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롯도 함께 하여 - 애굽에서는 전혀 언급이 없었던 롯이 여기서 다시 나타난다. 이는 아브람과의 언약 관계 속에서만 롯이 그 의미를 지니기 때문인데, 이것은 그의 후손 암몬과 모압 족속 역시 항상 이스라엘과의 관계 하에서만 신정사에 그 모습을 나타낸것과 같다(신23:3; 삿3;13,14; 왕하24;2).
남방으로 올라가니 - 애굽 쪽에서 보았을 때의 정확한 방향은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된다. 즉 아브람 일행은 남하할 때의 순서와는 역순으로 네게브를 거쳐 벧엘과 아이 부근(3절;12;8)으로 올라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올라가다'는 말은 가나안 땅보다 낮은 지대인 애굽에서 팔레스틴 산지 쪽으로 이 동하는 것을 나타낸 표현이다.
13:2
풍부하였더라 -( , 카베드). 원뜻은 `무겁다'로 미처 다 관리할 수 없을 만큼 차고 넘친 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아브람이 하란에서 모은 소유(12:5)에 바로에게서부터 받은 예물을 더하였기 때문인데(12:16) 굳이 이러한 사실이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까닭은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향방을 암시하기 위함이다(6절).
13:3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 애굽에서 네게브에 이른 뒤 잠시 휴식한 후 다시금 행진 한것을 나타내 준다. 이처럼 길을 가면서 정기적인 휴식을 취하는 것은 사람 뿐 아니라 가축들을 고려한 유목민들의 전형적인 여행 방식이다(33:13,14).
13:4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 정확히 얘기하면 두번째로 단을 쌓은 곳이다(12:8). 아브람이 하나님께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은 세겜이었다(12;6,7). 그러나 세겜에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현현을 기념하기 위하여 단을 쌓았을 뿐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공적예배를 드리기 위해 단을 쌓았던 곳은 벧엘이 처음이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 아브람이 애굽에서의 잘못을 회개하며 하나님께 찬송과 감사로 진실한 기도를 드리고 새 삶에의 결의를 다진 것을 뜻한다.(시18:49;50:51). 이처럼 신앙인도 범죄하며 넘어질 수는 있으 나 그때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던 뜨거운 체험을 상기하며 결단과 용기가 필요하다(계 2:4,5).
13:5
장막이 있으므로 - 유목민들은 대개 사람들이 휴식하며 거처하기 위한 장막 뿐아니라 가축들을 위한 별도의 장막도 아울러 준비해 가지고 다닌다. 그런데 롯에게 이러한 장막이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언급된 이유는 그에게도 아브람 못지않게 딸린 사람과 가축이 많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13:6
그 땅이...용납지 못하였으니 - 가나안 땅에 임했던 기근(12:10)이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탓에 많은 가축을 방목할 목초(牧草)와 물이 부족했던 것도 요인 중의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 많은 재물이 도리어 근심이 된 경우이다(딛전 6:10). 즉 두가정은 각각의 재산이 많아지자 서로의 재산을 돌보기에 급급하였으며 그 결과 지금껏 유지해 왔던 화목한 관계가 깨어지게 된 것이다(약 4:1). 이처럼 세상에는 재물때문에 우정과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흔한데 성도들은 세상 모든 물질이 하나님께로 부터 주어지는 것(대상 29:12; 마 6:25-32)임을 깨달아 지나치게 땅의것에 집착하는 삶을 삼가야 할 것이다(마 6:33;눅 12;15-21).
13:7
목자가 서로 다투고 - 아브라함과 롯의 양 가정의 분쟁이 먼저 목자에 게서부터 비롯된 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좋은 목초지와 샘의 근원을 확보하여, 가축 사육에 지장이 없도록 하는 최우선적인 임무는 목자들에게 있기 때문이다(26:20). 특히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더하면 더할수륵 양가 목자들 사 이의 반목, 질시는 더하였을 것이다.
가나안 사람과...그땅에 거하였는지라 - 아브람의 가정과 롯의 가정이 서로 분쟁하게 된 간접적인 이유이다. 즉 아브람일행이 장막을 친 곳은 임자없는 지역이 아니라 이미 원주민이 주거하고 있던 지역이었으니 한정된 주거면적 안에서 상대편보다 더 유리한 목축지를 선점하기 위해서는 다툼이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13:8
골육 - 문자적으로는 `형제(친척)인 사람'. 아브람이 이 점을 강조한 까닭은 자신들간의 집안 싸움이 여호와의 성호에 누를 끼침은 물론 결코 스스로에게나, 원주민에게도 덕이 되지 않음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또한 서로간의 다툼은 그 지역 원주민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추방하는 좋은 계기로 삼을 수 있음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서로 다투게 말자-`다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메리바'( )는 `주먹다짐'보다는 대개 `말다툼'이나'논쟁'을 의미한다(신 19:17;욥31:13;잠18:6). 물론 성도들간이라고 이러한 말다툼이 전혀 없을 수는 없으나 그러한 때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며 자신의 주장을 일보 양보하는 지혜와 미덕이 필요하다(잠 10:12;13:10).
13: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 사해연변을 따라 벧엘에서 소알까지 펼쳐져 있는 광활한 땅 뿐 아니라 요단 강 양편을 따라 형성되어 있는 비옥한 평지도 함께 가리키는 것같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 예수의 산상수훈을 연상시켜 주는 말로서(마 5:38-42) 참된 신앙에서 비롯된 아브람의 겸허하고 관대한 인격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양보는 세속적 처세술(12:10-13)을 완전히 초월한 여호와 신앙에서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빌 2:3,4). 아뭏든 아브람의 자기 희생적 대양보는(1) 둘 사이의 불화의 틈을 탄 원주민들의 기습 공격 가능성을 막았으며(2) 롯과의 종교적 화평을 유지, 이방 사회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지 않았고(3) 아브람이 더욱더 하늘 분깃만을 의뢰하게 됨으로 믿음의 조상로서의 덕망을 쌓게 된 3중 효과를 거두었다.여기서 우리는 한 공동체가 화평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아울러 그 희생은 결국 모두를 살리는 길이라는 교훈을 깨닫게 된다.
13:10
눈을 들어...바라본즉 - 단순히 좌우를 둘러보았다는 뜻이 아니라 이것 저것 세속적인 여러 조건을 따졌다는 의미이다. 즉 롯은 탐욕에 찬 눈과 마음으로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하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 요단 강에서 멀리 떨어저 있는 벧엘 지경과는 달리 강 좌우변에 위치한 요단 평지는 모압 산맥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풍부한 수원 덕분에 평상시의 가뭄하에서는 그다지 물 걱정을 하지 않았다.
애굽 땅과 같았더라 - 애굽은 천혜(天惠)의 보고인 나일 강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일찍부터 관개 수로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비옥한 땅이 많았다. 특히 나일 삼각주(Delta)지경은 세계적인 옥토로 이름나 있다.
13:11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 롯은 아브람의 조카로 하란을 떠난 이래 줄 곧 아브람의 영향하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보호자이자 후견인인 아브람에게 아들과 같은 의무를 이행해야 마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택권을 행사함에 있어서 아브람에게 양보할 줄 몰랐고 세속적 이해 관계에만 눈이 어두워 이기적 선택을 하였다. 그에게는 아직도 세속적이고 물질 중심적인 애굽의 정신이 남아있었다. 따라서 그의 이러한 이기적 선택은 미구에 닥쳐올 모든 불행을 자초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 이러한 분리는 양가 사이의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가 작용하였다. 즉 일찍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고 명하셨다(12:1). 따라서 아브람이 롯과 함께 있는 한 여전히 아비 집과 밀접한 유대관계를 가진 상태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서 롯을 분리시킨 것이다.
13:12
가나안땅 - 넓은 의미에서는 팔레스틴에서 시리아에 이르는 해안 지대 및 내륙지대를 모두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아브라함이 롯에게 앙보한 요단 평지를 제외한 그 일대의 산지를 뜻한다.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 세속적 부와 향락에 끌려 동으로 점점 옮기다가 죄악의 도성 소돔에까지들어간 롯(14:12)의 행적은 세상 명예와 물질에 눈이 어두워 신앙의 세계를 떠나 점점 죄악의 세계로 빠져드는 타락한 신자의 전형이다. 그 결과는 비극일 수밖에 없는데 롯 역시 포로신세, 가산의 몰락, 아내와 사위의 상실, 딸과의 불륜 등 온갖 참상을 겪게 되었다.
13:13
여호와 앞에 - 직역하면 '여호와께 대하여' 혹은 '여호와께서'. 이는 인간이 범하는 모든 죄악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하는 것임을 강조 해 준다.
큰( ,메오드) - '심히'(1:31), '강렬'(출 10:19), '풍부'(13:2),'번성'(47:27) 등으로 번역될 수 있는데 소돔인들의 죄악의 정도가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상식선을 넘어선 매우 심각한 것임을 시사해준다.
13:14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직접 현현하시어 이 말씀을 주셨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조카 롯을 떠나 보내고 적막한 가운데 처해 있는 아브람에게 임한 위로와 확신(12:2)의 약속이다.
눈을 들어...바라보라 - 롯과의 결별로 인한 인간적 고독과 상심을 극복하고, 또한 롯처럼 탐욕의 눈이 아닌(10절)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약속의 땅(12:7)을 바라보라는 말이다. 이 장면은 훗날 비스가 산 정상에서 모세에게 가나안 땅을 보여 주신 하나님의 행동을 연상시킨다(신34:1-4). 이와 같이 믿음은 갖지 못한 것을 소유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신앙이다(히 11:1). 따라서 우리도 신앙의 눈으로 하늘 가나안 곧 천국을 바라볼 수 있 어야 한다(히11:15,16).
13:15
보이는 땅 -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지상의 땅 가나안 뿐 아니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천상의 땅 가나안 까지 염두에 둘 때 그 의미는 보다 새로와진다.
네 자손 - 가나안 땅을 천국의 모형으로 이해할 때. 이는 지상 가나안의 실체인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모든 영적 아브라함의 자손(엡3:6)을 포함 하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영원히 이르리라 - 이러한 하나님의 약속은 결코 변역될 수 없다. 그러나 그 약속의 효력은 이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에게만 미친다. 출에굽한 이스라엘의 제 1세대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약속의 땅에 대한 소망을 저버린 결과 그 땅을 상속받지 못한 것(민14:26-38)도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13:16
땅의 티끌같게 하리니 - '너로 큰민족'을 이루게 하리라(12:2)는 약속을 보다 강조한 표현이다. 계속해서 '하늘의 뭇별'(15:5), '바닷가의 모래'(22:17)로 이어지는 후손에 대한 약속은 당시 늙고 무자(無子)한 아브람에게는 꿈과 같은 소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약속은 역사적으로도(왕상 4:20), 영적으로도 성취되었으니(마 8:11;롬 4:16;갈 3:7) 하나님의 약속은 마침내 성 취되며 또한 하나님 안에서는 능치 못할 일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18:14;막 9:23).
13:17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 아브람이 현재 발딛고 있는 땅이 곧 그의 후손에게 상속될 바로 그 땅(12:7)임을 확신케 하기 위한 탐방명령이다.
13:18
이에 - 하나님께서 명령한 즉시 행동에 옮긴 신속성을 나타낸 단어로 아브라함의 신앙의 성숙성이 엿보인다.
헤브론 - 벧엘 남방,예루살렘 남쪽 약 30여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본래 명칭은 기럇아르바이다(23:2). 훗날 여섯 도피성 중의 하나가 되었으며 (수20:7)다윗이 이곳에서 7년 반을 치리하기도 하였는데(삼하 2:1-4,11)이스라 엘 신정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곳이다.
기근으로 인해 약속의 땅을 등진 채 애굽에 내려갔던 아브람이 인간적인 실수와 하나님의 보호라는 극히 대조적인 경험을 한 후(12장), 무너진 신앙의 단을 수축하기 위해 벧엘로 귀환했다(1-4절). 본장은 벧엘 귀환 직후에 발생한 아브람과 롯의 주거지 분리에 얽힌 일화를 담고 있다. 여기서 믿음의 선택을 했던 아브람은 다음 장(14장) 이후에서 볼 수 있듯이 서서히 약속의 땅 가나안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된다. 본장의 내용 구성은 다음과 같다. 즉 애굽에서 많은 재산(특히 가축)을 모아 가나안에 귀환했던 아브람 일가는, 흔히 물질적 풍요로 인간 상호간의 첨예화된 이해 관계를 낳듯이 골육 간의 내분을 맞아야 했다(1-13절). 이에 아브람은 조카 롯과 경쟁적인 관계에서가 아닌 상호 협조적인 관계에서 분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아브람은 애굽에서의 실수를 되뇌이며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고자 한 상태였으나, 막상 가족의 장래가 걸린 주거지(목초지) 선정 문제에 있어서 인간적인 갈등을 겪지 않았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는 '약속의 땅'에 대한 믿음(히 11:7)과 풍요의 근원이 오직 하나님임을 확신하고(12:16,20)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한 채 목초지 선택의 기득권을 조카 롯에게 제공함으로써 더 이상의 분쟁의 소지를 제거하였다.
한편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것이 아니라 단지 아브람과 함께 떠났을 뿐인(12:4) 롯은 아브람에게 지나온 여정 동안 좋은 동반자였겠으나 현실과 장래가 달린 문제에 직면하여 선뜻 자신의 욕심을 앞세운 선택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본장 말미에서 확인하듯이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승리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모든 것을 양보했던 아브람에게 돌아갔다(14-18절). 즉 하나님은 인간적인 욕심을 제어하고 오직 당신의 뜻을 바라며 이웃의 번영을 기원했던 아브람에게는 미래의 번영을 약속하셨으나, 현상에 만족하고 욕심을 부렸던 롯에게는 그가 본 현상적인 것 이상은 허락치 않으셨다. 이것이야 말로 믿음의 유.무에서 빚어지는 궁극적 생의 희.비극이라 할 수 있다(히 11:1).
1. 아브람과 롯의 선택(13:1-13)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물음은 무엇을 소유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느냐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즉 물질적인 현상에 집착하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바를 성취하고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인간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이런 점에서 본문에 등장하는 아브람은 참신앙인의 길을 걸어간 자이다. 그는 첫 신앙의 고향 벧엘로 귀환한 후(1-4절) 많은 가축 때문에 필연적으로 롯과의 영토 배분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사실 그는 이 문제에 있어서 조카 롯보자 좋은 것을 우선 선택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거기에 마음을 두지 않고 기득권을 롯에게 넘겨 줌으로써 평화 정착에 노력했다. 이로써 그는 이 땅의 것에 소망을 두는 대신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기업을 더욱 소망하게 되었으며, 불화로 인한 치명적 손실(하나님의 영광 훼손, 원주민들의 약탈, 가족끼리의 분란 등)을 막을 수 있었다.
반면에 롯은 이웃의 이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지 현상적인 행복과 풍요에 눈이 멀어 죄악의 도성 소돔 근방을 선택하였다. 사실 그가 선택한 목초지 자체는 기름지고 풍족한 땅으로서 악한 것이 아니었지만, 그 목초지를 선택한 인간의 마음이 욕심과 이기심으로 가득찼기 때문에 그 선택은 큰 허물이 되었던 것이다(눅 12:15).
이처럼 지나친 소유욕에 얽매여 이웃과의 친화나 바른 인간성 및 하나님과의 관계마저 포기한 그는 후에 어쩌면 당연한 비극적인 순간들(포로 유배, 재산 상실, 아내의 죽음, 딸과의 불륜 등)을 맞아야만 했다. 그의 비극적 결말을 현실적으로 비록 많은 부를 소유하였다하더라도 그가 영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존재라면 그 누구나 결국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된다는 교훈을 제공한다(눅 12:16-21).
* 이스라엘 민족 신앙의 기원지 벧엘. 벧엘(Bethel)의 원래 명칭은 '루스'이다(28:19). 원래 이 곳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는 주신(主神) 중 하나인 엘(El) 신에게 봉헌된 성읍이었다. 그러나 후일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하란으로 도피 중 이곳에서 사닥다리 환상을 본 후, 그 감격으로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가진 '벧엘'로 명명했던 것이다(28:19). 따라서 벧엘은 단순한 고을 지명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숨결이 담긴 기념비적인 성읍이라 할 수 있다(28:10-22).
그리하여 이 벧엘은 이스라엘인에게 있어 예루살렘 다음으로 구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장소가 되었다.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만나 새로운 교제를 형성하고 헌신을 다짐하는 거룩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이렇게 신앙 유적지로 기억될 수 있게 된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깊은 신앙 자세에 기인한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도착해 처음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위해 제단을 쌓은 곳이 벧엘이었고(12:8), 가나안의 기근으로 맘미안아 애굼으로 내려갔다가 인간적인 치욕을 경험하고 다시 돌아와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속죄제와 감사제 및 헌신제를 드린 곳도 벧엘이었다(13:1-3). 즉 모든 신앙인의 아버지 아브람이 자신의 죄악된 실존(實存)을 철저히 고백하고, 지금까지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감사하며, 미래를 향한 자신의 헌신과 새로운 결의를 다짐한 곳이 벧엘이었다.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의 계시를 접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야곱의 일생에서 벧엘의 체험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바, 곧 불안한 그의 인생이 이 사건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야곱은 하나님을 '벧엘의 하나님'이라 부를 정도였다(31:13). 또한 하나님은 이곳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시키심으로써 언약 백성 이스라엘의 근간을 마련하셨다. 뿐만 아니라 딸 디나로 인한 세겜 대학살사건(34장)을 경험하고 그것이 곧 자신의 미진한 신앙의 결과였음을 깨달은 야곱이 간절한 마음으로 온 가정의 종교 개혁을 단행한 후 찾았던 곳도 바로 이곳이었다.
모든 신앙인에게는 누구나 할 것 없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첫사랑의 흔적을 발견하며 죄사함을 얻을 수 있는 신앙 회복의 제단인 영적 벧엘이 있다. 하나님은 항상 그 제단의 임재해 계시면서 범죄하고 좌절한 영혼들을 기다리고 계신다(35:1-3). 그러므로 우리는 참회와 새로운 결단을 할 때마다 그 제단을 찾고 거기에 계신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 불화(不和)를 방지하는 법. 어느 집단에서든 인간 관계로 빚어지는 긴장과 갈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최초 인류였던 아담과 하와 이래로 계속되어온 아픔이며(3:12) 인간의 힘으로는 좀처럼 해결하기 힘든 숙제이다. 그래서 사람들 중에는 인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고통을 없애기 위해 아예 무관심하다거나 위장된 평화로 대인 관계에 임하려 한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인간으로 하여금 더욱 심화된 갈등과 고통을 맞이하게 할 뿐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가정에도 예외없이 이런 긴장을 맞아야 했었다. 그러나 아브람의 믿음에 근거한 용단에 의해 큰 어려움없이 그 상황을 극복할 수 있었다. 즉 그는 긴장의 요인을 발견하고 대화를 추진했다. '나나 너나 서로 다투지 말자'. 대화에 임한 그는 자신의 이익에 관계없이 서로 평화해야할 것을 전제하였다. 평화는 그것을 하나의 부차적인 수단으로 삼을 때 완성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것 중 최우선으로 삼을 때 반드시 실현된다. 하나님은 이 평화의 실현을 위해 독생자까지 희생하셨다(요일 4:10).
계속해서 아브람은 자신과 롯이 적대 관계과 아닌 상호 협조 관계이자 한 가족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한 골육이라'. 그는 혈연에서도 신앙에서도 한 지체인데 도무지 다툴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인류가 하나님 안에서 한 가족이라는 사해 동포적(四海同胞的) 생각을 가질 때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인 갈등의 간격을 좁힐 수 있다. 물론 이런 공동체의식은 참사랑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고전 12:13장).
마지막으로 아브람은 자신을 희생하고 롯의 유익을 구함으로써 불화의 씨를 말끔히 제거하였다. "네가 죄하면 나는 우하고..." 자신의 이권까지도 포기하는 희생과 양보는 평화 정착의 제일 요건이다.
예수께서는 이 같은 희생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나와 너의 분쟁을 제거하셨다(빌 2:1-8). 이처럼 평화 실현에 대한 의지와 상대를 포용하려는 마음과, 그리고 마침내 자기 희생이 따를 때 비로소 불황의 아픔은 말끔히 가실 것이다.
2. 아브람을 향한 하나님의 위로(13:14-18)
본문은 하나님을 의뢰하는 믿음으로 조카 롯에게 좋은 거주지를 양보한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의 놀라운 계시로서 위로하시는 장면이다. 실로 하나님은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한 자에게 그가 포기한 것보다 더 풍성한 은혜로 채워주신다. 이것은 의를 위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공평하신 보웅이다(마 10:39).
롯에게 풍요한 땅을 양보하고 척박한 광야로 나선 아브람에게는 불확실한 미래와 쓸쓸함만이 남아 있었다. 이처럼 선을 위해 힘쓰는 자에게는 종종 절망적인 순간이 찾아들 때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을 기억하시고 그에게 가나안 땅과 후손에 대해 재차 약속하심으로 용기를 돋우셨다. 하나님의 이 같은 약속은 단순히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것 뿐아니라, 천국과 교회를 예시하는 영적이며 영원한 것이기도 했다. 비록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눈물을 감수해야 할지라도 항상 곁에 계시며 위로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평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신앙인만이 가지는 비밀스런 힘이며 기쁨이다(시 27:10). 그러므로 우리는 현실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에 초연함으로써 이웃과의 평화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먼저 이뤄가야 한다.
진정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는 자보다 부요한 자는 없다.
* 헤브론 마므레 상수리 수풀. 에덴이 인류 최초의 거주지였고 아라랏이 홍수 후 세대의 고향이었듯이 헤브론의 마므레는 이스라엘 신앙의 발상지라 할 만큼 중요하다. 이곳은 애굽의 소안보다 약 7년 앞서 건설된 고대의 도시로(민 13:22) 현재 '하나님의 친구'라는 뜻의 '엘 카릴'(El Khalil)에 해당한다.
하나님은 이곳의 마므레 땅에 외롭게 남겨진 아브람에게 친구로 나타나셔서 메시야의 통치와 그 나라 시민에 관한 원대한 계획을 말씀하심으로, 이곳이 하나님과 인간의 우정의 장소이자 황량한 벌판이 아닌 거룩한 약속의 마을로 기억되게 하셨다. 고향을 떠나 방황하던 유량민이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곳,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사드리고 그 은혜와 보호에 감사하는 등 가장 경건한 때를 보냈던 곳, 마므레는 분명 여호와 신앙의 발상지이자 구약 교회의 설립처라 할 수 있다. 후에 아브람은 이곳에 자신과 아내의 무덤을 두게 함으로써 그와 그 아내의 일생이 하나님과 더불어 진행된 신앙 여정이었음을 보여 주었다(23,25장).
이처럼 자신의 생활 터전을 신앙의 본원지이자 전수지로 삼고, 일생 동안을 그 신앙의 원칙에 따라 살다간 아브람은 진리가 소멸되고 불의가 득세하는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참신앙의 위대함을 제시하고 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나그네 생을 사는 우리 각자의 거처는 어쩌면 역사 속에 되살아난 20세기의 마므레인지도 모른다.
세일하머
D. 아브라함과 롯(13:5-19:38)
1. 다툼과 분리 (13:5-18)
비록 그 이전 단락과의 연관성이 뚜렷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단락이 13:5에서 시작된다. 이 서술은 다퉁의 주제에 의해서 지배되며 다툼의 결과로 말미암는 분리에 의해서 이루어진다(13:9,11,14). 그 결론 부분에서는 약속이 두번째로 언급된다(13:14-17). 약속에 대한 첫번째 언급이 아브라함이 나라들과(10:32) 아비 집으로부터 분리되는 것(12:1), 뒤에 나오는 것처럼 약속에 대한 두번째 언급은 아브라함이 그의 가까운 친척인 롯으로부터 분리되는 문맥 속에 놓여진다(13:14).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에 대한 마지막 언급이 그가 자신의 독생자요, 상속자인 이삭으로부터 기꺼이 분리되려고 한 직후에 주어진 것은 결코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22:15-18).
롯으로부터의 아브라함의 분리는 또한 '위험 속에서의 약속'이라는 주제를 수행하고 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롯에게 주려는 순간에 놓이게 된다('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3:9). 아브라함의 제안에 있어서 특별히 놀라운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서술 속에서(19:37-38) 롯은 암몬과 모압족속의 조상으로 제시된다는 점이다. 아브라함은 저자 자신의 시대와(예를 들면. 민 22-25장) 이스라엘의 계속되는 역사를 통하여(신23:3-6, 스9:1),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가 되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 약속의 땅을 넘겨주려고 한다. 아브라함 때문에 약속은 이제 모압족속의 조상의 변하기 쉬운 마음에 따라 좌우되는 위치에 놓이고 있다. 그러나 롯의 '동쪽'을 택함으로써(13:11)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남았다(13:12). 하나님의 약속은 아브라함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유지 되 었다.
그러므로 나라들의 계획조차도 자기 백성을 위한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는 것으로 제시된다. 아무것도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길을 막고 설 수 없다. 이 서술에서 반영되고 있는 동일한 관점은 나중의 예언서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이사야 제5장에서 예언자는 바사왕 고레스의 등장을 하나님 자신의 사역으로 묘사한다. 이사야에 의하면 고레스의 모든 계획과 군사적 정복은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가지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돌아와 안전하게 그곳에 거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가 나의 성읍을 건축할 것이며 나의 사로잡힌 자들을 값이나 갚음 없이 놓으리라" (사45:13).
저자는 독자에게 롯의 선택의 궁극적인 결과에 대하여 예시해 준다. 그가 선택한 땅은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는데 이것은 창세기의 문맥 속에서 긍정적인 표현이 된다. 그러나 저자는 롯에 의해서 선택된 땅이 '소알'까지 이르는 지역에 속해 있음을 덧붙이고 있다. 계속되는 서술이 보여주는대로 소알은 롯이 소돔과 고모라의 파별로부터 도망하여 피한 성읍이었다(19:22). 이미 '여호와의 동산 같은' 동쪽의 땅에 대한 롯의 선택 속에서 우리는 '소알'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그러한 선택의 최종적인 결과를 예시해 볼 수 있다.
이 서술 속에서 우리는 롯의 '분리'와 바벨론(11:1-9)에서의 나라들의 '나뉨'(10:32)과 소돔에서의 나라들에 대한 심판(19:1-29) 사이의 명 백한 연관성을 볼 수 있다. 13장과 소돔의 파멸(19장) 사이의 연관성은 13:10의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라는 표현과 13:12-13의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사람은 약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는 표현 속에서 보여진다. 이것은 19장의 첫 부분에서 다시 언급되는 것과 동일한 내용이다. 본문 속의 이 부분에서 소동의 파별에 대한 저자의 언급이 암시하고 있는 흥미로운 것들 중에서 하나는 저자가 자신의 독자들이 이미 19장을 읽은 것으로 가정하고 있음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모세오경은 한 번 이상 읽혀지도록 기록되었다. 사실상 대부분의 메시지는 우리가 모세오경 전체를 수차례에 걸쳐서 읽은 후에야 그 초점 이 분명해진다.
13장과 바벨론 멸망에 관한 설명 사이의 연관성은 아브라함으로부터의 롯의 분리와 그의 동쪽으로의 여 행이 창세기 11장에서의 바벨론 멸망에 대한 설명에 의해서 의서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에서부터 유래한다. 10:32에서 저자는 나라들의 흩어짐에 대한 설명을 다음과 같은 말로써 결론짓는다.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 그리고 바벨론의 흩어짐에 대한 서술은 땅의 백성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바벨론성을 쌓기 시작했다는 설명으로 시작된다(11:1-2). 이와 마찬가지로 롯은 아브라함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에 가나안땅으로부터 '동으로' 옮기어 '요단 온 들'의 성읍들로 이주하였다(13:11).
바벨론에서의 나라들의 '분리'에 뒤이어서 서술은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통과하면서 그것을 약속으로 받고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응답으로서 단을 쌓았다는 설명으로 시작한다(12:1-9). 이와 마찬가지로 롯이 '분리'되어 소돔으로 향한 후에 아브라함은 가나안땅으로 통과하면서 그것을 두번째로 약속으로 받았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서 단을 쌓았다(13:14-18). 그렇다면 롯은 바벨론과 소돔이라는 두 성읍에 대한 저자의 취지를 연결하는 다리이다. 13장의 서술에서 나타나는 이들 두 성읍 사이의 밀접한 평행은 저자가 이들 둘을 통하여 동일한 이야기를 말하려고 의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창세기를 통한 평행과 반복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동방의 성읍'을 파멸시키신 것에 대한 이중의 설명은 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확실하고 임박하다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의도되었다(41:32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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