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
총 3부로 구성된 본서의 마지막 3부(33-48장)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제껏 이스라엘과 주변 열강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1부(1-24장), 2부(25-32장)와는 달리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시점에서(32:1 주석 참조) 선지자는 더 이상 심판에 의한 멸망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이라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로 그 예언의 내용을 전환시킨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 예고 중에서도 그들의 고토 귀환(11:17;14:22)과 회복된 나라에서의 여호와 경배(20:40-44)를 언급한 바 있는데 본 예언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 3부는 크게 두 단락으로 대별되는 바, 그 첫째는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과 그 회복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약속이며(33-39장),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 새 나라에서 영원히 여호와만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40-48장). 한편 그 시작인 본장은 선지자의 파수꾼적 사명(1-20절)과 안악한 백성들에 대한 경고(21-33절)가 기술된다. 혹자는 1-20절까지의 내용이 회복과 구원이라는 3부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과 그 내용이 예루살렘 함락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새로운 단락에 포함시키는 견해를 배격하고 1-32장까지에 대한 선지자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이해한다(Kliefoth, Hengstenberg). 그러나 이 심판적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 회개와 회복의 전제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통시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연대의 언급이 중반부인 21, 22절에 나타나, 전후 단락의 내용을 하나로 이어 주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본장을 3부의 서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Delitzsch).
=====33:2
본절에서 6절까지는 일반적인 군대의 파수병에 대한 비유를 들어 파수꾼의 막중한 책임과 파수꾼의 경고에 대한 반응을 비유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개할 예언의 내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 이는 예언의 대상이 다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환원된 사실을 가리키며 본장이 새로운 단락의 서론부라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다. 칼을 한 땅에 임하여 - 여기서 '칼'은 고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바, 여기서는 대적의 침략으로 야기될 전쟁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33:3
나팔을 불어 - 이 말은 성경의 용례상 특별하게 백성들을 소집하기 위한 신호를 나타내는 데 쓰여진 표현이다(Schroder). 한편 원어상 '나팔'(* , 쇼파르)은 '새기다'란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염소 뿔로 만든 나팔의 용도는 연주용이라기보다는 주로 축제 때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새겨넣거나 전쟁 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민 10:6, 7;왕상 1:34).
=====33:4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 '그 피'란 파수꾼의 나팔 소리에도 불구하고 방비하지 않아 죽게 된 자의 피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죽게 됨을 강조한다.
=====33:5
본절은 4절에 선포된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반복절이다.
=====33:6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본 구절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이 말은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3:7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 실로 구약에 있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소식을 미리 대언해 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각성과 여호와 찬양을 실천케 하는 영적 파수꾼으로 비유된다(렘 6:17).
=====33:8,9
본문은 3-6절의 비유에 대한 해설에 해당한다.
=====33:10
우리는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 예언의 새로운 전환을 시사하는 구절로서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에스겔의 심판 예고 사역이 바로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본절처럼 그들 스스로가 죄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시인케 함으로써 철저한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Schroder). 혹자는 이를 닥쳐온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고백으로 생각하기도 한다(Havernick). 우리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 여기서 '쇠패하게'(* , 네마킴)는 '녹이다', '썬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어찌 능히 살리요'란 절망적인 고백과 관련하여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33:11
본절은 내용상 18:23, 32의 반복이다. 악인의...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악인의 멸절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는 구절로(신 8:5, 6;히 12:9-11), 절망을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 연속적으로 반복된 원어 '슈부'(* )는 '돌아가다'란 의미외에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바, 본 구절에서 이 말은 단순하게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떠남은 물론 철저한 회개와 함께 새로운 신앙의 사람으로 그의 전인격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33:12
의인이...구원치 못할 것이요 - 율법 주의에 얽매여 '자기의'(自己義)를 구원의 요건으로 확신하는 유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당시 선조들의 의가 자손에게 전가된다는 그릇된 사상으로(18:20, 21) 인해 하나님의 심판적 징계를 회개와 구원의 전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징계 자체를 이유없는 고난이라고 불평하며 심판적 경고와 그에 따른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구절이다. 에스겔은 구원의 소망을 제시한 11절에 이어 그러한 자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경고하기 위해 20절까지 구원은 자기의가 아닌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회복 속에 임하는 것이며 개개인의 운명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사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14:10, 14, 16, 18, 20) 하나님 심판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파하고 있다.
=====33:13
그 의를 스스로 믿고 - 여기서 '스스로 믿고'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러한 자가 죄를 범하면서도 과거의 의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그릇된 확신 속에 안주하는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계속적인 의의 실행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제시한다(Schroder).
=====33:14
법과 의대로 행하여 - 여기서 '법'(* , 미쉬파트)은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가리키며 '의'(* , 체다카)는 종교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올바름(right, NIV)을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법과 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의롭고 올바른 내적, 외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다(18:5).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돌이켜 자신의 죄에서 떠나서'라는 앞 구절과 함께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의 회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른 삶을 사는 것임을 재삼 주지시킨다.
=====33:15
14절에 언급된 '법'과 '의'에 따른 행위가 몇 개의 구체적인 실례로 기술된다.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 상반절인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의의 회복을 말한 것이라면 본 구절은 대신(對神) 관계에 대한 회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생명의 율례'는 협의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광의적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18:21;20:11).
=====33:16
본절에 대해서는 18:22 주석을 참조하라.
=====33:17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된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 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하나님의 공평치 못한 섭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음은 물론 그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는 백성들의 가증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만유 앞에 공평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하나 도리어 강퍅한 마음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던 것이다.
=====33:18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 본 구절은 내용상 13절 상반절과 논리적 연관을 맺고 있다.
=====33:19
본절은 11절, 그리로 14-16절과 내용상 상통한다.
=====33:20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였던 까닭에 모든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사 6: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죄가 언약 공동체의 공동 책임으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 곧 이스라엘의 죄는 공동체적 성격과 함께 개인적인 책임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33:21
본절은 선지자 예언의 새로운 전환부가 된다는 것을 연대기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핵심 부분이다. 본장 이전에까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함락 뒤에 선지자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24:25-27의 내용이 본절에서 성취되고 있다. 따라서 24:27의 예언대로 이제 선지자는 그 입을 열어 심판 뒤의 상황,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될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십 이 년 시 월 오 일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 4월의 일이었다(렘 39:2).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연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8개월이 경과한 시기로서, 이렇듯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에스겔 선지자가 그 멸망 소식을 접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학자들과 사본들은 맛소라 사본의 '12년'을 '11년'의 오기로 본다(LXX, 수리아역, Hitzig, Doederlein, Hengstenberg, Eichrodt).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에스라가 동료들과 함께 똑같은 길을 4개월 만에 여행했다는 기록에 유추하여 볼 때(스 7:9) 에스겔에게 소식을 알린 도망자의 여정이 약 6개월 정도라는 사실과도 합치하는 바,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접한 시기를 에스겔이 잘못 길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이(24:25-27) 성취된 사실에 대한 특별한 소식을 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33:22
본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 것은 결코 도망자의 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때문임을 시사한다. 곧 본절에 사용된 동사 '임하여'(* , 하예타 엘라), '여시더니'(* , 이프타흐)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 점과 '열리기로'(* , 이파타흐)가 '열리다'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세 반복어란 점에서 선지자는 이미 도망한 자가 소식을 전하기 이전 저녁부터 새로운 구원과 회복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Schroder, Delitzsch).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 본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킨다(Michaelis, Delitzsch, Schroder).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 곧 1-20절의 예언과 23절 이후의 예언을 구분지어 주는 말로 23절 이후의 예언은 도망온 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들은 후에 선포된 것임을 암시한다.
=====33:23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선지자에게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구원과 위로의 선포 이전에 형식적인 선민 사상에 젖어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곧 본절에서 29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당에 남아있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33:24
이스라엘 황무한 땅 - 여기서 '황무한'(* , 헤라보트)은 원어상 성읍이나 집들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기에(렘 33:10-13) 오히려 피신한 유다인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핍절한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Schroder). 아브라함은...주신 것이 되느니라 - 본 구절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라는 사실에 집착해 여전히 죄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향에 남은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요 8:33, 39). 곧 그들은 아브라함이 혼자의 몸으로도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얻은 바 되었으며 그 기업이 후손에게까지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죄악에 빠진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이 자신들에게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 회복의 조건이 아브라함 때와 비교해 숫적으로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실로 그들은 외적 조건에만 매달려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3:25
본절부터 29절까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걸쳐 포괄적으로 나열된다.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일찍부터 이 피의 식용이 금지된 바 있다(창 9:4-6;레 17:12;19:26). 따라서 본 구절은 그들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채 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경시하고 어긴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Delitzsch, Havernick). 또한 이는 하반절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우상에게 바친 피 있는 제물의 식용을 언급한 것으로도 보여진다(18:6, 11, 15;22:3). 이와 달리 혹자는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란 점을 비유해 그들의 살인 행위를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Hengstenberg). 그러나 '먹으며'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먹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살인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다시 언급되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B)은 본 구절을 '너희가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니'(you worship idols, and murder)로 의역했다. 이 해석은 본 구절에 매우 적절하다.
=====33:26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여기서 '칼'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제한적인 '폭력'의 의미를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18:12) 각각 가리킨다(Delitzsch). 특별히 슈로더(Schroder)는 '가증한 일'(* , 아시텐 토에바)이 여성형이란 점을 들어 이를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 매음 행위로 보았다.
=====33:27
26절에 언급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으 시사한다. 산성과 굴 - 여기서 '산성'(* , 메차도트)은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를, '굴'(* , 메아라)은 이스라엘 산지에 산재해 있어 은신하기에 알맞은 천연의 석회 동국을 각각 가리킨다(삼상 13:6). 하나님은 이런 곳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심판의 징벌이 임하게 하실 정도로 그 징벌을 철저하게 행하신다.
=====33:28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고 - '황무지와 놀라움'(* , 쉐마마 우메솨마)이란 말은 둘 다 '황폐케 되다', '폐허가 되다', '경악하게 하다'란 뜻의 어근 '솨멤'(* )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본 구절을 '황폐시켜 폐허가 되게 하고'(NIV, RSV), '가장 황폐하게 만들고'(KJV)로 번역했다.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 여기서 '권능의 교만'(* , 게온 우즈)은 곧 세속적인 힘에서 유래한 교만을 가리키는 바, 본 구절은 그러한 교만의 근거가 되는 그들의 모든 세상적 존립 기반을 없어지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7:24 주석 참조).
=====33:29
그 때에...알리라 - 여기서 '알리라'(* , 야다)는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전인격을 통한 체험적 깨달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맥을 같이한다(골 1:10). 따라서 본 구절은 위에 언급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11절).
=====33:30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루살렘 심판 예언이 성취됨으로써 고조될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진실한 회개와 구원의 소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정욕 충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 '담 곁에서'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집 문에서'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말이며(Delitzsch, Schroder), '너를'(* , 베카)은 '너에게 관해서'란 문자적 의미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과 그의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을 가리킨다(Schroder).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성취 후 선지자의 존재가 백성들간에 음으로 양으로 급속하게 부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자, 가서...들어보자 -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그에 대한 순종의 자세라기보다는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의 총족을 위한 행동이다(31절 주석 참조).
=====33:31
내 백성처럼...행치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실천적 순종이 결여된 그들의 내적 자세를 암시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동이 극히 위선되고 가증된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입으로 사랑을 나타내어도 - 여기서 '사랑'(* , 아가빔)은 그들의 이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후반절과 관련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모든 좋은 말들이 기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 충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의 양면성을 암시한다(Gesenius, Havernick).
=====33:32
음악을 잘하며...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그들의 예언을 노래로 읊어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삼상 10:5;왕하 3:15).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케쉬르 아가빔)는 세속적 의미에서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가수와 같다는 뜻이다(Delitzsch, Hitzig). 이는 백성들이 에스겔의 예언을 회복과 구원의 전제로서 진지하게 경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음악을 듣듯이 피상적으로 들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회개를 전제로 선포한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 중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구원의 메시지만을 아무런 결단이나 돌이킴 없이 듣기 좋은 말로만 수용했다.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이 성취될 것임을 말한다. 곧 그들은 아직도 회개에 이르기 위한 내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
본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이스라엘의 조로 인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첫
번째 부분(1-24장)과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부분(25-32
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세 번째 부분(33-48장)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은 바로 이 마지막 대목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에
대한 첫 번째 예언으로서, 에스겔의 소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현재적 상황을 서술
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현재적 상황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
만 여러 가지 가정적인(subjunctive) 언급들(7-9,14,18,19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미
래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본장은 하나님의 신실하
신 사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1) 파수꾼의 비유와 그 해석을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1-20절), (2)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21-3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선지자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
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장은 전장(32장)과 비교해 볼 때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도 약간
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전장에서는 애가체(lamentable style)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본장에서는 가정적 문체(subjunctive style)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
면 전장이 애굽의 비참한 상황을 서술한 반면 본장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선포함에 있어서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죄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전공동체에 대한
예언임을 선언하면서도(2,10절), 동시에 여러 가정적인 상황들에서는 개인적인 회개와
결단(11-16절)을 촉구함과 아울러 최후의 심판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20절).
또한, 본장은 역사적인 언급(21절)을 기점으로 전반부(1-20절)와 후반부(21-33절)
로 나뉜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본장 전체의 내용은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러나 저자의 일차적인 관심은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사
랑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전반부에서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치 못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
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심각해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수꾼의 경고를 듣지 않는 상황(1-9절)에서 하나님의 공평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저부하는 모습으로(17-20절),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
로서(21-33절) 절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예수 그리스
도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마 21:33-46). 즉 언약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들인 메시야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스
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불신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선지자 에스
겔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이미 구약 시대부터 드러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 선지자의 역할(33:1-20)
본 단락은 새로운 내용의 전개를 알리는 신학적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다(1
절;28:1;29:1;30:1;31:1). 특히 비유의 형식을 통해서 선지자의 책임과 역할을 극대화
시키고 있는데, 선지자의 경고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밝히고 있
는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지자를 세워 예언케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
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는 여호와의 사랑이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심판을 전하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1절).
이러한 본 단락은 (1) 파수꾼의 비유와 해석을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1-9절), (2)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전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10-20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
의 중요성과 책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 가운데 두 부분(7-9절,11-20절)은 다른 장들(3,18장)에서도 언급되
고 있다. 즉, 7-9절은 3:17-21,11-20절은 18:21-32 등과 유사하다. 그러나 단순한 반
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
다.
+-------+----------------------------------+---------------------------------+
| 구 분| 3:17-21 | 33:7-9 |
+-------+----------------------------------+---------------------------------+
| 배 경| 두루마리 환상(3:1-15)과 에스겔이 | 파수꾼의 비유(1-6절)와 이스라엘 |
| | 벙어리가 되는 사건(3:22-27) 중간 | 의 회개 를 촉구하는 내요(10-20 |
| | 에 위치함 | 절) 사이에 위치함 |
+-------+----------------------------------+---------------------------------+
| 강조점| 선지자의 예언 사역이 이스라엘의 | 선지자의 적극적인 예언 사역을 |
| | 패역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고 있 | 강조함 |
| | 음을 보여줌(3:26) | |
+-------+----------------------------------+---------------------------------+
| 구 분| 18:21-32 | 33:11-20 |
+-------+----------------------------------+---------------------------------+
| 배 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 선지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
| | 인정치 않고 조상에게 원인을 돌 | 반응을 보여주는 문맥 |
| | 리려는 상황(18:2) | |
+-------+----------------------------------+---------------------------------+
| 강조점| 회개의 당위성을 드러냄 |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함 |
+-------+----------------------------------+---------------------------------+
이와 같은 본 단락의 내용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1-9절). 저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
여 선지자의 위치와 책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특별히 선지자는 예언의 선
포 여부에 따라 전 공동체의 생사가 결정되며(4-6절).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준행
하는 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7절).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이 디모데
에게 구너면했던 내용과 흡사하다(딤후 4;1-4). 바울도 하나님의 권위에 의거하여(딤
후 4:1), 복음 선포를 명하였고 복음 전파자가 백성들의 구원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
음을 권고한다.
(2) 선지자는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10-20절). 에스겔은 표면적으로
는 예언의 대상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밝히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의 회개'에 두
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악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적인 언급
(11절)과 아울러 회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12,14-16,19절). 사
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어 하나님의 백성
으로 삼으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눅 15:3-32). 예수님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고 당시에 죄인이라고 인식되었던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눅
7:36-48;18:9-14). 특히 이 부분에서는 의인의 회개 가능성 보다는 악인의 회개 가능
성을 더 부각시킴으로 선지자가 궁극적으로 예언해야 할 내용이 회개를 통한 현재 삶
의 질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14-16절).
(3) 선지자는 설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한다(13,14,18,19절).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가정적인 표현들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
적으로 설득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언
할 때에는 불같이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지혜롭게 회
개를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의 타락한 삶을 알고도 직선적으
로 지적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자발적인 회개를 유도하셨다(요 4:4-26).
2.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33:21-33)
전 단락(1-20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개인적인 예언을 기록하였다. 이제 본 단락에
서는 이스라엘 전공동체에 대한 예언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한, 전 단락에서는 파수꾼
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으나, 본 단락
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21-24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적인 자세(31절)가 하나님의 기업에 대하서 심
각하게 오해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24절)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신란하게 폭
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 하나님의 땅의 약속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
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전반부(21-26절), (2) 칼과 들짐승과 온역
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짐을 묘사하고 있는 중반부(27-29절), (3) 선지자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30-33
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은 모세 언약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24-29절). 즉 선지
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와 삶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25,26절;출 20:4,5,14;레
17:10-14;19:26)., 그리고 죄에 대한 보응의 근거로서(27-29절; 신 27:26;29:25-29)
율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이 바벧론 포로 상황 속에서도 율법을 존
중하고 심판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오류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한 결과 심판을 받았다(23-29
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4절). 그들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가나안 따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많은 후손들에게 당연히 약속의 땅을 보장해 주시리라고 자만하였다. 이러
한 사실은 당시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고도 성전과 율법의 소유로 인해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교만과 일치한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므로 윤리
적 삶과 무관하게 무조건 구원받으리라고 생각하여 방탕한 삶을 영위했다(25,2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
삭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신적 삶을(창 22:1-18) 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부
리워졌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행함과 함께 일한 것'(약
2:21-24)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단지 아브라
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던 이스라엘 족속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27-29절).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했다(20-33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피
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
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겉으로는
듣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절), 단지 음악을 듣는 정도로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32절). 이와같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으로써 영적 소경이 되었
고, 거듭되는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며 육신적 요구를 따라 살게 되었다(31b절). 오
세아 선지자도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6)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식이 없어 목마르지 아니하고, 오
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방황과 절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선지자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유지시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만약 파수꾼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모든 백성들의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참다운 신앙은 합당한 열매를 수반해야 한다(14-16절;눅 3:8;13:1-9;계 3:19). 삶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약 2:17,26). (3)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보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빌 3:8). 하나님 없는 종교적 성공은 오히려 심각한 타락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총 3부로 구성된 본서의 마지막 3부(33-48장)가 시작되는 곳으로 이제껏 이스라엘과 주변 열강의 죄악을 지적하고 그 죄과로 말미암아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던 1부(1-24장), 2부(25-32장)와는 달리 이미 예루살렘이 멸망한 시점에서(32:1 주석 참조) 선지자는 더 이상 심판에 의한 멸망을 언급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궁극적인 회복과 구원이라는 위로와 평강의 메시지로 그 예언의 내용을 전환시킨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심판 예고 중에서도 그들의 고토 귀환(11:17;14:22)과 회복된 나라에서의 여호와 경배(20:40-44)를 언급한 바 있는데 본 예언부터 그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상세하게 기술된다. 이 3부는 크게 두 단락으로 대별되는 바, 그 첫째는 이스라엘의 고토 회복과 그 회복된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의 약속이며(33-39장), 둘째는 하나님에 의해 회복된 새 나라에서 영원히 여호와만을 섬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다(40-48장). 한편 그 시작인 본장은 선지자의 파수꾼적 사명(1-20절)과 안악한 백성들에 대한 경고(21-33절)가 기술된다. 혹자는 1-20절까지의 내용이 회복과 구원이라는 3부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점과 그 내용이 예루살렘 함락 직전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새로운 단락에 포함시키는 견해를 배격하고 1-32장까지에 대한 선지자의 최종적인 결론으로 이해한다(Kliefoth, Hengstenberg). 그러나 이 심판적 내용이 앞으로 전개될 회개와 회복의 전제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통시적인 개념과 구체적인 연대의 언급이 중반부인 21, 22절에 나타나, 전후 단락의 내용을 하나로 이어 주고 있다는 점으로 볼 때 본장을 3부의 서론부로 이해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Delitzsch).
=====33:2
본절에서 6절까지는 일반적인 군대의 파수병에 대한 비유를 들어 파수꾼의 막중한 책임과 파수꾼의 경고에 대한 반응을 비유하여, 이스라엘의 영적 파수꾼으로 부름받은 에스겔 선지자가 전개할 예언의 내용을 생동감 있게 전달한다. 네 민족에게 고하여 이르라 - 이는 예언의 대상이 다시 이스라엘 민족으로 환원된 사실을 가리키며 본장이 새로운 단락의 서론부라는 것을 지지하는 구절이다. 칼을 한 땅에 임하여 - 여기서 '칼'은 고대 전쟁의 가장 중요한 무기였던 바, 여기서는 대적의 침략으로 야기될 전쟁을 가리키는 제유법적 표현이다.
=====33:3
나팔을 불어 - 이 말은 성경의 용례상 특별하게 백성들을 소집하기 위한 신호를 나타내는 데 쓰여진 표현이다(Schroder). 한편 원어상 '나팔'(* , 쇼파르)은 '새기다'란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이 염소 뿔로 만든 나팔의 용도는 연주용이라기보다는 주로 축제 때 사람들의 마음에 특별한 의미를 새겨넣거나 전쟁 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되었다(민 10:6, 7;왕상 1:34).
=====33:4
그 피가 자기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 '그 피'란 파수꾼의 나팔 소리에도 불구하고 방비하지 않아 죽게 된 자의 피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는 자기 죄로 인해 죽게 됨을 강조한다.
=====33:5
본절은 4절에 선포된 내용을 부가적으로 설명하는 반복절이다.
=====33:6
자기 죄악 중에서 제한 바 되려니와 - 본 구절에서의 죽음이 하나님의 심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2절) 그 죽음은 파수꾼의 직무에 관계없이 자신의 죄과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의 결과임을 말한다. 그 죄를 내가 파숫군의 손에서 찾으리라 - 이 말은 파수꾼이 자신에게 주어진 책무, 곧 백성들의 안녕과 보호의 직임을 게을리함으로써 백성들을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점에서 간접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하나님은 그 죄값을 파수꾼에게서 찾으신다. 이 비유는 이스라엘에 있어 영적 파수꾼된 선지자의 책무와 그에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의 의무를 적절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33:7
이스라엘 족속의 파숫군을 삼음이 - 실로 구약에 있어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은 그 백성들에게 닥쳐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소식을 미리 대언해 줌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영적 각성과 여호와 찬양을 실천케 하는 영적 파수꾼으로 비유된다(렘 6:17).
=====33:8,9
본문은 3-6절의 비유에 대한 해설에 해당한다.
=====33:10
우리는 허물과 죄가 이미 우리에게 있어 - 예언의 새로운 전환을 시사하는 구절로서 이제까지 지속되어온 에스겔의 심판 예고 사역이 바로 백성들을 영적으로 각성시켜 본절처럼 그들 스스로가 죄를 인식하며, 그 죄를 시인케 함으로써 철저한 회개와 구원의 가능성을 열어주기 위한 것이었음을 암시한다(Schroder). 혹자는 이를 닥쳐온 심판을 모면하기 위한 위선적인 고백으로 생각하기도 한다(Havernick). 우리로 쇠패하게 하니 어찌 능히 살리요 - 여기서 '쇠패하게'(* , 네마킴)는 '녹이다', '썬다'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는 바, '어찌 능히 살리요'란 절망적인 고백과 관련하여 죄가 인간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를 잘 드러내주는 말이다.
=====33:11
본절은 내용상 18:23, 32의 반복이다. 악인의...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이 악인의 멸절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돌이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하는 구절로(신 8:5, 6;히 12:9-11), 절망을 마주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를 통한 새로운 구원의 소망을 확신시켜 주고 있다. 돌이키고 돌이키라 - 연속적으로 반복된 원어 '슈부'(* )는 '돌아가다'란 의미외에 '회복하다', '새롭게 하다'란 뜻을 함축하고 있는 바, 본 구절에서 이 말은 단순하게 악한 길에서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길에서 떠남은 물론 철저한 회개와 함께 새로운 신앙의 사람으로 그의 전인격이 회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33:12
의인이...구원치 못할 것이요 - 율법 주의에 얽매여 '자기의'(自己義)를 구원의 요건으로 확신하는 유다인들의 보편적인 생각과 당시 선조들의 의가 자손에게 전가된다는 그릇된 사상으로(18:20, 21) 인해 하나님의 심판적 징계를 회개와 구원의 전제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징계 자체를 이유없는 고난이라고 불평하며 심판적 경고와 그에 따른 회개를 촉구하는 선지자의 예언을 무시하고 배격하는 자들을 염두에 둔 구절이다. 에스겔은 구원의 소망을 제시한 11절에 이어 그러한 자들의 왜곡된 구원관을 경고하기 위해 20절까지 구원은 자기의가 아닌 회개와 새로운 신앙의 회복 속에 임하는 것이며 개개인의 운명은 어느 누구도 아닌 다사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라는(14:10, 14, 16, 18, 20) 하나님 심판의 기본적인 성격을 설파하고 있다.
=====33:13
그 의를 스스로 믿고 - 여기서 '스스로 믿고'는 주관적인 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따라서 본 구절은 그러한 자가 죄를 범하면서도 과거의 의가 자신을 구원하리라는 그릇된 확신 속에 안주하는 것을 경고하는 내용으로 계속적인 의의 실행만이 구원의 조건임을 제시한다(Schroder).
=====33:14
법과 의대로 행하여 - 여기서 '법'(* , 미쉬파트)은 종교적, 도덕적, 법률적 의미에서의 정의를 가리키며 '의'(* , 체다카)는 종교적, 도덕적 의미에서의 올바름(right, NIV)을 각각 가리킨다. 따라서 '법과 의'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의 의롭고 올바른 내적, 외적 상태를 포괄적으로 언급한 것이다(18:5). 이런 점에서 본 구절은 '돌이켜 자신의 죄에서 떠나서'라는 앞 구절과 함께 진정한 회개란 단순히 죄를 떠나는 것만이 아니라 새로운 인격의 회복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바른 삶을 사는 것임을 재삼 주지시킨다.
=====33:15
14절에 언급된 '법'과 '의'에 따른 행위가 몇 개의 구체적인 실례로 기술된다. 생명의 율례를 준행하여 - 상반절인 대인(對人) 관계에 대한 의의 회복을 말한 것이라면 본 구절은 대신(對神) 관계에 대한 회복을 가리킨다. 여기서 '생명의 율례'는 협의적으로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율법을, 광의적으로는 구원과 영원한 삶의 근거가 되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18:21;20:11).
=====33:16
본절에 대해서는 18:22 주석을 참조하라.
=====33:17
주의 길이 공평치 않다 하는도다 -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택한 백성된 자신들을 이방인들과 같이 심판 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하나님의 공평치 못한 섭리로 받아들였다는 의미로 최후까지 회개하지 않음은 물론 그 고난의 책임을 하나님께 전가하려는 백성들의 가증함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만유 앞에 공평하신 분이심을 깨닫고 회개했어야 하나 도리어 강퍅한 마음으로 모든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려 했던 것이다.
=====33:18
그가 그 가운데서 죽을 것이고 - 본 구절은 내용상 13절 상반절과 논리적 연관을 맺고 있다.
=====33:19
본절은 11절, 그리로 14-16절과 내용상 상통한다.
=====33:20
각기 행한 대로 심판하리라 - 구약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였던 까닭에 모든 죄의 책임을 나누어 가져야 했다(사 6:5).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개인의 죄가 언약 공동체의 공동 책임으로 희석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개인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신다. 곧 이스라엘의 죄는 공동체적 성격과 함께 개인적인 책임도 내포하는 것이었다.
=====33:21
본절은 선지자 예언의 새로운 전환부가 된다는 것을 연대기적 사실로 입증해주는 핵심 부분이다. 본장 이전에까지 언급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언이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성취되었으며 그 함락 뒤에 선지자에게 일어날 일을 예언한 24:25-27의 내용이 본절에서 성취되고 있다. 따라서 24:27의 예언대로 이제 선지자는 그 입을 열어 심판 뒤의 상황, 곧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게 될 구원의 소망을 선포하게 된다. 십 이 년 시 월 오 일 - 예루살렘의 함락은 시드기야 왕 제 11년(B.C. 586) 4월의 일이었다(렘 39:2). 따라서 여기에 나타난 연대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지 18개월이 경과한 시기로서, 이렇듯 오랜 시간이 경과한 뒤에 에스겔 선지자가 그 멸망 소식을 접했다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그러한 연유로 많은 학자들과 사본들은 맛소라 사본의 '12년'을 '11년'의 오기로 본다(LXX, 수리아역, Hitzig, Doederlein, Hengstenberg, Eichrodt). 또한 이러한 견해는 약 1세기가 지난 후 에스라가 동료들과 함께 똑같은 길을 4개월 만에 여행했다는 기록에 유추하여 볼 때(스 7:9) 에스겔에게 소식을 알린 도망자의 여정이 약 6개월 정도라는 사실과도 합치하는 바, 그 타당성이 인정된다 하겠다. 그러나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소식을 접한 시기를 에스겔이 잘못 길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왜냐하면 그의 예언이(24:25-27) 성취된 사실에 대한 특별한 소식을 접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33:22
본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새로운 예언이 시작된 것은 결코 도망자의 소식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직접적인 간섭 때문임을 시사한다. 곧 본절에 사용된 동사 '임하여'(* , 하예타 엘라), '여시더니'(* , 이프타흐)가 모두 미완료형으로 계속적인 동작의 상태를 나타내는 용법으로 쓰인 점과 '열리기로'(* , 이파타흐)가 '열리다'란 뜻을 강조하기 위한 강세 반복어란 점에서 선지자는 이미 도망한 자가 소식을 전하기 이전 저녁부터 새로운 구원과 회복의 예언을 선포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Schroder, Delitzsch). 여호와의 손이 내게 임하여 - 본 구절은 에스겔이 하나님의 역사에 의해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킨다(Michaelis, Delitzsch, Schroder). 다시는 잠잠하지 아니하였노라 - 곧 1-20절의 예언과 23절 이후의 예언을 구분지어 주는 말로 23절 이후의 예언은 도망온 자로부터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들은 후에 선포된 것임을 암시한다.
=====33:23
예루살렘 멸망 소식을 접한 선지자에게 처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직접적인 구원과 위로의 선포 이전에 형식적인 선민 사상에 젖어있던 자들에 대한 책망의 형식으로 전개된다. 곧 본절에서 29절까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그 당에 남아있는 유다인들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이다.
=====33:24
이스라엘 황무한 땅 - 여기서 '황무한'(* , 헤라보트)은 원어상 성읍이나 집들의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침략으로 철저하게 약탈되고 폐허가 되었기에(렘 33:10-13) 오히려 피신한 유다인들이 거주하는 곳보다 더 핍절한 환경이 되었음을 보여준다(Schroder). 아브라함은...주신 것이 되느니라 - 본 구절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육적 후손이라는 사실에 집착해 여전히 죄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고향에 남은 유다인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준다(요 8:33, 39). 곧 그들은 아브라함이 혼자의 몸으로도 가나안 땅을 하나님께 기업으로 얻은 바 되었으며 그 기업이 후손에게까지 약속된 것이라는 사실을 들어, 죄악에 빠진 자신들의 상태를 망각하고 여전히 가나안 땅이 자신들에게 회복될 것이며 심지어는 그 회복의 조건이 아브라함 때와 비교해 숫적으로 많은 자신들에게 훨씬 더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졌다. 실로 그들은 외적 조건에만 매달려 문제의 본질, 곧 자신들이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자격을 상실했음을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33:25
본절부터 29절까지 그들의 구체적인 죄목이 종교적, 도덕적 측면에 걸쳐 포괄적으로 나열된다. 피 있는 고기를 먹으며 - 구약 이스라엘에 있어 피는 곧 생명의 상징이었기에 일찍부터 이 피의 식용이 금지된 바 있다(창 9:4-6;레 17:12;19:26). 따라서 본 구절은 그들이 피를 깨끗하게 씻어내지 않은 채 고기를 먹음으로써 율법을 경시하고 어긴 사실을 가리키는 듯하다(Delitzsch, Havernick). 또한 이는 하반절의 우상 숭배와 관련하여 우상에게 바친 피 있는 제물의 식용을 언급한 것으로도 보여진다(18:6, 11, 15;22:3). 이와 달리 혹자는 피가 곧 생명의 상징이란 점을 비유해 그들의 살인 행위를 책망하는 것으로 이해했다(Hengstenberg). 그러나 '먹으며'라는 표현이 구체적으로 먹은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며 살인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 다시 언급되므로 이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 우상들에게 눈을 들며 피를 흘리니 - 영역 성경 중 리빙 바이블(LB)은 본 구절을 '너희가 우상을 숭배하고 살인하니'(you worship idols, and murder)로 의역했다. 이 해석은 본 구절에 매우 적절하다.
=====33:26
칼을 믿어 가증한 일을 행하며 - 여기서 '칼'은 일반적인 전쟁의 상징이 아니라 제한적인 '폭력'의 의미를 '가증한 일'은 우상 숭배를(18:12) 각각 가리킨다(Delitzsch). 특별히 슈로더(Schroder)는 '가증한 일'(* , 아시텐 토에바)이 여성형이란 점을 들어 이를 우상 숭배와 관련된 종교적 매음 행위로 보았다.
=====33:27
26절에 언급된 범죄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철저하고도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으 시사한다. 산성과 굴 - 여기서 '산성'(* , 메차도트)은 험한 산 위에 있어서 공략하기 어려운 천연 요새를, '굴'(* , 메아라)은 이스라엘 산지에 산재해 있어 은신하기에 알맞은 천연의 석회 동국을 각각 가리킨다(삼상 13:6). 하나님은 이런 곳에 피신해 있는 사람들에게조차 심판의 징벌이 임하게 하실 정도로 그 징벌을 철저하게 행하신다.
=====33:28
황무지와 놀라움이 되게 하고 - '황무지와 놀라움'(* , 쉐마마 우메솨마)이란 말은 둘 다 '황폐케 되다', '폐허가 되다', '경악하게 하다'란 뜻의 어근 '솨멤'(* )에서 파생된 말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역본들은 본 구절을 '황폐시켜 폐허가 되게 하고'(NIV, RSV), '가장 황폐하게 만들고'(KJV)로 번역했다. 권능의 교만을 그치게 하리니 - 여기서 '권능의 교만'(* , 게온 우즈)은 곧 세속적인 힘에서 유래한 교만을 가리키는 바, 본 구절은 그러한 교만의 근거가 되는 그들의 모든 세상적 존립 기반을 없어지게 하시겠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7:24 주석 참조).
=====33:29
그 때에...알리라 - 여기서 '알리라'(* , 야다)는 단순한 지식적 앎이 아니라 전인격을 통한 체험적 깨달음으로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정립과 그 맥을 같이한다(골 1:10). 따라서 본 구절은 위에 언급된 심판의 궁극적인 목적이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죄의 길에서 떠나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의 자리에 이를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임을 시사한다(11절).
=====33:30
본절은 에스겔 선지자의 예루살렘 심판 예언이 성취됨으로써 고조될 선지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이 진실한 회개와 구원의 소망 때문이 아닌 자신들의 이기적 정욕 충족을 위한 것임을 보여준다. 담 곁에서와 집 문에서 너를 의논하며 - '담 곁에서'는 은밀하고 비밀한 것을, '집 문에서'는 공공연하게 공개되는 것을 각각 의미하는 말이며(Delitzsch, Schroder), '너를'(* , 베카)은 '너에게 관해서'란 문자적 의미로, 곧 이스라엘 백성들이 에스겔과 그의 예언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임을 가리킨다(Schroder). 그리고 이것은 예루살렘 멸망 예언의 성취 후 선지자의 존재가 백성들간에 음으로 양으로 급속하게 부각되었음을 시사한다. 자, 가서...들어보자 - 말씀에 대한 진지한 경청과 그에 대한 순종의 자세라기보다는 단지 새로운 소식에 대한 호기심의 총족을 위한 행동이다(31절 주석 참조).
=====33:31
내 백성처럼...행치 아니하니 - 본 구절은 실천적 순종이 결여된 그들의 내적 자세를 암시하고 있는 바, 그들의 행동이 극히 위선되고 가증된 것임을 주지시키고 있다. 입으로 사랑을 나타내어도 - 여기서 '사랑'(* , 아가빔)은 그들의 이기적 안목에서 자신들의 기호와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것을 가리킨다(Delitzsch, Schroder). 따라서 본 구절은 후반절과 관련하여 그들 서로가 서로에게 하는 모든 좋은 말들이 기실은 자신들의 이기적 욕구 충족에 그 목적이 있음을 보여주는 구절로, 극단적으로 상반된 그들의 내적, 외적 상태의 양면성을 암시한다(Gesenius, Havernick).
=====33:32
음악을 잘하며...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구약 선지자들이 종종 그들의 예언을 노래로 읊어 전달한 사실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삼상 10:5;왕하 3:15).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같이'(* , 케쉬르 아가빔)는 세속적 의미에서 노래로 즐거움을 주는 가수와 같다는 뜻이다(Delitzsch, Hitzig). 이는 백성들이 에스겔의 예언을 회복과 구원의 전제로서 진지하게 경청한 것이 아니라 단지 좋은 음악을 듣듯이 피상적으로 들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회개를 전제로 선포한 심판의 구원의 메시지 중 그들은 자신들의 욕구에 맞는 구원의 메시지만을 아무런 결단이나 돌이킴 없이 듣기 좋은 말로만 수용했다.
=====33:33
그 말이 응하리니 - 백성들에게 선포한 심판이 성취될 것임을 말한다. 곧 그들은 아직도 회개에 이르기 위한 내적 상태와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구원의 약속에서 제외되었다.
본서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면 이스라엘의 조로 인한 심판을 예언하고 있는 첫
번째 부분(1-24장)과 이방 국가들에 대한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두 번째 부분(25-32
장) 그리고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 세 번째 부분(33-48장)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장은 바로 이 마지막 대목에 해당되는 이스라엘의 미래 회복에
대한 첫 번째 예언으로서, 에스겔의 소명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현재적 상황을 서술
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현재적 상황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언급되어 있기는 하지
만 여러 가지 가정적인(subjunctive) 언급들(7-9,14,18,19절)을 통해서 이스라엘의 미
래가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결국 본장은 하나님의 신실하
신 사랑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순종을 대조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본장은 (1) 파수꾼의 비유와 그 해석을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1-20절), (2)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의 상태를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21-3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이와 같은 내용을 통해 선지자는 회개하기를 거절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
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장은 전장(32장)과 비교해 볼 때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에 있어서도 약간
의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전장에서는 애가체(lamentable style)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나, 본장에서는 가정적 문체(subjunctive style)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왜냐하
면 전장이 애굽의 비참한 상황을 서술한 반면 본장은 이스라엘에게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하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본장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예언을 선포함에 있어서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실은 이스라엘의 죄가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집합적임을 암시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선지자 에스겔은 이스라엘 전공동체에 대한
예언임을 선언하면서도(2,10절), 동시에 여러 가정적인 상황들에서는 개인적인 회개와
결단(11-16절)을 촉구함과 아울러 최후의 심판이 개인적으로 이루어질 것임을 밝히는
것이다(20절).
또한, 본장은 역사적인 언급(21절)을 기점으로 전반부(1-20절)와 후반부(21-33절)
로 나뉜다. 이러한 구분 때문에 본장 전체의 내용은 일관성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
러나 저자의 일차적인 관심은 역사적 배경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사
랑에 반응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드러내는 것이다. 즉 전반부에서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해 이스라엘의 패역한 모습을,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언약을 준행치 못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특징을 담고 있는 본장은 여호와의 변함없는 사랑에도 불구하고 이스
라엘 백성들의 반역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적으로 심각해지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즉 파수꾼의 경고를 듣지 않는 상황(1-9절)에서 하나님의 공평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저부하는 모습으로(17-20절), 마침내는 하나님에 대하여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
로서(21-33절) 절정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이스라엘의 완악함은 예수 그리스
도의 악한 농부들의 비유에서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마 21:33-46). 즉 언약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들인 메시야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모습을 통하여 이스
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불신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선지자 에스
겔은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완악함이 이미 구약 시대부터 드러나고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1. 선지자의 역할(33:1-20)
본 단락은 새로운 내용의 전개를 알리는 신학적 표현으로 시작되고 있다(1
절;28:1;29:1;30:1;31:1). 특히 비유의 형식을 통해서 선지자의 책임과 역할을 극대화
시키고 있는데, 선지자의 경고 여부에 따라 이스라엘의 운명이 달려 있음을 밝히고 있
는 것이다. 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지자를 세워 예언케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
성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원하고 있는 여호와의 사랑이라는 점을 부각시킴으로써,
심판을 전하는 자의 기본적인 자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11절).
이러한 본 단락은 (1) 파수꾼의 비유와 해석을 기술하고 있는 전반부(1-9절), (2)
선지자가 이스라엘에게 전해야 할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후반부(10-20절) 등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하여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는 선지자
의 중요성과 책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본 단락 가운데 두 부분(7-9절,11-20절)은 다른 장들(3,18장)에서도 언급되
고 있다. 즉, 7-9절은 3:17-21,11-20절은 18:21-32 등과 유사하다. 그러나 단순한 반
복이 아니라 서로 다른 강조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비교하여 보면 다음과 같
다.
+-------+----------------------------------+---------------------------------+
| 구 분| 3:17-21 | 33:7-9 |
+-------+----------------------------------+---------------------------------+
| 배 경| 두루마리 환상(3:1-15)과 에스겔이 | 파수꾼의 비유(1-6절)와 이스라엘 |
| | 벙어리가 되는 사건(3:22-27) 중간 | 의 회개 를 촉구하는 내요(10-20 |
| | 에 위치함 | 절) 사이에 위치함 |
+-------+----------------------------------+---------------------------------+
| 강조점| 선지자의 예언 사역이 이스라엘의 | 선지자의 적극적인 예언 사역을 |
| | 패역으로 인하여 위기를 맞고 있 | 강조함 |
| | 음을 보여줌(3:26) | |
+-------+----------------------------------+---------------------------------+
| 구 분| 18:21-32 | 33:11-20 |
+-------+----------------------------------+---------------------------------+
| 배 경|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죄를 | 선지자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
| | 인정치 않고 조상에게 원인을 돌 | 반응을 보여주는 문맥 |
| | 리려는 상황(18:2) | |
+-------+----------------------------------+---------------------------------+
| 강조점| 회개의 당위성을 드러냄 | 회개의 가능성을 부여함 |
+-------+----------------------------------+---------------------------------+
이와 같은 본 단락의 내용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1-9절). 저자는 파수꾼의 비유를 통하
여 선지자의 위치와 책임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특별히 선지자는 예언의 선
포 여부에 따라 전 공동체의 생사가 결정되며(4-6절). 하나님의 절대적인 명령을 준행
하는 자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7절). 이와 같은 사실은 바울이 디모데
에게 구너면했던 내용과 흡사하다(딤후 4;1-4). 바울도 하나님의 권위에 의거하여(딤
후 4:1), 복음 선포를 명하였고 복음 전파자가 백성들의 구원에 절대적인 영향력이 있
음을 권고한다.
(2) 선지자는 악인의 회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10-20절). 에스겔은 표면적으로
는 예언의 대상이 '의인과 악인'이라고 밝히지만 궁극적인 관심은 '악인의 회개'에 두
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하나님이 악인의 회개를 기뻐하신다는 선언적인 언급
(11절)과 아울러 회개의 가능성에 대하여 여러 번 반복하고 있다(12,14-16,19절). 사
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죄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어 하나님의 백성
으로 삼으시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눅 15:3-32). 예수님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
고 당시에 죄인이라고 인식되었던 자들에게 집중적으로 복음을 전하셨던 것이다(눅
7:36-48;18:9-14). 특히 이 부분에서는 의인의 회개 가능성 보다는 악인의 회개 가능
성을 더 부각시킴으로 선지자가 궁극적으로 예언해야 할 내용이 회개를 통한 현재 삶
의 질적인 변화를 촉구하는 것임을 밝히고 있다(14-16절).
(3) 선지자는 설득하는 자세로 전해야 한다(13,14,18,19절). 이 부분에서 나타나는
가정적인 표현들은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하여 정죄하는 자세가 아니라 합리
적으로 설득하는 자세를 견지해야 함을 보여준다. 물론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선언
할 때에는 불같이 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백성들의 상황을 고려하면서 지혜롭게 회
개를 촉구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사마리아 여인의 타락한 삶을 알고도 직선적으
로 지적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접근함으로써 자발적인 회개를 유도하셨다(요 4:4-26).
2.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릇된 신앙(33:21-33)
전 단락(1-20절)은 이스라엘에 대한 개인적인 예언을 기록하였다. 이제 본 단락에
서는 이스라엘 전공동체에 대한 예언으로 확대되고 있다. 또한, 전 단락에서는 파수꾼
의 비유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하고 있으나, 본 단락
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 하여(21-24절)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심판을 기술하고
있다. 에스겔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중적인 자세(31절)가 하나님의 기업에 대하서 심
각하게 오해하는 것임을 지적하면서(24절)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무지를 신란하게 폭
로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본 단락은 (1) 하나님의 땅의 약속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
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는 전반부(21-26절), (2) 칼과 들짐승과 온역
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이루어짐을 묘사하고 있는 중반부(27-29절), (3) 선지자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는 후반부(30-33
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본 단락은 모세 언약적 특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24-29절). 즉 선지
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현재와 삶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25,26절;출 20:4,5,14;레
17:10-14;19:26)., 그리고 죄에 대한 보응의 근거로서(27-29절; 신 27:26;29:25-29)
율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에스겔이 바벧론 포로 상황 속에서도 율법을 존
중하고 심판의 근거로 사용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본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적 오류에 대해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오해한 결과 심판을 받았다(23-29
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
을 것이라고 생각했다(24절). 그들은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가나안 따을 선물로 주신
하나님께서 많은 후손들에게 당연히 약속의 땅을 보장해 주시리라고 자만하였다. 이러
한 사실은 당시 언약 백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고받고도 성전과 율법의 소유로 인해
결코 멸망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던 교만과 일치한다. 그들은 선택된 자들이므로 윤리
적 삶과 무관하게 무조건 구원받으리라고 생각하여 방탕한 삶을 영위했다(25,26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언약을 거부한 자들에게는 저주를 내리신다. 아브라함도 독자 이
삭까지 하나님께 바치는 온전한 헌신적 삶을(창 22:1-18) 통하여 믿음의 조상으로 부
리워졌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행함과 함께 일한 것'(약
2:21-24)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순종하지 않고, 단지 아브라
함의 자손이라는 사실만으로 만족했던 이스라엘 족속은 심판을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
이다(27-29절).
(2)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했다(20-33절).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피
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나님에 대해 올바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
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시고 전인격적 반응을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
그 결과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선지자를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겉으로는
듣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으며(31절), 단지 음악을 듣는 정도로
소홀히 여기고 있었다(32절). 이와같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김으로써 영적 소경이 되었
고, 거듭되는 선지자의 경고를 무시하며 육신적 요구를 따라 살게 되었다(31b절). 오
세아 선지자도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어 망한다'(호
4:6)라고 지적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양식이 없어 목마르지 아니하고, 오
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을 때 방황과 절망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선지자는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유지시키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므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만약 파수꾼이 자기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면, 모든 백성들의 회복이 불가능하게 되기 때문이다. (2) 참다운 신앙은 합당한 열매를 수반해야 한다(14-16절;눅 3:8;13:1-9;계 3:19). 삶의 변화가 없는 회개는 진정한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약 2:17,26). (3) 하나님에 대해서 알기보다 하나님 자체에 대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빌 3:8). 하나님 없는 종교적 성공은 오히려 심각한 타락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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