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하늘에 계신(* , 하이쉬비 봐솨마임) - 직역하면 '하늘에 좌정해 계시는'이며,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표현이다(2:4; 11:4; 115:3).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19:1) 이것은 '옛적부터'(93:2) 존재했었다. 이 사실은 법궤 혹은 예루살렘 자체가 여호와의 보좌로 불리웠던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데(렘 3:16), 그 이유는 이것들은 하나의 모형으로서 하늘 보좌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123:2
종의 눈 - 그 주인의 자그마한 동작, 그 의지를 나타내는 아주 작은 증표를 주시하며 어떤 혜택을 고대하는 종의 눈을 가리킨다. 이는 절대적인의 존성을 표현해 주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한 학자의 종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종들은 그들의 손을 가슴에 댄 채 그 주인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 있다. 그 눈을 그 주인에게 고정시킨 채 그들은 그 주인이 어떤 바램을 들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Savary). 본문에서 이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갈망한다고 보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호소하고 있다고 이해하는가 하면 징벌이 그만 멈추기를 원하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어떤 측정한 한 가지 견해에 국한시키기보다는 보다 폭넓게 여호와께 대한 시인의 신뢰와 경의를 표현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겠다(Alexander). 또한 시편에서 하나님의 손을 향하고 있는 눈이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인내하면서 바라보고 고대하는 눈이다. 이 눈은 어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순종하겠다고 하는 순종의 눈이기도 한 것이다.
=====123:3
심한 멸시가우리에게 넘치나이다(* , 키 라브 사바누 브즈) -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멸시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이다. 여기서 '사바누'(* )는 재귀형 동사인데, 특히 재귀형 동사가 그 내적 상태의 심각성을 나타내려고 할 때 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기자가 속한 공동체가 당하고 있던 모욕의 정도는 엄청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의 분량을 따라 심한 시련에 노출되어 왔던 그들이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호소하는 본절 전반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123:4
평안한 자(* , 하솨아난님) - 문자적인 뜻은 '부유한 자'인데 명사적으로 쓰일 때 흔히 이 단어는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을 전혀 갖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사 32:9,11; 암 6;1).
교만한 자(* , 게예오님) - 이는 사회 공동체 내의 힘없는 약자들의권리를 무시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권위마저도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nderson).
하늘에 계신(* , 하이쉬비 봐솨마임) - 직역하면 '하늘에 좌정해 계시는'이며, 하늘 왕좌에 앉아 계시는 하나님을 일컫는 표현이다(2:4; 11:4; 115:3). 하나님의 보좌는 하늘에 있으며(19:1) 이것은 '옛적부터'(93:2) 존재했었다. 이 사실은 법궤 혹은 예루살렘 자체가 여호와의 보좌로 불리웠던 사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데(렘 3:16), 그 이유는 이것들은 하나의 모형으로서 하늘 보좌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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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눈 - 그 주인의 자그마한 동작, 그 의지를 나타내는 아주 작은 증표를 주시하며 어떤 혜택을 고대하는 종의 눈을 가리킨다. 이는 절대적인의 존성을 표현해 주는 이미지이다. 이 이미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한 학자의 종에 대한 묘사는 흥미롭다: '종들은 그들의 손을 가슴에 댄 채 그 주인의 발 아래 조용히 앉아 있다. 그 눈을 그 주인에게 고정시킨 채 그들은 그 주인이 어떤 바램을 들어 주기를 고대하고 있다'(Savary). 본문에서 이 눈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해, 혹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갈망한다고 보며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부요하심에 호소하고 있다고 이해하는가 하면 징벌이 그만 멈추기를 원하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문맥에서는 어떤 측정한 한 가지 견해에 국한시키기보다는 보다 폭넓게 여호와께 대한 시인의 신뢰와 경의를 표현하는 말로 봄이 무난하겠다(Alexander). 또한 시편에서 하나님의 손을 향하고 있는 눈이란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닌 오직 하나님만을 인내하면서 바라보고 고대하는 눈이다. 이 눈은 어떤 하나님의 명령에 대해서도 순종하겠다고 하는 순종의 눈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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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멸시가우리에게 넘치나이다(* , 키 라브 사바누 브즈) - 직역하면 '왜냐하면 우리가 지나칠 정도로 멸시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이다. 여기서 '사바누'(* )는 재귀형 동사인데, 특히 재귀형 동사가 그 내적 상태의 심각성을 나타내려고 할 때 주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당시 기자가 속한 공동체가 당하고 있던 모욕의 정도는 엄청난 것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믿음의 분량을 따라 심한 시련에 노출되어 왔던 그들이 이제 인내의 한계에 도달하였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호소하는 본절 전반절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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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한 자(* , 하솨아난님) - 문자적인 뜻은 '부유한 자'인데 명사적으로 쓰일 때 흔히 이 단어는 교만하여 다른 사람을 돌아볼 마음을 전혀 갖지 않는 자를 가리킨다(사 32:9,11; 암 6;1).
교만한 자(* , 게예오님) - 이는 사회 공동체 내의 힘없는 약자들의권리를 무시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의 권위마저도 무시하는 자들을 가리킨다(A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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