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크마 주석, 시편 146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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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
할렐루야 - 본 시를 전체 시편을 종결하는 일련의 할렐루야 시편들(146-150편)의 시작으로 보는 근거는 바로 이 용어 때문이다. 본 시편의 용어들 및 구절들은 145편의 그것들과 연관성이 있어 보이며 104편, 118편과도 유사성을 보인다. 이와 같은 시편들은 119 및 150편 등과 함께 후대에 유대 공동체의 매일 아침 기도서의 일부로 사용되어졌다고 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 이 구절의 의미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나는 개인적으로 여호와 찬양하는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103:1;104:1, Anderson).

=====146:2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 아할라 예화 베하야이) - 직역하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를 찬양하겠습니다'이다. 이는 곧 기자의 삶의 주요 목적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이므로 그의 찬양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겠다는 의미이다(34:1;63:4;104:33).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 아잠라 렐로하 베오디) - 문자적인 의미는 '나의 존재가 계속되는 동안 하나님을 찬양하겠습니다'이다. 상반절과 외관상 유사하나 한층 더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곳에 담긴 의미의 핵심은 하나님을 말로만, 입으로만 찬양하지 않고 지정의(知情意)를 포함한 전인(全人)으로써 하나님을 찬양하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므로, 이처럼 전인적으로 바치는 찬양을 귀하게 여기사 받으시는 것이다(삼상 16:7).

=====146:3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 '방백들'에 해당하는 '네디빔'(* )은 원래 '관대한'이란 뜻으로서 '고관', '귀인', '방백'(princes, KJV) 등으로 번역되며, 여기서는 '영향력있는 사람'(Kidner) 혹은 '탁월한 위치에 있는 사람'(Anderson)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겠다. 본 구절은 그 같은 '월등한 존재들'을 포함한 모든 인간에게 신뢰를 두지 말라는 명령을 담고 있다. 본 시편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저작된 것임을 고려할 때 이 명령은 포로 이후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귀환이 하나님이 아닌 인간 특히 바벨론 왕 고레스의 덕분으로 간주할 수 있는 그릇된 경향을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

=====146:4
흙으로 돌아가서(* , 야슈브 레아드마토) - 직역하면 '그의 땅에 거할(돌아갈) 것이다'이다. 여기서 '그의'라는 표현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각도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1) 인간이 그것을 원료로 하여 만들어졌다는 의미에서의 '그의 땅'이다. 인간의 육체는 그것이 생겨난 곳으로 돌아감이 마땅하다(창 3:19). (2) '그의 땅'이란 곧 무덤을 가리킨다고 본다. 이것은 그 시신이 머물 장소가 바로 무덤이라는 의미이다. (3) '그의'라는 표현을 한 인간이 죽은 후에 차지하게 될 유일한 소유라는 면에서 이해한다(Barnes). 왕, 귀족, 군주, 백만 장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불과 한평 남짓한 '그의' 무덤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그의' 무덤은 각 개인 그들의 소유이므로 당분간은 그것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곳 역시 곧 다른 사람의 무덤이 되고 말 것인데, 왜냐하면 묘지 이전이나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묘지 자체가 소멸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심지어 무덤까지도 그것을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도모(圖謀)가 소멸하리로다(* , 아베두 에쉬토노타) - 직역을 하면 '그의 생각(계획)들이 사라질 것이다'이다. 아람어인 '에쉬토노타'(* )는 일차적으로 인간의 계획, 목적들을 가리킨다. 부자나 위대한 인물이 되겠다는 삶의 계획, 집을 세우기 위하여 기초를 놓거나 벽돌을 쌓는 일과 같은 비교적 사소한 일 혹은 책을 저술하거나 여행하기 위해 세우는 계획들까지도 여기 포함한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들, 목적들은 세상을 떠나는 날 무(無)로 돌아가고 만다(눅 12:19, 20). 또한 '에쉬토노타'(* )는 과학 이론, 철학적 이론 혹은 정치적 수완과 같은 현대적 개념의 학문 이론, 정치 술책까지도 포함하는 말이다. 아무리 한 시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이론, 술책(정책)이라고 할지라도 그 주창자가 살던 시대가 지나고 나면 서서히 타파되기 마련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세계적 지적 거장도 내일이면 그 화려한 영예의 화관을 벗게 되는 것이다. 각 영역에 있어서 쉴새없이 급속히 변화하고 있는 이 세대에 있어 사상가, 석학(碩學), 정치가는 잠시 그의 사상, 이론, 정책으로 많은 사람 앞에 나서고 그 이름이 기억되지만 곧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그의 사상, 이론, 정책과 함께 사라지기 마련이다.

=====146:5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 하나님의 축복은 진실된 마음으로 도움을 구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여기서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어떤 의도에서 사용되었는지는 다소 애매하다. 그러나 이 표현이 시온의 노래(the songs of Zion)를 의도적으로 암시하고 있다고 보아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시온의 노래들 중에서 '야곱의 하나님'은 시온에 임재하사 당신의 백성들을 돕고 보호하시는 분으로 종종 묘사된다(46:7, 11;76:6;84:8). 물론 여기서 '야곱'이란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높이는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킬 수도 있다(54:4;144:15).

=====146:6
바다 - 여기서는 창조주 하나님이 창조하신 한 영역의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바다'가 구약 성경에서는 대체로 위험스러운 어떤 요소를 암시할 때 비유적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65:7;욥 26:12 등). 그런가 하면 이방 나라들에서는 흔히 신화적 의미를 지닌 소재로 자주 사용된다(Anderson).
영원히 진실함을 지키시며(* , 하쇼메르 에메트 레올람) - 본절과 후속절에는 하나님의 몇 가지 행사 및 속성을 가리키기 위한 일련의 분사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유독 본 구절의 분사 '솨마르'(* )에만 관사 '하'(* )가 부착되어 있다. 이것은 '하'가 포함된 구절이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한 품성, 곧 하나님이 영원히 진리를 지키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부각시켜 특별히 강조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를 반영한다. 사실 하나님의 본 품성은 본 시편의 중심 사상이기도 하다. 열거되고 있는 다른 품성들은 이 품성을 근거로 하는 것들이라고도 볼 수 있다.

=====146:7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시며(* , 오세 미쉬파트 라아슈킴) - 직역하면 '눌린 자를 위하여 심판을 행하시다'이다. 직역상의 의미로만 볼 때는 하나님의 이 심판이 어떤 심판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본 구절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가 받을 축복의 세 번째 내용인 사실을 고려할 때 이 심판은 세상적으로 억눌리거나 잘못된 대우를 받던 자들을 위한 하나님 편의 공정한 형의 선고 및 형의 집행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역 성경의 번역은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하나님이 그와 같은 심판을 하실 수 있는 이유는 그가 그만한 능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그 같은 심판을 행하는 것이 바로 그의 품성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103:6은 이 같은 사실을 종합적으로 잘 정리해 주고 있는데 원문에 입각해 직역해 보면 다음과 같다:'여호와는 모든 억눌린 자들을 위하여 의와 공정한 심판을 집행하신다.
'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시는 자시로다 - 여기서 '주린 자'란 영과 육간에 주린 자를 가리킨다(107:9). 신약 성경의 '마리아의 찬가'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현을 엿볼 수 있다(눅 1:53). 결국 본 구절을 영적 측면에서 이해하면, 겸손히 참메시야를 기다리던 자들이 그의 도래로 인하여 영적인 만족을 얻게 될 것을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겠다.
갇힌 자를 해방하시며 - 본 구절을 부당하게 고소당하여 옥살이를 하거나 유배당한 자들과 관련시켜 볼 수도 있겠으나, 영적인 압박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자들의 구원을 암시한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68:6;107:10-16;사 42:7;61:1).

=====146:8
소경의 눈을 여시며 - 본 표현은 (1)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이적적 치유의 은총, (2) 주위 사람들로부터의 도움이 단절되고 궁지에 처한 자에 대한 보호(신 28:29;욥 12:25;사 59:9, 10) 혹은 (3) 영적 분별력의 결핍으로부터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사 29:18;42:7, 18;43:8)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겠으나, 문맥상 (2)의 해석이 가장 나을 것 같다. 여호와는 전혀 도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자에게까지도 그 손을 펼치사 문제를 해결하여 주신다. 고대 팔레스틴 주민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조건 속에 있는 자란 가장 친한 친구로부터도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는 흔히 하나님의 징벌을 받은 자로 간주되곤 하였다(출 4:11).
비굴한 자를 일으키시며(* , 죠케프 케푸핌) - 문자적인 뜻은 '꿇은 자를 일으키시다'이다. 여기서 '꿇은 자'란 염려, 근심, 고통 혹은 재앙으로 인해 그 마음이 눌리고 구부러진 자를 가리킨다(145:14).
의인 - 의인이란 도덕적으로 완전한 자를 뜻하지 않고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려고 전심 전력하는 자를 뜻한다.

=====146:9
객...고아...과부 - 이스라엘 사회에서 특별한 보호의 대상이었던 대표적 세 부류의 사람들이다(Perowne). 히브리 율법을 제외한 대부분의 이방 법전들은 세 번째 부류인 '과부'의 유산 상속을 명기하고 있다고 한다. 히브리 율법만 과부의 유산 상속을 명기하지 않고 있는데 이 이유 때문에 히브리 과부들은 그 사회에서 큰 푸대접을 받았으며 고아나 객(나그네)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de Vaux, Baab).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시는도다 - 여기서 '길'은 '계획', '음모'를 뜻하며 '굽게 하시는도다'에 해당하는 '예아웨트'(* )의 문자적인 뜻을 '구부리다', '왜곡시키다', '전복시키다' 등이다. 결국 본문은 악인의 악한 계획, 음모는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는 것을 의미한다. 악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 과정 안에 있는 것이며, 이는 의로운 율법의 시행에 따른 필연적 결과의 일부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Perowne).

=====146:10
하나님은 영원히 대대에 통치하시리로다 - 고대에 있어서 왕이 수행한 주요 기능들 중의 하나는 정의 실현과 안녕의 유지였는데 위대한 왕이신 여호와야말로 비교할 상대가 없는 정의 실현과 축복의 수여자이시다. 이러한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특징은, 인간적 의지의 틀 안에서는 효과적으로 책임을 수행할 수 없는 모든 인간 왕들의 불완전성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하겠다.
할렐루야 - 본 시편은 시작과 마찬가지로 '할렐루야'로 마치고 있는데 이러한 구조는 본 시편에서부터 150편까지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본시는 세 번째 '할렐시편'(146-150)의 첫 번째 것이다. 시편에는 '할렐루야'로 시
작되고 끝나는, '할렐 시편집'들이 세 곳에 수집되어 있는데, 나머지 두 곳은 '이집트
할렐'이라 불리는 113-118편과 '대 할렐'이라 불리는136편이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드러나는 여기의 시편들은 회당에서 아침예배 때마다 145편에 이어 낭송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시편 전체의 결론부(145-150편)에 해당하는 본시는 여호와께 대한 신뢰를 장황하게
나영하지 않고 단순명료한 문체로 표현함으로써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스
라엘 지혜 문학의 오랜전통에  있어서 핵심적 사상을 이루어 온 훈계가 발견되고 있다
(예컨대,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3절).
   한편, 본시의 저자에 대해 히브리 원본과 갈대아역에는 특별한 언급이없다. 그러나
70인역(LXX)과 벌게이트역(Vulgate)에서는  학개와 스가랴의 시라고 명명되었다. 만약
우리가 이 견해를 수용한다면 본시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에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더구나 본시는  포로기 이후 시대에 만들어진 시편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보다 이전 시대의 시편으로부터의 인용이나 암시가 문체상의 한 특징으로 발견되고 있
다(2절과 104:33;3절과 118:9;7절과 103:6;8b절과 145:14). 그러므로 우리는 아닥사스
다가 유다 백성의 원수들의 말을 듣고 예루살렘 성벽재건의 명령을 철회한 당시를 (스
4:1-24)본시의 저작 시기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본시는 운율적으로 볼 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즉 네절로 된 짧은 음절로 시작하여
(1-4절) 여섯 절로 된  긴음절로 끝나고있다(5-10절).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은혜에 대
한 찬미가 울려 퍼지는 본시는 평생 동안 찬양하며 살아가겠다고 고백하는 전반부(1-4
절), 천지를 창조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는 여호와에 대한 찬양이 드러나는 후반부(5-10
절)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으 본시를 회당 예배의식에 관련지어 좀더 세분하여
보면 1 여호와께 대한 찬양에로의 부름(1,2절), 2 제사장직 권명(3, 4절), 3 제사장적
축복(5절), 4 회중의 신앙고백(6-9절), 5 결론적 찬양(10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제 본시를 보다 상세하게 분석, 음미해 보도록 하자.
   첫째, 시인은 여호와께대한 찬양을 스스로에게 서원한다(1, 2절), 시인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을 요청하는 말로써 시를 시작한다(103:1,22;104:1, 35). 이 요구는 그의 영
혼을 사로잡고 있는 고양된 감정의 표출이다. 시인은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자하심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자가 압도당하고 영혼이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믿음으로 여호와를 뵈옵고 그분을 찬양하면서 이
지고의 상태에 머물겠다고 서원한다. 시인에게있어 가장 소중한 재산은 바로 하나님께
대한 사심없는 철저한 헌신다.
   둘째로 시인은 백성들이 하나남을 의지하도록 권면하다(3, 4절). 믿음과 헌신은 필
연적 으로 또 다른 책임을 부여하게된다. 하나님게 대한 신뢰가 이루어내고 있는 하아
복감의 한가운데서 시인은 한 인간이 타인에대해 갖는 책임을 의식하게 되었고, 이 같
은 의식은 본시에 제사장적 훈계 내지는 충고의 성격을 부여하게 되었다. 먼저 시인은
인간의 힘을 의지하지 말라고 경고한다(3절). 여기서 방백이란말은 일차적으로 일반적
인 의미로서 권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을 가리킨다. 물론시인이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
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어떤 지도자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인간의 힘과 권력과 능력을 과신하지 말라는 이 경고는 인간의 무상함과
무력함에 대한 시인의 인식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4절).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때, 그리고 죽음에의 전망과 맞딱뜨리게 될 때 인간은 자신
의 존재가 직면하고 있는 명백한 한계를 인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같은 의식은
생의 곤경에 처한 인간만이 느끼는 열등감의 발로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표현
되고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대해 솔직할 수 있는 용기를 냉정한 시각으로 그대로 바
라보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실체와 직면하게 될 때, 인간은 자신의 무기력을 느끼
고 적나라한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설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여기서 시인이 사람을
의지하지 말라고 강조한 이유는 이스라엘이 애굽(사30:1, 2;36:6)과 앗수르(왕하16:7)
를 의지한 결과로 멸망을 당했기 때문이며 또한 포로생활에서 귀환할 당시에 스룹바벨
이나 또 다른 방백들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는 백성들의 무지 몽매함을 깨우치기 위해
서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흙에서 나와서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의  권력이나 명예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살아계신 하나니만을 의지하라는
시인의 교훈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전3:20;눅12:16-21).
   셋째로 시인은 제사장적 축복을 선언한다(5절). 시인은 인생을 의지하는 행위가 어
리석은 일임을 힐책하면서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된  축복과 소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고있다. 여기서는 특별히 도움을 주시며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야
곱의 하나님으로 표현했다. '야곱의 하나님'은 시편 후반부에서 자주 이스라엘의 하나
님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76:6;81:1,4;94:7;114:7;132:2, 5). 시인은 참으로 도
움을 줄 수 있는 이는 한 분, 오직 언약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만이 참된 보호자요 인도자가 된다는 사실을 믿고 신뢰하자면
인간적 자만을 모두  버리고 자신의 전적인 희망을  오로지 하나님에게만 두어야 한다.
그와 같은 단호한 태도를 견재해야만 인간은 온갖 종류의 세속적 근심과 두려움으로부
터 자유로울수 있다. 시인이 의지하는 하나님은 '야곱의 하나님'이며, 동시에 '자신의
하나님'이다. 이와같은 방법으로 시인은 자신의 선조들과 연합하여, 하나님께 대한 위
대한 신앙의 전통 속에서 믿음의 공동체와 연대(連帶)하고 있는 것이다(22:4). 하나님
께서는 이처럼 당신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언제나 시공을 초월하여 보호와 구원을 베푸
신다(144:1-4).
   넷째로, 시인은 하나니만을 신로할 수 있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밝히고있다(6-9절).
   1 여호와는 진실하시다(6절). 진실하다는 말은 거짓이없고 속임수가 없으며 사람의
신분에 따라  차별하지 않는 공정함을 의미한다. 히브리어의 '진실'(에메트)이란 말은
'아멘'이란 말과 같은 어의(語義)를 지닌 명사이다.이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어느
것 하나도'아멘'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진실하다'는 말로 표현한 것으로 보여진
다.
   2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 있는 근거는 인간들에 대한 그분의 따뜻한 관심 때문이다.
7-9절에서는 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관심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가 압박 당하는  자를 위하여 공의로 판단하신다. 하나님의 진실은 공정성에 있다.
어느 사람에게난 억울함이 없게 하신다.
   나  주린 자에게  식물을  주신다. '주는  때를 따라 저희에게  식물을 주신다'(시
145;15)고 한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호소를 들어 주신다. 하나님은 주린 사람에게
만족을 주신다(107:1:53)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른시인은 '젊은 사자가 주리는 일이
있어도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자는 모든 것으로 만족하리라(34:10)고 했다.
   다 갇힌  자를 해방시키신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분이므로 인간의 실수와 악의에
의해 감금되는 사람을 해방시켜 주신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갇힌자를 해방시킨 사건을
많이 볼 수 있다. 메시야의 사명도 억울하게 신약에서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뜨게 하신
기적에서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반드시 육체적인 의미만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마
땅히볼 것을 보지 못하는 소경의 문도 열어서 보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영적 세계에 대
한 이해를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링 비굴한자를 일으키신다. 마리아의 찬가에서 메시야가 이 일을 하실 것이라고 노
래하엿다(눅1:52). 하나님은 인간을 결코 멸시하지 않으신다. 사람을 구별짖는 표준이
사람들의 사회에는 많지만, 하나님께는 그런 것이 없다.
   이상에서 시인은 하나님께서 연약하고 억눌린자들을 돌보시는 분임으로 전폭적으로
신뢰할 수 있다고말한다. 우리는 아무리 험난하고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라도 진실하시
고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극복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로, 시인은 하나님의 통치는 영원하시다는말로 본시를 끝맺는다(10절). 인간
에게는 영원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다. 모든것이 시한부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인간에
게는 영원이란 말을 쓰지 안니하고 하나님에게만 이 말을 쓴다. 시인은 오직 하나님의 통치만이 시간을 초워하여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가 영원하다고 할 때 그것을 단순히 시간적인 개념에서만 이해하는 것을 부족하다. 오히려 그분의 통치는 공정하고 의로우며죄와 슬픔이 없는 이상적인 형태로 행해지기 때문에 아무리 그통치가 계속되더라도 사람들은 환영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확대하는 것이 더욱 나을것 같다. 시인은 성삼위 하나님과 완벽한 교제를 이루는 풍요로운 영원을 내다보며 시온에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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