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1절
실을 수 있을 만큼 채우고 - 요셉의 마음과 관심이 항상 그의 부친과 온 가족에게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족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다한 것이다.
====44:2절
은잔을...넣고 - 베냐민에게 도둑 누명을 씌워 애굽에 억류시키기 위한 요셉의 의도적이고 계획된 행동이다. 즉 이 사건을 통해 요셉은 베냐민에 대한 형제들의 태도와형제간의 우애<43:34>를 다시 한번 확인하려 한 것이다.
===44:3절
개동시에 - 문자적으로는 아침이 밝아오자 (KJV;As soon as the morning was light)이다. 그들은 먼 길을 가야 했기 때문에 아침 일찍 출발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애굽총리의 환대와 시므온의 석방 그리고 많은 곡식을 살 수 있었으므로 아마 기쁜 마음을가지고 출발했을 것이다.
===44:4절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 70인역과 벌게이트역에는 너희가 어찌하여나의 은잔을 훔쳤느냐 는 말이 덧붙여져 있다. Modern Language Bible과 RSV도 이와같이 번역함으로써 의미를 보충하고 있는데(RSV; Why have you returned evil for good?Why have you stolen my silver cup?) 이에 따라 공동 번역도 이 말을 삽입하고 있다.
====44:5절
점치는데 쓰는 것 - 점을 치다 (divine)란 말의 나하쉬 (* )는 본래 뱀이기어 다닐 때 내는 소리를 가리키나 여기서 속삭이다 . 주문을 외우다 란 의미가 파생되었다. 이는 점(占)의 사단적 속성을 암시헤 주는데 특히 애굽에서는 술잔에 물을채우고 악령께 기도한 후 물을 관찰하여 점을 쳤다(Kalisch). 이러한 점술은 하나님의뚱과는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므로 훗날 모세 율법은 이를 엄격히 금하였다 (레 19:26;신 18:9-14). 한편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사람 요셉이 실제로 에굽의 미신적 행위인점술을 행하였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는 (1)자신이 애굽인인 양 신분을 철저히 은폐시키기 위한 목적과 (2) 애굽인들은 점치는 술잔을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짐짓 그랬을 것이다.
===44:6절
청지기가...그대로 말하니 - 우리는 여기서 유능하고 성실한 청지기상(相)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요셉이 의도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으며 요셉이 그 형제들을 대하는데 있어서도 언제나 큰 역할을 하였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 총무 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였던 것과 유사하다(39:1,2). 이와 같이 충실한 청지기의 모습은 만유의 주 되신 주님을 섬기는 성도의 역할에 대한 암시가 되기도 한다(눅 12:42).
====44:7절
이런 일은 종들이 결단코 아니하나이다 -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의 결백함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종의 말에 대하여 단호히 부인하였다.
===44:9절
뉘게서 발견되든지 그는 죽을 것이요 - 요셉의 형제들은 가나안 땅을 떠날 때 가져온 돈으로 그들의 정직성을 증명하면서 자기들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신들의 결백을 확신하면서 하였던 이 말은 요셉이 행한 시험의 중요한 초점이었다. 즉 이상황은 그들이 베냐민을 버리고도(어떤 의미에서 죽이고)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베냐민과 생사(生死)를 같이 할 정도로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44:10절
너희에게는 책망이 없으리라 - 은잔이 발견된 자에게만 개인적인 책임을 물을 뿐연대(連帶)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는 베냐민만이 도적 협의를 받고 애굽에억류케 되었을 경우 자유의 몸인 다른 형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알기 위한 조처였다.
====44:12절
나이 많은 자에게서부터 - 청지기는 가장 나이 어린 베냐민의 자루 속에 은잔이들어있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신들의 계획을 요셉의 형제들이 전혀 눈치채지 못하도록 짐짓 연장자 순으로 수색한다.
===44:13절
옷을 찢고...성으로 돌아 오니라 - 요셉의 형제들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여몹시 놀라며 슬퍼하였는데 옷을 찢는 것은 당시 근동 지방에서 자신의 극한 슬픔을 나타내는 행위였다 (37:24; 왕상 21:27). 한편 형제들은 요셉의 종의 제안에 따라 베냐민만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으나(10절) 그들은 다시 짐을 꾸려 베냐민과같이 요셉에게로 갔다. 즉 그들은 베냐민을 위하여 자신들의 자유와 생명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한 것이다.
===44:14절
유다와 그 형제들이 - 이 구절부터는 유다가 형제들을 대표하는 자격으로 자신들의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아마 유다는 재차 애굽을 방문할 때에 인솔자로 인정된 것 같다(43:1-15). 요셉이 오히려 그곳에 있는지라 - 요셉이 그의 종과 형제 사이에 진행되고 있는 일의 추이(推移)에 대하여 세심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일을 지체하지 않고 바로 처리하기 위하여 계속 집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다(Murphy). 그 앞 땅에 엎드리니 - 비록 형제들은 베냐민의 죄에 대하여 용서를 빌기 위해 요셉의 앞에 엎드렸지만 이는 요셉의 꿈이 거듭 성취되는 순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37:5-10).
====44:15절
나 같은 사람이 점 잘치는 줄을 - 애굽에서 요셉은 제사장 계급으로 형성된 상류층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잘 알려진 꿈 해몽가였음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요셉이 실제로 이방의 미신에 따라 점을 쳤다는 증거는 없다. 아마 그는 여기서도 형제들을 속이기 위하여 은잔 도난 사건을 점괘에 의하여 알게된 것인양 위장하였을 것이다(5절).그는 여기에서도 은잔 도난 사건을 점괘에 의하여 알았다고 위장한다. 그러나 요셉이이방의 미신에 따라 점을 쳤다는 증거는 없다.
===44:16절
하나님이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였으니 - 그들이 오래 전에 요셉에게 행하였던 악한행동(37:18-28)을 염두에 둔 말이다. 즉 그들은 지금 당하는 고난이 전날 요셉에게 저질렀던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으로 간주하여 자신들의 허물을 시인하고 있는 것이다(42:21,22). 다 내 주의 종이 되겠나이다 - 네가 참으로...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 (37:8)면서 요셉을 힐난하고 그의 꿈을 비웃었지만 정작 20여년이 지난 현시점에서 그들의 말그대로 요셉의 꿈이 완전히 성취되는 순간이다.이런 점에서 여호와 신앙 이란 어떠한역경과 환란 가운데서도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오늘날 성도들은 그 무엇보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거부당하고 비웃음사고 있는 복음의 진리를 굳게 파수해야 할 것이다(요이 1:10).
===44:17절
내가 결코 그리하지 아니하리라 - 유다의 제의에 대하여 요셉은 베냐민을 제외하고모두 풀어 주겠다고 말함으로써 마지막으로 그들을 시혐하였다. 그러나 야곱의 형제들은 아버지가 베냐민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기 때문에(42:36-38) 요셉의 말에 따를 수없었다. 잔이 그 손에서 발견된 자만 - 요셉의 이 제의는 형제들에게 큰 유혹이 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처자식이 딸린 몸으로서(46:8-25) 자칫하면 평생을 그들과 헤어져 먼 이국 땅에서 노예 신세로 억류될 위기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요셉은 이러한 제의에 대하여 형제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자못 궁금하면서도 초조하였을 것이다.
===44:18절
유다가 그에게 가까이 가서 기로되 - 유다가 베냐민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걸고 대국의 총리인 요셉 앞으로 나와서 간청하는 내용(18-34절)은 히브리 산문 문학 중에서도 손꼽히는 걸작이다(Inglis Kalisch). 특히 베냐민의 벌을 자기가 대신 받겠다는 희생 의지를 보이고 있는 33절은 절정에 이르는 감동스런 구절이다.
청컨대...고하게 하소서 - 유다는 요셉에게 자기를 극도로 낮추어 이야기함으로써긍휼을 얻으려 한다. 특히 원문에는 내 주여 라는 말 앞에 오 라는 감탄사가 첨가되어 있으므로 그 분위기가 더욱 선명하게 부각된다(KJV에도 Oh my Lord 로 되어 있다) 주는 바로와 같으심이니이다 - 요셉에게는 바로에 버금가는 큰 권력이 있음을 들어(41:44) 부디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는 말이다.
===44:20절
노년에 얻은 아들 소년 - 베냐민을 가리키는데 그는 야곱이 107세경에 가나안땅 에브람에서 얻은 아들이다. 이때 베냐민을 낳던 라헬은 난산 끝에 그만 죽고 말았으니(35:16-18) 야곱에게 있어서 베냐민은 아내의 생명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인 셈이다. 그 아비가 그를 사랑하나이다 - 유다의 이 말은 그 형제들이 처음에 요셉에게 했던말과 일치한다(42:13). 아뭏든 유다는 베냐민이 죽은 형과 어머니로 인하여 아버지로부터 지극한 사랑을 받고있는 자이므로 그의 죽음은 곧 아비의 죽음과 같다는 점을 들어 요셉에게 자비를 구하고 있다.
====44:22절
그 아이 - 이와 유사한 표현으로 아우 (19절), 소년 (20절), 말째 아우 (23절), 아이 (30절) 등이 있는데 모두 다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뜨거운 애정을 함축하고 있다. 떠나뗘 아비가 죽겠나이다 - 야곱과 베냐민의 관계가 갖는 의미로 핵심을 찌르는 문학적 표현이다.
===44:23절
함께 내려오지 아니하면... - 야곱의 생명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는 베냐민을 요셉에게로 데려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요셉의 준엄한 명령 때문이 었음을 상기시켜 선처를 구하고 있는 장면이다.
====44:24절
주의 종 우리 아비 - 비록 유다가 은연중이었을지라도 거듭 아버지 야곱을 요셉의종으로 칭하고 있는 점은 요셉의 꿈을 확정해 준다<43:28>.
====44:27절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 여기서 내 아내 는 라헬 을 가리킨다.라헬은 야곱에게서 가장 총애를 받았다. 또한 두 아들 은 요셉과 베냐민을 가리킨다(46:19).
===44:28절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 야곱은 요셉이 광야에 있는 맹수에 의해서 찢겨 죽은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37:33). 이 말을 통하여 요셉은 야곱이 자기 때문에 상심했음을간접적으로 확인하였다.
====44:29절
나의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 늙은 자기 몸이 슬프게 죽을 것이라는 문학적 표현이다<42:38>.
====44:30절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 문자적으로는 영혼 속에 영혼이 묶여 있거늘 . 아비 야곱과 아들 베냐민과의 끊지 못할 유대성을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말이다.
====44:32절
아이를 담보하기를... - 베냐민의 신변에 일어날지도 모를 불상사에 대하여서는 유다 자신이 평생 동안 책임을 지기로 약조한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유다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베냐민의 신변을 안전하게 지켜야 하였다.
====44:33절
아이를 대신하여 - 야곱에대한 효심에서 뿐 아니라 베냐민에 대한 뜨거운 형제애에서 우러나온 자기 희생적인 제안이다. 이는 곧 요셉이 형들에게서 찾아보기를 기대한마음이자 자세였으니 이로써 요셉의 시험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 하겠다<2절>.이처럼 아무리 풀기 어려운 인간사(人間事)라 할지라도 어느 한편이 자기 희생을 감수하려고만 든다면 봄눈 녹듯이 쉽게 해결될 것이다.그러나 오늘날 사랑을 수반하지 않는 꽹과리 같은 말만 난무하는 시대이니 각자 자신부터 유다의 행동 의지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약 2:15,16).
===44:34절
두렵건대(* , 펜) - ...하지 않도록 , ...하지 않기 위하여 란 뜻이다. 이는 어떠한 일에 대한 정중하면서도 간절한 소원을 아뢸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유다의화급한 심정을 잘 나타내 준다.
본장은 42장에서부터 계속되어 온 요셉과 형들 간의 숨막히는 만남과 시험, 갈등이이제 그 절정을 이루는 장이다. 즉 지금까지 요셉은 형제들과 두어 차례의 접촉을 가졌으나, 진정한 만남의 기쁨을 나누지는 못했었다. 따라서 이제 요셉은 그 같은 장애를 깨뜨리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 하는데, 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형제간의 우애를 확인하기 위한 시험을 행한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15절은 요셉이 계획된 은잔 시험을 실시하는 부분이다. 즉 요셉은 이를 통해 베냐민에 대한 형들의 우애를 확인해 보려 한 것이다. 그리고 16-34절은 베냐민을 위해 유다가 자기 희생적인 탄원을 하는 부분이다. 즉 유다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베냐민을 보호하여 아비 야곱에게 행한 약속을 지키려 한 것이다(43:9).
형제를 대표한 이상과 같은 유다의 희생 정신은 마침내 요셉을 크게 감동시킨다. 그리고 이로써 그동안 요셉과 형제들 간에 가로놓여 있던 갈등과 긴장, 반목의 벽은 무너지고 위대한 화합과 일치의 역사가 일어난다(45:1-15). 여기서 우리는 오늘날 반목과 질시, 각종 다툼으로 갈기갈기 분열되어 있는 인간 관계들이 하나될 수 있는 근본 정신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된다. 그것은 요셉과 그의 11형제들이 보여 준 사랑과 용서, 희생과 양보 정신이다. 자기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하는 바로 '밀알 정신'이다(요 12:24).
1. 요셉이 준비한 마지막 시험(44:1-13)
본문은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자신의 요구(42:20)를 만족시킨 형들에 대하여, 이제는 요셉이 형제간의 우애를 알아보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은잔 시험을 실시하는 단락이다. 그중 1-3절은 사전 시험 준비를 다 끝내 놓은 요셉이 형제들의 가나안 귀환을 허용하는 부분이다. 그리고 4-9절은 얼마후 요셉이 청지기를 보내 형제들을 따라 잡은 후 은잔이 없어진 것에 대하여 항의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10-13절은 베냐민의 자루에서 문제의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이 방성 대곡하며 요셉의 집으로 되돌아오는 부분이다. 아마 가나안을 향한 요셉 형제들의 2차 귀향은 볼모로 잡힌 시므온으로 인한 암울한 상태의 1차 귀향과는 달리 모든 형제들이 함께 돌아간다는 사실로 대단한 즐거움에 차 있었을 것이다(42:24,25). 그러나 이제 그 같은 기쁨은 커다란 절망 가운데 묻혀 버리고 만 셈이다.
인간은 자신의 의지(意志)와 관계없이 닥쳐오는 불운에 대해서 마땅한 대응책을 찾지 못하면, 이러한 상황을 내린 하나님을 저주하게 된다. 실제로 자신의 결백과는 달리 꼼짝없이 누명을 쓰게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 자신의 운명이라고 체념할 것인가, 아니면 불의에 맞서 싸울 것인가? 이 문제는 특히 오늘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에게 빈번히 발생하는 문제이다. 성경은 이 문제를 안고 살아 간 전형적 인물로 욥을 내세운다. 그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다 당하였지만(욥 1:13-19 ;2:7-9), 결코 그의 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간의 철학적 산물인 운명을 극복함으로써 신앙의 궁극적 승리를 보여 준 산 증인이 되었다.
한편, 요셉이 형제들을 그토록 난관에 빠뜨리려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결코 자신이 당한 과거의 치욕을 갚으려는 철저한 보복 심리에서가 아니었다. 요셉은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었으며(45:4-15), 자신이 이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당장 형제들을 만나고 싶은 충동마저 억제해야 됨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시험은 자신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베냐민을 버리고도 돌아갈 것인지, 아니면 진심으로 베냐민과 생사를 같이 할 정도로 과거를 뉘우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던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셉이 내린 시험은 예수의 사역을 연상케 한다. 즉 예수께서는 당신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모든 인간적 욕구를 억제해야만 했으며, 때가 이를 때까지 당신의 메시야성이 밝혀지기를 그토록 거부하셨던 것이다(마 12:16 ;막1:45 ;3:12 ;8:30 ;눈4:41 ;9:21).
아뭏든 시험을 받아 곤경에 처했음에도 하나로 뭉친 요셉 형제들의 신앙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자신의 모든 욕구를 눈물로 억제한 요셉의 신앙이 합해져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이 구속사에 등장할 수 있었다. 오늘날 신약의 성도들은 구속사의 흐름에 새로이 등장한 주인공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은총을 베풀기 위해 자신의 모든 욕구를 억제하셨음을 기억한다면, 성도들도 현재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신앙으로 견뎌내는 자세를 견지(堅持)해야 한다.
* 고대 애굽의 점술(占術). 고대 애굽인들 뿐 아니라 근동의 여러 지역에서는 대부분 점술을 신뢰했다. 애굽의 궁정에는 상당수의 술객, 박수들이 있었으며(출 7:22), 그들의 영향력은 애굽의 모든 영역에 미쳤다. 요셉의 등용 배경이 출중한 학문이나 군사력에 있지 않고 단지 기막힌 꿈풀이에 있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애굽 상층 계급의 점술 신뢰도가 어느 정도인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본문에는 점술의 한 도구로 '은잔'이 나온다. 이것은 아직도 애굽과 누비아(Nubia)에서 사용되는 것으로, 은잔에 금조각이나 보석을 던져 그 물결이 이는 모양을 보고 신의 계시를 알 수 있다 한다. 이방법은 당시 애굽에서 널리 사용된 점술이었으며, 애굽 상류층에 상당한 영향력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점술은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으로 독실한 여호와 신앙을 가진 요셉이 이 점을 쳤을 리 만무하다. 아마 본문에서는 그에게 부여된 총리 직분과 연결시켜 그가 애굽인이라는 확고한 사실을 형제들에게 주지시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점을 잘 치는 사람인 양 이야기 되었을 것이다(5,15절). 결국 애굽에 점술 행위가 만연함으로 요셉이 빠른 출세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의 한 방편이었다.
2. 유다의 감동적인 변론(44:14-34)
본문은 형제간의 우애를 시험해 보려 한 요셉을 크게 감동시킨 유다의 감동적인 변론이다. 학자들은 이 변론이야말로 구약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수사학이라고 극찬한다. 한때 가나안 여인과 부도덕한 관계에 빠진 유다(38장)가 이처럼 힘찬 신앙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야곱 일가의 실질적 가장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여기서 유다의 대변론의 힘은 그 진실에 있었다. 만일 거짓을 말하여 순간의 상황에 대처하려는 세상의 지혜대로 행동했었더라면, 그의 논리는 요셉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이스라엘을 애굽에 보내 진실한 선민으로 훈련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 더 뒤로 미루어졌을 것이다.
이러한 유다의 대변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먼저는 자신들이 현재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과정을 상술하는 부분이다(16-26절). 다음은 베냐민을 노예로 삼기보다 자신을 노예로 삼아 달라고 간청하는 부분이다(27-34절). 결국 유다의 이 자기 희생적 탄원은 요셉의 마음을 크게 감동시켜 마침내 마지막 테스트를 통과하게 했다. 이 변론이 주는 교훈은 첫째,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승리의 길이라는 기독교의 역설적 진리(43:14 ;에 4:16 ;마 10:39)를 보여 줌과 둘째, 사랑과 진실에 근거할 때에 진정 힘있는 말을 전할 수 있으며, 그럴 때만이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로 진실은 모든 인간 관계의 근본이 된다(롬 12:10 ;요일 4:20).
* 성도의 살신 성인(殺身成仁). 유다가 요셉에게 "청컨대 주의 종으로 아이를 대신하여 있어서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아이는 형제와 함께 도로 올려 보내소서"(33절)라고 말한것은 자기의 생명을 내어 놓고서라도 아버지 야곱의 뜻을 이루고 베냐민을 구해 내겠다는 자기 희생적 제안이었다. 그런데 생명은 인간이 뛰어 넘을 수 없는 마지막 영역이요, 양보할 수 없는 존재의 바탕이다. 이런 면에서 모든 인간이 생명에 집착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생명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자칫 남의 생명을 경시하여 경쟁 사회 속에서 '남을 이겨야 자신이 존재한다'는 식의 약육 강식의 논리로 발전할 우려가 있다. 이런 사회 속에서 즉, 경쟁에 뒤져 언제 도태될지 알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인간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생명을 지키는 것만이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님을 말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눅 17:33)는 말씀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의를 위해 생명을 던지는 자가 가장 보람된 삶을 살 수 있음을 설명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자신의 생명을 버리심으로 수많은 인간에게 구원의 길을 터놓으셨다. 그리하여 진정 그는 죽음을 이기신 자시요,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되셨던 것이다(요11:25, 26).
오늘의 시대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죽이는 희생적 삶을 살지 못해 죄악으로 뒤덮여 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투쟁과 불신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를 복된 사회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살신 성인의 도를 온전히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먼저 나 자신부터 '죽는 삶'을 사는 것이다(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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