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1절
때에 - 요셉이 총리직에 오른지 8년쯤 되던 해이다. 즉 7년 대풍년 기간이 끌나고(41:53) 흉년이 유례 없을 정도로 극성을 부릴때인데 이때 야곱의 나이는 129세 가량이었다. 관망만 하느냐 - 관망하다 에 해당하는 라아 (* )는 자세히 보다 (시 31:7)는 뜻인데 여기서는 쳐다보기만 할 뿐 그에 따르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비난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야곱은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장기간 발생한 대가뭄 앞에서 넋을 잃고 아무런 대책도 강구하고 있지 않는 아들들을 향해 심한 책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Keil).
===42:2절
너희는 그리로 가서...사오라 - 야곱은 아브라함(12:10)이나 이삭(26:2)과 같이 자기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킬 계획은 갖지 않았다. 그의 가족이 너무 많아졌거나 그가 이제 연로 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으나 애굽에도 역시 기근이 만면했기 때문인 것 같다. 따라서 그 아들들이 단순히 곡식을 사서 다시 돌아오기만 바랐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계획을 좌절시키셨으며(46:7) 이 사건을 통하여 미리 정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셨다(15:13). 그리하면...죽지 아니하리라 - 당시 기근이 얼마나 심하였는지를 보여 주고 있다. 야곱은 곡식을 사는 이 임무가 그들 가족과 가축들의 생존에 너무나 중요하였기 때문에 종들을 시키지 않고 그의 아들들을 직접 보내기까기 하였다.
===42:3,4절
베냐민을...보내지 아니하였으니 - 요셉은 야곱이 노년에 얻은 아들이었고(37:3) 사랑하던 라헬의 소생이었으므로 다른 아들들보다 더욱 사랑을 받았다. 이와 같은 이유로 동일한 라헬의 소생인 베냐민도 역시 야곱의 사랑을 더 받았을 것이다. 본절에서 야곱이 다른 아들들과는 달리 베냐민을 위험한 곳으로 보내기를 꺼려한 것도 그 단적인 예이다(Murphy). 왜냐하면 당시 광활한 사막을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한편 Living Bible)은 야곱이 그의 형 요셉이 당하였던 것처럼 (as it had to his brother Joseph) 베냐민에게 재난이 닥칠까 걱정했다고 번역함으로써 야곱이 요셉을 잊지 못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더욱 그의 친동생인 베냐민을 보호하려 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42:5절
가나안 땅에 기근이 있음이라 - 당시 기근이 심하였으며, 그 범위도 넓었다는 사실이 반복되어 기술되었다(41:57;42:2). 같은 내용이 이와 같이 반복되는 것은 그 일의 심각함을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뿐만 아니라 여기서는 요셉과 그의 형제들이 만나는 새로운 상황 전개에 앞서 그 배경을 다시 한번 밝히는 것이다. 또한 이 구절은 양식을 사러간 가나안 사람들이 야곱의 아들들 외에도 많았음을 보여 준다(Keil).
====42:6절
그 앞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서 모든 곡물의 매매를 관할하였다. 아마 내국인이 아닌 이집트 밖의 족속들이 곡식을 얻기 위해서는 일단 요셉의 허락이 필요했었던 것 같다. 형들과 요셉의 재회는 이런 극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다. 그들은 요셉에게 절함으로써 일찍이 요셉이 꾸었던 꿈성취시켰다(37:5-9). 특히 절하다 에 해당하는 솨하 (* )는 37:7,9,10에 이어 이곳에서도 반복 사용됨으로써 예언이 철저히 성취 되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러한 예언은 시간이 가면서 보다 철저히 반복, 성취되고 있다<43:26,28>.
====42:7절
요셉이...엄한 소리로 그들에게 말하여 - 야곱의 아들들은 20여 년 전에 헤어져 철처히 애굽화되고 위대한 통치자로 승격된 요셉 알아블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의 형제들을 용모와 말씨에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공개하지 않고 그에게 엄하게 힐문하였다. 이러한 요셉의 행동은 형제들에 대한 복수심이나 겉콰 속이 다른 인격 때문이 아니다. 그는 형제들의 마음 상태와 더불어 연로하신 아버지 그리고 동생에 대한 태도를 먼저 알아보기 위하여 이와 같은 행동하였다. 여기서 엄한 에 해당하는 카쉐 (* )는 혹독하게 (출 6:9), 맹렬하게 (삼하2:17), 포학하게 (왕상 12:13)등과 같은 의미이다.
====42:8절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 이처럼 형들이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로는 (1) 20년이란 긴 세월이 이미 흘렀으며 (2) 요셉이 감히 상상도 못할 지위에 올라 있었고 (3) 또한 깨끗한 면도, 애굽식 어투 등과 같은 요셉의 처신 (4) 더구나 형들이 요셉을 똑바로 자세히 쳐다볼 수 없었던 상황 등을 들 수 있다.
===42:9절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 37:5-9에 기록된 꿈을 가리킨다. 당시 그는 그 꿈이 확실히 성취될 것이라 믿고 형제들에게 이야기 했었다.그러나 이 때문에 그는 형제들의 미움을 받았고(37:5) 급기야 애굽의 종으로 팔리기까지 하였었다(37:28). 그런데 이것이 오히려 이제 요셉의 꿈을 성취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보면서 한순간 이 모든 일들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을 것이다. 너희는 정탐들이라 - 당시 애굽은 아시아 계통의 민족들로부터 침략의 위험을 받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애굽이 그들을 멀리한 탓도 있지만, 특히 당시는 애굽에만 식량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외국 나그네들에 대하여 극히 예민하게 감시하였다. 때문에 요셉의 이와 같은 말은 그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과 다름없는 선포였다. 요셉은 그들의 신변에 위협을 줌으로써 자신들의 지난 날을 반성하고 하나님을 의지 하도록 유도하였을 것이다.
===42:10절
종들은 곡물을 사러 왔나이다 - 요셉의 형들은 요셉의 말을 듣고 그들이 애굽에 온목적에 대하여 거듭 밝힌다. 그러나 별다른 증거가 없으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가족 상황까지 자세히 밝히면서 무죄를 입증하고자 노력하게 된다(11,13절).
====42:11절
독실한 자 - (* , 케님). 정직한 자들 (RSV;honest men) 혹은 진실한 자들 (KJV;ture men)이란 뜻이다. 특히 여기서 독실한 에 해당하는 켄 (* )은 옳은 (민 22:7), 마땅한 등의 뜻으로 행위의 정당성을 강변하는 말이다. 따라서 진실한 , 사심이 없는 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42:12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 요셉은 물론 그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인격과 양심을 재확인하려고 짐짓 억지를 부려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가고 있다.
===42:13절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 요셉의 형제들은 애굽의 총리에게 그들의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낱낱이 고함으로써 정탐꾼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아들들임을 보이려고 했다. 한편 여기서 없어졌다 고 하는 말은 죽었다 란 뜻이다. Living Bible에는 우리들 형제 가운데 하나는 죽었나이다 (One of our brothers is dead)로 나와 있다. 요셉이 20여년 동안 가족과 연락이 두절되었기 때문에, 형제들은 그가 죽은 줄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42:15절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 후대의 히브리인들이 존경하는 사람의 생명으로 그들의 맹세를 확증하는 것과 같이(삼상 1:26;17:55) 요셉은 바로의 생명을 맹세의 확실성에 대한 증거로 내세웠다. 이것은 가장 애굽적인 맹세의 전형이었다. 즉 요셉은 철저한 애굽인으로 행세하였던 것이다.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 요셉은 그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베냐민을 데려오라고 하였다. 이것은 베냐민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건은 형들의 입장을 더욱 급박하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하여 전날 요셉에게 행했던 자신들의 행동을 기억하고 회개하게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결코 요셉이 개인적인 보복 감정으로 취한 행동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여기서 감정을 억제하는 냉청한 지도자로서의 요셉의 면모를 잘 볼 수 있다.
====42:17절
그들을 다 함께 삼 일을 가두었더라 - 이렇게 함으로써 요셉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형제들의 진실성을 시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형제들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진실한 회개를 하게 되었다. 요셉도 과거에는 이와 같이 구덩이에 갇히기도 하였고(37:24), 3년간 옥중에서 생활하기도 했다(39:20).
====42:18절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노니 - 형들이 옥에 갇힌지 삼 일만에 요셉은 그들에게 인정(人情)을 베풀었다. 즉 그는 지금까지 철저히 애굽인으로 행세하였으나(15,16절) 이제는 하나님 을 이해하는 자로 처신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사용된 엘로힘 (* )이라는 하나님 명칭은 요셉의 형들에게 친근한 것이었으므로 그들은 요셉에게 이내 친밀감을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 정작 족장들의 언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여호와 라는 하나님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은 것은 자신이 히브리인이라는 사실을 끝까지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Hengstenberg).
====42:19절
너희는 곡식을 가지고 가서 - 요셉은 한 사람만 가고 나머지 아홉 사람은 남아있으라고 한 자신의 첫번째 조건(16절)을 완화하였을 뿐만 아니라 형들이 곡식을 가지고 팔레스틴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였다. 이는 곧 야곱 가족들이 기근으로 말미암아 겪고 있는 어려움을 덜어 주기 위함인데 일전의 악을 도리어 선으로 갚은 행위이다. 즉 고향으로 가도록 승인하였다. 요셉은 자신을 구덩이에 던져 굶어 죽게 하였던 형들의 무자비함에(37:24) 대하여 자비심을 가지고 처신하였던 것이다.
===42:20절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리고 오라 - 유일한 동복(同腹) 형제이자 어머니 라헬의 죽음과 함께 태어난(35:18) 16살 정도 아래 동생인 베냐민을 향한 요셉의 사랑은 각별했다(43:34;45:22). 따라서 그는 다시 올 때 베냐민과 반드시 함께 와야 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42:21절
요셉의 인위적인 강압 방법이 주효(奏效)하고 있는 순간이다. 즉 그들은 자신이 지금 당하고 있는 뜻아니한 고난을 과거 요셉에게 지었던 범죄에 대한 보응으로 시인하고 이를 뉘우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난과 죄의 상관 관계는 매우 밀접하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반드시 다 죄의 결과이지만은 않은데 곧 요셉이 당하였던 것과 같은 의로운 고난도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한 방편 중 하나로 고난을 허락하시기도 하는 것이다<욥 2장, 고난에 대하여>.
====42:22절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 옛날에 르우벤은 요셉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그의 형제들에게 충고하였었다(37:21-30). 그러나 형제들의 악행을 완전히 막는 데는 성공하지 못했었다. 르우벤은 이제 그 같은 과거 일을 회상하면서 형제들에게 피 값에 대한 원리를 상기시키고 있다(9:5). 즉 당시 야곱의 아들들도 노아 시대부터 내려오는 피 흘린 자는 반드시 그 피 값을 받게 된다는 법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후에 모세 율법하에서 고엘(갚는 자)의 법칙으로 성문화되어 나타난다(민 35:9;신 17:12).
===42:23절
피차간에 통변을 세웠으므로 - 요셉은 히브리 말을 잇지 앉고 있었으나(45:1-3)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증간에 틔역자를 두어 완전한 애굽인처럼 행동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그의 형제들은 히브리 말로 자신들의 진실한 감정을 토로하고 있다.
====42:24절
요셉이...울고 - 요셉은 하나님의 기이한 섭리와 형제들과의 재회로 인한 감사와 감격 때문에 눈물을 홀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요셉이 형제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그의 지도자적 면모가 부각된 반면<15절>, 이 사건에서 인간적인 측면이 강조되고 있다. 시므온을...결박하고 - 왜 요셉이 많은 형제들 증에서 시므온 억류시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세겜족을 살륙하는 데 앞장섰던(34장) 것과 같이 요섭을 죽이는 일에도 주동자였기 때문이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37:18-20). 그가 르우벤 다음으로 연장자였고 르우밴은 지난날 그일을 반대했으므로(37:21,22) 이와 같은 추정 설득력이 있다(F rst, Rosenmller).
===42:25절
각인의 돈은 그 자루에 도로 넣게하고 - 요셉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서도 베풀수 있는 최대의 선을 헹하였다. 그는 그들이 원하는 곡식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여행하는 동안 양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곡식을 따로 주었다. 또한 곡식의 값으로 받은 돈을 다시 그들의 자루에 넣어 주었다. 이것은 후에 그들에게 대하여 다른 구실(28절)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가족들에게 돈을 받고 곡식을 파는 것 자체를 가당찮은 일로 여겼기 때문이다(43:23).
===42:26,27절
객점 - 오늘날과 같은 시설을 갖춘 여관이 아니라 단지 여행객이 하룻밤 을 쉬어 갈 수 있는 숙박소(RSV;lodging place)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여행자나 짐상에게 음식물이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요셉의 형들은 나귀에게 먹이를 주려고 곡식 자루 중 하나를 푼 것이다.
===42:28절
혼이 나서 떨며 - 예기치 못한 일이 갑작스럽게 발생하여 어안이 벙벙한 상태를 가리킨다. 요셉 형제들은 베냐민 문제(15,16절)에 이어 이해할 수 없는 이 사건 역시 자신들의 과거 잘못에 대햐 형벌로 간주했다. 즉 그들은 자루 속에 든 돈에 대하여 다시금 그들이 애굽에 내려가면 도적 누명을 씌우려고 애굽 총리가 일부러 담아 둔 것일 것으로 오해하고 두려워한 것이다.
====42:29절
자세히 - (* , 콜). 전부 (6:17), 모든 (7:4), 만족할 만한 (33:11) 등의 뜻로 지금까기 있었던 일을 조금도 남김없이 전부를 가리킨다.
====42:30절
그 땅의 주 그 사람 - 자신들의 아우이자,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을 지칭한 말이다. 우리를 그 나라 정탐자로 - 그들의 보고 중에 애굽과 요섭이 모두 대명사(그 땅, 그 사람)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가나안에도 요셉의 이름이 널리 퍼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엄히...말씀하고 - 직역하면 무서운 어조로 말하고 이다. 이는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에서 받았던 강렬한 인상 반영한 말로서, 그 당시 그들은 죽음 또는 모진 옥살이를 상상했었던 것 같다.
===42:33절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 그들의 보고 중에는 한 사람을 볼모잡힌 후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요셉의 명령을 거론하지 않았다(16절). 즉 시므온이 구금된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는 데 그것은 될 수 있는 한 늙은 야곱에게 심적 부담을 주지 않기 의한 방도인 듯하다.
===42:34절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 야곱의 아들들은 가뭄이 끝나기 전에 그들이 구입한 식량이 떨이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었다. 그래서 요셉의 말을 야곱에게 미리 말함으로써 베냐민과의 동행을 용이하게 하려하였다.
====42:35절
각인의 돈뭉치가 그 자루 속에 있는지라 - 그들은 한 사람에게만 돈이 다시 들어 있는 것으로 얄았으나(28절) 이제는 모두에게 돈이 들어있음을 확인하고 두려워하였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요셉이 선한 의도로서 행한 것이다<25절>. 그러나 이것은 야곱의 모든 가족으로 하여금 근심하도록 하였지만, 결국 그들의 강퍅한 마음을 돌이키는 역할을 함으로써 선한 결과를 이루었다.
====42:36절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 야곱은 자신의 자녀들이 하나 둘 자신의 품을 떠나 영영히 돌아서버릴 것만 같은 위기 의식을 느꼈다. 그렇다고 요셉의 실종에 대해 다른 형제들이 연루되었으리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야곱의 이 한탄조의 말은 더욱더 깊은 슬픔으로 그 아들들에게 다가왔음이 분명하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 문자적으로 그것이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무거운 고충이로다 이다. 이는 그때 야곱의 심정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처절했는가를 실감있게 보여 준다.
===42:37절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 르우벤은 강한 책임 의식과 우애(友愛)가 다른 형제들보다 돈독했던 것 같다. 그는 옛날 요셉을 구출하려 헹던 것처럼(37 :21) 시므온 방면을 위해 자신의 두 아들을 담보 잡히기로 한 것이다. 한편 족장시대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아비는 자식의 생사권을 쥐고 있었다. 따라서 시므온의 제의는 실제 두 자식의 생명을 야곱에게 합법적으로 위임하겠다는 비장한 결사 각오의 표현이다. 실제로 자식에 대한 아비의 절대 권한을 보여 주는 사건은 소돔 성 사건(19:8), 드라빔 사건(31:29,32), 다말 사건(38:24) 등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42:38절
그만 남았음이라 - 가장 사랑했던 라헬이 남겨 놓은 아들 중 요셉은 이미 죽고 이제는 야곱 말년에 자신에게 위로와 기쁨이 된자는 오직 베냐민 뿐이라는 말이다.
흰 머리로 슬피 음부로 내려가게 함 - 늙은이의 한(恨) 많은 죽음 을 가리키는 문학적 표현(44:31)으로 이 말은 요셉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야곱이 옷을 찢으면서 한 말이기도 하다(37:34,35). 따라서 이 말이 담고 있는 원 의미는 만약 베냐민이 재난을 당하였을 때 자신이 겪게 될 즉음과 같은 비참한 슬픔 을 가리킨다. 음부 - 죽은 자들이 거처하는 지하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37:33-35>.
본장은 37장 이후 복선(複線)을 형성, 개별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야곱 가족과 요셉의 이야기가 마침내 하나로 합쳐지고 있는 장이다. 즉 도단 사건(37:12-28) 이후 기나긴 역경을 거쳐 애굽의 총리가 된 요셉이 약 20년 만에 형들과 재회하게 된 데 대한 기록이다.
이러한 본문은 내용상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먼저 1-5절은 야곱 가족도 기근을 당하여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대한 기록이다. 그리고 6-28절은 그리하여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간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과 대면하나, 요셉이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그들을 시험하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29-38절은 가나안으로 돌아간 형제들이 아비 야곱에게 자신들이 겪었던 일을 보고하는 장면이다. 이러한 본문은 이스라엘 민족의 애굽 정착을 보여 주는데 곧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될 때가 가까왔음을 시사해준다(15:13). 뿐만 아니라 요셉의 형제들이 그 앞에 엎드린 것은 오래전 요셉에게 주어졌던 꿈(37:5-11)이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보여 준다.
아뭏든 본장은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던 것과 마찬가지로 허물 많은 야곱의 집안에 대하여서도 동일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셨음을 보여 주는데 이는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첫째, 성경 기록이 철저히 선민(選民) 중심의 역사라는 점이다(사 43:1-7). 둘째, 선민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하에 속한다는 점이다(사 49:15,16;시 48:14). 셋째,하나님의 섭리는 허물 많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결국 최선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점이다(롬 8:28).
1. 기근의 확산과 애굽으로 떠난 요셉의 형제들(42:1-5)
본문은 애굽의 기근 현상이 이제 온 세상에 확산되어 마침내 가나안 땅에 거주하는 야곱의 집안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 주는 단락이다. 그중 1,2절은 애굽에 소식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이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양식을 구하러 갈 것을 권면하는 장면이다. 그리고 3-5절은 그리하여 요셉의 형들이 곡식을 사러 애굽으로 여행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야곱과 그 가족들이 도덕적으로 타락한 가나안 땅에 계속 머무른 사실은 그들이 선민의 특권을 점점 잃어버리는 나약한 삶을 살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요셉 이야기는 비록 그가 형들의 미움을 사 애굽에 노예로 팔렸지만, 끝내 애굽의 총리대신의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사실을 통해 그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 준다(39-41장). 하지만 이렇게 독자적으로 진행되었던 두 이야기가 이제 본 단원에서 하나로 합쳐짐으로 해서 커다란 주제 하나를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곧 이스라엘(야곱의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요셉을 애굽에 먼저 보내신 '하나님의 섭리'이다(45:5;시 105:17;행 7:9-14).
* 복음을 접하는 인간의 마음. - 멀리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소식은 혹독한 기근 속에 처한 야곱 일가에게 한줄기 희망의 빛이었다. 그러나 애굽에 양식이 있다는 말은 타인이 전해준 이야기일 뿐, 사실을 확증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야곱은 서로 관망(觀望)만 하고 있는 아들들에게 명한다. "가서 ...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 죽지 아니하리라"(2절). 이는 당시 기근 상태가 생사(生死)를 언급할 만큼 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생명의 촌각(촌각)을 다투는 일에는 주변의 상황을 저울질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게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갈급한 심령이 복음을 접할 때에는 주저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다시 말해 배부른 자에게는 떡이 필요없듯이,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듯이(마 9:12)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자에게 심령의 긴박감이란 없다.
안일하며 나태한 자에게 인생의 참된 의미는 소용없는 것이며,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자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놀라운 분이 아니시다. 그러나 일단 그 마음에 영적 기근이 임하면 개개인은 자기마을속 깊은 곳에 주께서 찾아오시기를 원하는 겸손한 자세를 가지는 때가 많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영적 기근을 맛보지 않으려는 자에게 더욱 심각한 '생의 의미'를 던짐으로써, 자신의 전부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할 마음밭을 갈아놓으시기 때문이다(요 4:7-26).
* 하나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 - 만일 하나님께서 단지 야곱 가문을 애굽으로 옮기기 위해 근동 전역에 기근을 내리셨다고 할 것 같으면, 그 같은 하나님의 섭리는 잔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생명과 온 우주에 미치는 것이다. 즉, 신자이건 불신자이건 간에 모든 생명에 미치는 것이므로 그 누구도 이것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같은 섭리에 대해 명확히 이해를 하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만을 위해 기근을 일으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일 하나님이 특정인(特定人)만을 위해 당신의 권능을 행하신다면, 세계의 질서는 이내 파괴되고 말 것이다. 즉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기 마련인 소수의악인을 향해 하나님께서 직접적이고 두드러진 심판을 매일 가한다면, 그 사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밝고 명랑한 사회가 되기보다는 아마도 두렵고 공포에 질린 암울한 사회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찬양과 영광을 돌리라'는 피켓(picket)을 강제적으로 치켜들게 하는 사회는 분명 하나님의 창조 질서가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따라서 그러한 세계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다스려지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섭리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자유의지(自由意志)와 결합되어 있다. 즉, 인간 편의 자유 의지와 하나님 편의 섭리가 어우러져 역사가 진행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모든 재앙과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 각자에게 부여된 독특한 자유 의지에 근거한 인간의 책임과 결코 무관한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2. 형들을 시험하는 요셉(42:6-28)
본문은 애굽에 양식을 사러 온 형들과 애굽 총리가 된 요셉이 20여 년 만에 극적으로 다시 만나는 장면이다. 그리고 요셉을 알아보지 못한 형들이 그 앞에 절함으로써 마침내 요셉의 꿈이 성취되는 장면이다(37:5-11). 그런데 요셉은 아비 야곱과 동생 베냐민의 근황을 알기 위하여, 또한 형들이 지난날의 행실을 돌이켰는지를 알기 위하여 짐짓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형들을 시험한다.
이러한 본문은 크게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6-8절은 요셉 앞에 이르른 형들이 자신들의 애굽 방문 목적을 밝히는 부분이다. 그리고 9-17절은 하지만 요셉이 그들을 정탐군으로 몰아 옥에 가두는 장면이며, 18-25절은 삼일 후 요셉이 시므온만을 억류하고 나머지 형들은 조건부로 귀향시키는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26-28절은 귀향하던 도중 객점에서 유숙하게 된 형들 중 하나가 곡식 자루에서 돈을 발견하고서는 혼절(昏絶)하는 장면이다.
이상에서 요셉이 형들에게 겉으로 보인 행동은 20여년 만에 형제 상봉을 한 자의 행동치고는 너무나 냉혹하게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성숙한 신앙 인격을 소유한 자는 자신의 감정을 사사로이 드러내기보다는 자신을 통해 펼치실 하나님의 일을 먼저 생각한다. 만약 요셉이 격정의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자신의 신분을 형제들에게 밝힌다면, 형제들은 과거에 자신들이 요셉에게 행했던 잘못 때문에 보복을 당하리라는 공포에 떨거나 아니면 최고 권력자의 형제들이라는 특권을 내세워 애굽 내에서 방자하게 행동할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는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게서 이스라엘을 애굽에 머무르게 하려는 원대한 계획과는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요셉은 때가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에 의해 형제들을 기쁘게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감정을 견뎌냈다. 그러나 우리는 나중에 눈물을 흘리는(43:30; 45:2) 인간 요셉의 한계를 볼 수 있다. 젊음의 정(情)과 단절된 채 살아온 요셉은 끈끈한 인정(人情)과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에 따른 갈등 때문에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아뭏든 요셉의 눈물은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들의 애환(哀歡)을 대변한다. 요셉이 갈등해야 했던 인정과 하나님 나라의 성숙과 확장을 위한 계획과의 문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맞부닥쳐야 하는 문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십자가 상에서 이 문제를 깨끗이 해결하셨다(마 26:39; 요 19:30).
* 반드시 성취되는 하나님의 뜻. - 본문은 요셉이 소년 시절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받았던 꿈(37:7, 9)의 완벽한 성취이다(6절).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시기하고 그의 꿈을 무시할 작정으로 그를 노예로 팔았으나, 오히려 이 일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완벽히 성취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과 뜻은 어떠한 세력에 의해서도 결코 방해받지 않는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신자에게 주어진 구원의 약속은 사단의 온갖 계교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요 17:12; 18:9).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실현시키는 데 있어, 인간의 영역 깊숙한 곳까지 세밀히 간섭하셔서 반드시 성취시키신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성도들은 낙심치 않고 소망 중에 인내할 수 있는 것이다(롬 12:12; 약 1:4).
* 요셉 형제들의 죄책감. - 인과 응보(因果應報) 사상은 모든 인간들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양심을 일깨우는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인과 응보라는 상식적 전제가 없는 인간에게서 도덕적 행위를 기대하기란 어렵다. '법'의 집행은 바로 인과 응보라는 도덕적 질서를 현실 세계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기독교 사상은 단순한 인과 응보적 사상을 극복하고 초월한다. 그러나 일면 이러한 사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갈 6:7-9).
바로 본문 중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이 과거에 저지를 잘못이 드디어 자기들에게 돌아오고 말았다는 고백을 한다. 이처럼 인간은 자신이 저지를 범죄에 대하여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잠 28:13; 애 3:39; 롬 6:23). 요셉이 결과적으로 죽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에 그들이 저지를 죄악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마 5:22). 시간이 흐른다고 그 죄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두뇌는 과거의 사실을 망각하는 수가 있으나, 잊어버린다고 해서 죄 자체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만이 그 죄를 근본적으로 씻을 수 있는 것이다.(히 9:12, 28).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인들을 대신하여 그 죄가를 담당했기 때문이다.
3. 요셉 형제들의 귀환과 야곱의 탄식(42:29-38)
애굽에서 뜻하지 아니한 환란을 당한 형들이 황망히 가나안으로 귀환한 후, 자신들이 당한 자초 지종을 낱낱이 아비 야곱에게 고하는 장면이다. 그중 29-34절은 자신들이 정탐으로 몰려 투옥된 후 풀려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보고이다. 그리고 35절은 곡식 자루를 풀다 각 자루마다 돈뭉치가 들어있음을 발견한 형제들과 야곱이 크게 놀라며 두려워하는 장면이고 36-38절은 자신에게 닥친 이러한 재난에 대하여 야곱이 깊이 탄식하는 장면이다.
즉 야곱의 아들들이 자신들이 당한 일을 인과 응보로 생각한 것처럼(21, 22절), 야곱 역시 자신이 현재 당하는 고통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고 크게 한탄하였던 것이다. 아마 야곱은 하나하나 사라지는 사랑하는 아들과 또 베냐민마저 떠나 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자기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는 어떤 한계 상황에 다다르고 말았음을 직감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야곱의 노년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따라 다니는 이러한 인과응보적 징계는, 그러나 결코 징계만을 위한 보응이 아니었다. 이것은 야곱을 애굽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장이요, 사랑하는 자식의 연단을 위한 아비의 채찍이었다(히 12:6).
* 생명을 내건 르우벤의 맹세. - 비탄에 빠진 아버지 야곱을 달래기 위해 르우벤이 내건 맹세 곧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37절)라고 말한 것은 일면 책임감이 투철한 강직한 말이다. 그러나 일면 이는 어떤 인간의 생명도 사람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의 맹세는 경솔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지나간 그의 경험을 돌이켜 볼 때, 그는 함부로 생명의 약속을 내걸 처지가 못된다. 그는 과거 동생 요셉을 지키지 못하였고(37:29). 시므온 역시 애굽에 볼모로 두고 온 상황이며, 앞으로도 어떠한 일이 전개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생명을 건 약속 때문에 사랑하는 딸을 번제로 드려야 했던 사사 입다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으며(삿 11:31-39), 예수께서도 맹세를 쉽게 함으로써 오히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신뢰감을 떨어뜨리는 폐단을 아시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마 5: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타난 르우벤의 맹세가 지니고 있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곧 추락된 가족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최대의 카드(card)였다는 점이다. 나아가 그것은 자신의 생사 여탈권을 쥐고 있었던 족장 시대 가부장적 제도하에서, 그러한 아비의 권한으로 자식의 생명을 걸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겠다는 일사 각오의 정신이 있었다는 점이다. 즉 이는 그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처럼 자신의 형제를 사랑한다는 고백이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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