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1
할렐루야 우리 하나님께 찬양함이...아름답고 마땅하도다 - 본절을 다음과 같이 번역해도 무난할 것이다. '여호와를 찬양하라. 그는 선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을 노래하라. 그는 사랑이 많은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를 찬양하는 노래는 아름답도다'(praise the Lord! For it is good to sing praises to our God;for he is gracious, and a song of praise is seemly, RSV). 개역 성경은 '키'(* )를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보지 않고, '얼마나'(how)란 뜻의 의문사로 번역하였다(Praise th Lord, How good it is to sing praises to our God, how pleasant and fitting to praise him!, NIV).
=====147:2
세우시며 - 포로 시대 이후의 성벽 재건에 관한 언급으로 보여진다(122:3 주석 참조).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를 모으시며 - 일차적으로는 바벨론 유수를 계기로 세계 각처로 흩어진 소위 '디아스포라'(diaspora)를 본토로 귀환케 하심을 뜻한다. 그리고 이를 보다 넓게 이해하면, 하나님을 떠나 방황하는 영적 고아들이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하심을 뜻한다.
=====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 하나님께서 오랫동안의 포로 생활로 그 마음이 찢어지고 상하였던 자들을 고치셨었던 사실 그리고 그들을 고향으로 귀환시킴으로써 그들에게 평안을 주셨었던 것을 일차적으로 가리킨다. 그러나 동시에 본문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문자 그대로의 표현으로는 구약 성경에서 유일한 것이지만 유사 용례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치료자되심을 암시하는 용어이다. 인생의 영과 육을 온전히 치유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신 32:39;사 19:22;57:18;렘 30:17).
=====147:4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 - 여기서 '계수하시고'는 '모네'(* )로서 개역 성경의 번역처럼 '수를 세다'를 뜻하기도 하지만 '지정하다' 혹은 '알다'의 뜻도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별들의 수를 일일이 지정하셨고 따라서 잘 알고 계신다는 것이다(사 40:26).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 하나님으로서는 가능함을 암시하는 의미가 있다(창 15:5). 이스라엘 백성의 포로 귀환 및 치유를 서술하고 난 직후 하나님의 전능성을 언급한 이유는 앞의 내용을 이룰 수 있는 분은 하나님 뿐이라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주기 위함이다.
저희를 다 이름대로 부르시는도다 - 문자 그대로 하나님께서 모든 별들의 이름을 부르신다는 것인데 이것은 온 세계를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암시해 준다. 고대 근동에서는 하늘의 별들 하나하나가 신성(神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상이 유행했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은 별들 하나하나가 자신들의 운명을 쥐고 있다고 믿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별들의 운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암시를 통해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위력을 과시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 하나님만 의존케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자가 양을 돌보듯이 하나님이 그들을 자세히 알고 또한 세심하게 돌보시리라는 확신도 겸해서 심어주고 있다(요 10:3).
=====147:5
능력이 많으시며(* , 라브 코아흐) - 문자적인 뜻은 '능력에 있어서 풍성하며'이다. 이것은 앞 문맥과 다른 내용의 하나님의 성품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한다. 즉, 별의 수효를 아시고 그 하나하나를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재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지혜가 무궁하시도다(* , 리트부나토 에인 미스파르) - 문자적인 뜻은 '그 이해력(지혜)은 수를 셀 수가 없다'이다. 하나님의 지혜의 무궁성을 암시하는 이 구절은 4절의 '저가 별의 수효를 계수하시고'와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147:6
겸손한 자는 붙드시고(* , 메오데드 아나임) - 문자적인 뜻은 '고통당하는 자를 세우시고'이다.
땅에 엎드러 뜨리시는도다 - 신적(神的) 공의의 수행을 뜻하는 시적인 묘사의 일종이다. 본절은 무한한 능력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지혜를 가지고 우주 궤도 속에 있는 별들을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인간 세계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밝혀준다. 특히 여기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기를 원하는 혹은 부당하게 핍박당하는 자를 옹호하시는 공의로운 재판관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의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특징지워지는 통치는 인간 정부의 무질서, 부패상과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147:7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 1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한 이유가 2-6절에 걸쳐 기록되었다면 본절의 감사 찬양의 이유는 8-11절에 기록되어 있다.
수금 - 오늘날 '하아프'로 알려져 있는 이 악기는 당시 공적(公的) 예배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33:2;43:4;49:4;57:8;71:22).
=====147:8
덮으시며...예비하시며...자라게 하시며 - 본 시편은 각 절이 짝수 행으로 되어 있는데 본절만이 홀수 행인 세 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70인역(LXX)은 이것을 필사자의 실수, 즉 한 행의 필사 누락으로 보고 임의로 한 행을 추가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인간의 사용을 위하여 풀을 주시며'이다. 그러나 이 첨가는 단순히 정형(定型)이라는 틀에 맞추어 원문을 재구성하였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않다. 70인역의 추가 내용은 104:14에서 끌어온 것이다.
=====147:9
들짐승(* , 베헤마) - 집합 명사로서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짐승', 혹은 단순히 '가축'이라는 뜻으로 주로 사용된다. 본 용어는 문자 그대로 들짐승을 가리킬 때는 좀처럼 사용되지 않는다.
우는 까마귀 새끼 - 이는 아마도 까마귀가 그 어린 새끼를 잘 돌보지 않는다는 당시의 통설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표현인 것 같다(Post). 여기 어린 까마귀의 우는 소리는 마치 하나님의 도우심을 호소하는 간구 소리처럼 간주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70인역은 본 구절을 '하나님을 부르는 까마귀 새끼'로 번역하고 있다.
=====147:10
말 - '전마'(戰馬)를 가리키나 '말을 잘 타는 용사'를 암시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하나님은 자신의 힘이나 말과 같은 수단을 의뢰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풀지 않고 하나님 자신만 의뢰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신다(20:7;암 2:15).
사람의 다리 -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민첩성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용사와 같은 인간을 기뻐하지 않으신다(슥 4:6).
=====147:11
자기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 - 10절의 왜곡된 가치관을 갖고 있는 자들에 대한 묘사의 대비로 본절은 하나님을 경외하고(19:9;25:12;85:19) 언약에 신실하신 여호와를 소망하고 믿는 자들에 관해 묘사하고 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총과 축복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도움을 요청할 줄 알 뿐 아니라 그 도움의 손길에 전폭적으로 자신을 맡길 줄 아는 자들이다(출 14:13).
=====147:12
예루살렘아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 이제 다시 시편 기자는 새로운 차원의 찬양의 노래를 시작하고 있는데 이 노래는 예루살렘 성의 재건에 대한 직접적인 암시 그리고 귀환 후에 이스라엘 민족 위에 임할 밝은 축복에 관한 전망을 포함하고 있다.
시온 - 시온은 '예루살렘'과 평행을 이루는 용어이다(65:1).
=====147:13
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 - 이는 한도성의 안전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하나 시편 기자가 계속해서 포로로부터의 귀환 및 예루살렘성의 재건을 언급하여 왔으므로(2절) 본 표현은 느 7:1-4에 묘사된 것과 같은 성문들의 수축에 관한 언급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사 60:17, 18).
너의 가운데 자녀에게 복을 주셨으며 - 이것은 상반절의 성문을 세우는 일과 연관성이 있다. 즉, 성문을 세워 그 성의 안정이 확보된 가운데 그 성의 주민들이 평화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이다.
=====147:14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 하삼 게불레크 솰롬) - 직역하면 '그가 너의 경계선을 평화롭게 하신다'이다. 여기서 경계선은 한 나라와 다른 나라의 영토를 구별하는 국경선을 뜻하므로 본문이 강조하는 바는 국가의 일부 지역이 아닌 전체의 평안이라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솰롬'(* )은 전쟁이라고 하는 소극적인 의미를 넘어서서 적극적인 의미의 평안인 국가적 안녕 및 번영을 가리킨다.
아름다운 밀로 너를 배불리시며 - 여기 '아름다운 밀'은 '헬레브 히팀'(* )으로 '가장 좋은 질의 밀' 혹은 '통통한 밀'을 뜻한다. 하나님은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을 든든한 성벽과 성문으로 보호하실 뿐 아니라 양질의 밀로 풍족히 그들을 먹이신다는 것이다(132:15).
=====147:15
그 명을 땅에 보내시니 - 창조된 세계는 그 자체로서 나름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보존하시는 섭리와 간섭하심을 통해 움직여지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표현이다. 심지어 파종 시기, 추수기, 여름과 겨울, 밤과 낮, 삶과 죽음과 같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 형태가 갖추어져 숙명적으로 보여지는 현상들까지도 독립적으로 진행되지 않으며(Robinson) 여호와의 손길이 멈춰지면 일순간에 혼돈과 무질서와 파국이 초래된다.
그 말씀이 속히 달리는도다 -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은 연기됨이 없이 신속히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의미이다(33:9).
=====147:16
눈을 양털같이 내리시며 - 산간 고지대를 제외하면, 눈발이 날리는 혹독한 겨울이란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볼 수 없는 현상이다. 그러나 그 같은 현상의 희귀성이야말로 여호와의 능력의 예시를 좀더 인상 깊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저자는 이 같은 표현을 하고 있는 것 같다(사 1:18;단 7:9).
재같이(* , 카에페르) - 본 직유는 언어의 유희(word-play)를 위해 의도적으로 취해진 것이 분명하다. 즉 '재같이'는 '카에페르'(* )이고 바로 앞(히브리 원문에서는 바로 뒤)에 나오는 목적어 '서리를'은 '케포르'(* )인데 음역을 보아 알 수 있듯이 이 두 단어는 뜻은 그렇지 않으나 발음상 매우 유사하다. 바로 이 같은 점, 곧 동음 이의어(同音異議語)에 가까운 이 두 단어의 특성을 고려하여 저자는 의도적으로 두 단어를 나란히 배열한 것이다.
=====147:17
우박을 떡 부스러기같이 뿌리시나니(* , 마쉴리크 카르호 케피팀) - 직역하면 '조각들같이 그의 얼음을 뿌리시는'이다. 여기 '조각들'이란 빵 따위의 부스러기, 작은 덩어리를 의미한다(창 18:5;삿 19:5). 본 구절이 암시하는 바는, 얼음 곧 싸래기 눈, 혹은 우박 따위를 내리게 하시되 그 일을 마치 빵을 부수어 그 부스러기를 흩는 것 만큼이나 쉽게 하신다는 것이다.
=====147:18
그 말씀을 보내사 - 성경 여러 곳에서 여호와의 말씀은 당신의 사자(使者)로 묘사되고 있다(107:20;사 9:8).
바람을 불게 하신즉 - '불게 하신'의 히브리어는 '야쉐브'(* )인데 그 원형은 '나솨브'(* )이며 이곳과 '쫓다'로 번역한 창 15:11에서만 나오는 용어이다. '바람'에 해당하는 '루아흐'(* )은 '호흡', '영'(靈)등으로도 번역되는 단어이다.
=====147:19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 15-18절은 온 인류에게 그 영향력이 미치는 자연 현상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설명하였다(마 5:45). 그런데 본절은 그의 택한 백성 야곱, 곧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특권을 묘사하고 있는데 그 특권이란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들을 세상 다른 민족들과 구별시킨다.
율례와 규례(* , 후카 우미쉬파타) - 이것을 직역하면 '법령과 판단'인데 전자는 입법화되고 성문화되었다는 데 강조가 두어진 율법, 후자는 하나님이 옳은 것을 판단하거나 결정하시는데 기준으로 삼는 무엇이라는 데 강조가 두어진 율법을 각각 의미한다.
=====147:20
아무 나라에게도 이같이 행치 아니하셨나니 - 하나님께서 계시된 하나님의 뜻인 성경을 유독 이스라엘에게만 주셨음을 가리킨다. 이처럼 성경을 소유했다는 것은 다른 모든 민족에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을 이 민족에게 부여해준다. 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나타내며 또한 신령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부여된 특권이었다.
저희는 그 규례를 알지 못하였도다 할렐루야 - 이방 민족들은 그들 나름대로 규례를 갖고 있으며 그 내용 중 어떤 것은 이스라엘의 율법과 거의 유사한 것도 있다. 그리고 그 규례들은 나름대로의 유용한 목적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여호와를 향한 예배와 헌신을 나타내는 방편으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았다. 이스라엘만이 하나님께 올바른 예배와 헌신을 드릴 수 있게 하는 율법 말씀을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하나님께 찬양을 드려야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회복자이신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에 대한 찬미가 아름답고도 섬세하게
묘사되고있는 본시는 전체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따사로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본
시는 내용에 의해서 세 단락으로 분명히 구분되는데, 각 연은 찬양하라는 명령과 찬양
해야 하는 이유가 기술되어 있다. 첫째 연(1-6절)은 택한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둘째연(7-11절)은 창조에 드러난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과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셋째 연(12-20절)은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존하
시고 말씀으로 통치하신다는 사실을 찬양의 이유로 열거하였다.
본시의 역사적 배경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과 성, 그리고 성곽과 성문 을 재건하고 난 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느
12:27-43). 이러한 사실 예루살렘의 재건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2절과 13절의 동사의
시제가 완료형으로서, 과거에 이미 일어나 사건을 암시하는 데서 확인된다. 에스라와
느헤미야에 의해 조국 재건이 어느정도 완성된 시기에 이스라엘을 군사적, 사회적, 경
제적으로 안정과 부흥을 누리게 되었다(12-14;느10:28, 29;12:44-47;13:12-15). 시인
은 이러한 이스라엘의 회복이 자신들의 노력에의해 달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한편 본시는 전체적으로 보아 33편과 104편, 그리고 사40-55장의 영향을 받은 흔적
이 뚜렷하다. 또한 세 번째 단락(12-20절)에서는 전반적인 내용이 시온에 집중되어 있
음을 보다 본 시편이 성전 예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두번째 단락과 세
번째 단락은 눈과 비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것은 본시가 이스라엘에 있어서 건조기다
끝나고 백성들이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면서 겨울철을 맞을 준비하던 9, 10경의 장막절
축제에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또한 본시는 외형상 그 내용 전개가 다소 산만해 보이기는 하지만, 두 가지의 두렷
한 주제가 시인의 찬야을 지탱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창조와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
하심으로 나타나는 여호와의 전능과 따뜻한 관심이다. 이 두 가지 주제는 한편 구약의
예배 전통에 있어서 핵심을 이루어 왔던 근분 주제이기도하다. 이 같은 주제를 중심으
로 각 단락을 보다 상세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첫 번째 단락에서 여호와는 흩어진 자와 상심한 자를 재건된 성 예루살렘으로 모으
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1-6절). 여기서 시인은 자기 백성들을 "겸손한 자"(6절)로
부르면서 "악인"과 대비시키고있다. 이 같은 표현들 배후에는 여호와께서 당신의 공의
를 집행하시게 될 심판의 날에 대한 기대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 공의의 집행은 여호
와의 신실한 백성들의 구원과 악인들의 멸망을의미한다. 시인은 이처럼 하나님의 자비
를 신뢰하면서 위로받을 수 있는 근거를 4절과 5절에서 밝히고 있다. 즉, 당신의 백성
을 구원하고 치유하실 여호와는 다름아닌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요 주인이신 지혜와 권
능의하나님이시므로, 그분은 이스라엘의아픔을 이해하시고 그들을 구원코자 하는 목적
을 능히 이루실 수 있는 것이다.
시인은 포로되었던 이스라엘이 고국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의
투쟁의 결과물이 아니었고, 다만 전능하신 여호와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한 것임을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와 예
루살렘을 재건한다는 사실은 곧 구원 역사에 대한 회복임과 동시에 이스라엘과 여호와
가 맺은 계약을 다시 갱신한다는 의미를 함의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귀환은 언약
백성들을 한량없는 은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대한 감격스러온 찬양을 불러일으킬 수
밖에 없다.
또한 예루살렘을 그 파멸로부터 다시 재건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 외형적 보수
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상처받은 심령을 싸매고 고쳐주는 일이었다(3절). "너의
파괴됨이 바다같이 크니 누가 너를 고칠소냐"(에2:13). 그러나 하나님은 이 상처를 고
쳐 주시고 그 아픈 데를 싸매어주셨다.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주시고 새로운 희망으
로 채워 주셨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
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주실 것임이라"(호6:1)고 한 호세아의 말
처럼, 시인은 여호와가 참으로 이스라엘의 치유되자심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락에서 본시는 더욱 감사에 집중하고 있다(7-11절). 시인은 시약는 여기
서 보다 넓은 자연에까지 확장되어, 구릅덮인 하늘(8절)과, 먹이를 찾아 울음 자체를
하나의 기도로 주된 야생 짐승들에 대한 뜨거운 관심을 나타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도 여호와의 주된 관심과 배려는 또다시 그의백성 이스라엘에게로 좁혀지고 있
다. 이와같이 하나님은 능력을 가지고계신다.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 민족들은 자
연을 신격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민족들은 자연을 신
격화하여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이스라엘은 이 모든자연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
관으로 생가하였다. 자연과 그 모든현상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였다. "주는 광대히
시며 능력이 많으시며 그 지혜가 무궁하시다"(5절)는 증거를 시인은 자연 현상에서 찾
고 있는 것이다.
또한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신다"(8절)는 표현의 배후에서 우리는 장막적 축제
의식에서 발견되는 것처럼 다가올 우기의 축복과 풍요에 대한 이스라엘의 기대를 엿볼
수 있다(135:7). 농경 사회나 유목 사회에서 비의 중요성이란 세상 강조할 필요가 없
다. 특히 예루살렘과 같이 물이 귀한 곳에서는 비가 매우 소중하다. 시인은 인간의 삶
과 자연의 생명에 직결된 비가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
님으 또한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8,
9절)고 할 만큼 자비로우신 분이니 찬양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같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은 외적이고 물질적인 힘이나 인간의 재주를 의지하는 사람들(10
절;146:3참조)에게는 주어질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만을 바라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단락(12-2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과뜻이 자신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보다 특별한 방법으로 드러나는곳, 즉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
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되는 언약 백성임을 시인은
강조하고 있다. 그는 "저가 그 말씀을 야곱에게 보이시며 그 율례와 법도와 규례를 주
어 백성들이 의롭게 살도록 지시해 준 나라가 이스라엘밖에 없다고 말한다(신4:8). 이
것은 이스라엘의 특권임과 동시에 그들의 책임과 의무를내포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특권을 민족적인 우월감이나 다른 나라에 대한 지배의 근거로 삼지 말고, 하나님을 찬
송하는 의무로 많이 맡은 자에게는많이 달라할 것"(눅12:48)이라는 구절도 이스라엘이
받은 남다른 특권과 의무라는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시인은 여호와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재건하시고, 회복된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
들에게 평화와 만족함을 주시는 분이시므로 찬송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13,14절). 하
나님께서 "네문빗장을 견고히 하시고"라고 한 말은 느혜미야가 예루살렘성을 재건하여
안심하며 살 수 있게 한 사실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예가 된다. 시인은 하나님이 지
켜주시닌 이제 어떤원스들도 함부로 이 성을 침입할 수 없다고 한다. "너의 가운데 자
녀에게 복을 주셨다"함은 이 성에 사는사람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
다. 또한 "네 경내를 평안케 하시고 아름다운 밀로베불리신다"라는 말은 평화와 만족
을 주신다는 의미이다. 시인은 이 같은 복된사회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자비하심으
로 말미암았음을 상기키면서 하나님께 찬송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권능이 말씀의 창조력이라는 측면에서 표현되고 있음을 직시한
다.(16-18절). 하나님의 말씀은 눈과서리와 우박을 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말
한다(사55:10,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에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비와 눈
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고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이렇게 말하고 있
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고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은 자연을 창조하며, 역사를 이루는 권능
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단락(19,20절)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풍요롭고도 창조적인 권능의 말씀이 세
상 만국중에서 오로지 택함받은 백성 이스라엘에게 계시되고 맡겨졌다고 말한다. 비나
나누처럼 자연의 은총은 세상의 모든 민족, 모든 이들에게 계시되고 베풀어진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 권능과 은혜가 이스라엘민족에게만 베풀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말씀 안에 담긴 권능과 은혜의 비빌은 이스라엘에게만 특별히 계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로 하여금 죄악의길로 빠져들지 않게 하며 오
직 진실되고 올바른 길을 좇도록 율법을 수여하셨다. 이것은 바로이스라엘과 이방인의
차이점이며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적 존재의의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하여금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 민족을향해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은 곧 남보다 더 많은 의무와 책임을 뜻한다고 가르티면서,이스라엘이 그렇게 살
지 못하였을 때 더 많은 보응이 뒤따른다고 선포했던 것이다(암3:2).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본시에서 시인은 여호와의 권능과 자비를 찬양하였다.
특히 온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탱하시어 당신의 권능과 은혜의비밀이 담긴 율례와
규례를 맡기신 것에 대하여 감사의 노래를 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말씀, 즉 율법을 통해 울시고자했던 뜻을 제대로 이루어 드리는 데 실패하
였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친히육신을 입으시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보다 온전히 드러내셨다(요1:14). 그러므로 영적 이스라엘인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통한 하나님의 가르침을 경외와 순종으로 받아들이며 생활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119:97, 103, 140;렘15:16;벧전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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