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로 왕의 몰락 (에스겔 28:1-10)
앞장에서 두로를 취급하였으나, 이제는 두로의 왕이 무리들 중에서 선택된다. 여기에 그에게만 전해진 말, 곧 "여호와로부터 그에게 전달된 전언이" 있다. 에스겔 예언자는 그 왕이 청종하든지 보류하든지 간에 그것을 그에게 전해야 한다.
Ⅰ. 에스겔은 왕에게 그의 교만을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의 백성이 교만하고(27:3 참조), 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되리라. 다음을 살펴보자.
1. 그의 교만에 대한 에스겔의 표현은 어떠했는가? "그의 마음이 들렸도다" (2절)고 했다. 두로 왕은 자신을 크게 믿었으며, 그 자신이 충분하다는 억견으로 부풀어 올라, 그 주위의 모든 사람들을 멸시하였다. 마음에 가득찬 교만 때문에 그는 "나는 신(神)이라" 고 말했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말했을 뿐 아니라, 감히 내어놓고 그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도 왕들을 가리켜 "그들은 신들이라" (시 82:6)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왕들이 자신을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홀로 하나님" 이시며 자기의 영광을 다른 이에게 넘기려고 하지 않으시는 분에게 큰 모욕이다. 세상이 잦기를 만드신 하나님께 의존하듯이, 두로 왕은 두로성이 필연적으고 자기에게 의존해야 하며, 그 자신이 하나님처럼 독자적이며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처럼 풍부한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비할 바없는 권위를 가진 것으로 생각했으며, 자기의 특권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절대적이며, 자기의 말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율법이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예에 도전했고, 신으로서 찬미되고 추앙받기를 기대하였으며, 사후에는 다른 영웅들 가운데서 세상에 대한 위대한 은인으로 받아들여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처럼 바벨론 왕도, "지극히 거룩한 자" 와는 아니지만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비기리라" (사 14:14)고 말했다. "나는 힘센 하나님이다. 따라서 나를 거역할 것이 없으리라. 당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다. 나는 하나님처럼 높이 앉아 있으며, 내 보좌는 그의 보좌와 동등하다. Divisum imperium cum Jove Casear habet - 즉 가이사가 여호와의 지배권을 나눠 갖는다. 나는 하나님처럼 안전하게 앉아 있으니, 바다 중심에 안전히 앉았고, 하늘 높이 계신 분처럼 위험이 도달하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져 앉아 있다."그는 보좌 주위에 있는 전사와 호위병을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군처럼 위엄있고 강력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비천함과 죽을 운명을 알고 언제어야 한다. 또한 그에게 꼭 말해야 할 말이 있다. 곧 "너는 사람이요, 신이 아니다. 의존적 피조물이요, 죽을 피조물이라" 는 자명한 진리이다. 이것은 결국 그에게 들려질 것이다. 너는 "육체요, 영이 아니니라" (시 31:3). 인간은 자기들이 "인간에 지나지 아니하는 줄" 을 알아야 한다(시 9:20). 가장 위대한 지혜자, 가장 위대한 주권자들, 가장 위대한 성도도 "인간이요 신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동시에 하나님이며 인간이셨다. 그러나 두로 왕은, 비록 그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재산의 도움으로 강한 지배권을 유지하였으며, 비록 그가 조공국과 조공물을 궁정으로 가져오게 하되 마치 그들의 그의 제단에 바쳐진 희생 제물처럼 매우 헌신적으로 바치게 하였으며, 또 비록 그가 조신들의 아첨을 받았으며, 시인들에 의해 신으로 읊어졌으나, 결국 그는 "인간일 따름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언제다. 그러나 "그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한다." "너는 스스로 신인 체하며 자신을 하나님과 비교하여, 네 자신을 그와 같이 현명하고 강하고 세상을 통치하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 우리의 첫 조상의 파멸이었으며, 그들 안에서 또한 우리도 파멸한 것이다(창 3:5). 그리고 아직도 인간으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신의 지배자로 설정하도록 하며, 자기들이 의도하는 바를 행하도록 하며, 자신의 목적에 따라 살게 하며, 자신의 편의를 즐기도록 하는 저 타락한 본성은 "자기들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같게" 여기며, 그의 특권을 침해하며, 그의 면류관의 꽃을 갈취한다. 이는 벌받지 않을 수 없는 위선이다.
2. 우리는 여기서 그가 자랑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1) 그의 지혜이다. 두로의 왕은 아마 천부적으로 좋은 자질을 갖춘 자로서, 당시 유행하던 모든 부문의 학문을 숙달한 철학자였거나 적어도 정치가로서 그 나라의 정사를 집행하는 데 매우 기민하였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다니엘 보다 더 지혜롭다" 고 생각했다(3절). 다니엘이 비록 젊은이에 불과하지만 그 뛰어난 기도 때문에 기념되었음을 앞에서 발견하였다(14:14). 여기서는 다니엘이 이 세상사를 경영하는 데 있어서 나타낸 그의 명철로 유명하며, 위대한 학자요, 정치가이며, 무엇보다도 위대한 성도임을 본다. 그러나 왕이 아니라 비천한 포로였다. 그와 같은 외부적인 불리한 조건아래서도 다니엘의 광휘가 찬란하여, "격언에까지 현명한" 자로 등장하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두로 왕이 스스로 신이 되려고 꿈꿀 때 그는 내가 "다니엘보다 지혜롭다" 고 말한다. 또 "내가 깨닫지 못할 만큼 은밀한 것은 없다" 고 한다. 아마 그는 솔로몬처럼 그 주위에 있는 자들 모두에게 "질문으로써 나를 시험하라" 고 도전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그들의 모든 수수께끼를 잘 풀었으며, 그들 중 누구도 그를 당황하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로 왕은 아마 궤계를 안출해 내고 이웃 왕들의 계획에 뛰어드는 데 있어서 성공적이었으며, 따라서 스스로를 전능한 것으로 생각했으며 어떠한 생각도 그에게 보류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나는 신이라" 고 말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한다" 는 사실을 명심하자. 많이 알고 있으면서 그 지식은 여전히 부족하여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란 어려운 일이다. "다니엘보다 지혜로왔던" 자는 계명성(Lucifer - 즉 사탄) 보다 더 교만하였다. 그러므로 지식이 있는 자들은 겸비하기를 배워야 할 것이며, 스스로 겸손함을 입증해야 할 것이다.
(2) 그의 부를 자랑했다. 그의 지혜가 그를 부요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그가 자기의 지혜에 의하여 자연이나 정치의 신비를 탐구하여, 현재보다 더 나은 정부를 설계한다든지, 더 나은 법률을 제정한다든지, 학문 세계의 관심을 진작한다든지 하였다는 말은 없다. 단지 그의 "지혜와 총명은" 그에게 있어서 "장사" 에 사용되었다. 유다의 몇몇 왕들이 "농사를 좋아하였듯이" (대하 26:10), 두로 왕은 장사를 좋아하였으며, 그것으로써 "재물을 더하였고, 금, 은을 곳간에 비축하였다" (4,5절). 이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지 보라. 그들은 돈을 모으는 방법과 옳건 그르건 간에 재물을 늘리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가장 현명한 자들로 추앙된다. 그러나 참으로 "저희의 이 행위는 저희의 우매함이로다" (시 49:13).
두로 왕의 우매함은 바로 이것이다.
[1] 그는 그의 부를 더하되 자신을 위했으며, 하나님의 섭리를 위하지 않았다. 즉 "그에게 재물을 얻을 능을 주신" 분을 기억하지 않았다(신 8:17, 18).
[2] 그는 부자였으므로 자신이 지혜로운 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매자도 재물을 가질 수 있다(전 2:19). 세상을 관찰해 볼 때 흔히 그러한 경향이 있다.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다" (전 9:11).
[3] "그 재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교만하였다." 즉 그로 하여금 그토록 오만하고 안일하게 하였으며, 그토록 무례하고 건방지게 하였고, "그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 같은 체" 하게 하였던 계기는 재물의 증가였다. "죄인" 은 세속의 위엄과 권세를 많이 누리면 "자기를 가리켜 하나님이라 한다" (살후 2:4). 따라서 이 세상에서 부유한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책망하시는 바를 들을 필요가 있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 (딤전 6:17).
Ⅱ.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생각은 몰락의 앞잡이다." 그러므로 이제 자신을 하나님과의 경쟁자로 살았던 그 기만에 대한 정당한 징벌로서 그에게 다가 오고 있었던 저 멸망과 몰락을 에스겔은 포고해야 한다. "네가 신인 체하였으므로(6절), 너는 인간으로서도 오래 살지 못하리라" (7절). 여기서 살필 내용은,
1. 그의 멸망에 쓰인 도구이다. "내가 외인을 거느리고 오리라." - 곧 두로와 무격하던 열국과 열상 중에서 찾아 볼 수도 없었던 갈대아 사람이다(27장). 만일 서로 통상하던 나라들 중 어느 나라가 그에게 닥쳤더라면, 그들은 (옛 교제 때문에) 그에게 동정을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외인들은 동정을 베풀지 않으리라. 또 그들은 현명한 두로 왕까지도 알아듣지 못했던 "외국어" 를 쓰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열국의 강포한 자들" 이다. 그것은 많은 나라들로 구성된 군대였으며, 당시에 그 힘과 용맹에 있어서 가장 강한 군대였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휘하시사, 두로 왕에게 덮치도록 하리라.2. 그 멸망의 잔혹성이다. "그들이 칼을 베어 네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치리라" (7절). 즉 그가 자기 지혜의 아름다움과 그 산물로 영화롭게 여기던 모든 것을 치리라.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가 자랑으로 삼던 것을 노획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근거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두로의 왕의 궁정, 보고, 성읍, 해군, 육군, 그는 이 모두를 자기의 광채로서 영광스럽게 여기며, 이들이 자기를 지상의 신으로서 뛰어나고 영화롭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용맹한 원수는 이 모두를 더럽힐 것이며, 손상시킬 것이며, 흉칙하게 만들 것이다. 두로왕은 그것들을 신성불가침한 것, 곧 아무도 감히 건드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정복자들은 그것들을 범상한 것으로 여겨, 그 광채를 망쳐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소유물이 어떻게 되든 간에, 그의 인격은 확실히 신성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도 않다(8절). "그들이 너를 구덩이에, 곧 무덤에 빠뜨리리니, 너는 죽게 되리라." 그리고,
(1) 그것은 명예로운 죽음이 아니라 굴욕적인 죽음이리라. 그는 죽을 당시 치욕에 처할 것이므로, 죽은 후에는 신격화되는 것을 포기하게 되리라. 그는 "바다 가운데서 살육당할 자같이" 죽으리라. 즉 죽음에 임하여 아무 명예도 얻지 못한다. 시체가 즉시 배 밖으로 던져져서 아무 의식이나 특출한 행사도 없이 고기밥이 되어버린 자들과 같이 죽으리라. 두로는 "바다 가운데서 멸망당할" (27:32) 터였는데, 두로의 왕도 그 백성보다 더 나은 운명을 맞이하지는 못하였다.
(2) 그것은 행복한 죽음이 아니라 불행한 죽음이리라. 그는 "할례받지 않은 자의 죽음" 에 처할 것이다(10절). 하나님이 모르는 자들처럼, 그와 계약을 맺지 않은 자들처럼, 그의 진노와 저주 아래서 죽게 되리라. 또 그의 죽음은 "죽음들" 이니, 이중적 죽음으로써 현세와 영원에서, 몸과 영혼에 있어서의 죽음이다. 그는 "둘째 죽음" 에 처할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불행하게 죽는 것이다. 여기서 두로의 왕에게 선고된 죽음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해 비준되었다. "내가 말하였음이니라. 나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고 그는 말씀하신 것을 행하시리라. 아무도 그것을 반박할 수 없으며, 그도 그것을 취소하지 않을 것이다.
3. 이것은 두로 왕이 자기는 하나님이라고 자처했던데 대한 효과적인 반증이 될 것이다(9절). "정복자가 네 가슴에 칼을 대고, 네가 전혀 도망할 길을 찾아 볼 수 없을 때, 네가 하나님이라고 하겠느냐? 그때에 너는 지금과 같이 스스로를 자부하며 자신하겠는가? 아니다. 너는 죽음의 위압에 눌려, 그 두려움에 떨며, 네가 신이 아니라 약하고 보잘 것 없으며 전율하며 죽어가는 인간에 불과하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너를 살육하는 자 앞에서 (하나님의 손 안에서 그리고 그가 쓰시는 도구 앞에서), 너는 사람뿐이요 신이 아니다. 전혀 저항할 수 없으며 스스로 도울 수도 없으리라."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라. 그러나 너희는 사람같이 죽으리라" (시 82:6, 7). 하나님과 대적하는 자들은 여러모로 그들의 자격을 상실한 것이다. 우리는 결국 죽음의 손아귀에 빠지게 되면 죽음에 의해서 우리가 사람에 불과한 줄을 알게 된다.
두로 왕의 패망에 대한 애가 (에스겔 28:11-19)
두로의 파멸에 대한 예언 이후에(26장) 애절한 통곡이 따라왔듯이(27절), 두로 왕의 파멸이 예언된 후에 애곡이 뒤이었다.
Ⅰ. 이것은 대체로 당시에 두로를 통치하던 왕에게 말한 것으로 이해된다(2절). 그의 이름은 "에트바알" 혹은 "이토발루스" (Ethabaal, Itholaus)이었다.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ciculus)는, 그가 느부갓네살이 두로를 멸망시켰을 당시의 왕이었다고 했다. 그는 모두 외적 조건에 있어서 성공한 인간이었던 듯하며, 매우 위대하고 유명한 인물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그의 허물이 그의 파멸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주석가들은 이 애가에는 문자적 의미 이외에 은유가 숨어 있으며, 바로 그 교만에 의하여 스스로를 망쳐 범죄하였던 천사들의 타락을 암시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비적 의미를 갖고 있는 본문들이 흔히 그렇듯이) 여기 있는 몇몇 구절들, 주로 그의 상업을 말한 구절들은 "하나님의 성산에 있는" 천사들을 지칭한다. 그러나, 그 안에 어떤 신비적 의미가 있다면(아마 있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을 아담의 타락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겠다. 본문에는 그런 것도 나와 있는 듯하다(13절). "네가 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으며, 네가 지음을 받던 날에 있었다. "
Ⅱ. 혹자는 "두로의 왕" 이란 말은 전 왕족을 의미하며, 이는 또한 이전 왕들을 포함하며, 두로 왕 히랍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통치자는 "방백" 이라고 불리웠다(2절). 그러나 여기서 애곡하는 대상은 "왕" 이라고 불리운다. 두로 궁정과 그 왕들은 오랜 시대를 통해 유명했었다. 그러나 죄가 그것을 파멸시킨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두 가지를 관찰할 수 있다.
1. 두로 왕의 명성이 어떠하였는지를 본다. 그는 호화찬란하게 살았다고 했다(12-15절). 그는 물론 하나의 인간이었으나, 본문은 그가 상당한 인물, 당대의 용자라고 말한다.(1) 그는 다른 사람들을 크게 능가하였다. 히람과 다른 두로왕들은 자기들 당대에 그렇게 행하였다. 그리고 이 때에 재위 한 왕도 그들 중 누구못지 않았다. "너는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웠 도다" 고 했다. 인간 본성의 능격과 인간 생활의 번성은 그에게서 최고의 도에 달했던 듯하다. 그는 인간의 이성이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자로 또한 이 세상의 부와 그 쾌락이 즐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자로 숭배되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양자가 행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을 볼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총괄하였다" 고 할 수 있으니, 아무 것도 부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한 인간이며, in suo genere - 즉 그의 부류에 있어서는 온전한 인간이다.
(2) 그는 무죄 상태의 아담처럼 현명하고 행복한 듯하였다(13절). "너는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었다. 너는 일생을 천국에서처럼 보냈고, 좋은 음식과 눈에 즐거운 것을 모두 충분히 즐겼으며 아담이 그랬듯이 네 주위에 있는 모든 자들을 완벽하게 통치하였다. "두로 왕의 웅장함에 대한 실례는, 그가 해외 무역에서 얻은 보석의 분량에 있어서 다른 모든 왕을 능가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온갖 보석으로 단장하였도다." 보석의 다양한 종류가 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종류의 보석을 그처럼 다량 소유하고 있어서, 그의 보석장에 넣어둔 것과 왕관에 장식한 것 외에도 그의 옷을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그 보석들이 그를 단장하였다. 아니 그는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였었도다" (14절). 즉 불처럼 빛나고 불꽃을 튀기는 듯한 이 보석 속에 있었다. 그의 방들은 어느 정도 보석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보석 속에서 거닐며, 스스로를 마치 하나님처럼 "불꽃" 에 비유된 저 많은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영화로운 자로 착각하였다. 그리고, 그가 보석을 매우 좋아하며 보석을 천사처럼 찬란한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자신을 찬미의 대상으로 삼아 하나님처럼 위대한 자로 생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여기에 아홉 가지 종류의 보석들 이름이 제시된다. 이는 모두 대제사장의 에봇에 달렸던 그대로이다. 아마 그것들의 이름이 나열된 이유는 그가 교만 때문에 매우 어리석은 쾌락에 빠졌고, 그의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것을 자주 말하곤 하였다는 데 있다. "이는 매우 가치가 있으며, 바로 그 장점인 보석이다." 이처럼 그는 그의 허영심 때문에 비난을 받는다. "황금" 은 맨 끝에 언급되며, 다른 보석보다 가치가 매우 열등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는 거기에 따라서 그것을 언급하곤 했다.
그로 하여금 그의 궁정을 천국으로 착각하게 한 또 하나의 근거는 기이한 음악으로써, "소고와 비파," 즉 손으로 다루는 악기와 현악기였다. 이것을 만든 "솜씨" 는 매우 뛰어났으며, 그를 위해 준비되었다. "너를 위해" 예비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온 대명사는 여성형이므로, "두로를 위하여" 란 뜻이 될 수 있다. 혹은 왕이 그와 같은 것들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 여성적이었음을 뜻한다. 그것들은 "그가 지음받던 날에," 즉 태어났을 때, 왕이 되었을 때 마련되었다. 그것들은 그의 생일 혹은 그의 대관식 때의 환희를 기념하려는 목적으로 마련된 것이리라. 그는 이것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으며, 그의 왕궁을 구경하러 오는 자들 모두에게 그것들을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3) 그는 성육신한 천사처럼 보였다. "너는 기름 부음을 받은 덮는 그룹임이로다" (14절). 즉, 그는 스스로를 자기 백성을 지키는 천사로 여겨, 찬란하고 강하고 신실하며, 또 이런 직책에 지명되었고, 그럴 자격이 있는 자라고 생각하였다. 기름 부음을 받은 왕들은 그 백성들에게 기름 부음을 받은 그룹처럼 보여져야만 했다. 즉 그들의 권능의 날개로 백성들을 덮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그러할 때에, 하나님께서도 그들은 인정할 것이다. 그들의 직위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하였다. "내가 너를 세웠도다." 혹자는 본문에 에덴이 언급되므로, 이것은 동쪽에 에덴을 지키기 위해 세워진 그룹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창 3:24).
두로 왕은 천사가 자신의 직책을 감당하듯이 자기 성읍을 모든 침입자들로부터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혹은 이것은 지성소에 있는 그룹들을 지칭할 수도 있다. 그 그룹들의 날개는 법궤를 덮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그런 그룹들 중의 하나님처럼 찬란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4) 왕은 영광과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의상을 입고, 대제사장처럼 찬란한 광휘 중에 나타났다. "네가 하나님의 성산에 있었으니, 그 성산 위에 세워진 성전의 제사장처럼 행세했다. 마치 일찍이 대제사장이 보석으로 꾸며진 성전을 거닐며, 가슴과 어깨에 보석으로 장식된 옷을 입었을 때 행하였던 것과 같은 위엄과 권위를 지니고 위대하게 보였다(대하 3:6). 거기서는 그가 화광석 사이에 왕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처럼 두로의 왕은 영화롭도다. 적어도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한다.
2. 이제 두로 왕의 파멸이 어떠하였으며, 그의 영화를 더럽히고 그의 모든 명예를 티끌 위에 던졌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살피자. "너는 네 모든 길에 완전하였다(15절). 너는 모든 일에 있어서 성공적이었으며, 모든 것이 잘 이루어졌다. 나는 네가 지음을 받던 날 네가 등급하던 날부터 허물이 네게서 발견되던 날까지 유명할 뿐만 아니라 찬란한 명성을 누려왔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을 망쳤다." 이는 아마도 타락한 천사들과 우리의 첫 조상들의 한탄할 만한 경우를 암시하는 것인데, 그 양자는 "모든 길에 완전하더니 마침내 불의가 드러났다." 그리고 불의는 한번 "그에게서" 발견되자, 계속 증가하였다. 그는 나타난 바대로 점점 더 나빠졌다(18절). "네가 네 성소를 더럽혔도다. 너는 네가 거룩하다고 생각하였던 모든 것의 이익을 잃었으며, 성소에 있어서처럼 그 안에서 너는 피난처를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너는 이를 더럽혔으며, 네 많은 죄악에 의해 노출되었다." 이제 살필 내용은 이러하다.
(1) 두로 왕의 파멸을 초래한 것은 어떤 불의였던가?
[1] 그것은 그와 그 백성의 "불의한 무역" 이라고 했다(18절). 그런데 그것 때문에 비난은 왕이 받는다. 그가 그것을 무역하였고, 그들에게 좋지 못한 본보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네 무역이 풍성하므로 네 가운데 강포가 가득하였고," 그래서 "네가 범죄하였도다" (16절). 그 왕은 상업에 깊이 관여하였고, 그 이득에도 깊이 관심한 나머지, 정의를 시행하고 억울한 희생자를 시정하며 폭력(강포)을 막는 일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복잡다단한 사업상 많은 잘못이 범하여졌다. 그리고 그는 거래에 있어서도 자기 권세를 사용하여, 그와 거래하는 자들의 권리를 침해하였다. 세상에서 많은 일을 하는 자들은 많은 실수를 범할 큰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리고 몇몇 사람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을 다루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장사를 은밀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매우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불의의 신비로 만든다.
[2] 그의 오만과 허영이다. "네가 아름다우므로 마음이 교만하였도다(17절). 너는 네 자신과 네 자신의 그림자를 사랑하였다. 이리하여 네가 영화로우므로 네 지혜를 더렵혔으니 뽐내는 일과 영화로운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이 일에 열중되었고, 그것이 그의 눈을 현란하게 하였으며, 그가 그의 길을 보는 것을 방해하였다. 그는 스스로 위대하다고 뽐내는 듯하였으며, 그로 인해 그는 지혜와 명성을 빼앗겼다. 그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바보" 가 되었다. 환락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지혜를 넘겨주고, 헛된 기분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참된 이득을 상실하는 자들은 자신에 대해 손해보는 장사를 하는 자들이다.
(2) 이 불의가 그에게 가져온 파멸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자.
[1] 그는 작위를 잃고 궁궐에서 쫓겨났다. 그는 그 궁궐로 그의 낙원과 성전을 삼았다. "내가 너를 더럽게 여겨 하나님의 산에서 쫓아내리라" (16절). 그의 왕관은 "산" 처럼 높아서, 그를 타인들보다 높게 하였다. 그의 왕권은 "하나님의 산" 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부여하신 것이며, 거기에 다소 성스러운 무엇이 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권세를 남용하여 속된 자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폐위되어 추방당하였다. 그는 쓰고 있는 왕관을 더럽혀서, 빼앗기게 되었으며, 성전처럼 그의 왕국을 장식하였던 보석, 곧 "화강석 사이에서" 죽어갈 것이다. 그래도 그것들은 그를 보호하지 않으리라.
[2] 그는 모멸과 치욕을 받게 되었으며, 그의 이웃들에게 짓밟혔다. "내가 너를 땅에 던질 것이며(17절) 보석 가운데서 꺼내어 길에 까는 돌 가운데로 던질 것이며, 비참한 광경을 자아내어 열왕 앞에 그들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며, 그들은 너로 인해 경계를 받아 교만하고 압박하는 왕이 되지 않겠다고 하리라."
[3] 그는 완전히 멸망되었으니, 그의 성읍과 그가 또한 그리하였다. "내가 네 가운데서 불을 내리라." 정복자들은 성을 약탈할 때 그 중심부에 불을 놓아, 성읍, 특히 궁궐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 혹은 일반적으로 보아서,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불은 왕과 백성을 다 사르고 그들의 모든 영화를 "땅 위에 재가 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불은 "네 가운데서 나올" 것이다.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모든 심판은 죄인들 자신으로부터 발생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붙인 불에 타 죽는다.
[4] 이리하여 그는 하나님의 보복에 대한 무시무시한 본보기가 되었다. 이처럼 그는 "그를 목도하는 모든 자 앞에서" 격하되었다. "너를 아는 자가 너로 인하여 다 놀랄 것이며" (18절), 그처럼 고고하던 자가 어떻게 그처럼 낮아질 수 있을까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예루살렘 성전처럼 두로 왕의 궁궐은 멸망당할 때에 "놀라게 하며 이야기거리가 될" 것이다(대하 7:20, 21). 두로 왕이 그처럼 몰락하다니!
시돈의 몰락 (에스겔 28:20-26)
1. 두로 옆에 놓여 있었고, 보다 더 역사가 오래되었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았고, 두로에게 의존하여 두로와 함께 서고 넘어졌던 성읍, 시도의 멸망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시돈아, 내가 너를 대적하다니, 네 가운데서 내 영광이 나타나리라" 고 말씀하신다(22절). 또한 "점잖은 방식으로는 알려하지 않던 자들도, 내가 그들을 국문하고, 즉 정의와 내려진 선고에 따라 심판을 시행할 때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리라. 게다가 나는 의롭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인 줄 알게 되리라." 시돈인들은 두로인들보다 우상 숭배에 더 몰두했던 것 같다. 두로인들은 사업과 큰 교역에 종사하였으므로 완악함과 미신의 힘에 덜 지배되었다. 그러나 사돈인들은 아스다롯 숭배로 유명하였다. 솔로몬이 그것을 도입하였었다(왕상 11:5). 이세벨은 바알 숭배를 이스라엘에 끌어들인 자로서, 시돈 왕의 딸이었다(왕상 16:31).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시돈인들에 의해 큰 치욕을 당하였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내 영광을 나타내고, 내 거룩함을 나타내리라" 고 말씀하신다. 시돈인들은 이스라엘 땅에 접해 있었다. 이스라엘 땅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도 하나님을 알 수 있었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은 이스라엘을 유혹하여 자기들의 우상들을 섬기도록 하였다. 하나님이 거룩함을 나타내실 때는 영광도 받으시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의 거룩함은 곧 그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거룩히 여기어 영광을 돌리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을 내림으로써 하나님은 거룩함과 영광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그 자신과 자기 백성의 침해된 명예에 대한 공정한 보복자임을 공언하는 것이다.시돈에게 내려질 심판은 전쟁과 염병이었다. 이 두가지는 땅을 황폐하게 하며, 인구를 말살하는 심판이었다(23절).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이요 사자들이므로, 그가 보내신 목적을 달성할 것이다. "내가 그에게 염병을 보내며 그의 거리에 피가 흐르게 하리라." 거리에 멸망한 자들의 시체들이 널려 있을 것이니, 일부는 그 성읍이 포위되었을 때 영양실조로 인해 발생된 전염병에 의한 것이요, 또 일부는 그 성읍이 함락되어 모두가 칼에 붙혀졌을 때 군대, 아마 십중팔구 갈대아 군대에 의한 것이었으리라. 이리하여 상처입은 자들은 심판될 것이다. 그들의 상처로 인해 죽어갈 때 스스로 심판하게 될 것이며, 타인들은 그들이 잘 망했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혹자의 해석에 따르면, "그들은 칼에 의해 징계될" 것이니, "사방에서" 멸망시킬 사명을 띠고 오는 칼에 의할 것이다.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그가 이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시려 하는 것은 두로와 시돈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멸시하며 그들의 환난을 기뻐하였던 자들 모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곧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면에" 있던 열방들과 변론하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26절). 하나님의 백서이 잘못 때문에 징계를 받고 있을 때, 과거에도 징벌받은 죄인들에 대해 그리하셨듯이, 주위에 있는 자들에게 경멸받지 않도록 돌보신다. 따라서 그들을 멸시하여, 하나님은 "조금만 노하였거늘 힘을 내어 고난을 가하는" (슥 1:15) 자들을 그가 책망하신다. 하나님께서는 낮은 처지에 있는 자들에게도 관심을 가지신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들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2.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이전의 안전하고 번영된 상태로 회복시킴으로써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죄악에 의해 수치를 당하셨으며, 그들의 고난 역시 원수에게 신을 모독하는 기회를 주었었다(사 52:5).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 양자의 죄를 치료하시며 그들의 곤고를 덜어 주실 것이며, "그들로 인하여 열국의 목전에서 거룩함을 나타낼 것이며," 모든 세계가 만족할 만큼 그의 거룩함의 영광을 회복하실 것이다(25절). 왜냐하면,(1) 그들이 다시 자신의 본토를 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흩어진 데로부터 이스라엘 족속을 모으리라."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소서" (시 106:47). 그리고 그 약속을 좇아서 (신 30: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모으실" 것이다. 그들은 모여서 한 공동체를 이룰 것이며, "고로, 곧 내 종 야곱에게 준 땅에 거할지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옛 땅을 되찾게 하심은 여전히 효력을 지니고 있던 옛 허락을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소유의 불연속은 권리의 폐지가 아니다. 그것을 주셨던 분이 다시 그것을 부여하시리라.
(2) 그들이 거기서 매우 평온하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괴롭혔던 자들이 제거되면 그들은 평온하게 살리라.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가 다시는 없으리라" (24절). 그들은 행복하게 정착하리니, "집을 건축하며 포도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거기서 행복한 안녕과 평온을 향유할 것이다. 그들은 "평안히 거하며 자신언제게 살" 것이며, 거기에는 그들의 평안을 해치거나 그들을 공포에 빠뜨리는 자들이 없을 것이다(26절). 그러나 이것은 저 백성이 육에 거하는 동안은 결코 완성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그들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에도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기 때문이다. 또한 복음의 교회도 결코 찌르는 가시와 아프게 하는 가시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가끔 "교회는 쉼을 얻으며," 신도들은 항상 하나님의 보호 아래 안전히 거하고, "악의 두려움에서 떠나 조용히"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약속의 완전한 성취는 하늘의 가나안을 위해 예비되어 있으니, 그때 모든 성도들이 함께 모일 것이며, 모든 거치는 것이 제거되고, 모든 슷픔과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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