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45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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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1
왕이신 - '왕'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멜레크'(* )인데, 하나님을 이러한 별칭으로 칭한 사례는 시편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5:2;68:24;84:3). 본 시편에서는 한 나라의 통치자처럼 영원히 온 세상, 온 세대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본 별칭을 사용하고 있다(11-13절).
영원히 - 하나님의 존귀와 위엄 그리고 다함 없는 그분의 사랑을 생각할 때 하나님 찬양을 멈출 수가 없다는 생각을 가짐이 당연하다. 시편 여러 곳은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이 사후(死後)에도 계속될 것을 암시하고 있다(16, 49, 73편 등). 그러나 본 시편이 사후에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암시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가 않다. 사후에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은 부활 사상과 직결된다. 즉, 사후의 찬양을 암시하는 시편들은 곧 구약 시대에도 부활사상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생명이 존속하고 있는 한, 찬양을 끊이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고 있다.

=====145:2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 날마다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으니(애 3:23) 우리가 날마다 그분께 감사를 돌려드리는 것은 당연하며,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하나님은 동일하시며 인생들을 향하신 목적이 변함없이 항상 동일하시므로 영원히 그분을 찬양하는 일은 당연하다. 본절을 통해 우리는 분명한 교훈을 얻는데 그 하나는, 참성도는 날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 일은 영원히 계속되어야 할 참성도의 고정된 목적이라는 것이다.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은 회당에서 하루 세번씩 본 시편을 낭송했다고 한다(Desterley).

=====145:3
측량치 못하리로다(* , 에인 헤케르) - '찾아낼 수 없다'가 그 문자적인 뜻이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그 능력의 범주는 인간의 이해 밖에 있다(욥 5:9;9:10;사 40;28).

====145:4
대대로 주의 행사를 크게 칭송하며 - 하나님의 행하신 사역은 땅 위에서 항상 찬양되어져야 한다는 말이다(19:2;사 38:19). 이제 한 세대는 당대에 나타난 하나님의 크신 행사뿐만 아니라 이전 세대를 통해 전해져 내려오는 기록을 통해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며, 이와 같은 식의 하나님 사역에 대한 지식의 전달은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물론 하나님 찬양은 이 세상뿐 아니라 주님의 재림 후 온전히 도래할 하나님 나라에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본 시편은 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될 찬양을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상의 주해는 '대대로'(* , 도르 레도르)의 문자적인 뜻이 '한 세대가 다른 세대에게'인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한편 '도르 레도르'의 경우 그 유사한 의미는 다른 곳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나(19:4;22;31), 문자 그대로의 표현은 구약 성경에서 이곳에서만 등장한다.

=====145:5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위엄 - 여기 '존귀', '영광', '위엄' 드은 하나님의 풍성을 나타내는 용어들이다. 이 같은 용어들이 함께 모여 있는 사실은 시편 저자의 마음이 단 한 가지 주제, 곧 하나님 찬양에 몰두해 있음을 보여준다. '존귀', '영광', '위엄'은 서로 다른 특성이기도 하지만, 한 분 하나님 안에서 조화를 이루는 속성이기도 하다.
묵상하리이다(* , 아시하) - 문자적인 뜻은 '되풀이하다', '자세히 이야기하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예배자로서 부끄럼없이 공개적으로 그분의 존재, 그분의 위대하심, 그리고 그분의 선하심 등에 관한 믿음을 깊이 상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선포하고 자세히 말하겠다는 것이다. '아시하'는 산문에서는 주로 '묵상하다'를 뜻하고, 시적인 글에서는 대개 '자세히 말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I will speak of..., KJV).

=====145:6
주의 두려운 일의 세력(* , 에주즈 노레오테카) - 직역하면 '공포를 자아내는 당신의 사역의 위력'이다. 한마디로 두려워 떨게 하는 주의 크신 권능의 사역이라는 뜻이다. 4-7절에서 시편 저자는 창조와 구원 역사에 나타났던 여호와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하여 일련의 유사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외관상 다소 다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이는 본문의 용어들도 이러한 문맥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다만 본 구절은 하나님의 사역을 목격한 이방인들의 처음 반응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 같다. 동일한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그분의 백성의 눈으로 볼 때는 은혜와 감격의 사역이지만 이방인이 볼 때는 두려움과 공포를 자아내는 사역일 수밖에 없다(men shall speak of the might of thy terrible acts, KJV). 또한 한 가지 유의할 사항은, 7절의 '저희'가 본절의 '사람들'을 받는 대명사인 점을 감안할 때 이들의 공포는 단순한 공포 자체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단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음을 암시한다는 것이다.

=====145:7
주의 크신 은혜를 기념하여 말하며(* , 제케르 라브 투브카 야비우) - 문자적인 뜻은 '그의 풍성한 선하심의 기억을 말하며'이지만 '선하심의 기억을 풍성하게 말하며'로 설명할 수도 있다. 전자의 뜻을 취할 경우 하나님의 선하심이 풍성하다는 사실에 강조점을 두게 되겠고, 후자의 뜻을 취할 경우 과거 하나님의 베푸신 선하심에 관한 기억이 너무 감격스러워서 마치 물이 가득한 샘에서 쉴새없이 작은 물줄기가 흘러 넘쳐 나오듯이 그 선하심을 선포한다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지겠다. 이 두 견해 중 어느 견해를 취해도 원문에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145:8
은혜로우시며...노하기를 더디하시며 - 이 세상을 오염시키는 죄악의 세력들에게 심판의 형태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두려운 일'에 관해 언급한 후(6절), 기자는 이제 하나님의 크신 자비에 관해 증거하고자 한다.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죄악 자체는 철저히 미워하고 징계하시지만 죄인들에게는 긍휼을 베푸사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그분은 거역하는 자를 즉시 멸하지 않으시고 오래 오래 참으시는 것이다(느 9:30;롬 9: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완악성과 사악성을 버리지 않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불가피하게 초래된다(삼하 3:39;욥 20:5;전 8:13;살전 5:3).

=====145:9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 토브 예화 라콜) - 문자적인 뜻은 '하나님은 모든 것에 선하시다'이다. 몇몇 헬라어 역본들은 여기 '모든 것'을 '여호와를 기다리는 자들'로 번역하고 있는데 평행구인 본절 하반절에 비추어 볼 때 설득력이 없다. 하반절을 중시하여 '모든 피조 세계' 곧 '그가 만드신 모든 것'(103:19)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 피조계 역시 규칙적이고 변동이 없는 우주 현상계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그 자비를 만끽한다(Eichrodt).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 속에는 그분이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임을 말하는 증거가 있다. 하나님은 당신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사랑하시고 복 주시는 분이며, 우주 도처에 이것 저것들을 배열하신 것은 궁극적으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지만 또한 인간의 행복을 위함이기도 하다. 그분은 연약한 자, 실수하는 자, 고통당하는 자를 쫓아버리지 않으신다. 그분은 당신으로부터 떠나 방황하던 자들을 기꺼이 다시 맞으신다. 그리고 그들의 배역(背逆)을 용서하시고 슬픔의 눈물을 그들의 눈에서 씻어 내신다.

=====145:10
주의 성도 - '성도'(* , 하시딤)은 언약적 충성을 실행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자이다(30:4;86:2).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의 은총과 돌보심의 수혜자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두어져 있다. 이 같은 용례는 대체로 신약의 '성도'의 그것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롬 1:7).

=====145:11
저희가 주의 나라의 영광을 말하며 - 사람은 대체로 관심있는 것, 기쁨을 느끼는 일, 바로 깨달은 바, 그리고 몹시 어려웠으나 해결을 본 난제를 이야기하기 원한다. 성도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그들 역시 앞에 진술한 것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원한다. 그러한 바람은 성도의 특징 중의 하나님이기도 하다.
나라(* , 말레쿠트) - 본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정치적인 나라를 뜻할 때 흔히 사용되고 있다(삼상 20:31;왕상 2:12;대하 36:22 등). 그러나 여기에서는 '여호와의 나라', '통치' 혹은 '왕권'을 뜻한다. 한편, 여호와의 통치라는 개념의 더 깊은 의미는 신약에 가서 드러난다(Rad, Evans).
주의 능 - 이것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능력'을 뜻하는데 이 능력이란 어느 한 영역이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존재의 확실성을 시사한다. 창조 사역, 섭리, 죄인들의 회심, 세계 도처에서 드러나는 말씀의 진리성, 죽어가는 자가 평화를 얻는 것 등 이 모든 영역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살아계심, 이것이 바로 '주의 능'이다(Barnes).

=====145:12
인생(* , 베네 하아담) - 성경에서 '베네 하아담'은 일반적으로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뜻하고 '베네 이쉬'(* )는 '신분이 높은 자', '고상한 자'를 뜻한다(4:2;49:2;62:9;애 3:33). 따라서 '베네 하아담'과 '베네 이쉬'가 함께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땅 위의 모든 사람을 가리키게 된다(49:2). 그런데 본절에서는 '베네 하아담'이 쓰였다. 그렇다면 일차적으로 본절은 '신분이 낮은 자', '비천한 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맥상 신분이 낮고 비천한 자라고만 고집할 수 없는데, 이런 경우 문맥은 어색해진다. 왜냐하면 본절은 하나님의 능력과 그분의 나라, 곧 하나님의 통치를 깨달아서 그 나라 백성이 되는 모든 성도들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절의 '베네 하아담'은 단순히 신분이 낮고 천한 자가 아니라 오고 가는 모든 세대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에 관한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그 마음이 가난한 자를 뜻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겸손히 받아들이는 자들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과 대비를 이루는 '어린아이들'로 묘사하고 있다. 귀신이 쫓겨 나가는 사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임재가 가시화되었을 때 예수께서 그 나라의 임재, 곧 그 나라에 관한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자들의 자격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 사실은 잘 드러나고 있다(눅 10:21).

=====145:13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니 주의 통치는 대대에 이르리이다 - 이 와 유사한 구절이 단 4:3, 34 등에도 나오는데 아마도 다니엘 저자가 본절을 참조했던 것 같다. 주의 통치는 공간적으로 그 어느 곳에나 미칠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는 영원 무궁토록 계속된다. 공의와 자비로써 통치하는 여호와의 나라는 그 어떤 세력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기 때문이다.

=====145:14
모든 넘어지는 자를 붙드시며 - '넘어지는 자'(* , 하고플림)란 '자신의 힘으로 계속 걸을 수 없는 자'를 뜻하지만 좀더 넓게는 인생의 무거운 짐 때문에 억눌려 피곤한 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자를 의미한다. 또한 '붙드시는'(* , 소메크)의 문자적인 뜻은 '지탱시켜 주는'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은 하나님께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며,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분임을 밝혀준다. 한편 전(前) 문맥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영광, 위엄, 영원성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을 추상적으로만 생각하고 자신의 실제적인 삶과는 무관하다고 단정하기 쉽다. 바로 이 같은 시점에서 하나님은 구체적인 삶의 영역 속에서 인생의 짐을 지고 힘들어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 구절의 문맥상 의의는, 추상적 개념으로만 여겨질 수 있는 하나님 나라의 특성들이 인간의 실제적인 삶과 연관시켜 준다는 데서 찾아진다.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는도다 - 여기서 '비굴한 자'(* , 하크푸핌)의 문자적인 뜻은 '그 몸을 구부린 자'로서 인생의 시련, 의무 따위로 정신적으로 억눌려 있는 자를 암시한다. 그러한 자를 일으킨다는 본 내용은 상번절과 그 의미에 있어서 평행을 이룬다 하겠으며 평행, 곧 유사 개념의 병행은 반복, 곧 강조를 나타낸다.

=====145:15
중생의 눈이 주를 앙망하오니(* , 에네 콜 엘레카 예사베루) - '모든 것의 눈들이 당신을 기다리다'가 그 문자적인 뜻이다. 여기 '모든 것'이란 사람뿐 아니라 땅 위, 공중, 그리고 물 속에 사는 모든 피조 생물을 가리킨다. 그 모든 것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공급받기 위하여 애타는 눈으로 한 분 하나님을 쳐다보며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온 우주가 날마다 매시간마다 매분 매초마다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있다는 이 표현은 자연신론자들의 주장, 곧 하나님은 온 우주를 만드신 후 하늘 나라로 올라가셔서 뒷짐지고 구경만 하신다는 주장을 일거에 일축해버린다. 일분 일초라도 그 간섭과 통치를 중단하신다면 온 우주는 엉망이 될 것이고 곧 멸망에 이를 것이다. 본절과 후속절 상반절은 104:27, 28과 유사하다.

=====145:16
모든 생물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나이다 - 여기서 '생물'이란 땅 위, 물속, 공중에 기식(寄食)하며 사는 모든 피조물, 곧 인간, 가축, 짐승, 물고기, 곤충 등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고 산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생물계에 적용하시는 '보존을 위한 보편 원칙'을 의미한다. 즉, 본절은 한 생물도 궁핍을 느끼지 않는다거나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때에 따라 궁립을 느끼고 소멸되는 생물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어떤 숫자의 생물들이 보존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는 배려하신다는 뜻인 것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는 환경 오염으로 인해 많은 생물들이 죽어가고 있지만, 추위, 배고픔, 헐벗음으로 소멸되는 생물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다.

=====145:17
그 모든 행위에 의로우시며(* , 차디크 베칼 데라카) - 직역을 하면 '그의 모든 방법들에 있어서 의로우며'인데, 문맥상 이것은 모든 피조물의 필요를 공급하는 방식, 곧 그것들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는 면에 있어서 공평하시다는 의미로 보면 되겠다(103:7).

=====145:18
진실하게(* , 베에메트) - 문자적인 뜻은 '진리 안에서'인데 이것은 위선적이지 않고 '신실함으로'란 뜻이다. 즉, 하나님을 참신으로 예배하면서 신실하게 그분의 은혜를 얻으려고 하는 것을 암시한다(요 4:24).

=====145:19
경외하는 자(* , 예레아) - 한 명의 개인보다는 경건한 공동체에게 주로 적용되는 용어로서, 경외한다는 것은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아니라 경배하는 마음으로 진실한 찬양과 기도, 순종과 충성을 바친다는 뜻이다(34:9).
소원(* , 레촌) - 여기서는 하반절의 '구원'(* , 요쉬엠)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시편에서 '소원'이 '구원'을 뜻하는 곳은 여러 곳에 있다(35:3;106:4 ).

=====145:20
자기를 사랑하는 자 - 문맥상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가리킨다. 쿰란 사본, 70인역, 시리아역, 탈굼역 등은 '사랑하는 자'(* , 오하바)를 아예 '예레아'(* )로 바꿔 적고 있는데 굳이 이처럼 원문을 개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문을 그대로 두고 의미 해석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하면 되겠다.
다 멸하시리로다 - 진리와 선(善)의 종국적인 승리는 거짓과 악(惡)의 종말을 의미한다(104:35;143:12).

=====145:21
내 입이 여호와의 영예를 말하며 - '영예'에 해당하는 '테힐라트'(* )는 '찬양'을 뜻한다. 말하자면 본문은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말로서, 그분이 하신 모든 일, 그분의 품성,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원하시는 분임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영광을 찬송하는 본시는  전체 시편 가운데서 가장
영화로운 '찬양시' 가운데 하나이다. 히브리 찬송에서 본시가 차지해온 탁월한 위치는
"이 시를 마음속으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자는 내세를 위해 최선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유대인들의 격언에 잘 나타나고 있다. 본시는 초대 교회 이후
기독교 예배에서 애용되었으며, 성 어거스틴이 '고백록'에 인용되는 등 기독교 문학과
신앙에도 많은 영감을 주어왔다. 그렇다고 해서 본시의 표현들이 현란하게 수식적이거
나 문체가 대단히 수려하지는 않다. 오히려 사용되고  있는 단어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문체 역시 꾸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자비, 두려움과 사랑 등 신
적 엄위와 하나님 나라의 위대함이 감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본시는 아홉편의 알파벳시(9, 10, 25, 34, 37, 111, 112, 119, 145편)중 마지
막 작품이다. 그런데 히브리 사본의 필사과정에서(13절과 14절 사이에)알파벳의 한 글
자 '눈'(   )이 누락되었다. 그래서 다른 고대 사본과 칠십인역은 누락 부분을 다음과
같이 보충하였다. "주는 그의  모든 말씀에 신실하시며 그의모든 행사가 은혜로우시도
다."
   또한 본시는 한 개인 즉 다윗의 찬송으로 시작하고 있으나, 시가 이어짐에 따라 모
든 피조물과 성도들이 찬송에 동참하라는 요청으로 확장된다(10절). 이러한 개인적 요
소와 회중적 요소의 혼합(21절)은 본시가 그 주제라든지 소재에 있어서 다른 시편들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호 연관성은 여러  부분에서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
다. 예를 들면 1절과 107:32, 3절과 48:1;96:4, 4절과  78:4, 9절과 86:5, 15, 14절과
146:8, 15, 16절과 104:27, 28등이다. 그러므로 본시는 '알파벳시'에서 일반적으로 나
타나는 것처럼 주제의 일관성이나 내용의 논리성이 부족하다.  그러나 본시는 이 같은
한계를 상당히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본시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시임을 강조하
기 위해 찬송으로 시작되어(1절) 찬송으로 끝나며(21절), '송축'또는 '찬양'이라는 말
과 '크신', '모든'등의 수식어들이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각각 7절식으로 이루
어진 세 연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사람(1-7절), 이스라엘(8-14절), 고통당하는 자
들(15-21절)등 다양한  대상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공의로우심과 선하심을 찬송하고 있
다.
   이처럼 여호와의 왕권(kingship)에 대한  찬양이 면면히 울려퍼지는 본시는 1 시인
의 삶의 목적(1, 2절) 2 하나님의 크신행사(3-7절) 3 하나님의 긍휼하심(8, 9절) 4 찬
양에로의 부름(10-13절) 5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하심(14-20절) 6 결론적찬양(21절) 등
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시를 각 단락으로 구분하여 좀더 심층적으로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시인의 삶의 목적(145:1-2)
   시인은 먼저 하나님을 날마다, 그리고 영원히  찬양하리라는 자신의 확고한 입장을
밝힘으로써 본시를 시작한다. 여기서 시인은 "주를 송축하리이다"는 말을 무려 세번씩
이나 반복함으로써 자신의  단호한 결심을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향한
찬양을 감정적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믿음과 마찬가지로 찬양도 의지
적 요소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것이다. 시인은 행복할 때뿐만 아니라 찬양하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동일하게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한다.
   한편 시인은    하나님을 '나의 왕'이라고 부른다(1절). 이스라엘의 왕이었던 다윗은
위대하신  하나님의 통치를  겸손히 인정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였다(빌
2:12-16). 사실 하나님의 다스림은 영원하며 날마다 선택된 백성들을 축복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을 세계의 유일한 왕으로 인정하며 찬양해야
할 특권과 의무가 주어진 것이다.

           2. 하나님의 크신 행사(145:3-7)
   시인은 이제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찬양하며(3절) 이것이 '주의 행사'(4절), '주의
능한일'(4절). 특히 시인은  어느 한 사람, 어느 한 세대 만으로 하나님의 광대하심에
합당한 찬양을 드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하며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
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말한다(4절). 고대의 왕들은 전달물을 종들로 하여금 릴레이식
으로 뛰게 하여 전했다고 한다(대하 30:6-10;에 3:13-15;욥 9:25;렘 51:31).   시인은
여기서 대대로 이어지는 세대들이 달리는 종들이 되어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전한다 해
도 부족할 것이라고 말한다(욥11:7;사40:28).
   그런대 이 같은  하나님의 크신 행사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을 드러내는    데 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은 하나님의 행하신 바를
생각하면서 그분의 은혜와 공의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7절).

           3. 하나님의 긍휼하심(145:8-9)
   본 단락에서 시인은  앞에서 말했던 하나님의 크신 행사가 사람을 위협하고 공포로
떨게 하는 것이라, 도리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긍휼하심의 증거라는 사실에대해 노
래한다. 광대하신 하나님은 인간이  본래적으로 연약하며, 홀로설 수 없고 실수투성이
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는 분이시다.
   본시에서 시인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것은 하나님의 우주적 주권과 통치인데, 특히
주의 나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 심판이나 정죄보다는 사랑과 자비를 앞
세우고 있다(8, 9절). 이 세상 나라와 권력은 사랑보다도 심판, 긍휼보다는 명령,관용
보다는 징계, 자유보다는 강제를 더욱앞세운다. 그러므로 이기적이고, 잔인하며, 일방
적이고, 보복적이 된다. 그러나 그분을 앙망한다(15절).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하나님
의 긍휼하심은 단지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마5:45)모든 존재에게로 확장된다는 사
실을 강조한다(9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세상은 악과불행,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많은 사람들은
재앙과 재난, 피흘리는 전쟁, 고통과 국한되지않는다. 하나님의 세계는 본질적으로 물
질적이라기보다는 도덕적이다. 사실물질은 도덕적 이유 때문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
나님의 우주적 선하심은 그가 허락하신 만물속에서 도덕적인 목적의 진전과 성취를 통
하여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4. 찬양에로의 부름(145:10-13)
   본연에 이르러 시인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존재와 성도들을 향하여 주
의 이름을 찬양하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시인은 하나님의 나라를 세계의 중심적인위치
에 두고 생각한다. 그는하나님의 전세계적인 통치가 실현될 모습을 예언적으로 바라보
고 있다. 사실 본 시편의 서론부(3-9절)와 결론부(14-21절)의 내용은 역사의 완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영광과 위엄, 권능에 대한 구체적인 해설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여기
서 시인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두 가지 측면에서 묘사하고있다. 1 주의 나라는 권능
과 위엄의 나라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모든뜻을 완성하시며, 친히 모든 목적을 성
취하신다. 2 주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다. 하늘과땅 위에 있는 만물들은 하나님의 무
한하신 계획과 목적을 완수하고, 영원히 즐길 것이다.

        5.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에 대한 묘사 및 찬양(145:14-21)
   시의결론부인 본 단락에서는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이 세상의 권력과 첨예하게 대조
되어 묘사되고 있다. 이 단락은 앞의 8절과 9절에서 언급했던 하나님의 통치의 성격에
대한 보다 상세한  해설이라 할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가 그를 의지하는 모든
존재에게 따뜻한 보살핌이라고 함축적으로 요약한다. 여기서 시인은 이 같은 하나님의
보호를 1  무기력한 자들을 도와주심(14절) 2 모든 피조물들에게 식물을 공급하심(15,
16절) 3 기도하는 자에게  응답하심(18,19절) 4 자기 사람들을 보호하심(20절)등의 네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시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통치를 약자에대한 보실핌이라는 측면에서 이기적
이고 냉혹한 세상 나라와 대조하고 있다. 패자는 언제나 비침한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
은 세상의 논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패배한 자들을 구원하시며, 인생의 무거운 고난
과 싸우는 자들의 마음을 고무시켜 주시며, 그들에게  필요한 은혜와 도움을 베푸신다
(14절).
   둘째, 하나님의 우주적 돌보심을 노래한다. 하나님은 때를따라 인간을 포함한 만물
에게 먹을 약식과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여 주신다(15,16절). 이점에서 인간은 대자연
과 더불어 동일한 피조물에 불과하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하나님이 주신것으로 만족하
게 살다가 하나님이 생명을 불러가시면 흙으로 돌아갈 뿐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할 일
은 생명이 있는 날 동안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노래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힘주어
강조한다.
   셋째로, 하나님은 자신에게 간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신다(18,19절). 하나님은
초월하신분인 동시에 내재자이시므로 자신에게 진실로 간구하는 자에게 하감하셔서 은
혜를 베푸신며, 반대로 교만한자에 대해서는 책망하신다(138:6). 하나님께서는 겸손하
게 부르짖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계신다.
   넷째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20절). 그분은 당신 백성들의 유익을
위해 적극적으로 개입하시고 마음의 소망을 주시며 모든악으로부터 승피케 하신다. 하
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을 통하여 끝까지 보존되고 기쁨과 소망
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이러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리라는 자신의다짐(1절)을 다시 한번 반복하면서(21
절)모든 육체로 하여금 자신의 찬양에 동참하도록 촉구함으로써 영화로운 찬양시를 끝
맺는다.
   이상에서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신자는 하나님과 내적으로 친밀한 교재를 누려야한다. 하나님은 어떤 추상적인 존재
나, 관념상의  신이 아니라 성도의 통치자요 보호자이시다(18:2, 2;23:4). 2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신자의 믿음에  커다란 힘을 공급해준다(3-6절). 우리가 사단의 강력하고
도 다양한 공격으로 인하여 좌절하게될 때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묵상하면 새로운 기쁨
과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3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우심과 은혜로우심은 모든 사
람들이 똑같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18절). 비록 마음이 선한 자들이라 할지
라도 항상 그러한 감정을 가질 수는 없다. 오직 성령의 거룩한 감동을 통해 영혼이 고양된 상태에서만 깨달을 수 있는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좀더 분명히 알 수 있도록 기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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