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7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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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 '피하오니'(* , 하시티)의 기본형 '하사'(* )는 '피난하다' 혹은 '신뢰하다'를 뜻하며, 위기를 맞이한 저자가 황망 중에서도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함으로써 그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모습을 잘 묘사해준다.
나로 영영히 수리를 당케 마소서 - 원수들에 의해 잡힘으로써, 그들로부터 온갖 창피와 수모를 당하게끔 되지 말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여기서 '수치를 당케'(* , 예보솨)는 70:2 주석을 참조하라. 한편, '영영히'(* , 레올함)는 '결코'의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Calvin).


=====71:2
주의 의로 나를 건지시며 - 여기서 '주의 의'는, 환난 중에서도 하나님의 언약을 의지하면서 인내하는 의인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과 그에 따른 보상을 가리킨다(Rawlinson, Delitzsch, Kraus). 본 시편 기자는 바로 이와 같은 '주의 의'가 자신에게 베풀어짐 으로써 환난에서 건짐 받기를 원한 것이다.
나를풀어 주시며(* , 테팔르테니) - 기본형 '팔라트'(* )는 '도피하다' 혹은 '벗어나다'의 뜻으로서, 생명 보존을 목적으로 한 신속한 탈출 행위를 가리킨다(창 45:7;스 9:8, 13-15).
주의 귀를 내게 기울이사 - 간절한 부르짖음에 응답해달라는 뜻의 신인동형동성론적 표현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에 따라 기도하는 성도에게 그 응답을 가장 유익한 방향으로 적절하게 유보시키실 뿐, 성도의 모든 기도를 항상 귀담아 듣고 계신다(66:19).

=====71:3
주는...피하여 거할 바위가 되소서 - '피하여 거할'(* , 마온 라보) 중 '거할'(마온)은 주께서 성전에 임재하신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26:8), 대부분의 경우에서는 안전한 '거처'를 가리킨다(90:1;91:9). 그리고 '바위'(* , 추르)는 쉽사리 올라가기 곤란한 대단히 크고 높은 바위를 가리킨다(61:2;출 17:6). 따라서 본 문구는, 저자 자신을 아무도 해하지 못하도록 안전하게 보호해달라는 간구이다.
무시로(* , 타미드) - 구약 성경의 대부분에서 '항상'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16:8;72:15).
주께서 나를 구원하라 명하셨으니 -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명하셨느냐는 것은 별다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빛이 있으라' 고 특정한 대상없이 명령하기도 하셨기 때문이다(창 1:3). 따라서 '명하셨으니'는 저자를 구원키 위한 하나님의 결단으로 봐야 적절한 것이다(68:28). 그런데 하나님의 결단은 곧 성취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71:4
악인(* , 라솨) - 이것은 단순히 악의(惡意)를 품고 있는 정도를 넘어 실제적으로 의인에 대하여 악행을 일삼는 자들에 대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Herbert Livingston).
불의한 자(* , 메아웰) - '벗어나다'를 뜻하는 아랍어 '울'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한 동사 '울각'(* )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올바른 표준에서 벗어나는 나쁜 행동 혹은 그러한 행동을 일삼는 자를 가리킨다.
흉억한 자(* , 호메츠) - '발효되다'를 뜻하는 동사 '하마츠'(*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마치 누룩이 밀가루 반죽 전체에 번지듯이 그 인격이 죄악성에 의해서 뿌리 깊이 오염되어 있는 상태 혹은 그러한 상태에 놓인 자를 지칭한다(마 16: 6;고전 5:8). 따라서 이 단어는, 죄악된 행동을 하는데 대단히 익숙해 있는 극악한자들에 대하여 사용되기에 적절하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이 단어를 '난폭한 자'라고 사역(私譯)하였다.

=====71:5
히브리 원문에는 본 구절이 앞 구절의 이유임을 말해주는 접속사 '키'(* )가 있다.
주 여호와 - '주'(* , 아도나이)는 위엄과 지배라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는 하나님의 명칭이다(16절). 다른 시편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또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문맥에서 이러한 명칭이 자주 사용되었다(51:15). 그리고 '여호와'(* )는, 당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따라서 본 시편 기자는 당신의 백성을 위험에서 구원하시겟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신실히 이행되어 자신이 신속히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하고 있다.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 이는 시인이 자신에게 '주 여호와'가 되시는 하나님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의지하고 그분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바라보았음을 말한다(렘 17: 13;50:7). 여기서 '소망'(* , 티크와)은, '간절한 기대감으로 고대하다'는 뜻의 동사 '카와'(*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믿음과 인내를 갖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은혜를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 '나의 어릴 때부터'(* , 민우라이)의 '어릴 때'(* , 나아르)는 '노년 시기'와 반대되는 폭넓은 의미를 갖고 있다. 즉 문맥에 따라서 '유아'(출 2:6), '소년'(창 21:17), 혹은 '청년'(119:9) 등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다.본문맥은, 지극히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다음 구절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여기서는 '유아기'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71:6
내가 모태에서부터...취하여 내신 바 되었사오니 -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성장 과정 뿐만 아니라 심지어 수태, 태아 발육 그리고 출산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함께 하셨다는 고백이다. 이는 시인이 자신의 전 존재를 오직 하나님께 의탁하기를 소원하는 심령을 반영하며 또한 그가 앞으로도 항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저자가 자의식이 없었던 때에도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대한 분명한 의식을 소유한 때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 그분을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나를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 -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처음부터 돌보아주셨다는 데 대한 감사의 표시이다. 시인은 이처럼 처음부터 자신을 도우신 하나님께서 자기가 죽는 순간까지도 적절히 붙드시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9, 18절).

=====71:7
나는 무리에게 이상함이 되었사오나 -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이상한 눈초리로 본 시편 기자를 보라보았다고 말한 것은, 출생 전부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고백한 시인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볼 때는 현저한 고통(4절)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주는 나의 견고함 피난처시오 - 본 시편 기자는 자신이 당하고 있던 환난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조롱을 받았으면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면서 그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곧 뻗치실 것을 확신하고 있는 것이다.

=====71:8
주를 존숭(尊崇)함(* , 티프아르테카) - '영화롭게 하다' 혹은 '아름답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 '파아르'(*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축제나 예식 때에 입는 아름다운 의복(사 52:1), 여인의 장식물(사 3:18), 영광(89:17;삿 4:9) 혹은 명예(신 26:19) 등의 뜻으로 쓰였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영광 흑은 그 영광을 찬양하는 것(잠 28:12 참조)을 나타낸다(Asderson).

=====71:9
나를 늙은 때에 버리지 마시며 - '늙은 때'는, 시인이 본 시편을 저작했을 당시를 가리킨다. 여기서 시인은 '모태에서부터 붙들어주신'(6절) 하나넘이 생의 마지막 날까지 항상 함께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하나님과의 화목 관계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비극이요, 고통이라는 사실을 시인은 누구보다도 절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한편 본문은태(胎)에서부터 1년에 이르기까지 보호해주시겠다고 하신 사 46:3, 4의 약속을 연상시킨다.

=====71:10
나의 영혼을 엿보는 자 - '엿보는 자'(* , 쇼므레이)는 '지키다' 혹은 '경비하다'를 뜻하는 동사 '솨마르'(* )에서 나온 단어로서, 해칠 기회를 포착하기 위해 모든 동태를 주의 깊게 지켜 살피는 모습을 시사한다. 이는 앞 문구의 '나의 원수들'에 대한 설명적 성격을 지닌다.


=====71:11
따라 잡으라 건질 자가 없다 - 본절은 압살롬 일당의 반역이 막바지에 이를 당시 아히도벧이 압살롭에게 했던 말을 연상시킨다(삼하 17:1, 2). 아마 이 시구는 본 시편 기자 자신의 생생한 체험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여기서 '따라'(* , 리드푸)의 기본형인 '라다프'(* )는 '추적하다' 혹은 '핍박하다'의 뜻이 있으며, 상대를 해칠 목적으로 온갖 열심을 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고 '잡으라'(* , 티프수후)는 후속적 행동 곧 여기서는 죽이는 일을 전제로 하는 포 행위를 가리킨다.

=====71:12
원수들은, 핍박하는 자신들에게 아무런 징벌도 내려지지 않자 하나님이 본 시편 기자를 더 이상 보호하지 않으신다고 결론을 내렸다(11절). 그러면서 그들은 기자를 죽여 없애버린다고 해도 아무런 벌도 받지 않으리라고 생각하고 그 계획을 서서히 실행하려 하고 있었다. 바로 이 같은 상황에서, 기자는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는 것이다(22:19;35:22;38:21, 22).


=====71:13
내 영혼을 대적하는 자로 - '대적하는 자'(* ,사트네이)는 동사 '사탄'(* )에서 파생되었다. 이 동사는 '훼방하다'의 뜻으로서, '원한을 품는 것' 혹은 '악으로 선을 갚는 것'(38:20;109:4) 등을 가리킨다. 그리고 항상 성도를 파멸케 하려는 사악한 인격적 존재인 마귀 곧 '사탄'(* )이라는 용어도 바로 이 동사에서 나왔다(욥 1:6-12). 따라서 이 '대적하는 자들'이란 말은 본 시편 기자를 까닭없이 그리고 집요하게 해치려고 했던 세력들이었음을 넉넉히 보여준다.
욕과 수욕이 덮이게 하소서 - '욕'(* , 헤레파)은 69편에서 무려 다섯번씩(69:7,10,10,19,20)이나 사용된 단어이다. 어근인 '하라프'(* )는 '비난하다' 혹은 '도전하다' 등의 뜻을 지니며 어떤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기 위하여 그에게 허물이나 죄를 돌리는 것을 가리킨다(Thomas E. McComiskey),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조롱을 받아 극도의 수치감을 느껴는 것을 뜻할 것이다. 한편 '수욕'(* , 켈림마)은 '공적인 굴욕으로 인하여 입게 되는 마음의 상처' 혹은 '패배와 속박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가리킨다(삼상 20:34;사 50:6). 이제까지는 악인들이 시인에게 수치를 안겨주려 하였으나 그들은 실패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간섭으로 말미암아 그 악인들에게 그 수치가 돌아가게 해달라는 것이다(70:2).

=====71:14
본절의 다짐은 앞절과 갈은 저자 자신의 간구가 응답될 것을 확신한 결과였다.
나는 항상 소망을 품고 - 여기서 '소망을 품고'(* , 아야헬)의 기본형 '야할'(* )은 '기다리다' 혹은 '바라다'의 뜻이 있으며, 특히 짧은 기간 동안의 기다림을 가리킨다(창 8:12).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본 시편을 쓸 당시에 하나님이 구원의 손길을 속히 보내줄 것임을 확고히 믿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저자는 본 시편의초반부인 5절에서는 오랜 기간의 기다림을 뜻하는 '소망'(* )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반면 여기서는 '야할'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확신을 일종의 점층법식으로 나타낸다.

=====71:15
본절은 다음절과 함께 저자의 서원이다. 다른 시편에서도, 환난에서 구원받은 후에이행하겠다는 여러 모양의 서원이 나와 있다(51:19;7:9;54:6;56:12;61:5). 측량할 수 없는 주의 의와 구원을...전하리이다 - '측량할 수 없는'(* , 키 로야다으티 세포로토)은 문자적으로 '왜냐하면 나는 그 측량치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의 뜻이다(Weiser). 이것은 저자가 '주의 의와 구원'을 전하려고 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즉, 저자는 그 '주의 의와 구원'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크기 때문에, 그 감격으로 그것들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서 접속사 '키'(* )를 양보의 뜻으로 보고 '비록...을 헤릴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로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thourh I know notits measure, NIV). 한편 본 문맥에서 '주의 의와 구우너'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주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거나 '구우너'하실 때에 그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신실함을 뜻하기 때문이다(Calvin). 다시 말하여 '주의 의'가 드러내어질 때만 '구원'도 있게 되는 것이다.


=====71:16
주 여호와의 능하신 행적을 가지고 오겠사오며 - 정확히 번역하기가 다소 애매한 본문은, '주하나님의 힘 안에서야(힘을 믿고) 나아갈 것입니다'(KJV). '와서 당신의 크신 행사를 선포할 것입니다'(NIV), 흑은 '주 하나님의 크신 행사를 가지고 올 것입니다'(RSV) 등으로 번역될 수 었다. 문맥상 하나님의 능하신 행적만을 의지하며 찬양하겠다는 저자의 서원으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무난하고다. 그런데 여기서 '능하신 행적'(* , 게부로토)은 복수(複數)이다. 이는 직접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저자를 구출하시기 위하여,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하여 행하신 여러 역사(役事)들을 가리킨다(신 3:24). 특히 이 단어의 어근인 '가바르'(* )가 일반적으로 전쟁 및 거기서 승리하는 용사(勇士)의 힘이나 무용(武勇)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John N. Oswalt)는 점에서, 본 단어는 악한 세력에 대한 하나님의 영적 전투와 그 결과를 뜻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진술하겠나이다. 여기서 '주의 의 곧 주의 의만'(* , 치드카트카 레바데카)은 문자적으로 '당신 자신만에 의한 당신의 의'(thy righeousness, even of thine only, KJV)를 뜻한다. 그리고 '진술하겠나이다'(* , 아즈키르)의 기본형 '자카르'(* )는 원래 '생각하다' 혹은 '기억하다'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생각이나 기억과 같은 지각 작용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공적인 선포 형위 혹은 칭찬 행위까지를 포함하여 가리킨다(45:17;아 1:4).


=====71:17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 본 시편 기자가 어릴적부터 경험을 통해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올 터득했음을 말한다(Cavin). 여기서 '어려서부터'는 5절의 '어릴 Eo부터'와 동일한 단어이다. 한편 '교훈하셨으므로'(* , 리마드타니)의 기본형 '라마드'(* )는 가르치는 것을 뜻하는 구약 성경의 12단어 중 하나이다. 그러나 이 동사는 단순히 교육하는 것뿐만 아니라 훈련시킨다는 개념도 내포한다. 이러한 훈련시킨다는 개념은, '소를 모는 막대기'를 뜻하는 본 동사의 파생어 '말메드'(* )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호 10:11). 저자가 이 문맥에서 바로 이와 갈은 어휘를 사용한 까닭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교훈'이 철저하게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였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히 12:7).
주의기사(* ,니플르오티카) - '기이하다' 혹은 '놀랍다'는 뜻의 동사 '팔라'(* )의 수동 분사 복수이다. 그런데 어근 '팔라'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될 수 없고 결국 하나님의 돌보심 혹은 반대로 보응적 심판으로 밖에는 설명될 수 없는 기적적 역사를 나타낼 때 주로 사용된다(Eichrodt).

=====71:18
내가...백수(白首)가 될 때에도...버리지 마시며 - 9절에서 거의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고 있으며, 죽움이 가까운 노년에도 자신을 계속 보호해달라는 간구이다. 이것은, 시인이 늙어 죽을 때까지 계속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하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너무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17절 주석 참조) 내가 주의 힘을 후대에 전하고 - '주의 힘'(* , 제로아카)의 '힘'(* , 제로아)은 원래 '팔'을 뜻한다. 그러나 이 단어는 하나님의 힘을 의미하는 신인동형론적(神人同形論的)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특히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이방 열강들을 엄중히 징벌하실 때의 도구로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사 48:14;52:10;겔 30:21). 한편 '후대에 전하고'는 말로써 그렇게 한다는 뜻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즉, 저자가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입을 경우, 그것이 곧 의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보호받는 특별한 존재임을 중명하는 일과 다름없음을 시사하기도 하는 것이다(Calvin).

=====71:19
주의 의가...지극히 높으시니이다 - '주의 의'는,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들을 보호하거나 구원하실 때에 그들을 향해 드러내시는 신실함을 가리킨다(15절, Anderson). 한편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는 15절의 '측량할 수 없는'과 동일한 뜻이다. 다만 '지극히 높으시니이다'는 하나님의 '의'를 높이로써 표현한 반면, 15절에서는 양으로써 표현하고 있을 따름이다.
주께서 대사(大事)를 행하셨사오니 - 이는 앞 문구의 구체적 국면이다. 즉, 여기의 '대사'는 16절의 '능하신 행적', 18절의 '주의 능' 등과 동일한 뜻을 전달하는 말로서 앞 문구의 '주의 의'가 역사 속에서 실현된 구체적 모습인 것이다.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 -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를 소유하셨고, 그래서 '대사'를 행하실 수 있는 분임을 강조하기 위한 반문이다. 또한 이것은 그 어떤 장애물도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극복되지 않을 것이 없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71:20
우리에게 많고 심한 고난을 보이신 주께서 - '우리에게...보이신 주께'(* 3 , 히르이타니우)는 오히려 '주께서 나에게...보이셨다'로 번역해야 한다(C. B.Moll, Delitzsch, NIV). 본 시편이 기자의 개인적 고난과 그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간구를 묘사하고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한편, '심한'(* , 라오트)은, '깨뜨리다' 혹은 '분쇄하다' 등을 뜻하는 동사 '라아'(* )에서 파생됐으며, '고난'(* , 차로트)은 '묶다' 혹은 '고통을 가하다'를 뜻하는 동사 '차라르'(* ,)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의부적 압력으로 말미암는 강력한 내적 고통을 가리킨다(25:17).
땅 깊은 곳에서 다시 이끌어 올리시리이다 - 바로 앞의 '다시 살리시며'라는 문구와 같이 마치 죽음에 이른 듯한 위기에서도 하나님이 다시 저자를 구출하실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런데 '깊은 곳'(* , 테훔)은, 70인역에서는 '심연' 혹은 '무저갱'(계 20:1)을 뜻하는 '아뷔소스'(* )로 번역되었으며, 스올 곧 죽음의 상황과 마찬가지로(9:13) 극도의 고난과 위험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Delitzsch, Rawlinson).


=====71:21
나를 더욱 창대하게 하시고 -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깊은 곳'으로부터 구출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원래 모습 그 이상으로 높아지게 해달라는 간구이다(대상 29:28). 한편 본문의 문자적 의미는 '나의 위대함을 중대시켜 주시고'이다. 여기서 '위대함'(* , 게둘라)은 대개 하나님께 적용되는 말로 사용되었다(145:3,6). 그러나 여기서는 어떤 사람의 존귀나 영예를 뜻하는 히브리어 '카보드'(* )와 동의어로 쓰였으며, 구체적으로는 저자가 지위와 그에 따른 위엄을 가리킨다(delitzsch).

=====71:22
비파...수금으로 주를 찬양하리이다 - '비파'와 '수금'이 동시에 언급되고 있다는 점에서, 성소에서 이루어지는 공적인 찬양을 암시한다.
주의 성실 - '성실'(* , 에메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언약을 온전히 이행하신 일과 관련한 그 신실성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거룩 하신 주 - 언약 백성을 구속하시는 과정에서 반역적 태도를 취하는 자들을 엄중히 징계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명칭이다(78:41;89:18;출 15:11;사 1:4;렘 50:29;51:5, VanGemeren).

=====71:23
본 구절은, 시인의 찬양이 전인격적인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시인은 위선이나 거짓없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한 것이다(Calvin).

=====71:24
나를 모해하려 하던 자가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초두에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어서, 본 문구가 길 22, 23절 그리고 본절 상반 절의 이유를 설명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물론 본문과 같은 일은, 하나님께서 본 시편 기자 '모해하려 하던 자'를 징벌하심으로써 기자가 위기의 상황에서 구출될 때 이루어지게 된다. 여기서 '수치와 무안을 당함이니이다' 중 '수치'는 13절의 '수욕'에 대한 주석을, 그리고 '무안을 당함이니이다'는 13절의 '욕'에 대한 주석을 참조하라.

 

 

 

  본 시편은 분류상 '비탄시'에 속한다. 시인은 자신에게 일아난 고난의 일을 통해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
  고난의 상황을 유추하여 카일 델리취(Keil & Delitzsch)와 같은 주석 학자는 이  시의 저자가 예레미야라고 추정한다. 왜냐하면 이전 시들을 자신의 의도대로 묶는  기술이 예레미야의 특징인데 본 시편에서 그러한 현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즉본 시편의 1-3절은 31:2-4에서 인용된 것이고, 4-6절은 22:10, 11에서 따왔으며,  '거할 바위'(3절)와 같은 표현은 다른 여러 시편에서 발견되고 있다. 또한 본 기자는  현재 고난에 처한 저자가 하나님의 직접적인 인도를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권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어려운 상황은 곧 기적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했던 예레미야의 상황과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21절은 시드기야를 섬긴 예레메야의 높은 지위를 암시하고  있기 때문에 저자를 밝히고 있지 않는 본시는 예레미야가 지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델보스(N.H.Ridderbos)와 같은 학자는 이 시의 저자를  다윗이라  밝힌다.왜냐하면 21절에 언급된 '나를 더욱 창대케 하시고 돌이키사 나를 위로해 달라'는  표현은 선지자의 말이기보다는 왕의 말이라는 것이다. 또한 70인역(LXX)에, 이 시의  표제로 등장하는 '다윗으로 저술된 시로서 요나답 자손 레갑이 노래한  시'라는  글귀는 더욱 다윗 저작설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 시의 저작이 다윗이라는 추론은  본  시편에 등장하는 다윗적 관용구인 '나의 반석', '나의 산성'(3절), '나의  원수'(10절),  '속히...도우소서'(12절)를 통해서도 증명되어 진다. 따라서 명확한 저자를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본시가 예레미야에 의해서보다는 다윗에 의해 지어졌다는 추론이 현명할 것이다.
  한편 본 시편의 저자에 대해서는 명시되어 있지 않으나, 본시의 저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즉 9절과 17절을 통해 시인의 나이가 많아  허약해져 있다는 사실, 또한 과중한 고난을 겪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과거에 자신에게 행하신 주(主)의 일을 회상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더욱 돈독해져 잇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21절을 통해 그의 직책이 범상치 않는 고위의 직책임도 생각할 수있다. 이렇게 저자를 다윗이라 예상하고, 노년에 고난을 겪었다고 생각할  때  저자의 상황은 아마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나, 스바의 반란 혹은 아도니야가 모반하려했던 어려운 때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이역시 정확한 근거를 찾기 힘들다.
  본시는 비탄시이기는 하지만 극잔적인 비탄의 감정으로 치닫고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저자가 노년에 이른 인생의 쇠퇴기에 있고 악인으로부터 핍박받는  어려운  상황에 있지만 노년이라는 저자의 상황을 통해 지난날을 회상하며 하나님께서 도우셨던  은혜의 때를 기억함으로 시의 후반부(17-24절)에서는 오히려 찬송과 감사를 드리고  있다. 따라서 극단적으로 비탄에 젖어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본시에는 시편 전반에 흐르는 비탄시의 특징이 모두 드러나 있다. 즉 저자는 자신의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 하나님임을 분명히 밝힌다. 그리고 악인들이 행하는 악행을  고소하면서 이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어려서부터 참으로 신뢰할 만한  분임을  드러낸다.
그리고 노년에도 자신을 구원해주실 것을 다시 한번 요청하면서 이 구원을 이루실  하나님께 확신에 찬 찬양을 드리고 있다.
  이런 비탄시의 특징을 숙지하고 본문을 다시 한번 살펴보면 본문의  전반부(1-13절)는 탄원과 간구의 주제를 반복하고, 후반부(14-24절)는 찬양과 감사라는 주제로  이어진다.
  특히 우리가 이 시를 읽을 때 주목해야 할 점은 22절에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주'라는 하나님의 명칭이다. 이 명칭은 시편에서 본시 22절과 78:41에서만  등장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를 단순히 고난 당하는 한 개인의 비탄시로 묶어  버리기보다는 22절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공중이 모인 집회 때에 애송되던 공동체적인 비탄시로 예배시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좋겠다. 이런 점을 감안한다면 이 시에 등장하는 시인의 증오(13절)가 단지 개인적인 원한에 관계된 증오라기 보다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하나님의 원수에 대한 증오로 사사로운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20절에 나타나고 있는 '우리'라는 표현도 이 시가 공예배 때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시의 표현적인 특색은 회상에 관한 내용이 풍부하다는 사실이다. 이 회상을 통해 우리는 이 시의 독자들로 하여금 선조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기억하면서 그 하나님을 찬양했던 신앙의 모본을 따르게끔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공예배로 모인 이스라엘 공동체는 시인 개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졌던 하나님의 은혜를 함게 기억함으로써 시인을 비롯한 선조들에게 베풀어졌던 것과 동일한 은혜에 참예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라는 19절 표현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왜냐하면 이는 '모세의  노래'로  알려진  출15:1-21 가운데서 발견되는 표현으로서 이 시를 암송하는 모든 이스라엘 자손들은 선조 이스라엘 보았던 하나님의 크신 기적에 대해서 공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일을 통해 시인은 독자는 회상이라는 수단으로써 현재 처한 고난 속에서도 반드시 역사하실 하나님을 기대하고 있다.

  1. 간구와 탄원(71:1-13)
  간구와 탄원으로 이루어진 본시의 첫째 부분에는 하나니의 구원의 요청과    자신에게 미친 고난에 대한 호소, 그리고 지난 날 놀라운 은혜로써 자신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을 앙망하고 있다.
  시인은 탄원하기 전에 진지한 태도로  하나님께    기도한다(1-4절).  시인의  기도는 31:1-3과 거의 동일한 간구 형태를 띠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를  핍박하는 핍박자들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실 것을 하나님게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시인의 기도가 역설적인 표현 형태를 띠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자신이 피할 반석과 산성으로 알고 있으면서도 구원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역설적 표현은 저자가 굉장한 위기의 상황에 몰려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위급한 상황에서 바로 하나님께 자신의 구체적인 어려움을    간구하지 않고 자신의 기도를 들으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숙고한다(5-8절). 저자는 어린 시절의 회상을 통해 자신을 보호하셨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22:9과 표현에 있어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병행절을 이루고  있다. 그는 회상을 수단으로 하나님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사실 모태에서 자신을 붙드셨다는 표현은 회상의 범위를 넘어서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회상이라 할 때에는  반드시 자신의 기억 속에 잠재된 부분이라야 한다. 그런데 저자는 인간의 의식으로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태아의 일을 기억하며 주께서 자신을 붙드셨다고 고백한다(6절). 이 표현은 굉장한 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히 이 사실을 저자의 과장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본문은 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가 가진 문학적 특색과  여호와
를 향한 시인의 굳건한 믿음을 고려해 볼 때 우리는 이 표현이 신뢰의 표현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현재 자신의 모습-인생의 황혼기에 처한 노년-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한 믿음은 곧 자기가 어머니의 태에 있을 때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호하셨을 것이라는 고백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뢰의 표현 속에서 저자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청하고 있는가? 먼저  저자는 자신이 수치를 당하지 않기를 , 즉 그의 기대가 수치스럽게 되지 않기를 요청하고  있다(1절). 그리고 저자는 자신이 원수의 손에서 구출되어지기를  요청한다(2절).  또한 저자는 하나님 안에서 휴식과 안전을 발견하게 되기를 요청하고 있다(3절), 그리고 저자는 감사할 일을 끊임없이 만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즐거워할 수 있도록  요청하고 있다(8절).
  저자는 이러한 요청과 더불어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의 처지를 탄원하고 있다(9-13절). 궁극적으로 시인에게 있어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악인으로부터의 구원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를 흔들고 있던 노년에 그와의 교제를 끊어버리시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이 두려움은 신뢰의 표현들이 있는 앞 구절(1-8절)과는 상반되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저자의  인간적인 솔직한 감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솔직한 표현은 18절에서도 다시 한번 나타나고 잇다. 여기서 우리는, 확신 가운데  있는 인간이라 할지라도 그 확신의 어디엔가에 불안이 있으며 그러기에 확신의 근거는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알리려는 시인의 깊은 의도를 간파해야 할 것이다. 본  시편은 이 부분에와서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킨다. 왜냐하면 불안 속에서 간구하는  시인을 하나님께서 버리실 것인지 아닌지 그 귀추가 주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불안에 빠진 저자의 탄원 내용이 앞 단락에서 했던 찬양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인은 고난과 재앙이라는 현재의 상황에 대해, 이 시기를 자신에게 있어서 멸망의 시기라기보다는 악한 자를 멸한 후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돈독히 구축할 수 있는 축복의 상황으로 바라보고 있다. 시인은 비록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다고 악인들에게 조롱을 받고 있으나 결국에 가서는 이 조롱의  결과가 자신이 아니라 악인들에게 내려질 것이라는 것을 경험을 통해 믿었기 때문에  저자의 탄원은 사실 축복의 상황으로 저자를 이끌고 있다.

  2. 감사와 찬양(71:14-24)
  본시의 두 번째 부분에서 저자는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셔서 자신을 핍박하는 원수를 멸하시고 비록 자신이 노년에  이른  나약한 자이지만 여전히 자신과 교제를 가져 주실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시인은 다른 사람들이 제사와 재물을 여호와께 가져오는    것처럼    자신도    하나님께 '신뢰'라는 제물을 가지고 간다고 고백한다(14-19절). 이러한 고백은 40:5과  66:13에서의 표현과 병행절을 이룬다. 시인은 자기의 입을 통해 종일 주님의 의(義)만 전하겠다는 결심을 하는데 이는 자신의 무죄함과 자신의 억울함을 들어주실 하나님의 신실성을 고백하는 말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고백은 시인으로 하여금 장차 하나님이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소망을 가질 수 있게 한다. 이 소망을  통해  시인은 고통 속이라 할지라도, 악한 자들의 조롱이 있다 할지라도 인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찬양드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기쁨과 찬미는  그에게 의롭게 행하시고 구원의 일을 행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며(15절), 하나님에 대한 경이와 감탄을 발하는 것이다(19절). 시인의 하나님을 향한 찬양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속의 일을 묵상함으로 더욱 고조되고 있다(20절). 한나가께서는 구속의 일을 행하시는데 그 구속의 일을 살펴보면 늘 평강으로써만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때로 고난과 재앙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들을 연단시키기도 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향한 순전하고 열정적인 믿음만 있다면 인생의 고난 속에서도 결코 좌절할 수 없음과 오히려 거룩한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음을 말한다. 이러한 시인의 생각은 66:10에서도 밝히 드러나는 사상이다. 시인은  자신이 장차 받을 구원이 곧 고난의 열매임을 알게 되었다(20절). 이제 시인은 하나님의 구원을 확신하며 기쁨과 환희를 피력한다(22, 23절). 그는 하나님의 미쁘심을 찬양하며(22절), 그 미쁘신 하나님이 곧 자신의 하나님이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주임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동체적으로 고백하고자 한다.
  시인의 기쁨의 표현을 주의하여 살펴보면 자신의 신체의 일부분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시인은 자신의 손을 통해 음악을 연주하여 기쁨을 표한다(22절). 그리고 자신의 입술을 통해서 기쁨을 표현하고(23절), 또 자신의 혀를 통해서도 주의 의를 찬양할 것이라고 말한다(24절). 이런 표현은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고는 결단코 결닐마 수 없다는 극에 달한 표현이라 하겠다.
  어떻게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시인은 이토록 최고의 찬양을 드릴 수 있었을까?  무엇이 시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역전의 상황을 만들었을까? 시인은 노인이 된 지금도 자기의 원수들에게 핍박받고 있음을 말하였다(9, 10절). 그런데 어떠한 연유로 이러한  찬양을 드리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실마리를 제공받을 수 있는 구절은  20절이  아닐까한다. 욥이 고난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았던 것처럼(욥 40장), 자신에게 있는 현재적 고난이 곧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부터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즉 시인은 고난을 통해서도 구속의 일을 전개시키시는 하나가의  역사를 알기 시작하면서부터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일신(一新)시키고 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현재적 고난으로 계속 좌절해 있지는 않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원망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의 공동체는 어떠한가? 하나님게서 환경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임을 확신하고 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바르게 이해해야 할 것이며, 그의 구속의 완성이 고난을 통해서였음을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이해가 있을 때 우리는 그 하나니을 향해 참으로 시인처럼  신뢰와 확신의 고백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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