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
항상 송축함이여 - 삶의 모든 정황 속에서, 즉 번성할 때나 실패해서 곤고함에 빠져 있을 때, 안전할 때나 위험할 때, 그리고 기쁠때나 슬플 때에도 개인적으로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여호와의 자비를 감사한다는 뜻(Barnes)이다. 공개적인 감사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본 34편을 선포적 찬양시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A. P. Ross). 본 시편의 저자 다윗이 이 같은 감사의 시를 짓게 되었던 시기는 제목에서 읽을 수 있듯이 사울에게서 도망하여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으나 거기서도 안전하지 못하여 침을 흘리는 등 미친 체 하여서 그곳을 빠져 나온 후였다(삼상 21:10-15, J. A. Alexand er). 여기서 아기스(삼상 본문에는 아비멜렉이 아니라 아기스가 가드 왕으로 되어 있다)가 아비멜롄으로 읽혀지고 있는 점을 이상하게 여길 필요은 없다. 왜냐하면 삼상본문에서는 애굽의 `바로'와 같이 어떤 왕조의 이름이나 왕가의 칭호를 따서 기록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J. A. Alexander, Kirkpatrick, Keil & Delitzsch).
=====34:2
여호와를 자랑하리리 - `자랑'에 해당하는 원어 `할랄'(* )은 `빛내다'. `밝히다', `찬양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인간적 우월함이나 교만을 언급한 것이 아니라 겸손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하나님을 주(主)로 고벡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한다(렘 9:24). 이러한 시인의 고백은 신약 시대에 있어 성도들이 십자가의 의미와 도리를 자랑하겠다는 의지와 일맥 상통하는 서원이다(갈 6:14).
곤고한 자 - 일차적으로는 고통을 통해 인내를 배운 자들을 뜻한다(Keil). 본시가 기록된 배경(1절 주석 참조)을 고려한다면 저자가 의도했던 이 `곤고한자'란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어서 고통을 모르는 자들과 대비되는 `사회 하류 계급'으로서 고통을 당하는 자들인 듯하다. 그러나 이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여기서 말하는 곤고한 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9:12), 온유한 자(25:9), 어린아이(눅 10:21)등은 동일한 부류의 사람들로서 유대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 등과는 대비되는, 겸손히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기다리는 자들임을 알 필요가 있다.
=====34:3
광대하시다 하며 - 이에 해당하는 문자적인 뜻은 `위대하게 만들다'인데 이는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간주하고 대우하겠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이 처했었던 것과 유사한 어려운 환경에 처했던 모든 자들이 하나님을 위대한 분으로 여기고 그분을 대접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한편, 시인의 이와 같은 표현은 최소한 인간의 모습과는 반대인 하나님의 존재를 매우 생동적이고 웅장하게 묘사한다. 이념의 위대성을 드러낸다(A. A. Anderson).
=====34:4
구하매...응답하시고 - 저자 다윗이 사울의 박해에 직면하고 아비멜렉 혹은 아기스의 땅에서 피난처를 찾았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당시 다윗은 자신의 지혜나 어떤 수단을 신뢰하지 않고 하나님의 보호와 안내를 구하여 위기를 해결하였다. 본시의 저자는 이 사실을 상기함으로 하나님만이 신뢰의 대상이며 그분만이 기도의 대상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두려움 - 두려움의 구체적인 실체는 다윗을 해하려고 찾아다니던 대적들임에 분명하다. 아울러 여기서는 그러한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대적들 외에도 그들로부터 쫓기고 핍박 당하는 외로운 종류의 공포와 망상들 곧 보이지 않는 그 무엇도 함께 지칭하고 있는 것 같다(Kidner).
=====34:5
저희가 - 어떤 학자는 여기의 `저희'를 본 시편을 읽게 될 청중으로 보기도 한다(J . Stott). 그러나 본 시편이 분명한 역사적인 베경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과 본시의 문맥을 중시할때, `저희'란 다윗이 사울과 아비멜렉을 피하여 도망한 후 아들람 굴에 이르렀을 때 그에게로 내려온 `그의 동료들'로 보는 것이 무난한 듯하다. 한편. 그 당시 그에게 모여든 자들은 그의 동료 뿐 아니라 환난 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다(삼상 22:1, 2).
앙망하고 광채(光彩)를 입었으니 - `앙망하다'란 바라보다는 뜻이다. 아마도 저자 다윗은 관심을 자신에게로 부터 갑자기 자기와 동일한 운명에 처했던 자에게 돌리면서 그 당시 그들이 근심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바라보았던 사실을 회상하고 있는 것 같다. 한편, `광채를 입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나하르'(* )는 `함께 모여들다', `모이다'(사 2:2; 렘 31:12). `빛나게 되다'의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문맥을 고려하여 볼 때 `빛나게 되다'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빛이 나도록 한 주체가 하나님이심을 강조하는 수동태의 `광채를 입었으니'라는 개역 성경의 번역은 무척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다윗과 동일한 운명에 처한 그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의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고 동시에 그 사실이 그들의 얼굴 빛을 환하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상상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부끄럽지 아니하로다 - 다윗의 추종자들이 하나님을 바라고 의뢰한 일로 인하여 수치를 당하거나 실망하게 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하고 후회하지 않는 자는 결코 수치를 당치 아니하고 도리어 그 결국이 기쁘리라는 사실을성경은 여러 곳에서 증거하고 있다(22:5; 롬 9:23; 요일 2:28).
=====34:6
이 곤곤(困苦)한 자 - 저자는 타인의 모습에서 부터 다시 자기 자신의 특정한 경험으로 돌아오고 있다. 여기서 강조점은 `곤고한'에 두어져 있는데 2절에서 지적하였듯이 영역본에는 `poor'로 되어 있는 이 말은 영어 표현 그대로의 물질의 빈핍이라는 의미에서의 `가난한'이 아니라 고통당하고, 쫓기고, 버림받았다는 의미에서의 `비참한'을 뜻한다(Anderson, Kidner).
여호와게서 들으시고 - 단순히 자신의 말을 `경청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간절한 기원에 응답하셨다는 의미이다.
=====34:7
여호와의 사자 - 이를 여호와 자신으로 보는 견해(Von Rad)도 있으나 이는 여호와께서 보낸, 그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할 목적으로 파송받은 천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J. A. Alexander, Kidner). 한편, `둘러 진치고'라는 표현이 뒤따르는 것으로 보아 이 천사는 여러명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의 사자는 복수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무리를 집합 단수 명사로 나타낸 듯하다. 물론 천사의 무리를복수로 표현하는 곳도 성경에는 있다(히 1:14). 둘러 진치고- 문자적으로는 `텐트를 세운다'는 뜻이나(창 26:17; 출 13:30; 17:1) `방어하다' , `보호하다'의 의미도 갖는다(슥 9:8). 본 시편의 배경이 위경(危境)에 처한 하나님의 백성들의 형편임을 고려할 때, 본절은 `보호하다',`방어하다'로 이해함이 무리가 없는 듯하다(삼상 22:1, 2 참조).
=====34:8
맛보아 - 원어는 `타암'(* )으로 `어떤 식물의 맛을 보다'(욥 12:11), `분별하기 위하여 약간 먹다'(삼상 14:24, 29, 43; 욘 3:7), `마음으로 인식하다', `노력하다', `경혐하다'등의 뜻이 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시험적으로, 경험적으로 생생하게 느껴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절이 포함된 문장이 청유형임을 보아 그 대상은 시편 기자와 유사한 환난을 경험하고 있는 어떤 회중으로 보아야 할것이다.
그에게 피하는 자 - 영역본에는 각각 `그를 의뢰하는 자'(KJV), `그에게서 피난처를 찾는 자'(NIV, RSV)로 되어 있는데 평행구를 고려할 때 전자가 바람직하다(2:12).
=====34:10
젊은 사자 - 이에 대해서는 (1) 힘센 육신 동물로서 능히 스스로 자신의 먹이를 찾을 수 있는 동물(Kirkpatrick)로, 또는 (2) 어린 사자, 즉 스스로 먹이를 찾을 수 없어서 어미 사자에게 의존해야 하는 동물(Keil, Barnes)로 해석하는 두 견해가 있다. 그런데 본 문맥이 여호와에 대한 의존, 의뢰를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후자가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어린 새끼 사자가 강한 어미 사자를 의존하듯, 인간적인 강한 그 무엇을 의존하는 자는 잠시 풍족할 수 있으나 그 의존의 대상이 사라지면 곧 궁핍을 느낄 수 밖에 없다는 말이다. 한편, 시편에는 많은 대구법이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동의적 개념 대신 반의적 개념이 대비적으로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는 대구법을 반의적 대구법이라고 부르는데 본절의 경우를 바로 이것이 적용된 예로 볼 수 있다(잠 10:1).
=====34:11
소자(小子)들(* , 바님) - 원어는 `아들'이란 뜻. 그런데 본절을 저자가 갑자기 자기 아들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대신 본 용어가 가르침의 대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경우를 고려하여 보면(Jamison, Fausset, Brown) 이러한 말은 이제 들려 주게 돌 이야기가 중요하므로 앞으로 진행될 교훈에 바짝 귀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기 위하여 사용한 호칭으로 보인다(잠 1:8, 10).
=====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 `생명을 사모하고'가 `살기를 소망하고'를 뜻하고 `장수하여'가 문자 그대로 `오랫동안 사는 것'을 뜻하므로(원래의 문자적 의미는 `많은 날들을 사랑하다'임)이 구절들은 결국 `장수한다'는 뜻의 강조형이라고 할 수 있다(시편에서 유사한 개념의 반복은 강조이다). 사실 땅 위에서 오래 살고 싶은 소망은 인간의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욕망이며 그것을 바라는 일은 결코 악이 아니다. 분명 성경은 장수를 긍정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다(엡 6:1-3). 저자는 이 같은 모두의 관심사에 대해 운을 떼므로써 청중으로 하여금 이어질 내용에 관심을 기울이게 하고 있다.
=====34:13
혀를 악에서 금하며 - 먼저 장수의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혀를 악에서 금하고 억제하는 것, 즉 진리가 아닌 헛된 말을 삼가하는 것이다(잠 13:3; 21:23; 약 1:26 ). 이어지는 조건인 `입술에서 궤사한 말을 금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뜻한다(Barnes, Briggs). 13, 14절에서 제시되고 있는 장수의 조건은 말과 행위에 있어서의 악으로부터의 억제, 경계(약 3:2-12)가 장수의 첫 번째 조건이 된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언어 사용 및 억제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더 실감케 한다.
=====34:14
선을 행하며 - 선을 행위로 나태내는데는 크게 소극적인 면과 적극적인 면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먼저 소극적인 의미의 선행은 `윤리적인 악을 범하지 않는 것', 즉 `악을 버리는'의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적즉적인 의미의 선행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37:27, 28)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후자의 적극적인 선행을 정의한다면 이웃과의 우정을 더욱 돈돈히 하기 위하여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 화목, 평화를 계속해서 추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화평을 찾아 따르는'이다(롬 14:19; 히 12:14).
=====34:15
여호와의 눈은...향하시고 - 여호와의 눈이 특정의 대상을 향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보호하고 지켜 준다는 뜻이다(욥 36:7). 그런데 장수하기를 원하는 자를 겨냥하는 권고가 게속되고 있는 본 문맥을 고려할 때 이 대상이란 막연하고 추상적 개념의 그 누구가 아닌 언행에 있어서 소극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는 자라고 볼 수 있다(12-14절). 그 귀는...기울이시는도다 -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어려움과 위험에 처한 자들을 들으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이 모든 진리들은 기자 자신의 경험의 결과로서 진술되고 있는 것 같다. 다윗은 위허속에서 자기를 바라보고 계시던 하나님의 눈을 목격한 바 있고 그가 불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귀를 여셨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6절). 이제 그 자신의 경험을 근거로 하여서 생명을 보존하고 번영을 누리는 길은 하나님의 은총과 보호를 꾸준히 추구하는 일임을 본시의저자인 다윗은 다른 사람들에게 확증하고 있는 것이다.
=====34:16
여호와의 얼굴 - 본절은 바로 앞절의 `여호와의 눈'과 유사성이 있다. 말하자면 의인과 악인은 하나님의 눈 아래 동일하게 서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동일한 하나님의 눈이 전자에게는 보호의, 그리고 후자에게는 심판으 의미가 있다. 그 어느쪽도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항상, 그리고 어느 상황에서도 그들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보신 바 되고 있는 것이다.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 의인에 관해 말할 때는 `향하시고'였던 반면 행악하는 자, 즉 악인에 대해서는 `대하사'로 적고 있다. 영역본에서도 이를 각각 `upon'과`again- st'로 구별해서 번역하고 있는데 `대항하다'(against)는 말 속에는 `악인들에게 심판을 내리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신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Barn es).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귿으려 - `자취'에 해당하는 원어 `제케르'(* )가 `기억하다', `회상하다'임을 고려하여 본문을 직역하면 `저희에 대하여 기억하는 바를 땅으로 부터 끊으려'가 된다. 그런데 구약에서 어떤 존재에 대한 기억을 땅으로부터 끊는다는 표현은 그 존재가 다른 이웃에게서 `완전히 잊혀진다', 혹은 어떤 공동체에서 `제거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109:13; 잠 10:7). 그런데 이것에 근거하면, 특히 `제거되다', `죽음을 당하다'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보면 13, 14절에 기록된 말과 행실에있어서 선을 행하지 않고 악을 행하는 자는, 즉 본절의 행악하는 자는 빨리 죽는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특히 인간 장수에 대해 논하고 있는 문맥에 비춰 보면 더욱 그러하다(12절에서 시작됨). 그러나 이 결론은 현실에 엄밀히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학적으로 보아도 악인으로 장수하는 자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그례다면 본절의 `악인이 공동체에서 잊혀지고 제거된다'는 말은 악인의 영적 생명에 관한 의미도 포함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12절에서 말하고 있는 `장수'란 단순히 땅 위에서 오래 사는 것뿐 아니라 사후에 영원히 사는 것을 포함하고 있는 말이라는 것을 추가적으로 유추할 수 있겠다.
=====34:17
의인이 외치매...들으시고 - 의인이 누리는 혜택 혹은 받은 특권이 있다면 그것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들으시고 구원하시리라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부르짖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다. 이러한 사실을 본 시의 기자가 감사의 시 속에서 새삼 강조하는 것은 의인의 간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함인 듯하다(잠 15:29). 그리고 이와 더불어 다윗 자신이 경험한 구원의 사실을 나타내기 위함인 듯하다.
극도의 환난속에서도 완벽하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께 대한 다윗의 감사와 찬송
이 드러나고 있는 본시는 (1) 다윗의 감사의 이유와 서원이 들어 있는 전반부(1-7절)
와 (2)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권유하는 중반부(8-14절), 그리고(3)궁극
적 심판에 대한 계시를 통한 권과 이루어지는 후반부(15-2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표제문에 명시된 것처럼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가드 왕 아기
스에게 도망갔다가 미친 체하여 풀려난 상황이다(삼상 21:10-15). 다윗은 아비멜렉 왕
에 의해 포로롤 잡힐 뻔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구조된 후 감사의 고백을 드리고
있다. 당시 다윗은 이스라엘 왕으로 지정되어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왕위에 등극하지
못하고 사울의 시기와 질투로 인하여 이리저리 도망가는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추대되
기까지 약 20년간의 세월은 시시 각각(時時刻刻)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긴박한 순
간의 연속이었다. 다윗은 사울의 추적을 피하여 다급하게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도
망하였다. 그런데 블레셋의 신하들은 골리앗을 죽인 다윗을 알아보고 살해할 결심을
굳혔다. 다윗은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상황에서 악귀에 의해 사로잡혀 정신이 나간 미
치광이 행세를 하게 되었고 급기야 구조 될 수 있었다. 이렇게 환난에서 환난으로 이
어지는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다윗은 극적으로 구출되어 생명을 유지하게 되었다. 다윗
은 자신의 과거를 회고해 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에 대해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생사의 기로에서 하나님은 한번도 실수하지 않으시고 다윗의 목숨을
보전해 주셨다. 이러한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다윗은 여호와를 진심으로 의뢰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어떠한 역경 속에서도 반드시 보호받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본시에서 다윗은 위기 일발의 위험 속에서도 언제나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보호에 대한 감격을 담대하게 부르짖었으며, 더 나아가서 모든 백성들이 동일한 믿음
을 소유하도록 교훈하고 권면하였다.
한편 본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 감사시'(individual thanksgiving psalm)로 분류될
수 있다. 어떤 학자들은 '지혜시', '비탄시'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본 시편의 전체적
인 내용은 사울과 이방 원수들의 핍박 속에서도 생명을 유지시켜 주시는 하나님에 대
한 감사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다. 다윗은 본시에서 의지하는 자에게 반드시 긍휼을
베푸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마움을 일반 백성에 대한 간증의 형태로 표현하고 있다.
또한 본시는 형식상으로 25편과 유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이는 흔히 '알파벱 시'라
고 불리워지는데 각 절이 시작이 히브리 문자의 알파벱 순서에 따라 배열되었다느 특
징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시를 쓰는 목적은 어느 경우에나 쉽게 기억되도록 하려는
데 있다. 특히 본시는 25편과 동일하게 여섯 번째 나오는 히브리 문자 '와우'(* )절
이 없는 대신 시의 끝에 가서는 '페'(* )로 시작하는 절이 첨가되어 있다.
이제 환난 중에 여호와를 의지함으로 받았던 보호와 구원에 대한 개인적인 감사가
세부적으로 나열되고 있는 본시를 내용에 근거하여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많은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1. 다윗의 찬양과 서원(34:1-7)
삶의 구체적 체험을 통해 얻어진 하나님에 대한 감사가 풍성하게 묘사되는 본연은
(1) 여호와에 대한 송축 서원(1, 2절), (2) 여호와에 대한 찬양 권고(3절), (3) 영호
와로 인한 구원에 대한 감사(4-7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연에서 다윗은 하나님게 찬송할 것을 서원하며 모든 곤고한 자들도 함께 찬송할
것을 권유한다. 다윗은 자신의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찬양의 유일한 대상은 오직 여호
와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사실 찬양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데 대
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근거한 새로운 경지의 찬양
을 요청한다(40:#;96:1;98:1;144:9;149:1).
다윗은 본연에서 찬양의 이유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1)하나님께서는 곤고
한 자가 부르짖을 때 들으시고 환난 가운데서 구원해 주신다(6절). 다윗은 여호와께서
고통 중에서도 겸손하게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므로 송축하여야 한다고 말
한다. 이러한 견해는 아마도 다윗의과거 경험을 토대로 형성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 추격을 당하면서 자신이 '죽은 개'나 '벼룩'과 같은 존
재임을 절감한다(삼상24:24). 이러한 고난 중에서 다윗이 하나님게서 겸손하게 부르짖
는 연약한 자의 간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1:1-2:4). 다윗은 하나님께서 겸손하게 부
르짖는 연약한 자의 간구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열납하시는 분이심을 상기함녀서 찬양
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2) 당신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보호를 베푸신
다(7절). 다윗은 하나님을 찬송해야 할 두 번째 이유로 하나님게서 자기 배것자에 대
해 신실하게 돌보시는 분이심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보호하심에 있어
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자시늬 눈동자처럼 성도를 지키시며, 독수리
가 날개로 자기 새끼를 감싸듯이 돌보신다(17:8;신 32:10).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하나님의 허락없이는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경배하
는 자를 끝까지 버리시지 않고 안전하게 보호하심을 인하여 찬양해야 한다고 주장하였
다. (3) 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하여 찬양의 이유를 제시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광대
하신 분이시며 위대하시기 때문에 찬양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3절). 하나님은 무한
하신 분으로서 인간의 지각을 초월하여 존재하신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을 접하면
접할수록 자신의 부족함을 철저히 인식하게 된다. 그 결과 자연적으로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존재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을 찬양할 수밖에 없게 된다. 다윗은 하나님게서
천지의 주재자로서 광대 무변하심을 생각하면서 찬양의 정당성을 알려준다.
다윗은 이상의 세 가지 이유를 염두에 두면서 회중들과 함께 계속적으로 찬송할 것
임을 다짐한다(1-3절).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자세를 보면서 인생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화를 주시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찬송의 대상이심을 깊이 자각할 수 있게 된다.
2.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의 복(34:8-10)
하나님께 대한 찬양의 이유를 제시하고 함께 찬송할 것을 권고하는 내용 이후에 나
타나는 본연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배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이 드러나 있다. 다윗
은 여기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윗은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외적
으로 볼 때는 가시밭길 인생이었지만 다윗의 마음은 언제나 기쁨과 평안과 감사로 가
득 차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신뢰하는 자에 대해 결코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않으시고 언제나 축복의 길로 인도하심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여호와를 경외
하는 자가 받을 복은 구약 성경 여러 곳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영적인 축복뿐만
아니라 물질적인 혜택도 포함되어 나타난다(신 28장). 이러한 현실적, 외적 축복은 영
적 축복의 상징적, 가시적 표출로 이해될 수 있겠다. 다윗은 하나님께 찬미할 것을 권
고한 후에 그들에게 주어지는 복을 설명함으로써 더욱 진심으로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격려하고 유도한다.
3. 마음을 감찰하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34:11-17)
다윗은 여호와에 대한 자신의 소중한 경험을 소개한 후 이제는 함께 나누어 가질 것
을 요청한다. 그는 인간적 지식이나 학문적 논리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았고 하나님과
의 관계를 통해 터득한 신앙에서 우러나온 영적 지혜를 설파(說破)하고 있다. 주님 안
에서 완전한 삶을 누리는 방법에 대한 다윗의 교훈이 드러나고 있는 본연은 (1) 하나
님의 축복을 누리는 지혜로운 삶(11-14절), (2) 여호와의 판결(15-17절) 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본연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위선적 행동에 의해 속지 않으심을 전제
로 하여 말한다. 인간은 외모로 보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을 향유하는 삶은 위선과 흉내로 성취될 수 없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도덕
저, 윤리적 영역에서 자신의 선함을 입증해야 한다. 다윗은 이러한 관점에서 의롭게
사는 사람의 삶의 태도에 대하여 교훈한다.
먼저 다윗은 평화로운 생명을 사모하라고 말한다(12절). 여기서 생명은 영생과 유사
한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신자가 우선적으로 인간적 욕심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권고한다. 둘째로, 다윗은 언어 생활의 정
결함을 주장한다(13절). 성경은 혀에 대해, 막강한 힘과 중요성을 지닌 세력물로 언급
한다(잠 18:21). 혀는 신체중 유일한 단일 감각 기관이며 중요한 발음 기관으로서 많
은 실수를 유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잇다. 만약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으면 온전한 자
라고 볼 수 있다(약 3:2). 다윗은 경건 생활의 요체로서 거룩한 언어 습관을 지목(指
目)하여 강조하였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도라면 마땅히 거짓과 궤사를
버리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웃에게 덕을 세우는 바른 언어 예절을 구비해야 할 것이
다. 셋째로 다윗은 타인에게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창조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
한다(14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반드시 사회 생활에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친절
과 사랑을 베풀어 준다. 다윗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사자처럼 남을 약탈하지 않고
마땅히 선을 행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권고한다.
이상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두려워하으로 체득한 구원의 경험을 통해 일반적인 잠언
조의 가르침을 제공하였다. 이어서 다윗은 다시 한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받아
누리는 축복에 대하여 묘사하였다(17, 18절). 하나님게서는 악인들에 대하여 철저한
심판을 감행하시는 반면에 의인들에 관해서는 구원으로 응답하신다. 물론 의인이 모든
고난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의인의 괴로움의 기간과 범위를 제한하시
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혹심한 상처를 모두 치유하시고 구원하신다. 다윗은 악인과
의인의 궁극적 운명을 대조적으로 설명하면서 간접적으로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수
할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이에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가지고 일상
생활 속에서 최선의 노력으로 경주할 것에 대해 자극을 받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결을 기억하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고 인내하면서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4. 의인의 고난과 하나님의 구속(34:18-22)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일시적으로 그심한 환난에 처할 수는 있으나 궁극적으로 반
드시 구원받게 된다는 사실을 결론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본연은, 의인과 악인 사이의
날카롭게 대립되는 운명을 보여주면서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권유하고 있다. 다윗은
의인이 아무리 극심한 상처를 입는다 할지라도 결코 멸망하지 않음을 확신있게 선포하
고 있다(20절). 악인은 정죄를 받을 것이나 여호와께 피하는 자는 아무도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21, 22절).하나님께서는 참으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는 자에게 구원을
허락하신다. 다윗은 악인과 의인의 운명의 차이점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으로 명백히
드러날 것을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다윗의 노래를 통하여 교회의 구주이시며 그 누구보다 크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 수 있게 된다. 다윗이 온 마음으로 선포한 말씀은(20절) 성령의
감동으로 완전하게 통제된 것으로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골고다에서의 임종시에 인용
되고 있다(요19:23). 예수님은 유다인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십자가에서 처형되
었다. 그런데 그들은 죽은 시체를 안식일이 다가오기 전에 빨리 무덤에 두어 땅을 더
럽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나아가서 나사렛 예수가 빨리 죽도록
뼈를 꺾어 달라고 요청했다. 로마 병정은 예수님과 함께 못박힌 두 사람의 다리는 꺽
었으나 이미 죽어 잇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옆구리를 창으로 찔러본 후 물과 피가 나옴
을 확인하고 나서 꺾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요한 복음서 기자는 이러한 사실을 자
세히 설명한 후에 자기가 현장을 직접 본 목격자임을 증명하고 나서 이러한 일은 우연
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연했다. 다윗이 본
연에서 의인의 승리에 대한 증거한 구절은 (20절) 이제 골고다에서 예수님에 의해 성
취되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세상에 성육신으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
의 죄를 대속하실 온전한 의인임을 예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완전하게
의지한 예수 그리스도를 골고다의 수난의 현장에서도 뼈 중에 하나도 꺽이지 않도록
보호하셨다. 뼈가 꺾이기 전에 예수님의 영혼이 돌아가시도록 하신 하나님의 배려는
구속 사역의 완전성과 치밀성을 다시 음미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하나님 아버지는 완전
한 의인이신 사랑하는 아들에 대해 생시나 죽음의 현장에서 뿐만이 아니라 시체까지도
철저히 지키셔서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섭리하셨다. 예수님의 시체는 공동 묘
지에 묻히지 않았다. 요셉의 동산에 마치 부자와 같이 묻혀졌다. 그 후에 천사는 예수
님의 부활의 영광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를 대속하신 의인
예수님을 철저하게 보호하셨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자들
에게 동일한 은혜와 축복을 제공해 주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다. 22절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종들(의인들)의 영혼을 구속한다고 복수형으로 말하고 있다. 여기서 의인
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하는 모든 성도들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멸시하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멸망과 진노를 내리시지만 십자가의 고오를 의지하여 감사하는 자들은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인우리들은 예수의 능력에 힘입어 자기의 죄악된 옛 성품을 죽이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오직 믿음으로 자신을 희생하며 진리를 증거해야 한다. 이렇게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자아를 부정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전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 뼈중에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보호해 주실 것이다(20절). 비록 일시적으로는 환난과 핍박에 처할 수 있지만 결국에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에 안전히 거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의인에게 약속된 풍성하고 확실한 소망을 기억하면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복음을 만방에 선포하는 노력을 쉬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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