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5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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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1
강포한 자여 - '강포한'(* , 기보르)은 기본적으로는 '용맹있는' 혹은 '능력있는'등의 뜻이지만. 문맥에 따라서는 '무력이나 완력(腕力)을 남용하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창 6:4;10:8, Rawlinson . 여기서 '강포한 자'로 표현되고 있는 '도엑'은 사울의 목자장으로서(삼상 21:7) 상당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삼상 22:6-19). 그러나 그는 그 권력을 하나님의 제사장들을 몰살시키는 데 사용했었다. 네가...악한 계획을 스스로 자랑하는고 - 여기서 '악한 계획'(* , 라아)은 다만 '죄악'의 뜻이다. 구체적으로는 '도엑'이 교활한 혀를 놀려서 제사장들을 다윗의 협조자로 참소한 것(삼상 22:9, 10)과 그 제사장들을 죽인 것을 가리킨다(삼상 22:18). '스스로 자랑하는고'는 자신의 악한 행위를 마치 영웅적인 행위인양 떠벌리고다닌 것을 뜻한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다윗과 관련한 참소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보고 잠잠했던 사울의 다른 신하들과는 전혀 달랐다(삼상 22:8).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항상 있도다 -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의 비방을 받고 그들 로부터 해를 받는다고 해서 낙심치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윗은 견디기 힘든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바로 이 같은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난관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한편 '인자'(* , 헤세드)에 대해서는 51:1 주석을 참조하라.

=====52:2
네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 죽고 사는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다고 할 만큼(잠 18:21) 혀의 역할이 중차대하며 또한 도엑의 '악한 계획'이 그의 '혀'로써 실행됐다는 점 때문에, 다윗은 도엑의 인격을 '혀'로 표현하고 있다. 본문은 구체적으로 '골리앗의 칼'과 '진설병'을 다윗에게 준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고소한 사실을 가리킨다. 도엑은 놉의 성막에 머무는 동안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베푸는 모습을 목격하면서(삼상 21:6-9) 바로 이 같은 마음을 품었을것이다.
날카로운 삭도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 - '날카로운 삭도'는 도엑의 혀가 끼칠 극심한 악영향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악한 말을 즐겨하는자들에게 임할 극심한 고통을 상징하는 '날카로운 살'을 연상시킨다(120:4). 다시 말해서 다윗은 여기서 도엑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속히 그리고 확실히 임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한편 '간사'(* , 레미야)는 '속이다' 혹은 '기만하다'의 뜻이 있는 동사 '라마'(* )에서 파생된 명사로서 도엑이 아히멜렉을 사울에게 고소했던 방법과 매우 잘 부합되는표현이다. 즉, 도엑은 다윗과 아히멜렉을 극한의 위험에 빠뜨릴 사악한 목적에 따라 아히멜렉이 어떻게 해서 다윗에게 '골리앗의 칼'과 '진설병'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다만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그것들을 준 사실에 대해서만 말하였다.

=====52:3
네가 선보다 악을 사랑하며 -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라'(34:14)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행동을 나타내는 본문은 성도들이 그 연약성으로 인하여 어쩔 수 없이 죄를 범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롬 7:20). 이것은 가장 극심하게 타락한 인간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모습이다(잠 1:22;미 3:2).

=====52:4
잡아먹는 모든 말 - 이는 문자적으로 '삼키는 말'을 뜻하며 여기서는 도엑의 파괴적인 고발을 가리킨다. 원어상의 뜻으로 미루어 볼 때 시편 기자는 도엑의 고발 행위가 더러운 탐욕에 기인한 것임을 넌지시 드러내고 있다 하겠다(A. A. Anderson).

=====52:5
그런즉(* , 감) - 이 접속사는 앞의 내용이 뒤의 내용과 인과(因果)관계를 갖고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 잘 사용된다(창 20:5;신 12:30;욥 2:10).
너를 취하여 네 장막에서 뽑아내며 - 여기서 '취하여'(* , 하타)는 집게 또는 부삽으로 아궁이 속의 재나 쓰레기를 제거하는 행위(사 30:14)를 가리키는 동사이다. 따라서 이는 도엑이 재나 쓰레기처럼 '장막' 밖으로 치워지게 될 것(겔 26:4)을 시사한다(Kraus). 그리고 '뽑아내며'(* , 나사흐)는 '헐다', '파괴하다', '근절시키다'의 뜻(잠 15:25)이다. 한편 '장막'은 여호와께서 임재하시는 '성막'(78:60;겔 41:1)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Weiser). 그럴 경우 본 문구는 도엑이 구원받은 백성듈의 집합인 언약 공동체로부터 축출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나 여기서 '장막'을 반드시 '성막'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근거는 없다. 그리고 본절의 내용이 뿌리채 뽑히는 악행자의 삶의 근거에 관한 것인 점으로 보아, 본문의 '장막'은 '거주지' 혹은 '안락한 가정' 등을 포함하는 말로 이해될 수 있겠다(A. A. Anderson).
생존하는 땅에서 네 뿌리를 빼시리로다 - 여기서 '생존하는 땅'은 악한 자들이 평안한 보금자리로 삼고 있는 장소 혹은 저택(Calvin)을 가리킨다. 한편 '뿌리를 빼시리로다'(* , 솨라쉬)는 여기처럼 강조형(피엘)으로 사용될 경우, 존재 근거까지를 제거하는 파괴 행위를(렘 11:19) 주로 나타낸다(H. J. Austel). 이와는 정반대로 의인은 마치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무성해질 것이다(1:3).

=====52:6
의인이 보고 두려워하매 - '의인'이 하나님의 능력과 공의를 목격함으로써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더 깊어지게 됨을 의미한다(Rawlinson). 사실 '의인'들은 자신들이 당하는 현실적인 어려움과 악인들의 번영으로 인하여 때로는 낙심하면서(73:1-3)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고 계시는지에 대해서 회의를 품을 수도 있을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을 확인한 후에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심이 더욱 공고하게 되는 것이다(Calvin). 반면에 악인들은 영적인 눈이 감기워져 있으므로(고후 4:4) 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만 우연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Calvin).
또 저를 비웃어 - 여기서 '비웃어'(* , 사하크)라는 번역은, 마치 성도들이 악인들의 멸망 자체를 기뻐해야 된다는 암시를 주는 듯하다. 그러나 구약의 윤리도 원수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말라고 가르친다(잠 24:17). 그러므로 여기의 '비웃어'를 '즐거워하며'로 번역하여(삼하 6:21;렘 30:19) '의인'들이 악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목도하고 오랫동안 숨겨져 있던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고 있는 사실로 인해 기뻐할 것(욥 22:19)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볼 수도 있겠다(Keil).

=====52:7
하나님으로 자기 힘을 삼지 아니하고 - 이 같은 도엑의 모습은 다윗이 하나님을 자신의 반석과 산성(31:3;37:39)으로 삼았던 것과 날카롭게 대조된다. 한편 여기서 '힘'(* , 마오즈)은 구약에서 '견고한 성'(삿 6:26), '산성'(28:8), '피난처'(나 3:11) 등으로 번역된 단어이다.
오직 그 재물의 풍부함을 의지하여 - 도엑은 이처럼 풍부한 재물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준다고 생각하고, 그러한 재물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울에게 대제사장 아히멜렉을 참소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포함한 수많은 제사장들을 몰살시켰다. 틀림없이 도엑은 그러한 악행의 대가로 사울로부터 많은 재산을 받았을 것이다(삼상 22:7).
악으로 - 여기서 '악'(* , 하와)은 심각한 재앙을 초래케 하는 악한 행위 혹은 원인를 가리키며(욥 6:2;30:13;잠 19:13) 구체적으로는 '재물'을 의미한다.

=====52:8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 - '하나님의 집'은 신성한 곳, 곧 성전 지대를 가리키며(A. A. Anderson) '푸른 감람나무'는 황무한 지역에서도 잘 자라나므로 시련 중에서도 낙심치 않고 굳건히 서 있는 성도를 가리킨다는점 등에 근거해 볼 때, 본문은 그 당시 다윗의 영적 형편을 암시한다. 즉 그때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어 먹을 음식의 해결에 급급해야 하는 등(삼상 21:2, 3) 육신적으로 곤고했었으며, 또한 '하나님의 집' 곧 성소에의 출입이 불가능하여 종교적인 어려움을 당하기도 했었지만, (1) 하나님의 보호 아래 그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으며(삼상 16:13), (2) 하나님과의 신령한 교제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적으로는 부요했었다(계 2:9). 그러나 도엑은 외면적으로는 번성하는 듯했지만,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영육간에 비참한 종국(5절)을 맞이할 운명에 처해 있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명명히 의지하리로다 - 이것은 앞 문구의 '하나님의 집에 있는 푸른 감람나무'가 되기 위한 필수적 조건이다(Kraus). 한편 '인자하심'에 대해서는 51:1 주석을 참조하라.

=====52:9
주께서 이를 행하셨으므로 - 하나님께서 도엑 및 사울의 마수로부터 다윗을 보호하신 것을 가리킨다(삼상 23:13, 14, 24-29, Calvin). 그러나 또한 이 문구는, 미래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하여 베푸실 모든 구원과 보호의 은총까지를 포함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로린슨(Rawlinson)은 이 문구의 시제(時制)를 '예언적 확실성의 과거'(54:7)라고 하였다.
감사하고(* , 야다) - 이 동사에는 '인정하다'혹은 '찬송하다'의 뜻도 담겨져 있다(왕상 8:33;대하 6:24;사 25:1;38:18). 주의 성도 앞에서...주의 이름을 의지하리이다 - 여기서 '성도'(* , 하시드)는 '자비를 나타내다'의 뜻이 있는 동사 '하사드'(* , 18:25;삼하 22:26)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성경의 다른 문맥에서는 '거룩한 자' 혹은 '경건한 자'등으로 번역되었다(32:6;신 33:8;삼상 2:9). 이것은 구체적으로 (1) 하나님께 경배하기 위하여 성전(8절)에 모인자들(Kraus), (2) 사울의 불의를 싫어하여 다윗 주변에 뫄려들었던 자들(삼상 22:1, 2)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다음의 '의지하리이다'라는 동사가 미래적인 사실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뜻함을 볼 때, 그 당시 다윗은 여전히 사울에게 쫓기는 신세로서 성진 출입이 불가능했었음이 분명하다. 따라서 위의 두 가지 정의 중 (2)의 것이 보다 타당한 듯하다. 한편 '의지하리이다'(* , 카와)는 '기다리다' 혹은 '앙망하다'의 뜻이다(40:1;사 33:2). 그런데 혹자는 본절 문맥상 '카와'라는 동사는 적절치 않다고 보고, '표시하다'의 뜻이 있는 '타와'(* , 겔 9:4)로 대체해야 한다고 주장하며(Hupfeld) 또 '전파하다'는 뜻의 '하와'(* )로 대체하려고도 한다(Gunkel, Notscher). 그러나 다윗이 경건한 자들 가운데서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섭리를 굳건히 소망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함을 밝히 드러내는일과 다름이 없다. 따라서 히브리 원문대로 '기다리다'의 뜻이 있는 동사 '카와'를 그대로 놓아도 본절의 문맥과 모순되지 않는다.

 

 

 

  표제에서 명시(明示)하는 바와 같이, 본 시편은 사울에게 쫓기던    다윗을    돌보아준
제사장 아히멜렉을 도엑이 밀고함으로써(삼상 21:1-9;22:6-19) 일어났던 비극적  사건
을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도엑이라는 인물은 그야말로 악행을 위하여 태어난  자
같았다. 다윗이 사울의 살해 위험을 피하여 기브아를 떠나 놉의 성소로 피해왔을  때,
도엑은 이미 성소에 와 있었다(삼상 21:7). 도엑은 개종(改宗)과 관련된 종교적  절차
때문에 성소에 머물러 있었는데, 그때 대제사장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실들을 직접 목격하였던 것이다. 한편 아히멜렉이 다윗에게 진설병과 골리앗의 칼을
주었지만, 사울에게 해를 입히려는 의도에서 그같이 한 것은 아니었다. 아히멜렉은 다
만 다윗이 사울의 명을 받아 자기에게 왔다고 판단하여(삼상 21:2), 다윗의 요구를 들
어주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도엑이 아히멜렉이 사울을 해하려는 역적(逆賊)으로  참소
한 것은, 그의 탐요스러운 공명심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권세 확장과 일신의  영달
을 위해서는, 거침없이 다른 사람을 그 희생물로 삼았었다. 그는 아히멜렉을 역적으로
몰았을 뿐만 아니라(삼상 22:18, 19). 심지어 그는 자신의 죄에 대해  뉘우치기보다는
오히려 잘한 일인 양 자랑까지 하고 다녔다(1절). 우리는 그가 어떻게 생을    마쳤는지
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지는 못하다. 그러나 본 시편을 통해서 그도 결국 육신
의 죽음을 맞이 했으며, 뿐만 아니라 그 죽음이 뭇 사람의 입에 회자(膾炙)될 만큼 비
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생생한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본 시편을 통하여 우리는  (1)  잔학한
범죄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죄로 인정치 않아 회개치 않는 영적 불감증은  더욱
무서우며(눅 13:3-5;히 3:8), (2) 세상에 속한 가치(價値)들에 대한 집착은 자신을 하
나님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하며, (3) 사리 사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권모 술수나  세상
의 지혜는 필경 자신을 파멸로 인도하고 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한편 본시에는 비탄(1-4절), 저주(5절), 지혜(6, 7절), 감사(9절)등 여러 요소가 포
함되어 있어 다소 복합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감사와  간구'
의 시로 분류하는 것이 무난하겠다.
  그리고 본시는 구성상 A,B,B,A의 형태를 띠고 있는 바, 이를 나열해보면 먼저  사악
한 자의 어리석음을 언급한 A(1-4절) 부분과 의인에게 임하는 축복을 노래한  A(8,  9
절) 부분이 대조를 보인다. 또한 하나님의 철저한 심판을 확신하는 B(5절) 부분과  하
나님의 심판을 통해 드러나는 지혜를 언급하는 B(6, 7절) 부분이 대구의 형식을  취하
고 있다. 이제 이러한 구성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보다 상세히 상고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시인은 강포한 자는 필경 멸망당하고 말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다(1-5절).
여기서는 한 강포한 자의 사악한 모습(1-4절)과 그가 그러한 사악성으로 인하여  하나
님의 심판을 받는 모습(5절)이 묘사되고 있다.
  그러면 도엑을 이처럼 사악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끊임없는 욕심 곧 재물
과 명예 및 권력에 대한 지나친 탐욕이었다. 그느 하나님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자였기 때문에, 진정으로 자신을 행복하게 해줄 만한 가치(價値)에 대해서 알 턱이 없
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대신할 만한 숭배의 대상을 갈구할 수밖에 없었다.  도엑
은 사울의 목자장이었으므로 이미 상당한 권세와 재물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것에 만족할 수 없었던데에 문제가 있다. 이는 생수가 아닌    소금물을
마신 자가 목이 더 타므로 그 소금물을 또 다시 거듭 마실 수밖에 없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비록 도엑이 처음에는 부당한 재물과 권세로 낙을 삼았겠지만, 그러한 근본
부터가 잘못된 쾌락 추구로 말미암아,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멀어지게  되었다.  가런
점에서 그 강포한 자는,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그리고 육신의 정욕을 진작  버려
야만 했었다(요일 2:16).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우리에게 (1) 재물과 권세에 대한 욕심은 일만 악의 뿌리이며
(딤전 6:9, 10), (2) 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은 곧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임(요일 2:15)
을 깨닫게 해준다.
  둘째로, 강포한 자의 멸망이 일개 조롱거리밖에 되지 못할 것임을 토로하는  내용이
다(6 ,7절). 강포한 자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멸망한다
는 사실이 언급된 데에 이어, 여기서는 강포한 자의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의인들이
어떠한 반응를 보이게 되는지를 말한다. 사실 의인들은 강포한 자의 극성으로  말미암
아 많은 고통과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이 시련과 고통은 반드시 그 강포한 자에게 직
접 피해를 입은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적어도 하나님의 공의를 믿는 의인이라면,  악
인에게 직접 당하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극성 그 자체를 목도하는  일이  괴로움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강포한 자로 인해 다른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가슴    아파했을  것이며
강포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으로운 심판이 신속히 임하지 않는 듯하여 안타까워  했
을 것이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  회의를  품었을지도  모른다.(73:2,
3). 그러나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공의를 밝히 드러내사 강포한 자의 최후가 어떠한지
를 몬든 이가 쉽사리 인식할 수 있게끔, 그 강포한 자를 멸하신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신앙의 정도(正道)를 따르는 자들이 일시나마 품었던 하나님께  대한  회의를
완전히 불식(拂拭)시켜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의인들의 본문과 같은 반응은,  결코
악인들의 멸망 그 자체를 기뻐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남으로써
그분의 살아 역사하심에 대한 신뢰가 굳어 질 수 있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공의를 의심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의 공의가 반드시 실현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확인한 우리들은, 모든 이에게 전함이 마
땅하다.
  끝으로, 시인은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자가 얼마나 큰 축복 상태에 있는지를 감
사 찬양조로 언급함으로써(8, 9절) 본시를 끝맺는다. 7절까지에서  시인은,    악인들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임을 강도 높게 토로하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다윗이
여전히 강포한 자에 의해서 쫓기는 비참한 신세지만, 영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하나님
의 커다란 축복 아래 있는 부요한 신분임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무고한  아히
멜렉 제사장을 참소함으로써 사울의 신임을 크게 얻었을 도엑은, 언뜻 볼  때는  잎이
무성하여 싱싱한 감람나무처럼 생각되어졌을 것이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으
며, 언제까지라도 꺽이지 아니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최후
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존재였다. 다시 말해서 도엑은 뿌리 뽑힌  나무인(5절)
반면,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푸른 감람나무였다. 비록
다윗은 쫓겨 다니고 있었고 먹을 것도 없어서 구걸하는 (삼상 25:8) 비참한 신세였다.
그러나 다윗에게 이같은 외면적 형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최우선의
관심사는, 자신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의  여부였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기만 하다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미래를 확실히 보장해주실 것이기 때문
이다.
  여기서 우리는 (1) 현실상의 외적 모습을 통하여 진정한 성공 여부를 판단하는 것은 곤란하며(계 18:21-23), (2)하나님 안에 뿌리 내리지 않은 모든 일은 사상누각(砂上樓閣)과 같으며(마 7:24-27), (3) 신자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자신의 목표  달성에 집착하기에 앞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는 일에  우선  순위를  두어야  함(마6:33; 요삼 1:2)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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