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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뱀(나하쉬) - 본래 이 단어는 파충류를 가리키는 포괄적인 낱말이나 성경에서는 모두 '뱀'으로 번역된다.(사27:1; 렘8:17; 미7:17). 한편 뱀을 가리키는 히브리어는 사나움을 강조하는 '사라프'(민21:8; 사30:6)와 '용'(욥7:12; 시74:13; 사27:1; 렘 51:34)으로도 번역되며 특히 큰 뱀을 가리키는 '탄닌'(출7:9; 신32:33) 등이 있으나, 여기서 사용된 '나하쉬'는 사람을 꾀며 미혹하는 능력을 지닌 뱀의 교활함을 특히 강조하는 명칭이다.
간교하더라(아롬) - 좋은 의미에서는 '영리하고 신중한 것'(잠12:16; 22:3)을,나쁜 의미에서는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것'(욥5:12; 15:5)을 뜻한다. 뱀은 본래 영특하게 피조되었으나 사단의 도구로 사용되자 그 지혜는 사악한 것으로 전락하였다<1-6절 강해 참조>.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 사단이 하와를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더 연약하고 또한 쉽게 미혹당할 수 있는 존재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벧전 3:7).
하나님(엘로힘) - 뱀이 '언약의 하나님'을 강조하는 명칭인 '여호와 하나님'<2:4>을 사용하지 않고 단순히 '지고자'(至?者)를 뜻하는 '엘로힘'<1:1>을 사용한 것은 아담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 의사를 표명하는 것이다.
참으로 - '진실로'(truly), '정녕'(indeed that)이란 뜻으로 어떤 사실에 대한 강한 놀라움을 나타내는 의문사이다.
먹지말라 하시더냐 - 원문의 정확한 번역은 '먹지 말라 한 것이 사실이냐?'. 사단이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몰랐을리 만무한데도 이처럼 물은 것은(1) 하나님의 말씀과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2) 그분에 대한 철저한 불신 행위이다. 그러나 우리는(1) 하나님께선 사람이 아니시므로 식언하거나 변개(變改)치
않으신다는 점(삼상15:29)과(2)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 본연의 의무이자 복된 길임(신6:4-9; 28:1-6을 기억해야 한다.

3:2
말하되(아마르) - '대답하다', '애기하다', '명령하다', '선언하다' 등과 같이 의사 소통의 수단을 포괄하는 다양한 뜻을 지닌다. 한편 뱀과 여자가 서로 의사(意思)를 나눌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해선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1) 범죄하기 이전 인류는 오늘날과 같은 언어 이상의 언어로 동물과 의사 소통이 가능했다.(2) 언어는 인간 고유의 기능이므로 당시 뱀이 여자와 의사 소통한 것은 사단이 뱀의 입을 빌어 여자와 얘기한 것이다. 이 중 전자는 언어 분열 현상(11:1-9)이 하나님께 범죄한 결과였다는 점에 부합되며, 후자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동물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 존재로 지으셨다는 점에 부합된다. 그렇지만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 입각할 때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먹을 수 있으나(노켈) - '아칼'(먹다, 소비하다, 삼키다)의 미완료형으로 현재뿐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든지 먹을 수 있다는 허용적 의미이다. 만일 아담이 범죄치 아니하였더면 오늘날의 인류도 각종 과실과 함께 생명나무 실과를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22절).

3:3
만지지도 말라 - 하나님의 금지 명령과는 차이가 있는(2:17) 과장된 표현이다. 이는(1) 하나님의 명령이 하와에게 있어선 너무 엄격한 것으로 비쳤다는 점과 (2) 하나님께 대한 그녀의 신뢰와 사랑이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점을 드러내 준다.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 직역하면 '너희가 죽지 않으려거든', 앞 구절과는 달리 하나님의 절대 명령(2:7)을 약화시킨 표현이다. 이처럼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 결과 그녀가 악의 유혹에 넘어진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마 14:27-32).

3:4
결코 - 2:17의 '정녕'(surely)과 동일한 말로 불변하는 사실을 나타내는 단어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절대 명령을 절대적인 거짓으로 맞바꾸고 있는 장면에서 우리는 사단의 거짓된 속성을 살펴볼 수 있다(요 8:44).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베욤 아칼르켐) - 여기선 '욤'(날)이 '순간', '때'란 의미로 사용되어 '너희가 그것을 먹자 마자', '너희가 그것을 먹는 순간에'란 뜻이다. 이것은 하와의 욕망을 충동질하는 강한 유혹의 말이다.
너희 눈이 맑아 - 문자적 의미는 '너희 눈이 열려'(your eyes shall be opened). 구약에서 이러한 표현은 대개 이상(異常)을 보거나 진리를 아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21:19; 민22:31; 사35:5). 그런데 여기서는 선악을 분별하는 분별력을 획하게 됨을 뜻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 '지고한 신성'(Supreme Deity)을 획득하여 하나님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절대적인 거짓말에 불과하였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결과는 오히려 그들의 순전했던 영안(靈眼)이 어두워졌을 뿐이다(7절).
아심이니라(요데아) - '야다'(알다, 이해하다, 탐지하다)의 완료분사로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일관되게 알고 계셨다는 의미이다.

3:6
먹음직도...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 선악과가 원래 이러했다기 보다는 하와와 경계심을 늦추고 탐욕의 눈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였다는 뜻이다.
보암직도 하고 - '눈이 추구하는'이란 의미로 육체의 안목과 정욕(벧전 2:11)에 사로 잡혀 허상을 보고, 느낀 것을 뜻한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러한 죄악에 빠지는 것을 엄히 경계하셨다(마 5:28, 29).
그도 먹은지라 - 아담은 하나님의 금지 명령을 직접 들은 자로서(2:16,17) 여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토록 이끌 책임이 있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받아 먹은 것은(1) 그의 자의로 여자의 범죄에 동참하였다는 곳과 (2) 죄는 놀라운 전염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증거해 준다(롬 7:11).

3:7
밝아(파카흐) - 문자적 뜻은 '개안(開眼)되다'. 그러나 이것은 시력이 항상 더 잘 보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혹은 보아서는 안되는 것을 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벗은 줄을 알고 - 타락 전과는 달리 수치심을 느낀 까닭은 창조시 하나님께로부터 부여 받았던 순수하고 고귀한 영적 순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마를 사용해 몸을 가리울 수 없었다<7-13절 강해 참조>.

3:8
날이 서늘할 때에 - 직역하면 '바람이 부는 때에', 서늘한 이 때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갔던 아담과 하와가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신들의 행위를 뒤돌아보기에 알맞은 시간이었다. 비록 인간은 하나님 곁을 떠난 범죄 하였지만하나님께선 그들을 포기할 수 없으셨기에 적절한 시점에 그들을 찾아오셨다.
음성(콜) - 사람의 '목소리'나 일반적인 '소리'를 모두 뜻하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동산에 찾아오실 때 난 기척인 듯하다.
낯(파님) - 문자적 뜻은 '얼굴', '앞'이나 여기선 대유법적 표현으로 하나님의'전존재' 혹은 하나님의 '영광'을 뜻한다. 한편 시105:4에선 하나님의 도우심을요청하는 것을 '그의 얼굴을 구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숨은지라 - '스스로를 숨기다'란 뜻이다. 그들은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뵐 면목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범죄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두려움(10절) 때문에 스스로를 숨겼다.

3:9
네가 어디 있느냐 - 타락한 인간이 자신의 실존을 올바로 파악키를 애타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심정이 토로되어 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어디에 숨었는지 몰라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죄를 자복하고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기 위해 이처럼 물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이처럼 잃어버린 양을
애타게 찾으신다(눅 15:3-7).

3:10
듣고(쇠마티) - '솨마'(주의깊게 듣다, 이해하다)의 완료형으로 아담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그 같은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이해했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때 아담은 하나님의 낯을 피해 숨지 말고 그 즉시로 하나님 앞에 나아갔어야 했다.
벗었으므로 - '완전 나체인 고로'란 뜻. 그러나 이는(1) 그들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게 된 근본 원인(8절)이 아니며(2) 또한 그들은 부분적으로나마 치부를 가리우고 있었으므로(7절) 잘못된 답변이다. 이처럼 아담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회개의 기회를 선용치 못하고 도리어 변명하기에 급급하였는데, 그
결과는 가중되는 죄악(12절)과 그에 마땅한 준엄한 형벌일 수밖에 없었다(17-19절; 약1:15). 용서받는 첫 걸음은 지은 죄를 자복하는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통회하는 심령을 멸시치 않으신다(시34:18; 51:17).

3:11
누가(미) - '무엇이' 또는 '어떤 자가'란 뜻. 벌거벗은 것을 깨닫게 된 원인이 아담 스스로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반어문 이다.
고하였느냐 - 원뜻은 '반대편에 서다.' 여기서부터 '기밀을 누설하다', '죄악을 고발하다' 등의 뜻이 파생되었다(수 2:20; 에 6:2; 렘 20:10). 본절 전체에서 이 말의 의미는 '누가 너의 벗은 것이 잘못된 일이라고 지적하더냐'이다.
네가 먹었느냐 - 아담의 잘못이 어떠한 것인지를 지적함과 동시에 아담이 솔직히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기를 애타게 원하시는 거듭된 반문이다.

3:12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 - '당신이 내 곁에 두신 여자'란 뜻. 하나님께서 하와를 주신 것에 대해 도리어 원망하며 또한 부부간의 한 몸 의식(2:24절)을 팽개쳐 버리는 무책임한 말이다.

3:13
어찌하여(마) - '어떻게'(how) 또는 '왜'(why)라는 뜻이 아닌 '무엇 때문에'(what)라는 물음이다. 하와의 죄악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사악한 교만과 욕망 때문에 빚어진 것임을 지적해 준다(5, 6절).
꾀므로 - '잘못 인도하다'는 말. 즉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게 막고서 그릇된 길로 이끌다는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하와는 자신의 행위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녀도 잘못을 시인치 않고 책임 전가에만 급급하였으니 하나님의 진노를 살 수밖에 없었다(16절).

3:14
모든 짐승보다 - '모든 짐승 가운데서', '모든 짐승들로부터'란 뜻이다. 즉 사단의 도구로 전락한 뱀은 이후 짐승들로부터 조차 경멸당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배로 다니고 - 천박하고 미천한 존재로 떨어지고 말았음을 나타내 주는 구체적 사례 중의 하나이다. 후일 모세 율법은 땅에 기어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였는데(레 11:41-44) 이제 뱀은 그러한 부정하고 추악한 것의 대명사로 손뽑히게 되었다. 이처럼 뱀이 배로 기어다니게 된 것은 분명
저주의 결과이기 때문에 저주받기 이전의 뱀은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이동했을 것이다(Luther. Josephus,Lange). 여하튼 사단의 도구가 되어 아담과 하와를 꾄 죄로 저주를 받아 배로 기어다니게 된 뱀은(1)땅(사단)에 속한 모든 멸망의후손들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2)그 머리가 낮은 땅에 있음으로해서 비록 그리스도의 발꿈치는 상하게 할지언정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머리가
결정적으로 쉽게 상할 필연적인 처지로 전락되고만 것이다(15절; 마 4:1-11).
종신토록(콜 예메 하아카) - 직역하면 '너의 생명의 모든날 동안'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시간, 즉 날과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히브리인들의 시상이 투영되어 있는 관용적 표현이다.
흙을 먹을지니라 - 뱀이 배로 기어다닐 때 그 입으로 흙이 들어긴다는 것을 근거로이 말의 문자적인 뜻을 주장하기도 하나, 실제 뱀은 흙을 식물(植物)로 사용하지 않기때문에 문자적 뜻보다는 '흙으로 핥으리라' 정도의 상징적 의미로해석해야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께 징계받은 피조물이 종신토록 멸시와 굴욕 가운데 처하는 것을종종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시72:9; 사49:23;애 3:29; 미7:17). 한편 하나님께서 인간에게와는 달리 이처럼 뱀에게는 회개할 기회를 전혀 허용치 않고 곧 바로 저주를 선포하신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1)인간은 뱀과 달리 하나님의 형상이 반영된 존재로서(1:27) 하나님의 특별 은총을 입은 존재이다.(2) 사단과 그의 하수인은 하나님께서 달리 구제할
방도가 없을 만큼 이미 완전 타락한 자들이다.

3:15
원수(에바) - '적대감', '증오감'이란 뜻으로 그리스도와 성도들에 대해 사단과 그의 하수인들이 갖게 될 악감(惡感)을 의미한다(요 15:18, 19). 그러나그럴수록 우리는 보다 즐거워해야 하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우리의 상이 커지기 때문이다(마 5:12).
머리(로쉬) - 신체상의 '머리' 뿐 아니라(48:14; 신21:12) 지위나 장소에 있어'최고 높은 것'(대하 13:12; 애 1:5)까지 뜻하는 말이다. 따라서 뱀이 최고귀한신체 부위인 머리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도저히 회복 될 수 없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는 뜻이다.
발꿈치(아케브) - 원뜻은 '끝부분'으로 신체 기능면에서든지, 지위면에서든지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여자의 후손이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것은 그가 비록 해(害)를 당할 것이긴 하나 그것이 치명적이지 못할 것임을 의미한다.

3:16
고통(이차본) - '아찹'(새기다, 각성시키다)에서 온 말로 하나님께서 하와에게 해산의 고통을 더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일러준다. 즉(1)그 같은 고통을 겪을 때마다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범죄가 얼마나 치욕스럽고도 중대차한 것이었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다.(2) 인간이 범죄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겪으시는 심적 고통 역시 여인이 겪는 해산 고통에 비견할 만한 것임을 주지 시키기 위함이다.
수고하고 - '슬픔 가운데', '고통 중에'란 뜻. 해산 때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크고 힘들 것임을 시사해 주는 말이다.
사모하고(테슈카) - '슈크'(...을 쫓다, 원하다)에서 파생된 말로 '의뢰하다','기대다'란 뜻. 그러나 이것은 여자가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자기 남편의 권위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해 준다는 뜻이다(엡 5:22,23).

3:17
네 아내의 말을 듣고 - 하와를 주관하여 선한 길로 이끌어야 할 아담이 오히려 아내의 장중에서 놀아난 것<6절>을 책망하는 말이다.
수고하여야(에쳅) - '땀흘려 가며 일하는 노동'이나 그에 수반되는 '고생스러움'을 의미한다. 물론 타락 전에도 아담은 노동을 했었다(1:28). 그러나 그것은 자기 성취감과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복된 성격의 것이었지 결코 생계 유지의 수고스러운 방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노동 자체가 지니고 있는 가치만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1) 하나님의 천지 창조 사역 자체가 신성한 노동이었기 때문이며(2)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1:28)은 이미 인간 타락 전에 주어진 것으로 영원한 효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3:19
얼굴(아프) - '파님'(얼굴, 8절 주석 참조)과는 다른 말로 원뜻은 '코', '콧구멍'(7:22; 사2:22; 겔8:17). 그렇지만 코가 얼굴을 대표할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안면 부위란 점에서 '얼굴'이란 뜻이 새로 파생되었다(삼상25:41; 대하 7:3; 느8:6).
필경은 - '시발점', ...에 까지, '...을 향하여'란 뜻. 인간의 범죄 결과, 그들의 여생은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여행길에 불과할 뿐임을 교훈해 주는 말이다(2:17).
돌아갈 것이니라(타슈브) - '슈브'(되돌아가다, 물러가다)의 미래 완료형으로 장차 어느 순간에는 이미 한 줌의 흙으로 와해 되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말은 인간 구성 요소가 흙 뿐이므로 필연적으로 흙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는 어디까지나 선악과를 따먹으면 정녕 죽으리라는 하나님의 '행위 언약'(2:17(에 대한 재확인일 뿐이며 따라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다만 죽음의 방법을 얘기한 것이다.

3:20
산자 - 본래는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뜻하는 말이다<1:24>. 그러나 여기서는 넓은 의미에서 뱀의 후손과는 구분되는 하나님의 택한 자녀들을 의미한다(15절).

3:21
지어(아사) - '만들다'는 뜻외에 '지정하다'는 뜻도 지닌다(24:14; 시 104:19) 따라서 이는(1)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하실 때처럼 직접 옷을 만드신 것일수도 있고 아니면(2)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지시하시고 또한 영감을 주셔 그들이 옷을 만들어 입도록 하신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하나님께서 동물을 잡아 인간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신 사건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의미가 있다.(1) 이것은 인간 죄를 속하기 위한 첫번째 희생이자 구약 속죄 제사의 원형이다(레 4:13-22). (2)이는 장차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을 예표하는 원시적 사건이다(롬 3:25).

3:22
보라(헨) - 기본 불변사로 대개 놀람이나 당혹감을 나타내는 말이나(출 8:26) 여기선 탄식하는 말로 쓰였다.
하나같이 되었으니 -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간에는 그 어떤 것으로도 좁힐 수 없는 본원적 차이가 있다(사 55:8, 9). 따라서 이 말은(1)인간이 선악을 인식할 수 있는 영악한 도덕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며(2)인간의 경솔하고도 어리석은 범죄 행위를 한탄하는 풍자적인 말로 이해되어야 한다.
하시고(펜) - '...하지 않도록', '...하지 않기 위하여'란 뜻. 이 말은 생명 나무 실과를 먹게 함으로 인하여 인간의 영원한 육체적 생존을 가능케 하는 생명력을 제공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이다. 아울러 이는 타락 이전엔 애초부터 죽음이란 것을 알지 못했던 인간과 하나님 간의 정상 관계가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하여 파괴되었음을 선언하는 말이다. 한편 생명나무가 지니고 있는 상징적 의미에 대해선 22-24절 강해를 참조하라.

3:23
내어 보내어 - '내던지다', '포기하다'는 뜻으로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과 인간간의 관계 단절성을 강조하는 말이다.

3:24
쫓아 내시고 - 강권적인 힘을 사용하여 밖으로 몰아내거나 다른 곳으로 추방시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과 하와를 황급히 에덴 동산 밖으로 쫓아 내신 것은 단순한 형벌의 의미만이 아니라 심오한 구원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된 비참한 상태에서 만일 인간이 동산의 생명 과실을 따먹게 된다면 그것은 육체적 고통이나 죽음 이상의 영벌(永罰)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일단 아담과 하와를 급히 동산으로부터 쫓아 내신 후 새로운 구속 사역을 계획하셨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22-24절 강해를 참조하라.

 

 

세일하머

 

 B. 땅과 추방 (2:25-4:26)
 만일 2장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좋은 땅을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한 원형으로서의 인간의 초기 상태를 묘사했다면 타락에 대한 설명도 역시 미래에 있을 이스라엘의 땅으로부터의 추방을 상기시키는 용어로써 설명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놀랄만한 것이 아니다.

1. 불순종 (2:25-3:7)
 악과 유혹에 대한 문제를 다룸에 있어서 이보다 더 연구를 시도하고 있는 구절은 모든 성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없다. 모세오경의 저자는 자신의 심혈을 기울이는 전략의 일부분으로서 사실상  독자가 이야기의 사건들과 함께 저자로부터 동떨어지도록 만든다. 그는 제시되는 사건들에 대하여 설명하거나 언급하지 않는다. 독자인 우리는 저자로부터 동떨어져서 오직 이야기에 대한 우리의 감각만을 가지고 그것이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자 자신의 이야기 구성에 있어서의 약간의 표시로부터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단서를 찾아야만 한다.

 a. 변이(2:25)
 25절은 분명히 땅과 축복에 관한 설명과(1:1-2:24) 타락에 관한 설명을 연결시키기 위하여 의도되었다(2:25-3:24). '두 사람'이라는 표현은 이전의 서술을 되돌아보는 반면에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는 표현은 다음에 나오는 서술의 중심 문제를 기다리고 있다. 이 서술에서는 남자와 그 아내의 '벌거벗음'을 묘사하기 위하여 사용된 두 개의 서로 다르지만 관련이 있는 단어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벌거벗은)이라는 단어의 드러나는 의미와는 다르게 그것의 풍기는 의미는 계속되는 문맥 속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라는 표현 속에서 얻어 질 수 있다.

 서술의 시작에 있어서의 이러한 용어의 선택은 아마도 두 가지 동기에 의해서이다. 첫째로, 아롬(벌거벗은)과 아룸(간교한)사이에는 두 운이 있다. 이 두 단어에는 분명한 기교가 있다. 이러한 기교의 효과는 이전의 서술과의 즉각적인 연결을 제공함으로써 독자를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것과
이어지는 이야기의 사건과 결과에 대한 예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결은 뱀의 '간교함'과 남녀의 '벌거벗음'에서 암시되는 순수함 사이의 잠정적인 관계에 대한 즉각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이야기는 이러한 관계의 특징을 보여준다.

 둘째로, 2:25의 아롬(벌거벗은)과 3:7의 아룸(벗은) 사이의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비록 이 두 용어는 모세오경에서 자주 나오지는 않지만 저자는 신명기 28:48에서 사용된 용법에 의해서 구별된다. 여기에서 이 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순종함에 있어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당한 이스라엘의 포로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네가 모든 것이 풍족하여도 기쁨과 즐거운 마음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지 아니함을 인하여 네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모든 것이 궁핍한 중에서 여호와께서 보내사 너를 치게 하실 대적을 섬기게 될 것이니..." 저자는 인간의 벌거벗은 첫번째 상태와 두번째 상태를 비교함에 있어서 이야기의 의미에 대한 미묘하지만 감지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해준다. 타락의 결과는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자신들의 아롬(벌거벗은)을 알게 된 것이 아니다. 특별히 그들은 신명기 28:48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의미에서 그들의 아롬(벗은)을 알게 되었다(겔16:39, 23:29참고).

 b. 유혹자(3:1)
 저자는 뱀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이야기에 대한 작지만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뱀은 다른 모든 피조물들보다 '간교'하였다. 원래 '간교한'이란 단어는 성경에서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라 지혜와 명철함을 의미한다 (이 경우 위에 이 단어는 잠언에서 8회, 그리고 욥기에서 2회 나온다). 뱀에 대하여 '간교하더라'고 묘사한 것은 저자가 타락과 인간의 지혜 추구 사이의 관계를 그리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몇 가지 특징과 일치한다. 남자와 여자의 불순종은 크게 악한 행위나 큰 죄로 묘사되기보다는 큰 어리석음의 행위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필요한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을 원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하였다. 금지된 나무는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였다. 그들이 나무에서 열매를 취하여 먹은 이유는 여자가 그것을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기 때문이다(3:6). 그러므로 심지어는 뱀조차도 지혜의 전형 곧 지혜자의 원형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뱀과 그의 지혜는 궁극적으로 저주로 인도하였다(3:14). 우리는 뱀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땅의 짐승들'중에서 하나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1:25, 2:19 참조). 이러한 언급의 목적은 뱀이 초자연적 존재라는 개념을 재거시키는 것이다. '뱀은 오직 뱀'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c. 유혹(3:2-7)
 유혹에 관한 이야기는 미묘한 단순성으로 묘사되고 있다. 뱀은 오직 두 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남녀와 하나님 사이의 믿음과 순종과의 균형을 이룸에 있어서는 충분하다. 이 이야기의 중심은 '선'을 아는 지식에 관한 질문이다. 뱀은 자신의 질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로부터 이 지식을 막았다고 암시하지만(3:5) 처음 두 장의 서술은 하나님께서는 남자와 여자를 위하여 이 지식을 막았음을 암시해준다(예를 들면. 1:4, 10, 12, 18, 21, 25, 31, 2:18). 다시 말하자면 뱀의 언급은 1장과 2장의] 서술이 중심 주제 곧 하나님께서는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만 하면 인간을 위하여 '선'을 예비하실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었다.

 그러나 서술의 단서는 여자가 열매도 먹기 전에 이미 '선을 아는' 하나님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지적해 주는데 그것은 곧 타락 저전의 여자의 생각에 관한 묘사이다. 서술은 "나무가 여자의 보기에 좋았더라"(3:6, 우리말 번역과는 다름: 역자주)고 언급한다. 지금까지의 서술에 있어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표현은 오직 하나님께 대하서만 사용되었다. 이제 "보기에 좇았더라"는 표현은 하나님 대신에 여자에 대하여 사용되고 있다. 저자는 바로 이 지점에서 '지혜'의 문제를 제기한다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람기도 한 나무인지라'(3:6). 그러므로 유혹은 하나님의 권위로부터의 일반적인 반역으로 제시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혜에 대한 추구요 하나님의 예비로부터 동떨어진 '선'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야기는 유혹이 하나님과 동떨어진 '지혜'에 대한 추구라는 사실을 보여준 후에 범죄 행위 자체 안에서의 돌발적인 결론에 도달한다.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3:6b). 일단 결심이 이루어지자 얼마나 신속하게 범죄가 들어왔는가에 이야기의 초점은 그 단순성과 함께 지혜 추구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역설적인 묘사에 놓여있다. 사실상 뱀이 약속한 것은 실현되어서 남자와 여자는 열매를 먹자 마자 '하나님과 같이'되었다. 그러나 역설은 그들이 이미 하나님과 같았다는 사실에 놓여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조되었기 때문이다(1:26). 유혹의 과정에 있어서 뱀은 마치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알고 계신 것과 같이 그들이 '선과 악'을 알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남자와 여자는 그들이 '선과 악' 을 아는 지식을 얻었을 때에 '선'을 즐기 게 될 것으로 믿었다는 사실은 이야기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서술은 그들이 열매를 먹기 이전에는 '선'이 아닌 오직 '악'만을 알게 될 가능성은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이 열매를 먹고 눈이 밝아지자 그들이 보고 즐긴 것은 '선'이 아니었다. 그들이 알게 된 새로운 지식은 그들이 벗었다는 사실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같이 만들어주리라던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은 그들 자신들 조차도 서로 같지 않음을 아는 지식만을 낳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부끄러워하여 나뭇잎을 엮어서 서로의 차이점을 가렸다. 전도자(전도서)와 같이 그들은 지혜를 추구했으나 오직 공허와 수고만을 찾았다. 서술의 다음 부분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남자와 그 아내는 동산의 나무로부터 옷을 지음으로써 서로의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시도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첫번째 소리를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자신들을 숨기려고 노력 하였다.

 왜 남자는 자기와 자기 아내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만 했는가? 본문과 그 문맥 속에는 이에 대한 몇 가지 단서가 있다. 예를 들면 저자는 3:13에서 여자가 속임을 당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본문은 남자도 역시 속았다고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자는 사실상 남자가 속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분명히 책임이 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인은 속았기 때문에 책임이 없다. 본문 안에는 왜 남자가 여자의 행동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암시가 있다. 그것은 곧 모세오경의 더 큰 문맥 안에서 (예를 들면 민30:1-16) 모세 율법은 남편이 그 아내가 한 맹세에 대하여 책임이 있음을 가르친다는 사실이다(아래의 민30:l-6에 대한 주석을 보라). 모세오경의 저자는 모세 율법에 대한 독자의 지식이 이 문맥을 이해함에 있어서 길잡이 역할을 하도록 허용한다. 민수기 30장에 의하면 만일 남편이 그 아내가 맹세하는 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으면 그는 그 맹세에 대하여 책임이 있다. 그러므로 창세기 3장에서 저자는 특별히 남자가 그 아내가 나무에서부터 열매를 따 먹을 때에 그녀와 함께 있었다는 사실과 그가 뱀이나 여자에게 아무런 말이 없었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그의 침묵은 왜 남자가 그 아내의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가에 대한 단서가 될 수 있다.

2. 심판 (3:8-20)
a. 장면 (3:8)
 심판의 장면은 하나님께서 임하는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3:8). 또 다시 장면에 대한 저자의 묘사는 역설적이다.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표현은 모세오경에서 특별히 신명기에서 일반적이다(5:25,8:20,13:19,15:5,18:16, 26:14,27:10,28:1,2,15,45,62,30:8,10). 여기에서 이 표현은 동사 솨마이(듣다/순종하다)와 전치사 그와 더불어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 형식이다. 저자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하여 "여호와의 음성을 들으라/순종하라"는 유일한 요구 사항을 미묘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상기시킴으로써 저주의 장면을 시작하는 것은 결코 맹목적이 아니다.
 시내산에서 여호와께서 강림하시는 것도 역시 여호와께서 첫번째 불순종한 부부에게 찾아오신 장면에서 예시되고 있다. 여호와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셨을 때에(신 5:25, 18:16, 출 20:18-21 참고)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동산에서의 아담의 응답은 시내산 기슭에서의 이스라엘의 그것과 완전히 동일하였다. 백성들이 시내산에서 여호와의 음성을 들었을때에 그들은 두려워하여 "떨며 멀리 서서 모세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지 못하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라고 외쳤다(출 20:18-19). 마찬가지로 아담과 그 아내는 동산에서의 하나님의 첫 음성에 도망하였다. 타락은 모든 죄의 원형일 뿐만 아니라 시내산에서의 이스라엘의 실패는 이 첫번째 죄의 반복으로 비춰지고 있다.
 하나님의 방문의 시간은 때때로 '선선한 때' 혹은 '저녁 때'로 번역되지만 본문에는 오직 '낮의 바람이 불 때'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문맥 속의 어떠한 것도 이것이 날의 어떤 때를 의미한다고 암시하는 것은 없다. 하나닙께서 심판과 권능 속에서 임하시는 것에 대한 묘사의 일반적인 문맥 속에서 볼 때에 저자가 묘사하고 있는 '바람'은 열왕기상 19:11에서 '여호와의 산' 위에서 불었던 '크고 강한 바람'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의도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서술의 관점은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로서' 욥에게 말씀하셨던 욥기 38:1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저자가 그들이 숨은 장소인 나무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이 장과 그 이전의 장들을 통하여 나무는 하나님과 인간의 변화된 관례를 묘사함에 있어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첫째로, 1장과 2장에서 과실 나무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예비에 대한 표시였다. 그러나 3장의 첫 부분에서 나무는 남자와 여자의 반역을 선동하는 근거와 반역한 남자와 여자가 하나닙으로부터 숨기를 구한 장소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남자와 여자가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였을 때에 그들의 길은 생명 나무로부터 막혔다(3:24). 나무에 대한 이러한 초점의 의미는 죽음의 형벌의 장소로서의 나무의 역할의 빛과(신 21:22-23) 생명의 선물의 장소로서의 나무의 역할의 빛 안에서 이해되어져야만 할 것이다(갈 3:13).

b. 재판(3:9-13)
 판결을 확정하기전의 반역한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질문의 형태로 주어졌다. "네가 어디 있느냐?"(3:9)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 네가 먹었느냐?"(11절)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13절). 하나님의 심판의 행위 이전의 하나님의 질문에 대한 묘사는 법정의 개정 과정을 암시하는데 이것은 4:9-10의 경우와 유사하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이것은 또한 18:21의 경우와도 같다: "내가 이게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 저자는 '벗은'이라는 단어의 반복을 통하여(3:7,10,11) 기술적으로 남자가 자신의 말과 함께 판결이 내려지도록 묘사한다: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그리고 저자는 마치 남자와 여자 사이의 거리감이 서로의 앞에서 현재 느껴지는 부끄러움을 훨씬 넘어서고 있음을 보여주려는듯이 남자가 여자에게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그리고 완곡하게는 하나님에게(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하게 하신 여자) 그 책임을 전가시키려는 남자의 불쌍한 시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남자의 말은 하나님의 원래의 의도를 역설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 18). 저자는 인간 타락의 한계에 대한 지침으로서 남자가 하나님의 좋은 선물을 자신의 어려움의 근원으로 보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C. 판결 (3:14-20)
 비록 뱀, 여자, 그리고 남자에 대한 저주에 관해서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지만 본문은 이에 대하여 매우 적게 언급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 본문에서 우리는 매우 명확하게 모세오경을 생산해 낸 기술적인 구성을 볼 수 있다. 저주 이전과 이후의 뱀의 모습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없다. 뱀은 발을 가지고 있었는가?  날개를 가지고 있었는가? 만일 그런 것이 있다면 뱀의 생각이나 남자와 여자의 생각은 완전히 관점의 밖에 놓여 있다. 서술은 우리가 각 개인으로서의 그들의 곤경에 대하여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어떠한 것도 제공하지 않는다. 뱀, 여자, 그리고 남자는 개인적인 위기 속에 처해있는 각각의 개인으로서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대표자들이다. 우리는 이것이 그들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이야기 곧 인간의 이야기라는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상당한 기교를 가지고 이들 세 당사자들을 각각의 종족의 우두머리로서 제시한다. 한편으로는 뱀,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남자와 여자는 큰 전투에 참전하고 있는 두 개의 거대한 나라와도 같다. 이 전쟁은 오직 좀 더 이후에 그러나 아저까지는 확인되지 않은 '씨'의 행위에 의해서 그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뱀은 한 때는 '간교'했지만 지금은 '저주'를 받았다. 그의 '저주'는 '모든 육축과 들의 모든 짐승'으로부터 그를 구별시켰는데  그것은 곧 그가 '배로 다니고 종신토록 흙'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저주는 반드시 뱀이 이전에는 다른 땀의 짐승들처럼 발과 다리를 가지고 걸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초점은 지금 이후로 그 생명이 다하기까지 뱀은 저주의 결과로서 뱀이 항상 그러하듯이 배로 다닐 때에 '흙을 먹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곳에서 이러한 표현은 '완전한 패배'를 의미한다(사65:25와 미 7:17). 그렇다면 타락에 참여한 결과로서의 뱀의 저주는 반역한 '씨'의 궁극적인 패배를 끊임없이 상기시키는 것이 된다. 뱀의 패배에 대한 이러한 영상은 후기 성경 저자들에 의해서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기 때문에 평화와 조화가 피조물에게 회복될 때인 의로운 '씨'의 궁극적인 승리와 다스림에 대한 그들의 묘사에 있어서도 뱀은 여전히 저주 아래 남아 있다: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사65:25).

 뱀과 여자는 대표자로서 그들의 씨의 운명을 간직하며 그들의 씨의 운명 또한 그들의 운명이 된다. 저자는 뱀과 그의 '후손'을 조심스럽고도 일관성 있게 일치시킴으로써 뱀과 여자의 대표성을 보여준다. 15절의 첫 부분에서 '적대감'은 뱀과 여자 사이에 그리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 사이에 놓여졌다고 언급되고 있다. 그러나 15절의 후반부는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언급한다. 뱀의 '후손'이 뱀 자신으로부터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과 같이 여자의 '후손'은 분명히 여자로부터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집단(혹은 개인)으로 이해 되도록 의도되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것은 여자의 '후손'이다. 비록 '적대감'은 이 두 '후손'들 사이에 놓여 있지만 마지막으로 그 머리를 상하게 하는 목표는 뱀의 '후손'이 아니요 뱀 자신이다. 그의 머리가 상하여질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는 뱀과 그 '후손'을 함께 묶어서 하나로 취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먼 미래에 그의 '후손'에게 일어날 일은 또한 뱀 자신에게 일어난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처럼 동일시하는 것은 저자가 뱀을 동산에서의 특정한 뱀을 넘어서서 확장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음을 나타낸다. 저자에게 있어서 뱀은 어떤 인격체 혹은 어떤 것의 대표자이며 또한 그 '후손'에 의해서 대표된다 그 '후손'이 상할 때에 뱀의 머리는 상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단순한 구절 속에는 독자가 처음에 깨닫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는데 그 속에는 한 계획이 제시된다. 그것은 곧 저자로 하여금 이 뱀 혹은 저 뱀과 그 '후손'을 훨씬 넘어 서도록 만드는 한 계획이 세워졌다는 것이다. 것자의 초점의 중심에 놓여 있는 것은 뱀과 그 '후손'이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상해져야할 '원수'는 바로 '그'인 것이다.  더 높은 존재(예를 들면 사탄)의 역할과 비교해서 유혹의 과정 속에서의 뱀의 역할에 관한 부수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떠한 대답도 시도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후기의 성경 저자들이 뱀의 행위 뒤에 놓여 있는 것을 본 한편의 드라마였다(롬 16:20: 계 12:9 참고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하는 온 천하를 꾀는 자라"). 앞에서 언급된 사실로 미루어볼 때에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결코 서술 속에서 이 구절이 암시하는 것을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마지막 분석에 있어서 독자에게는 오직 하나님께서 뱀에게 하신 말씀만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저자는 그러한 서술의 중심축에 있어서 단지 뱀과 그 후손 그리고 그들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에 대한 언급만을 의도했으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모세오경의 목적 이라는 더 큰 범위와 이러한 작은 설명의 단편들로부터 전체의 서술을 구성하기 위하여 저자가 기울인 노고의 관점에서 이 문맥을 본다면 이 말씀들(타락 이후의 하나님의 첫 말씀들) 속에는 더 많은 것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이처럼 계획적인 설명이 책의 나머지를 통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의 관점에서 볼 때에 저자는 이 말씀들이 책의 나머지 부분의 구성과 성격을 규정하기 위한 근거가 되도록 하기 위하여 계획적으로 읽혀지도록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이어지는 서술에 의하면 싸움(원수됨)이 있어야 한다. 이 싸움의 두 당사자는 두 후손 곧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에 의해서 대표된다. 이 싸움에서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은 비롯 이 싸움에서 부상을 당하게 되지만 승리하게 될 것이다.
 이 구절에는 수수께끼와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요한 모호성이 남아 있는데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이다. 15절의 목적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함이 아니라 그 질문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임이 분명하다. 사실상 책의 나머지가 이에 대한 것자의 대답이다.

 여자에 대한 심판은(3:16) 먼저 그녀의 자손과 그리고는 그녀의 남편과 연관된다. 이제 여자는 더 큰 고통과 진통 속에서 자녀를 잉태하게 될 것이다. 그녀의 '소원'은 남편이 될 것이며 남편은 그녀를 '다스릴' 것이다. 이 책의 더 큰 문맥 속에서의 이러한 심판의 의미는 1장과 2장에서 묘사된 여자의 역할 속에 놓여 있다. 여자와 그 남편은 자녀의 축복과(1:28) 결혼의 조화로운 동반자 관계(2:18, 21-25)를 누려야만 했다. 심판은 바로 이 두 가지 축복의 면과 관련된다. 한때 여자가 축복으로서 해야만 했던 것, 곧 자녀를 낳고 결혼의 동반자가 되는 것은 이제 저주에 의해서 오염되었다. 여자는 이제 자녀 출산과 결혼이라는 인생에 있어서의 최대의 축복의 순간에 하나님으로부터의 반역의 고통스러운 결과를 분명하게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는 15절의 약속과 여자에 대한 약속 사이의 관계를 간과 해서는 안된다 15절의 약속에 의하면 긍극적인 승리는 여자의 '씨'를 통해서 올 것이다. 태초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을 때에 출생은 창조주께서 그들에게 내리신 축복의 중심에 있었다("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1:28). 이제 타락 이후에 있어서 출생은 또한 뱀이 패배하고 축복이 화복되는 수단이 될 것이다. 모든 아이의 출생에 있어서의 고통은 하나님의 약속 안에 놓여 있는 소망을 상기시켜 준다. 해산의 고통은 단순히 타락의 무의함만을 상기시켜주지 않고 또한 임박한 기쁨에 대한 표시가 된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 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의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롬 8:22-24 마24:8 참고) .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서 1장과 2장의 서술에서 창조주에 의해서 예비된 '좋은 땅'은 것주를 받았다(3:17-20). 그는 더 이상 땅의 산물을 '값없이 먹을' 수 없었다. 저자는 2장과 3장을 통하여 먹는 것을 주제로 하여 인간과 창조주와의 계속적인 관계를 조심스럽게 추적하고 있다. 첫째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축복과 예비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2:16) 라는 말로써 표현되고 있는데 이것은 1장에서의 좋은 선물과 모든 것이 "심히 좋았더라"(1:31)는 선언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3장에서 유혹자가 남자와 그 아내를 향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선하심과 돌보심에 대하여 의심을 불러일으킨 것은 바로 먹는 문제에 관한 것이었다(3:1-3). 마지막으로 3장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불순종의 행위는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그도 먹은지라"는 말로써 단순하지만 의미심장하게 표현되고 있다. 그러므로 저자가 남자에 대한 심판의 묘사에서 바로 먹는 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3: 17). 이러한 먹는 것에 대한 초점은 타락에 대한 저자의 묘사를 지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또한 다른 곳에서 먹는 것의 중요성과 그것의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저자가 기울이고 있는 관심과도 연결된다. 그것은 곧 정한 음식과 부정한 음식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과(레 11장: 신 14장) 언약 안에서의 하나님의 좋은 땅의 선물을 기념하는 절기에 대한 규정이다(레 23장). 우리는 이에 덧붙여서 성경의 종말에 있어서의 절기와 먹는 것의 역할에 관한 더 큰 문맥을 추가시킬 수 있다(계 19:9).

 18절에서의 '땅'에 대한 묘사는(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2장에서 묘사된 땅의 상태가 역전된 것이다.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25). 저자는 타락 이전과 그 이후의 땅의 상태 사이의 대조를 묘사함에 있어서 현재의 땅의 상태는 원래 의도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오히려 땅의 상태는 인간의 반역의 결과이다. 저자는 이렇게 함으로써 성경의 종말론의 구조에 있어서의 중심적인 주제, 곧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을 향한 길을 닦아 놓았다(사 65:17 롬8:22-24  계21:1 참고).

 18절이 타락 이전과 그 이후의 땅의 상태의 역전을 보여주기 위하여 의도되었듯이 19절은 인간 자신들의 상태의 역전을 보여 주기 위하여 의도되었다. 타락 이전에 인간은 흙으로부터 취하여져서 그 코에 '생기'가 불어넣어졌다(2:7). 그러나 타락의 결과로 말미 암아 인간은 그가 취하여졌던 흙과 먼지로 돌아가야만 했다(3:19). 이러한 역전을 보여주는 저자의 초점은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경고되었던(2:17) 죽음의 판결이 이제 그에게 내려졌음을 보여주는데 맞추어져 있다. 타락의 결과를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위하여 저자는 사람의 이름(아담)과 그가 취하여진 흙(아다마)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사람인 아담은 신기하게도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로 불렀다: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미가 됨이더라"(3:20). 이것은 아담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부른 두번째 이름이다(2:23 참고). 그녀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이름은 그녀의 기원을 지적해주는 반면에 (남자에 게서 취하 였은즉) 두번째 이름은 그녀의 운명을 지적해준다(모든 산 자의 어미).

 3. 하나님의 보호하심 (3:21)
 저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언급 직후에 2장에서의 하나님의 일로부터의 안식과 큰 대조를 이루면서 다시 일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로 되돌아간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옥을 지어 입히시니라." 타락 이후에 바로 그것 때문에 더 되어져야 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저자는 이 일을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음을 가리는' 것으로 규정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옷의 형태 -'가죽(오르) 옷'- 에 대한 언급은 아마도 타락 이전의 남낭자와 여자의 상태를 상기시키기 위하여 의도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아룸) 부끄러워 아니하니라"(2:25). 저자는 또한 아마도 가죽옷을 만들기 위한 동물의 죽임 속에서 희생의 개념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서술 자체 속에서는 이러한 의미에 대한 어떠한 단서도 제공하지 않는다.

 모세오경이 나중 부분에서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성막에서 하나님이 임재 안으로 들어갈 제사장을 위하여 옷을 만들라고 명하셨다. 옷의 목적은 제사장의 벌거벗음(에르야)을 덮기 위함이었는데 이것은 그들이 죄를 지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출 28:42). 저자는 아마도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의 벌거벗음을 가리신 것에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킴에 있어서 이러한 '영원한 규례'(출 28:43)를 기대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을 통하여 모세오경의 나중 부분에서 발달된 제사장의 역할은 하나님의 과거의 사역에 의해서 예시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과의 교제의 축복을 인간에게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위에서 언급된 것들 위에도 이 본문과 모세오경의 나중 부분에서의 성결법 사이에는 다른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이에 대한 논의를 위해서는 레13:1-14:52에 대한 주석을 보라).

 4. 추방(3:22-24)
 남자와 여자에게 내려진 죽음의 판결은 동산으로부터의 그들의 추방과 생명나무에로의 접근 금지로써 이루어진다. 이 형벌은 죽음에 처해지는 것은(죽일지며) 곧 '백성 중에서 끊쳐지는' 것을 의미한다는 모세 율법에 의해서 설정된 것과도 같다(출 31:14). 이러한 의미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그들이 동산의 공동체 안에서 보호를 받으며 거하는 것으로부터 추방되어야 함을 뜻한다(창 4:14 참고).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한 남자와 여자에 대한 묘사는 레위기 13:46에서 피부병에 걸린 자가 추방당하는 것과 재미있는 평행을 이룬다. 이러한 평행은 타락을 레위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제의적 규정과 같은 선상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오염의 형태로서 묘사하고 있는 모세오경내의 더 큰 전략의 일부분이다(레 13:1-14:57에 대한 아래의 주석을 보라) .

 저자는 인간의 타락의 어리석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역설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비록 '하나님과 같아지려는'(3:5-7) 인간의 추구는 달성되었지만 그 목적 자체는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판명되었음을 보여준다. 태초에 '하나님의 형상'(1:26)으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는 타락 이후에 자신들이 신기하게도 '하나님과 같아'졌지만 더 이상 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지 않음을 발견하였다. 이처럼 미묘한 동사의 교환를 통하여 저자는 인간의 축복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데 있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누리는 것이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시리니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 (시 16: 11 [MT 12]).
 저자는 남자와 여자가 그들의 반역에서 겪었던 역전을 강조하기 위하여 동산에서의 인간의 축복에 대한 처음의 묘사에서 사용된 두 중심 단어의 기교를 사용하고 있다. 2:15에서 사람은 '경배'(   )하고 '순종'하기 위하여(우리말 번역과 차이가 있음 역자주) 동산에 놓여졌다. 그러나 3:23에서 타락 이후에 사람은 '토지를 갈기'(   ) 위하여 동산으로부터 추방당하였으며 또한 '생명 나무의 길'로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킴을 당하였다.

 저자는 타락 이후의 동산과 생명 나무에 대한 묘사 속에서 시내산 언약과 율법 안에서 인간의 축복과 생명을 회복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금 기대하고 있다. 시내산 언약에서 율법이 '그룹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언약궤 안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출25:10-22 신 31:24-26) 생명 나무는 '그룹들'에
의해서 보호를 받으면서 서 있었다.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관계는 오직 언약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출 25:22) 언약 안에서 인간은 창세기 2:15에서 그들이 누렸던 상태 - 하나님을 섬기고 그의 뜻에 순종하고 그의 축복을 누리는 것 - 로 되돌아 갔다.

 '동쪽'이라는 방향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단순한 지리적 설명이 아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저자는 등장 인물들의 진행 방향을 조심스럽게 독자에게 알려주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설명하고 있는 사건들의 의미에 대한 서술적 단서를 심고 있다. 서술의 이 시점에서 '동쪽'은 단순히 '동산
바깥'을 의미하는 중요성만을 가진다. 그러나 책의 나중 부분에서 저자는 '동쪽'이 '바벨론성' (11:2)과 '소돔과 고모라성'(13:11)을 향한 방향임을 보여줌으로써 이러한 중요성을 더 발전시키려고 한다. 더군다나 그는 동쪽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약속의 땅으로 돌아 가는 것 곧 '살렘성'으로 돌아오는 것임을 보여준다(14: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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