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3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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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1
감찰하시고(* , 하카르타니) - 직역하면 '당신은 나를 찾으셨다'인데 여기서 '찾으셨다'는 말은 원래 물줄기나 금속을 찾기 위하여 땅을 파거나 뚫는 것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말이다(욥 28:3).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땅을 파헤치고 드러내듯이 자세하고 정확하게 인생의 마음을 살펴보신다는 것을 암시한다.
아셨나이다 - 앞의 감찰의 결과로서, 자세한 조사의 결과 하나님은 우리 마음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말이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가지고 저자는 그의 논리를 펴나가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와 같은 인식을 확장하기도 하고 적용하기도 한다.

=====139:2
주께서(* , 아타) - 직역하면 '당신은'인데 주로 강조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대명사임을 고려하여 '당신만이'라고 번역하면 문맥을 더욱 효과적으로 살아나게 할 것이다.
앉고 일어섬 - 인간 삶의 모든 행위를 의미하는 이 표현은 127:2;신 6:7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나의 생각을(* , 레레이) - 이 용어는 구약 성경에서 이곳과 17절에서만 등장한다. 특히 '레레이'(* )는 전치사 '레'(* )와 '생각'이란 뜻의 '레아'(* ), 그리고 1인칭 소유격 '요드'(* )가 연결되어진 용어로서 전치사 '레'(* )의 의미를 살려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로 번역하는 것이 원문적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즉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하고 있는 바를 넉넉히 알고 계신다.

=====139:3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 여기서 '길과 눕는 것'이란 인간 전체 삶을 회화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또한 '감찰하신다'에 해당하는 '자라'(* )의 문자적인 뜻은 '흩어 버리다' 혹은 타락한 벼를 바람에 쏘이듯이 '알곡을 고르기 위하여 쭉정이를 바람에 쏘이다(골라내다)'(룻 3:2;사 30:24;렘 4:11) 등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껍데기들, 무가치한 것들을 흩어버리고 실제적인 것, 본질적인 것만을 붙들고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본문은 우리의 삶의 껍질이 아무리 치장되고 복잡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속, 우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 즉 우리의 진심을 바라보고 평가하신다는 사실을 교훈하고 있다 하겠다.

=====139:4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 , 키 에인 밀라 빌르쇼니 헨 예화 야다아타 쿨라) - 직역하면 '한마디의 말도 아직 내 혀에 없을 때에 조차, 오 ! 여호와여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Before a word is on my tongue you know it completely, O Lord, NIV)이다. 이는 하나님의 전지성(omniscience)을 이론적이기보다는 실제적 측면에서 묘사한 표현으로서, 언급된 말뿐만 아니라 마음속의 생각까지도 꿰뚫어 보신다는 뜻이다.

=====139:5
전후(前後)를 두르시며 - 여기서 '두르시며'에 해당하는 '추르'(* )의 일반적인 뜻은 '밀다', '압축하다', '누르다'이다. 이 용어는 대체적으로 성(城)의 포위, 혹은 일정 군대의 포위 혹은 포위당한 결과 피할 길이 없이 막혀버린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상황, 어느 곳으로도 갈 수 없게 되어 버린 상황 등을 가리킬 때 사용된다. 본 시편 저자는 이 용어을 사용하여 앞뒤, 좌우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편재성(comnipresence)을 말하고 있다.
안수하셨나이다 - 하나님의 축복(창 48:14, 17), 보호하심(출 33:22)을 뜻한다고 볼 수 있지만 인간의 행동, 사역 전체가 하나님의 뜻 아래 있을 뿐이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욥 13:21;33:7). 아무리 인간이 자유롭게 행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단지 하나님의 크고 빈틈없는 계획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리고 인생이 누릴 수 있는 진정한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로써만 가능하다.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起動)하며 있느니라"(행 17:28).

=====139:6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 여기서 '지식'이란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저자는 그 지식은 자신에게 너무도 놀라운 것이라고 탄성을 지르고 있는데 이와 비슷한 종류의 정서는 17, 18절;롬 11:33에서도 엿볼 수 있다.

=====139:7
신 - 본절에서 '신'(* , 루아흐)은 '(주의) 앞' (주의 면전)과 평행을 이루고 있으며 권능 가운데 임재해 계신 여호와 당신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하다.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 이 표현은 요나를 연상시킨다. "요나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욘 1:3). 그러나여기서 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기를 원하는 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시선, 하나님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발견하기란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기쁨으로 증거하기 위하여 이 같은 표현을 하고 있다.

=====139:8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 '아마르나 편지'(Amarna Letters)에 보면 편지 발송자가 하늘로 올라가든지 땅 아래로 내려가든지 자기의 목숨은 바로(Pharaoh)의 손에 달려 있다고 기록하고 있는 대목이 있는데, 어떤 학자들은 이 사실 때문에 위의 편지의 저자와 본 시편 기자는 단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권능이 무한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하여 잘 알려진 비유적 화술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을 뿐이라고 평가한다(Anderson). 그러나 본문을 굳이 아마르나 서신과 연결시켜 이해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본 구절을 통하여 저자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손길(88:6) 혹은 언약적 사랑이(6:5;30:9) 미치지 않는 곳으로 묘사되는 음부의 세계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시야로부터 숨겨질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나타내고자 하는 점이다. 이러한 사상은 욥 26:6-9;잠 15:11 등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39:9
새벽 날개를 치며(* , 에사 칸페 솨하르) - 문자적인 의미는 '내가 아침 날개들을 갖는다면'(If I take the wings of the moring, KJV)이다. 여기서 '아침 날개'는 해가 동편에서 솟아오를 때 날개처럼 비쭉비쭉 하늘을 찌를듯 뻗치는 빛 줄기를 가리킨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에 관해 말할 때 바로 이 빛 줄기를 사용하여 표현하곤 했다고 한다. 즉,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빠른 것른 것을 해가 뜰 때 순식간에 하늘을 향해 뻗치는 빛 줄기로 보았던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개념을 빌어서 세상에서 가장 빠른 빛줄기를 타고 신속하게 멀리 간다고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도 지키고 계실 정도로 편재(偏在)해 계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바다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 시편 기자가 살던 팔레스틴 세계에 있어서 '바다'란 말할 것도 없이 지금의 지중해를 가리키며 이 지중해의끝이란 지구 끝을 의미하였다. 이 지구 끝에 가되 가장 빠른 아침 빛 줄기를 타고 순식간에 가서 그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곳에 계신다는 것이다.

=====139: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 원래 '하나님의 손이 인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 돌보심을 뜻한다(23:3;27:11;73:24). 또한 문맥상 하나님의 편재성에 관한 또 다른 표현으로 볼 수도 있겠다.

=====139:11
내가 혹시 말하기를 흑암이 정녕 나를 덮고 - '덮고'에 해당하는 '슈프'(* )의 본래 의미는 '입을 크게 벌리다', '물어 뜯다'이며, 상징적으로 '압도하다', '깨뜨리다', '덮다' 등의 뜻으로 쓰인다. 이 용어는 창 3:15에서는 '상하게 하다'로 번역되었고, 욥 9:17에서는 '꺾다'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흑암'은 역경이나 위험(138:7)을 암시하는 비유적 표현이다(Alexander).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는 어디로 가든지(10절) 또 어떠한 역경에 처하든지(11, 12절) 하나님의 보호 아래 있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139:12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 감 호쉐크 로 야흐쉬이크 미메카) - 직역하면 '심지어 흑암까지도 그에게 있어서는 흑암이 될 수 없다'이다. 인생에게 닥치는 어떠한 어려운 상황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지키고 감찰하시는 눈길을 막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흑암이 우리를 어둡게 만들어도 하나님께는 그렇게 못한다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낙담, 이별, 고통, 손실 따위가 우리에게는 어둡게 보여도 택하신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크고 깊은 섭리의 측면에서 보면 그 어떠한 문제도 더 이상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할 뿐이다(롬 8:28).

=====139:13
장부(* , 킬르요타이) - 문자적인 듯은 '신장'(콩팥)인데 성경에서는 인간의 '내면'을 가리킬 때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성경은 인간의 지각, 감정 부분을 의미할 때는 본 용어를 사용하지만 인간의 해부학적 뼈대 부분, 즉 골격을 의미할 때는 '뼈들'이라는 용어를 따로 사용하고 있다. 본 문맥에서 '킬르요타이'는 감각 혹은 감정의 좌소를 의미한다(7:9;19:27;렘 11:20).
지으시며(* , 카니타) -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적 창조 사역(활동)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가 두 개 있는데, 그 하나는 창세기 1장에서 등장하는 '바라'(* )이고 또 다른 하나는 '카나'(* )이다. 그리고 전자보다는 후자가 적게 사용되고 있다. '카나'(* )는 '소유하다', '세우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그 파생어가 땅 위에 세워진 '막대기', '갈대', 따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 문맥에서는 '세우다', '소유하다'의 의미가 아니라 '창조하다'의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카나'가 '창조하다'의 의미로 사용된 연관 구절 혹은 평해구로는 창 14:19;신 32:6 등이 있다. 하나님께서 저자의 감정의 처소 곧 열망, 열정, 애정 등의 처소를 지으셨다는 것은, 인간의 눈(다른 인간)으로부터는 가리워진 그 마음의 깊은 곳까지라도 그곳을 지으신 그분께서는 면밀히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 테수케니) - 문자적인 뜻은 '보호하다', '짜다'(조립하다) 등이다. 전자는 밀폐된 공간에 넣듯이 보호한다는 의미를 말할 때 사용되며 후자는 여러 가지 물질, 재료를 사용하여 한 가지 물건을 지을 때, 특히 실 따위로 어떤 천을 짜는 것을 의미할 때 사용된다.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가 문맥에 적합하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기자를 만드셨다는 것, 특히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그의 모습, 골격 따위를 형상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모든 생각과 감정들을 이해하실 수밖에 없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의미를 볼 때 본절은 두 개의 동의적 대구로 구성되어 있다 하겠다.

=====139:14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 여기서 '감사하옴'은 '오드카'(* )로서 이것은 어떤 놀랍고 위대한 일에 대한 경탄이 아니라 그일을 통해 드러난 지혜, 거룩, 선하심을 공개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뜻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나를...묘 막측하심이라(* , 노라 오트 니플레티)- 여기서 '노라오트'(* )는 두려움 혹은 경외심을 낳기에 적합한 '경외로운 것들'을 의미한다. 또한 '니플레이티'(* )는 '구별되다'(출 8:23) 혹은 '분리되다'를 뜻한다. 이 같은 문자적인 의미들을 정리하면 본 구절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나는 경이로운 것에 의하여 구별되었다.' 말하자면 기자 자신은 하나님이 피조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비교해 볼 때 그 피조 상태가 너무 기이하고 놀라운 것이어서 다른 피조물과는 구별된, 각별한 경외감을 표해야 할 정도라는 것이다(l am fearfully ...made, KJV,NIV). 한편 영역본 RSV의 경우는 70인역(LXX), 시리아역(Syriac) 그리고 제롬역(Jerome)을 좇아 '당신은 놀랍고...인 분입니다'(thou art fearful...,RSV)로 번역하고 있다.

=====139:15
은밀한 데서 지음을 받고 - 여기서 '은밀한 데'는 비밀스러운 곳, 인간의 눈으로 부터 숨겨진 곳인 '자궁 속'을 뜻한다.
땅의 깊은 곳에서 - 여기서 강조점이 두어져야 할 단어는 '땅'이 아니라 '깊은 곳'이다. '깊은 곳'은 '어둡고, 모호한 곳'의 상징이다. 말하자면 인간의 관측 능력으로는 그 정확한 형태나 상태를 알수가 없는 곳을 일컫는 말이다. 문맥적으로 볼 때 이 구절은 '은밀한 데'와 평행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며 동일한 개념이 반복되었으니 이것은 강한 강조의 의미를 나타낸다.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 라캄) - 문자적인 뜻은 '수놓아진'이지만 좀더 분명한 의미는 '색으로 치장하다', '얼룩덜룩하게 하다'이다. 이것은 여러 색깔의 실들로 천을 짜거나 직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여기서는 인간의 신체를 조직하는 힘줄, 신경들, 혈관들, 근육 등이 인간의 두뇌로는 이해할 수 없는 직조 기술을 통하여 하나의 형태를 이루는 것을 비유적으로 나타낸다.

=====139:16
내 형질(形質)이 이루기 전에(* , 골렘) - 영역본들 중 KJV는 '내 형질이 불완전할 때'(yet being unperfect)로, NIV는 '채 형성되지 않은 나의 몸'(my unformed body)으로 번역하고 있다. '골렘'(* )은 이곳에서만 나오는 용어로 정확한 의미를 규정하기는 어려우나 왕하 2:8에서 '돌돌 말린 망토'를 가리킬 때 그 동사형이 사용되고 있어서 의미 추론을 가능케한다. 이러한 용례와 본 문맥에서 '골렘'을 통해 어떤 존재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할 때 여기서 '골렘'은 아직 미완성 상태로 그 모양을 동그랗게 유지한 채 어머니 뱃속에서 출산을 기다리고 있는 '태아'(보통 임신 8주까지의 아이)로 보는 것이 무난하다 하겠다. 인간의 눈으로는 그 어떤 형태나 모습을 식별하기 어려운 상태인 태아의 때에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형태나 모습을 아셨다고 말함으로써 시편 기자는 인간 생명의 시작 때부터 피조물인 인생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완전한 지식을 다시 한번 찬양하고 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나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 , 알 시프레카 쿨람 이카테부 야밈 유차루웰로 에하드 바헴) - 직역하면 '명령은 되었지만 아직 오지 않은 날들 모두가 당신의 책에 기록되었다'이다. 여기서 '책'이란 원래 건축가가 그의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그 작업의 방향과 계획 따위를 그려놓은 책을 말하지만, '그의 책' 곧 하나님의 책이라고 한 사실과 문맥을 고려할 때 한 생명이 시작되어서 기라갈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고 보면 되겠다. 또한 '날들'이란 한사람, 곧 '시편 기자의 전 인생 기간'을 가리킨다. 말하자면 기자의 모든 형질, 형태가 아직 발달되기도 전 아직 태아 상태에 있었을 때 따라서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에 관한 모든 것이 결정되지도 않았던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셔서 그의 형질과 형태에 관한 것의 수명, 그의 인생에 관한 것을 이미 알고 계셨다는 뜻이다.

=====139:17
주의 생각 - 여기서 '생각'이란 한 생명체가 태어나서 놀라운 방법에 의하여 그 형질이 조성되고 그 형태가 이루어지고 신비하게 영양을 공급받아 태아로 자라나 보호받고 더 성숙하여 완전한 아이로 되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말한다.
보배로우신지요(* , 야크루) - 문자적인 뜻은 '무겁다'이다. 말하자면 '이해하기 힘들다'는 뜻인데 이 단어는 '측량치 못할 것이며'란 의미를 지닌 헬라어 '아녀세류네타'(* )와 동의어이다.
그 수가 어찌 그리 많은지요 - 여기서 '수'란 생각들의 숫자, 즉 한 생명체가 완전한 형질로 자라기까지 동원되는 하나님의 경륜 내용의 다양성을 뜻한다. 이처럼 성도 개개인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보배롭고 다양해서, 성도는 하나님의 그 인자하신 섭리와 계획들을 다 인식할 수 없다. 단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해 감사, 찬양하는 것뿐이다(40;5;사 55:8, 9).

=====139:18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 잠에서 깰 때마다 그렇게 자주 하나님의 임재를 다시 깨닫게 되며 하나님의 생각들에 다시 압도당하게 되고 또 그분의 지혜와 선하심으로 인한 새로운 경이와 찬양을 새롭게 묵상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걸을 때나 잠잘 때, 낮이나 밤이나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그 생각의 끊임없는 깊이와 다함이 없는 충만함을 동일하게 느끼게 되노라.

=====139:19
하나님이여 주께서 정녕히 악인을 죽이시리이다 - 하나님의 놀라운 경륜에 관한 묵상으로부터 의로운 복수가 악인 위에 임하기를 바라는 소원으로 그 내용이 급전되고 있는 부분이다. 얼핏 보기에 이 부분은 우리에게 낯설게 여겨지는데, 그 까닭은 그 내용이 신약의 정신, 곧 원수를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이타적 사상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있어 도움이 되는 것은 63편인데 그곳에도 유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곳에서 저자 다윗의 감정은 좀더 직접적이고 개인적으로 묘사되었다. 당시 다윗은 그의 생명을 위협하던 대적들에게 포위당하여 심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때 반역에 의하여 왕좌로부터 쫓겨난 그는 분노를 표출하면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말미암은 승리를 예상하였었다. 물론 그때에도 다윗은 자신에게 위협을 가하는 대적들에 대한 증오심 자체보다는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열망이 앞섰었다. 그러나 본 구절의 경우 악인의 전복을 위한 그의 기도는 그와 같은 개인적 위험으로부터 야기된 것이 아니라 악(惡) 자체에 대한 증오감 때문에 터져 나온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문맥상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인간의 깊은 마음과 그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행위를 익히 알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바로 그 사실, 하나님이 그 어떤 인간의 마음도 꿰뚫어 보신다는 사실을 계속해서 생각하다가 갑자기 그는 악한 자에게로 생각이 옮겨갔고 그 악한 자의마음까지도 하나님께서 아신다는 확신을 전제로 한 간증적 기도, 하나님께서 악인의 악을 제거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게 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을 토대로 할 때 본문은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 성경의 가르침과 위배되는 구절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지성(全知性)에 대한 확신에서 우러나온, 악의 멸절의 소원을 밝히는 내용이라 하겠다.

=====139:20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 여기서 악인이 멸절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제시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악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악하게 말한다는 것은 하반절에 그 의미가 나와 있듯이 하나님의 이름을 헛되이 칭하는 것, 곧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을 뜻한다(Barnes).

=====139:21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 할로 메사네이카 예화 에스나) - 여기 본절의 '할로'(* )는 외형상으로는 부정 의문사이나 강한 긍정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고 번역하면 '내가 진실로 주를 미워하는 자를 미워합니다'가 되겠다. 어떤 영역본은 '얼마나 내가 ...를미워하는지 !'로 번역하고 있다(NEB). 한편 혹자는 여기 '미워하다'에서 어떤 교제의 단절 개념을 유추하여 본 구절을 저자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과의 교제 단절, 그들과는 분리된 자신을 강조하는 구절로 보기도 한다. 그렇다면 본문은 저자 자신과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은 대적 관계임을 밝히는 내용이 된다. 이 같은 해석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저자의 대적들은 또한 하나님의 대적들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6:5;119:113).
한하지 아니하나이까 - 여기서 '한한다'는 것은 '비통해 한다'는 듯인데 이 '비통해 함'은 앞의 '미워함'과 무관한, 별도로 이해해야 할 용어가 아니다. '미워함' 뒤에 '비통함'이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워함'과 '비통함'은 동시에 수반되는 정서라는 것이다. 주님도 이 같은 정서를 표출하신 바 있다: "저희 마음의 완악함을 근심하사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막 3:5).

=====139:22
내가 저희를 심히 미워하니(* , 타클리트 시느아 시네아팀) - 직역하면 '완벽하게 내가 저희를 미워하니'이다. 악인의 행위 그 어느 것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악에 대해서는 눈꼽만한 관심도 보이지 않으며 또한 그들의 악행에 대한 변명은 한마디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저희는 나의 원수니이다 - '내가 그들을 나의 원수들로 간주하나이다'로 번역될 수 있다(I count them mine enemies, KJV). 이것은 어떤 기준에 비추어 볼 때 그들이 나의 원수라는 뜻이다. 즉 시편 기자의 증오심은 시편 기자의 독선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 신실하신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본 결과로 나온 상대적 정서의 표출이라는 말이다(Anderson).


=====139:23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 하크레니 엘) - 직역하면 '오 하나님이여 나를 면밀히 살펴보십시오'이다. 여기서 면밀히 살핀다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이 어떤 사물을 샅샅이 조사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바로 그러한 판단 앞에 과감히 자신을 내어놓는다는 것은 저자가 조금은 교만한 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갖게 만든다. 그러나 그의 간구는 자신의 무지나 교만한 마음의 증거가 아니라 솔직한 마음일 뿐이다. 좀더 명확한 사실을 알기 위해서는 본 구절 앞 문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기자는 자신과 악인의 전적 분리를 선포한 바 있다. 그런데 그 분리가 단지 외적인 분리가 아니라 내적인 분리, 즉 전능자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도 인정해 줄만한 분리, 그것을 시편 기자는 바라고 있는 것이다.

=====139:24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 여기서 '악한 행위'는 '데레크 오체브'(* )인데 이런 형태의 구절이 성경의 다른 곳에 나오지 않기 때문에 그 의미 규정은 쉽지 않다. 일차적으로 '오체브'(* )는 '형상', '우상'(사 48:5)을 의미하지만, '고통'(대상 4:9;사 14:3)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런 내용들을 근거로 어떤 학자는 '데레크 오체브'를 '우상 숭배'로 번역하며(Gesenius), 또 다른 학자는 '고통의 길'로 번역하기도 한다.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은 '범죄의 길'로 번역하고 있고, 시리아역은 '거짓된 길'로 번역하고 있다. 이러한 역본들의 번역을 종합할 때 본 기도의 내용을 통하여 나타난 기자의 심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잘 살펴보셔서 자신에게 우상 숭배에 참여한 흔적이 있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분노케 한 적이 있는지 보시라는 것이다.
영원한 길로 - 혹자는 렘 6:16에서처럼 이를 '옛적 길'(in the ancient way)로 번역하기도 한다(NEB, RSV 난하주) -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은 개역 성경처럼 번역하고 있다(in the way everlasting, KJV, NIV, RSV). 이 '영원한 길'은 창졸간에 멸망하고 마는 악인의 길(1:6)과 대조된다(잠 4:18).

 

 

 

   본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매우 독특하고 다양한 표현
으로 생생하게 묘사하고있다.  시인은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취급하
지 않았고 구체적으로 삶을 주관하시고 인도하시는 측면을 부각시키고있다. 특히 본시
는 시편가운데서도 걸작에 속하여 '시편 중의 왕관'이라고 불리워지는데, 신앙적 감정
의 깊이와 사상적 탁월성, 표현의 아름다움이 돋보이고 있다.
   본시의 저자에 대해서는 표제에 쓰여져있는 데로 다윗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
떤 학자들은 본시의 내용 중 몇 개의 어휘들과 어절들이 아람어로 되어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포로후 시대의작품으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분명한 근거를 발견하는데 실패했
다.
   또한 본시는 다윗의 왕정 말기에 쓰여진 작품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윗의 모
든 신앙적인 요소들이 집약적으로 표현되어 있기때문이다. 누구보다도 험난한 길을 걸
어왔던 다윗은 고난속에서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 누구보다
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윗은 본시에서 개인적으로 자신이 깨닫고 체험했던 하나님의 다양한 성품을 고백
하고 감사하며 찬미하고 있다. 더 나아가서 창조 사실과 이스라엘애 대한 구원 역사를
더듬어 보면서 하나님의 섭리적 은혜에대해 무한한 감격을 표출하고 있다.
   한편, 본시는 전체적으로 네 개의 연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연은 여섯개의 절로 이
루어져 있다. 본시의 내용은 먼저 여호와의 감찰에대한 다윗의 확신으로 시작된다(1-6
절). 이어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고백과 항복이 드러나며(7-12절), 아울러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창조자 하나님의 이해를 선언하고 있다(13-18절). 마지막으로 하
나님을 거역하고 악행하는 사람들에대한 심판과 영원한 인도를 간구한다(19-24절).
   이러한 내용 속에 특히 1-6절에는 여호와를 주어로 하는 중심 단어 '알다'(      )
라는 표현이 네 번이나 나오고 있다. 게다가  본문1절에서 '감찰하다'(      )라고 언
급된 말이 결론 부분인 23절에서 다시한번 '살피다'(      )라고 반복되고 있다. 이러
한 사실은 본시가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편재(偏在)하심에대해 일관성 있게 설명
하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또한 본시는 일종의조직 신학적인 시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다양하게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과 시인 사이에는 개인적인 관계
로서 '안다'(       )라는 동사가 일곱 번이나 사용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다 알고 계심을 증거한다. 인간이 아무리 은밀한 비밀을 가지고 있
다고 할지라도 불꽃같은 눈으로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없다. 이처럼 하
나님께서 인간을 감찰하신다는 체험하며 살아가는 과정속에서 신학자들도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귀납적이고 직관적인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드러내고있는 본시를 몇 개의 단락으로 구
분하고 각각의 주도적 사상과 특징을 좀더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고자 한다.

        1. 인생을 감찰하시는 하나님(139:1-6)
   자신에 대해서 모든것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에 대해 노래하는 본 단락은 전지하신
하나님께 대한 시인의 감탄과 찬양이 드러나고 있다. 시인은 본연을 통하여 인간과 관
계를 맺은 하나님께서는 모든 생각과 감정에대한 완전한 지식을 토대로 판단하시는 분
이심을 강조한다.
   사실 성경 속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감찰하신다'는 말이 수없이 거듭 되풀이 되고
있다. 하갈이 사라에  의하여 광야로 쫓겨났을 때 하나님의 사자는 하갈을 만나주었고
이때 너무도 감격한 하갈은 여호와의 이름을'감찰하시는 하나님'(창16:13)이라고 불렀
다. 또한 야곱이 자기의 품삼을  열 번이나속인 외삼촌에게 '하나님은 나의 고난과 내
손의 수고를  감찰하셨다'(창31:42)라고 말했으며,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교훈할
때도 여호와를'감찰하시는 하나님'(대상28:9)으로 표현했다. 하나님은 인생의 모든 문
제를 다 알고 계시는 전지 전능(全知全能)하신 분이시다.
   특별히 다윗은 1 하나님께서 그의 앉고 일어섬을 아심, 2 멀리서도 그의 생각을 통
촉하심, 3 그의 길과 눠는 것을 감찰하심, 4 그의 모든 행위를 아심, 5 그의 혀의 말을
아심, 6 그의 전후를 두르시며 인수하심등을 고백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인간의
하루 일과와 삶의  목적, 계획, 욕망 등과 같은 일들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헤아리신다
(33:14). 다윗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해서 함께 호흡하며 눈동자같이 지켜보시는 하나
님의 전지하심을 분명히 인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생각과 인류 역사의 미래에
대하여 완전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며(욥34:21;렘16:17;32:19)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신
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자신의 지식이 대단히 제한되고 불완전한 상태임을 자각하고
완전한 지식을 소유하신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배해야한다(암9:3;습1:12;요17:3).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처하면서도 하나님의 뜻과의도에 무감각하다면 커다란 범
죄를 자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렘4:22;23:24).

        2. 무소부재하신 하나님(139:7-12)
   인생을 모두 감찰하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시인은 이제 우주의 모든
장소에 존재하시는 편재하신 하나님(7-12절)에 대해 노래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하나
님의 품안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본연은 1 하나님의 견고한 주권(7-10절), 2
하나님께 대한 자연의 순복(11, 12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은 본연에서 인간이 아무리주를 피하려고 노력해도 결코 하나님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고 고백한다. 인간이 하늘에 올라가거나 음부에 내려간다 할지라도, 그리고 새
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거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찾아내신다. 여기서 다
윗은 주로 공간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는  것에 대해 묘사했는데, 불꽃같은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하려는 모든 노력이 무의미함을 강조하는 것이
다. 인간의 개인적인 삶은 공간조차 하나님의 영역과 아주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말하는 하나님의 편재(偏在)는 범신론(汎神論)과는 분명히 구
분되는 사상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존재는 만유에 충만하며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하는
무한자임을 드러내는것이다. 다윗은 흑암조차도 하나님의 눈길을 감출 수 없다고 말한
다(11, 12절). 하나님은 빛이시며(27:1;84:11;요일1:5)세상과 어둠을 직접만든 창조주
이므로(창1:3-5)만물을 친히 감찰하실 능력이 있다. 그러므로 불법을행하는 자들은 인
격적인 하나님께서 위선적인 가면과 가식도 완전하게 통찰하시는 분임을알고(욥12:22;
눅12:2;고후5:10)두려움을 느껴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지어 동망하려고 한다면 전혀 불가능한 시도일 뿐이다
(욘1:3-17참조). 우리는 피조 세계의 모든 속성을 다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나와 마
음속의 온갖불순한 동기와 생각들을 숨김없이 고백하고 밝은 빛 가운데서 떳떳하게 살
아야 한다. 이러한 태도는 피조물로서의 인간이 취해야할 유일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
다.

        3. 모태에서 모든 조직을 만드신 하나님(139:13-18)
   전능하시고 우주에 충만하신 하나님에대해 찬송하던 다윗은 이제 모태에서 장부(臟
腑)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해  언급하고있다. 자신의 육체가 하나님의 손으로 창조되었
음을 부각시키는 본연은 1 영혼과 육체의 조성자로서의 하나님(13-16절)2 하나님의 능
력과 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17, 18절)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윗은 자신의 육체를 세밀하게 조직하시고 만드신 하나님의 놀라운 행사를 자각하
고 감사를 표명하고 있다. 특별히 본시의 전체의 기본적인 주제인 하나님에 대한 지식
을 다양한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다윗은 자신이 출생 이전에 하나님의 창조적 작업
의 대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비록부모의 몸을 통해 탄생했지만 하나님만이 유일한 조물
주임을 상기시킨다. 여기에대해 이사야는 토기장이가 진흙을 굽는 작업에 비유하며 설
명하고있다(사29:16). 다윗은 창조주 하나님을 자신의 유일한 소유주로 보면서 하나님
만이 자신의 사고와 행동의 주관자이시며 지배자이심을 거듭 천명한다. 이러한 통찰은
인간의 모든 삶이 하나님의 섭리아래 있음을 고백한 바울의 관점과 일치한다(롬14: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지극히 작은 삶의 현장에서도 철저하게 순종하는
겸허한 자세를 소유해야 한다.
   한편, 시인은 자신의 육체의 각 부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신
묘막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은 초월적인능력을 소유하신 존재이면서도 동시
에 인간의 각부분을 꼼꼼하게 지으시는 섬세한 분이심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다윗은주
의 생각에  대해 보배롭고 모래보다 많아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17,18
절).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베푸신 자비와 긍휼
은 너무나크고 놀랍기에 모두 인식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크신
은총을 모두 인식할 수 없고 오직 감사할 뿐이다(40:5;사55:8, 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의깊은 애정과 관심을 무시하고 온갖 우상을 숭배
하며 생활하고있다. 인간을 신격와하고 과학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미망(迷
妄)에 빠져 제2의 바벨탑을 건설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이렇게 허탄한 사상을 버리고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의 오묘하신 솜씨를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할 것이다(14
절;사43:7;고전10:31;계4:11).

        4. 영원한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139:19-24)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며 인간의 각부분을 지으신 절대자 하나님의 속성을 언급
한 시인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서 악인을 심판하시고의인을 인도하시는 분이심을 밝힌
다. 악인을 증오하며  자신을 성찰하는 시인의 태도가 부각되는 본연은 1 악인에 대한
심판(19, 20절) 2 영원한 인도에 대한 소망(21-24절)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특별히 본연에서는 하나님께대한 시인의 경건한 두려움이 드러난다. 시인은 하나님
의 거룩하심과악을 미워하는 속성을 묵하하며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반성해 보고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간구하고 있다. 시인은 하나님의 공의로움을 생각하며 악인들의 가
증스러운 행실에대해 극한 증오심을 표출시키고 있다. 이러한 증오는 개인적인 원한의
폭발이 아니라 하나님게 대항하는 사단의 세력을향한 총체적 울분의 표현이다. 이러한
의분(義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빛 가운데 거하기를 소원하는 모든자들의 공통적이고
기본적인 마음 자세인 것이다.
   그런데 본연에 이르러 시인이 갑자기 악인에 대한 주의 심판을 부각시키는 데 대하
여 크게 두  가지 의견이 제시되고 있다. 첫째는, 시인이 지금까지의 몽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 왔으며, 자기를 에워싼 원수들의 실체를 직시하게 되었다는 견해이다. 둘
째는, 보배로운 주의 생각을 상고하던 시인이 하나님의 뜻과은혜를 무시하고 피흘리기
를 좋아함8(19절) 헛되어 주의이름을 상칭하는 악인들을 생각하게 되면서 거룩한 분노
가 치밀어 올라 저주와 심판을 선포했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해석모두 가능하지만
특별히 후자가 더욱 타당하다고 볼수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악인들
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는 주장이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특별히 후자가 더욱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시인은 하나님을 조롱하고 무
시하는 악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시인은 여기서 한 단계 더욱 발전하여 자신도  동일한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간구하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하게 생활하겠다는 각오를 표명하게 되었다(24절).
   이러한 시인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도를 훼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
권에 도전하는 무리들에게 느끼는 강렬한 중으심은 순수한 사랑의 변형된 표현이며(마
12:32;막3:29;계16:9), 모든인간은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선한 인도를 간구하며 겸허하
게 생활해야 함(27:11;143:10)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는 본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몇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 2 하나님께서는 우주와인간을 창조하신 신묘막측한 분이시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속성에 부합되는 거룩한삶을 영위해야 한다(출19:5;벧전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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