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1
이스라엘은 이제 말하기를(* , 요마르 나 이스라엘) - 직역하면 '이제 이스라엘은 말하려 한다'인데, 이 표현은 과거를 회상하는 문맥의 시작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118:2; 124:1). 본 시편은 일반적으로 바벨론 포로로 부터 구원받은 후 이스라엘 민족이 과거의 모든 기억들, 고통의 기억 및 반복된 하나님의 자비에 관한 기억을 더듬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는 시편으로 간주된다.
나의소시부터(* , 미누라) -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어린시절부터'이다. 이스라엘 민족의 어린시절 곧 유년기란 대체로 출애굽 및 광야 방황시기를 가리킨다(렘 2:2; 호 2:15; 11:1).
=====129:2
여러 번...나를 이기지 못하였도다 - 대적들의 공격은 수도 없이 여러번 이루어졌었지만 이스라엘은 멸절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애굽 왕조들, 블레셋, 아람, 앗수르 그리고 바벨론 등의 압제자들로부터 결국엔 벗어났었다. 대적이 하나님의 백성을 압도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바로 본 시편의 요점이다. 본문의 신약 평행구는 고후 4:8-10인데 사실 기독 교회전 역사는 바로 본 구절의 복창이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29:3
밭 가는 자 - 잔혹한 압제자에대한 비유적 묘사인데 특히 이 용어는 밭고랑처럼 푹패인 자국들을 남기게 하는 채찍을 휘두르는 자를 연상시킨다(Anderson).
고랑 - 노예의 등에 채찍질하여 난 것과 같은 깊은 상처를 암시하는 말이다. 사 1:6이나 51:23의 표현은 외관상 본 구절과 다른 의미를 나타내고 있는 듯하나 사실은 동일하다. 이사야는 도시의 거리에서 벌어졌던 압제 행위를 묘하함에 있어 동일한 뜻을 나타내는 이미지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넘어가려는 그들의 팡에 네가 네 허리를 펴서 땅 같게, 거리 같게 하였는니라"(사 51:23). 반면 본 시편 기자는 농촌의 모습인 골이 깊은 밭고랑을 보고 동일한 이미지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Perowne).
길게 지었도다 - 이에 해당하는 '아라크'(* )의 문자적인 뜻은 '길게 하다', '연장하다', '선을 곧바르게 하다'이고 공간적 혹은 시간적인 연장을 가리킬 때 쓰인다. 여기서는 공간적, 시간적인 개념 둘 다를 적용하는 것이 무난할 것 같다. 전자는 등에 고랑을 내었다는 표현에서 후자는 여러 번 괴롭혔다는 표현에서(1절) 각각 그 근거를 찾을 수 있겠다. 이스라엘의 열방 압제자들에게 받았던 고통은 그 상처가 깊고 혹독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오랜 세월 동안 계속 되어온 것이었다.
=====129:4
여호와께서는 의로우사(* , 예화 차디크) - 어떤 학자는 본 구절을 '의로우신 여호와'(7:9)를 뜻하는 강조 문구로 간주하고(Kraus), 또 다른 학자는 여기서의 '차다크'를 '여호와'와 병치, 즉 동격 관계에 있는 것으로 본다(말하자면 '의로운 자이신 여호와'로 번역한다는 것이다. 119:137, Gunkel). 양자 중 어떤 번역을 취한다고 해도 그 의미는 명백한데, 여호와께서는 그의 약속에 신실하셔서 그의 백성을 구하시고 그들의 압제자들을 징벌하신다는 것이다.
악인의 줄(* , 아보트 레솨임) - '아보트'의 문자적인 의미는 '밧줄'로서 악인의 압제 혹은 멍에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2:3; 레 26:13; 사 9:4; 겔 34:27). 이 회화적 표현에서 이스라엘은 멍에를 메고서 밭갈기 위해 애쓰는 동물로 묘사되고 있는 듯하다(욥 39:10). 그리고 좀더 현실적, 역사적인 의미에서 보면 포로 상태에 대한 비유라 할 수 있다(2:3).
=====129:5
시온을 미워하는 자(* , 소네에 치온) - 이 표현은 '하팍스 레고메논'(성경에 한 번만 나오는 표현)으로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용어를 이스라엘의 대적들에게 적용시킨다. 이방 국가들의 침입이 시편 및 구약에서 자주 등장하는 주제라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이다. 그러나 '소네에 치온'을 시온의 주장, 즉 하나님의 요구를 배격하였던 특정 영향력 있는 이스라엘 무리들에 대한 언급으로 보는 것도 가능하다(Weiser). 그렇다면 본 구절을 통해 시편 기자가 지적하는 바는 과거에 있었던 외국 압제자들의 적대감이 사라지게 되엇던 사실뿐 아니라 국내의 패역한 무리들이 수치를 당하였던 사실까지 포함한다 하겠다(25:2; 119:22).
=====129:6
지붕의 풀 - 쉽게 자라지만 뿌리가 없어 곧 말라버리는 특성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고대 근동 가옥들의 평평한 지붕들은 회반죽, 타르, 재, 모래 등을 반죽하여 바르는데 흔히 그 갈라진 틈 사이로 풀들이 자라났다. 가난한 자들의 가옥의 경우 진흙과 볏짚으로 지었는데 이 경우 잡초는 더욱 무성하게 자라난다. 이 모든 이미지들은 농촌 생활에서 취할 수 있는 것들인데 이를 보아서도 본 시편 기자가 거주하던 데가 어떤 곳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그 같은 잡초는 지붕에 있어서 직접 햇빛을 받기 때문에 미처 자라나기도 전에 말라버리고 마는데 저자는 이스라엘 대적들의 운명이 바로 그와 같을 것임을 지금 확신하고 있다(사 37:27).
=====129:7
베는 자의 줌 - '베는 자의 손'을 뜻한다. 추수꾼들은 대체로익은 곡식의 줄기를 한움큼 잡아챈 뒤 날카로운 금속 도구로 벼의 이삭을 잘라낸다(욥 24:24). 잘려진 줄기들은 옆에 세워둔 후 결국엔 불태워버리지만 모아진 이삭들은 단으로 묶여저서 타작마당으로 보내졌다. 본 문맥에서 '베는 자의 손'은 이삭을 잘라낼 목적으로 벼의 줄기를 움켜쥐던 추수꾼의 손을가리킨다. 아울러 이 손은 알곡으로부터 쭉정이를 골라내는 손을 동시에 가리킨다(마 13:30,40). 본절은 쭉정이와 같은 지붕 위 잡초의 무익성을 묘사하는 것 같은데 결국 이것은 사악한 자의 삶의 주용한 특성들 가운데 하나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129:8
지니가는 자도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하지 아니하느니라 - 추수가 진행 중일 때 그 옆을 지나가는 동행자는 추수자가 풍성한하수확을 거두는 것을 보면서 기쁨과 축하를 표현한다. 여기서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는 오늘날의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인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길'처럼 선한 소원, 경건한 축하, 성공과 번영의 소원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었다. 여기서의 의미는, 그 같은 용어는 지붕 위에 자라는 잡초에 대한 언급으로는 결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잡초처럼 말라가고 있는 혹은 이미 말라버린 것을 손에 들고 있는 자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해주는 것은 너무 우스꽝스럽고 도리어 조롱하는 말이 되었을 것이다.
본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악인들의 박해 속에서 완전하게 보호하신 하나님의 구원
을 회상하며, 원수들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고하고 있다. 시인은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압박을 받았으나 결국 승리했음을 말하면서 어려움에 처해 있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고
있다.
이 시가 기록된 시기는 아마도 바벨론 포로시대가 끝나고 고국에 돌아온 이후인 것
으로 보여진다. 포로 생활 속에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상실한 자책감과
함께 성전을 향한 갈망을 가지고 있었다.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포로 생활을
마치고 귀환하게 되었다. 그런데 또다시 이방의 질투와 협박으로인해 괴로움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인은 지쳐있는 동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새 힘을 주기
위하여 본시를 쓴다. 그러므로 본 시편에는 이스라엘 역사의 우울한 측면보다 밝고 희
망적인면이 부각되어 나타난다.
한편 본시의 장르에 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어떤학자는 '비탄시',
'저주시' 등으로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시는 전반적으로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하
나님에 대한 확신과 미래의 안전에대한 간구가 드러나는 '기도시'라고 볼 수 있다. 시
인은 지나간 역사를 토대로 하여 대적들이 미래에 하나님의 심판을 통해 파멸될 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의 본시는 내용에 의해서 분명하게 두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1-4
절)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체험을 회고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소개하고 있으며,
후반부(5-8절)에서는 하나님의 때가이르면 원수들은 괴로움을 당하며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철저한 보응을 받으리라는 내용을 선포하고 있다. 이제 각단락의 내용을 돔더 자
세하게 고찰하여 보기로 한다.
1. 하나님의 구원을 회상함(129:1-4)
시인은 먼저 이스라엘이 여러차례 핍박자들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받은 사실을 회상
한다(1, 2절). 시인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인격화하여 화자(話者)로 묘사하고 있다. 이
스라엘은 건국 초기로부터 갖은 수모를 당해왔고, 어느시대에나 수없는 박해를 겪어왔
다. 이스라엘 주위의 열방들은 끊임없이 침입과 압제를 감행했다. 이러한 압박과 설움
은 다윗의 통치 기간 동안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극성을 부렸다.
이스라엘은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포로생활이 끝나고 그리운 고국으로 돌
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여전히 주위 백성들의 모함과 공격을 받았다. 더구나 외부
의 원수들에게만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고백하는 내부의
원수들에 의해서도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시인은 '저희가
나를 소시부터 괴롭게 하였도다 저희가 나를 괴롭게 하였도다'(1,2절)라고 두 번 반복
하고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당한고통의 강도가 얼마나 극심하였는지를 생생하게 보
여준다. 시인은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지만 결국 이스라엘을 굴복시키지 못했
음을 강조했다(2b, 4절). 이스라엘이 회생할 수 없을 만큼 절망적인 상황에 도달할 때
만다 언제나 여호와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나타나 극적인 회복이 이루어졌다. 시인은
혹심한 박해 중에서도 하나님께서 구원을 행하신 사실을 비유적으로 표현한다(4절). 즉
쟁기를 끄는 소의 멍에를 풀고 그 줄들을 산산조각 내어 잘라버리는 것처럼 여호와께
서는 악인들의 맹렬한 공격을 막으시고 결퇴시키셨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환난을 당하고 있는 그의 백성들에게 안식으로 갚아 주시고, 성도를
괴롭히는 자들을 책망하신다(살후1:6, 7). 하나님은 의와 공평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악인들의 악의에 찬 소행을 결코 묵과하지 않으신다(103:6;잠16"11;사45:21). 시인은
하나님께 이스라엘과 맺은언약을 신실하게 지키심으로 언제나 구원이 성취되었음을 분
명하게 말하고 있다.
2. 악인에 대한 저주(129:5-8)
앞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노래한 시인은 이제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물러가를 바라고 있다(5절). 시인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들을 '시온을 미워
하는 자'로 표현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적으로 간주하고 있다. 시인은 시온을 미워하는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멸망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원수들이 지부의 풀과같이 자라기 전에 마를 것이라고 말한다(6절). 원수들은
비가 온 후에 중동 지방 가옥의 평평한 지붕 위에서 자라는 풀과 같이 단명할 것이다.
비로 일시적으로 영화와 위대함을 소유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두렵게 할수는 있으나 결
국 파멸하게 된다.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자기의 마음을 높이는 자는 그교만의 정도가
높아질 수록 쉽게 시들 것이다(잠24:19, 20). 이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의 최후는
그들의 전성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패배
하게 되고, 그들의 노력과 모든 계획은 자기의 수치로 되돌아 갈 것이다(10:15).
시인은 이처럼 대적의 궁극적인 파멸을 언급한후에 마지막으로 그 원수들에게는 결
코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오갔던 통상적인 인사말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8절). 사실 열방의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러한 인사는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었다(룻
2:4,8). 그러나 시인은 이러한 당연하고 평범한 축복의 인사말조차도 시온을 미뤄하는
자에게는 임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심지어 그들의 악행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
는 나그네까지도 악인들에게는 인사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 장면은 최후의 심판
날,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아무도 돌아보지않는 악인들의 고독과도 비침한 모습을 연상
케 한다(마25:11-13). 시인은 악인들이 철저하게 파멸하여 결코 회복될수 없음을 강하
게 말하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은 구속하시고 악인들을 멸망시키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환경이 성도들을 잠시 환난 속에 매어 둘 수 있으
나, 결국 하나님은 악인에 의해 고안된 악의 줄을끊어 주신다(롬8:31참조). 반면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의 최후는 항상 실패와 비참함으로 끝나게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들이 이 땅에서 잠시고난을 겪게 될지라도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보살피심으로 승리하게 될 것임을 확신하며 담대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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