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17:1
아브람의 구십 구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여기 이른바 "구십 구세 때"란 말은 의미 심장하다.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 그가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노쇠기(老衰基)(16-17)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보기에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전능자이시다. 그는, 일을 기적적(奇蹟的)으로 성립시켜려고 약속하시는 때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약속을 믿을 뿐이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이 문구는 히브리 원어로 아니 엘 솨따이(* )인데, 엘(* )이란 말은 "능력 있는 하나님"을 의미하고, 쇠따이(* )란 말은 "전능자"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이제 노쇠한 아브람과 사래에서 자식이 있을 것을 약속하시는 장면에 있어서, 자기를 이와 같은 분으로 그들에게 알려 주실 필요가 있었다. 아브람은 일찌기 그의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또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지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도(13:16, 15:5), 종종 불신앙에 빠졌던 일이 있었다(15:2-3, 16:1-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의 신아을 견고케 하시기 위하여, 여기서 자기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말씀해 주신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 "앞에서 행"한다 함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식(意識)하고 행함을 뜻함인데, 그것이야말로 건전한 신비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신앙이다.
창 17: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세워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하시니 -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전 약속을 아직까지 이루자 아니하시고 또 다시 언약으로 대신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불신앙을 구제하시기 위하여 언약(약속)의 말씀으로 일관하신다. 얼른 보면, 이것은 유쾌한 실행은 없이 말 뿐으로 사람을 위로하시는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거짓된
"너로 심히 번성케 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으로는, 아브람의 자손이 번성한
다는 것을 중요한 것으로 가진다.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노인들이 이런 약속을 받는 유일한 방편이다.
창 17:3
아브람이 엎드린대 하나님이 또 그에게 일러 가라사대 - "아브람이 엎드린"것은,하나님을 경외(敬畏)하는 태도였으며 또한 이상의 태도였다. 아마 그는, 이때까지 자기에게 있었던 불신앙을 회개하며 자기의 무가치를 의식하는 의미에서도 이와 같은 동작을 취한 것 같다.
창 17:4-8
이 귀절들은, 아브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 내용을 보여 준다.
(1) 그의 자손들이 번성하리라고 함(4-6). 하나님께서는 이 내용을 역설(力說)하시는 의미에서, 여러가지 표현으로 거듭거듭 말씀하셨으니 곧, 아브람을 가리켜
"열국(列國)의 아비"라는 의미에서, 그의 이름을 고쳐
"아브라함"(* ) 이라고 하신것,
"번성케 하리"라는 것,
"나라들이 네게로 좇아 일어나"리라는 것 등이다. 이렇게 자손이 번성하는 것은 큰 축복이다. 본래 하나님께서 인생을 내시고 축복하신 내용도 이러하시다(1:22). 오늘날도 인류가 짐승들과 다른 점은, 그 번성함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번성하기만 하는 것은, 축복을 바로 받지 못하는 폐단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을 공경하는 백성으로 번성하는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번성케 하시는 목적이 여기에 있다.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및 그의 후손의 하나님의 되시리라는 것(7 하반, 8 하반). 이 말씀이 두 번 나오므로 그 뜻이 강화된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은, 그들이 영생의 기업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시고(요 14:6), 그 근원이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을 소유한 자는 영생을 소유한다. 하나님을 소유한 것이 곧 영생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은 많이 말씀하고 있다(계 21:6-7). 하나님께서 그 백성으로 더불어 계약하실 때에 이것을 중점적으로 말씀하신다(출
29:45; 레 26:12; 렘24:7,33,32:38; 겔11:20,34:24, 37:23,27; 슥 8:8; 고후6:16; 히 8:10; 계 21:3). 이 약속을 바로 깨달은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보다도, 혹은 갈대아 우르보다도 하늘나라(영생의 나라)를 더욱 사모하였다(히 11:9-16). 이와 같이 하늘나라를 사모하는 심리였다. 히 11:15-16에 말하기를,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
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고 하였다.
(3)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심(8절). 이 약속도 하나님께서 일찌기 말씀하신 바 있었다(12:7, 13:15, 15:18-21).
위 세 가지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간섭 없이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신앙으로야 이 약속을 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이든지 다 그와 같다. 우리는, 성경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음으로써만 받을 줄 알고 늘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창 17:9-12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언약을 지키시는 표로서 "할례"(* =갓난 애기의 陽皮를 베는 것)를 명하셨다. (1) 할례는, 순결(純潔)을 이루기 위한 의식(儀式)임. 그러므로 "할례"는 외부적 양피를 베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순결을 위한 예식이어야 한다(렘 4:4; 신 10:16, 30:6). (2) 할례는 또한 메시야를 다스리는 소망과 관련되어 있음. 모든 순결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나니, 할례는 그것을 내다보는 의식이었다. 빌 3:3에 말하기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고 하였다.
할례의 풍속은, 이스라엘 이외의 어떤 다른 민족들 가운데도 있었다. 예를 들면 아프리카의 어떤 족속들이다. 그 민족들이 이 풍속을 이스라엘 민족에게 배웠는지, 혹은 독자적으로 그 의식을 행하였는지 알기 어렵다. 설혹 그 민족들이 독자적으로 그 풍속을 소유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을 시행하는 목적은 이스라엘의 그것과 다르다. 이방 민족들의 할례 의식은 미신(迷信)에 속하고, 이스라엘의 것은 성결의 도(道)를 위한 것이다.
창 17:15,16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 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아 줄 자가 사래 자신임을 지적하신다. 이제 그것을 역설(力說)하시기 위하여 "사래"(* = "공주"란 뜻)의 이름을 고쳐서 "사라"(* = 왕후, 곧 왕들의 어머니)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일찌기 아브라함에게서 날 자손을 사라와 연결시켜 말씀하신 적은 없었을지라도, 그들(아브라함과 사라)은 하나님의 법(2:24)을 어기는 길로 가지 않았어야할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실족했다(16:1-2).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을 연단시키기 위하여 어떤 때엔 그 주신 말씀이 명확하지 않은 방면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명확하지 않은 점에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실 길을 굳게 잡고 요동하지 않아야 된다.
위에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때에 명확하지 않게 보이나 우리의 신앙 경험을 통하여 점차 명확하게 알려진다. 아브라함은 이제 하나님의 약속에 속하는 아들이 사라에게서 날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알게 될 때에 그는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마다 하나님의 뜻을 명확히 알게 된 때에 기쁨을 얻는다(17절).
창 17:17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닌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 "아브라함이 엎드린"것은,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뢰하는 태도였다. 그리고 그가 "웃은"것은, 불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 기뻐함이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태도에 대하여 말씀하신 바 있다. 요 8:56에 말하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웃음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가 그의 자손 가운데서 메시야가 나실 것까지(12:3)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였던 것이다. 갈 3:16 참조.
"심중에 이르되 백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아브라함의 이와 같은 생각은 불신앙이 아니라, 도리어 하나님의 권능을 감탄하는 믿음이다.
창 17:18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 이 말씀은, 사라에게서 아들이 나리라는 약속을 믿지 못하여 "이스마엘"을 그 대신 채용하시기를 원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그가 사라에게서 아들이 나서 축복 받을 것을 믿는 동시에, "이스마엘"도 축복 받기를 원한다는 뜻이다(Luther). 여기 "이스마엘이나"란 말은,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래도 이스마엘이"라고 번역된다(Keil, Delitzsch, Lange).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약속의 아들이 날지라도 이스마엘도 형통함을 바란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이 귀절의 말씀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가리킨다고 한다(Driver). 그러나 이 아래 19-20절 말씀이 이런 해석과 반대된다. 그 귀절들의 해석을 참조하여라.
창 17:19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 - 여기 이른바 "아니라"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아발(* )이니, 랑게(Lange)는 이것을 "참으로"(indeed)라고 번역하였다.
"이삭"이란 말은 히브리 원어로 이츠칵(* )인데, "웃음"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적 행위를 기념하는 이름이다.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곧, 하나님께서 일찌기 아브라함에게 세우신 언약을(12:1-3) 이삭에게도 세우시겠다는 뜻이다.
창 17:20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청원(18절)을 들어 주시고, "이스마엘에게"도 축복하실 것을 약속하신다. "열 두 방백"이란 말에 대하여는 25:13-15을 참조하여라.
크게 번성케 할지라 - 16:10 해석 참조.
창 17:23-26
아브라함은,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그대로 "할례"를 단행하였다. 이것을 보면, 그의 신앙은 사상(思想)에서 멎어진 것이 아니고 행동으로 열매를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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