시키는 표현이다. 기자는 가장 겸손한 부복(俯伏)과 예배에로의 초청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시를 주시고 그들과 언약을 맺으셨던 사실을 새롭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우리를 지으신(* , 오셰누). 직역하면 '우리의 조성자'이다. 이것 역시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인격적 언약 관계롤 암시하는 표현이다. 모세의 다음과 같은 꾸지람도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그들 간의 언약 관계를 망각한 사실을 겨냥하고 있다. "너를 낳은 반석은 네가 상관치 아니하고 너롤 내신(조성하신) 하나님은 네가 잊었도다"(신 32:18).
무릎을 꿇자 - '굽혀', '경배하며'와 의미상의 동의어로서 여호와를 향한 존경과 복종을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Anderson).
=====95:8
므리바 - 원어상의 뜻은 '다툼(혹은 겨룸)의 장소'틀 의미하며, 출 17:1 이하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임재를 의혹함으로써 하나님을 격노케 한 후 모세가 그 장소에 붙였던 이름이다(106:32;출 17:7). 출 17:7을 근거로 하여 혹자는 '므리바'와 '맛사'는 한 지역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또 다른 학자는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근본적으로 이 두 곳은 서로 다론 곳이라고 주장하지만(North), 확실한 단정을 내리기는 힘들다. 적어도 '므리바'는 시온 광야 안에 있던 가데스 바네아 지역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민 27:14;신 32:51;겔 47:19;48:28).
광야 - 물이 고갈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와 아론을 향하여 두 번째로 불평했던 가데스 인근 지역인 신 광야를 뜻한다(민20:1,Perowne).
맛사(* , 마사) - '시험하다', '입증하다'를 뜻하는 '나사'(* )에서 유래된 용어로 '시험'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Johnson). 70인역(LXX)은 '유혹'으로 번역하고 있다(신 6:16).
=====95:9
나를 시험하며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신지 혹은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실 수 있는지를 의심하여 하나님을 시험의 대상으로 삼았던 광야 시대의 한 사건을 암시하는 표현이다(출 17:1;민 20:1).
그 후 세대들은 이 사건을 불신의 전형으로 보았다(78:18,41,56) 나의 행사 - 기적 같은 구원, 심판 따위를 포함한 이스라엘 민족을 유지함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든 행동들로 보아야 한다(Perowne, Anderson). 광야에서 물을 선물로 준 한 사실로만 국한시키는 학자도 있으나(Boylan) 그것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행사'에 해당하는 '파알리'(* )는 복수형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78편).
=====95:10
내가 사십 년을 - 히 3:9에 본 구절이 인용되어 있는데 그곳에서는 본 구절과 앞절을 연결시켜 놓고 있다 : "거기서 너희 열조가 나를 시험하여 증험하고 사십 년 동안에 나의 행사를 보았느니라." 이런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 앞에는 의미상 '그러므로'가 생략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근심하여(* , 아쿠트) - 혐오, 구역질 따위의 의미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강한 표현이다.
마음이 미혹된(* , 토예 레바브) - 직역하면 '그 마음이 헤매이고 있는'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에서의 방황은 그들의 내적 방황에 따르는 필연적인 징벌 때문이었음을 반영한다. 동일한 표현을 107:4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내적 방황'이란 다름아닌 하나님과의 교통이 단절됨으로 인해 스스로 갈피를 못잡고 헤매는 상태를 가리킨다.
내 도를 알지 못한다 - 이스라엘의 광야 방황의 이유를 설명하는 구절이다. 따라서 본 구절 앞에는 '왜냐하면'이 생략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도'(* ,데레크)의 문자적 의미는 '길', '도로'이며 여기서는 하나님의 말쏨을 퉁해 계시된 지침 혹은 보다 포괄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오직 곧고 평탄한 한 길 곧 하나님의 법도를 무시한 것, 그것이 바로 구불구불한 길과 같은 광야에서 방황한 이유이다.
=====95:11
내 안식 들어오지 못하리라(* , 임 예보운 엘 메누하티) - 여기서 '임'(* )은 부정사(not...) 역할도 지니는 말이나 조건문을 이끄는 접속사(if...로도 사용된다. 여기서 본문을 조건문으로 번역해 보면, '만일 그들이 나의 안식으로 들어간다면'이 된다. 히브리 어법에서 그 맹세의 일부 내용이 생략된 이 같은 조건문은 강한 부정과 맞먹는 의미를 지닌다(Alexander).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될 수 있겠다. '그들은 결코 나의 안식으로 들어올 수 없으리라.' 또한 '메누하티킥'(* ). 곧 '나의 안식'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처소를 뜻하지만(132:8,14) 문맥상으로는 광야에서 방황 이후 있을 안식의 터전으로서 약속된 땅, 가나안이 적절한 의미이다(신 12:9). 약속된 가나안 땅은, 영적 안목에서 보면, 하나님의 언약을 준수하고 순종하는 자들이 들어가는 곳이다. 그렇다면 결코 그 안식의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본절의 경고는 주님 재림 때까지 오고 가는 모든 세대 중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모든 인류를 겨냥한 경고이기도 하다. 이처럼 본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이 말씀은 심판의 경고임에 분명하지만, 이와 아울러 여호와의 메시지를 경청하여 과거의 실패를 답습하지 말도륵 이스라엘 회중에서 권면하는 적극적인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M. A. Tate).
본 시편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와 방법에 대하여 잘 알려주고 있
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을 유지하시는 전능자이시며(4, 5절) 동시에 이스라
엘을 택하신 구원자이스모 찬양해야 한다고 말한다(6절). 아울러 아스라엘은 과거의
비참한 역사를 거울 삼아서 외식으로 찬양치 말고 진실하게 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사실 95-100편은 동일한 사상을 골자로 하는 한 묶음이다. 그 내용은 모두 하나님
의 통치를 주제로 하는 '선정시'(theocratic psalm)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한편 본 시편의 저자는 다윗으로 보는 경향이 지배적이다. 이렇게 보는 근거는 1
70인역(LXX)에서도 다윗의 작품이라고 표기(標記)하였다. 2 본 시편이 하나님을 '반
석'이라고 한 것(1절)으로 보아서, 이 시편은 94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94:22에 동일한 사상이 있는데 다윗의 표현 기법과 매우 유사하다. 3히브리서 기자가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히4:7). 그러나 현대의 비평가들은 본시의 형태나 다윗 저작
시기의 일반적인 정형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윗의 저작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이들은
본시를 크게 구성하고 있는 두 부분(1-7a절, 7b-11절)이 각기 너무나 대조적이어서 전
혀 연관성이 없는 두단장(separate chapter)의 우연적인 결합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
러나 대다수의 성경 주석가들은 본 시편을 면밀히 관찰해 볼 때에 의도적인 작시법(作
詩法)에 의한 대조를 취하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본시의 저자를 꼭 다윗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분명히 한 시인에 의해 저술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본시의 내
용을 대조하면 다음과 같다.
+--------------------------------+------------------------------+
| 1-7a절 | 7b-11절 |
+--------------------------------+------------------------------+
| 기쁨 | 슬픔 |
| 선(善) 제시 | 선(善)의 엄중함 제시 |
| | (롬 11:22) |
| 기쁨과 감사에의 초대 | 시험과 회개 촉구 |
|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 | 인간의 연약성과 위험성 폭로 |
+--------------------------------+------------------------------+
또한 본 시편의 구족적인 특징은 '창조'와 '구속'이라는 주제가 대구적(chiastic)
으로 묘사되고 난 후에 결론적으로 창조와 구속의 주인되시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세와 성찰을 서술하고 있다.
+--------------------------------------------------------------+
| A. 하나님 경배를 요청(1-2절) |
| B. 창조주이신 왕된 하나님을 찬양(3-5절) |
| A'. 하나님 경배를 요청(6절) |
| B'. 언약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7a절) |
| C'.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세와 성찰(7b-11절) |
+--------------------------------------------------------------+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경배와 찬양에 들어있는 본시는 아마도 성전 예배 중에 사용
하기 위해 지어진 노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본시의 내용 자체에서 발
견할수 있는 본시의 전반부(1-7절)는 찬송 인도자의 지도에 따라서 회중이 부르는 노
래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그 이유가 기록되어 있으며, 후반부(8-11절)는 예배 인도
자의 독창으로서 이스라엘의 역사적 교훈을 상기시키면서 바른 예배 자세를 갖추도록
교훈하고 있다. 이와 같은 구조와 내용적인 특징을 근간으로 하여서 본 시편을 구분하
고 각 단락의 내용 및 주도적인 사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하나님 경배를 요청함(95:1-2)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요청한다(5:11). 여기서 하나님은 구원의 반석으로 불
려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백성을 구원하시고 보호해 주시는 사실에 대한 상징이다.
분명히 회중은 이와 같은 구원을 경험했으며, 여기에 대한 감사를 드려야만 하는 것이
다.
시인은 회중으로 하여금 전심으로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찬양을 드리도록 초청하고
있다(1절). 2절과 6절에서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는 것으로 보아서 본시는 '초청시'로
불러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하나님을 '구원의 반석'으로 표현한 사실은 신
32:15에서 인용한 것인데, '우리 구원의 힘'이라는 뜻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
다. 반석에 대한 성경적 비유의 뜻을 좀더 살펴보면 1 하나님의 보호(31:2) 2 하나
님의 구원(89:26) 3 그리스도의 보호(고전10:4) 4 교회의 터(마 16:18)등이다. 이어
서 시인은 구원의 반석이신 하나님의 존전에 이르렀을 때의 의무를 감사와, 시(詩) 곧
찬양의 노래 등 두가지로 표현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구체적으로 화답하
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경배할 때 '언어의 표현'을 통한 감사의 고백과 음악을
통한 '찬양의 노래'등 두가지가 적절한 표현 양식임을 알 수 있다.
2. 창조주이신 왕된 하나님을 찬양(95:3-5)
하나님께서는 절대 주권자로서 모든 피조물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신 분이다.
여호와는 모든 신 위에 크신 왕으로서(5:2;98:6;99:4) 존귀와 위엄이 영원하시다.
그런데 본 단락에서 우상들에 대하여 언급했다고 해서 그 실재를 인정한다고 보아
서는 안된다. 시인은 단지 하나님께서 모든 힘과 실체, 상상물보다 뛰어난 주권과 우
월성을 지니고 계심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모든 이방인들이 신으로 숭배하
는 대상들도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물에 포함되며 하나님께서는 우상들에 대한 지배권
조차도 갖고 계심을 주장한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지극히 찬양해야 하는 이유는 만물을 통치하시는 왕이시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3절;5편). 모든 땅 위의 나라들은 제한된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이 섬기는 신들, 역시 제한성을 지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이방 신들보다
위대하시며 (4, 5절;출15:11) 천지 위에 홀로 뛰어난 절대자이시다. 시인은 이처럼 하
나님에 대한 신앙을 재차 확인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상실
(loyalty)을 촉구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이방신의 존재를 거부하도록 유도한다(96:4,
5)
3. 언약의 주인되신 하나님을 찬양(95:6-7a)
본시의 찬양 부분 (1-7절)을 결론짓는 본연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회중
에게 권고하고 있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양
이다(74:1;79:13;100:3). 하나님께서는 친히 이스라엘을 만드시고 번성하도록 인도하
셨다(신32:6). 여기서 특히 '양'이란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셔서 구체
적으로 인도하시며 필요를 공급하신다는 시실을 다시 강조하는 단어이다.
특별히 본 단락은 하나의 새로운 측면을 강조한다. 1, 2절에서는 창조의 주인으로
서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촉구했다면 이 곳에서는 언약의 주인되신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경배는 복종의 구체적인 행위이며, 헌신의 표현이다. 이어서7a절
은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이유을 제시한다. 곧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시라는 것
이다(출19:5, 6;렘31:33;겔11:20;14:11;34:31).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이스라엘을 선택
하시고, 특별한 언약을 맺으셨다(신32:6, 15, 18;사44:2). 이러한 관계를 시인은 특별
하게 '양과 목자'와의 관계에 비유하여 표현하고 있다(79:13;100:3;요10:11-16).
. 목자되신 하나님. 목자가 양떼를 보호하고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개념에서 하나
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목자라는 사상이 유추되었다. 이와 같은 유사성을 최초로 선언
한 사람들은 목자 자신들이었다. 야곱은 운명 직전에 하나님을 뫄자로 불렀다(창
48:15). 잘 알려진 다윗의 시편23편에서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라고 불렀으며(23:1) 아
삽도 80:1에서 동일하게 호칭 했다.
이사야도 동일한 관점에서 하나님을 양무리를 먹이고 인도하는 목자로 표현하고 있
다(사40:11). 예례미야는 하나님에 대해 당신의 백성을 지키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라
고 묘사하고 있다(렘31:10). 에스겔도 하나님을 흩어진 당신의 백성을 찾으시는 분으
로 묘사함으로써 목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겔34:12).
이러한 개념을 염두에 두고 볼 때, 우리는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백성을 지도하
는 사람들을 목자로 표현한 많은 성구를 찾아낼 수 있다. 민27:17에서는 지도자가 없
는 이스라엘 백성의 어려운 처지가 목자없는 양 무리로 비유되고 있다. 후대에는 하나
님과 하나님의 백성을 버린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들이 양무리를 버렸거나 잘못 인도한
목자로 정죄를 받았다(렘2:8;10:21;23:1이하;겔34:2이하등).
신약성경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목자'( )로 묘사된 사실은 이런 의미에서
당연하다. 주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시는 '선한 목자'였다(요10:2, 11,
14, 16). 주님은 목자처럼 당신의 양들을 분별하시며(마25:23)선한 목자로서 양들을
위하여 자발적인 고통을 당하셨다(마26:31).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양의 큰 목
자'라고 불렀다(히13:20). 베드로도 역시 하나님을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되신 이'
라고 불렀다(벧전2:25).
4.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세와 성찰(95:7b-11)
본 단락은 출17:1-7에 기록된 사건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졌다. 출애굽 이후 이스라
엘이 경험해야 했던 광야 생활은 단지 과거에 일어났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국한될 수
없으며 영원토록 살아있는 교훈으로 작용하는 구속사의 한 토막이다(고전10:5, 6;히
3:8-11).
이 교훈적인 부분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을 향하여 조상들이 저질렀던 어리석은 불신
행위를 되풀이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하나님에 대한 배역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조상
들은 가나안 땅에서 얻도록 약속되었던 안식을 얻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경고는 특
히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친히 돌보신다는 언급에 의하여 자극받고 있다(7a절).
여기서 특별히 시인은 르비딤에서 했던 백성들의 불평을 경고와 표준으로 제시한다
(출17장;민20:1-13). 이 장소에 붙여진 이름들은 그 사건을 상기시키는데, '므리바'
(81:7;106:32)는 '다툼'(contending) 을 의미하고 '맛사'는 '시험'(testing)을 의미한
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시험하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시인은 전 이스라엘의 불신앙을 경고하고 반성을 촉구하려는 의도로 이러한 장소를 구
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78:18, 41, 56;히3:7-11).
시인은 시스라엘의 청중들을 권면함에 있어서 '오늘날'이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러
한 표현은 기회의 즉시성을 강조하는 수학적 기법이다. 선택된 백성은 신뢰와 순종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역하지 말아야 한다(7b절). 성경에서 마음이라는 말은
종종 사람의 의지를 나타낸다. 따라서 마음을 강퍅하게 한다는 것은 순종하기를 거부
함을 의미한다(9절). 광야 세대는 특히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세대들을 대표한다. 하
나님께서는 40년 동안 전적으로 그들을 돌보셨다(10절). 그러나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정상적인 궤도에서 이탈했으며 그 결과 계속적인
배도(apostasy)를 일삼게 되었던 것이다.
시인은 독특한 40년 광야 기간에 하나님의 지속적인 돌보심으로 증거하는 많은 성
경적 진술과는 다르게 하나님께 근심(angry)하는 시기였다고 진술한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에 대한 이스라엘의 부정적인 반응을 몹시 싫어하셨음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불순종한 세대들은 광야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었다. 광야 세대는 단 두명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약속된 땅에 들어갈 수 없었다(신 12:9). 왜냐하면 그들은 불순종하는 성품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구원 형태와 전혀 어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여호수아와 다윗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원한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적용한다(히4:1-11).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진정한 안식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제공되어짐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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