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1
손바닥을 치고...외칠지어다 - 엄숙한 축하 순서 중의 하나로서, 기쁨을 표시하는 방법의 일종이다. 손바닥을 친다는 것은 왕하 11:12에 의하면 새로운 왕의 대관식에서 행해지던 관행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본 구절로 보아 모든 열방들이 그들의 새로운 왕을 즐거워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본 시편은 주제별 분류상 찬양시에 속하지만, 모든 열방들이 하나님을,그들의 왕으로 인정하고 기쁘게 맞아들여야 한다는 면에서 볼때 메시야 시편으로 볼 수도 있겠다. 만민, 모든열방이 공통적으로 그들의 왕으로 인지하고 기뻐할 수 있는 인물이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외침'에 대해서는 민 23:21주석을 참조하라.
=====47:2
자존하신 여호와는 엄위(嚴威)하시고 - (* , 키 예훼 엘룐노라).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왜냐하면 여호와, 곧 가장 높으신 이는 무섭기 때문'이다. 즉, 본절은 여호와 하나님이 만민의 기쁨의 대상이 되시는 이유를 설명하기 전에 그분이 가장높으신 분, 곧 모든 피조물보다 월등히 우월하신 분임을 밝히고 있다(95:3 ; 출 18:11 ; 대상 16:25 ; 대하 2:5). 그리고 나서 그분은 무서은 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무서운'이란 문자 그대로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이란 뜻이다. 그런데 이 문자적인 의미를 그대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하나님이 거칠고 엄하고 혹독한 분이기 때문에 그분을 우리의 왕으로 억지로 모셔야 한다고 착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태도는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神)에 대해 갖는 태도이다. 따라서 여기서 '무서운'이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가져야할 경외와존경의 태도를 강조하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할 만큼 존경스러운 분이시다. 그러므로 만민은 그분을 왕으로 섬겨야하는 것이다.
큰 임군 - 이는 원래 앗수르 왕들이 자신들을 지칭할 때 사용했던 표현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본 시편 기자가 그들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우월한 왕이신 하나님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한 것 같다. 세상의 언어로 하나님의 특성을 완전하게 묘사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언어들을 지고 하나님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애쓰는 일은 필요하다.
한편, 하나님께만 진정한 의미의 '큰 임군'이란 표현이 합당한 까닭은 오직 그분만이 온 세상의 통치자 이시기 때문이다(24:1 ; 말 1:14)
=====47:3
발 아래 - 이것은 '완전한 정복'에 대한 묘사이다. 이러한 묘사의 기원은 정복자가 자신의 발로 피정복자의 목을 밟았던 고대(古代)의 관행에서 찾아볼 수 있다(수 10:24).
복종케 하시며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야드배르'(* )로서 본절 이외에 18:47에서만 발견되는 동사이다. 이 용어의 원형은 '다바르'(* )인데, 그 의미가 '말하다', '이야기하다','정돈하다' 등인 점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용하시되 말씀 한마디로 이방을 정복하신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한편, 이것이 구체적으로는 다윗에 의한 가나안 정복을 뜻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Anderson).
=====47:4
사랑하신 야곱 - 여기서 아브라함이나 이삭이 아닌 야곱이 언급된 것은 가나안 땅이 야곱의 열두 아들의 이름들을 따서 12지파로 구분, 분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곱이 실제로 그 땅을 소유한 것으로 언급하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임에 들림없다. 참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은 그땅을 소유하지 못한 채 낯선 순례자로 약속의 땅에 우거하였을 뿐이었다(히 11:9, 10, 13). 그들이 소유한 땅은 그들이 묻힌 자그마한 매장지뿐이었다(창 23:12-16). 이후 그 땅은 실제로 야곱 가족의 소유가 되었다. 영화(榮華)로다.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가온'(* )으로 문자적인 뜻은 '자랑하다', '화려하다' 등이나 대부분의 역본들은 '우월하다'로 번역하고 있다.여기서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과는 달리 특별히 야곱에게만 특별하고도 우월한 선물을 주셨다는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135:4 참조). 그 선물이란 다름아닌 '거룩한 땅'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와 동일한 개념을 암 6:8(여기서 '그의 궁궐들'과 '기업'은 평행구를 이루고 있음)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거룩한 땅'은 소위 야곱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겼던 영광스러운 소유물로 불리우는데 그렇게 지칭되는 까닭은 그땅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의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47:5
하나님이...올라가심이여 - 본 구절에 대해 흑자는 삼하 6:16의 다윗의 도성으로 법궤가 입성하는 장면을 근거로 삼아 하나님께서 당신의 보좌로 승천하시는 모습으로 해석한다(Perowne). 흑자는 하나님이 하늘로 승천하시기는 하되 승리를 거두신 후에 당신의 나라 보좌로 승천하시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쟁을 치르는 그의 백성들을 돕기 위하여 강림하셨다가 이제 승리를 거두고 백성들의 승리의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승천하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시적인 표현이며 조금도 실제에 대한 묘사는 아니라고 후자의 견해를 지지하는학자들은 덧붙인다(Barnes). 그런가 하면 본 구절을 주님께서 이 땅에 강림하시어 구원 역사를 완성하시고 나서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리는 장면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우리는 이들 세견해 중 어느 것을 배타적으로 취하기보다는 나름대로 타당성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즉 (1)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본 강해에서도 밝혔듯이 시온 성으로의 법궤 안치(삼하 6:1-19)와 연관된다고 보며 (2) 본문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이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강림하셔서 구원을 성취한 후 다시 올라가시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며 (3) 궁극적으로는 예수의 부활 승천을 예표하고 있다는 것이다.
=====47:6
찬양하라 - 본 시편 저자는 이러한 찬양에 대한 명령을 본절과 7절에서 다섯 차례에 걸쳐 반복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찬양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를 기쁨이 차고 넘칠정도로 찬양할 것을 요구하는 명령으로 볼 수있다. 한편, 이는 막연한 대상이 아니라 성전의 노래하는 자, 그리고 음악가들이라는 특수 계층에 대한 명령인 듯하다(Kraus).
=====47:7
지혜의 시로 친양힐찌어다 (* ,자므루 마스킬). 이를 직역하면 '숙련된 곡조로 음률을 만들라'이다. 결국 이는 흘륭한 곡조 혹은 아름다운 음률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이와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온 땅의 왕이시라는 사실은 하나의 지혜(지식)인데 이 지혜를 지닌 자들은 그 사실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라고 본다(Barnes). 물론 하나 님이 온땅의 왕이라는 사실은 본 시편이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것이 하나의 지식이며 그 지식을 지닌 자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라고 볼수는 없다. 그럴 경우 문맥이 어색해 지기 때문이다. 문맥의 원활함과 앞절(6절)과 본절의 대비적 호응을 중시한다면 아름다운 음률(멜로디)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본 구절을 보는것이 바람직하다 하겠다.
=====47:8
하나님이 열방을 치리하시며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하나님이 이방을 통치하시며'이다. 즉, 하나님이 땅 위의 모든 나라를 통치하신다고 보는 것이다. 그분은 온 우주의 통치자이시기 때문이다(46:10).
=====47:9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다 (* , 암 엘로헤이 아브라함) 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이다. 본직역에 비추어 볼때 '되도다'라는 동사를 삽입하고 있는 개역 성경은 원문적이지못함을 알수있다. 그러나 본 구절에 대한 이해는 다양하다. 이 경우 문맥을 중시하여 해석할 수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보수주의 학자들도 문맥을 중시하여 개역 성경의 동사 ...되도다'를 생략하고 바로 앞 구절의 동사에 '아브라함의 하나의 백성'을 연결하여 '열방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로 모임이여'로 해석하고 있다(Perowne). 즉, 이 말은 열방의 방백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백성과 섞여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의미로 볼 때 하나님께 정복당한 열방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이스라엘 백성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그들의 참하나님으로 고백하게 될 것을 가리키는 것 같다(Barnes).
세상의 모든 방패는 여호와의 것임이여 - 여기서 '방패'란 그들 백성의 방어자, 혹은 옹호자임을 자청했던 열방의 방백들을 가리킨다. 본 표현은 그들 마저도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임을 암시하는말이다.
성전에서 예배가 진행되는 가운데 여호와께서 성전으로 올라가시는 임재(臨在)를 상
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본시는 (1) 지존하신 왕에 대한 경의를 표하도록 요청하며 그
이유를 제시하는 전반부(1-4절)와 (2)지고(至高)하신 왕의 공의로운 통치에 대해 찬양
하는 후반부(5-9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아마도 법궤를 시온 산으로 옮길 때 거행된 의식과 관련이 잇
는 것으로 생각된다(삼하 6:1-19). 이러한 추정은 '하나님이 즐거이 부르는 중에 올라
가심이여'라고 표현한 5절의 내용을 통하여 확증된다. 본시는 24편에서 묘사되는 오벱
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시온 산에 준비된 장막으로 옮기는 행사 이후에 언약궤를
성막안으로 들여놓은 의식에서 사용되던 노래이다. 그러므로 본 시편은 여호와 하나님
을 이스라엘과 만방의 왕으로 재인식하는 내용이 강조되어 나타난다. 시인은 언약궤가
성막 안에 좌정하는 모습을 하나님께서 세계의 통치자로 즉위하시는 모습과 연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좀더 확장해서 살펴본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강림하셔서 공생애(共生涯)를 마치신 후 하나님 나라로 승천하심과 열방들이 모두 복
종하게 될 그의 왕국이 세상에 세워질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한편 본시의 장르는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왕권을 찬송하는 국가적인 '찬양시'로 알
려져 있다. 본시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심과 동시에 세계 만민을 다스리시는
왕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본시는 93, 96-99편과 함께 왕의 즉위식에서 사용하던
'대관시'(enthronement psalm)로 분류되기도 한다.
이제 하나님께서 인류의 주인이심을 찬양하고 있는 본시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좀더 자세히 고찰해 보고자 한다.
첫째,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만민 중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드러나
있다(1-4절). 시인은 먼저 엄위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의 태도를 언급한다(1절). 여
기서 시인은 내적인 감격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권유한다. 만
약 우리가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찬송한다면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바리
새적 행위에 불과할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영혼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
나오는 감격으로 이루어져야 함을 제안한다(엡 5:19). 그리고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
에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해야 한다(요 4:24).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찬
양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인간의 내적 상태와 자세를 언급한 것자티다.
이어서 시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한다. 시인은 일차
적으로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찬양의 타당성을 입증한다. 시인은 여호와께서 세계
의 통치자이시며 온 우주를 만드신 창조주이심과 아우러 열방이 두려워하는 엄위로우
신 분이라고 소개한다(2절). 시인은 우주적 왕권을 소유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정확히
인식함으로써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찬양에 도달하였다.
다음으로 시인은 하나님께서 열조와 맺으신 언약을 신실히 지키시는 분이심을 상기
하면서 찬양할 이유를 발견한다(3, 4절).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맺은 약속을 기억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가나안 따을 기업으로 수여하셨다(창 12:1-7). 시인은 이처
럼 신실하게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담대함을 회복하고 신앙을
확고히 정립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말하는 땅의 소유는 신약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감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의와 공평이 완전히 실현되는 이상적인 나라를 믿는 자에게 상속하심을 믿
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불완전을 극복하시고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셔서 성
도를 온전히 구원하실 하나님께 대해 전심으로 찬양하여야 한다.
둘째, 구속을 완성하시고 승천하셔서 모든 민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나타나고 있다(5-9절). 본 대목에서 시인은 이스라엘의 구원을 넘어서서 열방
의 구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찬송하고 있다(9절). 이제 시인의 시야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탈피하여 전 세계로 확산된 것이다. 하나님은 온 땅을 지배하시고 우주를 초월
하여 왕권을 행사하신다. 믿지 않는 자들도 예외가 될 수 없다.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
시지 않고는 결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구현할 수 없다. 시인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
고 세계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극한 찬미를 드리고 있다.
시인은 본 대목에서 단순한 언어를 반복해서 사용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정열을 쏟아 하나님을 마음껏 찬송하고 있다(6, 7절). 시인은 목소리만으로 부르는 찬
양이 아니라 현악기의 반주에 맞추어 힘차게 찬미하고 있다. 이러한 찬양의 생활은 인
간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동시에 특권이다. 인간은 찬양을 통하여 삶의
존재 의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경건한 삶의 에너지를 충전하게 된다. 만약 인간이 하
나님께 찬양하기를 그친다면 이것은 결국 우상과 세상에 굴복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다(단 5:4). 우리는 구원의 감격을 기억하여 날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찬미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지존하신 하나님께서 온 세계를 공의롭게 통치할 것을 믿고 전 존재를
통하여 최상의 찬양을 드리고 있다.
또한 시인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환호와 찬양 속에서 법궤가 시온 산에 위치한 성막
안으로 들어감을 실감있게 묘사하고 있다(5절). 이러한 의식은 지상의 왕이 행진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사역을 모
두 마치시고 하늘로 승천하시는 장면을 예표한다(왕상 1:40; 행 1:9). 하나님께서는
법궤가 지성소로 들어가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많은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
라로 들어올리셨다(히 9:24).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올리우신 그대로 성도
들의 찬양과 환호 속에서 재림하실 것을 확증해 준다(살전 4:16). 시인은 성령의 감화를 받아 법궤의 안치를 보면서 그리스도의 승천과 재림에 나타날 하나님의 우주적 왕권을 소리높여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주권은 세계 만방에 영향력을 행사한다(사 45:23;빌 2:10, 11). 우리는 단순히 현실적인 상황에 매몰(埋沒)되어서 여호와의 종말론적 우주적 왕권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2) 찬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존재의 고백으로써만 가능하다. 찬양은 습관적인 노래나 몸 동작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영혼 깊숙이에서 흘러나오는 내면적 자세로 부터 시작된다. (3) 찬송의 내용은 지혜의 말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7절). 말씀 없는 찬양은 공허한 자기 고백에 불과하다.
Previous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