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1
여호와는 광대하시니 - 하나님께서는 약하고 무력한 우상과는 달리 자신에게 예배하는 백성들을 대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능력과 힘을 지니셨음을 선포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대적'이란 구체적으로 히스기야 왕 시대의 앗수르 왕 산헤립을 가리키는데 하나님깨서는 산헤립의 공격으로부터 이스라옐 백성과 예루살렘 성을 보존하셨다(왕하 18:19 ; 사 36장 등)그렇게 보는 근거는, 앗수르의 침공과 관련한 이사야의 예언들과 본 시편이 그 사용된 동사들에 있어서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사 8, 28, 29, 33장).
=====48:2
터가 높고 아름다워(* , 예페노프). 직역하면 '높음에 있어 아름다운'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이 지형적으로 높은 곳에있는 도시임을 강조하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본 구절 해석의 핵심적 요소인 '높음' 으로 번역된 '노프'는 여기서만 등장하는 용어로서 그 의미를 규정하기가 까다로우나 히브리어와 동일 어족에 속하는 아랍어의 유사 용어가 '고도'를 뜻하기 때문이다(Perowne). 한편, 예루살렘의 고도가 높다는 것은 예루살렘이 유다의 무수한 언덕들 중 가장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가 그 나라에 있는 가장 높은 고원중에 하나라는 말이다.
온 세계가 즐거워하이여 - 이에 해당하는 원어의 문자적인 뜻은 '온 땅의기쁨 인 데 이는 바로 앞 구절 '높음에 있어 아름다운'이란 말의 보어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결국 이 표현은 예루살렘이 온 땅의 기쁨이 된다는 것이다. 한편, '온 세 계'(온땅)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둘로 나뉘는데, 그 전자는 이스라엘 온 땅 '을 가리킨다는 의견이고 후자는' 세상의 모든 땅'이라는 견해이다. 그러나 본 시편 전체에 풍기는 어감을 볼 때 그 기쁨이 미치기 원하는 범위는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니라 온 세상인 것이 분명하다(애 2:15). 따라서 여기의 '온 땅'은 개역 성경도 지지하는 후자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한편, 사 60:15은 이와 유사하게 '대대의 기쁨'이란 표현을 사용하고있다.
북방에 있는 시온 산 - '북방에 있는'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히 규명하기란 쉽지 않다. 겔 38:6, 15 ;39:2등에도 유사한 표현이 있는데 그곳에서는 '하나님의 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사 14:13에서는 이방 신들의 산, 혹은 앗수르 올림푸스의 위치를 묘사하는 것 같이 보인다 . 일부의 구약 학자들은 시온을 앗수르 신화의 그곳과 같은 위치로 말하기 위해 본 시편기자가 여기서 앗수르 신화로 부터 그 이미지를따왔다고 가정한다(Ewald, Hitzig, Hengsten-berg). 그러나 이러한 가정은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온전히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계시에 의존하는 하나님 중심적인 시인이 거룩한 사실을 나타내는 일에 신화의 일부를 빌린다는 것은 결코있을 수 없는 일로 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북방에 있는'은 예루살렘 성 안에 있는 성전의 위치와 관계가 있다. 물론 예루살렘 자체는 북쪽이 아니라 앞서 언급한 높은 탁자(tadie) 모양의 고원 지대의 남쪽에 위치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처소로 알려진(특별한 의미에 있어서) 곳인 성전은 북쪽, 좀더 자세히는 도시의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기에 저자가 '북방에 있는'이란 표현을 사용할 때 염두에 둔 것은 바로 이곳이었을 것임에 틀림없다. 또한 성전이 있음을 중시하면서, 예루살렘을 지칭할 때 흔히 사용하는 표현 중 하나가 '시온 산'이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본 구절의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다.
=====48:3
여러 궁중 - (* , 아르므노 테이하). 직역하면 '그의 궁중들'이다. 이것은 예루살렘의 궁전이 여럿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동일한 한 궁궐이 강조점에 따라 다르게 불리울 수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이 궁궐은 '성'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며, 특히 이 말의 원형이 '들어올리다', '높이다'를 뜻하는 '아르몬'(* )임을 고려할 때 높은 곳에있는 '요새'로 부를 수도 있다. 이렇듯 한 장소가 그 특성상 다르게 호칭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수가 아닌 복수 형태의 단어가 여기서 사용된 것이다.
자기를 피난처로 알리셨도다 - 문자적인 뜻은 '그가 자기 자신을 높은 탑으로 알리셨다'이다. 이것은 바로 다음절 이후에서 묘하되고 있는 반응이, 최근에 하나님께서 이루셨던 위대한 구원 사역의 결과임을 뜻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높은 탑으로 알려지셨다는 것은 마치 그 누구의 손도 닿지 않는 높은 탑같이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대적의 공격에 피해를 입지 않도록 보존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가리킨다.
=====48:4
열왕이 모여 함께 지났음이여 - (* , 힌네 히믈라킴 노아루 오브루 야흐다우). 문자적인 뜻은'보라 ! 왕들이 모였다. 그들이 함께 지나갔다'이다. 여기서 복수인 '왕들'이란 표현 때문에 본 시편의 역사적 배경을 한 명의 앗수르 왕 산헤립에 의한 유다 공격 시대로 보는 견해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 왜냐하면 산헤립은 자신에게 조공을 바치는 왕들을세웠기 때문이다. 즉 그는 갈대아, 페니키아, 블레셋 등을 점령한 후 그곳 왕들을 자신의 수하에 있는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바로 이 왕들과 연합하여 그는 예루살렘을 침공한 바 있다(사 10:8-11). 그리고 왕들이 '모였다'는 것은 가나안 왕들처럼 그들이 공식적인 연합국을 조성했던 것을 가리킨다(수 11:5). 또한 그 연합국이 '함께 지나갔다'는 말은 일차적으로 그 군대가 전투 대형으로 행진했다는 것을 가리킬 수 있다(사 10:28, 29). 그러나 여기 사용된 동사의 의미는 사 37:36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소멸되었다. 당장 함께 사라졌다'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이러한 이유를 고려해 볼 때 본 구절은 두 개의 상황, 즉 많은 군대가 모이고 그리고 바로 멸망한 사실을 간략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구절들에서 상술되고 있다.
=====48:5
빨리 갔도다 - (* , 네흐파주). 직역하면 '그들이 완전히 어리둥절하였다'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대적 연합군들이 하나님의 성(城)을 보고, 느끼고, 취했던 행동의 마지막 단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도망하다'로 번역해도 무리는 없다고 본다(70인역). 그래서 개역 성경도 이와 유사하게 '갔도다'로 번역한 것 같다.
=====48:6
고통이 해산하는 여인 같도다 -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님의 거룩한 성을 바라보고 가졌던 혼돈과 공포는 성경에서 흔히 가장 심한 고통을 뜻할 때 사용하는 산고(産苦)에 비유되고있다(렘 4:31 ; 6:24 ; 13:21 ; 22:23 ; 30:6 ; 49:24 ; 미 4:9, 10).
=====48:7
주께서 동풍으로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시도다 - (* , 베루하 카딤 테솨베르 아니오트 타르쉬쉬). 직역하면 '동풍으로 당신은 다시스의 배를 깨뜨리신다'이다. 여기 사용된 동사 '테솨베르'는 2인칭 남성형 혹은 3인칭 여성형으로 해석될 수 섰는데, 전자의 경우는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당신 하나님께서 그들...를 깨뜨리신다'로 번역되며, 후자의 경우는 '그를'이 주어가어 '그들은 그들을 깨뜨리는 동풍에 의해 깨어졌다'로 번역된다. 이 둘 중 전자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 이유는 문맥이 하나님의 강력한 주권적 능력에 의한 이방의 패배와 실패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본절에서는 앞절에 이어 산헤립의 패배를 폭풍우로 인한 해군의 난파및 와해(瓦解)에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성경의 언급으로 볼 때 다시스의 배는 가장 튼튼한 큰 배로 알려져 있다(왕상 10:22). 그러나항거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사 27:8 ; 렘 18:17 ; 암 4:9 ; 욘 4:8) 막강한 앗수르의 해군력은 무용지물 (無用之物)이 될 수 없다 (사 33장).
=====48:8
우리가 들은 대로...보았나니 - 경이로운 구원, 즉 과거 이스라엘 역사속에 흔히 있었던 경이로운 사랑의 구원 역사는 이제 시편 기자의 시대에 생생한 현실로 입증되고 있는 이다(44:1) 따라서 이 사실은 미래 시대에도 당당히 물려줄 불변의 진리가 될 것이다. 한편, 87:5에서 '지존자가 친히...하리로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48:9
생각하였나이다 - (* , 데미누). 문자적으로 직역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본 단어에 대한 번역은 다양하다. 그러나 이 단어가 어떤 사물을 조용히 사려깊게 '고려하다'를 의미하는'자맘'(* )의 동족어임을 중시할 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Perowne). 그래서 흑자는 이 단어를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부합되는 어떤 개념을 구체적으로 갖게 되었던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추측한다(Hupfeld). 이러한 근거로 볼 때 흔히 알고 있는 '묵상하다'로 이를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48:10
주의 이름과 같이...미쳤으며 -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풀이하면 '이스라엘을 위한 하나님의 막강한 권능의 행사를 통한 하나님 자신을 이스라엘 가운데 알려지게 한 그분의 이름, 그 이름은 찬양을 받으실 만하다'는 것이다.
=====48:11
유다의 딸들은 즐거워할지어다 - '유다의 딸들'이란 노래와 춤을 곁들인 승리의 축제를 묘사하는 글에서 흔히 볼 수있는 표현인데 ,그럴 경우 이는 문자 그대로 '유다의 딸들'이 아닌 '유다 백성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절에서는 이것이 평행구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중시할때, 이는 평행구인 상반절의 '시온산'의 평행적 개념인 바 적(敵)의 침략으로 고통을 당했던 '유다의 여러 도시들, 마을들'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은유는 시가(時歌)뿐 아니라 산문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48:12
편답(遍踏)하고...순행(巡行)하며 - 여기 두 단어는 공히 어떤 '건물 따위를 둘러본다'는 것을 뜻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 전자는 한 개인이 그 일을 수행하는 경우를 가리킨 것과 비교해 후자는 일단의 무리가 공식적인 행렬을 갖추어 엄숙하게 그일을 수행하는 경우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결국 본 구절은 이스라엘의 개인이나 단체가 하나님께서 그 성을 든든히 보존하셨음을 확신하기 위해서 성을 한번 돌아보라는 명령을 주고 있는 것이다.
=====48:13
성벽을 자세히 보고 - '성벽'(* , 헤일)은 '무리' 혹은 '군대', 그들이 들어가 있는'요새' 특히 성벽 울타리 밖에 바짝 붙은 곳에 파놓은 '참호' 따위를 말한다(삼하 20:15 ; 사 26:1). 70인역(LXX)(* , 두나미스)은 '능력'이나 '힘'으로, 벌게이트역(Vulate)은 '용기' 등으로 이것을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할때 '성벽'이란 단순한 건축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위용을 갖춘 '난공 불락의 수비형 진지(陳地)'를 의미한다고 할 수있다. 또한 '자세히 본다'(* , 쉬투)는 어떤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하다', '면밀히 검토하고 조사하다' 등을 뜻한다. 그래서 한마디로 '성벽을 자세히 본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成)의 위용과 그 수비형 진지 상태를 면밀히 검토하고 살펴보라는 것이다.
그 궁전을 살펴서 - 여기의'궁전'은 왕가의 처소뿐 아니라 요새화되어 있어 방어벽이 잘 구축되어 있는 성(成)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절은 다음과 같은 뜻이 되겠다. 즉, '그 도성의 힘, 그 방어 능력 또한 외부 위험으로 부터의 안전성들을 살펴서'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리고 '살펴서'로 번역된 '파스구'(* )는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볼 수 있는 단어로 그 의미를 명확히 규정하기란 무척이나 어렵지만 어떤 학자에 따르면 이 단어는 '세분화하다', 즉 철저하게 돌아보기 위하여 그 돌아볼 대상을 세분하는 것 혹은 '정확히 자세히 살펴보다'를 의미한다고 본다(Gesenius). 그리고 벌게이트역(Vul-gate)은 이를 '배분하다', '분배하다'로 번역하고 있고, 70인역(LXX)은 보기 위하여 '거리를 잡다'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번역 경향과 상반절의 '자세히 보고'의 의미를 고려할 때 이 용어는 '주의 깊게 혹은 사려 깊게 조사하다'로 보는 것이 무난하겠다. 이러한 의미의 표현들을 통하여 본 시편 저자는 대적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지키시는 성 예루살롑은 그 작은 부분에 있어서도 손상을 입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48:14
이 하나님은 영영히 우리 하나님이시니 - 이에 해당하는 원어를 직역하면 '왜냐하면이 같은 이는 영원한 우리 하나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이다. 저자는 성(成)을 자세히 돌아보고 그 결과를 후세에 전해야 하는 목적과 이유를 본절에서 다시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는 성이 그렇게 든든히 서 있는 근원이 도시 자체의 강함이나 백성들의 재간이 아니라 하나님 때문이라는 본 시편의 주제를 요약하고 있는 듯하다(Anderson).
하나님의 성읍 예루살렘의 영광과 안전을 노래하는 본시는 (1) 하나님께서 임재하시
는 시온의 장엄함을 묘사하는 전반부(1-3절)와 (2) 원수들의 패배와 시온의 안전을 노
래하는 중반부(4-8절) 그리고 (3) 하나님의 신실한 돌보심에 대한 이스라엘의 찬양이
드러나 있는 후반부(9-14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의 저작 배경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어떤 학자는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
루사렘을 침범하다가 기적적으로 패전당한 사건을 염두에 두고 지은 시라고 주장하며,
또 다른 사람은 여호사밧 왕 때에 이스라엘을 침입했다가 패배한 모압, 암몬, 에돔을
생각하며 읊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확히 결정할 수는 없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과 보
호를 통하여 구원받은 예루살렘의 안전을 감사하며 하나님께 찬양하는 시임은 분명하
다.
시인은 여기서 시온 성 자체에 대해 말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 집
중적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시인은 이스라엘의 승리의 근거가 병력이나 무기, 성벽
의 견고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에서 비롯됨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
인은 예루살렘의 옥좌(玉座)에 앉아 계시는 하나니의 보호와 영광을 찬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본시는 장르상 '찬양시'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한다면 하나
님의 임재처소인 시온의 영광과 안전을 노래하는 '시온의 노래'(songs of Zion) 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시인은 본시에서 자비하심과 공의로우심으로 인하여 시온을 지
키시고 강대한 열방을 패퇴시킨 하나님의 섭리를 감격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예루살렘은 신약 시대의 교회와 종국적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예표한다
(갈 4:26; 히 12:22).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절대적 주권의 행사로 인하여 성결이 유지
되는 영역을 '하늘의 예루살렘'(히 12:22), '위에 있는 예루살렘'(갈 4:26)이라 부르
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완벽한 보호 속에서 승리를 보장받은 예루살렘에 대한 찬미
는, 곧 하나님의 다스림이 시행되는 모든 장소에 대한 찬양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하나님이 거하시는 도성(都城) 예루살렘의 아름다움을 극찬하고 있는 본시는
내용에 따라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 시온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48:1-3)
거룩한 성(城) 시온의 아름다움이 인상깊게 묘사되고 있는 본 대목은 (1) 여호와의
광대하심에 대한 찬송(1절), (2) 하나님의 성(城)의 영광(2, 3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
다.
여기서 시인은 여호와의 광대하심에 대한 찬송으로 서두를 시작한다(1절). 광대하심
이란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인간이 이지(理智)를 초월하여 위대하시다는 의미를
갖는다(사 55:8, 9). 하나님은 무궁한 지혜를 소유하고 계심으로 인간이 도저히 상상
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속서을 묵상하면서 권능
과 기사를 통하여 예루살렘을 보호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있다.
이어서 시인은 시온의 영광을 선포한다(2, 3절). 여기서 시인이 높이는 시온의 아름
다움은 결코 외적인 풍모나 장엄함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근거하고
있다. 시온은 여호와의 내재(內在)를 통하여 열국의 피난처가 되며 축복의 전달자가
된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삶은 이방 민족들의 귀감(龜鑑)이 되며
동시에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에 대해 단지 이스라엘의 주(主)
라고 제한하지 않고 열국의 왕이며 피난처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민족과 인종을
초월하여 당신을 찾는 모든 자에게 기꺼이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9:10). 그러므로 우
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주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해야 하며 아울러 모든 족속들에
게 '아름다운 예루살렘' 곧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여야 할 것이다(마 28:19, 20).
2. 영원히 견고한 시온의 안전(48:4-8)
시온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한 후에 시인은 시온의 원수들의 멸망
(4-7절)과 만군의 여호와께서 시온을 견고케 하셨음을 확증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능
력을 통하여 강대한 힘을 소유한 열방이 완전히 패배당했음을 비유법을 사용하여 생생
하게 묘사한다. 이러한 진술을 함에 있어서 시인은 유대의 군사력이나 전술에 대해서
는 일체의 언급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침략 세력의 패배 원인이 이스라엘의 힘에 있
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간섭과 능력'에 달려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대적들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시는 동안에도 무패의 위용(偉容)을 자랑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께서 작정하신 날이 임하면 아무리 강성한 세력도 풍지 박산나고 만다. 시인은 이러한
자각을 가지고 대적의 파멸을 담담하게 기술해 나갔다. 우리도 인간적인 비교를 통하
여 교만이나 절망에 빠지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며 담대하게 나가야 한다.
또한 시인은 전투를 언급하는 구절에서 자주 사용되는 '만군의 여호와'라는 호칭을 사
용하여 시온 성의 견고함을 입증한다. 예루살렘은 만군의 여호와의 성으로서 영원히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다. 시인은 이스라엘의 안전의 근거로서 하나님의 능력있는 보호
를 직접 경험했다(8절).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시인은 어떠한 위험과 공격 속에서도
시온은 결코 무너지지 않고 건재할 것을 확신한다. 마찬가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주시는 성령의 전(展)으로서의 교회가 결코 파멸하지 않을 것임
을 확신할 수 있다.
3.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대한 찬송(48:9-14)
시온의 안전에 대한 언급 이후에 이어지는 본 대목은 (1)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과
공의에 대한 찬송(9, 10절), (2) 시온을 보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11-14절)등으
로 구성되어 있다.
시인은 성전에서 주의 인자와 정의의 실체가 미치는 범위에 대하여 자가하였다. 그
는 성전에서 예배를 진행하는 동안 예루살렘이 겪은 위기와 하나님이 베푸신 구원을
비교해 보고 하나님의 미쁘신 사랑을 더욱 확실히 인식하였다. 시인은 극심한 환난중
에도 낙망하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대망하였다. 사실 우리의 인생을 회
고해 보면 하나님께서 베푸신 긍휼이 우리가 당한 슬픔과 고통보다 훨씬 강렬함을 알
수 있다(엡 1:3). 그러므로 우리는 난관(難關)에 봉착했을 때 불평과 원망을 버리고
하나님의 신실하신 돌보심을 의뢰하면서 극복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의지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과 찬송이 땅 끝까지 확산된다고 강조하였다. 하나
님의 구원과 사랑은 무한하며 오묘(奧妙)하다.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을 감지하
면서 더욱 열정적으로 찬양할 수 있었다. 우리도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
면 더욱 절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성벽과 궁전과 망대를 자세히 살펴보고(12, 13절), 후대에 전할 것을
요청한다. 이 말은 시온의 풍모와 위용을 관찰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흔적들을 발견하
여 보존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외형에 집착하여 본질을 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예루살렘의 승리에만 집중하지 말고 배후에서 역사하신 하나님께 관
심을 갖으라고 촉구한다. 아울러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혼자만의 전유
물로 독점하지 말고 이웃과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호소한다. 시인은 하나님의 인
도가 죽음 너머의 세계로 연장될 것을 확신하며(14절) 전도와 신앙 교육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신약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원한 인도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이웃과 후손들에게 전달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이상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유익한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1) 하나님의 임재하심이 가장 큰 축복이다. 예루살렘은 외적으로 볼 때 다른 열강의 수도(首都)에 비해 특별히 유리한 입지 조건이 아니였지만 하나님의 내주를 통하여 영원한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8절), (2) 하나니은 신자(信者)의 유일한 피난처이시다(3절). 하나님 안에 있으면 대단히 호의적인 환경이 조성된다 할지라도 궁극적으로 패망할 수밖에 없다. (3) 하나님은 성도들을 끝까지 인도하신다(4절). 때때로 우리는 이해할 수없는 상황에 부딪혀 회의하고 좌절하게 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고 감사하여야 한다. 우리는 사후(死後)에까지 인도하실 주님을 믿으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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