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여호와 - 하나님의 이름으로 '예호와'(* )란 신명칭을 본장에서 일관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은 본서 기자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선택된 백성을향한 그 분의 언약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증거해 준다<2:4>.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일반 사람들도 들을수 있는 말씀으로 아브람의 계시를 받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브람의 심령 속에 내적으로 임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만 '이르시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아마르'(* )의 의미가 대개 '말한다', '이야기한다'란 점에 비추어 볼때 전자일 가능성이 크다.
본토 - 혹자(Calvin)는 이를 '우르'로 이해하고 아브람이 구체적 소명을 받은 것을 우르에 있을 때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1:31). 그러나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후 떠난 곳이 '하란'인 점에 입각할때(4절) 이는 하란 , 더 나아가 우르와 하란을 포함하는 메소포타미아 전지역을 가리키는 것임에 분명하다. 떠나...가라 - '누가 네 뒤에 남든지 상관 말고 너를 위하여 떠나라' 는 의미이다. 기독교 역사는 이러한 떠남과 분리의 역사인데 오늘날 우리 성도들 역시 죄악된 이 세상에서 분리되어 의와 거룩을 좇는 순례의 길을 떠나야 한다(롬 12:2).
내가 네게 지시할 땅 - 직역하면 '내가 네게 보여 줄 그 땅'. 여기서 '보여 줄' 은 미래 미완료형으로 아직까지는 보여지지 않으나 미래에는 구체적으로 보여질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땅'은 아브람으로서는 불명확하나 하나님으로서는 이미 작정해 놓은 가나안 땅을 의미한다.
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 Living Bible은 문두(文頭)에 '네가 그렇게 하면'(If you do)이란 말을 부기하고 있다. 한편 여기서 '큰 민족' 이란 단순한 숫자적으로 인구가많은 것 뿐 아니라 영적으로 위대한 민족을 가리키는 바 곧 '이스라엘' 에 적합한 명칭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이 그의
적은 수의 친척을 떠나기만 하면(1절) 그 보상으로 오히려 큰 민족을 이루게 해주시리라고 보장하셧다.
네게 복을 주어 - 아직껏 무자(無子)한 아브람(11:30)이 많은 무리의 아비가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을 수 있는 근거이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분이니 그분께서 원하시고 또한 복을 내려 주시기만 하신다면 인간적인 모든 제약은 사라지고 만다(롬 4:18).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 직역하면 '내가 네 이름을 크게 할 것이다'.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유명케 하여 그 이름이 길이 회자(膾炙)되게 하시겟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사 속에서 아브람의 이름은 위대하게되었다. 즉 열국의 아비(17:4,5),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5,6)
하나님의 벗(약 2:23) 등의 명칭을 부여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은 선민 이스라엘의 시조(始祖)로서, 또한 믿는 모든 성도들에게는 영원한 믿음의 조상으로서 길이 남게 되었다.. 이처럼 사람을 높이시는 이는 근본적으로 하나님이시니 겸손한 자는 높이 들림받지만 무릇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는 낮아지고 말 것이다<1,2,3절 강해>.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 이 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예 베라카'(* )는 곧 '너는 복이 될지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말이 함죽하고 있는 의미에 대하여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된다.(1) 아브라함으로 인한 물리적 풍요(슥 8:12)를 의미한다(Gesenius, Rosenmuller)(2) 사람들이 상호 축복의 양식(樣式)이 된다는 뜻이다.(Calvin, Knobel, Kimchi)(3) 여기서 복은 영적인 복으로서 곧 아브라함은 그로 말미암는 복의 기준이 되리라는 뜻이다(Keil, Delitzsch, Kalisch). 이상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물론 첫번째와
두번째 견해도 세번째 견해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으로 말미암는 영적 축복이란 단순한 아브라함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긍적으로는 그의 가계(家系)에서 약속된 '여자의 후손'(3:15)인 메시야가 나리라는 뜻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은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미칠 수 있는 것이니(살후 2:13,14)그 같은 메시아의 조상인 아브라함을 가리켜 '복의 근원'이라 칭함은 당연하다.
12: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내가 저주 하리니 - 하나님과 아브람과의 각별한 관계를 나타내는 이 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람과 상호 공수 맹약을 맺으시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제 아브람의 이웃은 아브람과의 관계에 따라 그들도 각각 하나님께 축복과 저주를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원리는 신약
시대 그리스도와 교회와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 여기서의 '저주'(* ,칼랄)는 '감소시키다' , '낮게 여기다' 는 뜻으로 곧 남을 멸시하거나 하찮게 여기는 행위를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과 특별 맹약을 맺은 하나님의 종 아브람을 멸시여기는 행위는 곧 하나님을 업수히 여기는 행위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저주하리니 - 여기서의 '저주'(* ,아라르)는 하나님의 법에 따른 공적저주를 의미 하는데 이에는 구체적이고도 직접적인 징계 조처와 형벌이 따르게 된다(삼상2:30,31,32,33).
땅의 모든 족속이...얻을 것이니라 - '복의 근원'(2절)에 대한 보충,확대 설명이다(갈 3:8).축복은 타락 결과 인간에게 주어진 저주(2:17;3:16,17,18,19)와는 정반대되는 것이니, 이러한 축복은 단순한 물질적 축복 뿐 아니라 죄를 사해주느 영적 축복을 포함한다(Calvin, Keil, Luther). 즉 본질은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구상의 모든 민족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해결받고 진정한 삶의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리라는 복된 언약이다(눅 24:47).
12:4
여호와의 말씀 - '말씀'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다바르'(* )는 '명령'을 의미한다(27:19;왕상 12:12). 따라서 이는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행동의 절대 기준으로 삼았으며 말씀의 권위를 존중, 어김이 없었음을 나타내 준다(22:1,2,3,4,5,6,7,8,9,10,11,12).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메소포타미아를 떠난 사실이 거듭 언급되고 있는 까닭(11:31)은 그가 이후 아브라함과의 관계에서 많은 족적을 남겼기때문이다(13:1-13;14:13-16;19:1-28).
아브라함이...그 나이 칠십 오 세였더라 - 아브라함의 향년이 일백 칠십 오세였으니(25:7) 이때는 그의 중년기이다. 대개 중년기의 사람들은 현실에 안 주하려 하며 변화를 기피하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갈 바를 알지 못하고서도 지체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본토 집을 나선 아브람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용기와 신앙의 결단력을 보게 된다(마 4:18,19,20,21,22).
12:5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 - 연로한 부친 데라로 말미암아 뜻하지 아니하게 체류하게 되었던(11:31) 하란 거주 생활이 비교적 오래 지속되었음을 나타낸 준다. 한편 당시 아브람과 롯은 유목인이었으니(13:5) 그들의 모슨 소유물은 대부분 가축이었을 것이다(13:2).
얻은 사람들 - 직역하면 '획득한 자들'. 대족장 아브라함 집에 속한 남녀 종들과 그들의 자식을 가리킨다. 일손이 부족한 아바람에게 많은 가축을 돌보기 위해서는 부득이 종들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 본절은 마치 아브람이 목적지를 알고서 길을 떠난 듯이 오해할 수 있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는 11:31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결과 필연적으로 도달할 수 밖에 없는 작정된 땅이 바로 가나안임을 일깨워 주는 구절일 뿐이다<1절>.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 하란에서 가나안까지는 약 480Km정도의 거리인데 당시의 여행로로 미루어 보아 아바람 일행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시리하에 도착, 그곳 광야를 횡단하여 다메섹에 이른 후 가나안으로 직진하였을 것이다.
12:6
모레 상수리나무(* , 엘론 모레) - '본다'는 뜻을 가진 '라아'(* )로부터 파생된 '모레'는 종교적인 의미에서 '가르치는 자'를 뜻하는데 '예언자'로 번역될 수도 있다. 그리고 '강하다'란 뜻을 가진 '울'(* )로부터 파생된 '엘론'은 상수리나무 처럼 재질(才質)이 강하며 병충해도 잘견디는 나무를 가리킨다. 따라서 많은 학자들은 '모레 상수리나무'를 고대 이교도들이 신탁(oracle)을 받을 때 사용하던 '예언자의 나무'로 본다. 그러나 '마므레'와 같이(13:18) '모레'가 단순히 상수리나무 숲의 주인 이름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Alford,Murphy,Kalisch).
그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 아브람이 세겜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벧엘과 남방으로 옮겨 가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8,9절). '가나안 사람'은 함의 후예(10:6)로 우상숭배 행위에 탐닉하며 배타심이 강하던 족속이 었으니 아브람이 그들 가운데서 생활하기란 무척 힘들었을 것이다<4-9절 강해>.
12:7
여호와께서 아바람에게 나타나 - '나타나'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라아'(* )는 '증명하다','보이다'는 뜻으로 아브람에 대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 꿈이나 환상이 아닌 눈으로 볼 수 있는 객관적인 실제로 이루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요 4:24) 눈에 보이는 것은 온전한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분의 임재의 상징이거나 표시일 것이다(17:22;18:1,2;출 3:2). 그러나 이것은 계시를 받는 자가 분명히 인지할 수 있 다는 특징을 지닌다.
가라사대 - 대개의 경우 하나님의 현현(顯現)에는 선포되는 말씀이 동반된다. 따라서 계시 수납자는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특별 계시를 귀로 들을 수 있다(33:24,25,26,27,28,29,30).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 1절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시는 섭리에 의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곳 가나안이 자신의 후손들에게 허락된 '약속의 땅'임을 알게 되었다. 훗날 이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출애굽의 원동력이 되었으며(50:24;출 3:15,16,17,18,19,20) 또한 민족적 일체성을 유지하는 근본 동인이 되었다. 여호와를 위하여...단을 쌓고 -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제단을 쌓은 자로는 아브람 이전에 이미 노아가 있지만(8:20) 자신에게 현현하신 하나님을 기념하여 제단을 쌓는 자는 아브람이 처음이다. 이로써 아브람은 장차 그의 후손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에 대하여서도 함께 감사하였을 것인데
참된 신앙은 이처럼 보지 못하고 장래일에 대하여서도 믿고 감사할 줄 아는 것이다(히 11:1,13).
12:8
벧엘 - '하나님의 집'이란 뜻. 아브람 당시의 본래 이름은 '루스'였으나 야곱에 의해 벧엘로 바뀌었다(창 28:16,17,18,19). 예루살렘 북방 약 19Km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베이틴(Beitin)으로 좋은 샘들이 많아 고대로 부터 유목민들의 각광을 받던 곳이다.
아이 - '황폐한 작은 산'이란 뜻. 벧엘 동남쪽 약 3Km지점에 위치한 가나안의 요새화 된 성읍이다.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시 아간의 범죄로 일차 정복에 실패한 성읍이바로 이 아이 성이다(수 7:1-26).
여호와를 위하여...이름을 부르더니 - 여기서 단을 쌓는 것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것을 뜻하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찬송과 기도가 있는 공(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한다<4:26>.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입성 후 처음으로 모든 식솔들을 불러 모아 하나님께 대한 공 예배를 드림으로써 자신의가정에 예배 규례를 확립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아브람은 정처없이 유리하는 중에서도 하나님과의 교제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은 성도가 멈추어서는 안 되는 영적 호흡이다.
12:9
점점...옮겨 갔더라 - 이러한 이주 원인은 원주민과의 마찰 때문으로 추측되는데(6절) 얼마의 시간 동안에 어느 만큼 이동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가다가 장막을 치고, 다시 출발하곤 하는 일을 되풀이 하였을 것이다.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 가나안(팔레스틴) 지방은 지리적 여건상 우기와 건기가 뚜렷이 구분되어 대개 양력 10, 11월에 집중적인 비가 내린다. 따라서 이대 비가 적게 오면 그 다음 해에는 기근이 들게 마련인데 가나안으로 이 주한 아브람에게 때맞춰 닥친 이러한 기근은 다시금 그의 신앙가 인내를 시험 하는 계기가 되기에 충분하였다.
애굽에...내려 갔으니 - 애굽은 나일강이란 풍부한 수원(水原)으로 인해 어지간한 가뭄에도 불구하고 거의 기근을 모르는 지역이다. 따라서 아브람이 기근을 당하여 메소포타미아로 돌아가지 아니하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지혜로운 행동으로 평가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굽은 성경에서 세속을 상징하는 나라나 혹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적 도움, 수단으로 묘사되어 있음을 볼 때 (사 31:1) 그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애굽으로 내려간 것은 경솔한 처사이자 실족을 자초하는 전조 행위였다 하겠다<10-20절강해>.
12:11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 직접 재난을 당하기도 전에 미리 도덕적 나약성과 두려움을 보인 아브람의 태도는 하나님을 의뢰치 아니하는 자가 드러내게 되는 비신앙적 면모와 다를 바 없었다.
12:12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 시대를 막론하고 이방인이 타지에서 경원시 당하는 것은 보편적 현상이다. 더군다나 당시 애굽 사료들에 의하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해 살인쯤은 예사로이 자행하던 시대상을 엿볼수 있다. 따라서 아브람은 애굽인들이 자신을 죽이고 사래를 빼앗아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
다. 그러나 그가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며 보호해 주신 하나님의 권능의 손길을 여전히 믿었더라면 이러한 부질 없는 염려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12:13
원컨대(* ,나) - 간청을 나타내는 기본 불변사로 '미안하지만', '부탁드리지만' 정도의 정중한 어감을 지닌다. 이는 아브람이 아내 사래에 대한 결례인 줄 알면서도 자신의 의사를 완곡히 강요하였음을 시사한다.
나의 누이라 하라 - 혹자는 아브라함의 이러한 태도는 아내 사래의 순결을 보호하기 위해 부득불 취한 신중하고도 불가피한 처사라고 합리화시키기도 한다(Rosenmuller). 그리고 사래가 아브람의 이복 누이였던 점(20:12) 만을 생각하면 아브람의 이러한 행위는 잘못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과 현시를 받은 아브람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뢰 하지 않고 인간적인 처세 방법을 택했다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자 나아가 남을 속이려는 기만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그대로 인하여...보존하겠노라 - 아브람의 이기심과 허물이 노출된 대목이다. 왜냐하면 거짓말의 결과 자신의 생명은 보존할 수 있었을런지 몰라도 사래의 순결은 보다 더 무방비 상태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15, 19절). 이처럼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도 그 이면에는 죄와 결점을 지닌
인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약속의 땅으로 다시금 인도하신 것(13:1)은 그분의 신실하심과 사랑 때문인데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그 같은 품성에 입각해 낮고 천한 우리를 택하사 부유하고 지혜롭다 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고전 1:28).
12:14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 여기서 '아리땁다'는 것은 외견상 보기에 아름다운 용모와 자태를 뜻한다. 비록 이때 사래의 나이 65세를 웃돈 때이긴 하나(4절;17:17) 127세란 그녀의 수한에 비추어 볼 때(23:1) 원숙미를 자랑할 중년기이다. 더욱이 그녀는 아직 아이를 낳은 적이 없으니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으며 혈색 또한 좋았을 것이다. 그 뿐 아니라 비록 애굽인들이 흑인계는 아니라 하나 그 쪽 여인네 들의 피부색이 거무스름한 것에 비추어 볼 때 사과 빛 피부색을 지니 사래의 용모는 더욱 돋 보였을것은 분명하다.
12:15
바로의 궁으로 - 고대 근동 및 애굽의 세도가들은 여러 첩들을 거느렸으며 특히 왕들은 수십, 수백 명의 후궁(後宮)들을 거느리는 것이 관례였다. 따라서 바로가 사래를 궁전으로 불러들인 것은 곧 그 같은 후궁 중의 하나로 삼기 위하였음임을 알 수 있다.
취하여 들인지라 - 혹자는 본 구절에서 사래의 순결성을 의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브람과 특별한 관계의 공수 동맹 계약을 맺은(3절) 하나님께서 곧 약속의 자녀를 생산할 사래가 바로에게 정절을 빼앗긴 후 때늦게 재앙을 내린다는 것은 도저히 말이 안된다. 따라서 본절은 사래에게 남편이 없는 줄
안 바로가 그녀를 정식 후궁으로 맞아 들이기 위해 일단 후궁(Harem)으로 모셔 놓은 것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12:16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 고대 근동에서는 신랑 될 사람이 신부 될 사람의 가족에게 결혼 대가로 예물을 주는 것이 관례였다(출 22:16;신 22:29;삼상 18:25). 아브람이 사래로 인하여 후대받은 것도 바로 이러한 의미이다.
아브람이...얻었더라 - 아브람이 바로의 선물을 받은 것은 물론 타의였겠지만 그가 끝내 입을 열어 자신의 거짓을 밝히지 아니한 것은 결국 자기 아내를 판 것과 다름없는 비겁한 행위였다.
12:17
사래의 연고로 - 사래는 장차 약속의 자녀를 낳을 열국의 어미이다(17:16). 따라서 비록 아브람의 약한 믿음과 실수 때문에 아내에 대한 그의 권리를 빼앗겼다 하나 하나님께서는 사래가 바로의 첩으로 전락되는 것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셨다.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 비록 바로가 모르고서 남의 아내를 취하였다고는 하나 언약의 전승 가문을 모독함으로써 하나님의 권위를 훼손시킨 죄는 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고의적이 아니었던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발하신 재앙은 직접적인 징계가 아닌 경고를 주시기 위한 간접적인
수단이었을 것이다(20:6, 7).
12:18,19
아브람의 거짓과 불성실에 대한 바로의 삼중적인 책망이 나타나 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이 이방인 바로에게 오히려 책망당한 것은 그의 거짓과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간섭적, 주권적 보옹이라 할 수 있다.
네 아내라고...아니하였느냐 - 사래가 아브람의 아내라는 사실을 바로가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 알았는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 일로 하나님의 선지자 아브람이 이방의 군주 바로에게 힐책당한 것은 마치 맛을 잃은 소금이 천시당하듯(마 5:13) 도덕적으로 순전치 못한 하나님의 자녀 역시 세상 사람들
로부터 조소받을 뿐임을 교훈 해준다(빌 2:15).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 사래가 명실 공히 순결을 잃지 아니한 아브람의 아내임을 증거해 준다. 이처럼 하나님께선 당신의 백성들이 위기 중에 처할때 결코 그대로 내버려 두시지 않고 항상 돌아보시는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스스로 곁길로 나가려 뻗대는 자들에 대해서는 채찍으로 돌보실 것이다
(사 1:5).
12:20
그들이...보내었더라 - 아브람이 자기 가족과 소유를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 의해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의 예표로 볼 수 있다.(1)기근으로 인해 애굽에 내려간 점(42-47장) (2)애굽에서 어려움을 겪은 점(출 1장)(3)하나님의 돌보시는 역사와 재앙에 의해 구출된 점(출7장-12:30)(4)풍부한 소유물을 이끌고 출애굽한 점(출 12:31-38). 여기서 우리는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언약의 땅 가나안을 아브람의 후손에게 주려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같은 맥락에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된 우리들에게 언약의 땅을 천국을 주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까지 내주셨다(골 1:20).
전장은 바벧 탑 사건으로 인간은 멸망할 수밖에 없는 부패한 존재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간 구원을 위해 셈 계통의 한 가계를 선택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했었다. 이어 본장은 우상 문화권 안에 살던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인류 구원을 위한 '복의 전달자'이자 '언약의 체결자'로 삼으신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한편 본장에서부터 25:11까지는 아브람의 행적에 관한 내용인데, 그의 전생애는 구속사의 한 단면으로서 하나님의 언약(12:1-3)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성취되어갔는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본장의 내용을 요약하면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서 늘 그러하듯이 새로운 세대를 알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아브람에게 전해졌다(1-3절). 그 계시의 핵심은 인류 구속을 위해 아브람에게 큰 민족과 복의 근원이될 것이라고 약속한 내용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발길을 옮기는 아브라함의 순종과, 계속되는 나그네 여정을 그리고 있다(4-9절). 비록 부름받은 자라도 방심하면 인간적인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애굽에서의 사래 사건을 통해 경고하고 있다(10-20절). 즉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 '복의 근원'이었으나 그도 역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함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본장은 인간 아브람의 믿음에 대한 승리 기사가 아니라, 본래부터 '복의 근원'이 될 수 없는 인간을 부르셔서 하나님 나라 건설의 역군 삼으시고 그의 일생을 인도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경륜을 알리고 있다.
본문에는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과 더불어 구속사의 일대 전환기를 이루는 아브람의 역사가 시작되고 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부르시고 그를 통하여 당신의 나라 건설을 실현하시고자 하셨다. 그런 점에서 아브람을 택함은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지고한 관심이었다<11:10-32 강해>. 이처럼 한 개인으로부터 한 가문, 한 민족 그리고 온 인류에 이르는 점진적 선택 과정은 예수 그리스도 한 개인을 통해 성취될 인류 구원의 기본적인 틀을 제시한다. 그러므로 아브람의 선택과 그에게 주어진 사명은 믿음의 계보를 이어받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깊은 연관이 있다.
한편 하나님은 아브람을 선택하시고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으시기 위해 그에게 3가지(본토, 친척, 아비 집)를 청산하게 하셨으나, 곧이어 그에 상응하는 3가지(땅, 민족, 복)를 약속하심으로 당신의 일에 동참한 자를 향한 다함없는 사랑을 보여 주셨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할 사실은 하나님께서 하찮은 인간 아브람에게 '복의 구원'이 되게 하신 점이다. 즉 하나님은 아브람을 저주하는 자에게 당신의 공의의 법에 따라 저주하실 뿐 아니라, 반면 축복하는 자에게 아브람을 통해 복을 얻게 하셨다(3절). 결국 이런 은혜는 아브람 개인만을 향한 축복이 아니라, 그의 후손을 통해 오실 메시야와 연관된 우주적이며 영적인 축복이다. 즉 하나님은 계속 부패해 가기만 했던 인류를 구속 하시기 위해 이미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3:15), 곧 오실 메시야의 전조로 그를 메시야의 육신의 조상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아브람은 자신의 가계를 통해 인류 구원자를 배출하게 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아브람의 가계에서 나실 메시야는 인류의 복의 원천으로서, 누구든지 그를 믿고 순종하면 지복의 은혜를 누리지만 그를 거부하면 영원한 저주를 받게 된다(요 3:16; 롬 4:11-25). 그러므로 참된 복을 추구하는 자는 무엇보다 우선하여 그분을 자신의 진정한 복의 근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갈 3:7-9).
* 창대케 된 이름. - 이름은 그 사람의 전인격을 대변하는 매개체란 점에서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특히 영적인 측면에서 '이름'은 그 사람 전체의 삶과 미래를 예견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계 21:27). 이런 사실은 이름 자체가 인간의 전인격과 미래까지를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여태껏 행해진 개인의 모든 역사 특히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그 이름 아래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 언급된 인물의 '이름'들은 하나님과 깊은 연계 속에 거쳐온 개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해석될 수밖에 없다.
홍수 후 사람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위업을 드높이기 위해, 즉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11:4) 바벧에 건축물을 쌓아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명성을 높이려는 그들의 불건전한 욕망을 꺾으셨다. 이같은 사실은 하나님을 등진 채 추구하는 영예와 자아 실현(이름을 냄)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보여 준다(행 12:20-23).
한편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에 따라 한 자연인(아브람)의 이름을 높이기로 결정하시고 그에게 새로운 사명을 부여하셨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만을 조장하기 위함보다 그를 높이신 분이 바로 당신이심을 세상에 알리며, 그를 통해 당신의 구속 역사를 성취하실 목적으로 그의 이름을 높이신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로 아브람은 후에 '열국의 아버지'(17:5), '선지자'(20:7), '하나님의 방백'(23:6), '여호와의 종'(시 105:6), '하나님의 벗'(대하 20:7; 약 2:23) 및 '메시야의 선조'(롬 4:11-25)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었으며, 오고오는 세대로부터 이스라엘의 원조이자 믿음의 조상이라는 찬사를 얻게 되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명성을 얻게 된 데는 그의 뛰어난 인물됨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오직 인간을 높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의 강권적 역사와, 그리고 그 역사에 자신의 전 삶을 내맡긴 그의 순종에 의해서였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명예를 위해 온갖 수고를 하기에 앞서 근원적으로 인간의 이름을 높이시며 창대케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신 26:19; 빌 2:9).
2. 가나안으로 향하는 아브람(12:4-9)
본문은 하나님의 소명에 즉각 순종하여 비록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히 11:8), 미련없이 자신의 본토 아비 집을 떠나 가나안으로 향하는 아브람의 여정이 나타나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여행한 결과는 편안한 안주가 아니라, 오히려 거민들의 냉대와 계속적인 피곤한 유랑 생활 뿐이었다.
신앙인들 중에는 간혹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자신이 처한 나쁜 환경이 개선되며, 하는 일마다 만사 형통될 것으로 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기대를 단호히 묵살시키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 일이 고난을 자초하는 것임을 가르친다(딤후 3:12).
아브람의 유랑 생활은 바로 이같은 사실을 증명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1-3절) 믿고 나선 그의 앞에는 안식과 풍부한 재물이 아니라 피곤함과 빈핍만이 존재했고, 어느 한 곳에 오래 머물 수 없을 만큼 불안정했다. 더욱이 그가 약속받은 가나안은 정착지가 아닌 경유지에 불과했으며, 그리하여 피곤한 나그네 생활을 거듭하던 그는 결국 애굽에까지 흘러가게 되었다(10절).
그러나 과연 신앙인은 숙명적으로 고난을 타고 났으며 고통 가운데 살다가 죽어가야 하는가? 그렇지만은 않다! 하나님은 현실에서 고통당하는 것처럼 보이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힘과 희망과 기쁨을 제공하셔서 고통 가운데서도 참 평안과 희락을 맛보게 하신다. 하나님은 불안에 떨며 피곤 중에 있던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미래에의 희망을 안겨주셨고(7절) 계속해서 그의 유랑길에 동행해 주셨다(7,8절).
이처럼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 현재의 안락과 물질적 풍요를 약속하기에 앞서 미래에 있을 안식과 평안을 소망하게 하며 영적인 기쁨을 먼저 약속한다(히 11:15, 16). 아울러 고난에 찬 현실마저 간과하지 않으시고 각 개인과 날마다 동행하신다(수 1:5; 마 28:20).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 그것은 어떤 환경에도 좌절치 않는 천국의 삶인 것이다(눅 17:21).
* 가나안 땅에 대한 약속. - 가나안 땅은 넓은 의미에서 시리아-팔레스틴 해안 지역을 의미하며(페니키아 본토 포함), 좁게는 요단강 서편 땅 전부를 가리킨다. 10:29에 의하면 팔레스틴은 해안 지대로는 시돈에서 가사까지, 내륙으로는 사해 주변 도시들까지를 포함한 지역을 의미한다.
아브람 당시 이곳에는 우수한 농경 문화를 기반으로 풍요한 생활과 다양한 우상 숭배(다산의 신인 바알과 섹스와 전쟁의 신인 아스다롯 등)를 즐겼던 것으로 추정되며, 함 계통의 원주민들이 주로 거주한 지역으로(9:18, 22) 타민족이나 유랑민들을 무척이나 학대, 배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은 이처럼 타락하고 배타적인 이민족(異民族) 땅의 중심부 세겜(예루살렘 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아브람을 인도하셔서 장차 가나안이 그의 후손의 소유지가 될 것을 약속하셨다.
한편 이 약속의 이면에는 장차 가나안 족속들이 모두 추방될 것을 내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당신 백성들의 삶의 터전을 마련하시기 위해 당신을 거부한 무리들의 심판을 예시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불공평과 편애를 나타낸 것이 아니라, 그 무엇보다 당신의 백성을 사랑하시는 거룩한 정열과 죄인들을 다스리시는 공의로운 성품(가나안 원주민의 몰락 요인은 그들의 타락에 있었다)을 반영한다. 여하튼 이 가나안 약속은 이스라엘 민족의 단합된 힘을 조성하는 동인(動因)이 되었으며 후일 출애굽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여기서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은 이스라엘의 가나안 소유권이 생득적(生得的)이거나 스스로의 능력에 의해 얻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따른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가나안은 하나님의 소유로서, 이스라엘은 단지 그분에게서 그 땅을 은혜로 불하받았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인들에게 있어서 가나안 거주는 하나님의 품안에서의 삶으로 간주되었다. 특별히 이 가나안 약속은 영적 측면에서 모든 성도들의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예표한다. 하나님은 세상 끝날 이 땅의 불의한 세력을 멸절시키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신 후 그곳에 우리를 있게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영적 가나안이 완성될 때까지 우리는 여전히 불의한 세상 가운데서 본향을 사모하며 온갖 고난을 꿋꿋이 감래해야 한다.
* 아브라함의 여정. - 기독교의 역사는 떠남과 분리의 역사이다. 떠남과 분리의 근거는 하늘의 소명이요, 떠나야 할 자는 바로 부름받은 자신이다. 그리고 떠날 곳은 죄악의 도성이요, 떠나 향해야 할 곳은 약속의 땅 가나안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브라함의 출본토(出本土) 여정은 신앙의 순례길이다. 아래 도표는 이상의 의미를 지닌 채 고대 근동의 지리에 그 역사적 발자취를 남긴 아브라함의 여정 도표이다.
3. 애굽에서의 아브라함의 실수(12:10-20)
신앙인의 실패는 주로 도전해 오는 악한 세력의 힘이 강해서라기 보다, 그 세력에 대응하는 각자의 자세가 그릇되었기 때문에 발생한다. 즉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힘과 꾀에 의존할 때 실패는 항상 따르게 마련이다.
믿음의 위인 아브람은 하나님께 부름받은 순간부터 지금까지 철저한 순종과 겸손으로 일관했으며, 그로 인해 '복의 근원'이 되며 가나안 땅의 약속을 받는 은혜를 누렸었다(1-9절).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는 물질적 곤핍과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자, 지금까지 섬겨오던 하나님을 잠시 멀리하고 다급한 나머지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잔꾀로 위기를 모면하려 애굽으로 내려갔다(10절). 그의 이러한 노력은 생명 보존을 위해 거짓말하게 되며 바로에게 자신의 아내까지 내어줌으로써(11-16절) 실패로 돌아가고 오히려 더 극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지혜와 노력은 그로 하여금 깊은 허무와 절망을 맛보게 한다.
그러나 택한 자를 끝까지 보존하시며 그 인간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비록 당신을 저버린 연약한 아브람이었지만, 당신의 나라 건설의 역꾼으로 택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은혜로 그를 용납하시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17-20절). 이와 같이 우리는 스스로 실망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자를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고 더불어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날마다 새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시 40:30, 31).
* 아브람의 출애굽과 이스라엘의 출애굽. - 성경에서 애굽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머무는 곳, 혹은 세상의 힘,부귀,쾌락 등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혹자는 아브람의 애굽행을 불신앙과 기근에 대한 인간적인 자구책으로 이해하여 그의 실패한 애굽생활을 당연한 귀결로 평가한다. 그러나 아브람의 실패의 궁극적인 이유는 단순한 애굽행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애굽에서 취한 거짓과 위선과 극단의 이기적 태도에 있었던 것이다. 즉 그는 자신의 생명 보존을 위해 자기 아내를 바로의 후궁으로 내어주어 신앙과 양심을 내팽개친 파렴치한 인간으로 전락함으로써 자신과 아내와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바로의 자존심을 멍들게 하였던 것이다.
신앙인의 범죄는 단순히 한 개인의 허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파급 효과가 그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까지 미친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신앙인은 자신이 단순한 자연인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의 도구임을 알 때 그 생활을 올바르게 꾸려갈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광의 도구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 아브람과 그의 아내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보존하시기 위해 바로의 가정에 재앙을 내리셨고 그로 인해 아브람 가정이 애굽에서 쫓겨나도록 유도하셨다. 이 같은 애굽에서의 추방은 인류의 역사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을 중심으로 엮어져 간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증명해 준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가나안에 당신의 나라를 건설하시기 위해 아브람의 많은 허물에도 불구하고 그를 새롭게 하셔서 다시 한번 당신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셨다. 결국 애굽은 아브람을 단련시키기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훈련장이었던 것이다.
한편 이 애굽 추방 사건은 후에 모세에 의해 주도될 출애굽 사건을 예표한다. 본사건과 후에 있을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사건 사이의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식량 고갈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사실 애굽이 궁극적으로 평안을 제공하지 못했다는 것 하나님의 강력하고도 신속한 재앙 심판을 통해 바로가 항복한 점 많은 재물을 얻어 애굽에서 나온 점 등이다. 더욱이 이 두 사건은 구원의 주체가 하나님이심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 어떤 희생을 치루어서라도 당신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해 들이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베푸시는 역사는 비록 인간의 시각에서 수치스럽게 보일런지('추방'과 같은) 모르나, 궁극적으로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스러운 조처임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신앙인은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 감사와 찬양이 필수적인 것이다(살전 5:16-18).
세일하머
B. 아브라함의 부르심 (12:l-9)
우리는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바벨론에서의 나라들의 흩어짐(11:1-9) 다음에 위치시킴으로써 저자가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심판 가운데서의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로 묘사하려고 의도하고 있다고 이미 제시하였다. 저자는 이러한 주제를 더 길게 유지시키는 한 방편으로서 아브라함의 부르심과 축복에 관한 설명을 홍수 서술의 결론이 되는 심판 가운데서의 구원의 선물에 대한 설명 다음에 위치시킨다(8:15-19에 관한 앞의 주석을 보라). 이 두 서술 사이의 유사성은 놀랄만한 것으로서 아브라함이 노아와 같이 '온 인류'를 축복하려는 하나님의 원래의 계획(1:28)으로의 복귀 뿐만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성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브라함과 그 자손이 하나님의 축복의 계획에 있어서 새로운 시작을 이루고 있다는 주제는 창세기에서 다른 여러 방법들을 통하여서도 발전되고 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의 서술을 통하여 l:28에서의 하나님의 '축복'이 빈번히 반복된다는 사실이다(예를 들면, 12:1-3, 13:15-16, 15:5,18, 17:6-8, 22:17-18, 25:11, 26:2-4, 27:2?-29, 49:28). '족장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다름 아닌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원래의 축복의 반복이다(1:28). 저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10장에서 그들의 '족속들'(10:32)을 따라서 '온 인류'의 대표적인 명단을 제시했으며 어떻게 그들의 흩어짐이 바벨론의 반역의 결과가 되는가를 보여주었다(11:1-9). 바로 이 '세상의 족속들'이 아브라함과 그의 씨를 통하여 축복받아야만 한다(12:3).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새로운 아담으로 제시되며 '아브라함의 씨'는 두번째 아담인 새로운 인류로 제시된다. 그를 '축복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축복하실 것이며 그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저주하실 것이다. 한 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2: 17)에 의해서 표시되었으며 나중에는 방주에 의해서도 표시된(7:23) 생명과 축복의 길은 이제 아브라함과 그 씨에 의해서도 표시된다. 아브라함의 '씨'의 신원은 이어지는 서술들의 중요한 주제들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미래에 대한 한 장막이 걷히면서 장래의 아브라함의 씨를 짧게 바라보는 것이 간단하게 허용된다(49:8-12). 장차 올 이 '씨'는 왕권이 그에게 속하는 자로서 '유다 지파의 사자가 될 것이며 모든 백성이 그에게 복종할'것이다(49:l0). 저자가 '축복'의 성취와 이 씨가 유다 지파로부터 올 것이라는 사실과의 연결성에 부여하고 있는 중요성은 49장에서의 야곱의 예언적 시에 주어진 서술적 구조 속에서 보여질 수 있다. 야곱의 말의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그의 말이 축복의 주제의 갱신으로서 이해되어야 함을 세 번에 걸쳐서 반복하였다. "그 아비가...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축복의] 분량 대로 축복하였더라"(49:28). 장차 올 왕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이 왕의 미래의 통치와 그로부터 발생하는 축복은 모세오경 내에서의 다른 시형 본문의
초점이 된다(민 24장에 대한 아래의 주석을 보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 대한 설명은 선택적이다. 그 땅 가운데서 오직 세 군데의 지명만이 언급되었는데 그것은 세겜과(12:6) 벧엘과 아이 사이의 땅(8절) 그리고 네겝(9절, 우리 말 번역은 '남방')이다. Cassuto가 지 적 한 것과 같이 이들 지명은 야곱이 하란으로부터 가나안으로 돌아올 때에 거쳐 간 세 지역과 동일하며 (창 34-35장) 또한 여호수아의 지도 아래서의 가나안 땀의 정복에 대한 기사 가운데서 차지하고 있는 지역과 동일하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일 수 없다.
"오경은 단순히 고대 역사에 대한 교훈을 주기 위하여 그 서술을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 목적은 종교와 전통을 기르치는 것이며 이것을 위하여 고대의 전통을 활용하고 있다. 오경은 그 용어를 조심스럽게 선정함으로써 그 의미를 보여주는 고대의 전통 안에서의 핵심적인 관계들을 독자에게 암시해 준다. 이미 창세기 12장의 첫 부분에서 이러한 방법을 인식하는 것이 가능 하다. 아브람은 북쪽에서 와서 세번에 걸친 여행을 통하여 가나안 땅 전체를 통과하였다. 첫번째 여행에서 그는 세겜 땅으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단을 쌓았다. 이것은 땅의 '이상적인 정복'과 그것이 하나님께 거룩하게 드려졌음을 의미한다(6-7절). 두번째 여행에서 그는 동쪽으로는 벧엘 그리고 서쪽으로는 아이 사이의 땅인 벧엘 동쪽에 도달하였다. 여기에서 다시 그는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8절). 세번째
여행에서 그는 네겝 땅으로 가서 (9절) 그곳에 있는 헤브론에서 나중에 막벨라 밭을 샀다(창 23장). 야곱이 동쪽으로부터 돌아 와서 이 땅을 여행한 것은 아브라함의 경우와 같다. 첫째로 그는 세겜으로 가서 밭의 일부를 사서 그곳에 장막을 치고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단을 쌓았다(33:18-20). 그는 이곳을 떠나기 전에 가족들에게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신을 버리라고 명하였고(35:2) 그가 세겜으로부터 받은 모든 우상들을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 묻었다(35:4). 그리고 그는 벧엘로 가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앞에 기둥을 세웠다(35: 14-15). 마지막으로 그는 남쪽에 있는 네겝으로 가서 헤브론에 이르렀다(35:27).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여행에 있어서의 요지는 야곱의 여행에 있어서의 그것과 평행을 이루며 이들 둘은 또한 여호수아서에 기록된대로 땅의 정복에 있어서의 요지와 평행을 이룬다. 그들이 첫번째 점령한 성은 아이성인데 창세기 12:8에서도 역시 같은 표현이 나타난다. "벧엘 동편...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수 7:2, 8:9, 12절도 역시 참고하라). 이 직후에 여호수아서는 세겜 다음에 있는 에발산에서 단을 쌓은 것을 설명해준다(수 8:30). 그곳에서부터 이스라엘인들은 더 확장된 두 지역인 벧엘과 아이의 남쪽과(수 10장) 세겜의 북쪽(수 11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우리가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 보는 세 지 역과 동일하다. 세겜에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야곱이 그 당시 사용했던 것과 거의 같은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 가운데 있는 이방 신들을 버리라고 명하였다(수 24:23). 그곳에서 여호수아는 창세기 35:4에서의 상수리나무 아래에서와 같이 여호와의 성소 곁에 있는 상수리나무 아래에 큰 돌을 세웠다(수24:26).
이러한 평행들은 과거의 조상들의 행위가 현재의 그 자손들의 행위를 예시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방법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의도는 아브라함에게 일어났던 것은 또한 야곱과 그들의 자손에게도 일어났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것은 땅의 정복이 이미 조상들의 시대에 그들이 단을 쌓고 땅을 구입하는 것에 의해서 제시된 것처럼 상징적인 방범으로 성취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그것은 조상들의 행위 안에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돌보셨으며 나중에 그 조상들의 자손의 시대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남아 계실 것임을 믿을 수 있는 근거가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C.애굽에서의 아브라함(12:10-13:4)
10절은 기근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애굽에서 피난처를 찾도록 강요했다는 언급과 함께 새로운 사건의 문을 연다. 마치 애굽을 향한 아브라함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여행을 정당화시키려는듯이 저자는 10절의 끝에서 '기근이 심하였음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서술은 13:4로 이어져서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데 여기에서 아브라함은 벧엘과 아이 사이의 그가 처음 단을 쌓은 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렸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이어지는 서술들을 통하여 반복되는 주제를 찾을 수 있는데 이것은 지금의 이야기 속에서 처음으로 언급 되고 있다. 그 주제는 12:1-3에서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위협이다. 이어지는 거의 모든 이야기 속에서 '무수한 자손' '땅의 모든 족속을 향한 축복' 혹은 '땅의 선물'에 대한 약속은 서술 속의 인물들의 행위에 의해서 위협을 받는 위치에 놓여진다. 약속은 마치 실패하는듯이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위협 앞에서 서술은 하나님께서 항상 자신의 말씀에 대하여 신실하시며 그 자신이 그 속에 개입하셔서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보여준다. 이처럼 반복되는 서술의 주제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자신의 약속을 이루실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인간의 실패는 하나님의 약속의 길을 가로막을 수 없다.
아브라함의 애굽 여정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으로부터 구원하신 것에 대한 나중의 설명과 평행을 이루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배열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창 41-12장). 두 설명은 비슷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을 다루고 있는 서술들의 첫 부분인 여기에서 우리는 마지막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대를 찾을 수 있다. 창세기의 다른 부분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기에서도 평행은 놀랄만하다.
아브라람 요셉
12:10-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41:54b-각국에는 기근이 있으나
12:11-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46:28 - 다 고센 땅에 이르니
때에...
12:11-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46:31 - 요셉이 그 형들에게 이르되
12:ll - 나 알기에... 46:31 - 내가 올라가서 바로에게 고
하여 이르기를.......
12:12-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때에 46:33 - 바로가 당신들을 붙러서...
이르기를... 묻거든...
12:13 -(말)하라... 46:34 - (말)하소서...
12:13-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 46:34b 당신들이 고센 땅에 거하게
고 ... 되리이다
12:15-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47:1 - 요셉이 바로에게 가서 고하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여 가로되...
12:15-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47:5 - 바로가 요셉에게 일러 가로
취하여 들인지라 되 땅의 좋은 곳에 네 아비
와 형들을 거하게 하되....
12:17- 아브람이 양과 소...를 얻 47:6 - 그들로 나의 짐승을 주관하
었더라 게 하라
12:18- 여호와껴서 바로(에게) 출11:1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바로(에게) 내린 후에야
12:18-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 12:31- 바로가 모세와 아론을 불러
르되 서 이르되
12:19 - 이제 데려가라 12:32 - 일어나... 떠나서
12:20 -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12:33 - 백성을 재촉하여... 속히 보
보내었더라 내려 하므로
13:l - 아브람이애굽에서 나올새 12:37 -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에서
... 남방으로 올라가니 발행하여 숙곳에 이르니
13:l - 롯도 함께하여 12:38 -중다한 잡족...이 그들과 함께
하였으며
13:2 - 아브람게 육축과 은금이 12:38 - 심히 많은 생축이 그들과 함
풍부하였더라 께 하였으며
13:35 - 은금
13:4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 12:? -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을 불렀더라
아브라함의 애굽 여정에 대한 설명을 출애굽 사건과 평행을 이루도록 구성함으로써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과거의 행위가 암시하는 것을 보도록 허용한다. 과거는 과거에만 머물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그 교훈은 미래를 향한 것이다. 이 구조 뒤에는 신실하신 사랑의 하나님이 서 계신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것을 오늘날과 미래에도 당신의 백성을 위해여 행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환 전체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단순한 이야기의 범위 안에 간직되어 있다. 우리는 또한 바로 이러한 평행의 관점 속에서 12장에서의 아브라함의 애굽 여정에 대한 설명과 20장에서의 그의 그랄 여정에 대한 설명 그리고 26장에서의 이삭의 그랄 여정에 대한 설명 사이의 밀접한 유사성을 이해해야만 한다. 이러한 본문들 사이의 유사성은 비록 항상 인정받지는 못하였지만 오랫동안 인정받아 왔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극단을 피해야만 한다. 우리는 유사성의 중요성을 '일반적 전통'의 증거로 축소시키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또한 유사성을 단순한 우연으로 돌리는 것도 충분하지 않다. 오히려 유사성은 의도적이며 모세오경을 통하여 발견되는 보다 큰 평행 구조의 일부로 보인다. 예를 들면 요셉의 서술 속에서 두드러진 유사성을 지닌 일련의 평행적 꿈이 설명되고 있다. 비록 그 자세한 사항은 차이가 있지만 각각의 꿈은 대체로 같다(37:5-7,9, 40:5-19, 41:17-21, 22-24). 바로의 꿈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요셉은 꿈의 반복 뿐만 아니라 모세오경 내의 모든 반복 및 평행 뒤에 놓여있는 의미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바로께서 꿈을 두번 겹쳐 꾸신 것은 하나님이 이 일을 정하셨음이라 속히 향하시리니"(41:32). 모세오경을 통하여 비슷한 서술이 반복되고 순환되는 이유는 그 일이 하나님에 의해서 확고히 결정된 것이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약속을 곧 이루시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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