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
빈약한 자 - 이에 해당하는 원어는 '달'(* )로서 시계추 혹은 나뭇가지들처럼'매달려 있거나 흔들리는 어떤 물건'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에게 적용될 때에는 '연약한', '가냘픈', '힘없는' 등의 뜻이 된다. 결국 이 단어는 빈곤이나 질병으로 인하여 바싹 마르거나 도움받을 곳이 없는 자, 그리고 열등한 환경에 처하여 이웃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가리킨다(창 41:19 출 30:15 ; 삼하 13:4).
권고하는 - (* , 마스킬). 원어의 의미는 크게 둘로 나뉜다. 그 첫째는 '동정의 눈을 가지고 보다'(느 8:13 ; 잠 16:20 ; 21:12)이며, 둘째는 '의로운지혜를 가지고 의롭개 대하다'(14:2)이다. 우리는 이 두 의미 중에서 70인역의 지지를받는 전자를 취할 수 있다. 즉 '권고하는 자'란 무시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굳은마음이나 냉정한 마음이 아닌 동정의 마음을 가지고 빈약한자를 돌아보는 자를 가리킨다(Barnes, Pero-wne). 한편, 본 시편은 애가(哀歌)가 그 바탕이되고 있는 일종의 저자의 신앙 고백문이라고 볼수 있다(Anderson).
=====41:2
여호와께서...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 이것은 경건한 자의 행위는 부분적으로 땅위에서 보상을 받는다는, 혹은 이웃에게 친절한 자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 나타난다는 신적 통치에 있어서의 일반적인 법칙이다. 이 법칙에 관해서 성경은 1:3 ; 37:3, 4, 11, 23-26, 37 ; 마 5:5 ; 딤전 4:8 등에서 말하고 있다. 한편 이 법칙을 본 시편에 적용해 본다면 누구든지 질병으로 연약해진 자를 긍율로 돌볼 경우 그가 동일한 상황에 빠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상황에 개입하셔서 보존하시고 생명을 유지시키신다는 것이다. 물론 이 적용은 일반 원리하에서만 가능한 진술로 보아야 한다.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 이것은 방금 전에 살펴본 원리와 조화를 이룬다. 시편과 성경 여러 곳은 경건에 기본을 두고 이웃을 돌아보는 행실이 이생에서의 행복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가르친다.
원수의 뜻에 맡기소서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원수의 욕심에 나를 넘기지 마소서'로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27;12에서 볼 수있다. 이것은 저자를 해롭게 하여 어떤 이익을 보려는 대적의 욕심을 저지해 주기를 원하는 저자의 소원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문자 그대로 단순한 소원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악한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저자 편에서의 확신의 표현으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40:14 주석 참조).
=====41:3
쇠약한 병상에서 저를 붙드시고 - 이의 문자적인 뜻은 '고통의 자리 위에 있는 그를 힘있게 하시고'이다. 여기의 '힘있게 하시고'에 해당하는 원어 '사아드'(* ) '지지하다','후원하다', '유지하다', '강하게 하다', '원기를 되찾다' 등을 의미한다. 문맥에서는 저자의 육체가 쇠해졌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가 병을 견디어 낼 수 있도록 해주시거나 힘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의미를 앞서 언급된 바와 연결시켜 볼때 연약하 병들고 도움없는 자에게 자비(1절)를 베푸는 자는 그가 병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돝아보신다는 좀더 구체적인 적용을 도출해 낼 수 있겠다(18:25). 병중 그 자리를 다 고쳐 펴시나이다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저가 병 중에 있는 그의 자리 모두를 바꾸셨다'이다. 여기서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은'자리'인데 상반절의 '병상'이 단순히 침대를 의미하는 반면이 '자리'는 오랫동안 병들어 누운 환자의 상태를 강조하는 의미가 있다(Perowne). 한편,'고치다'(* , 하파크)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전자는 단지 쿠션이 있는 벼개 같은 것을 환자의 머리 밑에 받쳐 주어 기분전환과 안락함을 공급하는 행위로 해석하는 견해이다. 그리고 후자는 하나님이 그 환자의 병을 완전이 고치셨기 때문에 더 이상 환자의 침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이 두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근거는 계속적으로 아파왔던 상황이 완전히 끝났음을 암시하는 바, 원어상 '고치다'의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제는 단순한 어떤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인 경혐을 표현한다. 즉 저자는 본절에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경우에서도 보았던, 오랫동안 계속되어 온 병든 상태로부터 완전한 고침을 받은 사실들을 회상하며 이 같은 고백을 하고있는 것이다.
=====41:4
내가 말하기를 - (* , 아니아마르티).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내가, 내가 말하였나이다'이다. 여기의 '아니'는 대명사로서 1-3절의 긍율이 넘치는 자에 대한 칭송으로부터 저자 자신의 개인적 감정과 소원에 대한 아룀으로의 전한을 두드러지게 구분짓고 있다. 뿐만아니라 이는 다음절의 '원수'에 대한 대립을 분명히 밝혀주는 강조사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였사오니 - 나에게 고통이 임한 것은 나의 죄 때문이라는 저자의 회개적인 고백이다. 여기서 저자가'나의 영혼을 제하소서' 즉 '나의 죄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왜냐하면 역경을 만났을 때 그 원인이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닌가 하여 자신을 살피기 보다는 단지 그 역경이 물러가기만을 기대하고 소원하는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이 사실은 도전을 주기 때문이다.
=====41:5
내게 대하여 악담하기를 - 저자의 대적들이 저자의 슬픔을 더하게 할 목적으로 그의 연약하고 유약한 상태에 대해 악하게 말하기 위하여 자리를 마련한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러한 문맥에 비추어 볼 때 여기 '악담'에 해당하는 원어 '아마르'(* )는 단순히 '말하다', '발언하다'를 뜻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대적들의 '중상' 및 '비난'을 의미한다.
저가 어느 때에나 죽고 - 함축적인 이 표현을 더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저 사람은 병들어 있소. 그의 죄때문에 병든거요. 저 사람이 죽는 일은 분명한 일일 것이오. 아니 저런 사람은 죽는 것이 낫소. 그러나 저 사람은 죽은 후에 소망이 없기 때문에 그 생명이 끊기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것이오'이다. 참으로 병들어 있는 사람에 대해 이보다더 신랄하고 혹독한 비난은 없을 것이다(Bar-nes).
그 이름이 언제나 언제나 멸망할꼬 - 이것은 한 특정인과 그의 가문의 멸망(109:13 ; 신 14 ; 25:5 ; 삼하 18:18). 또는 본절의 예와 같은 불행한 한 인간의 단순한 죽음(9:5)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표현을 통해 본 시편 저자의 이름이 더 이상 언급되기를 원치 않는, 그의 삶의 향력이 더 이상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그의 대적의 바램을 엿볼 수 있다=====41:6
나를 보러와서는 - (* , 임 바 리르오트). 원어를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만일 그가 보기 위하여 온다면'이다. 유사한 구절인 삼하 13:5 ; 왕하 8:29 등에 의하면 이러한 표현은 병든 친구나 친척의 방문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상기의 구절에서 보여준 것과 같은 병자 방문의 대표적 예는 욥 2:11인데 이 구절에 의하면 방문의 목적은 애도를 표시하고 고통받는 자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전승에 의하면 고통받는 자가 스스로 대화의 문을 열 때까지 위로자는 그 어떤 말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고 한다(Anderson).
거짓을 말하고 - 문자적인 뜻은 '공허한 것으로 말하고'이다. 이것은 방문자가 방문 목적대로 위로하고 위안을 주지 않고 방문 목적과는 상관없는 쓸데없는 공허한 말들을늘어 놓은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결국 방문자의 목적은 위안 주기를 가장하여 피방문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었음을 알수 있다(Barnes). 그 중심에 간악(奸惡) 쌓았다가.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그의 마음은 부정을 모 으고'이다. 이것은 악한 위로자가 나쁜 소문을 퍼뜨릴 목적으로 자료들을 수집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아마도 이 사악한 방문자인 친구는 피방문자의 질병의 증상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피방문자의 질병의 원인을 그의 죄 때문이라고 나름대로의 생각을 굳혔을 것같다(8절).
=====41:7
수근거리고 - 저자의 대적들이 예정된 악행과 관련된 최근의 정보를 토론하고 서로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던 것을 가리킨다(삼하 12:19).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행위를 일삼고 즐거워한다. 마 7:1-4에 나타나 있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러한 사실이 진리임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준다. 한편, '수근거리다'(* ,라하쉬)는 '주문을 걸다', '속삭이다', '중얼거리다'라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대적들이 고통 당하고 있던 시편 기자가 확실히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와 같은 유치한 행위를 하였던 것을 묘사하는 장면으로 볼 수 있다(An-derson).
=====41:8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으니 - 문자적인 뜻은 '벧리야알(* ))의 것이 그에게 쏟아 부어졌으니'이다. 우선 악한 병을 가리키는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충격적인 것'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는 '육체적인 혹은 도덕적인 악'을 의미한다. 그러나 후자 '도덕적인 악'이 좀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의미이다. 이와 동일한 형태의 표현이 101:3 ; 신 15:9에서도 등장하는데 그곳에서도 도덕적 악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있다. 그러나 '벧리야알의 것'은 어떤 육체적인 악한 결과를 동반한 '도덕적 악에 대한 징벌'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보아야 한다(Perowne, Ra-shi). 왜냐하면 문맥이 악 자체보다는 그 악으로 인한 '결과' 혹은 그 악 때문에 임한 '징계'따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한편, '쏟아붓다'에 해당하는 ''야차크'(* )는 왕상7:24, 30 ; 욥 41 :15, 16에서도 볼 수 있으며 아마도 롑 42:18에 그것과 동일한 상징으로도 볼 수 있겠는데 어떤 녹인 금속이 주조(鑄造)를 속으로 구석 구석 흘러들어 가듯이 인간의 몸전체를 덮고 몸 속로까지 스며들어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상의 소찰(小察)을 통해 볼 때 '악한 병이 저에게 들었다'는 것은 도덕적인 악의 결과로 말미암아 그 몸 외부뿐 아니라 그 피부 속 깊숙한 곳까지 육체적인 질병이 임했다는 말이다.
=====41:9
떡을 먹던 - 이것은 주인의 환대를 받았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삼하 9:10 ; 왕 상 18:19). 본 구절의 일부분이 제자 가룟 유다의 반역적인 소행에 대한 예수님의 언급에서 발견되기 때문에(요 13:18) 본 시편을 메시야 시편으로 보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바람직하지 못한 이유는 본절에 ' 나의 신뢰하는'이라는 중요한 구절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예수님은 유다가 어떤 자인줄 알았고 따라서 그를 신뢰하지 않으셨다(Pdrowne). 나의 가까운 친구(* , 이쉬 쉴로미). 문자적인 뜻은'나의 평안의 사람'이다. 이는 서로 가슴으로 안을 수 있는 친구라고 볼 수 있는(Anderson),그리고 서로 항상 평안을 주고 받고 소원(蔬猿)하지 않으며 최고의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러한 우정은 언약의 식사(covenant meal)나누고 어떤 약조를 맺음로써 시작되곤 하였다(창 26:28 ; 31:53 ; 삼상 18:3, Pedersen).그렇다면 '떡을 먹던 가까운 친구''란 이 같은 언약의 식사를 나누고 약속을 나눈 언약적 친구라고 볼 수 있다.
그 발꿈치를 들었나이다 - 문자적으로 직역하면 '그가 그 벌꿈치를 크게 만들었다'이다 이 표현은 말이 그 주인을 차버리고 도망하는 모습에서 따온 것인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어떤 주석가는 '그가 그 발로 그를 밟았다'라고 본절을 번역하기도 한다 (Lu-ther). 한편, 이 표현은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에 대한 예언(요 13:18)으로 신약 이후부터는 이 표현이 주인을 배신하는 행위를 암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1:10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 -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경우 이 같은 기원은 그리스도인의 선한 양심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소원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다윗이 신정국(神政國) 이스라엘의 공법(公法)을 집행하는 왕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소원은 정당화될 수있다. 즉 다윗의 주 관심사는 개인적 앙갚음에 있다기보다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을 보는 데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모반자들의 반역적 거사에 의해 일단 폐위되었었던 다윗은 이 같은 소원을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 당연하였다고 여겨진다.
=====41:11
승리치 못하므로 - '숭리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루아'(* )로 '소리치다', '소동하다','개가를 울리다', '경종을 울리다'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이것은 전쟁에서 승리한 편이 지르는 기쁨의 환호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다(삼상 17:20). 그렇다면 이 구절은 다윗의 대적이 승리를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가 곧 죽으리라는 기대 속에 있었던 다윗의 대적들은 매우 실망하게 될 것이다.
주께서 나를 기뻐하시는 줄을 - 좀더 분명하게는 '주께서 다윗의 친구가 되시는 줄을'이라는 뜻이다.
내가 아나이다 - (* , 야다티). '내가 알았나이다'가 문자적인 뜻인데 번역을 보아 알수 있듯이 시제가 과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시제가 과거로 되어있다는 것은 비록 본 시편을 저술하는 시점의 상황은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이지만 저자는 하나님과 친구인 자신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을 미리 알고 확신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41:12
완전한 중에 붙드시고 - '완전'은'톰'(* )으로서 문자 그대로 '죄없는 완전한 상태' 혹은 '무죄'를 가리킨다(욥 27:5 ; 31:6). 그렇다면 이러한 표현은 4절 상반절의 자신이 죄인이라는 저자의 고백과 모순된다. 그러나 이것은 지금까지의 주석을 통해 보았듯이 저자가 고통을 받았던 이유는 죄악 때문이었지만 이제 그러한 고통으로부터 승리하고 회복될 것을 확신하는 마당에서, 저자가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음으로써 반복적인 고통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41:13
여호와...아멘아멘 - 원래의 시편에 없던 것으로 시편의 큰 단위 하나가 종결되는대목에서 결론조로 후대에 첨가된 찬양으로 이 마지막 구절을 보는 일부의 경향이 있다(A. A. Anderson). 이러한 견해는 아멘 찬양(72:19 ; 89:52)이 시편의 큰 다섯 단위(개역 성경엔 제 일권, 제 이권...제 오권 이런 식으로구분되어있다)의 종결 부분에 각각 등장함을 볼 때 그럴듯 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된 찬양은 히브리 시 속에서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강조해 나타내는 표현이기 때문에 꼭 이렇게 볼 수만은 없다.
본 시는 제 1권의 마지막 부분으로서 다윗이 병상에서 인간의 배반과 하나님의 신실
한 돌보심을 대조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경배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다윗이 연
약함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본 시는 (1) 연약한 자에 대한 긍휼(1-4절), (2) 인간에
대한 배신감(5-9절), (3)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10-13절) 등 세 부분으로 구
성되어 있다.
다윗이 이 시를 쓸 당시의 역사적 상황은 아마도 압살롬에게 박해를 받던 시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압살롬은 다윗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공정
한 재판관을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국민의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급기야 다윗의 가장
친한 친구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아히도벧과 함께 반역을 일으켰다(삼하 15:1-12). 다윗
은 이러한 사실을 사전에 인지하였으나 자신의 부끄러운 죄악(간음과 살인)에 대한 양
심의 가책과 아들인 압살롬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자각 때문에
미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묵묵히 하나님의 처분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에 의한 배역(背逆)으로 인해 육신과 영혼이 모두 쇠약한 상황에서
다윗은 인간의 배은 망덕(背恩忘德)함에 대한 탄식함과 함께 영원하신 하나님의 자비
와 긍휼에 대한 신뢰를 시적(詩的)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본 시편의 유형은 일반적으로 병상에서 쓰여진 '감사시'로서 알려져 있다. 어떤 학
자들은 '탄식시'로 보기도 하는데, 이는 본 시가 다양한 감정을 복합적으로 묘사하므
로 여러 가지로 해석될 여지를 남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시에는 시인잉 병상에
누워서 주위 사람들에게 느꼈던 배신감과 여호와와의 교체 경험 속에서 가졌던 신뢰와
감사가 주도적으로 부각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시에는 병자 특유의 내면적 섬세함과
감상이 짙게 드러나 있으며,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과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매우 강도 높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히 본시편은 55편과 한 쌍을 이루고 있는데, 55편
이 하나님의 우주적 권능에 대한 구원을 강조하는 엘로힘적인 시인 반면에, 본시는 언
약을 맺으시고 구원하시는 여호와를 찬양하는 야훼적인 시로서의 특징을 갖는다.
이제 본 시편의 내용을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가각의 내용적 특서을 고찰해 보고
주도적 사사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첫째, 연약한 자에 대한 시인의 애휼심(愛恤心)이 잘 드러나 있다(1-4절), 다윗이
동병 상련(同病相憐)의 정을 가지고 읊은 본 단락은 (1) 긍휼히 여기는 자의 복(1,
2절), (2) 여호와로 인한 치료(3절), (3) 하나님의 용서에 대한 간구(4절)등으로 구성
되어 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처해 있는 다윗은 모든 빈약(貧弱)한 자를 자비롭
게 대하는 자에 대해 하나님이 축복하실 것을 말하고 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자신의
범죄를 용서해 주시고 자신을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믿고 있다. 역시서는 특
별히 다윗이 자신의 개인적 고통을 혼자만의 아픔으로 내면화시키지 않고, 함께 고난
을 당하는 모든 사람의 문제로써 확장시켰다는 점이 중요하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
이며, 대부분 자신의 문제에 집착하여 다른 사람을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다윗은
개인의 고난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보다 먼저 모든 억눌린 자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이웃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1절). 이러한 시각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향하여 눈을 돌릴 수 잇는 신앙 속에서만 가능하다. 다
윗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도 아마 이와같은 가난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골리앗을 물리치고 주변 열강
을 정복한 용사 중의 용사였다(삼상 17:41-58;삼하 10:15-19). 그러나 다윗은 동시에
연약하고 병든 자였으며(3절), 섬세하고 아픈 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어루만져 줄 수
있는 자상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보잘것없는 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은 하나님의 사람
들이 공통적으로 지녔던 마음이다. 다윗은 자신의 고통에 연연하여 좌절하지 않았고,
같은 아픔을 당하는 모든 사람과 연대 의식(連帶意識)을 강하게 느꼈던 하나님의 종이
었다(고전 12:26).
둘째, 인간에 대한 배신감과 절망을 말하고 있다(5-9절). 다윗이 인간적 절망이 적
나라하게 드러나는 본 대목은 (1) 원수들의 악담과 저주(5-8절), (2) 친구의 배신(9
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으로서 위로가 필요했던 다윗은 사랑과 동정을 베풀어 주기는 커녕 오히려 악담
고 조롱을 퍼붓는 원수들과 직면한다. 그들은 다윗의 멸망을 기버했고, 심지어 다시는
회복될 수 없을 것이라고 폭언을 퍼부었다(5, 8절). 그런데 다윗에게 있어서 더 큰 고
통은 원수만 그러한 행동을 취한 것이 아니라 절친했던 벗까지도 배반했다는 사실이다
(9절;삼하 15:12;요 13:18, 21-30). 여기에 이르러 다윗의 고통은 최절정에 다다른다.
다윗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을 경험한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아히도벧의 반
역을 겪으면서 인간의 악함과 변덕스러움을 뼈에 사무치도록 절감한다.
결국 본 단락에서는 인간의 부패함과 불신실함에 대한 폭로가 신랄하게 표현되고 있
다. 특별히 다윗은 원수의 배반을 언급한 이후에, 이어서 친구의 배역을 말함으로써
점층적으로 인간의 죄성을 강조하였다. 사실 이러한 인간관은 성경 전체에 주도적으로
나타난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범죄하였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모든 것이 악하므로 인
간의 마음은 만물보다 부패하였다고 선언한다(창 6:5;롬 3:9-12). 이러한 사실에 대해
다윗은 철저하게 피부로 느꼈으며, 그에 대한 비감(悲感)한 마음을 시적 표현을 사용
하여 토로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러한 사실을 경험하면서 인간 혐오론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여 나간다.
셋째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확신을 표현하고 있다(10-13절). 인간에 대해 완
전히 절망한 상황에 이어지는 본 대목은 (1) 원수에 대한 승리(10, 11절), (2) 하나님
의 영원한 보호(12절), (3) 하나님에 대한 찬양(1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별히 여기서는 절망스러운 상황으로부터의 극적인 반전(反戰)이 이루어진다. 다윗
은 지금까지의 음울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을 단숨에 뛰어넘어 새로운 소망을 제시한다.
그 비약적 전환의 근거는 바로 영원히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있었다(12절). 인간은 배반할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변개(變改)치 않으시며 자신을 끝까지 돌보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다윗은 참된 기쁨을 발견한다. 이러한 사실을 좀 더 효과적으로 설명하기 위하여 다윗은 인간의 악함(5-9절)과 하나님의 신실하심(10-13절)을 첨예하게 대조시키고 있다. 이러한 표현법은 히브리 시에서 흔히 쓰이는 반어적 평행법으로서, 상반되는 두 개념을 예리하게 대조함으로써 더욱 분명히 강조하고자 할 때 사용한다.
결국 본 대목은 앞 단락의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면서 역설적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다윗은 인간에 대한 철저한 좌절을 경험하면 할수록 인간에 대한 환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 오르게 된다. 다윗은 참된 소망은 상황과 무관하게 하난미으로부터 도래함을 발견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황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고 여전히 절망스러울 뿐이었지만, 다윗은 처지를 지으시고 공의롭게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봄으로써 자신의 역경에 대한 해결점을 발견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바라본 순간, 원수에 대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얻는다(11절).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기대는 시의 전반부(1, 2절)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러므로 본시는 수미 쌍관법적(首尾雙關法的)인 구성 방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예찬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통하여 우리는 가장 비참한 상황 속에서 가장 완벽한 희망을 도출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낼 수 있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가장 커다란 위기였지만, 부활을 통하여 가장 완벽한 희망으로 승화되었다. 이러한 다윗의 자세를 통하여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고 더욱 굳건해지는 참된 믿음의 모형을 발견할 수 있다.
결국 다윗은 원수들로 인하여 답답한 마음으로 기돌르 시작하였으나, 하나님의 궁극적 승리를 믿는 확신에 도달하였고(12절) 급기야 하나님에 대한 찬송으로 귀결시킬 수 있었다(13절). 이처럼 하나님만이 궁극적 구원자라는 사실을 믿는 신앙은, 모든 환란과 역경을 초극하여 난관(難關)중에서도 찬양할 수 있는 마음을 소유할 수 있게 된다.다윗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한 중에서도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찬야으로 자신의 시를 끝맺을 수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고난 중에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야 한다. 우리는 흔히 타인의 고통에 대하여 이해하려는 입장에 서기보다 정죄하려는 경향이 있다(욥 4:7-11).
(2) 환란과 고통은 자신을 성찰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다윗은 질병과 친구의 배반속에서 자신의 범죄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보았다(4절). 우리는 약할 때에 도리어 강하다는 바울의 고백(고후12:10)을 기억하면서 자신의 고통과 환난을 내면적 성숙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3) 하나님께 대한 소망은 오히려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으로부터 도출됨을 알 수 있다. 가장 친한 친구까지도 자기를 배반하는 상황에서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다(9절).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인간에 대한 철저한 절망에 부딪칠 때 염세주의적 태도를 보일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의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4)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신실히 지키신다. 이러한 확신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일관성있는 삶의 태도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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