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44:1,2
요셉은, 그 청직이를 시켜서 "양식을 각인의 자루에...채우고" 돈은 그들의 자루에 도로 넣었다. 그것은, 자기 부친과 온 가족을 구제하는 은밀한 사랑이다. 구제가 귀한 중, 은밀한 구제는 더욱귀하다.
"은 잔"을 베냐민의 자루에 넣은 것은, 그 형제들을 한 번 더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요셉의 이와 같은 행동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바로 되게 하시려고 시험하심과 같다. 하나님은 신자들을 은밀히 도와주시되, 그들을 시험하시는 일도 있다. 그는 시험을 통하여 신자들을 도야(陶冶) 시키신다.
창 44:3-6
"개동시"란 것은 날이 밝아오는 때를 의미한다. 그 시대에도 먼 길을 떠나는 자가 이렇게 일찌기 떠났다(22:3). 여기 "나귀"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카모림(* )인데 "나귀들"을 의미한다. 그 때에 그들이 많은 나귀들을 가지고 와서 곡식을 가나안으로 운반하였다.
너희가 어찌하여 악으로 선을 갚느냐 - 이 말은, 요셉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악으로 선을 갚"는 것은 큰 죄악이기 때문에, 옛적부터 이 말이 많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내 주인이...점치는데 쓰는 것이 아니냐 - 옛날 애굽에서는 잔에 물을 붓고 거기에 돌이나 쇠 조각을 던져서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일을 알아 맞혔다고 한다(Jamblichus, de Myst. III, 14). 요셉은 실상 그런 미신적인 점술을 행하지 않았으나, 이 때에 그가 어디까지나 자기를 애굽 사람으로 가장하기 위하여 이런 말을 꾸며낸 것이다. 이 말은, 자기 형제들을 해롭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좋은 뜻으로 시험하기 위한 것이니 단순한 거짓말과 다르다.
창 44:7-11
그들은, 어디까지나 요셉의 은잔을 도적하지 않았다고 양심적으로 극구 부인했다(8-9). 마침내 은잔이 "베냐민의 자루에서 발견"되었을 때에 그들은 대경실색(大驚失色)하였다.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니 요셉이"이 아직 거기 있었다. 그들은 일제히 "그 앞 땅에 엎드"러 졌다. 이것도 또 다시 요셉의 어릴 때의 꿈이 이루어진것이다(37:5-10).
창 44:15,16
나 같은 사람이 점 잘 칠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이것도, 요셉이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꾸며 낸 말이다. 곧, 그가 그들의 은잔 도적한 일을 점쾌에 의하여 알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의 죄악을 적발하셨으니 - 이것은, 그들을 대표한 유다의 말이다. 그들의 오래 전에 요셉에게 대하여 취하였던 악한 행동(37: 18-28)을 생각하고 한는 말이다. 곧, 그들에게 지금 되어진 딱한 일이, 그들의 오래 전에 "범한"죄악에 대한 보응이라는 것이다. 이런 말은 일종의 회개라고 할 수 있다(42:21). 요셉이 그들을 시험한 목적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창 44:17-34
이 부분에서는, 요셉이 베냐민만 그의 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했는데,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의 아버지 야곱을 죽을 지경으로 빠뜨리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야곱이 일찌기 베냐민만은 애굽에 보내지 아니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라헬에게서 난 자식 요셉을 잃은 후 베냐민을 또 다시 잃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유다"는, 이제 극히 간절한 말로써 요셉에게 모든 사연을 진술하였다. 그 말 끝에 마침내 요셉은 "방성대곡"하고(45:2). 자기가 요셉임을 그들에게 실토하게 되었다(45:3).
"유다"의 언변이 어떠했기에 요셉이 그렇게도 감동을 받았을까? 우리는 이제 유다의 언변에서 그 원인을 찾아 보기로 하자.
(1) 유다가 자기 부친 야곱의 애지중지하는 말째 아들(베냐민)에 대하여 여러번 언급한 것이 요셉의 마음에 감동을 주었다. 유다는 이 부분(18-34)에 있어서 스물 두 차례나 베냐민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것은, "아우", "소년", "그", "말째 아우", "이", "아이"란 말 등으로 표현되고 있다. 요셉은 자기의 동복(同腹)동생 베냐민을 생각만 해도 눈물 날 지경이었다.
(2) 유다가 자기 부친의 가련한 정지를 여러 차례 말하였으니, 그것이 역시 요셉에게 비감(悲感)을 일으켰다. 예를 들면, "그 아이는 아비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아비가 죽겠나이다"(22절), "아비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31절)란 말들과 같은 것이다.
(3) 유다의 눈물겨운 효도가 요셉의 마음을 극히 부드럽게 만들었다. 유다는 자기 부친에게 염려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그 부친의 실정을 일일이 말하였으며, 또한 자기가 친히 그 아이를 대신하여 애굽에 머물고다고 하였다(34절)
(4) 유다는 요셉의 형인데도 불구하고, 피차간 서로 알지 못하는 실정하에서 요셉앞에서 극도로 낮아져 요셉을 "주"라고 하였다(18-19). 이와 같은 겸손은, 하나님을 아는 요셉에게 비감을 일으킬 만한 충격을 주었다.
(5)요셉은, 유다의 말 가운데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설을 들었다. 예를 들면, "그의 형은 죽고"(20절), "주의 종 우리 아비가 우리에게 이르되 너희도 알거니와 내 아내가 내게 두 아들을 낳았으나 하나는 내게서 나간고로 내가 말하기를 정녕 찢겨 죽었다 하고 내가 지금까지 그를 보지 못하거늘"(27-28)이라고 한 말들이다. 이런 말은, 요셉으로 하여금 일찌기 당하였던 비극 때문에 역시 비감한 생각을 가지게 하였다.
(6) 또 한가지 이 점에서 생각해야 될 것은, 유다의 언변이 극도로 애처로운 성격을 띤 사실이다. 그의 말은 마디마디 진실과 열정과 자세함과 또는 사랑으로 뜨거웠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부친과 동생을 사랑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희생물로 제공하였다. 이와 같은 언변은, 우리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하여 사용해야 할 적절한 말씀이다. 유다의 언변은 실상 육적인 가족적 인연에 불타서 나온 것이 아니고, 그 가족들과 관계는 가지면서도 역시 의리(義理)를 위한 것이었다. 베냐민과 그는 이복(異腹)형제이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베냐민을 위하여 대신희생이 되려고 하였다. 그는, 부친이 요셉을 잃고 베냐민을 다른 아들들보다 뜨겁게 사랑함을 충분히 이해하고 그 부친의 심정을 받들었다. 자식들은, 부모의 마음을 알아 드리지 못하고 행할 때에 그 부모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일례를 들면, 부모는 자식들을 꼭 같이 사랑하는데 그들이 서로 싸우면 부모의 마음이 괴롭다. 이 사실을 아는 자식들은 서로 사랑한다. 유다는, 그의 아버지가 베냐민을 특별히 사랑하는 줄 알기 때문에 베냐민을 저렇게 아꼈다. 이것은 의리(義理)에 속한 행동이다. 우리는 교회에 대하여 이와 같이 행해야 된다. 야곱의 가정은 실상 교회의 표상(表象)이라고 할 만하다.여 있다. 서로 살아남기 위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투쟁과 불신의 사회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회를 복된 사회로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살신 성인의 도를 온전히 실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먼저 나 자신부터 '죽는 삶'을 사는 것이다(고전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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