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06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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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1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 '기다리오며'(* , 두미야)는 '침묵'의 뜻일 뿐이다(62:1). 또한 본 단어는 히브리 원문에서는 '찬송' 앞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시온에서 침묵의 찬송이 주께 있사옵니다'의 문자적 뜻을 갖는다(RSV). 이에 대해서 (1) 하나님의 백성이 마땅히 하나님께 찬송을 해야만 하는 필연성을 말한다는 해석(Calvin, Weiser) (2)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찬송을 드리고 싶은마음을 표현한다는 해석(박윤선). (3)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뜻을 하나님께 모두 맡김을 뜻한다는 해석(Keil) (4) 성소에서 제사장과 레위인에 의하여 하나님께 조용히찬송이 드려지는 것을 묘사한다는 해석(rawlinson) 등이 있다. 그런데 본 구절은 대구(對句)를 이루는 다음 구절과 합치되는 뜻을 지녀야 한다.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으로부터 기도 응답을 받은 결과로서, 하나님께 대한 서원 이행 행위를 묘사함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위의 네 가지 견해 중 (2)의 것이 가장 타당하다. 한편, '시온'은 하나님의 성소가 있던 예루살렘을 지칭하기도 하지만(대하 5:2; 사 10:12; 렘 26:18), 여기서는 하나님의 성소를 가리킨다.
사람이 서원을 주게 이행하리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 특별한은총을 베푸신 일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의미에서 하나님께 이전에 서원햇던 바를 실천하겟다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61:8). 물론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무슨 은총을 베풀어 주신 후에만 그에 대한 감사의 표시를 해서는 안 된다(살전5:16-18). 그렇다면 성도들은 본 구절에서 처럼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받은 경우에는더욱 더 감사하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한다.


=====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 다윗이 하나님을 이처럼 표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실제로 하나님에 의한 기도 응답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울과 압살롬을 비롯한 많은 대적으로부터 쫓길 때 하나님께 자신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였으며(54:1;55:1; 56:1; 57:1; 59:1)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을 매번 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칼빈(Calvin)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품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수 밖에 없다라고 하여 기도 응답의 필연성을 강조하였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 - 여기서 '모든 육체'란 본서가 보편주의 사상을다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5,8절) 반드시 이스라엘로 제한될 수 없다. 차라리 혈통이나 신분의 구별없이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사람의 총체를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4절). 한편, '주께 나아오리이다'란 표현은 사람들이 (1) 하나님을 자신들의 구원자로 삼는 것, (2) 구원자이신 하나님께 경배하며 자신들의 필요가 채워지기를 기도하는것 등을 가리킬 것이다(22:27; 86:9; 사 66:23; 렘 16:19).


=====65:3
죄악이 나를 이기었사오니 - 혹자는 본구절을 조건절로 해석하여 '죄악이 나를 이겼다면' 혹은 '죄악이 나에게 벅찬 것이었다면'으로 번역하며, 또 어떤 학자는 시간을나타내는 종속절로 해석하여 '우리가 죄악에 의해 압도되었을 때'(Kidener) 또는 '우리의 죄악이 우리를 이겼을 때'(Weiser)로 번역하였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는 독립절이 사용되었으므로 개역 성경처럼 번역되는 것이 자연스럽다.
우리의 죄과를 주께서 사하시리이다 - 여기서 '사하시리이다'(* , 카파르)는 원래 '덮다'의 뜻으로서, '죄를 속량하는 것' 혹은 '화해하는 것' 혹은 '죄를 깨끗이 하는 것'을 뜻한다(창 32:20; 출 30:10; 레 4:20; 렘 18:23). 따라서 본 구절은 죄에 대한 자신의 무능력을 깨달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와 사죄의 은총을 간구함으로써모든 죄 문제를 해결받는 것을 뜻한다(요일 1:9).


=====65:4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 '택하시고'(* , 바하르)는 '쪼개다'혹은 '통찰하다'의 뜻을 갖는 아랍어 어근 '바하라'와 관련 있다. 즉, 이 동사는 만민들 중 특별히 당신의 백성을 뽑아내신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를 가리킨다(신 7:6).한편, '가까이 오게 하사'(* , 카라브)는 하나님께 경배 혹은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성소로 나아가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출 3:5; 신 5:23). 이처럼 하나님이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는 것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자들만의 특권이었다. 사실 죄악 투성이의 인간은 본질상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출19:24).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의해 선택된 자들에게는 자신에게 담대히 나아올수 있도록 허락하셨다(엡 3:12).
주의 뜰에 거하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 '주의 뜰'은 제사장이 아닌 평신도들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성소의 한 구역을 뜻한다(레 6:16). 그리고 '거하게 하신'(* , 사칸)은 친근과 근접의 개념이 강조되는 단어(68:16)이다(V.P.Hamilton). 따라서 '주의 뜰에 거한다'라는 말은 하나님과 밀접한 교제의 관계로 들어가게 됨을 뜻한다. 한편, '복이 있나이다'는 사죄의 은총을 받는 일(요일 1:9)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 필요 적절한 자비를 얻는 일에 까지 포괄적으로 적용되는 표현이다(Hengstenberg). 우리가...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 - 본 구절은 하나님과의 교제를통하여 위로부터 주어지는 '아름다움'(* , 투브), 곧 신령한 은혜로 인하여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처럼 신자들에게 참된 만족을 가져다 주는 것은 세상의 재물과 권세나 명예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교제를통해서만 진정한 기쁨을 향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령한 은혜'를 결코 한꺼번에 받을 수는 없다. 지속적으로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갖는 것이 그 비결이다.

=====65:5
본절에서 본시의 저자 다윗은 하나님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방 세계의 구원자도 되신다는 보편적 사상을 주장한다.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 '우리 구원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호칭이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호칭의 사용을 통하여하나님의 구원 섭리가 게속 펼쳐지기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믿어 의심치않는다.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의 의지할 주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의 구원자도 되심을 시사한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사실은(출 19:6) 이스라엘 백성들만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이방인들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것을 오해하여 그들은 단순히 선민사상에 안주했던 것이다.
의를 쫓아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 -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택한 백성들을 초자연적인 기적을 통해 구원하실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의를 쫓아'(* , 베체데크)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있어서 그 결과와 수단이 공평 무사(公平無私)할 것을 말해 준다(Kidner). 한편, '엄위하신 일'(* , 노라오트)은 원수들을 징책하기 위한 하나님의 초자연적 심판 뿐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킨다(신 8:21; 삼하 7:23; 사 64:2).그리고 '응답하시리이다'(* , 타아네누)는 미완료 시제로서 다윗 자신이하나님께 기도했던 바(2절)를 현재 응답받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을말해 준다(Keil).

=====65:6
여기서부터 마지막 절(13절)까지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권능이 이스라엘 땅에 뿐만아니라 온 세상에 미치고 있음을 진술한다. 그는 이같이 말함으로써 이방인들에게까지구원의 손길을 뻗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님을 암시한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구원자가 되실 수 있으신분임을 확증해 주는 첫 번째 증거이다. 특히 '산'은 하나님의 능력과 확고한 불변성의상징이다(Rawlinson). 그런데 다윗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주는 첫 번째의 실례로서산을 거론한 것은 산이 세상의 다른 피조물들보다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관해 보다더 강력한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Calvin).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 '띠'는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한 개인의 인격 및 신분을 대변해 주는 상징물(삼상 18:4)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친히 만물, 특히 여기서 '산'을 창조하신 것은 자신이 권능자이심을 보여주는 권능의 띠를 띤 것과 다름없다(93:1).

=====65:7
본절에서도 다윗은 6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인간의 힘이 도저히 미칠 수 없는일까지도 통제하고 계시는 분임을 진술하고 있다.
바다의 흉용(洶湧) - '흉용'(* , 쉬온)이란 말이 '황폐하게 하다'를 뜻하는 동사 '솨아'(* )에서 파생된 명사라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본 구절은 배를집어삼켰 듯 높은 파도가 큰소리를 내며 몰려드는 것을 가리킨다(사 17:13). 그런데성경은 이러한 '바다의 흉용'을 다스릴 자는 오직 하나님뿐이심을 증거한다(욥 38:8;잠 8:29; 사 51:10; 렘 5: 22; 마 8:26,27).
물결의 요동 - 문자적으로는 '그것들의 파도들의 흉용'이다. 여기서 '그것들'은'바다'를 뜻한다는 점에서 본 구절은 앞의 '바다의 흉용'과 동일한 의미이다.
만민의 훤화 - 앞의 두 구절은 자연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제력을 가리킨다. 반면본 구절은 인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훤화'(* , 하몬)는본래 '소동' 혹은 '소란'의 뜻이며 여기서는 하나님께 대한 주제넘고 건방진 반역을가리킨다(사 29:5,7,8). 그리고 '만민'은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인간을 가리킨다.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혹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만민의 '훤화'는 유사(有史) 이래로 잠시도 그치질 않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만민'의 모든 시도를 권능으로진정시켜 오셨다. 그렇게 하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권능자이심을 만천하에 여실히 드러내셨다(사 17:12-14).

=====65:8
땅 끝에 거하는 자가 주의 징조(徵兆)를 두려워하나이다 - '땅 끝에 거하는 자'란팔레스틴 지역에서 제일 멀리 떨어져 있는 곳, 곧 미지(未知)의 땅에 살았을 사람들로서 하나님을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주의 징조'란 만물에 드러나고있는 하나님의 신성(神性)과 기적적인 역사(役事)를 의미한다. 또한 '두려워하나이다'란 하나님께 대한 단순한 공포를 가리키지 않는다. 오히려 존경 혹은 경외심을 뜻할것이다(Keil).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 - 본 구절(* - , 모차에 보케르 오에레브 타르닌)은 '아침이 되는곳과 저녁이 되는 곳에서도 즐거워하게 하시며'로 번역됨이 더 낫다. 즉, 이는 '아침이 되는 곳' 곧 동쪽 끝의 사람들과 '저녁이 되는 곳' 곧 서쪽 끝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신성과 기적적 역사를 인하여 즐거워한다는 뜻이다(사 24:16). 다시 말하면 만민이하나님께서 대자연의 지배자가 되신다는 사실 때문에 즐거워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65:9
땅을 권고하사 물을 대어 - '권고하사'(* , 파카드)는 '방문하다' 혹은 '감찰하다'의 뜻이다. 따라서 이 동사는 땅의 형편을 알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오셔서 살피시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본 구절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사랑과 친절을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물을 대어'는 앞 구절과 연속적인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땅의 형편을 살피신 하나님께서 때에 따라 필요 적절한 비를내려주시는 것을 가리킨다.
심히 윤택케 하시며 - 이는 하나님께서 땅으로 하여금 많은 수확이 가능하게끔 축복하시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 강'(* , 펠레그)은 '원천'(源泉)의뜻이며, 하나님께서 필요에 따라 비를 내리시기 위하여 하늘에 물을 모아놓았다고 생각되어졌던 저수지를 가리킨다(Keil). 현대 과학적으로 본다면, 구름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물론 고대인들도 비의 원천을 하늘의 구름으로 생각했었다(왕상 18:44).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비의 원천을 '하나님의 강'으로 표현한 까닭은 강우(降雨)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 나타날수 있는 현상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저희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 본 구절에는 인간의 먹는 문제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강조되어 있다. 특히 '이같이 땅을예비하신'이란 표현은 하나님께서 땅에 필요 적절하게 비를 내리시고 비옥하게 하시어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드신 것을 가리킨다.

=====65:10
본절에는 우리가 일용할 앙식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이라는사실이 다시 언급되고 있다. 다윗의 이 같은 반복적 언급은 하나님의 자비를 간과하는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엄청난 시혜(施惠)를 받고 있음을 일깨우기위함이다(Calvin). 하나님의 자비를 알지 못하는 자들은 자연의 일반적 법칙과 자신들의 노력이 합력되어 자신들이 곡식을 얻을 수 있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 이것은 산출된 알곡에 의해서 울퉁불퉁한 밭 표면이덮여진 모양을 연상시킨다(rawlinson).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 '단비'(* , 레비빔)는 일반적으로 '소나기'를 뜻한다(72:6; 렘 14:22). 그런데 여기서는 식물이 수분을 하요로 할때 내리는비를 가리킨다. 한편, '부드럽게 하시고'는 밭 이랑에 있는 흙의 유실(流失)이 없이밭이 씨앗의 파종을 위해 부드럽게 되는 것을 뜻한다. 밭에 수분이 없으면 흙이 굳어져 딱딱하게 되어 파종해도 씨앗이 뿌리를 내리기 힘들며 또한 파종된 씨앗이 흙 표면에 노출되어 새들에게 먹히게 된다. 그런데 하나님은 파종 적기(適期)에 비를 주셔서파종된 씨가 뿌리를 내릴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시는 것이다.
그 싹에 복 주시나이다 - 싹이 잘 돋아날 수 있도록 해주심을 가리킨다. 이는 하나님께서 싹이 자랄 수 있는 모든 여건을 만드셨음을 뜻한다.

=====65:11
주의 은택으로 연사(年事)에 관 씌우시니 - 이는 하나님께서 그 해 가을에 풍년이들게 하시어 많은 익은 곡식으로 들을 아름답게 장식하실 것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연사'(* , 쉐나트)에는 정관사가 없다. 따라서 본 구절은 어떤 특정한 해에만하나님께서 '관 씌우시는' 은택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연례적(年例的)으로 항상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Calvin).
주의 길에는 기름이 떨어지며 - 본 구절을 직역하면 '당신의 길은 기름진 것을 떨어뜨리며'이다. 이말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곳에 풍성한 열매가 맺힌다는 뜻이다.특히 '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마갈레카'(* ) 지나간 흔적'이라는 의미를 지니는데, 이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강조해 준다.

=====65: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 본 구절은 인공적인 경작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곳에도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짐을 보여준다(욥 38:26) 특히 '들의 초장'은 소나 양을 먹이기에 적절한 목초지(牧草地)를 뜻하므로 본 구절은 밭의 소산뿐 아니라 가축을 위한모든 여건도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 본 구절은 문자적으로는 '작은 산들의기쁨이 스스로를 둘렀나이다'로 해석된다. 이것을 앞 구절과 연결시켜 구체적로 표현하면, 작은 산이 많은 풀로 덮이게 된것을 가리킨다.

=====65:13
초장에는 양떼가 입혔고 - 여기의 '초장'(* , 카림)은 12절의 '들의 초장'보다는 좁지만 자연적 조건이 더 나은 출발을 가리킨다. '입혔고'란 표현은 가득한것을 말한다.
골짜기는 곡식이 덮였으매 - '골짜기'는 언덕과 언덕 사이의 밭으로서, 팔레스틴에서는 중요한 경작지로 이용되었다(삼상 6:13). 여기서는 주로 밀이 경작되었다.
저희가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 - 앞절과 본절에서 '들의 초장'과 '골짜기' 등을 의인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저희'는 사람을 가리키지 않음이 분명하다.이처럼 자연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자연을 의인화시킨 경우는 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종종 발견된다(사 14:8;35:1; 55:12). 그런데 여기서 '즐거이 외치고'(* , 이트로아우)와 '노래하나이다'(* , 이쉬루)는모두 미완료 시제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 대한 자연의 찬양은 어떤 한 해에 국한되지 않고해마다 계속될 것(11절)을 시사한다(Calvin).

 

 

 

  삼라 만상(森羅萬象)의 생성과 질서를 관장하시는 하나님의 권능과 은총을 찬양하는
시로서, 마치 자상한 정원지기가 정성스레 화초를 다듬듯이 온 우주 만물을 자상히 돌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형상화되어 있다.
  이 시편의 저작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히 단언하기 힘들다. 혹자는 히스기야의  기도
가 응답됨으로 말미암아 앗수르 군대가 퇴가가한 사건을 본시의 배경이라고 보지만(사
37:30) 그 근거는 희박하다. 그보다는 표제어에 나오는 대로, 다윗이 여러 어려움들을
극복한 후에 자신의 서원을 이행하면서 이 시를 지엇다고 봄이 나을 것이다. 한편  이
시가 작시 배경상 예배 의식 혹은 축제 의식과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견해도 제기된  바
있으며, 그 구체적인 배경이 되는 의식(儀式)에 대해서는 봄에 열리는 무교절 혹은 가
을에 열리는 장막절 등 두 견해로 엇갈린다.
  또한 궁켈(Gunkel)이나 크라우스(Kraus) 같은 학자들은 이 시의 전반부(1-8절)와 후
반부(9-13절)가 내용상 어색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이유를 들어, 원래 독립된 두  개의
시편이 합해진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그러나 본문 내용을 살펴보면 하나님께 대한 감
사와 찬양이 일관성있게 전개되므로 굳이 본시의 통일성을 부인할 이유는 희박하다 하
겠다. 이제 본시를 세 부분으로 나누어(1-5절;6-8절;9-13절)  순서대로  상고해보고자
한다.
  첫째, 시인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에게 베푸시는 은총을 네  가지로  말한다(1-5
절). (1) 자녀들의 기도에 응답하시며(2절), (2) 자녀들의 죄를 용서하신다(3절), (3)
당신께 예배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며(4절), 그리고 마지막으로 (4)    당신의    자녀들을
환난에서 보호해 주신다(5절). 여기서 5절의 '구원'이란 궁극적인 면에서 보면 죄악의
세력으로부터 구원받아 하나님 나라의 복된 축복 상태로 들어가게 되는 것까지를 시사
한다. 그리고 1-5절의 핵심 단어는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비롯되는  곳인    '성전'(4
절)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이 부분은 하나님의 특별 은총에  관한    내용으로
볼 수도 있겠다. 즉, 시인은 여기서 구속주(救贖主)이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사실 성도들에게 기도 드릴 분명한 대상이 계시다는 것은 너무나도 복되다.  곤고할
때에 진심을 털어 놓고 위로를 주고 받을 수 있는 친구가 있기만 해도 그 인생은 외롭
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헛되이 듣지 아니하시고, 자녀들이
간구하는 바를 모두 응답하시어 그들의 필요를 온전히 채워주신다. 그리고 우리가  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다. 본질상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
의 주홍같이 붉은 죄를 무엇으로 깨끗이 하겠는가? 율법을 엄격히 적용하자면 죄를 범
한 자에게는 죽음이 불가피하다(롬 1:32;6:23). 그러나 하나님은 죄사함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두사 깨어진 언약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해주셧다. 뿐만 아니라 우리  인
간이 지존하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또한 실로 대단한 영광이요 축복인
것이다. 여기다 하나니은 우리를 모든 올무와 위험에서 구원해 주신다.  다윗이야말로
이 같은 은총을 누구보다도 많이 체험했었다. 그는 수많은 위기와  환난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하나님의 크신 능력으로 구출되었다. 이 같은 보호의 은총이 반드시  다윗에
게만 주어졌던 전유물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자녀들에    대하여    다윗에게
베푸셨던 보호의 은총을 지금도 동일하게 베풀어 주기 원하신다.
  둘째, 시인은 하나님이 자연 만물과 인생의 주관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주목한다(6-8
절). 다시 말해서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핵심 단
어는 '권능'(6절)이라 해도 무방하겠다. 하나님의 권능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
시고 죽은 자를 능히 살리실 수 있는 초자연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인 것을 시인은 분명
히 깨닫고 있다. 때때로 인생들은 스스로 교만하여져서,  안하  무인(眼下無人)격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스스로 존재하게 된 양 착각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살아
갈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는 근본부터 잘못된 생각이며 인생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피조물일 뿐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당신이며 인생은    하나님께
서 당신의 보전(保全) 섭리를 그치실 경우, 우리는 단 1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연 법칙을 일관되게 유지하시어 모든 우주 만물을 감찰
(監察)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인생들은 하나님을 마치  부
재 지주(不在地主) 정도로 이해한다. 즉, 조물주(造物主)가 만물을 만들고 스스로  방
관(傍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물에는 하나님의 심성이 분명히 나타나 있는
데(8절;롬1:19,20) 만물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야말로 자가 당착적  단
견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다스리고 통제 조정하시는 분이 안 계시는데 어떻게  수많은
별들이 질서 정연하게 운행되고 있겠는가?
  끝으로, 시인은 풍성한 곡식으로 인생들을 먹이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한다(9-13
절). 특히 본문은 필레스틴의 농사와 목축과 관계되는 구체적인 묘사를 세밀하고 정확
하게 보여줄 뿐만 아니라 탁월한 시적 감각을 유감없이 나타내고 있다.  땅이  스스로
수확을 내는 것도 결코 아니다. 하나님께서 씨앗에 생명을 주셨고, 그래서  30배,  60
배, 100배의 소산을 내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자연의 힘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
이 창조하신 인생들을 먹이시기 위한, 지금도 계속되는 보전의 섭리의 일환인 것이다.
다윗은 바로 이 같은 하나님의 섭리적 역사(役事)를 확신하고 있다. 그는 그러한 일반
은총을 태어나면서부터 받아왔고, 이제 죽을 때까지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깨닫고 잇었
다.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살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모든 인생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다(마 5:45).

  * 언약적 축복으로서의 아침과 저녁  본시 내용 중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
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8절)라는 구절은 창 8:22의 내용과 관계 있다. 즉,  하나
님께서는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후에 다시는 물로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으시겠다고
노아와 언약을 맺으셨다. 그리고 그 언약의 증거로서 '땅이 잇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
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창  8:22)는  약속과
'무지개'(창9:13)를 제시하셨다. 따라서 본시에서 아침과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하
는 것은 이러한 언약이 계속적으로 유지되어 오고 있음을 기뻐한다는 의미도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 즉 파종과 추수가 가능하고 계절이 순환되며 아침과 저녁이  계속 반복되는 것은 오늘날도 이 언약이 준수되어 오고 있음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심코 보내기 쉬운 하루하루와 계절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라는 사실과 함께 이 같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감지할 수 있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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