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번성하기 시작할 때 -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1:28)는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선 아담의 범죄 이후 모두가 죽을 운명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정 기간 동안 인간에게 장수(長壽)를 허용하사 많은 자녀를 갖게 하셨다(5:6-27 강해).
딸들(* ,바트) - '벤'(* ,아들)의 여성형으로 문자 그대로 '딸'을 의미한다. 그런데 '사람들에게서 딸들이 나다'란 말은 남자에 비해 여자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였다는 뜻이 아니라 그녀들로 인해 인류에 어떤 위기가 도래케 되었다는 사실을 함축하고 있다.
6:2
하나님의 아들들 - 이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자들인지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1)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들이라는 유대 랍비들(Onkelos, Symmachus, Aben Ezra)의 견해
(2)성경의 일반적 용례(욥1:6;2:1; 38:7;단3:25)에 따른 '천사'란 견해(Lxx,Josephus, Tertullian,Luther, Baumgarten, Kurtz, Alford)
(3)셋 계통의 경건한 자녀들이란 견해(Augustin,Calvin,Lange,Keil,Wordsworth). 이 중 (1)은 히브리어의 일반적 용례로 볼 때 비성경적이며(2)는 본문의 전후 문맥 관계상 상치된다. 그리고 구속사적으로 보더라도 이들을 천사들로 볼 경우, 향후 전개되는 타락사는 인간의 타락사가 아니라 천사의 타락사가 된다는 견지에서도 이 견해는 합당치 못하다. 따라서 세번째 견해가 가장 유력시되는데 이는 신학적 의미와도 부합되며 또한 이와 유사한 표현이 경건한 신앙인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성경 관례(신32:5; 시73:15;80:17; 호1:10)에 의해서도 지지를 받는다.
사람의 딸들 -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도 세 가지 견해가 있다.
(1)지체 낮은 천민 계층의 딸들(2)인간의 딸들(3)가인 계통의 불경건한 자녀들. 이 중'하나님의 아들들'이란 말과 자연스레 대응을 이루는 견해는 역시 세번째 것이다.
아름다움(토브) - '좋은', '선한', '아름다운' 등의 뜻을 지닌 단어로 성격상에 있어서의 사랑스러운 면을 뜻할 수도 있으나 여기선 외견상의 '미모'를 의미한다(24:16; 단 1:15).
보고(라아) - 단순히 보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세히 주목하거나 인지하는 것을 의미한다(왕상 20:7; 시 31:7).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들'이 신앙과 선한 행실, 아름다운 마음씨등과 같은 응당 주의를 기울여야 할 내면적 아름다움은 외면한 채 인간의 외모에만 관심을 집중하였다는 것은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이는 곧 하나님을 아는 자든 모르는 자든 간에 당시의 모든 사람이 전도된 가치관을 갖고 있었음을 증거해 주는데 이처럼 온 사회가 타락 일변도로 흘러갈 때 그 결국은 필연적으로 패망일 수밖에 없다(7절).
좋아하는 - '선택하다', '지정하다'는 뜻. 하나님의 뜻이 아닌, 자신들의 안목의 정욕을 좇아 고르는 것을 의미한다(고후 10:7).
아내(나쉼) - '이솨'(2:24; 3:20; 4:17)와 교체하여 쓸 수 있는 단어로 '아내''부인'(4:19; 삿8:30)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여인'(신20:14; 느8:3)을 뜻하기도한다.
삼는지라(라카흐) - 4:19에서는 '취하였으니'로 번역되었다. 일반적으로 결혼하는 것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다(출 6:25; 민 12:1).
6:3
나의 신이...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 신(루아흐)은 문자적으로 '바람'(8:1), '호흡'(7:22), 상징적으로 '마음'(26:35), '정신'(삿15:19), '영감'(왕하2:9)을 의미한다. 그런데 때로는 '신'(34:9), '영'(왕상22:21)을 뜻하기도 하므로 혹자는 '나의 신'을 1:2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성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않다. 여기선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생명'을 뜻하는 바 본절은 인간 타락이 절정에 달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홍수 심판으로 그인간들의 생명을 거두어 가시겠다는 의미이다(17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 그 시대의 사람들이 필연적으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육체(바사르)는 헬라어 '사륵스'와 같은 의미로 단순한 '몸'(15:4; 고전6:15)이 아니라 죄의 영향으로 사악하게 된 '타락한 육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롬 8:6).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 - 당시 모든 사람들의 수명이 일백 이십년으로 한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 기간이 지난 후 대홍수 심판이 있을 것이라는 예언적 경고이다. 따라서 이 기한은 당시의 타락한 인간들에게 주어진 심판의 유보 기간이자 동시에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 마지막 은혜의 기간이었던 것이다(벧후 3:9).
6:4
네피림(네피림) - '떨어지다'(fall)란 뜻을 지닌 기본 동사 '나팔'(* )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어떤 학자들(Hoffman, Delitzsch)은 이러한 원어의 뜻에서 유추 해석하여 '네피림'을 하늘로부터 떨어진 타락한 천사들의 후손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튜크(Tuch)나 크노벨(Knobel)같은 학자들은 이들을 '괴물'(monster) 또는 '신동'(神童)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70인역(LXX)은 네피림을 '장부'(丈夫)란 뜻의 '기간테스'( )로 번역했고, 벌겟역(Vulgate)과 KJV도 70인역을 따라 '용사', '거인'이란 뜻의 'giant'로 번역하여 네피림을 타락한 천사나 혹은 천사와 인간 사이의 혼혈족으로 보지 않고, 단순히 그 신체적 특성상 장부가 거인으로 불릴 수 있는 일단의 사람 혹은 족속을 가리키는
말로 보았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신체적 특징은 아울러 도덕적 특성까지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대체로 훼방꾼, 무법자, 난폭꾼, 가해자등의 속성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종합하면 노아 당시의 '네피림'이란 거대한 신체를 지닌 '폭꾼들'내지는 '침략자들' 정도의 뜻으로 이해함이 좋을듯 하다(Luther,Calvin,Keil, Murphy). 한편 이 용어는 출애굽이후 광야 여행 시대인 민 13:33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이때 이용어가 사용된 것은 가나안 땅을 탐지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이 그 땅 족속들의 모습이 마치 홍수 전 노아 시대의 네피림같이 장대하고 난폭하다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말하기 위한 것 뿐이었다.
그 후에도 - 하나님께서 홍수 심판을 예고하신 이후에도 여전히 사람들이 이전의 타락한 행실을 담습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취하여(야보우) - '보'(얻다, 침투하다, 달려가다)의 미완료형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멸망의 경고를 들은 이후에도 계속해서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맞아들인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보'( )는 남녀간의 혼인을 뜻하는 완곡한 말이다(삼하 16:22; 대상2:21).
용사 - 문자적 뜻은 '강한 자', '힘센 자', '우두머리' 당시 이들은 세상을 지배하던 힘세고 강한 영웅이었거나 아니면 많은 하수인을 거느렸던 압제자였음을 뜻한다. 즉 이들은 전쟁과 약탈, 방종과 사치 등이 난무하던 홍수 이전 시대 그 타락의 주역들이었던 것이다.
고대에(* , 올람) - 헬라어 '아이온'(*)과 같이 '오래 전', '영원'(눅1:70; 고전2:7)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3절; 17:7; 왕하 5:27). 이는 저자(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본절에 기술된 의미를 지닌다.
유명한(* ,쉠) - 좋은 의미에서는 명예나 명성을 얻는 것을 뜻하지만(신26;19;단9:6) 나쁜 의미에서는 본절과 같이 악명(惡名)을 날리는 것을 뜻한다.
6:5
죄악(라) - '라아'(깨뜨리다, 상하게 하다, 쓸모없게 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창조 질서를 어기거나 그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인간의 모든 악한 행위를 의미한다(39:9; 사47:10).
관영함 - 원어 '라바'( )는 '크다', '충분하다', '너무 많다'는 뜻(대상23:17;시 130:7). 이는 당시 사람들의 죄악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깊이 뿌리를 박은 지속적인 것이었음을 나타낸다.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 타락한 이후 인류가 지니게 된 보편적 죄성(罪性)을 증거하고 있는 구절이다. 그러므로 칼빈(J.Calvin)은 이에 근거하여 '타락한 인간은 근본적으로 그 본성이 부패하고 죄에 오염되었으므로 스스로는 아무런 영적 선도 행할 수 없다'는 '인간의 전적 타락설'(Total Depravity)을 주장하였다(롬3:9-18). 한편 여기서 마음(*,레브)은
갖가지 감정이 자리잡고 있는 좌소(座所)를 의미한다(17:17). 그리고 생각(* , 마하솨바)은 어떠한 문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골똘히 연구하는 것을 의미한다(삼하 14:14; 잠16:3; 렘18:12).
또한 계획(에체르)은 어떤 일을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의도적으로 기획하는 것을 뜻하며(8:21; 신 31:21) 악하다는 것은 앞에 나온 죄악과 같은 의미를 지닌 동일 단어이다.
보시고(야르) - '라아'(바라보다, 주목하다, 발견하다)의 미완료형으로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소위(所爲)와 그 생각하는 바가 어떠한 것인지를 오랜 기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셨음을 의미한다.
6:6
지으셨음을(아사) - 여기에 '바라'(창조하다) 대신(7절) '아사'가 쓰인 것은 자신이 최고의 애정을 기울여 만든 인간을 전멸시켜야 하는데 대한 하나님의 극한 아픔을 강조키 위함이다(5:1).
한탄하사(나함) - '후회하다'는 뜻과 함께 '위로하다'는 뜻도 지니고 있는 단어이다(5:29). 그런데 이는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도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후회하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선 인간이 아닌 전지 전능한 지존자(至尊者)로서 결코 변개치 않으시기 때문이다(삼상 15:29). 다만 이는 인간의 비극적 타락에 대해 갖으시는 하나님의 안타까운 심정을 인간의 측면에서 묘사한 말일 뿐이다(1-7절 강해).
마음에 근심하시고 - 직역하면 '그의 마음에 새기셨다'. 즉 인간의 비극적인 타락상황을 보신 하나님께선 그것이 마음 깊숙이 새겨져 도저히 지울 수 없는 극심한 아픔으로 느끼셨다는 뜻이다(시 78:40). 이상에서 우리는 범죄한 인간에 대해서조차 사랑을 쉽게 단념치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심임을 알 수 있는데(눅15:11-24). 이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마땅한 태도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선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그것을 준행함으로 더 이상 그분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는 것이다(롬12:2).
6:7
나의 창조한 사람 -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가 아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는 구절이다. 만일 그들이 '사람의 딸들'과 함께 방종을 일삼는 타락한 천사였다면 하나님께선 본절에서 '내가 창조한 사람과 천사를 멸절시키리라' 는 심판을 선고 하셨을 것이다(3:14).
쓸어 버리되(마하) - 문자적 뜻은 '씻다'(왕하21:13). '지워버리다'(출32:32).'닦아내다'. 하나님께서 물로서 깨끗이 쓸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임을 시사해 주며 또한 그 심판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파멸이 될 것임을 의미한다(출 17:14).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 3:17에 이어 다시 한번 인간의 죄책(罪責)과 그영향이 자연계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범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자연계에까지 확산된 점은(1)자연계에 대한 인간의 주권성과(2)인간에 대한 자연계의 예속성을 보여 준다(3:14-21 강해).
한편 여기서 육축(베헤마)은 본래 소나 말처럼 몸집이 큰 네 발짐승을 가리키나 본절에서 모든 가축을 뜻하는 집합적 의미로 쓰였다(1:24; 7:14). 그리고 기는 것(레메스)은 '라마스'(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다)에서 파생된 말로 곧 파충류(1:24; 왕상4:33)와 곤충(합1:14)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새(오프)는 날개가 있어 날아다닐 수 있는 모든 생물을 의미하나(레 11:21) 성경에선 대개 '새'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1:20; 호 4:3).
6:8
여호와께 - 직역하면 '여호와의 눈에', 이는 노아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게 된 까닭이 그분 보시기에 기뻐하실 만한 점이 있었기 때문임을 시사해 준다(9절).
은혜(헨) - '하난'(불쌍히 여기다, 아랫사람에게 호의를 베풀다)에서 파생된 말로 하나님께서 경건한 자(시4:3)와 고생하는 자(시 6:2)를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사랑, 은총, 자비등을 의미한다(30:27; 출 33:12). 그렇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본성이 곧 사랑과 긍휼, 공의임을 뜻하는 '헤세드'(렘 9:24)와는 달리 먼저 은혜를 받는 자가 경건하며 의로운 자여야 한다는 조건을 필요로 하는 단어이다(9절). 여기서 우리는, 비록 하나님의 강권적인 사랑이 없다면 구원 얻을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나(롬 3:10-12) 그 같은 사랑에 대한인간측의 적극적인 반응과 노력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 확인할 수 있다(계 3:20).
6:9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 이 말은 이후 전개될 이야기는 인류 전체의 역사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노아를 중심하여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속사'에 초점을 맞춘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의인(이쉬 차디크) - 여기서 '차디크'(의로운, 공정한)는 '차닥'(곧다, 올바르게 행하다)에서 온 말로 전혀 무죄하거나 흠없는 것이 아니라, 타락한 시대적 상황에서 그래도 경건하고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전 7: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선 노아의 이 같은 노력을 높이 평가하사 '의'(義)로 인정해 주신 것이다.
당세에 - '그의 동시대 사람들 가운데'라는 뜻, 이는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자라는 것이 절대적인 개념에서가 아니라 상대적 개념에서 그렇다는 뜻임을 드러내 준다. 이처럼 성도도 본시 불신자와 다름없는 죄된 성품을 지닌 자요 육적 죽음이 예정된 자이긴 하나 그래도 세상과는 구별된 존재로 경건한 삶을 살아 그리스도인의 향기를 발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고후 2:15).
완전한 자(이쉬 타밈) - '타밈'(온전한, 성실한)은 '타맘'(완성하다, 완수하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이 역시 '차디크'와 마찬가지로 모든 행위가 한 점 티도 없이 완전하다거나 전햐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과 하나님 보시기에 부끄럽지 않는 자가 되기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것을 의미한다(잠 28:18).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 노아가 '의인', '완전한 자'로 불림 받을 수 있었던 이유이다. 그는 온 땅이 하나님 앞에 쾌괴한 가운데서도(11절) 그분을 경외하며그의 뜻을 따라 그의 말씀과 더불어 동행하는 곧고 바른 삶을 살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토록 분에 넘치는 호칭을 얻을 수 있었다(5:22). 그런데 하나님께선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내가 온전한 것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고 명하신다. 따라서 우리는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딤전 4:12)등.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우리의 삶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드러내야 할 것이다(딤전 4:15).
6:10
5:32과 거의 동일 구절이긴 하나 그 진술 목적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5:32은 구속사의 주역이 될 새로운 족속의 시조(始祖)출현을 암시하고 있으나 본절은 노아의 신앙과 경건성이 그의 아들에게도 영향 미쳤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는 그의 아들 셈의 계보에서 위대한 신앙의 인물 아브라함이 출현한
것에 의해 뒷받침된다(11:27).
6:11
때에 - 원문에는 없는 말이다. 노아당대를 가리키는 말로 당시 노아와 같은 이가 있었긴 하나 전체 시대 풍조는 부패하기 짝이 없었음을 강조하기 위해 개역 성경 편찬자가 부기(附記)한 듯하다.
온 땅(하아레츠) - 직역하면 '그 땅', 당시 지상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뜻하는 은유적 표현(2:1).
강포 - 원어 '하마스'( )는 '학대하다', '해치다', '탈취하다'는 말에서 파생된 단어로 '포악', '흉악'을 의미한다(삿 9:24; 겔 7:11). 즉 강도, 살인, 약탈, 강간 등과 같은 악으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뜻하는데곧 그러한 온갖 무법 현상이 노아 시대에 횡행하고 있었음을 증거해 준다.
충만한지라(티말레) - '말레'(가득하다, 채우다)의 완료형으로 더 이상 채울 자리가 없어 밖으로 흘러 넘칠 정도로 꽉 찬 것을 의미한다(수 3:15). 이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한시도 심판을 지체하실 수 없을 만큼 시대의 타락상이 무르익었음을 보여 준다.
6:12
하나님이 보신즉 -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육체를 지니지 않은 영이시다(요4:24). 그러나 성경은 우주와 인간을 섭리하며, 조금도 쉬지 않고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요5:17)을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이처럼 의인적 표현을 많이 쓴다(출15:17; 신11:12; 왕상 8:42; 시 8:6). 그 가운데 본절과 같은 표현은(1) 하나님이 인간의 외면과 더불어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시므로 인간은 그 앞에서 결코 변명하거나 거역할 수 없다는 점과(2)그분의 판단은 정확하며 한치의 오류가 없다는 점을 강조해준다.
행위(데레크) - '다라크'(걷다, 밟다)에서 파생된 말로 습관적으로 굳어진 '행동양식'을 의미한다(겔 20:30). 이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습속이 타락 일변도로 고정되어 있어 갱생시키기 매우 힘든 상태였음을 나타내 준다.
6:13
노아에게 이르시되 - 후일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알려 주시는 것처럼(18:17) 하나님이 노아에게 장차 있을 대홍수심판을 미리 일러 주시는 부분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계획과 비밀을 계시하여 주시는데(시25:14) 이는(1)환란 가운데서 그를 구원하시기 위함일 뿐 아니라(요17:12)(2)그로 하여금 세상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게 하여 악인이라도 그 경고를 듣고서 돌이켜 회개하고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겔 33:11).
끝날 - 원어 '케츠'(* )는 원래 어떤 물건이나 장소의 '테두리', '가장자리'를의미하나 여기서는 시간에 있어서의 끝, 즉 '멸망의 때'를 가리킨다(욥6:11; 단11:40).
내 앞에 이르렀으니 - 어떤 사건이나 때가 임박했음을 뜻하는 히브리인들의 관용적 표현(삼하22:6; 시18:5; 요7:6).
멸하리라(* 솨핫) - 11,12절에서는 '패괴하다'로 번역된 단어. 이는 하나님 앞에서 타락하거나 부패한 자의 결국은 멸망일 수 밖에 없음을 교훈해 준다.
6:14
잣나무(*고페르) - 선박이나 성문, 관 등과 같이 강한 내구성이 요구되는 구조물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되는 침엽수류의 수지성(樹脂性)나무, '고페르'란단어는 성경에서는 이곳밖에 나오지 않는다.
방주 -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 가정을 구원하기 위해 예비된 방주는 그 기원과 기능에 있어 신약 시대 '교회'에 자주 비유된다. 즉, 둘다 그 기원에있어 '신적'이며, 그 기능에 있어 '구원'이기 때문이다(11-22절 강해).
간들을 막고 - '여러 칸의 방들을 만들라'는 뜻. 둥우리 같은 작은 방들을 말하는 데 이러한 방은 노아의 식구들을 위한 것일 뿐 아니라(18절) 각종 짐승들을 그 종류대로 구분, 유치하는 데 반드시 필요하였을 것이다(19,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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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르그리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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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방주"라는 단어는 출애굽기 2장에 나오는 갈대상자 즉 모세를 구원받게 해준 작은 배를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이 방주는 출 25:10-22에 나오는 증거궤와는 다른 것이다.
6:15
1규빗을 45.6cm로 계산할 때 방주의 규모는 길이 약 137cm, 배수량 약 20,000t이 된다(11-22절 강해). 따라서 한때 세계 최고의 항공모함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엔터프라이즈호'가 길이 317cm, 배수량 75,700t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즉 당시 선박 건조술이 발달치 못하였고 동원 인력수도 8명(18절)에 불과하였던 상황에서 그토록 큰 방주를 어떻게 건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1)배의 구조가 극히 단순하였다는 점(2)선박 건조 기간이 120년이었다는 점,3절)(3)고대에는 인근에서 목재를 충분히 구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해 보면 그 같은 의문은
해소될 수 있다.
6:16
창(초하르) - 원뜻은 '빛'이나 여기서는 채광과 통풍을 위한 '창문'을 의미한다. 방주에는 이러한 창이 꼭대기에서부터 45.6cm되는 지점에 빙둘러가면서 여러 개 설치되어 있었던 것 같다.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 - 이처럼 갑판을 삼층으로 한 까닭은 적재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 및 각종 짐승들 외에도 그들이 1년여간 사용해야 할(8:14)식량과 생활용품을 적재하여야했기 때문이다(21절). 한편 체적(體積)에 따른 용적량 산출법에 의거하면 방주의 최대 선적량은 약14,000t에 달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6:17
홍수(*마불마임) - 직역하면 '물의 범람'. 여기서 '마불'(쇄도,범람)은 앗시리아어 '나발루'(파괴하다, 멸절시키다)에서 파생된 단어로 홍수의 엄청난 위력을 강조해 준다.
무릇 생명의 기식있는 육체 - 인간뿐 아니라 땅 위에 사는 모든 생물을 가리킨다. 여기서 물고기는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까닭은 분명치 않으나 죄로 오염된 땅(3:17)에 거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인 듯하다.
6:18
언약(*베리트) - '바라'(자르다, 끊다, 새기다)에서 파생된 말로 위반시에는 죽음 및 관계 단절이 뒤따르는 하나님과 인간간의 엄정한 약속, 계약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선 일찍이 아담과도 이러한 언약을 맺으셨는데(2:16,17,3:15).구체적으로 이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여기서부터이다. 이외에도 성경에는 아브라함(15:18;17:9-14;22:15). 이삭(26:24), 야곱(28:13,14)등과 맺은 언약이 나오는데 이것들은 모두 구속사에 있어서 최고의 정점인 예수 그리스도 및 그의 구속사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6:19,20
하나님께서 노아 개인과 언약을 맺으셨으나 그로 인해 가족과 동물까지도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대표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즉 아담의 타락으로 전인류와 피조계가 함께 저주를 받은 것과 마찬가지로(3:17) 노아의 의로움이 동물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던 것이다. 이러한 대표 원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루었는 데 곧 그분 한분이 대속의 죽음을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가 그 공로를 힘입어 속죄함을 받은 것이다(롬 5:17-19).
6:21,22
다 준행하였더라 - 120년에 걸친 노아의 인내와 믿음과 소망이 응축되어 있는 구절이다. 전력을 기울여 방주를 짓는 그 오랜기간 동안 노아는 당대 사람들에게 갖은 조롱과 희롱을 당하고 또한 미치광이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다 준행하여(약 2:17), 그 결과 자신과 가족, 짐승들을 구하였는데 이는 오늘날 각종 불법과 불경건이 난무하는 현시대를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역시 절실하게 요구되는 자세이다(눅 21:19; 약5:7).
창세 역사를 반영하고 있는 족보의 기술이 일단 노아에게서 멈추고, 본장은 타락한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로운 자에 대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 언급되고 있는 대홍수 전의 상황 묘사이다.
1-4절은 타락한 인간이 지상에서 번성하는 과정을 설명하며, 아울러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을 떠나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삶은 하나님의 피조물에 대해 한없는 염려를 표명하시며, 어차피 하나님의 거룩한 세계에 조화할 수 없는 인간의 편만한 죄악을 일소하기로 작정하신다(13절). 죄악된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이러한 조치는 단지 무서운 심판이기에 앞서 새로운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반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인물이 노아이다. 노아의 사역은 구시대의 악으로부터 새시대의 소망으로 이전하는 다리를 놓는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한다. 8-22절은 바로 의인 노아를 선택한 하나님의 섭리와 그를 통해 완성될 교회의 예표인 방주 건설 및 방주 속에서 이어져 나갈 생명체의 보존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은 죄악이 범람하는 오늘날에도 노아와 같이 당신의 뜻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당대의 의인을 찾으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통하여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 땅 위에 이루어 나가신다. 따라서 오늘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세계를 찾은 자들이야말로 20세기의 방주 속에 거한 새로운 생명의 씨앗들이다.
1. 하나님을 격노케 한 인류의 타락(6:1-7)
본문은 가인의 후예와 더불어 셋의 후예까지 타락하여 온 땅에 불법과 죄악만이 가득찬 홍수 전 상황이다. 실로 모든 것이 좋았던 창조 세계가 죄악의 오염으로 죽어가는 현실 앞에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마침내 인류를 심판하실 것을 작정하시는 장면이다.
비록 하나님의 나라가 성(聖)과 속(俗)이 공존하는 삶의 현장 속에서 건설되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바른 신관과 경건의 능력 없이 세속과 교류함은 오히려 타락을 이루는 첩경이다. 가인의 후예들과는 달리 여호와 신앙을 보존,확산하는 사명을 맡았던 셋 가계는 처음에는 부패한 세상 가운데서도 거룩을 잃지 않고 계속 번성해 갔다. 그러나 세월이 감에 따라 셋 가계 내에서도 세속의 가치관에 동조하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죄악된 문명에 친숙해가는 무리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러한 불경건함이 셋의 후예들에게도 깊숙히 침투하여 마침내 그들마저 완전 동화되고 말았다. 즉 셋 가계는 하나님 없는 질서와 문화를 이룸으로 죄에 대해 적극성을 띠기에 이르렀다. 성경은 이 사실을 단적으로 표현하여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3절)고 지적하였다. 즉 그들의 가치 기준은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육체적인 우아함과 강건함과 지혜로움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추구하는 바는 영원과 신령한 것들이 아니라, 찰나적인 쾌락과 외모와 인간적인 명예였다.
육체적 욕망과 가치관의 혼란에 젖은 인간들은 또한 절제의 능력을 지니지 못한 관계호 죄악을 가속화시켰으며, 끝내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죄악이 가지는 무서운 전염성과 아울러 인간의 범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케 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심판은 세속인들의 타락보다 거룩을 보존할 사명을 맡은 자들의 부팽 더 큰 원인이 있음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구현해 나가야 하는 성도는 인류의 운명을 책임지고 있는 역사의 주역들이라 할 수 있다.
* 인간 구원을 향한 하나님의 근심. -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당신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만족을 채우는 일에 급급했으며 자신의 세속적 영광을 위해 하나님을 저버렸다. 이에 하나님은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 물론 이 말은 인간들의 반역에 대해 하나님이 가지시는 거룩한 감정을 묘사한 신인 동형 동성론(Anthropomorphism)적 표현일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을 침해하고 정의의 법을 무시하는 악인들에 대해 침묵하지 않으시고 진노하시며 보응하신다. 이같은 하나님의 의로우신 감정이 있기에 우리는 진리를 사랑하며 정의로운 일에 헌신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거룩한 감정의 표출을 잘못 이해하게 되면 인간 창조 자체에 문제점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즉 하나님의 창조 사역이 불완전한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자유 의지를 지닌 인간의 허물과 실수에 기인한 것일 뿐 절대 완전하신 하나님의 실수로 매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은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거룩한 감정과 의지의 표현이지 결코 인간과의 관계 청산이 아니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하나님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선(善)을 이루지 못했던 타락한 인간을 준엄하게 심판하시고 경건한 노아의 가정을 통해 당신과 인류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고자 하셨다.
한편 노아 사건 이후에도 하나님의 '근심'과 거룩한 분노는 거듭되었다(겔 6: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영영히 명망시키지 않으시고, 그들을 심판하시는 동시에 그들의 회복을 주도해 오셨다. 그리고 마침내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희생시키시면서까지 당신을 실망시키는 인간을 구원하셨다. 이는 당신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뚜렸한 증표이다. 즉 인간 구원을 위한 끝임없는 집념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익히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사랑을 악용하여 하나님의 '한탄'과 '근심'을 초래하는 일을 삼가하고, 그분이 '감탄'하시며 '기뻐'하실 일을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간의 아름다운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2. 당대의 의인 노아(6:8-12)
본문은 칠흙같은 죄악만이 가득 찬 타락한 시대 상황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자 하는 의인 노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그러한 노아를 통해 거룩한 씨의 보존을 이어 나가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이 암시되어 있다. 실로 대홍수 전의 세상을 본장은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12절)라고 묘사하였다. 하나님은 도무지 진실과 정의가 발디딜 틈이 없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 희미한 불빛과도 같이 의와 진실을 추구하며 부패한 환경에 물들지 않은 고독한 의인 한명을 발견하셨다.
에녹의 3대손으로서 노아로 알려진 그는 신앙적 측면에서는 '의인'이며, 인격에 있어서는 '당세에 완전한 자'였고, 그 생애는 '하나님과 동행'한 자로서 그 시대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가 그런한 신앙을 통해 하나님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도덕성이나 종교성이 완벽했기 때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여호와의 은혜를 입었기'(8절)에 거룩하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완전한 자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사실 노아는 죄의 저주가 이미 인류에게 영향력을 미치던 때에 생존했었기에 그 역시 타락한 존재에 불과했다. 즉 그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랗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었던 영적 불구자였다(롬 3:10).
그럼에도 하나님은 당신의 거룩한 계획을 설명하시며 그를 당신의 동역자로 삼으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결국 본문에 서술된 노아의 뛰어남은 노아의 인간성을 드높이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그를 사용하셔서 인류 구속의 큰 역사를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묘사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와 같이 성경은 화려한 인간 행적과 그들의 영예를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라, 인간의 허물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나라를 건설해 가시는 하나님의 경륜이 기록된 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마다 하나님의 숨결과 그분의 메시지를 발견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성경의 역사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이지만 단독적인 역사는 아니란 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과 의지대로 역사를 추진해 가시되 인간과 함께 공동으로 일하기를 기뻐하시는 분이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는 인간 편에서는 '믿음'과 '순종'과 '헌신'이 요구되어 진다(히 11:7). 노아는 바로 이런 면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던 것이다. 죄악과 불의가 충만한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이 사실
을 믿는 우리는 어두워져만 가는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부름받은 하나님의 동역자로서 소극적으로는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할 뿐더러(약 1:27), 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응하고 그분의 뜻을 세상에 전파하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엡 5:8-21).
3. 노아의 방주(6:13-22)
관영한 죄악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 세계는 재생 불능으리 지경에 이르렀고 이를 간과할 수 없으셨던 하나님은 인류와 자연을 동시에 멸절시키기로 결정하셨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결정 사항이 당대의 의인 노아에게 계시되는 장면이다. 아울러 심판 후 새세대를 이어나갈 생명체들을 보존시키는 장면이며, 그 방편으로 방주 건조를 명하시는 장면이다. 따라서 본문은 죄가 세상에 보편화되면 하나님의 심판은 반드시 임하게 된다는 사실과 그러한 무서운 심판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거룩한 씨앗을 반드시 보존하여 주신다는 사실임을 일깨워 준다.
한편 본문에 나타난 바 하나님의 심판 결정을 우리는 인간들 사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복수극이나 치졸한 감정의 폭발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문화 창달 명령을 이행치 못하고, 피조계를 다스리는 특권과, 당신의 거룩한 형상을 상실한 인간들을 더 이상 부패하지 않게 하며, 오고 오는 세대에게 죄악의 심각한 파괴성을 깨우치실 목적으로 그 일을 결정하셨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당장 멸하시지 않고 120년 동안의 회개 기회를 주신 것이 그 좋은 증거라 할 수 있다(3절). 더욱이 하나님은 오염된 인류와 자연을 쓸어버리고 당신의 거룩한 나라를 만드실 창조적인 계획에 따라 그 일을 결정하셨다. 방주 건조(建造)를 명하시고 경건한 노아의 가족과 몇몇 짐승들을 보존하신 것이 그 증거이다.
이처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은 종국적인 의미에서 항상 거룩하며 창조적이며 영광스럽다. 그러므로 인류와 자연의 보존과 재생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경륜과 능력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생명과 기쁨을 용솟음치게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를 따르는 것만큼 희망적인 것은 없다.
* 노아의 방주와 그 의미. 120년이라는 오랜 기간에 걸쳐 건조(建造)된 방주의 모양에 대해서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추측해 볼 수 있는 것은 그 배의 구조가 단순했고(항해용이 아니었기에 추진,제동 장치가 없었음, 상자 모양으로 추측됨) 각종 동물들이 여라 쌍씩 들어갈 만큼 매우 컸으며(혹자는 성경에 제시된 척수를 근거로 배수량 2만t 급의 배로 추측함) 당시에 구할 수 있었던 좋은 재료를 사용했으므로 매우 튼튼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확실한 것은 이 배를 설계하시며 감독하시고 운항시키신 분이 하나님이셨기에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편안한
배였다는 사실이다.
한편 죽음의 홍수 가운데서 인류의 생명을 보존시킨 이 방주는 후일 유월절 어린양 되시사 인류를 사단의 죽음의 사슬로부터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을 상징한다(벧전 1:18-21). 그 중에서도 방주 안의 여러 방은 우리의 안전하고 영원한 처소를(요 14:2), 잣나무는 예수의 변치않는 영원한 사랑과 희생을(히 13:8), 심판의 물이 도저히 침입할 수 없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역청은 죄의 심판을 면하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보혈(레 17:11; 엡1:7)을 각기 상징한다. 그리고 윗쪽에 위치한 창은 성도의 시선이 항상 위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여야 한다는 묵시적 교훈이 담겨져 있다(골 3:1,2). 이처럼 방주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살리시고, 인간을 영원히 안전한 처소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의 증표였다.
* 노아 방주와 신약 교회. - 암흑의 세상 중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생명과 평안의 처소라는 점에서 노아 방주와 신약 교회는 여러 면에서 그 유사성을 지닌다. 다음은 방주와 교회가 지니는 공통점에 관한 설명이다.
1.기원에 있어서 신적 근거를 가진다. 방주는 하나님의 지시와 설계에 따라 건설되었으며, 교회 역시 하나님께서 태동시키셨다(요 10:15,16).
2.기능적 측면에서 '구원'을 주된 사명으로 한다(행 2:47). 구원을 전제하지 않는 방주와 교회는 무의미하다.
3.오랜 기간에 걸쳐 하나님의 계획하에 세워졌다.
4.모든 자들을 받아들일 만하다. 구원을 얻지 못함은 방주(교회)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무능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초대를 거부한 인간의 교만 때문이다.
5.방주(교회)가 건조되기까지 세상이 멸망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예수께서는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된 후에야 세상 종말이 이를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마 24:14).
6.운전자는 하나님이시다. 자체의 추진력이 없었던 방주를 극심한 폭우 가운데서도 안전하게 운전하셨던 하나님께서는 험악한 세파 가운데 위치한 교회의 갈 길을 형통하게 예비하신다(요17:15-26).
7.사망의 권세를 극복한 자리에 머문다. 모든 죄악된 생명체를 멸망시킨 물 위에 떠 있던 방주처럼,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죽음의 권세를 극복한 거룩한 영혼들의 모임이다(벧전3:20-22).
세일하머
C. 결어 (6:1-4)
홍수 기사 저전에 있는 족장들의 목록에 대한 결론 부분에서 저자는 아담의 자손들의 상태에 대하여 요약하고 있다(족보의 결론 부분에서의 이와 동일한 요약에 대해서는 창 10:31-32, 11:27-32, 출 1:7을 보라). 이 짧은 구절에 대해서는 매우 다양한 해석이 있어 왔는데 그 대부분은 이 구절이 홍수 기사에 대한 서론이라는 관점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만일 이 구절의 사건들이 홍수 기사에 대한 서론이라면 그것은 홍수를 가져온 인간의 약함과 무시무시한 행위에 대한 것이어야만 한다(예를 들면. Calvin: "대홍수의 역사로 전개하기 위하여 저자는 온 세상이 너무 부패하여서 거의 아무 것도 만연한 죄로부터 남아있지 않았음을 선언함으로써 이 기사에 대한 서문을 열고 있다"). 이들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서의 이러한 출발점은 그 안에 묘사된 것을 악한 것으로 가정하는 상당히 많은 해석으로 인도하였다.
역사적으로 세 가지 중요한 해석이 있어 왔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1) 천사들(가장 오래된 관점, 예를 들면 칠십인역의 초기 사본중의 하나인 Codex Alexandrinus): (2) 왕(역시 매우 오래된 관점, 예를 들면 Targum Onkelos, 그러나 Levy는 이것들이 Onkelos에서 '천사들'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Targum Neophyti 1 :'사사의 아들들'도 역시 보라) 그리고 (3)'셋의 계통'으로부터의 경건한 사람들로 해석 되었다. 첫번째 관점은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마태복음 22:30의 언급과 대치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관점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셋의 계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해석들은 6:1-4가 홍수 기사에 대한 서론이기 때문에 홍수의 원인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가정에서 기인한 것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6:1-4을 5장에 대한 요약으로서 읽는다면 기록된 사건들은 일상적인 것들임을 의심할 여지가 거의 없다. 이 짧은 서술은 앞의 장에 대한 요약으로서 아담의 아들과 딸들이 큰 수로 번성하여 결혼하고 계속해서 자녀를 낳았음을 상기시켜 준다. 그것이 가져다 주는 인상은 간주곡적인 것으로서 마치 폭풍 전의 고요함과도 같다. 우리는 잠시 동안 일상생활 속에서의 인간의 모습을 보게 된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마 24:38-39).
2:24에서 저자가 타락 기사로 옮겨가기 전에 잠깐 결혼에 관한 주제를 다루듯이 6:1-4에서 서술은 홍수의 전야로서 또 다시 결혼의 주제를 다루고 있다. 결혼에 관한 요사가 이미 저자에 의해서 발전된 몇 개의 중심 용어에 맞추어지고 있음을 주목하는 것은 홍미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6:1)라는 언급 속에서 저자는 창세기 1:28에서의 "생육하고 번성하여"라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시킨다(출 1:7참고).
3절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일이 되리라" 비록 이 언급은 간결하고 또한 몇 개의 해석에 열려있지만 그 의미는 전후 문맥 속에서 찾을 때에 분명해진다. 이것은 5:2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고 말씀하신 후에 첫번째로 말씀하신 것임을 주목하는 것은 홍미롭다. 이 문맥 속에서 사람이라는 용어는 4장에서의 개인적 인물(아담)보다는 더 큰 범위(인류)를 가지고 있음이 명백하다. 5장의 나머지 부분에서 저자는 즉시 아담 개인의 족보로 넘어간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용어의 초점이 다시 인류 전체로서의 사람으로 넘어가는 것은 하나님께서 두번째로 말씀하신 6:3에서이다. 여기에서의 초점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두
언급 사이에서 저자가 그 수명이 사람의 '일백 이십년'의 수명과 크게 대조를 이루는 열 명의 유명한 사람들의 목록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의 배열이 의미하는바는 그들에게 긴 수명을 주는 것은 그들 자신의 '육체'(6:3)가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거하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사실이다. 이 서술에 있어서의 비극적인 사실은 그러한 긴 수명이 인류 전체에게 주어지지 않고 오저 다른 세대에게만 속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5장에서의 유명한 사람들의 긴 수명은 규칙적이기보다는 예외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그 이후로 인간의 수명은 오직 '일백 이십년'이 될 것이다. 앞 장의 긴 수명과 비교해볼 때에 이처람 짧은 수명은 인간의 타락과 그들의 창조주로부터의 분리를 표시한다.
이 점을 유지함에 있어서 저자는 모세오경이 나머지 부분을 통하여 노아의 자손들의 수명을 계속해서 제시함으로써 그들의 수명이 점차적으로 짧아졌음을 보여준다(11:10-26 참고). 우리는 오직 모세오경의 마지막 부분에서 불신으로 인한 하나닙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광야에서 120세에 죽은 모세의 수명에 접하게 된다(민 20장). 그는 아직 강건할 때에 죽었다 (신 34:7).
루터는(칼빈과 스코필드 Bible도 역시) 120년이 홍수를 보내기 전에 하나님에 의해서 인간에게 부과된 유예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내가 아직 120년의 유예 기간을 그들에게 주기를 원하노라"
Luther Bible). 이러한 해석은 인간의 수명에 부과된 120년의 한계와 창세기 11:10-26에서의 120년을 초과하는 인간의 수명에 대한 기록 사이의 불협화음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다(참고: 어거스틴 "그것은 그 이후로 인간은 120년을 초과하여 살지 못할 것임을 예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그 이유는 우리가 흥수 이전의 경우와 같이 그 이후에 있어서도 인간이 심지어는 500세를 넘어서까지 산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불협화음은 위의 해석에 있어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베드로전서 3:20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는데("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창세기 6:3의 120년의 기간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120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이미 Targum Onkelos("유예 기간이 그들에게 주어질 것이라")와 Targum Neophyti 1("보라 내가 너희에게 120년의 기간을 주노니 [혹시] 그들이 회개하여 (그것을) 행하지 않을까 함이라"). 그러나 이것은 LXX이나 Vulgate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때때로 '거인'으로 해석된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이 구절들을 앞절과 연결시킨다. 저자는 네피림 이라는 용어를 모세오경의 다른 곳에서 출애굽 당시에 가나안땅에 살았던 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민 13:32-33). 창세기 6:4에서의 네피림이라는 용어 역시 고대의 거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이제 막 고대로부터의 열 명의 위인들의 이름의 제시를 마친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5장) 그가 '유명한 사람'(6:4)을 언급 할 때에 이들 열 명의 사람들을 염두에 두었으리라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민수기 13:33에서의 네피림에 대한 언급은 그들이 출애굽 시대에 생존해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5장에 나오는 열 명의 위인들로 취급하는 것과는 상반되는 것으로 보인다.
2. 홍수 (6:5-9: 19)
홍수에 관한 기사는 모든 면에 있어서 조심스럽게 다루어졌으며 또한 매우 복잡한 서술임을 보여준다. 이 서술은 일곱개의 주요한 단계로 이루어진다: (1)홍수를 보내고 노아를 구원하려는 결정(6:5-12) (2)방주를 지으라는 명령(6:13-22) (3)방주 안으로 들어가라는 명령(7:l-5) (4)홍수의 임함(7:6-24) (5)홍수가 물러감(8:1-4) (6)방주에서 나오라는 명령(8:15-19) 그리고 (7)제단의 세움과 언약(8:20-9:19)이 그것이다. 각각의 단계에 있어서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홍수의 격랑에 사로잡히고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를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소용돌이치는 행위의 배열로 전개시킨다.
저자가 이야기의 전개되는 관점을 철저히 조정함으로써 얼마나 독자로 하여금 서술 속에 참여하도록 인도하는가를 살펴보는 것은 중요하다.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독자는 하나님의 관점에서부터 사건의 진행을 따라간다. 독자인 우리는 하늘에서부터 온 땅 위를 내려다보고 또한 하나님 자신이 보시는 것을 보도록 허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화를 듣고 또한 하나님의 심판을 따라가도록 허용된다(6:5-7:5). 그러나 흥수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우리의 특권적인 위치를 잃게 된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을 보지 못한다. 우리는 하늘이 비를 쏟아내고 깊음의 샘들이 터졌을 때에 오직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보는 것만을 보게 된다. 홍수는 우리들 주위를 올라오고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서서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고 있는 서술 속의 사람들 위를 내려 다볼 수 없다.
홍수가 진행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상스럽게도 부재해 계신다. 오직 물과 물을 피하는 자들만이 서술 속의 관점의 대상이 된다.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시는 동안에 중립의 위치에 서서 바라보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서술 자체 속의 사람들처럼 어느 한 쪽을 선택하도록 강요받는다. 롯의 아내처럼(19:26)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험하는 동안에 그것을 바로 볼 수 없다. 우리는 노아와 함께 방주 속으로 들어가거나 혹은 바깥의 홍수 속에 남아있게 된다. 홍수가
'모든 육체' 위에 임박했을 때에 우리에게 허락되는 하나님에 대한 유일한 모습은 방주 속으로 들어간 자들 뒤에서 문을 닫는 것이다(7:16). 150일 동안의 홍수 후에(8:1-4) 독자는 하나닙의 행위에 대한 간단한 묘사를 보게 된다(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시고 바람을 불게 하사 땅이 마르도록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다시 우리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을 계속해서 그러한 고상한 관점으로부터 보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서술을 즉시로 우리를 방주로 되돌림으로써 우리는 노아와 함께 물이 감하기를 기다려야만 하고 오직 방주의 작은 창문을 통하여 내보내진 까마귀와 비둘기의 귀환에 의지해야만 한다(8:5-14). 마른 땅이 드러나자(8: 13-22) 독자의 관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관점으로 되돌아가고 우리는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와 같이 다시 하나님의 관점에서부터 듣고 보게 된다.
a. 서문 (6:5-8)
이 구절은 홍수 이야기에 합당한 서문을 형성한다. 이것은 서문으로서 이 이야기를 앞의 서술들과 서로 연결시켜주며 뒤이어 나오는 서술의 중심 주제를 제공해 준다. 이 부분과 홍수 이야기 전체를 통하여 저자는 1장에서의 창조 기사와 많은 부분에서 연결을 이룬다. 그 효과는 홍수가 하나님의 선한 창조의 사역의 역전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1장에서 하나님은 인간을 위하여 좋은 땅을 예비하신 분이시다. 그러나 홍수 기사에 있어서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패역하여 하나님의 길을 가지 않을 때에 그들로부터 이처럼 좋은 땅을 빼앗는 분이시다. 이 서론 부분에서 제시되는 중심 주제는 인간의 약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의로운 자에 대한 하나님의 은혀로운 구원이다.
홍수의 원인은 앞서의 3장에서의 타락 기사에 저접적으로 연결된다. 타락의 결과로서 인간은 '선악을 아는 지식'(3:22)을 얻었다. 앞의 서술들은 저자가 인간이 이러한 지식을 얻은 것을 유익한 것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저자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인간은 '선'을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했을 때가 훨씬 좋았던 것이다.
저자가 1장에서 이러한 교훈을 가르쳐줄 수 있는 방법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의 반복이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선한 예비'라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반복된 묘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 타락 이후에 인간들이 스스로 '선한 것'을 찾아야만 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보신' 것은(6:5) 그의 창조의 선함이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셨다(6:5). 6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셨다. 저자는 라멕이 노아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서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말의 기교를 통하여 인간의 악함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묘사 하고 있다: "수고로이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5:29).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노아라는 그의 이름과 인간의 반역으로 말미암는 슬픔과 고통으로부터의 '안위'라는 용어를 연결시키는 말의 기교를 통하여 노아를 소개한다. 저자는 하나님을 6:6의 동사들에 대한 주어로 놓음으로써 인간의 죄의 슬픔과 고통은 오직 인간만이 느끼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죄에 대하여 슬퍼하셨다. 이처럼 노아의 이름의 중요성 안에 포함되어 있는 '위로자'의 역할로 돌아감으로써 저자는 노아가 슬픔 속에 있는 인간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까지 위로를 가져왔음을 암시한다.
다른 모든 자들 중에서 오직 노아만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6:8). 여기에서 다시 서술은 은혜라는 단어가 노아의 이름에 있어서의 자음을 바꾼 것이라는 점에서 노아의 이름에 대한 말의 기교를 보여준다. 8절의 목적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음을 보여주려는 것 이상이 아니다. 이어지는 부분에서(6:9-12) 저자는 왜 하나님께서 노아에게서 예외적인 것을 발견하셨는가를 설명한다. 이 설명 속에는 창세기의 홍수 기사의 중심 목적이 놓여 있다.
b. 노아의 의(6:9-12)
홍수 기사는 9절에서 노아의 의에 대한 묘사로서 시작된다. 저자가 기사를 시작하는 방법으로 볼 때에 홍수 이야기의 중심 목적은 왜 하나님께서 홍수를 보내셨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셨는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이 도입부는 노아의 '의'와 '모든 육체'의 '패역함'을 대조시킨다. 이 서술의 교훈은 매우 직선적이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구원하신 이유는 노아가 하나님의 길에 '패역'하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였기 때문이다. 노아를 이러한 방법으로 묘사함으로써 저자는 홍수로부터의 노아의 구원과 죽음으로부터의 에녹의 구원(5:22-24) 사이에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 요점은 매우 분명한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길에 패역'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과 동행'하는 자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이다.
에녹의 구원에 대한 설명에서와 같이 9절과 10절에서 저자는 노아의 '의'의 본질이 무엇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어지는 부분에서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노아의 의의 본질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허락한다. 우리는 그가 사역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므로 홍수 이야기로부터 드러나는 노아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발견한 자의 삶의 모형이 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대학 단순한 순종과 그의 예비하심에 대한 신뢰의 모형이다. 모세오경의 다른 부분에서도 '믿음'의 개념이 지배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에 저자는 히브리서 기자가 그렇게 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게 노아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것은 곧 노아가 "믿음으로...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된 것이다(히 11:7).
C.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6:13-22)
방주를 짓는 것에 대한 설명과 모세오경내의 다른 두 서술 곧 창세기 1장에서의 창조 기사와 출애굽기 25-39장에서의 성막 건축 사이에는 매우 중요한 유사성이 존재한다. 각각의 기사는 두드러진 형식을 가지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한 가지 행위를 명하시고(명령형) 그 명령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수행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사성에 대한 열쇠는 각각의 서술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결론을 맺고 있으며 (창 l:28, 9:l, 출 39:43) 특별히 성막과 노아의 방주의 경우에 있어서는 하나님에 의해서 세워진 언약으로(창 6:8, 출 34:27) 결론을 맺고 있음을 관찰하는데 놓여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볼 때에 후기의 성경 전통도 역시 창세기 l-3장의 사건을 하나님의 언약의 설정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예를 들면 호 6:7). 모세와 같이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가까이 따랐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과 하나님의 언약 속에 있는 축복을 발견하였다. 이러한 본보기들 속에서 모세오경의 저자가 의도하고 있는 교훈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그는 신명기 30:2-3에서 직접적으로 독자들에게 그것을 말하고 있다: "너와 네 자손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것을 온전히 따라서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마음을 돌이키시고 너를 긍훌히 여기사 네 포로를 돌리시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휴으신 그 모든 백성 중에서 너를
모으시리니" 6장에서 방주에 대하여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 저자의 목적은 성막 건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의 경우와 같이 독자로 하여금 방주나 성막이 어떻게 생겼는가를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라 이들처럼 경건하고 본보기가 될만한 인물들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들의 과업에 있어서 얼마나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는가를 올바로 평가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들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