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절
심하고 - (* , 카베드). 맹렬한 (출 9:24), 무거운 (시 38:4)이란 뜻으로서 도무지 감내하기 어려운 상황임을 의미한다. 다시 가서 - 야곱은 아들들의 애굽행에 필요한 준비, 곧 베냐민을 동행시켜야 한다는 사실(42:20, 34)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들들의 애굽행을 명령한 것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급박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절박한 상황의 배후에는 이스라엘의 애굽행을 주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담겨 있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보존. 번창시키기 위해 곡창 애굽 땅을 준비하시고 그들을 몰아쳤던 것이다. 양식을 조금 사라 - 조금 은 적은 양 곧 70여명의 야곱 가족이 섭취하기에는 부족할 수밖에 없는 분량이라는 말인 둥시에 상당 분량을 가리키는 동양식 의례적 표현 양식을 좀 사 오너라 의 뜻(18:4, 5:43:11)이기도 하다.
====43:3절
유다가 아비에게 말하여 가로되 - 앞서 르우벤의 간청(42:37)에 거절되었으므로 이제는 유다가 야곱에게 베냐민을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유다는 야곱의 네째 아들이었으나 맏아들인 르우벤의 간청이 거절되었고, 둘째 아들인 시므온은 애굽에 억류되었으며, 세째 아들인 레위는 세겜인 살륙 사건을 주도하여(34:25) 야곱에게 신용을 잃었으므로 이졔 유다가 나선 것 같다. 전날 유다는 그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려고 했을 때에 그들의 잔인한 행동을 막는(37:35-28) 일을 했으므로 양심적인 거리낌없이 이러한 말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햐편 유다는 이 사건을 계기로 서서히 구속사 전면에 주도적 인물로 부각되다가 출애굽과 왕정시대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주도적 역할이 절정을 이룬다.
===43:6절
선택받은 민족 전체의 애굽 이거문제와 관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본서 기자 모세는 애굽 이주가 인간(야곱)에 의한 게획이 아니라 하나님(이스라엘)의 거룩한 섭리에 따른 것임을 강조하기 위해 이렇게다른 표현을 사용하였다. 가로되 - (* , 아말). 원뜻은 한탄하다 (Living Bible, moaned)이다. 야곱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고 아들들에게 항변조로 말을 시작하였다. 오히려...나를 해롭게 - 야곱은 기근으로 인한 전가족의 위기보다는 베냐민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짜증스럽게 말을 잇고 있다.
===43:7절
그들이 가로되 - 지금까지는 르우벤과 유다만이 야곱에게 이야기했으나 이제는 모든 아들들이 그들의 요구가 정당함을 이야기한다. 너희 아버지가...아우가 있느냐 - 이러한 요셉의 질문은 그가 아버지 야곱과 동생 베냐민에 대한 관심에서 떠날 수 없었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조조(條條)이 - 이 말은 조목조목 자세히 란 뜻이다. 즉 요셉이 그들에게 자세하고 치밀하게 질문했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이 대답할 수밖에 없었음을 타당성있게 변명하고 있다.
===43:8절
유다가...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 유다는 베냐민을 아이 라고 불렀다. 여기서 아이 (* , 나아르)란 고함치다 는 의미에서 유래한 말로써 유년기에서 청년기에 이르는 사람을 통칭한다. 여기서는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일컫는다. 당시 베냐민은 이십세가 넘었지만 40세가 넘은 유다 자신에게는 역시 보호의 대상이 된 것이다.
====43:9절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 그는 베냐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신 담보로 내놓으면서까지 어떤 피해도 베냐민에게 미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했다.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 평생을 아버지 앞에 죄인으로 살면서 아비가 부여하는 어떠한 형벌도 달게 받겠다는 비장한 각오의 표현이다. 실제적인 문제로 야곱 가문에서 추방당한다든가 합당한 상속권의 박탈, 마지막 유언시의 저주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다의 이러한 자기 희생적인 발언은 결국 모든 일이 선하게 끝났을 때 야곱의 큰 축복으로 보상받는다(49:8-12).
====43:10절
벌써 두번 갔다 왔으리이다 - 당시 야곱 가족의 거주지가 정확하진 않으나 남부 가나안 지방에서 애굽교역지와의 거리는 대부분 열흘길 정도였다. 따라서 하루 속히 애굽행을 재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짐직할 수 있다.
====43:11절
그러할진대 - 문자적으로 만약 지금 당장 그렇게 해야 한다면 이다. KJV는 이러한 원어의 뜻을 살린 반면에 (If it must be so now), Living Bible은 만약 그것을 피할 수 없다면 (If it can't be avoided)으로 의역하였다. 여하튼 야곱이 고심한 후에 다른 방도가 없었으므로 이와같은 결정을 하였다. 이렇게 하라 - 야곱은 지금까지의 소극적인 자세를 버리고 가족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대책을 세운다. 야곱은 그의 연륜과 경험을 살려 지혜로운 지시를 하였다.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예물을 삼을지니 - 주위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하기를 힘쓰는 야곱 성격의 일면을 보여준다. 그는 일찍이 에서를 만나러 갈 때에도 이렇게 예물을 보냈었다(33:8). 야곱이 보낸 선물들은 애굽에서 생산되지 인는 가나안 토산물들이다. 혹 자는 (Bohlen) 야곱의 예물 준비는 기근이라는 상황에서 전혀 격에 맞지 않는 것으로 모순이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야곱이 준비한 예물은 기근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 것들일 뿐 아니라 가뭄때 더 맛을 내는 과일 종류들이란 점에서 위의 주장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 유향 - 유향목의 진액을 짜내 말린 고급 향료이다. 벌꿀이 아니라 신선한 포도에 즙을 내어 졸인 진한 시럽(syrub)이다. 오늘날도 헤브론의 주 산물이라 한다. 향품 - 고무(Lange. RSV) 내지는 향료(KJV)로 보고 있다. 아마 흰 수지질(樹脂質)의 약제인 것 같다. 몰약 - 감람과의 관목 줄기에서 채취한 즙으로 진한 향기의 약재(방부제 등에 사용) 이다. 비자 - 여기서 나는 기름은 식용, 등화용. 가구용, 살충제용 등 다양하게 사용되어 팔레스틴에서는 인기 있는 상품 중 하나이다. 파단행 - 알몬드(Almond) 나무이다. 애굽에 흔치 않아 상품적 가치가 높다.
====43:12절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기지고 - 먼저번 곡식을 사기위해 가져갔던 돈의 두배라는 의미가 아니라 지난번 그냥 먹은 식량값과 다시 사고자하는 양곡의 값에 해당하는 돈을 함께 갖고 갈 것을 의미한다.
차착(* , 미쉬게) - 허물되다 (욥 19:4), 실수하다 (사 28:7), 범죄하다'(민 15:22)는 '솨가'에서 파생한 말로 실수로 인한 뚜렷한 허물을 뜻한다. 야곱이 이 말을 사용한 것은 곡물을 관리하던 애굽 관리들의 실수로 또는 자신의 아들들이 너무 급해서 경황중에 돈을 치우지 않았기 때문에 지난번의 돈이 다시 자루 속에 담겨 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풍습이지 실제로 정량보다 더 많은 음식을 주어 먹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삼상 9:22-24). 특히 애굽인들의 숫자 개념에서 5 는 완전함 , 충만함 을 뜻한다(45:22;사 19:18). 한편 요셉은 이 일을 통하여 형들이 아직도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특정인에 대하여 시기하는 버릇이 남아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꾀하였는지도 모른다(Pulpit) 함께 즐거워 하였더라 - 가정에서의 편애(42:38)는 물론 가장 어린 자임에도 불구하고 애굽에서도 특별 대우를 받는 베냐민에게 요셉의 형들은 전날 요셉에게 보였던 시기심(37:4) 같은 것을 전혀 보이지 않고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 이것은 요셉의 일(37:31-35) 이후 그들이 많이 회개했고(42:21,22) 또한 그들의 인격이 성숙된 것을 의미한다.
===43:14절
전능하신 하나님(* ,엘 솨다이) - 하나님께서 자신을 족장들에게 나타내실 때 사용하셨던 특별한 명칭으로서(출 6:3) 천지의 주재이시며 조상과 맺으신 언약을 온전히 이루시는 능력의 하나님을 강조한 호칭이다.야곱이 이 명칭을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이 난관을 능히 해결해 주실수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 여기 은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라하밈'(* )이다.성경에서 이 말은 특히 불타는 심정으로 긍휼을 호소할 때(신 13:17)와 '죄를 사유하시는 하나님의 자녀'를 가리키는데 사용되었다(출 34:6;시 51:3;39:8;마 7:19).이렇게 볼 때 여기서 하나님의 크신 자비하심을 간구하는 야곱의 심정이 재판장 앞에 선 죄인의 심정과 더불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 자포자기적 표현이 아니라 그는 그후의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기겠다는 절대적 신뢰감을 토로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이것은 어떤 경우에든지 그 결과를 자신의 신앙으로 수용하겠다는 의지의 문학적 표현이다(왕하 7:1;에 4:16).
===43:15절
갑절 돈을...가지고 - 이것은 곡식을 두배로 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전날의 돈을 다시 되돌려 주기 위해서였다<12절>.
===43:16절
베냐민이...있음을 보고 - 애굽으로 팔려오기 전 요셉이 베냐민을 마지막 본 때는 22년 전 헤브론에서 유아 때(1살 정도)였다.따라서 한 눈에 베냐민을 알아본다는 것은 무리한 해석인 듯하다.그러나 요셉은 형들을 제외하고 1차 방문 때 안보였던 나머지 젊은 청년이 베냐민인 줄 짐작으로 알았을 것이다. 짐승을 잡고 준비하라 - 요셉은 자신의 집을 맡고 있는 청지기에게 그의 형제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라고 지시했다.그의 집은 성의 외곽 지역에 있었던 것 같다.어떤 학자는 당시 애굽 상류 인사들은 종교적인 이유 때문에 결코 고기를 먹지 않았다고 생각하며 이 구절의 역사성을 의심한다(Bohlen).그러나 황소(Apis)나 매(Horus) 등 신상으로 숭배되던 짐승들을 제외하고는 각종 조류나 짐승을 식용으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Wikinson).뿐만 아니라 심지어 황소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식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Kalisch). 오정에...먹을 것이니라 - 오정은 애굽인들의 일반적인 식사 시간이다.
====43:18절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 요셉의 형제들은 총리대신 집으로 인도될 때 형벌을 받게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하였다.왜냐하면 일개 양식 구입차 방문한 외방 사람들을 애굽의 총리 집에 모셔들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로 사려되었기 때문이다.특히 그들은 1차 방문시 자신들을 첩자로 알아 투옥시키려 했던 사건과(42:12-16) 물건 매입비가 도로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발견되었던 일(42:27,28)을 생각하고는 돈을 다시 가지고 온 것을 불안해 하였던 것이다(욥 30:14;시 22:8;잠 16:8). 우리를 억류하고...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신변과 소유물에 큰 위험이 닥쳐온 것이라 확신했다.그들이 이처럼 두려워한 데는 여호와 신앙에 대한 결여도 있었겠지만 그들의 뿌리 깊은 죄의식이 그들을 짓누른 까닭이기도 하다.이러한 상황에서 요셉은 곧 바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들에게 충분한 반성의 기회를 준 다음 구원의 기쁨을 주려고 했다.이처럼 하나님도 죄인들이 깊이 뉘우치고 회개를 할 때 용서와 구원의 기쁨을 주신다.
===43:20절
성문에 이르러 - 고대에는 성문이 모든 공공 생활의 중심지로서 매매가 이루어졌고 재판관의 장소이기도 했다(19:1 ; 23:10). 사람이 많이 운집하는 이곳에서 세겜은 이스라엘과의 교류에 관해 능란한 연설로 여론화를 도모하였다.
===43:21절
돈이 본수대로 자루...있기로 - 요셉의 형제들은 그들의 자루에서 발견된 돈에 대하여 요셉의 청지기에게 변명하고 있다.그러나 그들의 변명은 사실과 다르다.왜냐하면 객점(客店)에서는 정작 한 사람의 자루만 풀어 보았으나(42:27)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객점에서 짐을 풀어 보았다고 했기 때문이다.아마 그들은 전번에 왔을 때 정탐꾼이란 혐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결백을 과장해서 이야기한 것같다(42:16).한편 여기서 '본수대로'는 곡식값으로 지불했던 돈의 중량이 '고스란히 그대로'란 뜻이다.
====43:23절
너희 하나님...주신 것이니라 - 요셉의 청지기도 히브리인의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 했음을 알 수 있다.이러한 사실은 당시 요셉이 자신의 집을 여호와 신앙으로 철저히 훈련했다는 암시가 된다(Murphy).또한 청지기의 말은 이 사건의 핵심을 지적한 것이다.왜냐하면 비록 요셉의 명령에 의하여 이러한 일이 이루어졌지만(42:25) 이것은 그들을 놀라게 하려는 것이 아니었고 그들을 도우려는 친절에서 비롯된 하나님의 뜻에 맞는 행위였기 때문이다.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 요셉의 집에 혼자 남아 있던 그(42:24)가 어떻게 생활했는지는 모르지만 아직도 요셉의 신분을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그런데 요셉이 형제들로 하여금 시므온을 만나게 한 것은 먼저 형제들을 안심시키기 위한 것 같다.이렇게 볼 때 시므온이 매우 평안한 생활을 하였음을 암시받을 수 있다.한편 형제들을 만난 시므온은 아마 그들에게 그리 큰 해는 없을 것이라고 안심시켰을 것이다.
===43:24절
발을 씻게하며 - 당시 손님을 접대하던 일반적인 관례였다(18:4;24:32).이일로 인하여 형제들은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지만 불안을 완전히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죄인의 마음에는 참된 평안이 있을 수 없다.
===43:25절
예물을 정돈하고 - '정돈하고'에 해당하는 '쿤'(* )은 '확실하게 하다','예비하다'는 뜻으로 성의를 다하여 준비한 예물을 더욱 돋보이게 가지런히 놓는 것을 가리킨다.이러한 행위는 청지기의 정중한 예우,시므온의 무사한 출옥(23절),오찬 예고등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어떻게 하든 요셉의 호의를 사려고 애쓰고 있는 형제들의 모습을 잘 나타내 준다.
====43:26절
땅에 엎드리어 절하니 - 요셉이 17세때에 꾼 꿈이 성취되는 순간이다(37:2,5-9).요셉의 꿈에 대하여 반감을 품고 그 꿈을 무산시키려고 획책했던 형들의 간계(37:18-20)가 이처럼 도리어 그 꿈을 성취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음을 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1) 인간들의 생각을 초월하여 세상만사를 당신의 뜻대로 주관해 나가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이다(사 55:8,9).(2) 인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모든 계시와 약속은 비록 더디 성취되는 것 같아도 때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 진다는 사실이다(합 2:3).
====43:27절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숨기고 있지만 아버지에 대한 관심만은 숨기고 있지 못하는 장면이다.즉 요셉은 연로한 아버지,또한 자기를 가장 사랑했던 아버지 야곱이 기근의 어려움 중에 무슨 변고가 없는 지 가장 궁금했던 것이다.그의 효성은 이미 어릴 적부터 지극했었다(37:13).
===43:28절
주의 종 우리 아비 - 요셉의 두번째 꿈(37:9)이 성취되는 순간이다.즉 야곱이 직접적으로 요셉에게 경배하지는 아니하였지만 형제들이 야곱을 가리켜 요셉의 '종'이라고 칭한 것은 간접적으로 경배한 것과 다름없는 의미를 지닌다.이외에도 야곱은 그의 노후를 요셉에게 의지하였으니 실제적으로 꿈의 내용을 성취시켜 준 것이나 마찬가지이다(47:11,12).
====43:29절
소자(* ,벤) - 문작적 뜻은 '아들'또는 '조카'이나 예외적으로 손아래 사람을 친근하게 부를 때 사용되기도 한다(시 34:11).요셉은 자신의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이자 친동생인 베냐민에 대하여 각별한 애정과 친근감(30절)에 겨워 자연스레 이러한 호칭을 사용하였을 것이다.
====43:30절
마음이 타는 듯하므로 - '타는 듯하다'에 해당하는 '마하르'(* )는 '액체가 되다'는 뜻으로 너무도 마음이 군급(窘急)하여 심장이 녹아 내릴 정도를 가리킨다.이는 베냐민에 대한 요셉의 주체하기 힘들 정도의 애정과 흥분을 의미하는데 그의 또 다른 성품을 잘 보여준다.즉 지도자로서의 요셉은 냉철한 판단력과 통솔력을 지닌 이지적인 자였지만(47:23-26) 형제에 대하여서는 역시 진솔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다정 다감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급히...들어가서 울고 - 요셉은 베냐민에 대한 사랑의 감정이 북받쳐 올랐기 때문에 급히 자리를 피하여 울었다.이것은 요셉이 감정을 견디지 못하여 운 두번째 사건이다.처음은 그의 형제들이 자신에 대한 잔인성을 이야기할 때였다(42:24).이 사건은 또한 요셉의 지도자적 면모와 풍부한 인간성을 동시에 보여준다.즉 요셉은 풍부한 정서를 갖고 있었으나 그것에 지배되지 않고 큰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굳은 의지를 가졌던 것이다.
===43:32절
따로 하고...따로 하니 - 이처럼 요셉의 시종들이 세 개의 상을 각기 따로 차린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1) 형제들과는 구별되는 애굽 총리 요셉의 신분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2) 애굽 종교를 숭상하지 않는 이방인,특히 히브리인과는 식사를 같이 하지 못하도록 금지되어 있는 애굽의 규례 떠문이었다(Aalders). 부정을 입음이었더라 - 물신(物神) 숭배 사상에 젖어 소를 신성시여기던 애굽인<출 32장,애굽의 종교>과는 달리 히브리인들이 소를 제물이나 식용으로 삼은 데(신 12:20-28)서 비롯된 풍습인 듯하다.아뭏든 애굽인들은 히브리인들이 사육한 짐승의 고기를 먹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이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한 도구나 식기조차 사용치 않았다(Herodotus).
===43:33절
그들이...장유의 차서대로 앉히운바 - 형제들은 이러한 배열에 대하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왜냐하면 이 일은 자신들의 가정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있지 않는 한 불가능했기 때문이다.결국 이는 암암리에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려 한 요셉의 의도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형제들은 아직까지도 미처 동생 요셉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지 점을 잘 치는 자(44:15) 내지는 초자연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 정도로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했을 뿐이다.
===43:34절
오 배나 주매 - 특별한 손님에 대한 경의와 애정을 표하는 고대 근동의 상징적인 풍습이지 실제로 정량보다 더 많은 음식을 주어 먹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다(삼상 9:22-24).특히 애굽인들의 숫자 개념에서 '5'는 '완전함','충만함'을 뜻한다(45:22;사 19:18).한편 요셉은 이 일을 통하여 형들이 아직도 형제간에 서로 우애하지 못하고 특정인에 대하여 시기하는 버릇이 남아 있는지 시험해 보려고 꾀하였는지도 모른다(Pulpit). 함께 즐거워 하였더라 - 가정에서의 편애(42:38)는 물론 가장 어린 자임에도 불구하고 요셉의 형들은 전날 요셉에게 보였던 시기심(37:4) 같은 것을 전혀 보이지 않고 함께 즐거워하고 있다.이것은 요셉의 일(37:31-35)이후 그들이 많이 회개했고(42:21,22) 또한 그들의 인격이 성숙된 것을 의미한다.
영적인 갈망(渴望)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하나님의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고통이 심할수록 고통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이 뒤따르듯, 하나님께서는 야곱 가문으로 하여금 요셉이 터 잡아 놓은 애굽으로 향하도록 대기근을 풀지 않으신다. 이래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극한 상황은 인간으로 하여금 살아 남을 가능성이 있는 곳에 뛰어들도록 만든다. 이에 본장 1-15절은 야곱이 베냐민을 그 형들에게 딸려 애굽으로 보내게 되고 만다는 기사이다. 그리고 16-25절은 이리하여 다시금 요셉의 집에 이르른 형제들이 요셉을 만나기까지 두려움과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장면이며, 마지막으로 26-34절은 요셉이 그 동안 헤어져 있던 열 한 형제들과 재회하며 같이 식사를 나누는 장면이다.
늘그막에 라헬에게서 낳았던 아들 베냐민을 놓지 않으려는 야곱의 고집은 하나님 앞에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던 자신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세계가 존재하고 있는 한, 하나님의 나라가 마음 속에 건설될 여유는 없다. 수많은 역경을 헤쳐 온 야곱에게 아직까지 남아 있는 자기 영역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가야 하는 선민 이스라엘에게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었다. 가문의 가장으로서 자신의 소유물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의 후손들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은 성취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나안 땅에 오랬동안 거한 야곱 가족은 그 연한(年限)만큼이나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멀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가나안을 떠난 요셉이 애굽에서 자신의 믿음을 지킨 것과는 달리, 가나안에 거한 형제들은 모든 일에 자신이 없고 두려움에 차 있었다. 하나님을 멀리한 자에게서나 찾을 수 있는 두려움이 야곱의 가족에 이토록 만연된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때가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야곱 일가)은 하나님 증심으로 돌아와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대로 애굽을 향한 이들에게서 두려움을 없애 주셨고 모든 일이 순탄하도록 도와 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거하도록 때론 고난을 주시며 때론 풍족한 은혜를 선사하신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향해 주저하는 인간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본장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은 인생의 경험과 무관하며, 값진 물건으로 잘 봐 달라는 아부가 필요없는 오직 결단 뿐임을 주지(周知)시키고 있다.
1. 유다의 설득과 야곱의 결단(43:1-15)
전장에서 우리는 요셉의 형들이 시므온을 애굽에 볼모로 잡혀 둔 채 양식을 사 가나안으로 되돌아왔음을 살펴 보았었다. 그런데 야곱의 가족들이 그 같은 양식을 먹으면서 마음 편했을리 만무하다. 아마 야곱의 아들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 시므온을 되찾고, 양식도 사자는 요구를 끊임없이 했었을 것이며, 사랑하는 아들을 또하나 잃어야 하는데서 오는 야곱의 절망과 진노는 집안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화합되지 못한 야곱의 집안에는 해결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해결책은 가족의 노력에 의해 주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본문은 그 같은 해결책의 실마리로서 온 땅에 여전히 기근이 심하고 야곱의 집안에는 다시금 양식이 떨어졌음을 보여 준다(1,2절). 이와 같은 현실은 야곱의 아들들이 다시금 애굽으로 식량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전제를 만들었으며, 이 전제를 앞둔 최후의 가족 회담에서 유다의 설득을 중심으로 가장(家長) 야곱의 결단을 촉구하게 되었다(3-10절). 그 결과 야곱은 배후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에 굴복하였고, 형제들은 베냐민을 동행하여 재차 애굽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는데(11-15절), 이는 그동안 시기와 죄악, 불평과 원망 따위로 분열돼 있던 야곱의 집안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었음을 의미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애굽 이주와 민족적 위대한 역사인 출애굽 사건(15:12-16)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전단계 과정으로 강권적으로 역사하시어 야곱 가족 내의 불일치부터 제거해 주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죄가 더한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욱 넘친다"(롬 5:20)는 사실을 확증받게 된다. 그러나 그 역(逆)으로 죄와 분열이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도 깊이 명심해야 할 것이다(롬 6:15,16).
* 야곱의 결단에서 배워야 할 교훈. 본문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가는 것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 아들들의 요청에 대하여 야곱이 마침내 결단을 내려 그것을 허락하였음을 보여 준다. 사랑하는 라헬에게서 낳은 마지막 아들마저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14절)라고 고백한 이것은 야곱이 자신의 인간적인 마지막 기쁨을 온전히 포기하였음을 뜻한다. 즉 자기가 가장 귀하게 여기고 아끼는 것을 포기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야곱의 집에 실현되었던 것이다. 만일 야곱이 끝까지 베냐민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기근으로 인해 야곱은 베냐민을 잃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야곱의 희생적 결단은 기독교적 진리를 다시 한번 입증해 주었다.
실로 죽으면 살고, 썬으면 많은 열매를 맺으며, 낮아지면 높아지고, 버리면 얻게 되는 놀라운 기독교적 진리를 생생히 보여 준 것이다. 즉 세상적인 것을 하나님 앞에 내어 놓을때, 비로소 하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가장 귀한것 곧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하나님 앞에 포기했을 때 그는 역으로 만백성의 아비가 될 수 있었고, 야곱이 노년의 유일한 기쁨인 베냐민을 내놓았을 때 비로소 이스라엘 12 공동체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만은 하나님 앞에 내놓지 못하겠다는 이삭은 없는가? 아직도 하나님 앞에 온전히 포기하지 못한 베냐민은 없는가? 그 마지막 자기의 영역이 존재하는 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는 그만큼 더디게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야곱의 결단처럼, 에스더의 결단처럼(에 4:16) "잃으면(죽으면) 잃으리로다(죽으리로다)"라는 자기 희생적 결단으로 자기의 가장 귀중한 것마저 온전히 하나님 앞에 포기할 때, 성도는 이제 세상에 기댈 것이 없는 고로 온전히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되고,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만을 바라보는 자에게 놀라운 은총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오늘 야곱의 결단은 바로 그러한 교훈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2. 요셉을 두려워하는 형제들(43:16-25)
본문은 긴 여행 끝에 다시금 요셉의 집에 다다른 형제들이 요셉의 분부를 받은 청지기로부터 환대를 받지만, 자신들에게 어떠한 불행이 닥칠지 몰라 두려워하는 장면이다. 그중 16,17절은 형제들이 청지기의 인도를 받아 집 안으로 안내되는 장면이다. 그리고 18-22절은 뜻아니한 환대에 당황한 형제들이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고 지난날 자루 속에 든 돈 사건에 대하여 변명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23-25절은 그러자 청지기가 형제들을 안심시키며 식사 준비를 차려 주는 장면이다. 이상에서 볼 수 있는 형제들의 불안감은 분명 첫번째 여행시의 돈 사건(42:26-28,35)과 관련하여 애굽 총리가 간사한 계획을 세워 자신들을 재차 함정에 빠뜨린 후 노예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보다 더 근원적인 이유로 그들이 지난날 요셉에게 저지른 범죄를 자각하고, 그 죄에 대한 댓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기때문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42:21,22).
아뭏든 요셉 형제들의 두려움은 오늘날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두려움을 생각케 해준다. 더욱이 현대인은 어느 시대에 살다 간 사람들보다 더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고 주장한다. 즉 현대 세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핵전쟁을 두려워하면서 하나뿐인 지구를 지키자고 아우성이다. 물질적 풍요로만 말한다면 오히려 현대 세계는 축복받은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안에 떨고 있다. 핵무기 때문에 혹은 환경 오염 때문에 인류의 장래가 암담하다고 토로(吐露)하고 있지만, 기실(基實) 이 두려움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뿌리깊은 죄악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근원적인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오직 죄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밖에 없는 것이다.
* 히브리인의 식생활. 1. 일상시(日常時). 이들은 보통 하루에 두 번 식사를 하는데(출 16:12 ;왕상 17:6) 첫 식사는 정오에, 저녁 식사는 저녁 일을 마친 후에 한다. 특히 저녁 식사 시간은 원기 회복은 물론 온 가족이 한 자리에 모여 친화(親和)를 도모하는 시간이다. 주식은 빵과 물이었으며, 곁들여 사육하는 짐승의 젖과 고기, 그리고 계절에 따른 과일을 섭취하였었다.
2. 손님 접대시(接待時). 손님이 오면 주인은 먼저 그를 상석에 앉히고 손과 발을 씻을 물을 가져다 준다(18:4). 그후 음식이 차려지면 주인은 그 음식에 대한 감사 기도를 드리고(삼상 9:13), 손님과 더불어 음식을 들기 시작한다.
3. 여행시(旅行時). 여행자들은 노중(路中)에서 양식을 구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고대 근동에서는 일찍부터 나그네를 환대하는 풍습이 생겨 났다(18:1-8 ;19:1-3). 길가던 여행자들은 일단 어느 집에 유숙하게 되면 그날의 식사와 잠자리를 보장받았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전도 여행시에 양식을 준비하지 않고 길을 떠났다(마 10:10). 이에 반해 대상(隊商)들은 빵, 말린 과일, 치즈 등의 식량을 준비해 가지고 다녔다.
3. 형제들을 환대하는 요셉(43:26-34)
야곱의 열두 아들이 실로 20여년 만에 한 자리에 모인 장면이다. 그중 26-28절은 형들을 대면한 요셉이 다시금 아비 야곱의 안부를 묻는 장면이다. 그리고 29,30절은 동생 베냐민을 본 요셉이 감정을 억제치 못하고 급히 안방에 들어가 울고 나오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31-34절은 요셉이 형제들을 그 나이 순대로 앉힌 후 함께 식사를 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요셉이 비록 형제들을 알고 외형상 모든 형제들이 한자리에 있었다고 해도, 다른 형제들은 요셉의 정체를 모르며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에게선 만남이 주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모든 인간을 아시며 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나타내신다 하더라도 인간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다면 '구원'이라는 극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만남이란 있을 수가 없다.
또한 요셉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며 형제들이 자신을 알아볼 수 있도록 식사를 베풀었다. 그러나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의 친절에 대해 긴장을 풀지 않았으며, 다소 굴욕적인 자세를 취하였다(28절). 이들이 요셉을 자신의 형제로 알아보기에는 너무나도 오랜 세월이 흘렀으며 세상살이의 처세술에 짓눌려 진실을 바라볼 수 없었다. 본문의 이러한 사실은 현재 인간의 상황을 너무도 잘 표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기 원하시며, 그들과 더불어 화목하게 되기를 원하신다. 그럼에도 인간은 세상의 헛된 수단으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하기 때문에 그분의 진정한 성품을 알 수 없으며, 너무도 오랜 시간을 사단의 음모에 속아만 왔기 때문에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를 상실하고 말았다.
이처럼 마음 문이 굳게 닫힌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진리를 밝히 알 수는 없다.다만 인간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이 베풀어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능력만이 있을 뿐이다. 즉 후일 요셉의 경우(45:1)에서 보는 바 그분이 생명 잔치를 배설(排設)하고 자신의 정체를 스스로 드러낼 때에만이 인간은 구원의 기쁨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마 13:10-23).
* 요셉 형제 사랑과 이스라엘 공동체. 형제애(兄弟愛)는 인간 관계의 아름다움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다 형제니라"(마 23:8)는 말씀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화목을 강변하였다. 교회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다윗과 요나단의 사랑을(삼상 18:1-3 ;20:17 ;삼하 1:26)형제애의 모범 사례로 꼽아 왔다. 그러나 창세기 전체에서 형제 사랑의 아름다움은 요셉을 통해 처음 나타난다.창세기에 나타난 아름다운 인간 관계로서 아브라함-사라, 야곱-라헬의 부부관계나 아브라함-이삭, 야곱-요셉의 부자 관계 그리고 하갈-이스마엘, 리브가-야곱 같은 모자 관계를 들 수 있다. 오히려 형제 관계는 가인-아벧, 이스마엘-이삭, 에서-야곱과 같은 대립과 반목(反目)의 연속이었다.
아마도 형제가 동격(同格)이라는 점에서 서로가 격려해 주는 보완 관계를 맺기보다는, 편애와 장자권 다툼 등으로 인한 시기와 경쟁 관계에 놓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여기 요셉의 형제애가 지금까지의 모든 수치스런 형제 관계를 불식시키고 형제 사랑의 진수를 보여 주고 있다. 요셉에게서 기인한 이 형제 화합의 아름다움은 이스라엘을 '열두 아들의 지파연맹'이라는 '선민 공동체'로 출발케 한 원동력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는 가장 화목하기 힘든 동격의 대립 상태를 극복하여 가장 아름다운 인간 관계로 전환시킨 '기적의 공동체'다. 아울러 교회란 그리스도로 인하여 '너'와 '나'라는 가장 상대적인 개념이 '우리'라는 아름다운 공동체 개념으로 승화한 곳이라 할 수 있다(갈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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