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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

유다의 미천한 연원(에스겔 16:1-5)

에스겔은 지금 바벨론에서 포로들과 함께 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않는 예레미야가 에스겔이 바벨론 포수들과 함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위해 글을 쓴 것처럼, 에스겔 역시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설렘 거주자들을 위해 글을 썼다. 그러나 이들 두 예언자들의 이러한 관계는 상대방을 서로 모욕하기 위해서라거나 또는 상대방 임무에 대한 간섭 행위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왜냐하면 설교나 저술에 있어서 어느 한쪽의 능력이 부족한 그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다른 사역자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바벨론 포수들에게는 위안이 필요하였으므로 예레미야가 그들을 위로하는 글을 썼으며, 예루살렘 주민에게는 참회가 부족하였으므로 에스겔이 그들을 정죄하고 질책하는 글을 쓴 것이다.

Ⅰ. 이것이 그의 임무였다. "예루살렘으로 하여금 그들의 가증스러움을 깨닫게 하라" (2절). 그들이 저지른 죄악들을 그들의 면전에서 밝히라는 것이다. 유의할 점이 있다.

1. 죄악은 하나님의 본성에 반대되는 것이다. 죄악은 하나님을 노하게 하는 "도전" 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증오" 하시는 "가증한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멀리하여야 된다(렘 44:4).

2. 예루살렘의 죄는 특별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교적인 관습이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에게서 가장 심하게 나타난다.

3. 예루살렘 주민은 높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자신들의 죄를 깨닫는 점에서는" 게을렀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장점을 좋아하기 때문에 자신들의 결점을 통찰할 수가 없다. 나아가서 자기들의 결점을 부정하거나 과소평가하려 한다.

4.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죄를 깨달아야 된다. 그래야만 그것 때문에 우리에게 행하시려는 하나님의 행위를 바로 알 수가 있다.

5. 죄인들에게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며, 자기 자신들의 결함이나 불순함을 환희 비쳐볼 수 있는 율법의 거울을 주며, 나아가서 그들에게 그들이 지니고 있는 결점을 명백하게 선언하여 주는 것이 사역자의 임무이다. "바로 당신이 그 사람입니다."

Ⅱ. 예루살렘으로 "그 자신의 가증한 일을 알게" 하려 함이다. 특히 하나님께 대 한 그들의 불경스러운 행실 중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했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베푸신 수 많은 은혜들을 마음속에 간직해야 한다. 나아가서 본문에 표현되어 있는 바대로 하나님이 은혜로 구출해 내셨지만 저들의 비천한 연원과, 하나님이 그들에게 베풀어 준 은총과 영광을 감당하기에는 아무런 자격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에서의 예루살렘은 유대 민족과 교회를 상징하고 있다. 그리고 에스겔은 이 예루살렘을 천하게 태어나고, 낳자 마자 버림받았으며, 그의 어머니가 아무런 관심이나 애정을 베풀지 않는, 버림받은 어린아이로 비유하고 있다.

1. 유대 민족의 연원이 미천하다. "네가 난 땅은 가나안이며(3절), 너희들은 처음부터 가나안 족속의 정신과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스라엘 족장들은 가나안에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거기서 재산도 영향력도 못가졌으며 거주할 땅 뿐만 아니라 매장될 무덤조차 차지하지 못한, 완전한 "이방인이요 나그네" 에 불과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정말로 저들의 "아비와 어미" 였다. 그러나 이들은 아모리인과 힛타이트족의 동거민에 불과했으며, 아모리인과 힛타이트족이 당시 가나안의 패권을 쥐고 있었는데, 이들이 아브라함 후손들의 조상들인 것으로 보인다. 아브라함이 "헷 족속" (창 23:4, 8)에게 호의를 청했던 사실과 또 아브라함 후손들이 가나안 족속을 이웃으로 의지하여 살면서도(창 13:7) 그들 중에 사는 것을 두려워한 점(창 34:30)으로 미루어 보아 그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족장들이 처음에 가나안에 입주하여 곧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 땅의 주인이 되었더라면, 그들의 자손들에게는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 되고, 이스라엘 역사에도 크게 취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과는 정반대로 족장들은 "숫적으로도 매우 열세였으며," 소작인이 한 농장에서 다른 농장으로 옮기거나 또는 거지가 이집 저집 옮겨다니며 문전걸식하는 것과 흡사하게, "이 민족에서 저 민족에게로" (시 105:13) 이주했다. 그러나 이것이 최악의 처지는 아니었다. 저들의 조상은 "갈대아의 우르에서 우상을 섬겼으며" (수 24:2), 야곱의 가정에서조차도 "이방 신상" 이 모셔져 있었다(창 35:2). 이처럼 저들은 일찍이 우상 숭배적인 수호신을 모시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볼 때 저들의 조상은 아모리 족속과 힛타이트(헷) 족속이었다.

2. 이스라엘 민족이 처음으로 숫적 증가를 가져오기 시작하였을 때의 저들의 정황은 참으로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저들은 어머니가 보호하지 않으면 모태에서 나오자 마자 죽어버릴 어린아이와도 같았다(욥 3:11, 12).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할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증가하고, 상당한 힘을 지니기 시작하자, 그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나라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기근이 나라에서 그들을 쫓아낸 것이다. 애굽이 정착할 곳 없는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들" (영문에는 "열린들" -역주)이기는 하였지만, 그들은 애굽 왕으로부터 아무런 보호나 후원을 받지 못하였으며, 오히려 가혹하게 시달렸다. 그리하여 그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저들에게는 그들 자신의 가문을 이어나갈 자유도 재산을 이룰 도움도 허락되지 않았다.

또한 저들의 권익을 강화해 줄 우방이나 동맹군도 없었다. "이스라엘의 목자이며 초석" 있었던 요셉이 죽었다. 그러자 요셉 때문에라도 이스라엘 자손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했을 애굽 왕은 "남자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이기로" (계 12:4)작정했다. 그래서 모세를 비롯한 많은 아이들은 위험에 처하게 되었던 것이다. 국가와 도시의 창건자들은 정략적으로 그들의 휘하에 있는 모든 기술과 무기를 이용하여 자기들의 유아기적 상태를 보호하고 육성시키려 한다(Tantae moliserat Romanam condere gentem-즉 로마인이란 이름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노력이 필요하다(버질). 아테네, 스파르타, 로마 그리고 기타 많은 국가들은 창건될 때 그만한 보살핌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은 그러한 보살핌을 받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탯줄도 자르지 못했고, 목욕도 못했을 뿐 아니라, 아무런 옷도 못입고, 강보에 싸이지도 않은 채 눈보라 속에 내버려진 어린 아기의 운명처럼, 곧 파멸될 운명에 처하였다. 그들을 "긍휼히 여길" 자가 없었기 때문이다(4, 5절).

우리는 유아 시절에 자연(본성)의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심어 준 동정심과 자연적 애정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그런데 본문에 보면, 이 아기는 "그 몸이 꺼린 바 되어, 버림받았다" 고 했다. 즉 그 어린아이는 낳은 부모도 미워하였고, 그 아기를 돌보는 것조차도 거리낌이 되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민족에게는 가증스러운 것이었다" (창 43:32; 46:34).

혹자는 본문 말씀을 이스라엘 민족이 그 민족 형성기부터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사악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그들은 연약하고 "모든 민족 중 가장 수효가 적을" 뿐만 아니라(신 7:7), 모든 민족 중 가장 사악하며 악질적인 민족이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은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기 때문이다" (신 9:6). 모세 역시 "내가 너희를 알던 날부터 너희는 항상 여호와를 거역하였느니라" 라고 그들에 대해 설파하고 있다(신 9:24). 저들의 "탯줄은 잘리지도, 씻기지도 않았으며, 강보에 싸이지도" 않았다. 즉 그들은 전혀 순종하지 않았으며 유순하지도 않았고, 선한 것은 모양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이유는 그들에게서 훌륭함이나 어떤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또 이 말씀은 모든 어린아이들이 당면하는 비참한 조건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다. 우리의 "근본(根本)에 대해서는" "우리가 태어나던 날에" 이미 죄악 중에 형성되었고 죄 속에서 잉태되었으며, 우리의 지각은 둔해져 있었고,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었고, 죄로 더러워져 있으며, 이 모든 사실로 하나님 보시기에 거리끼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말을 이상히 생각지 말아야 한다."

 

16:2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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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없음.

 

16:6

이스라엘에 보이신 자비(에스겔 16:6-14)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 행하신 아주 중요하고도 크신 역사에 관해서 살펴보자.

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압제 밑에 풍전등화의 운명에 처해 있을 때 구출하여 주셨다(6절).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길짓하는 것을 보았고, 거리낌이 되어 버림받았기 때문에 도살자의 손에 걸려든 어린 양처럼 죽을 운명에 빠진 너를 보았을 때, 내가 네게 이르기를 '너는 살리라'라고 말해 주었다. 나는 네가 죽음에 처해 있을 때 살 수 있도록 도와 주었으며, 죽음에서 너를 구해 주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에게 살아가도록 명령하심으로 비로소 살아 갈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생은 헐벗고 버림받았으며, 더럽혀졌고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존재와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인생이 선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셨으며, 그들이 살아 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며, 나아가서 보다 풍성해지도록 도와 주신다. 하나님은 회개케 하는 은총을 주시고, 그 사람에게 "너는 살리라고" 고 말씀하신다.

2.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친절과 연민으로 돌보아 주셨는데 이것은 단순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사랑" 에서였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설명할 수 없이 큰 것이었으니, 그들 가운데는 사랑받을 가치 있는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며 보니, 네 때가 사랑의 때라" (8절).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 그리스도를 보내시며, 우리를 성화(聖化)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시며, 우리를 자연의 상태로부터 은총의 상태로 불러 주시는 것을 모두 다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친절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시며, 우리에게 그를 사랑하고 요구하시던 때, 그때는 진실로 "사랑의 때였다." "그때에는 내가 하나님 보시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았도다" (아 8:10).

3. 하나님을 그를 보호했다. "내가 내 옷으로 너를 덮어 너를 바람과 비로부터 보호하여 주고, 네 벌거벗은 몸을 덮어 주어, 네 부끄러운 곳을 가려 주었노라" (8절). 보아스는 룻에 대한 특별한 호의를 나타내고자 했을 때, "그의 옷자락으로 그녀를 덮었다" (룻 3:9). 마치 독수리가 그 날개 위에다 새끼들을 업듯이(신 32:11),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사람들을 그의 백성으로 선택하셨을 때, 그리고 "불붙는 가시떨기 속에서" 모세에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수행하라고 명령하시고 그를 애굽으로 보내어 이스라엘 사람을 구출토록 하셨을 때, 그때 하나님은 진정코 "그의 옷자락으로 그들을 보호하사" 덮어 주신 것이었다.

4. "내가 물로 너를 씻겨서 네 피를 없이하고, 네게 기름을 발라 주어(9절) 너로 하여금 깨끗하고 부드럽게 하였느니라."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겪은 노예 생활을 통해 물든 타락된 습성들을 정화시켜 주시었다. 그들이 노예 생활 속에서 당한 모든 치욕은, 그들이 고상한 품위를 가지고 열심히 일하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획득하였을 때, 말끔히 씻겨 나가고 말았다. "이스라엘은 나의 아들이며 내 적자이니 그들을 가게 하여, 나를 경배토록 하라" 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것은 "그들의 피를 철저하게 씻어내는" 사건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기적이 따랐다. 또한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그들을 보호하며 인도하신 것 역시 하나님이 "그의 옷자락으로 이스라엘을 감싸 주신" 것이었다.

5.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번성케 하시었으며, 제 민족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우셨다. 이 기사는 하나님이 그의 옷자락으로 그들을 감싸 주신 기사 앞에, 7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그들의 인구는 그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이미 놀랄 만큼 증대하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인구는 봄철에 "들의 풀같이 많게" 되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여, 심히 강대하여졌다" (출 1:7). 저들이 뚜렷한 지파를 형성하고, 그들 자신의 관원을 가질 수 있었을 때(출 5:19), 그들의 "젖가슴이 부풀었다." 또 숫적으로 증가하였을 때 바로 저들의 "머리카락이 자랐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벌거벗은 적신이었다. 여전히 소수 민족이고, 경멸을 받았다.

6. 하나님은 자기가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었다고 시인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영광스러운 결혼을 한, 이 불쌍하고 의지할 곳이 없는 고아가 나중에는 무엇을 더 좋아하였는가를 살펴 보라. 간신히 노획물처럼 목숨을 구한 자가 처음에는 얼마나 존귀해졌는가를 보라. "내가 너와 맹세하고 언약하였도다" 고 말씀하셨다. 이 계약은 시내 산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조인되고 비준되었을 때, 그때 너는 내 백성이 되었도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부르셨으며, 또 하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이 되셨다. 하나님은 영적 생명을 부여하는 자들과는 또한 친히 계약을 맺으신다는 점을 기억하자. 이 계약에 의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또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의 의무를 말한다. 또 하나님의 분깃, 그의 보배가 되었으니, 이것은 저들의 특권을 말한다. "우리로 큰 위안을 받게 하려고," 이것이 "맹세로 확증되었다."

7.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아름답게 치장하여 주셨다. 이처녀는 그녀가 가지게 된 장신구를 잊을 수가 없었으며, 장신구를 풍성히 가진 사실을 매우 기뻐하였다(10-13절). 이 구절의 의미 해석에는 특별나게 주의할 것이 없다. 그녀의 옷장은 화려한 옷으로 가득차 있다. 즉 "수 놓은" 옷, "물돼지 가죽신," "가는 베옷," "비단" 너울, "팔지," "목거리," "귀고리" 그리고 "화려한 면류관" 까지 있다. 아마 이것은 그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가져온 보석류와 기타 값진 물건들을 가리킬 것이다. 이런 사실은 후일에도 그들의 애굽 탈출을 좋은 여건 아래 이루어졌다고 말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들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창 15:14).

또는 그 온갖 하늘의 축복으로 그들의 교회와 나라가 장식된 것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짧은 기간 동안에 그들은 "심히 아름답게 되었다" (" 뛰어난 장식품이 되었다" 7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준 율법과 훈계는 그들의 머리에 쓰는 아름다운 관이요 목에 거는 아름다운 금사슬이었다(잠 1:9).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장소인 지성소는 그들에게는 머리에 쓰는 아름다운 왕관이었다. 그것은 "성결의 아름다움" 이었다.

8. "그들은 고급 밀가루와 벌꿀을 먹으며 또한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와 석청을 먹도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부유스럽고 풍성하고 호사스럽게 해 주셨다. 가나안에서 그들은 극상품의 밀가루와 충분히 익힌 빵을 먹었다(신 32:13, 14).

하나님은 그와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생명의 빵으로 먹이시고, 의의 외투로 옷입히시고, 영혼의 안락과 은총으로 치장해 주셨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심령이 썩지 아니할 것이다" (벧전 3:4 참조).

9. 하나님은 저들에게 명성을 주고, 부강하게 했으며, 저들의 맹방에게는 인정을 받게 하고, 대전에게는 두려움을 주게 했다. "너는 한 나라로 번영했도다" (한글:왕후의 자리에까지 나아갔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관작과 영토권을 모두 의미해 주는 말이다. 또 "네 아름다움으로 인해, 이방인 중에 이름이 났도다." 열방이 저들을 주시하며, 이스라엘 민족이 척도를 삼고 있는 바 하나님으로부터 수여받은 그들의 특권인 훌륭한 율법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찬사를 보냈다(신 4:7, 8). 솔로몬의 지혜와 솔로몬 성전은 이스라엘 민족의 영광이었다. 만약 유대 교회와 유대 왕국의 특권을 통틀어 말한다면, 이들이야말로 지상에 있는 모든 민족들 중 가장 아름다운 것을 성취했음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완전무결하였다. 우리가 한 백성이 지닐 수 있는 영예를 무어라 말하든, 바로 그것을 그 절정기에 있던 다윗과 솔로몬 치세 하의 이스라엘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경건, 학문, 지혜, 정의, 승리, 평화, 재물, 그리고 그밖의 모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께 성실했더라면 이 모든 것들은 계속적으로 누릴 수가 있었을 것이다. "내 화려함이 온전하니라.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 같은 아름다움은 저들이 하나님을 위해 구별된 민족이 되고, 그에게 "찬미와 영예의 제목" 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가진 다른 모든 아름다움 위에 빛나며 그들의 아름다움을 완전케 하는 것은 진실로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본문을 영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성별된 영혼들은 아름답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러하며, 그들 자신들이 그 은택을 맛볼 수 있으리라. 그러나 하나님만이 그 모든 영광을 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본래는 흉하고 타락되었으며, 저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은 모두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것이며 치장시켜 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그 자신의 손으로 이루신 것을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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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배은망덕(에스겔 16:15-34)

이 대목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저지른 극도의 타락상을 알 수 있다. 특히 중대한 범죄 행위는, 하나님과 영원한 계약을 맺은 그들이 하나님이 베푼 많은 은혜를 망각하고 우상을 숭배했다. 이스라엘 민족의 이러한 타락상은, 모든 점에서 아버지와 남편 역할을 예상하고 있던 어느 친절한 친구요 후원자인 사람에게 구출되어 양육받은 아름다운 처녀가 음란을 범한 이야기로써 상징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우상 숭배 행위는 가장 큰 범죄이며, 하나님을 격노시키는 범죄인데, 솔로몬 치세 말기부터 시작되어(사무엘 시대까지는 우상 숭배에 관한 어떠한 기록도 없다) 바벨론 포로가 되기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으며, 종교 개혁자적 의지를 품은 왕들에 의해 몇 번씩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완전하게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무례해졌다.

이스라엘 백성은 단이나 베델에서 10지파가 송아지상을 세워 그랬듯이 진실한 하나님을 형상으로써 경배했을 뿐 아니라 거짓 신들 즉 바알, 몰록, 기타 모든 이방신을 경배하고 있었다. 여기에 나와 있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줄곧 나왔지만, 우상 숭배와 음행의 죄악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1. 그 이유는 우상 숭배는 그들이 하나님과 맺은 결혼 계약을 배신하는 행위이며, 나아가서 그를 저버리고 다른 남자를 포옹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우상 숭배는 오로지 하나님께만 바쳐야 할 사랑과 봉사를 하나님의 적수에게 바치는 행위이다.

2 우상숭배는 심령을 타락시키고 모독하는 행위이며, 음행처럼 인간의 정신적 요소를 감각적 힘과 패권에 종속시키고 노예화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3. 우상 숭배는 양심을 변질시키고 고갈시키며, 무감각하게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우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본성을 모독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며, 그의 영광을 수치로 바꾼 자들을 하나님은 공의롭게 벌하시사, 인간의 사악한 마음에 내버려두사 그들이 스스로 악한 욕정에 사로잡혀 인간의 본성에 치욕을 가져오게 하신다(롬 1:23). 우상 숭배 행위는 인간이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잔뜩 매혹시키는 죄악이다. 그래서 인간이 이 우상 숭배의 죄에 일단 빠져들면, 좀처럼 그 올가미에서 벗어나오지 못한다.

4. 우상 숭배는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맺고 있던 사람들이 우상과 관련을 맺으려던 창피스럽고도 부끄러운 죄이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서 관찰해보자

Ⅰ. 우상 숭배라는 죄를 저지르게 된 원인이 무엇인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우상 숭배로 타락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그렇듯 잘 교육받고 훈육된 처녀가 창녀로 타락하게 되었는가? 누가 이런 일을 생각이나 했으랴?

1.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오만해졌다. 즉, "네가 네 화려함을 믿었도다." 그래서 그런 것이 네게 재미를 줄 것이라 생각하고, "네 명성을 인하여 행음을 행할 것이로다" (15절).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주변 민족들에게서 찬미와 존경을 받게 되자, 그들 역시 주변 민족의 비위를 맞추어 주고, 그들의 찬미에 보응해 주기 위해서는 그들 이스라엘 민족 역시 주변 민족들이 믿는 신을 경배하고 그들의 관습을 받아들여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솔로몬은 그의 후궁들을 기쁘게 해 주고 또한 그녀들의 종교심을 만족시켜 주기 위해서 그들이 믿고 있던 우상 숭배를 허용해 주었다. 젊은 사람들의 지니고 있는 풍요는 교만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에 관한 교만(자랑) 때문에 파괴된다는 것을 잊지말자. Rara est concordia formae atque pudicitioe-즉 미와 정숙은 공존하는 일이 별로 없다.

2. 이스라엘 민족은 그들이 처했던 처음 상태를 망각하여 버렸다. "너희는 네 어렸을 때 일들을 잊어버렸나니(22절), 그 때에 너희들이 얼마나 불쌍하고 허약하고 애처로왔다는 것을 잊어버렸으며, 너희를 위해 베푸신 하나님의 수 많은 일들과 나아가서 너희들에게 기울이신 하나님의 마지막 은총까지도 망각해 버렸도다." 하나님의 자유로운(관후한) 은총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많은 빛을 지고 있으며, 또 우리 존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숙고하는 것이 우리의 철부지한 교만과 정욕을 억누르는 데 효과적인 방파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3. "네가 이 모든 일들을 행함을 보나니, 네 마음이 어찌 그리 약한가 !" (30절)라는 말씀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해와 결단에 있어서 나약하기 짝이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서의 정욕의 강한 힘은 그들이 가진 마음의 나약성에 대한 증명을 기억하자.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하여 아는 바가 없었으며 나아가서 그들 자신을 억제하지도 못했다. 본문에 인용된 처녀는 나약한 자며, 이제 그녀는 뻔뻔스러운 음녀가 되어 버렸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이 흔히 가장 교만한 사람들이며, 또 자기 자신도 제어할 수 없으면서 다른 사람을 지도하기에 가장 적절한 자들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Ⅱ. 우숭 숭배의 구체적 내용은 무엇인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닥치는 대로 모든 우상을 경배했다. "무릇 지나가는 자면, 더불어 음란을 많이 행하므로 네 몸이 그들의 것이 되었도다" (15절).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주변 종족들이 숭배하는 모든 우상들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행위는 그렇듯 불합리하고 어리석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이미 이런 종류의 모든 유혹이든 받아들일 태세가 되어 있었다. 어떠한 외국 우상도 수입될 수 없었고, 어떤 새로운 신도 날조해 낼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모든 지나가는 사람들과 매음하며" (25절), 모든 손님들과 매음하는 창녀처럼, 외래 우상을 쉽사리 받아들일 채비를 하고 있었다. 술주정꾼들은 그들에게 손가락질하는 모든 사람과 사귈 것이다. 이러한 마음 상태는 얼마나 나약하고 비굴한 것인가 !

2.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우상 사당과 숲과 산당을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사하신 훌륭하고도 화려한 장식물로 치장했으며, 아름답게 장식하였다(16, 18). "네가 수놓은 우상으로 그 우상에게 입히고, 거기서 행음하였느니라."

그들이 우상에게 입혀 준 옷은 요셉이 입었던 것과 같은 채색 옷으로써, 하나님이 그의 특별한 은총의 표식으로써 그들에게 주신 것이었다. 이런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이런 일은 전무후무하나니라" 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와 같은 일은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할 일이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일임을 말해 준다.

3. "네가 또 내가 준 나의 금 . 은 장식품으로" (17절) 우상을 만들었도다.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금과 은, 기술, 산업, 상업상의 이익 등은 모두가 땅의 열매처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대해서는 그 소유권과 사용권이 여전히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내가 내 은과 내 금을 너에게 주었지만, 그것들은 아직도 나의 은이요 나의 금이니라." 그것들은 아직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영예롭게 하며 그에게 봉사하는 데다 그것들을 사용해야 하며, 나아가서 그 처분을 하나님과 상의하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금과 은이 사실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임음 심사숙고한다면, 우리는 과연 우리의 금이나 은, 우리의 식기, 돈, 보석들을 우리의 낭비나 탐욕 또는 우리의 오만심이나 경쟁심을 만족시키는 재료로 사용할 수가 있을까? 이스라엘인들은 아론이 그들의 청원을 들어 금 송아리를 만들었을 때부터 이미 그들의 보석을 이 우상에게 바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에게 봉사하고 또한 그들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라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좋은 물건들을 가지고 그들의 우상을 섬기는데 사용하였다(18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들 쓰레기처럼 하찮은 우상들을 향응하기 위하여 "너희는 네가 준 나의 기름과 향으로 그 앞에 베풀며, 내가 너희에게 주어 먹게 한 내 음식물" 즉 고운 밀가루와 기름과 가나안에서 생산된 꿀을 가지고 우상 앞에서 향연을 벌였으며, 또한 우상 사랑의 굶주린 사제들은 죄인들이 깨끗게 되기 위해서는 친절한 우상들에게 재물을 바쳐야 한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재물을 받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은 일들은 너무나 야비한 행위이며, 그렇다고 꾸짖기만 하기에는 너무 사악한 행위였다. "이러한 일들을 너희들이 행하였도다." 모든 일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사악한 행위 역시 알고 계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에 얼마나 깊이 빠져 있었는가를 보라. 그들은 진실되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공양하는 데에는 심히 부끄러울 정도로 인색하면서도, 하나님이 그들과 그들 가족이 떳떳하게 살도록 주신 필요불가결한 물질들까지도 우상을 공양하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제공하였다.

5.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공양하기 위해서 그들의 자녀까지도 희생시켰다.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은 악마가 그들의 본성적 이성과 애정을 이때 만큼 강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는 증거로서, 그리고 그들 우상이 가진 가장 사악한 결점의 증거로서, 본문과 기타 다른 부분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 희생 제사 의식을 거행함에 있어서, 그들은(렘 7:31; 19:5; 32:35 참조) "자기들의 아들과 딸들을" 불의 신 목록에게 바치기 위해 불더미 속을 걸어가게 하거나 두 불기둥 사이를 통과하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제물로 삼아 불살라 버리기도" 하였다(20절). 그들이 저지른 이와 같은 일처럼, 극악무도한 폭군 앞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파괴된 예는 결코 없었다. 이것이 그 사건의 최악상은 아니다. 이것은 역시 하나님 그분께 대한 회복할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는 행위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바로 나의 아들이며" (20절), 또 "네가 나를 위해 낳은 자손들인" 까닭에(20절)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금이나 은 또는 음식물보다 더한 축복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들의 아버지" 이며, 이성을 가진 영혼은 독특한 의미에서 그의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 곧 사람의 생명을 불법적으로 앗아가는 것은 "생명의 하나님" 께 대한 중대한 모욕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자손들은 좀더 확고한 권리에 의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계약의 아들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네 하나님이며 네 자손들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었다. 그들은 이미 8살 때 그들의 몸에다 계약의 표식으로써 할례를 받으며, 하나님의 이름을 마음속에 간직하며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지킨다. 이러한 그들을 살해하는 행위는 가장 비인간적인 행위이며, 나아가서 그들을 살해함은 하나님께 대한 가장 후안무치하고 불경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부모된 사람들이 죄없는 그들 자식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끊어버리거나, 그 어린것들의 살조각을 먹으라고 악마에게 제물로 바치는 행위, 또는 우상에게 그들 자식을 산제물로 바침을 공공연히 실행하는 행위 등에 대해서 인간이라면 격렬한 분노없이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어린아이들을 "악마에게 제물로 바쳐버리는 것" 이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냐 ! 보이는 교회의 일원인 부모를 둔 자식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여겨야 한다. 또 그 부모도 이러한 생각으로 자녀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나아가서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도록 양육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명감을 주어서 부르신다면 부모들은 그녀의 자녀들을 즐거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의 자녀를 가지고 무엇을 못할 것인가?"

그들의 우상 숭배의 이 같은 진상에 대해서, 결코 특별한 낙인이 없이는 간과할 수 없는 일임을 시사해 주는 말씀이 있다. "네가 네 음행을 작은 일로 여기느냐?" (20절). 이렇듯 흉폭하고 잔인한 죄는 다시 없다. 아무리 양심이 이지러진 자라도 웃어 넘길 수 없는 죄악이다. 음행, 그것도 영적인 음행을 그렇듯 작고도 사소한 일이라 하겠는가? 인간이 자기 자녀들을 짐승 취급을 하고, 나아가서 그들의 하나님을 야수 취급한 것이 작고도 사소한 일인가? 그것은 단연코 중대한 사건임에 분명하다.

6. 그들은 그들의 우상 숭배를 위하여 성전을 건립하였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협력하도록 요청했을 것이며, 그들의 우상을 함께 숭배하자고 했을 것이다. "은밀히 범행된 이런 종류의 네 모든 나약성으로 인해 화있을진저, 네게 화있을 것이로다. 너희들은 마침내 그것을 당연한 권리로 선언하는 데까지 도달하게 되었도다. 너희들이 오랫동안 창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제는 창녀의 행위를 행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부끄러워할 수도 없게 되었다" (23-25절). "너희는 거기에 누" 곧(난외에 있듯이) "기생집을 지었도다." 우상의 사랑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높은 대를 모든 거리와 모든 길 모퉁이에 쌓았다" (31절). 즉 그들은 그들이 할수 있는 한 가장 열성적으로 우상 숭배를 널리 전파시킴으로써 우상 숭배라는 나쁜 풍습을 널리 퍼뜨렸으며, 다른 사람들까지 타락시키고 유혹하였다. 나아가서 우상 숭배에 빠진 장본인들은 그들 자신을 타락시키고, 우상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써, 그들이 가진 미덕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조차 "네가 네 아름다움이 혐오당하게끔 행했다." 그들은 사악한 우상의 난폭성이나 욕심을 지나치게 만족시켜 주기 시작했다.

유대 민족은 그들의 섭리자이신 하나님을 배신하고 그들 주변 국가의 우상들에게 지나치게 탐닉함으로써 주변 이교도 국가들에게 야비하고 나약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하나님과 종교의 명예에 관련된 것, 현명하고 선한 것, 그 모두가 주변 이교국에 의해 혐오받게 되었다. 인간들에게 자민심의 근거가 되는 아름다움이나 탁월성 등은 그들 자신의 소명에 치욕을 초래하여 그들 자신을 불명예스럽게 하며, 나아가서 주위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게 한다.

Ⅲ이 같은 죄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무엇인가?

1.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정복하고 박해한 민족들의 우상에 심취당했다.

(1) 애굽인들과의 사례. 애굽 사람들은 이름난 우상 숭배자들이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우매하고 지각없는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애굽인들은 옛날에는 이스라엘인들을 야만스럽게 대접했고 근래에는 불실하게 대함으로써 학대했다 - 그들은 이스라엘인들에게 언제나 잔인하든가 어리석게 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에게 심취되어 "저들의 이웃 사람 애굽 사람과도 행음하였다." 즉 애굽사람들의 우상 숭배에 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하나님께 대한 배신 행위로 난국이 발생하였을 때에도 오히려 우상 숭배자 애굽에게 도움을 얻고자 그들을 의존하였다.

(2) 앗수르인들과의 사례. 앗수르인들과 이스라엘인들은 상당히 멀리 떨어져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앗수르인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겐 참으로 성가신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 사람과 행음하고" (28절)라는 말씀대로 그들의 우상까지 숭배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앗수르인들의 우상과 그들의 미신적 풍습까지 받아들였다. 또한 "네가 장사하는 땅 갈대아에서까지 심히 행음하니라" 는 말씀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적대 국가였던 갈대아인들에게서조차 신들의 형상, 제단 형식, 희생 제사 의식 기타 그밖의 어리석은 요소들을 배워들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이교 요소들을 "가나안 땅 안으로" 수입해 들여와서는, 그 땅에 유포시키고 부흥시켰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질책을 받아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된 행위를 계속 고집하였다. "내가" 너를 경각시키기 위해 "네 위에 나의 팔을 폈도다" (27절).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멸망시켜 버리기 위해 "그의 손을 그들 위에 펴시기 전에" 그같이 경고하셨던 것이다. 먼저 경이한 심판으로 인간들을 참회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의 통상례이다. 여기서도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하셨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음식물들을 멸절시킴으로써, 그들에게 기근을 주기 전에, 그들이 일용할 빵을 없애 버리셨다. 식물을 뿌리째 뽑아 버리시기 전에 우선 수확량을 감소시켰다. 영양물이 남용되면 하나님은 필수품을 없애 버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기 위해 갈대아인들의 손에 넘기기 전에, 저들을 "블레셋의 건달들" 의 손에 넘기사 우상 숭배로 인해 조롱을 당하게 만드셨다. 불레셋의 딸들은 자기들도 우상을 숭배했지만 이스라엘을 중오했고, 특히 저들의 조잡스런 우상숭배 방식을 수치스러워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주변의 어느 민족보다 더욱 불경스런 방식으로 우상을 숭배했으나, 저들은 자기들의 신(神)을 바꾸었지만, 이웃 민족은 아무도 자기들의 신을 바꾸지 아니했기 때문이다(렘 2:10, 11). 그래서 하나님이 블레셋을 통해 저들을 징벌하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는 본문은 블레셋 사람들이 남쪽 유다 왕국을 아하스 왕 때 침입하여, 유다 왕국을 몹시 쇠퇴게 한 사건을 말할지도 모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슬픔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대하 18:18).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들은 멸망당하게 내버려지고 말았다. 뉘우칠 줄 모르는 죄인들은 그들이 망각해버렸던 은총과 고칠 수 없는 환난에 대한 말을 들을 것이다(암 4:11).

3. 그들은 영적 음행에 만족을 몰랐다. "너는 음욕이 차지 아니하리라" (28, 29절). 즉 그들은 정도 이상으로 많은 우상들을 가지게 되고, 또 미신적 생활 습성을 배우지만, 여전히 새로운 신들과 새로운 예배 양식을 추구하고 있었다. 참 하나님께 성실하게 충성하는 자들은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그러나 저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더욱 사모하나,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을 바란다. 보잘 것 없는 초라한 저수지 때문에 힘차게 솟아나오는 샘물을 저버린 사람들은 곧 싫증나버린 자기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며,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들이 소유한 우상들에 대해서 곧 싫증을 내고, 그리고는 또 다른 우상들을 찾는다.

4.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대단한 낭비를 하였으며, 여러 모양의 우상과 제단을 사들이며, 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외국에서 초빙해온 사제들의 고용료 등으로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였다.

창녀는 보통 화대를 받는다. 그러나 여기 나타나는 이 사악한 창녀는 우상에게 봉사한 화대를 받는 대신, 오히려 자기 자신을 보호해 주고 자기의 충성을 받아 주었다하여 우상에게 화대를 내어 준다. 이러한 사실이 31-34절 사이에 크게 강조되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네 행음이 다른 여인과 같지 아니하니라. 다른 여인들은 아첨을 받으나, 너는 너를 따르지 않는 사람을 유혹하기 위해 네 스스로 아첨했고, 너를 경멸하는 이교도 민족들과 동맹이나 연합하기를 좋아했다. 다른 여인은 남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으나 너는 자신이 그들에게 선물을 하였고, 그 선물은 하나님이 네게 주신 것인데도 너는 그것을 우상에게 바쳤구나. 이 점에서 너는 창녀처럼 돈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외간 남자와 간통하는 여인들처럼 죄를 짓는구나."

우상 숭배를 쫓는 마음, 곧 영적 매음은 육체적 정욕만큼이나 강렬하고 사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그리고 이 영적 매음은,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세속적 이득을 도모하는 대신 그들의 죄로 인해 바로 자기 자신의 유혹자가 되어, 재물을 크게 낭비하므로, 더욱 가중한 죄가 된다. 진실로 사악한 범죄자는 바로 그러한 "이유없는 범죄자" 이다(시 25:3).

예루살렘은 이제 이 모든 사건 속에서 자신의 가증스러움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예루살렘이 범죄할 수 있는 것 중 이것보다 더 큰 범죄가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이 인간들을 버리시면, 비록 인간들에게는 가장 잘 행동할 기회를 가질는지도 모르나, 인간들의 타락한 본성이 인간 자신들에게 얼마나 전율적인 일을 초래하는 가를 잘 볼 수 있다. 죄의 길은 내리막 길이다. Nitimur in vesitum-즉 우리는 금지된 것을 하고 싶어한다.

 

16:16 없음.

 

16:17 없음.

 

16:18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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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5

형벌의 경고(에스겔 16:35-43)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간음은 사형에 처해야 할 중죄로 취급된다. 앞의 본문에서 유죄가 판명된 이 악명 높은 창녀에게 이제는 형이 언도된다. 그녀의 죄에 대한 형벌이 35절에서 엄숙히 선고된다. 심판자로서 에스겔 예언자는 "창녀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녀를 부른다.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는 여기 나타난 예언자처럼 창녀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추방시키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도 하나님의 나라에 초대받을 수 있도록 회개를 권유하셨다. 신앙을 버린(배교할) 교회는 창녀와 마찬가지다. 예루살렘 역시 창녀와 다를 바 없이 된다. 그토록 신앙이 깊던 예루살렘이 창녀처럼 되다니 ! 여기서의 예루살렘처럼, 요한 계시록에서는 로마가 멸망당하기로 예정된 창녀로 상징되어졌다. "이리 오라, 많은 물 위에 앉은 큰 음녀가 받을 심판을 네게 보이리라" (계 17:1). 하나님의 명령하시는 말씀을 들으려하지 않고 또 그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윽고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며, 무서운 공포를 맛보게 된다. 이제 이스라엘에 내린 심판을 함께 연구하여 보자.

Ⅰ. 범죄 내용이 진술되고, 혐의 조목과 이들을 더욱 악화시킨 것들이 요약되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분노하시어 말씀하실 경우 하나님은 꼭 심판을 하실 것이며, 하나님은 그가 심판하실 때나 심판받을 때에도 명백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심판받을 때 죄인들을 그들의 범죄 행위가 그들 면전에서 일일이 들춰지므로 입을 열지 못할 것이요, 하나님의 명백하고도 공평한 심판 앞에서 아무런 반대의 말을 꺼낼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창녀가 정죄받고, 이제 그 때문에 문책당하는 범죄는 두 가지이다.

1.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로 인해서 첫째 율법판의 처음 두 계명을 어긴 죄이다. 우상 숭배 행위를 에스겔은 "그녀를 연애하는 자와 그녀 사이의 불륜관계" 라고 표현하였는데(호 2:12 에서, 창녀를 그녀의 손님들을 연애하는 자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녀의 손님들이 진실로 그녀에게 이익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때의 대상은 그녀가 봉사하고 숭배한 모든 옳지 못한 우상들, 즉 "그녀의 가증스러운 모든 우상들" 이다. 이 우상 숭배 행위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을 격노시키는 범죄이다.

2. "네가 그들에게 네 어린아이의 피를 바쳤다." 죄없는 자기 자식을 살해함으로써 두 번째 범한, 처음 두 계명을 범한 죄이다. 본능적 애정의 가정 강하고 신성한 의무를 저버리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배신해 버린 이런 자들이 이러한 범죄를 저질렀다 해서 하등 이상할 것은 없다. 그들이 범한 죄는 점더 깊게 성찰해 보면 더욱 나쁜 면이 있다.

(1) 그들은 자신에게 치욕을 돌렸다. "네 불결함이 깊어졌도다. 그들의 마음속에 있던 부정함이 빛 가운데 드러나고, 그들의 벌거벗은 나체가 구경거리가 되며, 그런즉 그들이 멸시와 치욕을 당했다." 자기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모욕과 치욕을 당하는 사람은, 신앙을 공언한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결코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받지 못한다.

(2) 저들의 비열한 비은망덕은 저들의 죄를 무겁게 하는 또 다른 요인이다. "너는 네가 어렸을 때의 일을 기억하지 아니하고, 다른 사람들이 너를 모욕하고 박해할 때 내가 너에게 베풀어 준 은혜를 망각하였도다(43절)."

(3) 기쁘게 해드렸어야 했을 하나님을 저들의 죄가 노엽게 만들었다. "너는 이 모든 일들을 행함에 있어서 나를 화나게 하고, 나를 슬프게 하였도다." 하시려고만 하면 어떠한 불가능한 일도 없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걱정하였노라" 라는 말씀은 다소 이상한 어법이다. 그러나 바위 같은 심장이라도 녹여버릴 정도로 감격스러운 표현이기도 하다. "40년 동안 내가 이 세대로 인해 걱정하였노라."

Ⅱ. 그 처벌에 관하여서 일번적인 진술이 나와 있다. "내가 또 간음하고 사람의 피를 흘리는 여인을 국문함같이 너를 국문하여 진노의 피와 투기의 피를 네게 돌리리라" (38절). 그리고 이와 같은 두가지 죄악은 지극히 불명예스러운 죽음으로써 처벌되어진다. "네가 사람의 피를 흘렸으므로, 내가 네 피를 흘리게 하였고, 네가 혼약을 깨뜨렸으므로 나도 네게 혼약을 파기시켜 주겠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러한 처벌 행위는 "그 남편이 투기함으로 분노하여 원수를 갚는 날에 결코 용서하지 아니함과 같이" (잠 6:34, 35), 비록 정의감에서 뿐만 아니라 질투감에서도 수행되여질 것이다. 하나님은 "네 행위대로 네 머리이 보응하신다" (43절). 모든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은 "그들이 저지른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시는" 방법으로 죄인을 처벌하시므로, 죄인들은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정도대로 뿐만 아니라 그들이 획득한 그 정도와 동등하게 처벌당한다. 이것이 죄인들의 죄과가 마땅히 도달하는 종국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좀더 깊이 살펴보자.

1. 이 범죄는 공개적으로 수치를 당하도록, 반드시 대중에게 공개되어야 한다(37절). 죄인은 사사로이 그리고 비밀리에 처벌받은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외부에 알려지도록 공개적으로 처벌받게 된다. 이와 같이 죄인이 공개적으로 처벌당한다는 사실은, "내가 너의 즐거워하는 정든 자와 사랑하던 모든 자가" 그 처벌의 증인이 되도록 할 것이며, 이를 통해 그들의 범죄를 예방하고 경고를 해주며, 또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너를 모욕하게 해 주고 네가 심판받는 것을 즐기게 해 주겠다" 라는 말씀에 명백해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의 재난은 그들 친우들의 비통해함과 그들 적들의 통쾌함이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인해 더욱 악화될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창녀의 범죄에 대한 동조자 뿐만 아니라 창녀의 범죄에 대한 반대자까지도 창녀를 처벌하는데 참여한다는 의미이므로, 결국 예루살렘의 동맹국뿐만 아니라 애굽과 앗수르 같은 예루살렘의 적대국까지도 예루살렘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을 때는 사람이 그의 적과도 평화롭게 지낼수 있음" 과 같이, 사람이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을 때는 그의 친구까지도 적으로 만들게 된다. 그러므로 범죄 행위에 있어서 그들의 동반자이며 심지어 그들을 유혹한 자라 할지라도 그들 죄인들을 채찍질하고 괴롭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땅이 황폐되어졌음을 보러" 올 것이다. "내가 불로 너의 집들을 사르고 여러 여인들의 목전에서 너를 벌할지라" (14절). 그러므로 너희가 두려움의 표적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같은 목적을 거듭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기록된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너를 봄으로써 두려워하게 되고," 그로 인해 더 이상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2.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사형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가 저지른 죄악은, 내가 "무리를 데리고 와서 너를 돌로 치며, 칼로 찌르며" 라는 말씀처럼, 죽음에 해당되는 죄악이기 때문이다. 이 음란한 창녀는 그처럼 치욕적이고도 소란스러운 죽음을 선도받는다. 예루살렘 성벽이 적군이 쓴 석포에 의해 파괴되고, 예루살렘 주민들이 침입해온 적군의 창검에 찔려 죽을 때 에스겔의 이와 같은 예언은 실행되어졌다.

3. "내가 또 너를 네 적들의 손에 붙이고" (39절), "그들이 네 집을 불사르리라" (14절). 범죄자의 재산이 모두 몰수된다. 또 그에게 속했던 모든 소유물들은 마치 사악한 창녀의 집이 파괴당하는 것처럼, 범죄에 대한 증오감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될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숭배하기 위해 지었고 그들과 그들 주변 민족들에게 찬탄을 받았던 높은 누대, 곧 우상의 산당은 공격당하게 되고 파괴될 것이다. 우상 숭매를 위해 지은 "누각을 철거하지 않은 죄" 는 유다 왕들 중 최고의 선정을 베푼 왕의 재위 중에서도 남아 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죄악인데 이제 그것이 모든 것을 황폐화시키는 갈대아의 군병에 의해 철저될 것이다. 만약 부정 행위가 민족의 정의(사법)에 의해 없어지지 않는다면, 그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없어지게 될 것이다.

4. 이리하여 죄인과 죄가 동시에 사라질 것이다. "네가 창녀와 즐기기를 그만 두게 될 것이니라." 우숭 숭배자가 하나도 남아 있지 못할 것이니, 주민들이 전부 다 멸절당할 것이며, 나아가서 저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더 이상 화대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죄가 자기들을 떠나기까지 살 어떤 자들은 자기들의 죄를 떠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그들의 우상을 숭배할 때 사용하던 모든 것들이 그들에게서 박탈당하고 나면, 더 이상 "값을 지불치 못할 것이다" (14절). "그때가 되면, 네 모든 가중스러움 중에서 가장 분노를 일으키는 범죄였던, 네 자녀를 희생 제물로 바치는 음란한 행위를 너는 다시는 할 수가 없게 되나니, 네 모든 자녀들은 칼에 의해 살해당하거나 포로로 잡혀가므로, 결국 희생물로 바칠 어린아이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43절).

또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살아남거나 도피한 자들이 개심할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경고를 받을 것이며, 더 이상 오만스럽게는 행동할 수 없게 된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창녀와 놀아나는" 행위를 중단하게 만들었다. 바벨론포로 생활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애호 습벽을 실질적으로 치유하였다. 그리고 이 치유가 효과를 맺고 죄에서 그들이 떠나게 되자, "그리한즉 네게 대한 내 분노가 그치고 내 투기가 네게서 떠나고 마음이 평안하여, 다시는 노하지 아니하리라." 즉 모든 것이 순조로와졌다. 우리가 죄와 투쟁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평화를 유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가 내리신 재앙이 그 소임을 마친 후면 더 이상 재앙을 내리시지는 않기 때문이다. 죄가 인간을 떠나면 하나님의 질투 역시 재빨리 인간을 떠나게 된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질투하도록 말들지 않으면, 결코 하나님은 질투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 말씀은 전적인 파멸을 알리는 경고라고 이해한다. 즉 하나님은 "완전 파멸을 이룰 것이며," 연료가 있는 한 하나님의 불길은 계속 탈 것임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서 쉬며," 떠나지 아니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을 불신자의 운명과 비교해 보자(요 3:36).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머문다" 고 했다. 저들은 잔의 찌끼까지 마시게 될 것이고, 그후에야 하나님이 "더 이상 노하지 아니하니라." 그는 "그의 대적으로 안위를 얻으며" (사 1:24), 그들을 버림으로써 만족을 얻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 진노" 가 없느니라. 더 이상 노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자비와 심판이 다투고 있는 동안은, 저들 때문에 하나님이 걱정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가 잠잠해졌다." 그는 죄인들의 영원한 저주에 대해서 그리하실 것이다. 게다가 그것으로써 그는 영광을 받을 것이니, 그가 만족을 얻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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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4

예루살렘의 죄악과 징벌(에스겔 16:44-59)

선지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예루살렘을 그 이전의 장소들과 비교하고 예루살렘이 이전의 어느 것보다 악했다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예루살렘에게 그 가증한 것들을 보여 준다. 따라서 그는 예루살렘이 그들처럼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파멸을 당하리라고 설명한다. 우리는 누구나 비교에 의해서 자신을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아무게 만큼만 선하면 괜찮다는 식으로 생각하거나 모모한 자보다 악하지 않으면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게 보통이다. 이제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예루살렘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제시하신다.

Ⅰ. 예루살렘은 그 어미 즉 저주받은 가나안인 만큼 악했다. 가나안인은 그보다 먼저 그 땅을 소유했던 자들이었다. "그 어미에 그딸" 이란 속담을 사용하는 자들은 그 속담을 예루살렘에 대해 적용할 것이다(44절). 예루살렘은 그 어미의 자식이다. 유대인은 마치 가나안인의 자식이라도 되는 듯 기질과 성향에 있어서 가나안인과 같다. 어미의 특성은 그녀가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하며 음녀의 표적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딸의 특징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소시의 짝 버리며 자기 배에서 나온 자녀들에게 야만적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을 때 그들보다 앞서 있던 그땅 사람들의 가증한 대로 행치 말 것을 각별히 경고하셨다. 왜냐하면 그 땅의 악은 그 땅의 주민을 토해냈기 때문이다(레 18:27, 28). 우상 숭배의 기념물은 우상 숭배자들과 함께 그들에게 끊임없는 유혹이 되었다.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나안 선주민의 행위를 습득하고 그들의 전철을 밞으며 가나안의 우상에게 탐닉하였다(시 106:38). 이와 같이 모방이란 점에서는 실로 그들의 어미가 헷 사람이요 그들의 아비가 아모리 사람이라고 말할만 했다(45절). 왜냐하면 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를 닮았다기보다 가나안인을 더 닮았기 때문이다.

Ⅱ. 그들은 그 자매였던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더 악했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역시 음녀였고 그 남편과 자녀를 싫어했으며 자기 열조의 신들에게 싫증을 냈다. 그들은 새 신의 소개에 열중했다. 그들은 새 신의 소개에 열중했다. 그들은 유행 따라 일어나는 새 신과 새 종교를 도입했고 변화에 몰두했다.

선지자는 그들을 회개의 수치 속으로 몰아넣거나 그들의 파멸로 하나님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예루살렘과 그 자매를 상세히 비교시킨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예루살렘의 자매는 누구인가? 그것은 사마리아와 소돔이었다(45절). 사마리아 형(언니)이라고 불리운다. 왜냐하면 사마리아는 훨씬 더 큰 성읍이었고 왕국이었던 때문이다. 사마리아는 더 부유하고 더 괄목할 만한 상대였으며 이스라엘과 더 밀접히 연합되어 있었다. 예루살렘이 북쪽으로 향해 본다면 사마리아는 부분적으로 그 왼쪽에 있다. 사마리아성과 그 어미성의 딸과 같던 도시와 촌락들은 영적 음행으로 말미암아 근자에 멸망되었다. 소돔과 그 딸 같던 인접 도시와 촌락들은 예루살렘 오른쪽에 위치한 동생이었다. 그들은 예루살렘보다 작았고 사마리아보다 작았으며 그 현세적 음란으로 인해 옛적에 파멸을 당했다(유 7).

2. 예루살렘의 죄는 그 자매 특히 소돔의 죄와 방불하였다(49절).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니라." 여기에는 "네 죄악도 이러하니라" 라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소돔의 극히 흉악한 죄였던 남색은 널리 알여진 악명 높은 죄였으므로 여기에 언급되지 않고 그다지 악하게 보이지 않던 죄가 나온다. 이 죄들은 보다 극악한 죄의 씨앗이자 문빗장으로서 소돔의 죄의 양을 채우기 시작하였고 결국에는 부자연스런 음란으로 채워진 것이다. 이들 죄악의 시초는 다음 네 가지다.

(1) 교만. 교만심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다른 사람보다 높이며 대적하게 만든다.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변케 하고 여호와의 동산을 지상의 지옥으로 전락시킨 첫째 죄였다. 의로운 롯을 멸시하고 그의 견책을 받지 않으려 한 것이 소돔인의 교만이었다. 이 죄 때문에 그들의 멸망은 성숙했던 것이다.

(2) 탐식. 이것은 본문에서 식물의 풍족함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그들에게 풍족함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큰 자비였으나 그들이 자기 풍족을 남용하며 탐식하고 과음과식하며 생명의 유지를 위해 주어진 것을 포식하도록 충족시킨 것은 그들의 큰 죄였다.

(3) 게으름(풍부한 게으름:원의). 그것은 수고에 대한 두려움과 안일의 사람이었다. 그들의 나라는 비옥했고 그들의 풍족은 손쉽게 왔다. 이것은 그들에게 나태의 유혹을 가져왔고 그들에게 정욕을 불사를 가증한 음행심을 일으켰다. 게으름은 많은 죄의 입구가 된다는 데 주목하자. 소돔 사람들은 게을렀고 악했으며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창 13:13). 고인 물에는 오물이 모이며 앉아 있는 새는 새잡이의 표적이 된다. 다윗은 저녁 때 침상에서 일어나다가 밧세바를 보았다. Quoeritur, AEengistus quare sit factus adulter? in promput causa est- 즉 엔기스투스를 간음자로 만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방종이다.

(4) 압제. "그는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 주지도 않았다." 여기에는 그가 빈궁한 자의 손을 오히려 약화시키며 그들의 팔을 꺾었다는 것이 암시되고 있다. 제물이 많고 따라서 권세와 여가를 아울러 가진 자들이 빈자의 구제를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악했다. 식물이 풍족한 자들은 빈자의 궁핍을 위해 희사하며 시간을 선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풍족하다 하여 그렇게 빈둥거려서는 안 되지만 실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러한 것들은 소돔인의 죄였고 예루살렘의 죄이기도 했다. 그들의 죄의 원인인 교만이 다시 언급된다(50절). 그들은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여호와 앞에서 행하였다. 그것은 죄의 두려운 결과였다. 인간은 불경건과 사악의 절정에 점차적으로 도달한다. Nema repente fit turpissimus-즉 단번에 사악의 절정에 도달하는 이는 없다. 교만이 한 사람에게서 세력을 가질 때 그는 모든 가증의 첩경에 선 셈이다.

3. 예루살렘의 죄는 소돔과 사마리아의 죄를 훨씬 능가했다. 그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보다 극악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악 때문이거나 아니면 몇 가지 가증시키는 악 때문이다. "네가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며 그들의 전철을 밟을 뿐만 아니라 악함에 있어서 그들을 훨씬 능가하기까지 하였다(47절). 너는 그들의 행위대로 행하는 것을 적게 여겼다. 너는 그들을 남몰래 범죄하는 어리석은 죄인이라고 비웃었다. 너는 보다 교활하고 대담하게 악을 범하려 하며 네 확신을 담대히 짓밟으려 하며 하나님과 종교를 공공연히 멸시하려고 했다. 범죄하려거든 큰 죄를 범하라는 것이 네 신조다. 그러므로 네 모든 행위는 그들보다 더욱 부패하였도다." 예루살렘은 소돔이나 사마리아보다 더 세련되었으므로 그 범죄도 기지와 기교와 사술이 월등히 뛰어났다. 예루살렘은 소돔이나 사마리아보다 더 많은 재물과 권세를 소유했고 그 통치는 더욱 전제적이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빈자를 압제하고 악한 세력을 행사할 기회가 소돔이나 사마리아보다 더 많았다. 예루살렘에는 성전과 법궤와 제사장과 다윗가의 왕들이 있었다. 예루살렘은 그토록 존귀하고 하나님께 친근한 성이었다. 그러므로 그 거룩한 성의 악은 예루살렘의 특권이나 은혜의 수단을 소유하지 못했던 소돔이나 사마리아의 악보다 하나님을 더 격동시켰다. "소돔은 네 행위같이 행치 않았느니라" (48절).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심판날에는 소돔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마 11:24)고 부합한다. 열 지파의 왕국은 매우 악했다. 그러나 "사마리아는 네 죄의 절반도 범치 않았느니라. 네가 섬긴 우상의 절반도 섬기지 않았고 네가 살륙한 선지자의 절반도 죽이지 않았느니라." 예루살렘 거민이 소돔의 죄를 지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악했다. 남색조차 예외가 아니었다(왕상 14:24; 왕하 23:7). 사해는 소돔의 죄와 멸망을 상징하는 기념비였다. 바로 그 사해가 그들의 나라와 접경을 이루고 그 유황의 못이 바로 그들 코밑에 있었다. 하나님은 소돔과 그 딸들을 자기 보기에 좋으실 대로 없이 하셨고(50절) 그 한 가지 일로써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다. 그런데도 그들은 경고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소돔보다 더욱 가증한 죄를 범하였다.

(1) 이로써 그들은 소돔과 사마리아를 의롭게 하셨다(51절). 그들은 거만을 떨면서 소돔과 사마리아를 판단하겠다고 나섰다. 그들이 자기 순전성을 지키던 옛날에는 그랬다(52절).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상대적으로 소돔과 사마리아를 의롭게 만들고 있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너보다 의롭다. 즉 너보다 덜 악하다." 소돔과 사마리아는 너보다 의롭다. 즉 너보다 덜 악하다." 소돔과 사마리아가 악했지만 하나님의 성이라는 예루살렘이 더욱 악했으므로 소돔과 사마리아의 죄가 경감되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돔을 의롭다고 호소할 근거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예루살렘을 정죄한다. 심판 때에는 소돔과 사마리아가 일어나 예루살렘을 칠 것이다.

(2) 이 때문에 그들은 크게 부끄러워해야 마땅하다. "네가 네 자매를 논단하고 그들에게 수치를 부르짖었으니 너도 네 수치를 이제 담당할지니라. 이는 네가 범한 죄가 비록 그들의 죄와 같은 종류의 것이라 해도 네가 범한 것이기에 그들의 범죄보다 더욱 가증하기 때문이다(52절). 이것은 멸망의 예고나 회개에의 초대로 해석할 수 있다.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너는 놀라며 네 수치를 담당할지니라. 네게 돌아가 마땅한 수치를 네게 취하라." 죄인들이 충심으로 자기 죄를 부끄러워하기 시작한다면 죄를 버릴 가망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사로잡힐 것이며 거기서 죽을 것이다. 이는 그들이 행한 모든 일을 인하여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소돔과 사마리아에게 위로와 격려가 되었기 때문이다(54절). 우리는 범죄함으로써 남들와 범죄를 조장하고 마땅히 슬퍼해야 할 그들에게 위로가 된다. 우리는 다른 어느 것보다 죄악의 이런 면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이 부끄러워해야 할 또 다른 이유는 번영하던 시절에 이웃을 너무나 멸시했다는 점이다. "네가 교만하던 때에 네 아우 소돔을 네 입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56절). 그들은 소돔이 예루살렘과 같이 운위될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결국 소돔보다 악명 높은 수치 속에 있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교만한 자들은 아마 자기들이 무시하던 자와 동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네가 소돔을 입으로 말하지도 않았다. 즉 소돔의 멸망에서 의도된 경고를 너는 중시하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이 소돔의 불경건과 불의에 대해 하늘로써 나타난 하나님의 진노를 보다 자주 그리고 진지하게 서로 예기하고 자손들에게도 가르쳤더라면 그들은 그 일을 두려워하여 소돔의 전철을 밟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그들은 그 일을 아득한 옛 일로 생각하고 그들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다. 전설에 따르면 그들은 이사야가 그들을 "소돔의 관원과 고모라의 백성" 이라고 부르자 그를 사형시켰던 것이다(사 1:10). 타인에게 임한 하나님의 심판을 주목하지 않은 자들은 스스로를 위해 심판을 예비할 따름이다.

4. 하나님은 소돔과 사마리아보다 악했던 예루살렘에게 어떤 황폐를 가져다 주셨으며 이제 또 어떤 파멸을 가져 오시는가?

(1) 예루살렘은 오래 전에 이미 수치를 당했고 그 이웃 사이에서 멸시를 받았다(57절). 그의 악이 드러나기 전에, 그가 극악무도함을 표면화하기 전에 그는 정당한 형벌을 받았다. 그는 음란을 남몰래 위장했고, 이것은 감춰진 음란에 대한 벌이었다. 그는 그때 아람의 딸들에게 능욕을 받았고 사방에 둘러 있는 블레셋의 딸들에게 멸시를 당했다. 블레셋 딸들은 그를 부끄러워하여 멸시했다고 한다(27절). 이것은 아하스 시대에 있었던 아랍인들의 유다 침공과 얼마 뒤에 있은 블레셋의 침공을 가리키는 것 같다(대하 8:5, 18). 자기 욕망에 굴복함음으로써 스스로를 수치스럽게 하는 자는 마땅히 자기 원수에게 굴복하게 됨으로 인해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극히 강력한 원수들을 데리고 오셔서 그들을 멸망시키시려 하시기 전에 보다 덜 흉맹한 원수를 데리고 오셔서 그들을 수치스럽게 하셨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보다 작은 심판이 제 구실을 다 한다면 하나님은 보다 큰 심판을 보내려 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 점에서 "너는 네 음란을 담당하였느니라" (58절). 회개와 개심으로 자기 죄를 내던지려 하지 않는 자들은 놀람과 당황으로 자기 죄를 담당하게 될 것이다.

(2) 예루살렘은 이제 사로잡힘 중에 있거나 아니면 포로됨을 재촉하고 있다. 이로써 예루살렘은 자기 음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58절) 불충실과 언약의 파기에 대해서도 셈을 치르게 된다(59절). "내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네가 나를 버리듯이 나도 너를 버릴 것이며 네가 나를 일축했듯 나도 너를 일축하리라. 이는 네가 맹세를 멸시하여 언약을 배반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시내산의 언약을 의미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그들의 열조와 언약을 맺으사 그들의 열조를 취하여 자기의 특수한 백성으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제까지 그들의 도발에도 불구하고 은총을 계속 베푸셨으므로 앞으로도 여전히 그러실 것이라는 헛된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너희는 나와의 언약을 배반하고 언약의 약속과 의무를 멸시하였은즉 네가 네 행한 대로 네게 행하리라" 고 말씀하신다. 자기들의 하나님되신분께 꼭 매달리지 않는 자들은 그가 계속해서 자기들을 백성으로 인정하시리라고 기대할 만한 이유가 없다.

(3) 악한 유대인의 사로잡힘과 멸망은 소돔과 사마리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취소할 수가 없을 것이다. 대개의 해석자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53, 55절). "내가 소돔과 사마리아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때, 소돔과 사마리아가 그들의 옛 지위를 회복하게 될 때 내가 그들 중에 너의 사로잡힌 자의 사로잡힘을 돌이킬 것이며, 이것은 말하자면 그들을 위해서이며 그들의 그늘과 보호 아래서 되어지는 일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너보다 의롭기 때문이다. 그때 너는 네 옛 토지를 회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소돔과 사마리아는 결코 복구되지 않았고 옥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은 결코 회복을 기대해서는 안 되었다. 하나님은 이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는 자들을 세상 모든 나라 중에 흩어서 환난을 당하게 하실 터였다(렘 42:9, 10). 그들이 평화와 번영을 다시 누리기보다는 소돔인에 먼저 사해에서 일어날 것이며, 사마리아인에 먼저 앗수르 땅에서 돌아올 것이다. 이것은 먼저 흩어져 포로 중에 있던 열 지파에게는 위로가 되고 예루살렘에게는 수치가 될 일이다. 두 지파는 열 지파보다 더 악했으면 악했지 덜 하지는 않았다. 열 지파는 두 지파도 마찬가지로 풍지박산을 당하고 사로잡힘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보고 위로를 얻을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생사존폐를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양자 중 악한 자들은 함께 멸망할 것이며 선한 자들은 함께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극히 악한 죄인처럼 행동하는 자들은 그들과 동일한 운명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네 대적으로 악인 같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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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의 약속(에스겔 16:60-63)

죄에 대한 극히 수치스런 판결과 극히 두려운 심판의 선언이 있은 뒤 본장 말미에서는 나중 올 자들을 위해 자비가 기억되고 예비된다. 이것은 출애굽시와 같다. 출애굽 때 하나님은 진노하신 가운데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터이나 "너희중 어린 자들은 들어가리라" 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혹자는 이것을 소돔과 사마리아(53, 55절) 그리고 예루살렘의 귀환에 대한 약속으로 생각한다(그로티우수와 일부 유대학자들의 이해처럼). 이것을 한 때 소돔에 거주했던 롯의 후예인 모압인과 암몬인으로 이해한다면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렘 48:47; 49:6 참조). 그러나 이것이 귀중한 약속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 약속은 참회하고 개심한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귀환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고 복음 시대에 완전히 성취되었다. 회개와 죄의 사유는 복음 시대에 성공리에 선포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민족에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여기서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Ⅰ. 이 자비는 어디서 일어나는가? 자비는 하나님 자신에게서 나온다. 이것은 그들과 세우신 그의 언약의 기억에서 나온다(66절). 그들은 너무나 패역했고 하나님은 다시는 그들과 화해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될 만큼 노하셨다. 그러나 "내가 너의 어렸을 때에 너와 세운 내 언약을 기억하고 그 언약을 다시 살리리라. 너는 그 언약을 배반했을지라도(59절) 나는 그 언약을 기억할 것이며 그것은 다시 활용될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대로 우리에게 행하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여간 큰 위로와 이익이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주목하자. 이와 같이 언약의 자비는 영원하고 확실한 은혜가 된다(사 55:3). 그리고 이 뿌리가 땅에 굳건히 서 있는 한 비록 나무가 찍힐지라도 소망이 있어서 물기운에 뿌리가 움이 돋을 것이다(욥 14:7, 8).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께 언약을 상기시킨 게 아니라 ex mero motu-즉 하나님이 자신의 선한 즐거움에서 그 언약을 기억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다(레 26:42, 그때 내라 내 언약을 생각하고 그들을 권고하리라). 우리에게 언약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그 언약 곧 천대에 명하신 말씀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이다(대상 16:15). 그가 명하시는 말씀은 견고히 서 있다(시 33:9).

Ⅱ. 그들은 이 자비에 대해 어떻게 준비되며 자격을 갖추는가?(61절) "너는 네 행위 즉 네 악한 행위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로 하여금 네 악한 행위를 기억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너로 하여금 네 악한 행위를 상기시키고 네 행위를 네 앞에 나열하여 너로 부끄러워하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선하신 활동을 개시하시며 그 활동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의지와 보조를 같이 한다는 데 주목하자. 하나님은 우리 죄를 기억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이는 우리를 해칠까봐서이다. 그는 반대로 우리를 위해 언약을 기억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 죄를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 스스로 반대하게 하신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우리 행위를 기억하게 되기만 한다면 우리 행위가 얼마나 패역하고 비뚤어진 것이었으며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과 배치된 행동을 했는지를 깨닫고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럴 때가 인침받은 사유와 확립되는 평화의 명예와 위로를 받아들일 준비가 가장 잘 된 때이다.

Ⅲ. 그들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고 계신 자비는 어떤 것인가?

1. 하나님은 그들과 언약을 세우실 것이다 "내가 너와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60절). 내가 네게 내 언약을 어느 때보다 굳게 세울 것이며 재확립시킬 것이다(62절 참조)." 모든 진정한 회개자에게 말로 다 할 수 없이 위로가 되는 것은 은혜의 언약이 모든 일 가운데 너무나 잘 조정돼 있어서 어떤 언약의 위반도 우리를 그 언약 밖으로 축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언약은 불가침의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은 이방인을 교회의 친교 속으로 불러들일 것이다(61절). "네가 네 형과 아우 곧 네 주위에 있는 이방 나라들, 너보다 크거나 작은 나라들, 옛 나라와 현대 나라들을 접대하게 될 것이며 내가 그들을 네게 딸로 주리라." 그들은 복음 곧 여호와의 말씀으로 창시되고 양육되고 교육받게 될 것이며 그 복음은 시온과 예루살렘에서 발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교회가 거기서 존속하는 한 모든 이웃들은 예루살렘을 어미라 부를 것이며 위에서 온 예루살렘을 자유자와 우리 모두의 어미로 인정할 것이다(갈 4:26). "그들은 네 딸이 될 것이지만 네 언약으로 말미암음이 아니며 독특한 언약에 의함도 아니다. 또 유대교로 개종해서도 아니며 의식법의 굴레에 복종함으로써도 아니고 너와 함께 기독교로 전향함으로써이다." 또는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다. "네 언약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는 것은 "네가 피정복민이나 포로나 부속자에게 부과해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조건에서가 아니다" 는 것이다. 세상적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한 그런 지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니다. 그들은 내 언약으로 말미암아 네 딸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내가 너와 그들과 공동으로 맺은 삼자 계약의 은혜이다. 나는 아버지가 될 것이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공동의 아비가 될 것이어서 너는 그들과 서로 자매가 될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들을 접대할 때는 네 행위를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너는 이방인을 보면 네가 타락했을때에 그들보다 훨씬 악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낯을 붉히게 될 것이다."

Ⅳ. 이 일의 결과와 효능은 무엇인가?

1. 하나님은 영화롭게 될 것이다(62절).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권능의 신 여호와며 자기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알려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마치 그것을 알거나 믿지도 않은 자처럼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네가 나를 여호와인 줄 알 것이며 쓰라린 경험으로 알게 되라라" 는 말이 진노 가운데서 나타났지만 여기서는 자비의 말로 나오고 있다. "너는 내가 여호와인 줄 알게 될 것이며 즐거운 경험으로 알게 될 것이다." 극히 작은자에서 극히 큰 자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그를 알게 되리라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맺으신 새 언약 중에서 가장 귀중한 약속 중 하나이다.

2. 그들은 이로써 보다 겸손하게 되고 죄 때문에 낮아지게 될 것이다. "이는 네가 그릇되이 행한 모든 일을 기억하고 놀라며 자책하며 골백번도 더 자신을 무지하고 무도하고 배은망덕한 자라고 부르게 하려 함이다. 또 나는 너로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하고 하나님을 반박하거나 비난하거나 불평 못하게 하고 네 수치 때문에 영영 침묵하며 순응하게 할 것이다." 자기 죄를 올바로 기억하는 자는 그것을 참으로 부끄러워한다는 데 주목하자. 그리고 자기 죄를 진정으로 부끄러워하는 자는 고난 가운데서 인내하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벙어리처럼 입을 열지 않는 게 옳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내가 네 모든 행한 일을 용서한 후에" 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화해에 대한 증거가 분명하면 할수록 하나님께 득죄한 자들이 더욱 더 슬퍼하고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진정한 참회자의 은혜로운 솔직함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그는 우리의 평강이며 우리가 용서받는 것은 그의 십자가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하나님 세상과 화해하시는 것은 그의 복음 안에서이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죄에 대한 경건한 근심을 강열하게 느끼게 된다. 이것은 천국이 가까웠기 때문에 하는 회개이다. 탕자는 아버지의 입맞춤으로 영접을 받고 아버지가 자기를 용사했다는 것을 확신한 뒤 부끄러움과 당혹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나이다" 라고 고백했다. 자비의 사유하심을 인식함으로써 죄에 대한 우리의 수치심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하나님 안에서 얻는 우리의 위로는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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