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ip to content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9:1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 축복의 유일한 '주체자'(엘로힘)는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인간은 언약에 근거한 복을 받는 객체에 불과할 뿐임을 보여 준다. 즉 하나님께선 아담에게 주셨던 원시 복음(3:15)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준 것과 동일한 축복(1:28)을 인류의 새 조상인 노아 가족들에게 주신 것이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 자신의 심중에 결심하셨던 바(8:21)를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장면이다. 이로써 인류에 대해 갖고 게셨던 하나님의 구원 게획은 더욱더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었다(8-17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 혹자는 1:28과는 달리 '땅을 정복하라'는 명령이 생략된 것에 대해 주목한다. 그리고 그 까닭에 대해 하나님께서 범죄한 인간들로부터 땅을 정복할수 있는 권한을 거두어 가셨기 때문으로 이해한다. 이는 타락한 인류와 함께 고통을 겪고있는 만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될 날만 고대하고 있다는 가르침(사 6:1-9; 롬 8:18-23)에 부합된다. 따라서 비록 땅이 부단히 정복되어가고 있는 점은 부인될 수 없지만 피조계에 대한 원초적 지배권(정복권)을 박탈당한 인간은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대로 자연계를 온전히 회복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계의 온전한회복은 오직 여인의 후손,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만 가능할 것이다(엡 1:22).

9:2
바다의 모든 고기가 - 노아 홍수시에 물고기도 그 종류대로 보존되었다거나 아니면 전멸되었다는 언급이 없었는데 여기서 다시금 물고기가 등장한다. 이는 (1)본래 물에서 살도록 지음 받은 생명체이므로 홍수 심판시에도 자연히 생명을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2)또한 인간과 함께 땅을 생활 터전으로 삼던 뭇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의 죄책(罪責)에 비교적 영향을 받지 않은 생명체였으므로 심판의 대상에서 유보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뭏든 여기서 물고기까지 언급된 것은 인간을 제외한 살아 움직이는 모든 생명체를 가리키기 위함이다.
너희들 - 노아 가족만이 아닌 오고 오는 세대에 걸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두려워하며...무서워하리니 - 아담의 범죄 이전에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 간에 아름다운 공존 관계가 유지되었으나(2:19) 타락 이후 이제는 하등 피조물들이 인간 권위에 도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인간과 뭇 짐승들 간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에게 심어 주신 인간을 향한 본능적 두려움에 의해서만 서로의 관계가유지될 수 있음을 시사해 준다. 한편 여기서 '두려워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모라'(* )는 '야레'(깜짝 놀라다, 도덕적으로 경외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동물들에게 주신 생득적(生得的) '공포'를 의미한다. 그리고 '무서워하다'에 해당하는 '하타트'(* )는 '위축시키다', '위협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것으로 인간들로부터 당한 무서운 경험에 의해 후천적으로 취득케 된
'두려움', '불안감'을 의미한다.
이들은 너희 손에 붙이웠음이라 -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타락 이후 이제는영적 권위로는 더 이상 동물계를 지배할 수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 내리신 명령과 권위, 배후에서 역사하신 섭리에 의해서 계속해서 지배할 수 있음을 뜻한다. 일부 동물들을 가축으로 길들여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 좋은 예이다.

9:3
산동물 - 인간에게 육식(肉食)을 허용하고 있는 최초 구절이다. 그러나 '산 동물'이라고 제한하여 다른 짐승에 의해 찢겼거나 이미 죽은 것은 모두 제외하고 있는데 이러한 규정은 훗날 율법화되었다(출 22:31; 레 22:8). 이는 시체를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던 히브리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였다(민 19:16).
채소같이...너희에게 주노라 - 채소에 덧붙여 이제 동물도 인간의 음식이 될 수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정확히 언제부터 육식이 허용되었는가에 대해선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1)홍수로 말미암아 땅이 황폐해진 결과 식물이 부족하자 비로소 육식이 허용되었다(Rosenmuller, Clarke, Kalisch). (2)처음부터 허용되었으나 인간의 신체 구조상 채식이 적합하였으므로 스스로 먹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홍수후 연약해진 신체의 변화로 인해 육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Pererius, Aquinas, Luther). (3)타락 전에도 육식이 허용되었으나 여기서 그 허가가 새롭게 갱신된 것이다(Calvin,Bush, Lange).
아뭏든 분명한 사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것이 공식적으로 허용되었다는 점인데(Keil, Alford) 이는 홍수 사건 이후 인간과 피조 세계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음을 예시해 준다(1-7절강해).

9:4
그 생명되는 피 - 생명체가 일정량 이상의 피를 흘리면 죽게 되는 것을 볼 때 생명과 피는 불가분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자명하다. 그러므로 성경은 피를 생명과 동일시 여기고, 더 나아가 영혼이 거하는 처소로까지 묘사한다 (레 17:11,14). 따라서 고기를 피 채 먹지 말라는 명령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1)모든 생명은 창조주 하나님의 것이므로 인간이 그 주권을 절대 침해할 수 없다. (2)비록 짐승의 피일망정 피를 흘리고 먹는 일이 습관화되면 자연히 사람의 생명까지도 경시될 우려가 있다. 따라서 모든 생명의 존엄성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다(Calvin).
먹지 말 것이니라(* , 로 토켈루) - '아칼'(먹다, 소비하다)의 미완료형 부정 명령으로 영원토록 먹지 말라는 의미이다. 즉 이 명령은 노아 당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 걸쳐 전인류가 지켜야 할 명령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모세 율법도 피를 먹지 못하도록 엄히 규정하였고 (레 3:17;17:21;신 12:25;15:23), 초대 교회에도 이방인 개종자들이 피를 먹는것은 금하였던 것이다(행 15:20, 29). 물론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자유를 얻은 성도들은 율법을 자구적(字句的)으로 준수하여야 하는 의무에서부터 자유하긴 하나(롬 3:28) 이러한 명령을 주신 근본 취지와 정신만은 영원토록 존중하여야 할 것이다(롬 3:31; 고전 8:1-13).

9:5
반드시 - 문자적 뜻은 '왜냐하면', 그러나 여기선 인과적 의미보다 제한적 의미가 강하므로 '반드시'(surely)로 번역하는 것이 보다 자연스럽다. 즉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해 인간 생명을 해친 자는 사람과 짐승을 막론하고그 피에 대한 책임을 꼭 묻겠다는 뜻이다.
너희 피...찾으리니 - 여기서 '찾는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리쉬'(* )는 '추적하다', '조사하다', '탐구하다'(신 12;30; 스10:16)는 뜻이다. 따라서 본절은 하나님께서 인간생명을 해치는 일에 대해서는 그것을 그냥 넘기지 않으시고 끝까지 추적하여 징벌하시겠다는 강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짐승이면 그 짐승에게서 - 모세 율법은 이에 대한 세부 규정을 기술해 놓았다(출21:28,29). 그런데 짐승은 영혼이 없는 존재로 율법 조항에 대한 책 임을 물을 수 없는 미물이니 짐승을 처벌하는 것은 오히려 인간들에게 경고 를 주기 위함으로 이해된다.
사람이나 사람의 형제면 그에게서 - 직역하면 '사람의 손 곧 모든 사람의 형제의 손에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사람이 같은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에게도'(공동번역)이다.

9:6
사람의 피를 흘리면 - 여기서 '흘리다' 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솨파크'(* )는 '소비하다', '붓다'(시 69:24; 호5:10)는 뜻으로 우연한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죽인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자에 대해선 반드시 보수하셨으나 우연한 실수로 사람의 피를 흘린 자에 대해선
그 생명을 보존토록 특별히 조처하셨다(출 21:13; 민 35:11-15).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 정확한 번역은 '사람에 의해 그 피를 흘릴 것이라', 즉 피의 보복을 하되 가인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직접하시 는 것이 아니라(4:18-12) 재판권을 사람에게 맡겨 간접적으로 시행하시겠다는 뜻이다. 모세시대에는 이것이 고엘(갚는 자, 피의보복자) 제도로 성문화되어
나타난다(민 35:19; 신 19:12). 그런데 이것이 살인자에 대하여 개인적으로 복 수할 수 있다는 근거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십게명은 개인으로서의 살인 을 엄격히 금하고 있다(출 20:13).
자기 형상대로...지었음이니라 -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원천적으로 설명해 주는 말이다(1:26,27). 물론 인간 타락으로 인해 그 같은 하나님의 형상은 많 이 훼손되었지만 그래도 완전히 소멸되지 않고 부분적으로 남아 있어 하나님과의 교제시 그접촉점(Contact point)을 이룬다(롬 1:19). 그러므로 인간을살해하는 것은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상해(傷害)하며 그분을 모독하는 하나님의 형상 파괴죄가 된다. 한편 여기서 '형상'(히,첼렘)은 주로 성질상에 있어서 의 유사성을 가리키는 말이지만(5:3) 인간의 육체 역시 하나님의 영광이 깃들기에 합당하도록 존귀하고 품위있게) 구성되었음을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말이다.

9:7
그 중에서 번성하라 - 6절과 대조되는 구절로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퇴락치 아니하고 번성하기를, 그리고 그들에게 형벌 대신 축복 주시기를 원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또한 이는 인간이 허무하게 살해당해서는 안되는 존귀한 존재이며 나아가 번성하고 땅에 편만하여 그 어떠한 삶의 현장에서도 하
나님의 기쁘신 뜻을 펼쳐 드려야 할 자들임을 시사해 준다(롬 12:2).

9:8
하나님(* ,엘로힘) - 우주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강조하는 이 명칭(1:1)이 거듭 사용된 것(1절)은 하나님이 노아와 그 가족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9,10절)과 무조건적인 언약을 체결하셨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9:9
내가 - 언약의 주체자가 바로 하나님자신이심을 역설하는 말이다. 즉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언약을 베푸시고 그대로 실행할 것임을 강조해 주는데 이것은 피조물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의 증거이다.
언약 - 본래는 상호동등한 입장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계약으로 어느쪽이든 이를 어길 때에는 그에 준하는 보응이 따르기 마련이다(6:18).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언약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무조건적인 언약이다(8-17절 강해)

9:10
세우리니 - 본장에서는 언약을 '세우는 것'을 가리키는 각기 다른 세 종류의 히브리어가 사용되었다. (1)'쿰'(* ):본절(원문상에는 9절)과 11, 17절에 나오는데 타락한 세상을 회복시키며 유지하는 언약의 기능을 강조하는 말이다. (2)'나탄'(* ):12절에 나오는데 언약이 하나님의 무조건적 은혜에 의해 주어졌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3)'자카르'(* ):15절에서 '기억하다'로 번역된 단어로 언약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9:11
다시는...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 여기서 '홍수'(* ,마불)에 정관사(* ,하)가 붙은 것은 다시는 '그 홍수', 즉 노아홍수와 같은 세계적인 대홍수가 없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국지적인 홍수가 자주발생 한다 하여 이를 하나님의 언약에 상치되는 것으로 오해하여서는 안 된다
(8:21).

9:12
영세까지 - 직역하면 '숨겨진 세대에까지'. 이는 비록 인간들에계는 장래의 모든일이 숨겨진 비밀처럼 알 수 없는 것이나 하나님께서는 그에 대해서 낱낱이 아시고 미리 그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계심을 나타내 준다(엡 1:3-10).
증거(* , 오트) - '우트'(오다,나타내다. 동의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곧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대해 보증하시고 그 언약과 함께 하심을 명백히 나타내는 '신호물','표시', '전조'(前兆)등을 의미한다.

9:13
무지개 - 이것이 이전까지는 없었으나 노아와의 언약 후 비로소 생겨났는지 그 이전부터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1)하나님의 천지창조 사역의 성격과 (2)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실 때에도 기존의 별을두고 맹세하신 것(15:5)에 근거할 때 무지개는 기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Calvin, Kalisch, Lange).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천지 만물은 자신의 언약시 중표로 삼으시거나(신 4:26; 3:28;시 19:1) 신령한 진리를 보여 주는 도구로 삼으시곤 하신다(마 6:26-30). 아마 그 이유는 당신이 친히 창조하신 천지 만물은 당신의 실천적 행위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언약의 증거 -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주신 모든 언약은 그 본질에 있어 영원 불변하다(6:18). 그러나 그것이 주어지는 형식과 증거는 시대를 따라 형태를 달리한다. 아담의 타락으로인해 생명이 단절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여자의 후손이란 약속을 주셨고(3:15) 모세시대에는 모세 같은 선지자의
약속을 주셨다(신18:15). 그리고 왕국시대에는 다윗의 위(位)를 이을 영원한 왕에 대한 약속을(삼하 7:12),이사야 시대에는 고난 받는 종의 약속을 주셨다(사 42, 53장). 그런데 여기서는 무지개 언약을 주심으로 물 심판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하고계시니 결국 이 모든 언약의 증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징
(表徵)이자 기독교 언약의 그림자인것을 알 수 있다(8-17절 강해).

9:14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 직역하면 '구름의 구름을 땅 위에 모을 때에', 이처럼 많은 구름이 한 지역에 모인다는 것은 곧 큰비가 내릴 전조이다(삿5:4;왕상 18:44,45; 시 77:17).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를 보고서 또다시 노아 홍수 같은 물심판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해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염려에서 자유토록 하기 위해 주신 보호의 증표가 곧 무지개이다.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 무지걔는 주로 소나기가 그친 후 찬란한 햇살이 비취기 시작할 때 목격된다. 그 까닭은 무지개가 형성되는 데 반드시 햇빛과 자욱한 안개 또는 물방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절도 이러한 사실에 근거한 표현으로 햇살을 등진 맞은편 구름가운뎨 무지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구름을 인간 죄악으로 말미암아 찾아든 각종 환난과 질고로(3:16-9), 무지개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참된 평안과 영원 한 안식을 상징하는 것(요 3:16-18)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더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8-17절 강해).

9:15
다시는 물이...홍수가 되지 아니할 지라 - 직역하면 '홍수를 위한 물이 다시 있지 아니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세상 종말에는 물이 아닌 불로써 온 우주를 심판하실 것이란 점이다(벧후 3:10). 이 같은 심판이 지니는 성격이 어떠할 런지는 소돔 성에 임한 국지적인 유황불 심판만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데 성도들은 영적으로 항상 깨어 있어 이 같은 심판 중에서도 마치 물 심판 때 구원을 얻은 노아 가족들처럼 하나님의 구원의 장중에 온전히 붙들림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벧후 3:12-14).

9:16
보고(* , 라아) - 힐끔 쳐다보고 지나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주목하여 살펴보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31:42;민 13:18) 하나님의 세밀한 주의력과 관심을 표명해 준다.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말이 ]5절에 이어 반복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을 언제나 신실하게 준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이다. 한편 언약의 징표인 무지개가 홍수를 막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영원한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있는 것은 십가가에서 흘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가 하나님의 진노를 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그 피 공로를 덧입기만 하면 하나님의 진노에서부터 자유하게 될 것이다(요일 1:7).

9:17
또 이르시되 - 스스로에게 다시금 다짐하실 뿐 아니라(공동 번역) 노아에게 재차 공식적으로 확언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증과 맹세는 비단 노아 뿐 아니라 홍수 후 전 인류가 그 어떠한 상황 가운데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믿음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9:18
함은 가나안의 아비라 - 노아의 여러손자들 중 특별히 가나안만 그의 아비와 관련하여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함이 실수한 결과 저주를 받게 될 인물(24,25절)로서 향후 전개 되는 성경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9:19
퍼지니라(* ,나파츠) - 원뜻은 '산산이 때려 부수다'(삿 7:19; 시 2:9). '흩 뿌리다'로 이 말은 노아의 후손들이 마치 잘 익은 봉숭아 꽃씨가 터져 사면에 흩어지듯 세상구석 구석에까지 확산, 정착해 살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이는 '땅에 충만하라(1절)는 하나님의 축복의 성취인데 노아와 그 가족
들은 아담과 거의 비슷한 상황 가운데(1:27,28) 종족을 번성시켜 나갔다.

9:20
노아가 농업을 시작하여 - 직역하면 '땅의 사람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기시작하였다', 이는 노아가 인류 최초의 농부였다든지 그때야 비로소 포도 재배가 이루어졌다는 뜻은 아니다. 아담도 토지를 경작하였고(3:23) 가인도 땅의 소출을 수확하던 자였다(3:23) 가인도 땅의 소출을 수확하던 자였다(4:2,3) 다 만 이는 홍수 이후 황폐해진 땅을 노아가 다시금 경작하기 시작하였다는 뜻이다.
포도나무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케렘'()은 복수(plural)의 의미로 많은 포도나무를 가리킨다. 아라랏 산의 위치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지역(8:4) 서북편에는 넓은 야산 지대가 있는데 이곳은 실제로 고대의 유명한 포도 생산지였다.

9:21
포도주를 마시고 - 포도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야인'(* )은 일종의 '발효된 포도즙'을 가리키는 상용어이다(레 10:9; 시 60:3; 사 22:13; 욥 1:5).그런데 여기에 정관사 '하'(the)가 붙은 것은 노아가 그 같은 포도주에 이미 익숙해 있었음을 나타내 준다(Kalisch).
취하여(* , 솨카르) - '잔뜩 마시다'는 뜻으로 자신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만취된 것을 의미한다. 바로 여기에 노아의 잘못이 있는데 사실 그가 포도주를 마신것 자체는 아무런 잘못일 수 없다(18-29절 강해). 왜냐하면 순수한 자연수를 구하기 어려웠던 히브리인들은 일상 생활시에 포도주를 음료수로 사용하였으며 하나님께 전제(奠祭)를 드릴 때에도 제물로 삼았었기 때문이다(출 29:40; 레 23:13). 그러기에 성경도 이를 과다 섭취할 때에 따 르는 폐단에 대하여서만 엄히 경고하고 있다(잠 23:20,21; 사 20:1; 28:7; 엡5:18).
벌거벗은지라 - 직역하면 '그 자신을 벗었다'(he suncobered himself)로 스스로 옷을 벗어버려 알몸을 드러낸 것2 뜻한다. 당대에 완전한 자로 하나님께 인정받았던 노아도 이처럼 잠깐의 방만(放漫)한 자세로 인해 시험에 빠진 것은 우리성도들이 한순간이라도 영적 긴장을 풀어서는 안됨을 교훈해 준
다(마 26:41; 벧전 5:8).

9:22
'하체' - '하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에르와'(* )는 '벗게 하다','발가벗기다'란 뜻을 가진 '아라'에서 파생된 말로, 넓은 의미로는 벌거벗은 상태를 가리키나 좁은 의미로는 사타구니 부분의 성기를 가리킨다. 타락전 순결한 기쁨의 상징이었던 이것이 아담 범죄이후 수치(3:7;신24:1)와 불결함(애1:8)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보고(* ,라아) - 단순히 힐끗 지나쳐 보았다는 뜻이 아니고 만족스럽게 응시하였음을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함의 실수는 아비의 하체를 본 그 자체에 있지 아니하고 그것을 보고 악의적으로 즐긴 데 있음을 시사해 준다.
두 형제에게 고하매 - 보다더 적극적이고 경박스런 함의 죄이다. 정상적인 부자간(父子間)이라면 아들이 아비의 허물을 덮어 주는 것이 상례인테 함은 형제들까지도 아비의 수치를 목격하고 쾌감을 느끼도록 충동질한 것이다. 이처럼 범죄자들은 남들도 자신의 범죄에 가담토록 강요함으로써 동질감콰 심리적 안정감을 얻으려는 경향이 있다.

9:23
옷을 취하여 - 옷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시믈라'(* )는 주로 겉옷(garment)을 가리키는데(신 10:18;삿 8:25; 룻 3:3) 때로는 덮개나 보자기를 가리키기도 한다(삼상 21:9). 그런데 여기에 정관사 '하'가 붙은 것을 볼 때 셈과 야벳이 취한 옷은 노아가 벗어 아무렇게나 놓아 두었딘 바로 그 옷일 수도 있다
뒷걸음쳐 들어가서 - 아비의 수치를 보지 아니하고 덮어 주려는 조심스럽고도 사려깊은 행동이다. 이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는 최초 효도의 예로서 비록 십계명으로 성문화(成文化)되지 않았을지라도 부모에 대한 존중은 인간이 지녀야 할 기본 도덕률임을 교훈해 준다(출 20:12). 한편 다른 사람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고 가려 주는 행위는 성도가 지녀야 할 당연한 태도인데 왜냐하면 성도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죄로 인한 허물과 수치를 가리움 받은 자들이기 때문이다(18-29절 강해).

9:24
작은 아들 - 22절을 볼 때 이 자는 함인것 같다. 그러나 혹자는 가나안으로 보기도 하는데(Poole,Inglis, Lewis) 이는 25절에서 가나안이 저주받고 있는 점에 근거한 견해이다.

9:25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 난해 구절중의 하나로 아비의 하체를 조롱한 함의 범죄가 왜 그의 아들 가나안의 저주와 연결되었는가하는 의문점이 제기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1)함이 받을 형벌의 가혹함을 더하기 위하여 가나안으로 대표되는 그의 후손들을 저주하였다(Calvin, Lange)
(2)노아는 예언의 은사를 통하여 장차 가나안족이 징계를 받게 될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Theodoret, Willet)
(3)가나안이 노아의 수치를 처음 목격하고 그 사실을 함에게고한 진짜 범죄의 하수인이요 공범자였다(Aben Ezra, Poole, Jamieson)
(4)함이 노아의 막내 아들인것같이 가나안도 함의 막내 아들이므로 같은 원리로 저주받았다(Hoffman, Delitzsch)
(5)당시 가나안도 이미 그의 아버지의 불경건함과 죄악을 답습하고 있었다(Ambrose, Keil).
아뭏튼 함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아들이 저주받은 것은 자신이 저주받은 것 이상의 형벌이었고, 또한 자신의 미래는 아들 가나안의 미래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함은 가나안과 함께 복합적으로 저주를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종들의 종 - 최상급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가장 비천한 종'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용례로는 '신의 신'(신 10:17) '왕 중 왕','노래중의 노래'등이 있다. 한편 이 저주는 역사속에서 그대로 성취되어 가나안 족속은 여호수아 시대에 셈족인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가장 비천한 종의 형태로 전락되었고(수 9:23), 그 나머지는 솔로몬 시대에 완전 정복당했다(왕상 9:20,21). 그후에도 칼타고인이나 애굽인들과 같은 가나안 족속들은 페르샤 인, 마게도냐인, 로마인 등과 같은 야벳 족속들에 의해 계속 철저히 정복당하였다(Keil).

9:26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 '찬송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바라크'(* )가 사람에게 적용되면 '그를 축복하다'는 뜻이 된다(신28:6;룻 3:10). 따라서 본절은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셈에게 측복 베푸시기를 원한다는 함축적 의미를 지닌다.
셈의 하나님 - 귀하고 특수한 것이나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에 대하여 얘기하고자 할 때 먼저 하나님과 연관지어 사고하며 발언하는 히브리인들의 관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신 33:20).

9:27
야벳을 창대케 하사 - 문자적 뜻은 '야벳에게 넓은 공간을 주사',이 말은 비단 야벳족속의 영토와 인구 뿐 아니라 문명, 문화에도 관계된 것인데 참으로 구라파의 문화와 과학,희랍의 철학, 로마의 법정신 등은 야벳의 후손들에 의해 이룩되었다.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 이 말은 야벳 족속이 셈 족속을 지배하게 되리라는 뜻이 아니다. 이는 그들이 종교적으로 셈 족속의 영향을 받게 될 것이란 뜻이다. 야벳이 셈의 종교적 축복에 동참하게 되리라는 뜻이다(Calvin, Keil, Lange). 실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여자의 후손'에 대한 약속(3:15)은 후일 셈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나셨고 그로 말미암아 복음이 온 누리에 퍼짐으로써 성취되었다. 한편 함 족속 역시 비록 종의 신세로나마 셈과 야벳의 장막에 거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배제당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오늘날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얻을 수 있는 것이다(요 3:16).

 

 

   홍수 심판 후 새로운 관계에 들어선 인간과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된 본장은 전반부(1-17절)에서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규례 및 언약을 받고 무지개를 언약의 증표로 받는 등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과 더불어 재출발 하지만, 결국 후반부(18-29절)에서 볼 수 있듯이 인간의 근본적인 죄악으로 또 다시 실패의 역사가  반복되는  서글픈 장면을 서술하고 있다.
   1-7절에서 하나님은 선택한 노아의 가족에게 새로운 세계에서 적응할 수 있도록 모든 축복을 아끼지 않는다. 즉 모든 짐승에 대한 권위(2절), 식물의 공급(3절)과  아울러 새 세계의 질서에 맞는 주의 사항(4,5절)까지 세밀하게 제시해 준다. 이는  인간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소망이 얼마나 절실한가를 잘 나타내 준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하나님께서 약속의 증표로 주신 무지개라는 매개물을 통해 더욱 확실해진다(8-17절).
   불안과 염려에 싸인 인생에게 믿음을 주는 이 무지개는 사실 하나님 사랑의 강력한 표현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영원한 언약의 그림자이다. 즉 날마다 죄악의 홍수가 넘실대는 이 세상 속에서 잠시후 떠오르는 이 찬연하고 화려한 소망의 결정체는  믿는 자의 궁극적 소망인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 후반부의 생(18-29절)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부패한 심성은 이렇듯 은혜로운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실패와 좌절로 이어진다. 그렇기에 완전한 회복은 여인의 후손에 의한 새 왕국 건설로써만 가능할 뿐이다(3:15; 사 11:6-9).  그러나 인간의 실패가 아무리 크더라도 무지개로 언약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변치  않는다. 오히려 노아의 실수는 은혜받은 모든 자들로 하여금 방심치 말도록  교훈해  주는 신앙 간증이다.

                   1. 노아 가족에게 주어진 축복과 금지 조항(9:1-7)
   본문은 새로운 세계를 펼쳐나갈 인간들에게 하나님게서 번영의 축복과 동물계에 대한 계속 통치권을 보장해 주시는 내용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특별 축복과 보장은 창조시 설정된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계의 아름다운 조화가 죄로 인해 깨졌기 때문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곧 갓 태어난 신생아는 생존 능력이 전혀 없으므로 부모의 헌신적인  관심과  보호 아래에서만 성장해 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폐허의 땅에 살게 된 노아 일가에게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극진한 보살핌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번영과 삶의 기본적인 규범들을 제시하여 안정된 가운데 생활하도록 하셨다(2-6절).
   그리고 이러한 조항을 인준이라고 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처음과 마지막에 당신의 축복과 번영에의 약속을 명시하셨다(1-7절). 이로써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것은 모두 갖추어졌다. 이제 인간 생존의 관건은 하나님이 제시한 조항들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즉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설정한 삶의 테두리 안에 있을 때 진정한  번영과 축복이 주어지지만, 그 테두리를 박차고 나갈 경우 저주와 죽음만이 따를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태초 선악과 사건에서와 홍수 심판을 통해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악인의 형통이 평범한 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오늘날 사람들은 현상적인 풍요만을 참된 행복의 요건으로 이해하여 위의 사실을 부정할 것이다. 그러나  본문에서도 제시된 바와 같이 풍부와 번영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알 때, 그러한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이며 또한 참된 행복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마 6:24-34).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자의 행복에 대해 "근심하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고후 6:10)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같은 성경적 관점을 따라 성도는 '생존'과  '번영'  그 자체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시는 하나님과 그분의 뜻에 온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 홍수 후 인간과 동물과의 관계. - 창조시 하나님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주권을 허락하셨다(1:26, 28).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여 하나님의 주권에 대항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간의 조화가 깨어졌을 뿐 아니라, 인간과 동물 간의 질서와 조화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이것은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교만한 인간이 하나님을 대항하자, 그  영향이 짐승들에게도 미쳐 짐승들도 교만한 인간에게 더 이상 순복하지 아니하고 대항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타락 전에느 동물과 인간의 조화로운 삶의  관계가  타락
후에는 대립과 그에 따른 약육 강식의 경쟁 대상으로 전락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 피조 세계보다 인간을 더욱 사랑 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지위와 생명의 보존책으로 인간의 권위에 대항하는 동물들에게 인간을 향한 본능적  두려움을 주입시키셨다. 이렇게 하여 동물에 의해 인간이 멸망당하지 않게 하셨으며 완전한  복종은 아니지만 부분적인 복종을 하게 하셨다. 즉 인간은 더 이상 영적 권위로는  동물세계를 통치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법적 권위로 그 지재권을 계속  행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에 대한 인간의 주권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이런 점에서  동물  숭배 행위는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시한 처사로서 죄로 나약해진 인간 심성의  반영이다. 선지자 이사야는 인간의 죄로 인해 생겨난 인간과 동물 간의 적대감과 공포가  인간의 죄를 완전히 멸하고 세워질 메시야 왕국 곧 하나님의 나라에서 말끔히 씻겨지고, 참평화와 아름다운 질서가 회복되고 정착될 것이라고 노래하였다(사 11:6-9).

   * 하나님의 문화 명령. - 문화란 본래 인간이 자연 세계를 지배하기 위하여 행하는 모든 생활 양식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창조한 인간에게  자기 주변의 물질적, 정신적 환경을 적극적으로 다스리고 활용할 수 있는 지배권  곧  문화 명령(cultural mandate)을 위임하셨다(창 1:26-28). 그러나 인간의 문화 창출  행위는 최초 인간 아담의 타락 사건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의 명령과 반대되는 길로  치닫았고 급기야 온 땅에 악의 문화가 융성하게 됨으로써 대홍수 사건이라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심판을 받고 말았다.
   본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문화 명령은 새롭게 세상을 정화(淨化)하신 후 노아와  그 후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할 것과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것이다(1-3,7절). 이는 창조시 주어졌던 1:28의 명령과 동일하다. 따라서 비록 인간  세계에 죄가 들어왔으나 하나님의 문화 명령을 위임받은 인간은 이 피조 세계를 잘 다스려 하나님의 영광을 적극적으로 나타낼 책임이 있다. 즉 인간이 창출해내는 문화는  하나님의 선하신 사랑의 뜻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문화만이 성경이 말하는 인간과 자연을 위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부합되는 진정한 문화인 것이다.

   * 공식적인 육식(肉食) 허용. - 창조시 인류는 채식(菜食) 위주의 식생활을 명령받았다(1:29). 그런데 홍수 이후 하나님께서는 자연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허용하셨던 바, 그 적극적 표현으로 인간의 식용물로 육식(肉食)을  구체적으로  허락하셨던 것이다. 사실 이전에도 제사(4:4)와 의복용(3:21)에 한해서는 한정적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을 묵시적으로 허락하셨었다. 그러나 이제 음식용으로도 사용할 수 있게  하심으로써 동물에 대한 인간의 주권을 더욱 강화하셨다.
   한편 동물을 음식으로 취한 것이 홍수 이후부터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인지에  대해 많은 주장들이 있다. 완악한 인간의 심성을 생각한다면, 홍수 전 인간들이  육식을 하지 않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명령이 있기 전에 한 육식은  인간의 욕심과 교만에 따른 것으로 분명히 '죄'(罪)에 해당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육식을 공식화하심으로써(9:3), 이후부터의 육식은 아무런 죄나 허물이 되지 않게 하셨다. 이같은 사실은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명령(말씀)이 모든 행위와 사고에 대한 선악간의 절대 판단 기준임을 명시한다. 아울러 이러한 육식 허용은 모든 피조 세계를  희생해서라도 인류의 보존과 안녕을 지키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2. 무지개 언약(9:8-17)
   이 부분은 언약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언약의 당사자인 노아와 그의 아들들  사이에 맺은 무지개 언약에 대한 구절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언약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과 권위를 근거로 인간을 향해 발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이다. 원래 이 언약은 상호 계약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약속에 임한 쌍방이 동등한 입장에서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선행 조건이 전제되며, 이 조건이 만족될 때에만 약속이 성립된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언약은 어떤 조건이  선행되지 않을 뿐 아니라, 언약의 주도권을 하나님만 가지고 계신다는 점에서 '은혜와 사랑의 언약'이라 할 수 있다<3:14-21 강해, 은혜 언약>. 즉 더 이상 물로 인간을 멸망(부분적이 아닌 전체적인 멸망)시키지 않으시겠다는 이 언약은 인간과 상하이거나 타협하여 맺지 않고 오직 당신의 무조건적이며 주권적인 결정에 따라 체결되었다.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주권적인 의지는 인간 구원의 원동력이다(요일 4:10). 특히 본문에서  '내가'라는  말을 거듭하신 것은(9,11,12,17절)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의지가 얼마나  확고한가를 잘 보여 준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확실한 언약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홍수의 피해를  두려워하는 인간의 약한 마음을 통찰하시고, 언약의 증거인 '무지개'를 주시어 이를  보는 때마다 당신께서 이 언약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약속까지 곁들이셨다. 그러므로 이  무지개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며, 더 나아가 인류의 죄를 구속하신 예수의 사역을 예표한다(벧전 3:21). 언약의 증거물인 무지개가 홍수를 제어하듯이, 허물과 죄 많은 우리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이처럼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를 도말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희생이 하나님의 심판을 막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가 의인이어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는 예수의 십자가 희생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히 6:16-18). 그러므로 우리는 비록  격랑 이는 바다 같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죄인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에 침통해 하지만, 우리의 구원의 증거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금 참위로와 용기와 평안을 얻을 수 있다.

   * 무지개로 확약된 언약. - 무지개는 안개나 물방울에 햇빛이 조절 반사되어  해가 있는 반대쪽 하늘에 일곱가지 색깔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따라서  무지개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대기중 높은 습도를 조성할 폭우와 강렬한 햇빛이 똑같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무지개는 심판에 뒤따르는 구원의 과정, 즉 죽음으로 이끄는 인간의 죄와 생명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불가항력적인 은혜(사랑)의 관계를 적절하게  묘사한다. 즉 하나님의 언약의 증표인 무지개는 과거에 대한 어두운 기억을, 미래에 대한 밝은 희망으로 연결시키며 죄가 넘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도 차고 넘친다는 복음을  제시하고 있다(롬 5:20).
   이처럼 무지개는 심판과 자비, 어두움과 밝음 사이의 긴밀하고 불가분한 관계를 나름대로 이해시키며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이중적 사역을  인식시켜  준다. 그러므로 폭풍우가 몰아친 후 우뚝 솟아나는 무지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  땅에서 당하는 슬픔과 고통을 영원한 축복의 수단으로 삼게 하는 동인(動因)이 된다. 즉 무지개의 의미를 알고 있는 성도들은 시커먼 심판의 구름만을 보지 않고, 그 구름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언약의 무지개를 목격함으로 새 힘을 얻는다(사 54:9, 10).
   또 한편 무지개가 있다는 것은 구름이 있었다는 표시이다. 비를 오게 하는  구름은 무지개를 만들어 내는 데 필수적이다. 마찬가지로 하늘의 영광과 기쁨이 있기까지에는 이 땅의 실망과 좌절과 슬픔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괴로움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가 친밀해지며, 신앙 인격이 성숙해지고, 천국이 더욱  가까와짐을 알 때 우리의 삶의 자세는 범사 감사와 범사 기쁨으로 변화할 것이다.

                   3. 술로 인한 노아의 실수(9:18-29)
   자연 법칙과 은혜 언약의 중요성을 설명한 무지개 언약에 이어 본문은 홍수 후  계속되는 노아 생애의 후반부 기록이다. 그러나 그 생애는 실수로 특징 지워지는 생애로서 인간의 나약함을 생생히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의 실수를 통해서도 당신의 계획을 계속 성취시켜 나가시는 모습이 또한 기록되어  있다.
   한편 대홍수 사건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는 진리를 가르쳐 준다. 즉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보잘것없는 존재로서 나약하며 타락할  가능성이 다분하고 끝내 명망당할 수밖에 없음을 시사한다. 본문에 나타나는 바 노아의  실수는 위의 사실을 또 한번 확증해 주는 사건이다. 그는 인간의 타락이 가져다 주는  무서운 심판을 경험했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지만,  죄악된 본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했다.
   즉 그는 술에 취해 추태를 부렸으며 그 추태를 희롱한 아들의 후손에게 저주를  내리는 또한번의 인간 실패를 낳고 말았다. 타락한 인간의 무절제와 방종이 가져다 주는 비극적 참화를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그가 여전히 실수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한계와 무능한 현실을 발견하게 되며, 아울러 평안한 삶이 인간을 경건하게 만드는 궁극적 요인이 될 수 없음도 알 수 있다.
   또한 성령으로 거듭난 자라 하도라도 늘 깨어있지 않으면(고전 10:12), 하찮은  일에 의해서조차 실수하게 된다는 사실을 배울 수 있다. 사실 신앙의 세계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과거의 은혜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 얼마나 절제하며,  근신하며, 경건에 힘쓰고 있는가가 문제이다. 성경이 당대에 완전한 자요 의인이었던 노아의  허물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것은, 우리의 시선을 인간의 위대함에 고정시키지 않게  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무한한 지혜의 배려이다.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허물 많은 인간들과 더불어 당신의 구속 역사를 펼쳐나가신다는 사실을 보여 줌으로써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떠한 지를 알게 하기 위한 크신  사랑의 배려이다.

   * 술에 대한 바른 태도. - 술은 인간의 침체한 감정을 해소해 주며 원기를  북돋아 건강에 도움을 주는 잇점도 있다(삼하 16:2; 눅 10:34; 딤전 5:23). 그러나 자칫 잘못 사용하게 될 때, 술은 사람을 방탕케 하고(엡 5:18) 이성을 상실케 하여 판단력을  마비시키며(잠 23:34,35) 건강과 재산과 명예를 손상시키는 부정적인 측면도 강하게  띠고 있다. 이러한 술의 이중성으로 인해 우리는 사실 술 그 자체를 죄악시할  수는  없다. 그리고 성경도 술 그 자체를 정죄하고 있지는 않다. 그것은 술에도 일말 긍정적인 측면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을 이용하는 사람이 그것을 쾌락의 도구로 사용할 때 그 사람은 술이  가져다 주는 폐해에 쉽게 오염되고 만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의 부패한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히며 인간을 파멸에까지 이르게 하는 술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롬 13:13). 그리고 술 취한 자의 실수를 여러 곳에서 지적함으로써 술이  갖는  부정적인 측면을 보다 강조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본문에  나타난  노아의  경우와  롯(19:33), 나답과 아비후(레  10:1-11),  아하수에로(에  1:10-12)  그리고  벧사살(단 5:1-6)의 경우이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이 술을 선용하기 보다는 술에 취해 버리는 확률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암시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술 취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을 경고한다(고전 6:10).
   결국 술취함은 신앙 생활에 전혀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신앙 생활의 장애  요인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술이 제공하는 호기심이나 육신과 정신의 해방감 만낏 등에 미혹 되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처럼 술을 절제하는 이 일은 우리의 결단과 의지만으로서는 수행할 수 없고 우리 속에서 항상 우리를 위해 역사하시는 성령의 힘으로 가능하다. 이에 사도 바울은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외쳤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러한 술의 실체를 알고 그에 대한  바른 태도를 가질 때 온전한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남의 허물을 다루는 법. - 털어서 먼지 안날 사람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은 누구나 할 것 없이 허물과 죄로 찌들어 있다. 물론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우기는 사람도 있겠으나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까지 자신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처럼  모두가 허물과 실수로 점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드러난 상대의 허물을 꼬집고 밝히기를 좋아하는 것이 인간의 보편적인 기질이다.
   성경에 나타난 노아의 아들 함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한낱 조롱섞인 화제거리로 삼아 아버지의 권위와 인격은 아랑곳하지 않고, 형제들에게 떠벌임으로써 아버지를 모독하고 가정의 질서를 혼한케 했으며, 나아가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신 하나님께 패역하는 큰 죄를 짓고 말았다. 결국 함은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치졸한 성품과 경박하고 못난 마음을 공개했던 것이다.
   반면에 함의 형제 셈과 야벱은 아버지의 허물을 방관하지 않고 적극 그 허물을  가림으로써, 아버지의 명예와 인격이 더 이상 실추되지 않게 했다. 즉 그들이 지닌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아버지의 허물을 넉넉히 덮고도 남음이 있었다. 남의 허물에 대한 비판과 조롱은 상대의 마음과 명예를 상하게 하고 자신을 천한 감정의 노예로 전락시키지만, 남의 허물을 사랑으로 감싸주는 행위는 남과 자신을 유익되게 한다. 본문도 아비의 실수를 함은 자신의 저주로 삼았고, 셈과 야벱은 자신들의 축복으로 삼았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도저히 지울 수 없는 허물과 죄를 용서받은 자이다(엡 2:1). 성경은 이런 자를 참으로 복되다고 하였다(시 32:1). 적어도  이렇게  큰 복과 사랑을 받은 자이면서도, 그 일이 진리와 공의를 세우는 일이 아닐진데,  사소한 이웃의 허물에 흥분하여 파헤쳐 즐기기를 힘써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  7:3)는 예수의 말씀에 조용히 귀기울여야 한다.

 

세일하머

 

 h. 제단과 언약 (8:20-9:19)
 노아의 제단과 언약에 대한 설명 속에서 저자는 창세기 1장과의 밀접한 연관성을 계속해서 제시한다. 노아의 제단과 제물의 결과로서 홍수 이전의 인간의 상태가 회복된 것이다. 인간은 여전히 타락하지만(8:21) 제단 위의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찾을 수 있다(8:21-9:3). 창세기 l장에서와 같이 홍수 후의 인간에 대한 저자의 관심의 초점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르는 인간의 창조에 맞추어지고 있음은 중요한 사실이다(9:6).

 이 부분과 창조 기사 사이의 연관성이 중요한 것처럼 노아의 제단과 출애굽에 뒤이은 시내산에서의 모세의 제단(출 24:4-18)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도 역시 중요하다. 몇 개의 중요한 평행했에 대한 목록은 언어와 주제의 유사성에 대한 감각을 가져다 준다:
 (1)두 기사에서 제단을 세운 것은 홍수로부터의 노아의 구원과 애굽의 종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구원의 큰 행위를 뒤따라 나온다:
 (2)두 기사에서 제단과 제물은 하나님과의 '언약'의 설정을 표시한다(창 9:9, 출 24:7)
 (3) 두 언약의 결과는 하나님의 '축복'이다(창 9:1, 출 23:25)
 (4) 두 언약의 중요한 예비의 내용은 '들짐승'(창 9:2, 출 23:29)과 인간의 원수(창 9:5-6, 출 23:22)로부터의 보호이다
 (5)두 기사는 특별히 '땅'이 파멸로부터 보호될 것을 언급하고 있다(창 9:11, 출 23:29)
 (6)창세기에서 언약 설정에 대한 가시적인 '징표'는 '구름'속의 무지개이고(9:13-17) 출애굽기에서 언약 설정은 산을 덮은 '구름'(출 24:15)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의해서 결론을 맺는다
 (7)두 언약은 백성이 순종해야할 조건을 제시한다(창 9:4, 출 24:3) .

 이러한 관찰은 저자가 노아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과 시내산 언약 사이의 유사점을 의도적으로 모사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의 목적에 가장 잘 부합되는 대답은 그가 시내산에서의 하나닙의 언약이 하나님의 새로운 행위가 아님을 보여주기 원한다는 것, 그 언약은 오히려 하나님의 원래의 약속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다시 한 번 인간과의 교제를 회복시키며 인간을 다시금 자신에게로 되돌리는 사역을 하신다. 노아와의 언약은 하나님의 축복의 회복에 대한 저자의 발전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축복(1:28)과 아브라함을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을 축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12:1-3) 사이에 놓여 있다.

 18절과 19절은 홍수 이야기의 결론인 동시에 노아의 술취함에 대한 짧은 이야기에 대한 서론을 형성한다. 이 구절들은 창세기를 통한 저자의 구성 스타일의 좋은 본보기이다. 저자는 이 짧은 전환적 단위를 통하여 개체적이고 독립적인 서술들을 보다 큰 이야기들의 단위로 묶어준다. 이 특별한 전환적 단위 속에서 우리는 가나안이 함의 아들들 증의 하나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9:18). 이 작은 정보는 뒤이어 나오는 서술의 의미에 있어서 필수적인 것이 된다(9:22-25 참고).

 3. 노아의 술취함 (9:20-29)
 이야기의 바로 이 시점에서 노아의 술취함에 관한 이야기를 위치시킴에 있어서 저자는 창조 기사의 반복으로서의 홍수 서술을 제시하는 계획을 계속해서 따르고 있다. 창세기 첫 부분의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가 누리도록 하기 위하여 동산을 창설하신 것과 같이(2:8), 이제 서술이 독자의 시선을 하나님의 '축복'(9: 1)과 언약 관계로 돌리면서(9: 17) 노아의 이야기는 포도원의 경작과 함께 시작된다(9:20) 그 결과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의 결과와 매우 유사하다. 노아는 자신의 포도원의 과일을 먹고 벌거벗었다. 저자의 의도는 노아와 아담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는 홍수로부터의 구원 이후인 여기에서도 역시 인간이 하나님의 선한 선물을 누리는 것이 유지될 수 없음을 보여주기를 원한다. 아담과 같이 노아는 범죄하였고 그 죄의 결과는 그 후손들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3장에서와 같이 노아의 죄의 결과는 그의 '벌거벗음'에서 나타났다(2:25,3:7 참고). 에덴 동산의 사건의 문맥 속에서 읽혀질 때에 노아의 술취함에 대한 암시적인 설명은 매우 분명해진다. 인간의 원래의 상태를 모방해서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2:25) 노아는 술에 취하여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다' 함은 그 아비의 벌거벗은 것을 보았지만 셈과 야벳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그것을 보지 않고 그 아비의 벌거벗은 것을 덮었다.
많은 사람들은 서술이 묘사하고 있는 세 아들의 행위를 훨씬 더 악한 행위에 대한 개요 정도로 여긴다. 실제적인 행위의 자세한 내용이 어떠하든지 간에 묘사된 세 아들의 행위는 저자의 목적에 매우 잘 부합된다. 그는 단순히 함의 행위와 셈과 야벳의 행위를 대조시키기를 원한다. 이러한 대조는 뒤이어 나오는 저주와 축복의 기초가 된다(9:25-26). 아들들의 행위 사이의 대조의 중요성은 3장에서의 타락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서 나타난다. 그 아비의 벗은 것을 덮음에 있어서 셈과 야벳은 (2:25, 3:7, 9:23 참고) 아담과 하와(3:7) 그리고 인간의 벌거벗은 것을 보지 않고 가죽옷으로 벗은 것을 가리신 하나님과도 같았다(3:21, 2:25 참고). 반면에 함은 그러한 본보기를 따르지 않았다. 그의 행위는 나중에 율법 속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하체를 드러내는' 자들의 행위와 같았다(출 20:26, 레 17:18ff 에 대한 아래의 주석을 참고하라). 이것은 오경의 저자에 게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저자는 제사장에 관한 규례 가운데서 그들이 제단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가까이 갈 때에 그들의 벗은 '하체'를 가리기 위하여 '베로 된 고의'를 입어야만 하는 것을 포함시키고 있다(출 28: 여기에서 노아의 아들들은 두 종류의 인간들에 속하는데 아담과 하와와 같이 그들의 벌거벗은 수치를 가린 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함, 혹은 가나안인들처럼 하나님 앞에서 수치심이 없는 자들이다. 전자인 셈의 후손은 축복을 받을 것이다(9:26). 그러나 후자인 가나안인들은(함족이 아닌) 오직 저주를 받을 뿐이다(9:25).

 저자가 죄의식을 깨닫는 중요성을 가르치기 위하여 어떻게 이 서술들을 이용하고 있는가를 보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관점은 단순히 모든 가나안인들이 저주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저자가 나중에 그를 통하여 "땅의 모든 족속이 [가나안인들을 포함하여]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말하고 있는바 아브라함에 대하여 기록한 것에 어긋난다. 오히려 저자의 관점은 단순히 이 세 아들들이 나중에 "아브라함의 씨"와 "나라들"의 경우와 같이 인간의 죄와 불순종에 대한 두 가지 반응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저자는 한 사람이 단순히 어떤 가족에 출생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축복이나 저주를 좌우하지 못함을 보여주려고 한다. 아브라함이라는 인물 속에서 저자는 축복의 길에 대한 그의 최종적 판결을 제시하려고 한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6).

 창세기의 이 부분의 사건과 아론의 두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의 심판에 대한 서술 사이에도 역시 유사성이 있다(레 10장, 13-14장에 대한 아래의 주석을 보라).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공지 호크마 주석과 강해
1190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1장
1189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2장
1188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3장
1187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4장
1186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5장
1185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6장
1184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7장
1183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8장
»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09장
1181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0장
1180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1장
1179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2장
1178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3장
1177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4장
1176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5장
1175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6장
1174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7장
1173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8장
1172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19장
1171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0장
1170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1장
1169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2장
1168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3장
1167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4장
1166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5장
1165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6장
1164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7장
1163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8장
1162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29장
1161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0장
1160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1장
1159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2장
1158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3장
1157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4장
1156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5장
1155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6장
1154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7장
1153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8장
1152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39장
1151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0장
1150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1장
1149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2장
1148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3장
1147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4장
1146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5장
1145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6장
1144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7장
1143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8장
1142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49장
1141 창세기 호크마 주석, 창세기 50장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 24 Next
/ 24

All the Bibles, Commentaries and Dictionaries here have their own rights.
All rights are reserved for them, not for us. Thanks! Praise our great God, Christ Jesus!

HANGL Lingua Franca 한글 링구아 프랑카

sketchbook5, 스케치북5

sketchbook5, 스케치북5

나눔글꼴 설치 안내


이 PC에는 나눔글꼴이 설치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사이트를 나눔글꼴로 보기 위해서는
나눔글꼴을 설치해야 합니다.

설치 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