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54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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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1
고대 중근동 사람들에게 '이름'은 인격 혹은 그 인격에 포함된 총체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으로 여겨졌다(창 25:19-2를 주제 강해, '이름 짓기'참조). 따라서 '이름'은 문맥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서는 '능력'(Rawlinson), 특히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리킨다(Weiser). 다윗은 십 사람들의 밀고에 따라 자신의 일행을 추격해오던 사울과 그 군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같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삼상 23:19-2를;2를:1).
주의 힘으로 나를 판단하소서 - 여기서 '판단하소서'(* , 딘)는 원래 '재판하다' 혹은 '다투다'의 뜻으로서,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올바로 가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는 '변호하소서' 혹은 '억홀함을 풀어주소서' 등으로 번역할수도 있겠다(창 30:6;렘 22:16;30:13).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았던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그를 추격하고 있는 사울의 불의함을 인하여 그를 물리쳐 주시기를 탄원하고 있다.

=====54:2
하나님이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 39:12과 55:1에서도 유사한 표현이 나타나며, 본질적 의미상으로는 1절의 반복이다. 다윗은 이러한 의미상의 반복을 통하여 (1)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탄원이 반드시 받아들여 지기를 소원하며, (2) 자신이 대단히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을 간절히 알리고자 하였다.

=====54:3
외인이 일어나 나를 치며 - '외인'(* , 자림)은 '곁길로 들다' 혹은 '관계가 없어지다'의 뜻을 지닌 동사 '주르'(* )에서 파생된 분사형 명사로서, 하나님의 백성과 본질상 어울릴 수 없는 이방인들을 부정적으로 표현할때 주로 사용된다(민 3:10;잠 2:16;5:3). 구체적으로는 (1) 다윗이 십 광야에 있음을 사울에게 알려준 십 사람들(삼상 23:19;26:1), (2) 사울과 그의 군대(삼상 26:2) 등으로 볼 수있다. 그러나 본 문구의 '일어나 나를 치며'와 다음 문구의 '수색하며' 등이 본절에서 군사적 용어로 사용된 점에서 볼 때, (2)의 것이 더 타당하다. 한편 '일어나 나를 치며'(* , 카무 알라이)는 문자적으로 '나를 대하여 일어나다'의 뜻이다. 그중 '카무'는 군사적인 행동 혹은 그밖의 중요한 행동을 하기에 앞선 마음의 결단을 가리킬 때 사용되곤 한다(삼하 18:32;렘 49:14).
강포한 자가 내 생명을 수색하며 - '강포한 자'(* , 아리침)는 '위협하다'혹은 '학대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아라츠'(* )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것은 복수라는 점에서 앞의 '외인'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사울과 그의 군대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단어는 사울 개인의 포악한 성품을 잘 반영하는 것임도 사실이다(삼상 19:10;22:16, 17). 한편 '수색하며'(* , 바카쉬)는 자신의 분명한 목적과 관련하여 무엇을 애써 찾아 해매는 것을 가리킨다(대하 15:15;렘 29:13). 이처럼 사울은 다윗을 죽이기 위하여 십 사람들로 하여금 십 광야를 찾아 헤매게 하였고(삼상 23:22, 23), 또한 직접 삼천의 군사를 이끌고 그 지역을 정찰하기도 했다(삼상 23:15, 26;26:2, 3).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 이는 다윗을 해하려고 애썼던 외인, 곧 강포한 자의 영적 상태를 나타내며 특히 사울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지 아니했었음을 뜻한다. 사실 사울은 하나님의 신이 자신에게서 떠난 후 악령에 의해 지배받는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삼상 16:14;18:10, 11). 반면에 다윗은 주를 자기 앞에 모시는 삶을 살아갔었다(16:8).

=====54:4
하나님은 나의 돕는 자시라 - 히브리 원문에는 '보라!' 혹은 '여기에'의 뜻이 있는부사 '히네'(* )가 있다.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혹자는 본 문구를 '보라 !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 그분은 나의 돕는 자시라'라고 사역(私譯)하였다(Calvin, Weiser). 비록 이러한 사역이 약간 확대적이긴 하지만, 3절까지에 언급된 다윗 자신의 기도가 하나님께 응답되었다는 확신을 극명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적절하다. 즉,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도움을 주는 자의 입장에서 그의 곁에 계셨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한편 '돕는자'(* , 오제르)는 '구원하시는 자'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이다(수 10:6).
주께서 내 생명을 붙드는 자와 함께 하시나이다 - 이 같은 번역은 하나님의 도움이 다윗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미치고 있었던 것 같은 오해를 하게끔 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1)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드는 자 중의 한 분이시다(NIV, Kidner) (2) 주께서는 내 생명을 붙드는 분이시다(Kraus, Weiser, Keil, C. B. Moll)로 번역됨이 보통이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 중에서도, 본 문구의 '붙드는자'(* , 소므케이)가 복수 분사라는 점에서, (1)의 것이 더 옳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학자들이 (2)와 같은 번역을 고집하는 것은, (1)의 번역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던 모든 자들로 하여금 계속 그를 보호하게끔 하셨으며 그에 관한 주도권을 지니셨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다윗의 생명을 보호하던자들은 누구였을까? 그들은 다윗의 주변에 모여들었던 '육백 명'(삼상 23:13)을 가리킨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사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다윗의 보호자로 붙여주시지 않았다면, 쫓겨다니던 다윗을 계속적으로 추종하기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54:5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 '갚으시리니'(* , 야슈브)는 원래의 위치대로 되돌려 놓는 행동을 가리키는 동사 '슈브'(* )의 사역형이다. 따라서 본 문구는 문자적으로 '주께서 내 원수에게 악을 되돌아가게 하실 것이다'로 번역된다. 결국 본문은 원수들이 저지른 자신들의 악한 행위 그 이상으로 보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의 표명(表明)이다(Calvin). 한편 여기서 '악'은 구체적으로 '죽음'(삼상 23:20)을 가리킨다.
주의 성실하심으로 저희를 멸하소서 - 여기서 '성실'(* , 에메트)은 '확실성' 혹은 '불변성'을 뜻하는 단어이며(19:9;138:2), 이 문맥에서는 구체적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가리킨다(Rawlinson). 그리고 '멸하소서'(* , 차마트)는 '사라지다' 혹은 '파괴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로서 구약 성경에서는 사람의 생명을 끊는 행동을 가리킬 때 자주 사용된다(69:4;애 3:53).

=====54:6
내가 낙헌제(樂獻祭)로 구께 제사하리이다 - '낙헌제'(* , 네다바)는 일반적인 감사 예물보다도 훨씬 더 자발적인 성격의 제물이었다(민 15:3;신 16:17;고후 8:10-12). 따라서 본문에서는 하나님이 악인을 멸하시고 자신을 보호하실 것이라는 다윗의 확신이 드러나 있다. 즉 다윗은 비록 사울에 의해서 쫓기는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에 의해 결국 구원될 것을 확실히 믿으면서, 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미리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성막에 나아가지 못하는, 쫓기는 신세였기 때문에 '낙헌제'는 실제적으로 사울이 죽은(삼상 31:4, 5) 후에야 드려질 수 있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다 - '여호와'는 하나님의 언약적 측면을 강조하는 명칭이다. 여기서 다윗은 이 같은 명칭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곧 자신을 보호하시겠다는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며 또한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주의 이름'은 곧 '하나님의 인격' 혹은 '하나님 자체'를 가리킨다.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 - 히브리 원문에는 본 문구가 앞 문구의 이유에 해당됨을 보여 주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접속사 '키'(* )가 있다. 한편 '선하심이니이다'는,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보호의 섭리를 펼치실 것을 나타낸다.

=====54:7
본절은 다윗이 하나님의 선하심(6절)을 인정하며, 하나님에 의한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었던 근거이자 이유이다. 즉, 다윗은 여기서 과거의 체험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베푸실 구원의 역사를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건지시고 - 여기의 '건지시고'(* , 히칠라니)는 완료형이므로, 본 문구는 다윗의 과거 경험을 나타냄이 분명하다. 여기의 '건지시고'라는 단어는 다윗의 경험 중 그가 골리앗을 이긴 일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삼상 17:37). 그리고 '환난'(* , 차라)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극한적 상황과 그러한 상황에 따라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심신의 고통을 아울러 가리킨다(20:1;잠 1:27;사 30:6;렘 50:43). 내 원수가...목도케 하셨나이다 - 문자적으로는 '나의 눈이 나의 원수를 구경하였다'의 뜻이다. 따라서 '보응받는 것을'은 히브리 원문에는 없는 부분으로서, 본 문구의 뜻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삽입이다. 한편 유력한 영역본들은 한글 개역 성경과는 달리 '승히 가운데서'(in triumph)라는 말을 삽입하고 있다(NIV, Weiser). 반면에 크라우스(Kraus)는 본 문구를, 어떤 삽입없이 '나의 눈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로 번역하였다.

 

 

 

  이 시는 그 내용상 52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52편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다닐 때에 에돔 사람 도엑의 밀고로 말미암아 끔찍한 살상극이 벌어진 것을 그 작
시(作詩)의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제 본 시편에서는 십 사람들의 밀고로  인해  풍전
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위기에 빠진 사실이 그 배경이 된다(삼상 23:19  이하).  특히
이들은 다윗과 동일한 지파에 속했다는 점에서 다윗이 당햇던 고통은 배(倍)가 되기에
족햇다.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외국에서의 도피 생활을 청산하고  유다  광야에
머물고 있었다(삼상 22:5). 다윗이 유다 땅으로 들어와 최초의 도피처로 삼은 곳은 그
일라였다. 그러나 그 지역 주민들은 다윗에 의해서 블레셋 족속들로부터 구원을  받은
(삼상23:1이하)직전(直前)의 은혜를 망각하고 사울에게 다윗의 은신처를 밀고  하였다
(삼상 23:7, 11). 이 사실을 우림과 둠밈이 통한 하나님의 계시로서 알게  된  다윗은
새로운 도피처로 떠났는데, 그 곳은 바로 십이었다(삼상 23:14). 그러나 다윗은  또다
시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 되고 말았다. 즉, 이번에는 십 사람들이 다윗의  은
신처를 알려 주었던 것이다(삼상23:19;24:1;26:1). 그들의 밀고는 무려  세    번씩이나
거듭 되었다. 그들은 비록 다윗과 같은 지파였지만, 그로 인하여  사울로부터  어떠한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봐 심히 근심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실 십 사람들은 아히멜렉  대
제사장이 다윗을 부지(不知)중에 도왔던 일로, 그의 일족 전체가 살륙 당한 일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삼상 22:11-19).
  어쨌든 십 사람들의 밀고느 사울의 추격으로 이어졌다. 사울은 무려 삼천 명의 군사
를 이끌고 육백 명의 군사를 거느렸던 다윗을 추격하였다(삼상 24:2). 더구나  수풀도
제대로 없는 십광야에서 다윗과 그 군사가 숨을 곳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비록 어디에
숨는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시종 일관 관측했었을 십 사람들에 의해서  곧바로
사울에게 알려질 게 뻔하였다. 이제 다윗 앞에는 마치 수천길 낭떠러지가 기다리고 잇
는 것과 같았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다윗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겠는가? 물론
다윗은 최선을 다하여 도피책을 강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울에 으해서 이미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다윗은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 오직 하나님께 기도
하는 일임을 깨달았다. 그와 같은 절박한 상황에서 다윗은 본문의 기도를 드렸다.
  한편 시편 분류상 본시는 개인적 비탄시의 요소도 많이 내포하고 있지만,    일반적으
로는 '간구와 신앙'의 폭넓은 범주에 포함된다.
  이러한 본시는 (1) 하나님께 자신의 급박한 형편을 아뢰며 구원을 간구하는  전반부
(1-3절) (2) 하나님의 구원과 보호를 선취적 믿음으로 확신하는 후반부로(4-7절) 구성
되어 있는데,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시인은 자신을 구원해 달라는 애타는 간구를 한 다음에 (1, 2절), 자신이  당
한 형편을 하나님께 아뢴다(3절). 일반적으로는 자신의 사정을 상대에게 알린 다음 도
와달라는 요청을 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처한  위기  상황이
하도 급박했던 관계로 대뜸 구원해 달라는 간구부터 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다윗은
1절과 2절에서 동의적 대구법을 사용하여, 본질상 같은 뜻의 탄원을 거듭  되풀이하고
있다. 이와같이 위급환 상황에서 다윗이 취할 수 있었던 태도는 세 가지 정도였을  것
이다.
  (1) 자신의 지혜를 의지하여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있는 방도를 강구해 나가는  것
이다. 그러나 사울의 포위망(包圍網)에 완전히 갇힌 상황에서 이러한  노력은  허사로
끝날 가능성이 다분했다. 인간사(人間事)에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자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자이 얼마든지 존재한다. '나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다'는 지그히 소망적
인 말을 공언(公言)한 나폴레옹도 자신에게 닥쳐올 불가능의 상황 때문에 결국 비참한
삶의 종국을 맞이해야 했다. 앞뒤를 헤아리지도 않고 무작정 자신의 지혜와    능력만을
의지하는 세속적 의미의 적극적 사고 및 행동은 자신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다.
  (2) 그가 주저 않아 낙심하는 자포자기(自暴自棄)이다. 그러나 이러한 낙심은  하나
님께 대한 신앙의 결핍을 의미한다(출 14:12, 13).
  (3) 본문에 드러나듯이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리는 것이다. 사실 그 당시의 상황에
서 기도외에 또 무슨 방법이 있었겠는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있더라도  범사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바른 신앙 자세일진대, 이처럼 절박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
지하여 그분께 간구하는 그래도 성도들이 기도를 통하여 겸손히 당신을 의지하기를 바
라고 계신다. 결국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기도없는 문제의 해결은 진정한  의
미에서 불가능하다(마9:29), 환난 중의 기도 여부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유무(有無)를
판가름 할 수 있는 훌륭한 기준(대하 20:1-4)임을 깨닫게 된다.
  전반부에서(1-3절) 자신이 당한 극한(極限)의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간구한 데 이
어, 시인은 자신의 간구가 응답될 것을 전제로 하여 자신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의
표현을 할 것인지에 대하여 서원한다(4-7절).
  이처럼 다윗은 여전히 사울에 의해서 쫓기고 있는 긴박한 상황 가운데서도,  낙심치
자신의 승리를 확신한다. 그러면 다윗이 이러한 확신을 어떻게 소유할  수  있었을까?
그는 무조건 믿는 맹신(盲信)의 소유자였던가? 아니면 믿지 아니해야 할 바를 믿는 미
신에 사로잡힌 자였던가? 다윗은 결코 그렇지 않았다. 다윗은 자신의  간구가  반드시
응답되리라고 믿을 수 있었던 두 가지 근거를 갖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신을 항상 보
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바 있었다(5절). 또한 그는 구원의 역사
를 실제로 체험한 바도 있다.
  따라서 본문에서 다윗이 구원받은 후에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겟다고  다짐한
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유도하기 위한 흥정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이  부
족해서 성도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며(행 17:25). 인간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주고 받는 식의(give & take) 흥정을 하실 분도 아니시다. 그분은 오직 자신의 약속하
신 바에 대한 신실함과 주권적 판단으로써 성도의 어려운 처지를 헤아리실 따름인  것
이다.
  어쨌든 결국은 하나님이 다윗의 확신대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그를 구원해 주셨다. 다윗에 대한 사울의 포위망이 점차 좁혀져 가고 있었던 급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은 이방 민족 블레셋을 동원하시어 사울로 하여금 그 포위망을 풀고,  수도(首都) 기브아로 돌아가도록 하신 것이다(삼상 23:27, 28). 이것이 기도 응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일촉 즉발(一觸卽發)의 화급한 상황을 모면케 된 일은 다만 우연으로  돌려야 하는가?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으로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을리가 없는  것이다(마 7:11).
  이러한 본문 내용은 (1) 확신에 찬 기도만이 응답받을 수 있으며(빌 4:6, 7)  (2)말
씀에 근거한 신앙도 참으로 중요하지만 거기에 체험이 더하여지면 금상첨화(錦上添花)격이 됨(삼상 17:34-37)을 깨닫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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