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절
눈을 들어 보니 - 하나님과 대면한 이후, 더 이상 전전 긍긍하며 겁에 질린 '야곱'의 눈이 아니라, 이제는 믿음과 확신에 찬 '죽으면 죽으리라'(에 4 : 16)란 신앙으로 형 에서를 담담히 바라보는 '이스라엘'의 눈이다.이처럼 하나님께 매어달려 그분의 은헤를 체험한 자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야말로 하나님께무릎 꿇는 자는 사람에게 무릎 꿇지 않는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33:2절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야곱은 자식들과 아내들을사랑하는 순서대로 배열하였으므로 라헬과 약6살 정도 난 막내 아들 요셉은 가장 뒤에배치되었다. 이것은 아직도 버리지 못한 야곱의 뿌리깊은 편애 심리를 보여 준다(29:30).
====33:3절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 얼굴이 땅에 닿을 만큼 몸을 숙여 경의를 표하는 인사를 한곳에 머물러 서서 한 것이 아니라 차츰 가까이 가면서 계속적으로 하였음을 가리킨다. 즉 이것은 고대에 왕이나 점령자들에게 갖추던 예의로 먼 발치에서 일곱번 절하는 사이에 가까이 나아가던 방식이다. 그러나 야곱은 위선이나 비굴한 마음에서가아니라 진심으로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화해를 간구하는 뜻으로 성심성의를 다하였을 것이다.
===33:4절
그를 맞아서 안고 - 다혈질적 성격인에서는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형제를 보는 순간 모든 살의(殺意)와 원통함이 눈녹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얼음보다 차가운 에서의 마음에 은혜와 사랑의 온기를 심어 주셨기 때문이다.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 우애가 넘치는 재회 장면으로서 그들의 지난 이산 기간에의 서러움과 지금의 만남이 한없이 기뻤기 때문에 취할 수 있었던 자연발생적인 인사와 교제였다(45:14).
====33:5절
이들은 누구냐 - 직역하면 '이들은 너에게 있어서 누구냐'로 그 관계를 묻는 말이다. 에서는 집을 떠날 당시 미혼이었던 야곱의 곁에 모여있는 여인들과 아이들에게로눈길을 던지며 물었다. 하나님(* , 엘로힘) - 야곱은 언약의 하나님인 '여호와'를 언급함으로써과거 에서에게 입힌 쓰라린 기억을 상기시켜 일을 그르칠까봐 하나님의 통상적인 명칭을 사용한 것 같다<1:1 주석>.
====33:6,7절
요셉이 라헬로 더불어 - 다른 모자(母子)들과는 달리 요셉이 자기 어미보다 먼저나온 이유는 확실치 않으나 아마도 아무런 사정도 모르는 철부지로 말로만 듣던 큰 아버지를 막상 보자 그리움과 반가움에서 우러나온 행동이었을것이다.
====33:8절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 문자적으로는 '이 모든 무리는 네게 무엇을 의미하느냐?'이다. 예상 밖의 선물을 주는 야곱의 동기에 대한 의아심의 표시이다.
====33:9절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예쉬 리 라브). '있다'란 동사 '야솨'와 '...에게'를 뜻하는 전치사 '리' 그리고 '많다'란 '라브'가 합쳐진 말로'나는 많이 소유하고 있다'란 뜻이다. 이는 야곱의 예물이 자신에게 필요치 않음을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사실 서로간의 진정한 화해는 그 사이에 속된 이권이 오고 가는 것이 필요치 않기 마련이다.
====33:10절
은혜를 얻었사오면...예물을 - 고대사회에 있어서 선물은 각 부족간의 우의와 상호동맹에 대한 증표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상대의 선물을 받는 것은 그의 교제를 받아들이는 표로, 선물을 내치는 것은 전쟁과 불화를 표시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야곱은에서의 용서와 화해의 증거물로 선물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것 같사오며 - 형의 얼굴에 나타난 따뜻하고 친절한 우애 속에서 야곱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의 빛을 보았다. 왜냐하면 복수심에 가득찬 형 에서의마음을 그처럼 부드럽게 변화시켜 자신을 영접토록 주장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깨달았기 때문이다. 기뻐하심이니이다 - 이에 해당하는 원어 '라차'는 '즐거워하는 것'(잠 23:26) 뿐아니라 적극적으로 호의를 보이며 함께 연합하는 애정(시50:18)까지 의미한다===33:11절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 먼저 '족하오니'(* , 콜)는 모두(6:17 ;7:4). 여러가지(출 35:22) 등 전혀 부족함 없이 풍족한 상태를 일컫는다. 따라서 직역하면 '나는모든것을 소유하였으므로'이다. 단지 '많이 가졌다'라고 말한 에서(9절)와는 달리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 하나님께서 자신과 동행 하심을 확인한 야곱의 말이다.이처럼 하나님께 신뢰를 두는 자는 모든 것을 소유했다고 고백할 수 있다. 강권하매 받으니라 - 이를 통해 야곱은 형과 소원했던 관계를 모두 청산하고 화해를 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10절>.
====33:12절
너의 앞잡이(* , 레네게데카) - '...에게'를 뜻하는 전치사 '레'와 '...앞에'를 나타내는 '네게드'에 2인칭 접미어가 합쳐진 말로 '네 앞서'(KJV ; beforeyou)란 뜻이다. 즉 에서는 야곱의 길 안내자가 되기를 자청한 것이다. 그러나 미크(Meek) 같은 학자는 이를 '...의 곁에서'(alongside)로도 주장하였다. 이것은 격정의순간이 지나고 이제 차분한 상태로 돌아오자 형 에서가 동생에게 호위와 인도를 친절히 제의한 것이다. 그러나 야곱은 정중히 이 호의를 사양하였는데 그 이유는 (1)에서의 훈련된 군대와 유약한 자기 일행의 진행 속도가 맞지 않았고 (2)가고자 하는목적지가 달랐으며 (3)인간적인 정에도 불구하고 추구하는 삶의 목표 및 자세에 있어서는 도저히 형의 방식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곱은 형 에서와 사이좋고 평화롭게 헤어지기를 바랬었다.
===33:13절
자식들은 유약하고 - 당시 맏아들 르우벤은 13세 정도였고(29:20,21; 31:38) 막내아들 요셉은 6세 정도에 불과했다. 하루만 과히 몰면...죽으리니 - 얼마전 라반에게서 도피하면서 새끼 딸린 가축들을지나치게 몰아 지쳐있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행군하는 에서의 군대에 보조를 맞춰더 이상 무리하게 몰 수 없다는 말이다.
====33:14절
행보대로 - 직역하면 무리하지 않고 가축과 자식들의 '보조에 맞추어'가 된다. 가나안은 야곱 혼자만의 땅이 아니라 야곱 가족과 그 후손에게 약속된 복된 기업이었다. 세일로 가서 - 하란을 떠날 때부터 야곱의 목적지는 아비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헤브론이었다(31:18 ;35:27). 따라서 이 말은 형 에서를 고의로 따돌리려는 속임수가아니라 일단 헤브론에 정착한 다음 후일 세일에 있는 에서를 방문하겠다는 뜻으로 이해함이 좋다. 한편 그후 야곱이 세일 땅을 방문하였는지에 관해서는 성경상의 언급이없는데, 대신 아비 이삭의 장례식에서 다정하게 만난 두 형제의 모습은 기록되어 있다(35:29).
===33:15절
어찌하여 그리 하리이까 - 약탈자가 빈번히 출몰하던 당시 광야 여행에서 야곱이강력한 에서의 호위대를 이처럼 거듭 거절한 이유는 그가 이미 하나님의 군대(32:2)에 의해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음을 확신했기 때문일 것이다. 얻게 하소서(* , 에메차) - '발견하다'란 동사 '마차'의 미완료로서 '기원'을 뜻한다. 즉 형께서 다시 한번 은혜를 베풀어 너그럽게 제 사양의 뜻을 이해하시고 받아달라는 의미이다.
===33:17절
숙곳에...집을 짓고 - '숙곳'(* ,숙코트)이란 가축용 '우리' 또는 '장막'을 뜻하는 말로 얍복강에서 북쪽으로 16km 떨어진 요단 동편 계곡에 위치한 지역이다(수 13:27;삿 8:4-16). 이곳에서 야곱 일행은 수년을 거주했던 것 같다. 이는 어린 딸디나가 세겜에 당도했을 때 이미 성숙한 처녀였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뒷받침 된다(34:1-4). 한편 야곱 일행이 이곳에 장기간 체류한 이유는 (1) 라반집에서의 20년간에 걸친 종살이에 따른 압박감 (2)급한 도피 여행 (3) 얍복강 사건으로 인한 육체적불편함 (4)형 에서와의 극적인 만남 등으로 심신( 心身)이 완전히 지쳐 있어 일단은상당 기간의 휴식이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릿간 - 가축을 위해 갈대나 풀잎으로 엮어 만든 처소를 가리킨다. 방목에 의존했던 가나안에서 이 같은 처소를 마련한다는 것은 상당히 오랜기간 한곳에 머무를 것을시사하는 행동이다.
===33:18절
밧단아람에서부터 - 직역하면 '그가 밧단아람에서부터 돌아 왔을 때'이다. 이것은 오래전 하나님께서 맺으신 벧엘 언약(28:10-15)이 외삼촌 라반의 집인 밧단아람(28:5)에서부터의 귀향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평안히(* ,솰렘) - 가나안 정착을 순조롭게 진행하신 하나님의 손길을 암시하는 말로서 야곱에게 절대안전이 보장되었음을 나타낸다. 세겜성에...장막을 치고 - 이때 야곱은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신실성에 감사하며이전 하란으로의 도피 중 벧엘에서 맹세한 서원(28 : 21, 22)을 기억하고 곧장 벧엘로 내려가 감사의 단을 쌓았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하지 못한 야곱의 실수는 결국세겜 땅에서 '디나 강간 사건'(34장)이라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여기서도 우리는 성도의 최우선적인 행동 좌표가 항상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 유지어야함을 교훈받는다.
===33:19절
밭을...사고 -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28:13)에 의거하여 언젠가는 이 가나안 땅이자신과 자신의 후손의 터전이 될 것이라는 믿음에 근거, 그 담보로서 땅의 일부를 매입하였다(20절). 훗날 이 정신을 계승한 야곱의 후손들은 가나안 정복 직후 애굽에서운구(運柩)한 요셉의 유해를 이곳에 장사했다(수 24:32). 은 일백개(* ,베미아 케시타) - 직역하면 '100개의 케시타'이다.여기서 '케시타'는 일반적으로 동전으로 사용된 일정량의 은을 가리키는데, 혹자(Onkelos, Gesenius)에 따르면 '케시타'가 '새끼 양'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새끼양한 마리 가격에 상당하는 은' 이란 뜻으로 해석한다.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으나 성경 최초로 주화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33:20절
단을 쌓고 (* , 야체브미즈베아흐) - '세우다' 혹은 '만들다'란 동사 '야체브'의 3인칭 과거형과' 제물을 바치다', '동물을 희생시키다'라는 동사 '자바흐'에서 유래된 명사 '미즈베아흐'(제단)가 합쳐진 말로 '그는 동물을 희생시키는제단을 만들었다'란 뜻이다. 즉 야곱은 조부 아브라함이 처음 가나안 땅에 들어와 제단을 쌓은 그곳에(12 : 6, 7) 역시 같은 단을 쌓음으로써 섭리로 그를 인도하여 주신하나님께 자신의 첫 땅을 거룩히 구별하여 바쳤던 것이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 - '강한 자로서시의 하나님'을가리키는 '엘'과 '...의 하나님'이란 뜻을 지닌 '엘로아흐'의 연계형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이다. 야곱이 단을 쌓은 곳을 이처럼 명명(命名)한 이유는 자신과벧엘 계약을 맺어주시고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을 부여해 주신 그 하나님을 기념키위해서였다.
하나님은 압록강 사건을 통해(32:24-32) 야곱의 인격을 변화시켰고 에서의 불같은 증오심을 지극한 형제의 우애심으로 승화시키셨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의 본성적기질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면 20년 간의 별거 생활 동안 불화가 심화되어 도무지 화해할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서로를 허물없이 껴안고 눈물 흘릴 수 있었다(1-11절). 이처럼 인간 심령의 변화 주체는 하나님으로서, 하나님은 화석처럼 굳어버린 인간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마저 용서하며 사랑하게끔 만드신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하나님 없이 추구하는 변화는 인간을 더욱 곤혹스럽고 불행하게 만드신다.
한편 본장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으로 은혜스럽게 재회한 에서, 야곱 두 형제의 만나는 모습(1-11절)과 더불어 그들의 뜨거운 화해 장면, 그리고 야곱이 인간적인 여러가지 이유로 세겜에 안주하는 내용(12-10절)으로 엮어져 있다. 사실 형통한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에합당한 자로 살아가야 마땅했던 야곱은 가나안에 입국한 후 곧장 벧엘로 올라가 20년 전의 서원(28:20-22)을 갚았어야 했으나, 많은 재산으로 인해 숙곳에 집을 마련하고 뒤이어 세겜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17, 18절). 야곱은 훗날 딸 디나의 추행 사건(34장)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뒤늦게 깨닫고 벧엘 행을 결심하게 왼다(35:1-3). 결국 그가 추구했던 안주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었기에 실패하게 되었으며 그 실패의 배후에는 야곱을 당신의 품으로 인도하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섭리가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실수 투성이인 인간을 온전하게 하시려고 때로는 치시고, 때로는 싸매시며 역사의 한 고비 고비를 진행시켜 가신다. 그러므로 누구나 인간 스스로에게는 한없이 절망하지만, 기어이 당신의 목적하신 바대로 우리를 천국으로 이끌고야 마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는 감사와 감격이 넘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을 접할때마다 인간의 체취를 맡기 이전에 하나님의 그 뜨거운 사랑과 은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1. 20년만의 형제 상봉(33:1-11)
요즈음도 재산 상속 문제로 한 가정이 풍지박산 나거나 형제끼리 원수처럼 지내는 겅우를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익이 달려 있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기 일쑤이나 일단 조그마한 이해 관계라도 발견되면 악착같이 달려을어 형제나 이웃을 매섭게 다루는 것이 보편적이다.
에서와 야곱 사이에 발생했던 불화도 이해 관계에 얽힌 분쟁으로서 쉽사리 화해욀 수 없는 성격의 것이었다. 이 분쟁의 원인자인 야곱은 형과의 화해를 위해 많은 재산을 예물로 준비하였으나(32:13-23), 그것은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좁히는 데는 근본적인 힘이 되지 못햇다. 그들 두 사람 사이를 좁히는 데는 근본적인 힘이 되지 못했다. 그들 사이의 화해는 오직 얍복 강가에 나타나신 하나님과 인간간의 만남을 통해 가능했다(3:24-32).
즉, 형 에서의 문제로 고뇌하던 야곱이 철저히 낮아져 하나님의 도우심만이 당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기도함으로써 화해의 길이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본문에서 야곱이 진실된 몸짓으로 회개할 수 있었으며(1-3절), 이에 눈물로 용서할 수 있었던 에서의 뜨거운 환영(4-9절)은 바로 평화의 왕이신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개입되었기에 가능했다. 결국 이 화해 사건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그곳에 인간이 지닌 제문제들의 해결 방안이 마련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잠 16:7;렘 33:3;요삼 1:2).
간혹 인간들은 자신의 문제를 자기의 것으로만 여기고 사정을 하나님께 전혀 아뢰지 않은 채 탄식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각종의 갈등을 여전히 인간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 함으로써 문제를 근원적으로 치료하지 못하거나, 더욱 심각한 상태로 이끌 때가 있다. 아무리 사소한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는 노력이야말로 가장 빠르고 완전하게 문제를 타개해 가는 방법이다(시 50:15).
* 구약 시대의 인사법. 히브리인들은 이웃에 대한 관심의 표시로, 안부를 물을 때(삼하 8:10;11:7), 길을 가다가 사람을 만날 때(왕하 5:21), 여행을 떠나거나 헤어질 때(삼상 1:17;삼하 15:9), 그리고 출산을 전후하여 '살롬'(* )이라는 인사말을 주고 받았다. 이는 '평강을 빕니다'(스 4:17), '평안합니까?'(왕하 4:26;5:21), '안녕히 가시오'(삼상 1:17) 등의 뜻을 지닌다. 그런데 이 용어는 하나님의 속성 및 사역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점에서 히브리인들의 인사가 종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샬롬'은 주의종, 곧 메시야의 도래와 연결되어 있으며(49:10) 그렇기에 평강의 왕이신 메시야의 성품을 반영한다(사 9:6).
이처럼 히브리인들은 인사를 통해 상대의 안부를 묻는 것 뿐 아니라, 자신과 상대 사이에 영존하셔서 평강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인식하였다. 이같은 인사말과 더불어 서로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것이 통례였다(27:26;출 18:7;롯 1:9;삼상 20:41). 이는 사랑과 우정의 표시이며(50:1;왕상 19:18), 존경과 충성을 표하는 것이기도 했다(삼상 10:1;시 2:12). 이러한 평범한 인사법 외에도 상대방의 권위와 지위와 인격이 자신을 압도하는 경우나 자신의 겸양을 표시할 경우에 상대방의 발치 아래 무릎을 끓어 인사했으며(42:6), (삼하 9:6). 그리고 지극한 겸손과 헌신의 표시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는 인사도 있었다(50:18;삼하 14:4;왕하 4:37;대하 20:18). 이러한 정신에 입각해 요즈음 로마 카톨릭리 사제 서품시에 이러한 자세로 의식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여하튼 구약 히브리인들의 인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안부라는 차원을 넘어 그 양자를 동시에 평안케 하시는 하나님을 중심한 신앙적 교제였다. 오늘날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쉽게 뱉아버리는 인사에 익숙한 우리들은 인사에 앞서 상대와 자신을 사랑으로 묶어주시며 평안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해야 할 것이다.
2. 세겜에 안주한 야곱(33:12-20)
라반과의 갈등, 얍복 강가의 피나는 기도, 그리고 형 에서와의 만남과 화해 등으로 인하여 심신이 매우 지쳐 있었던 야곱은 일단 에서의 환대에 응하는 조(調)로 숙곳에 머무르게 된다. 이 숙곳 거주의 또다른 이유는 그곳이 수많은 가축들을 관리하기에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17절). 그는 숙곳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좀 더 번창한 세겜으로 장막을 옮겼다. 물론 그곳도 약속의 땅 가나안의 일부이며 하나님을 위한 제단이 쌓아졌던 곳이기는 하나, 옛날 사닥다리 언약이 이루어졌던 벧엘(28:20-22)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세겜정착은 다분히 인간의 편익(便益)만을 도모한 조처라 할 수 있다. 즉, 그는 현실의 안일과 만족에만 급급했을 뿐 가장 시급했던 하나님과의 첫사랑 회복과 서원 이행에는 무관심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야곱의 세겜 정착은 벧엘(하나님의 집)을 무시하고 세상에 안주하기를 좋아하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안일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속적 안녕과 번영을 추구하는 자, 34장의 디나 추행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본장의 세겜(세상) 정착에 있었다는 점에서 위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엘 엘로헤 이스라엘. 야곱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들어와 최초로 단을 쌓고 하나님께 공식적인 예배를 드렸던 바로 그곳 세겜에(12:6, 7) 제단을 쌓고 자신이 언약의 후손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확인하는 자리가 된 그 땅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란 뜻의 '엘 엘로헤 이스라엘'이라고 명명하였다. 야곱은 지금까지 겪었던 온갖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번창을 허락하시고 인도하시며 지켜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입증하며, 바로 그 하나님을 대대 손손(代代孫孫)에게 기념하기를 원했다.
특히 여기서 야곱이 브니엘에서 새롭게 얻은 자기의 이름 '이스라엘'(32:28)을 적용한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흠이 많은 존재인 자신을 선택하시고 자기 속에 새 일을 시작하신(빌 1:6)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를 '이스라엘'이란 이름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야곱은 자신의 지나온 생애와 새롭게 된 현재와 미래의 삶 전체가 자신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자각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그분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야말로 그의 생의 유일한 의미였던 것이다. '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것은 분명 삶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고백할 수 있는 이름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오늘날 자신의 삶이 존재한다는 바른 인생관을 지닌 자만이 감격스럽게 부를 수 있는 성호이다(빌 1:20,21).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름을 부여하는 행위는 명명자(命名者)의 소유권과 통치권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된 이 사건은 '죄인'으로 있었던 우리가 하나님의전적인 은총에 의해 '의인'이 된 구속의 은혜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된 이름 (의인, 성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등;벧전 2:9)이 요구하는 바를 따라 거룩하고 겸손하고 온전하게 생활해야 할 뿐 아니라, 자신은 항상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인 자임을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하나님 앞에서(Coram Deo),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Soli Deo Gloria) 살아가야 한다(롬 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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