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온 세상의 소유자이며 통치자이신 여호와를 노래함으로 본시가 시작되고 있다.
땅과 거기 충만한 것 - `거기 충만한 것'이란 땅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물질 세계를 지시하는 말이다(Kraus). 여기에는 무생물 뿐 아니라 모든 생물이 포함될 것이다.
세계와 그중에 거하는 자 - `세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테벧'(* )은 생존가능한 땅, 곧 생산력 있는 토지가 있는 곳을 가리킨다. 이는 창조시 혼란한 바다에서부터 육지를 분리시킨 하나님의 전능하신 사역으로 말미암아 형성되었다(창 1:9). 그리고 `그 중에 거하는 자'는 모든 생물체들을 의미하며 그 중에서도 특히 인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들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24:2
여호와께서 - 원문에는 지시 대명사 `후'(* , 그)가 언급되어 있는데 이는 강조형이다. 즉, 다른 존재가 아니고 오직 `그'라는 뜻이다(Briggs). 한편, 이 용어 앞에는 `왜냐하면'을 뜻하는 히브리어 `키'(* )가 자리잡고 있다. 이로써 본절의 내용이 여호와께서 온 우주의 소유권을 가지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Kraus).
그 터를 바다위에 세우심이여 강들 위에 건설하셨도다 - 여기서 `위에'란 결국 `.. .에서부터'란 의미로서 땅이 바다에서 부터 나와 견고하게 되었던 창의 사건(창 1:9 f.; 벧후 3:5)을 지시하고 있다(Kidner). 한편, 혹자는 이 구절을 상징적으로 해석한다(Craigie). 즉, `바다'(* , 얌) 나 `강'(* , 나하르)은 가나안의 신비 종교에서는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고 진술하면서 이 구절이 여호와께서 혼돈의 세력을 상징하는 바다와 강을 통제하여 그위에 질서있는 아름다은 세계를 창조하셨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비록 이 견해는 본 구절을 하나님의 창조 사역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창조 당시의 상황과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다윗이 본 구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노래하기 위해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예로 선택했을 뿐이기에 그 이상의 의미로 비약시킬 필요가 없다.
=====24:3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 누구며 그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군고 - 하나님의 창조의 사건에 이어 창조주 되신 하나님을 모실 수 있는자의 조건이 질문되고 있다. 이 질문이 창조의 사건 뒤에 이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께서 흑암과 혼돈 중에서 질서있는(아름다운) 세계를 세우셨으므로 그를 모실 수 있는 자들은 자연히 질서있는, 곧 도덕적으로 선한 자들이어야 한다 해석을 제시한다(Craigie). 그러나 본 구절은 단순히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나아갈수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물음일 뿐이다.
=====24:4
손이 깨끗하며 - 혀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손'은 행실을 상징한다. 왜냐혀면 손은 인간의 의지를 수행하는 가장 중요한 기관이기 때문이다(민 15:30; 신 30:9, 10). 따라서 본 구절은 행위에 흠이 없는 자에 대한 묘사이다.
마음이 청결하며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자의 조건은 마음의 청결함이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모든 행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구절과 앞 구절은 영육간에 흠이 없는 자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뜻을 허탄한 데 두지 아니하며 - 마음이 청결한 자의 정신 상태를 분석한 히브리어`솨웨'(* )는 일차적으로 `공허', `허무'를 뜻하며 이는 물질적 또는 도덕적으로 비실제적이며 무가치한 어떤 것을 지칭한다. 따라서 이말은 종종 우상과 관련된다(렘18:15; 겔 13:7). 마음이 청결한 자는 우상과 같이 도무지 도움이 되지 못하며 무가치한 것들에 그 영혼을 팔지 않는다.
거짓 맹세치 아니하는 자로다 - 행할 의지가 없으면서도 그것을 행할 것처럼 맹세하는 것은 완전한 거짓이며 마음이 청결한 자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한편, 본절에는 여호와의 산에 오를 수 있는 자의 조건이 네 가지로 제시되었으나 15 편에서는 보다 자세하게 제시되어 었다.
=====24:6
이는 여호와를 찾는 족속이요... 구하는 자로다 - 여기서 `찾고 구한다' 는 동사는 실제로 성소에 올라오는 행위를 의미한다(삼하 21:1; 호 5:15). 이처럼 참이스라엘은 특성상 여호와를 즐겨 찾는다. 이들에게는 진정으로 여호와를 모시고 그에게 경배드릴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 것이다.
=====24:7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 여기서 `문들'은 성소의 문들을 가리키며 장차 건설될 성전의 문들을 예시하는 말이기도 하다(Rawlinson). 그리고 본절에서 이 문들은 `영원한'문들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왜냐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속에서 허락된 것으로 영원히 존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성전은 바벨론의 침공으로 함락 되었으나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오늘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Calvin).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성소의 문들을 향하여 `머리를 들지어다'라고 레위인들은 소리치고 있다. 이 표현은 성소의 문지기들에게 문을 열라는 의미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 - 신정국가 내에서 진정한 왕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5:3; 10:16; 29:10; 44:4; 145:1; 149:2; 행 15:18). 그리고 왕의 특징은 영광이다.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지상 군주의 제한된 영광과는 달리 온 땅과 하늘의 끝에 까지 미치는 영광이다(사 6:1-3).
=====24:8
영광의 왕이 뉘시뇨 - 이는 일부 찬양대의 질문이다. 7절부터 8절까지 계속 `영광의 왕'이 반복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이러한 반복은 하나님의 영광을 강조하여 오직 그분만이 영광받으시기에 합당함을 암시한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 본 구절은 일부 찬양대의 질문에 대한 남은 일부 찬양대의 답변이다. 여기서 `강하고 능한'이란 전사(戰士)에게 어울리는 수식어이다. 여호와는 사실상 이스라엘을위해 싸우시는 용사이시다(출15:2, 3; 민 10:35). 이스라엘은 지금까지 여호와의 언약궤를 앞세운 전쟁에서 많은 숭리를 경험했으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 안에서 기적적인 승리들을 목격해 왔다(삼하 5:17 -25; 8:1-14).
=====24:9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 7절에서 언급된 말이 본절에서 다시 반복되었다. 같은표현이 반복된 것은 운율상의 기법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영광의 하나님 앞에서 문지기들이 신속하게 자신들의 할 일을 수행하라는 말이기도 하다.
=====24:10
만군의 여호와 - 역시 하나님에 대한 군사적 표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삼상 1:11 주석을 참조하라.
영광의 왕이시로다 - 이로써 성소의 문들은 열리고 무사히 언약궤가 성소 안에 모셔졌다. 그런데 이와같이 문들이 열리고 언약궤가 모셔지는 이 순간은 예수그리스도의 승천을 예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Rawlinson). 바로 이러한 생각 속에서 본시는 승천절에 많이 애송되었다.
만물의 주인이신 여호와를 영광의 왕으로 높이는 본시는 (1)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에
대하여 진술하는 전반부(1, 2절)와 (2)성소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예배자의 자격에 대
하여 언급하는 중반부(3, 6절), 그리고 (3) 질문과 응답을 사용하여 여호와의 영광스
러운 입성을 강조하는 후반부(7-10절)로 구성되어 있다.
본시를 저술하게 된 역사적 배경은 오벧에돔의 집에서 법궤를 시온 산으로 옮기고자
결단한 시기로 추정된다(삼하 6:12-19). 어떤 학자들은 전쟁에 함께 나아갔던 법궤를
개선(凱旋)의 행렬과 함께 모셔 들여온 사실을 기념하면서 쓰여졌다고 추측하기도 한
다. 그러나 본시에는 새로 마련된 성소에 법궤를 모시는(3-6절) 감격과 기쁨이 생생하
게 묘사되고 있다. 그러므로 다윗이 처음으로 법궤를 시온에 안치하는 행사에서 이 시
편이 사용되었다고 보는 것이 적합하다.
그런데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므로 본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성도들 중에 임
재하실 때에 성도들의 마음 문을 열도록 촉구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법궤가
성막으로 모셔지는 장면은 고대로부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는 장면의 모
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편 본시는 분류상 하나님의 위대하신 영광을 노래하는 '찬양시'로 볼 수 있다. 다
윗은 천지를 창조하신 위대한 하나님께서 낮고 천한 땅 위의 성막에 거처를 정하심에
대하여 놀라움을 표시하고 영광을 돌리고 있다. 인간은 만왕의 왕이신 여호와를 향하
여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그 영광의 높음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능력과 권
능으로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시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다(8절). 다윗은 본시를 통해
서 신정국(新正國) 이스라엘의 존재 의의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시온에 거
하시는 자비로우심을 흥분된 어조로 고백하고 있다.
이제 내용에 의하여 뚜렷하게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 본시를 좀 더 자세히 고찰해 보
고자 한다.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24:1-2)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진술로 되어 있는 본연은 세계에 충만한 모
든 것이 여호와께 소속되어 있음을 찬양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도시의 설립자이시며
창조 세계의 섭리자이심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는 바다와 땅 위의 모든 생물
로부터 하나님의 숨소리를 감지할 수 있는 영적 감각을 지니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께
서 온 우주의 창조자이심을 우선적으로 제시한다. 하나님께서는 땅과 거기에 묻혀 있
는 모든 물질들, 그리고 모든 생존 가능한 세계와 그곳에 사는 생물들, 특히 인간을
아름답게 창조하셨다(1절). 주목할 점은 지금 인생들이 생존하는 이 아름다운 세계는
본래 바닷물이 덮여 있던 혼돈과 암흑의 세계였다는 사실이다(창 1:2). 그런데 하나님
께서 이 혼돈의 세계를 질서의 세계, 생존 가능한 세계로 창조하신 것이다. 물은 물대
로 모으시고 바다밑의 육지는 올라오게 하심으로 오늘날과 같이 생산력있는
(productive) 아름다운 세계가 창조된 것이다(2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번성하여 하나의 큰 나라를 이루었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윗은 하나
님을 찬송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주인이시며, 소유권자이시
다. 우리는 다윗처럼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겸손히 고백하며(욥
1:21),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해야 한다(요 4:19-24).
2. 성전 예배 참여자의 자격과 축복(24:3-6)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 이후에 이어지는 본연은 이처럼 위대하신 여호
와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이와 같은 내용은 15
편에서도 드러나 있는데, 본연에서 제시하고 있는 자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행실과 심령의 청결함(4a): 여기서 말하는 깨끗함은 죄가 전혀 없는 상태를 말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범죄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노력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신자는 세상과 타협하며 살아가지 말고 오직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하며(마
5:8;6:24), 외모만 그럴듯하게 갖출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거짓됨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완전한 정결은 결코 인간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의 피를 통
해서만 가능하다(히 9:14).
(2) 허탄한 데(idol) 예배하지 않음(4c절) :인간이나 우상등 가치없는 존재를 의존
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 피조
물을 경배한다면 결코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눌 수 없다.
(3) 거짓 맹세치 않음(4b절): 하나님께서는 일구 이언(一口二言)하는 간사한 사람과
교제하기를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과 사귀는 사람은 특별히 말에 있어서 거짓됨이 없
어야 한다.
이같이 성전 예배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에 대해 언급한 이후에 다윗은 계속
해서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임할 축복을 설명한다(5절).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는 구원
의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의(義)를 소유한다. 의(義)란 구원을 통하여 여생을 소유하는
사실을 가리킨다(사45:25).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운
구원의 축복이 주어진다.
그런테 보편적인 인간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다. 이는 인간의 전적 타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생은 누구든지 본연에서 제시된 것처럼 하나님을 올바르게
섬길 능력이 없다. 따라서 반드시 준비의 단계를 거쳐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와 어두움을 고백하고 주의 은혜를 바랄 때 인간은 빌소 하나
님을 모실 수 있는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요일 1:8, 9). 그리고 이러한 자는 하
나님 앞에 나아가 복(福)과 의(義)를 얻으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5, 6절). 다윗은 성소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예배자들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교훈을 드러내고 있다. (1) 하나님은 진실된 경배를 원하시며, (2) 하나님을 진
실로 경배하는 첫 걸음은 우선적으로 자신을 성찰(省察)하는 것이다.
3. 영광의 왕의 입성(24:7-10)
본 대목은 하나님의 언약궤를 모실 준비를 모두 마치고 본격적으로 예루살렘 성소에
모시는 장면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성소에 모셔지고 있는 여호와는 '영광의 왕'으
로 불리워지고 있다. '영광의 왕'은 본문에서 모두 5번 언급되었다(7-10절).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다윗이나 이스라엘 백성이 진심으로 하나님의 실제적인 통치를 원하는
중에 법궤를 성막 안으로 옮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단지 형식적으로 여호와를 모
신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진정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이 되셔서 온 나라를
평화롭게 다스리시며 주변의 모든 대적들을 물리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여호와의 언약궤를 모셔왔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참된 믿음 자세는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자신의 왕이 되어주셔서 그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다스려 주시기
를 바라는 간절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언약궤가 성소 앞에 도착했을 때 언약궤를 어깨 위에 맨 레위인들은
성소의 문지기들을 향하여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7, 9절). 영광의 왕이 들어가셔야 했
기 때문에 그들은 소리 높여 외쳤다. 그때 성소의 문이 열리고 언약궤가 모셔지게 되
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역사상 가장 큰 복이요 영광이었다. 그 이유는 높으신 창조주
께서 이스라엘 중에 영원히 거하시게 되는 중요한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하나
님은 하늘의 하늘이라도 감당할 수 없는 거룩한 분이시며 광대한 분이다. 그런데 이
높으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중심에 임하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다윗과의
언약에서 이스라엘을 영원히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삼하
7:14-16). 사실 성소에 모셔진 영광의 왕은 전쟁에 능한 전사(戰士)이시며 만군의 여
호와시다(8절). 그 어떠한 대적도 그 앞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거룩
하시고 전능하신 창조주이시지만 동시에 성소에 임하여 자기 백성을 안전하게 다스리
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이같이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임재하
여 좌정하시는 것은 얼마난 복되고 기쁜 일이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자가하면서 다윗
은 흥분된 어조로 성소의 문을 활짝 열도록 소리치고 있다(7, 9절). 다윗은 하나님께
서 이스라엘 왕국의 진정한 왕으로 입성하심을 기대하면서 더욱 큰 감격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러면 성소의 문을 열고 법궤가 들어간다는 사실은 신약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자. 먼저 구약의 예루살렘 성소는 오늘날에는 성도의 마음을 의
미한다고 볼 수 있다(고전 3:16). 그러므로 법궤의 안치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내주하셔서 죄와 사마의 법을 해방시키고 참평안과 참자유를 주심을 의미한다. 지금도
성령님께서는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며 영원히 함께 살기를 원하신다(계 3:20). 우
리는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즉시 영접하여 구원의 기쁨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마음에 좌정하여 계시면 성도는 모든 고통과 환난에서 구원을 받고 세세 무궁토록 왕노릇하게 되는 것이다(계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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