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1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사 복을 주시고 - 본절은 다음 절과 함께 복을 간구하는 기원문의 형태이다. 시인은 하나님이 만복의 근원이 되심을 잘 알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은혜는 축복의 근거요, 그 백성들에게 과분하기까지 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말미암아 인생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즐거음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VanGemeren). 한편, '긍휼히 여기사'(* , 예하네누)는 '하난'(* )의 미완료 시제로서 앞으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성격을 갖는다. 그리고 '하난'은 원래 '구부리다', '아랫 사람에게 호의로 몸을 굽히다'는 뜻으로서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무엇을 주어야겠다고 진심으로 느끼는 반응을 나타낸다(Edwin Yamauchi). 이처럼 인간들은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한 존재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영적, 물질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그 얼굴빛으로 우리에게 비치사 - '그 얼굴빛'(* , 파나이우)은 문자적으로 '그분의 얼굴'이다. 그런데 '얼굴'(* ,파님)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께 적용될 때는 하나님의 임재를 뜻한다(창 4:16;27:7). 그리고 얼굴이 빛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기쁨과 즐거움의 표현이며 상대방에 대한 호의의 표현이자(잠 16:15 참조, Anderson) 관계 회복의 표현이기도 하다(Eichrodt).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하사 은택을 베풀어 주시기를 함께 바라는 기도이다.
=====67:2
본절의 내용은, 1절과 갈은 기도가 응답될 때에 성취될 수 있다. 즉, 제사장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출 19:6)이 하나님의 온전한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이방인들도 그들을 통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주의 도를 땅위에...알리소서 - 이것은 억지로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간구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에 충만하고 넘침으로써, 그 결과 그 은혜가 이방인듸에게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가기를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에 충만하게 됨으로써 이를 목도한 이방 민족들마저 하나님의 크신 권능과 주권을 인정함과 아울러 동일한 구원의 축복에 동참하기를 갈망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민족적 이기심이나 배타주의적 편견으로서 받아들이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 세계에 편만하게 되기를 바라는 탁월한 신앙적 통찰을 보여준다(VanGemerern). 한편, '주의 도'(* ,데레크)는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다루시는 방식, 보다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호의 넘치는 섭리(Alexander)혹은 권능이나 통치(Anderson)를 뜻한다.
=====67:3
하나님이여 - 이 표현은 위급한 상황에서 구출받기 원할 때, 혹은 간절한 소원을 아뢸때 사용된다(51:1;60:1). 그런 점에서 본 시편 기자는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도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겠다(VanGemeren).
민족들로 주를 찬송케 하시며 - 이방 민족들도 이스라엘과 동일하게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되면 동일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될 것을 암시한다. 따라서 이는 이방인듸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구원받게 해달라는 기도이다. 특히 저자는 거의 동일한 문구를 반복 사용함으로써 이방인 구원에 대한 간절한 마음을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67:4
앞절에 이어 여기서도 이방인 구원에 대한 비전이 소개된다. 여호와의 왕권을 주제로 삼은 시편들(93-99편 등)에서는 의와 평강과 즐거움으로 특징지워지는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우주적인 통치가 노래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통치는 궁극적으로 이방 민족들을 배제하지 않으며 그들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뜻을 받아들일 것을 요청한다. 물론 이러한 비전은 신약 시대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비로소 찬란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유대인들을 틔해 메시야이신 예수께서 임하셨고 예수는 하나님의 길과 뜻이 무엇인지를 세계 만방에 밝혀 드러내셨던 것이다(행 4:12;롬 9:5).
=====67:5
3절과 동일하다. 이러한 반복은 이방인의 구원을 위한 저자의 기도가 지극히 간절함을 보여준다. 또한, 3절과 본절을 예언으로 볼 수 있음을 생각한다면, 예언 성취의 확실성에 대한 암시이기도 하다.
=====67:6
땅이 그 소산(所産)을 내었도다 - 과거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풍성한 결실을 맺게 해주사 필요한 것들을 공급해 주셨다는 의미로서, 모든 것이 주로 말미암았다는 고백과 일맥 상통한다. 특히 이는 씨를 뿌림으로써 얻은 결과였으며 지극히 풍성한 축복이었다. 또한 이것은, 앞으로 더욱 큰 축복이 있을 것을 보여주는 표징이다. 그러면 여기서 본 시편 저자가 바라보고 있는 축복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방인 까지도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연적인 큰 소산을 얻게 되는 것이다. 믈론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무관하게 살아간 때에도 일반 은총 가운데 있었다. 그들도 자연의 혜택을 받아결실을 얻었다(행 14:17). 그러나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경우 그분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 있게되며 만물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음올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욜 2:14). 우리 하나님이...복을 주시리로다 - 전반절이 과거 사실에 대한 언급이 라고 하면, 후반절인 본문은 장래에 베푸어 주실 축복에 대한 기대라 할 수 있다. 7절 상반절에서도 반복되는 본문 내용은 시인의 강한 확신을 저변에 깔고 있다. 시인이 이러한 고백을 담대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었다(Kinder). 물론 여기서도 시인은 하나님의 은혜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부여되는 배타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는 결코보고 있지 않다.
=====67:7
땅의 모든 끝이 하나님을 경외하리로다 -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섭리를이방인들이 깨닫고 신앙을 갖게 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하신 통치에 기쁨으로 복종하는 것을 가리킨다(Calvin). 여기서 '땅의 모든 끝'은 2절의 '만방'과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며(2:8;22:27, 28;렘 16:19), 또한 '경외하리로다'는 2절의 '알리소서'와 동일한 의미를 전달한다(VanGeren).
선민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열국에게도 높임을 받기를 기원하는 '감사와 경배의 시'이다. 이 시편의 저자와 작시 연대에 관해서는알려진 것이 없으나 추수 감사의 노래로 혹은 7일간의 장막절을 지킬 때 사용되었다는견해가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1절 내용으로 볼 때, 이 시가 이미 받은 축복에 대해 감사하는 감사의 노래, 더구나 추수 감사의 노래라고 보기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장막절의 경우 과거의 축복과 은혜를 돌아볼 뿐만 아니라장래의 축복을 기원하는 측면도 내포한다는 점을 유의하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본시에서 추수의 축복에 대해 강조점을 두지 않은 것은, 아마 풍요제에 들떠 있었던가나안 족속의 전래 풍습에 대한 역반응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자연의조화난 그 산물보다는 이 모든 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성품에 강조점을두어 왔던 것이다. 예컨대, 수확의 만물을 하나님께 드리는 과정에서도 그 수확물 자체보다는 구속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고백에 치중하였다(신26:1-11).
아울러 본시는 이스라엘의 중보적 위치와 역할로 인해 하나님의 축복이 온 땅에 확산될 것을 노래한다는 점에서 '예언시'로 평가되기도 한다. 즉, 본 시편은 신약 시댕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이루어질 이방인들에 대한 복음 전파(행 1:8)와 그들의 복음 수납(행 10:34, 35)을 예언적으로 보여주는 시(詩)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구속의 계획과 섭리에 따라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일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성숙시키셨고, 그 같은 때(갈 4:4)가 되면 이방인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이 전파되게끔 만반의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아무튼 본시편의 저자는 복음 확장에 대한 열정적 소원을 갖고있었다. 이러한 열정적 소원은, 그 자신이 구원의 감격을 소유했었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관련하여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본시는 구성상 4절을 축으로 하여 대칭을 이루고 있다. 즉 1, 2절과 6, 7절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는 기도이며, 3절과 5절은 이방 민족들이 구원 반열에 편입되기를기도하는 내용인 것이다. 그리고 4절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염두에 두고서 본문에 나타나 있는 세 가지 주제를 하나씩 고찰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시인은 이 시의 서두(序頭)와 말미(末尾)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간구하고 잇다(1, 2, 6, 7절). 이 서두 부분은 하나님의 호의(好意) 곧 넓은 의미에서의 은혜와축복을 포괄적으로 간구하는 내용인가 하면, 말미 부분은 '땅의 소산' 곧 구체적이고현실적인 축복을 간구하는 내용이다. 이러한 간구 형식은 모든 가시적이고 현실적인축복들도 궁극적으로는 성도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자애로우신 관심과 배려가 전제될때 비로소 주어진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시사한다.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은 서두와 말미 부분에서 공히 이방 만민들에게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는 점이다(2, 7절).
2절의 '만방'은 7절의 '땅의 모든 끝'과 동의어적 표현으로 사용되어 하나님 나라의우주적 확장을 강조한다. 비록 본문에는 메시야에 관한 직접적 언급은 없지만,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존전(尊前)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복락을 누리는 메시야 시대를 대망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사축복하신 것도 궁극적으로는 세계 만방에 그 복음이 증거되어 그들도 또한 동일한 은택을 누리게 한느 데에 목적을 두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사실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로부터는 , 유대인과 이방인의 역할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즉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섭리를 깨달아회개한 이방인들로 주로 채워져 갔던 것이다. 따라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막론하고하나님의 백성으로 택함받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어 동일한 희락과 만족을 충만하게 누리게 되었다(마 6:25-34). 그리고 이제는 역(逆)으로 이방인 성도들이 불신 상태에 빠져 있는 유대인들로 하여금 예수를 메시야로 믿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는 입장에 놓이게 된 것이다. 땅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될그날에는 메시야 왕국의 목표가 달성 되어질 것이다.
둘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가 세계 만방에 편만(遍滿)해지기를 염원하고 있다(4절).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왕권(Kingship)에로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관적이며 우주적인 통치의 특성을 '공평'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는 메시야 왕국이 의와 평강과 회락으로 충만하다는 사실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하겠다(롬 14:17).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후 멀리 떨어져 방관만 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주 만물고 민족과 개인의 역사에 일일히 그리고 철저히 개입하사 당신의 공의와 사랑을 드러내시는 분이시다. 먼저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당신의 말씀을 계시하셨고(롬3:2;9:4,5) 당신의 최종적인 계시로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돌르 유대인들의 혈통을 통해 이 땅에 보내 주셨다(행 4:12;9:2;롬 9:5). 또한 세계 만민들은 하나님을 우주 만물과 모든선한 것들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신령한 구원의 섭리와 방도(方途)를 먼저 이스라엘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다. 복음이 세계 만방으로 전파되어감에 따라 이방인들도 아들을 통해 아버지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뜻이다.
셋째로, 시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세계 만장에 편만하게 되기를 거듭 소망한다(3, 5절). 이는 앞에서 상고한 내용과도 일맥 상통하며, 사실상 시인의 주관심사요 본 시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겠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선민 의식에 너무 편향된 나머지 이방 민족들에게 철저한 배타주의 태도를 드러내기 일쑤였다. 하나님이 그들을 택하신 목적이 그들로 하여금 제사장 나라로 삼기 위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출19:6), 그들의 생각은 하나님의 심원한 뜻을 좀처럼 헤아리기 어려웠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본 시편 기자의 영적인 무게와 그 통찰력의 깊이는 실로 놀랄만 하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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