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16:5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 제자들은 떡 가져가기를 잊은 사실을 발견하고 걱정한
다. 그것은 그들의 상습적 결점이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퍼지고 있는 죄악의 누룩은
주의 할 줄 모르고 있다. 누룩은 사람이 모르게 퍼지는 것이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교훈은 그처럼 암암리에 그들에게 퍼지고 있었다.
마 16:6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정통적으로 믿
는다고 하지만 외식함이 병이고, 사두개인은 내세를 무시하고 현세 주의로 기울어진
것이 벼이다. 하나는 정토으이 탈을 쓰고 참된 성도를 모해하고, 다른 하나는 초자연
주의를 배척하면서 진리를 막는다. 이 둘은 다 불신앙 주의이다. 이 두가지 이단은 누
룩과 같이 사람이 모르게 교활하게 사람을 감염시킨다. 불신앙 주의가 위태한 것은 이
점에 있다. 실상은 불신앙의 누룩을 속에 품고 모양은 정통한 신앙을마 가진듯이 자기
를 내세우는 자들이 많다. 우리는 누가 정통 신앙의 모양을 가졌다고 햐여 얼른 그를
지도자로 삼을 수는 없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이유는 그의 제자들의 속에는 불신앙이 누룩과 같이 침입
아였기 떠문이야 불신앙은 이렇게 누룩처럼 퍼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마 16:7
제자들이 서로 의론하여 가로되 우리가 떡을 가져오지 아니하였도다 - 그들은
떡을 가져오기를 잊은 사실을 이제 기억하면서 그들속에 불신앙이 누룩과 같이 침입
한 사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벌써 그들을 주의시키신 것이다.
마 16: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이 적다고 종종 꾸짖으셨다.신자들은 완전히 믿음을
잃지는 않으면서도 이런 꾸지람을 받을 만한 처지에 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
마 16:9,10
이 귀절들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과거의 두가지 큰 이적을 기억시켜 그
들의 믿음을 다시 일으키신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능력을 기억하므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한다. 과거에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엔 그리
하시지 않으시랴?
마 16:13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 이땅은 레바논산 아래 있었던 파니움(Panium)이란 곳이었
는데 팔레스틴의 동북편끝이다. 대 헤롯의 아들 빌립이 그 땅의 이름을 '가이샤라 빌
립보'라고 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지방에 오신 이유는 그의 제자들을 수양시키려는 까
닭이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말씀으로나
행위로 노력하신 목적 중 하나는 자기가 그리스도이심을 알리려는 것이다. 인간은 예
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믿을 때에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역사는 그사람에게 효과를 내지 못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수
님을 알게 되었는가에 대한 문제는 큰문제이다.
마 16:14
더러는 세례 요한-곧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 왔다는 말이고 더러는 엘리야-곧 엘
리야가 다시 살아왔다는 말이고 어떤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곧 예레미야나 혹은 다른 선지자가 다시 살아 왔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보면 그때의
사람들 중 예수님을 바로 안자가 별로 없었다.
마 16:15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부터"너
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는 물음으로 옮기신것은 신앙 시험에 적절한 것이다 신앙
이란 뇌화 부동하는 일반화한 심정이 아니고 남달리 어떤 독특한 절개를 가진 자립성
을 가지고 주님과 연결된 거기에서 생명성을 띠는 것이다. 남들이 다 주를 떠날지라도
나는 오히려 고열도의 충절을 지켜야 한다. 그것이 신앙의 참 값과 본색을 보이는 길
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남들을 따르고 모방하는 자만 되지 말고 직접 주님을 깊숙히
따라 들어가서 남들의 모르는 것을 알도록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도록 힘써 나가
는 혼담을 가져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이말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비교해 다
투거나 교만하거나 일부러 고립되어지라는 의미의 말이 아니고 다만 군중을 맹목적으
로 따르거나 의존하는 생명 없는 신앙을 경계하는 것 뿐이다.
마 16: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이것은 간단하지만 완전한 신앙 고백이다.여기 주란 말은 원어로 쉬(* )라
고 하는 대명사인데 당신이란 의미로 힘있게 나타나는 말이다. 왜 이렇게 힘있게 그
대명사가 여기서 필요할까? 그 이유는 베드로가 오직 예수님께서만 그리스도이심을 확
신한 까닭이다. "당신이 진정한 의미로 메시야올씨다"(Er is andere Messias en Gij
zijts het ten volle-Grosheide, Matteus p.254) 이런 강미있는 신념이야말로 신앙 고
백의 생명요소인 것이다. 여기서 베드로는 굳게 그의 신앙 곧 주님이 참된 메시야라는
것을 고백하였다. 그리스도 이는 메시야(* )란 히브리 말의 헬라어 번역이니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자"라는 것인데 (1)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자를 가리키는 동시
에 (2)신성하셔서 하나님과 동일하신 자라는 뜻이니 그를 거역하면 곧 하나님을 거역
함과 같은 중죄에 빠지게 된다. (삼상 24:6, 26:9; 삼하 1:14; 왕상 21:10-13) (3)그
리고 이 기름 부음을 받는다는 것은 한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데 곧 성령님을 부어
주심을 가리킨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성령은 한량이 없고(요3:34; 행10:36) 또 그 임
하신 성령님께서 영원히 머물러 계셔서 떠나시지 아니하셨다. 옛날에 왕을 세울 때에
기름을 부었고(삼상 10:1, 16:1-13) 또한 대제사장을 세울 때에도 그같이 하였고(레
8:12), 선지자에게도 그리하였으나(왕상 19:16), 일률적으로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니
이 이유는 기름 부음을 받은 것은 한가지 상징적 의미를 가지는 외형이고 실질은 아니
기 때문이다. 실질이 있을 때에는 혹시 외형을 빼놓을 때도 있었다. 예수님꼐서는 위
의 삼직을 가지시고 하늘에서 보내심을 받으시사 기름 부음이 되셨다. 왕이라 함은 만
물의 왕을 가리키고(계19:16), 대제사장이라 함은 영원한 대제사장(히7:21) 곧,모든
죄인들을 대신하여 하나님앞에서 대언 하시는(요일2:1) 영원하신 중보를 가리키고(히
8:6, 9:15), 선지자라고 함은 본래 아버지 품안에 계시다가 세상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아려 주시고 기타 모든 하늘의 일들을 계시 하신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아들 - 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세상에 보내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의미한
다."하나님의 아들"이란 말은 다만 윤리 도덕으로 타월하여 하나님의 성품에 가까운
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불신앙적 비평갇르은 공관 복음에서 말하는 이 예수님
의 영원하신 신자격을 부인하려 한다. 그리하여 그들은 예수님의 초자연적 유래를 부
정하고 그를 순 인간 뿐으로만 보고 그의 하나님의 아들의 칭호를 도덕적 의미의 것으
로만 본다. 여기 베드로가 고백한 대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것이 과연 위
의 비평가들의 말한 내용과 같은가? 그렇지 않다. (1) 먼저 마 11:27을 읽어 보면 주
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아버지께서 모든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알르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난자가
없느니라"하셨으니 이 말씀은 너무나 뚜렸하게 예수님이 영원하시고 초자연적이신 하
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낸다. 요한복음에 있는 중요한 귀절을 살펴 보아도 예수님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2) 요10:34-36을 읽어 보면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
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라고 하셨
다. 여기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문구에는 재판장들은 하나님의 시키심을 받아 일한다는
뜻으로 한말이고 그들 자신이 영원부터 신이라든지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말이 아니
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귀절에 근거하여 자기의 신자격의 정당성을 주장하신것을 볼
때 예수님의 신자격도 인간이 하나님의 시키심을 받은 뜻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고
영원자존의 하나님의 아들(Ontological Sonship)이 아닌것을 증거하신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이문구에 나타난 예수님의 논증상 요점은 그것이 아니다. 이 논증의 귀결은 추
론의 등위적 결론(Analogical argument)이 아니고 강이유적 결론(afortiori)이니 곧
보통 인간도 하나님의 시키심을 받은 자이면 그질에 있어서는 신이 아니로되 신이라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거든 하물며 아버지께서 세상에 보내신 자(영원 자존하신
하나님 아들)야 더욱 그렇지 않으랴 하는 말씀이다.
마 16:17
이를 네게 알게 한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예수님으
그리스도시요 하니님의 아들이시라고 아는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성
령님의 감화로 말미암아서 알 수 있는 오묘한 지식이다.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라고 인
가이 아무리 가르쳐도 그것을 믿는 자가 없더니 성령님의 감동으로서만 믿는자가 생기
는것은 우리들의 전도 경험으로 보아서 잘 증명되는 사실이다. 이 귀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 곧 그리스도 이심을 친히 의식하시고 또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옳게 여기셨다.
불신앙적으로 복음 문서를 대하는 비평가들은 예수님의 메시야 의식 문제에 대하여 여
러가지 이론을 가지나 모두 다 그릇된 학설이다. 그들의 학설은 다음과 같다.
(1) 예수님께서 자기가 메시야라는 생각을 가진때가 없었다는 학설. 이 학설의 논거는
복음서에 도덕적 요소와 초자연적 요소(메시야 요소)가 이원적으로 병립하여 있기 때
문이라고 한다 곧 그들은 말하기를 복음서에 서로 용납할 수 없는 사조 두 갈래가 흐
르고 있는데 하나는 도덕적인 것이고 또하나는 초 자연적인 요소 곧 메시야 요소라고
한다 그리고 이도덕적인 부분은 역사성을 띠는 반면에 초자연적인 부분은 아무리 하여
도 후대에 가입된 것 같이 보인다고 한다 . 이학설을 주장하는 자는 볼크만, 말티노,
슈미드(Volkmal, Martineau, Schmidt) 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주관적 관찰이고 객관
적이 아니다 . 우리들이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관찰하건데 비평가들의 이른바 원마태복
음으로 불려지는 예수 어집(* )도 초자연적 요소를 포함하지 아니치 못하고
그들의 가정하는 원 마가복음(Ur-Maekus)도 그것을 포함하지 아니치 못한다. 초자연적
요소와 도덕적 요소는 이원적 대립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위 일체로 잇어서 둘 다
동일한 마음(예수님의 마음)에서 생긴것이 아니다. 산상 보훈도 혹자의 생각대로는 초
자연적 교훈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공정한 관찰로 보건대 산상 보훈도 예수님은 하
나님이시고 종말 심판자 곧 메시야 이심을 가르친다. 그 이유는 거기 기록된 도덕은
인간의 처지에서 발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처지에서 명령한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
이다.
(2) 복음서의 메시야 관념은 본래의 것과 달라진 후에 생긴것이라는 학설.
이 학설은 말하기를 예수님께서 가르치셨다고 한 메시야 관념이 본래 유대 민중이 가
졌던 그것과 다르니 그러한 메시야 관념은 예수님께서 가졌을 리가 없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민중에게서 끊긴 메시야로 나왔을 리가 없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민중의 메시야 사상과 다른 복음서의 그것은 반드시 예수님 후에 다른 사람들로 말미
암아 새삼스러이 발명된것일 수 밖에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옳지 않다. 예수
님의 메시야관념이 반드시 유대인의 것과 같아야만 될까? 유대 민중의 메시야 관념은
인본주의의 것이다. 그들의 메시야는 권세로써 이스라엘을 다른나라에서 건져낼 자였
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야 관념은 그것이 아니고 신본주의의 것으로서 바로 이사야
예언서에 있는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메시야였다. 유대인은 성경에서 탈출하여 그들의
사욕 본위로 메시야를 그렸으나 예수님은 예언의 성취자로서 고난의 메시야로 오신것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대인과 다르게 생각하신 점이 있다고 그것을 자
연스럽지 않다고 할것은 없다.
(3)예수님께서 메시야 의식을 실제로 가지신 일이 없고 다만 어떤 미래에 그가 메시야
가 될것을 희망하셨다는 학설
이 학설은 성경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때에 자기를 메시야
라고 하신것은 그가 그 성역 초두에 세례를 받으실 때에 벌써 그리하셨고 또 그이 일
생 사업이 메시야의 일임을 직언 하셨다.(막 2:17, 10:45; 마5:17, 10:34; 눅12:49,
19:10).
(4)메시야 의식이 발달되었다는 학설
이 학설의 주장자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친 이 귀절들의 내용을 근거
로 한다. 그러나 이 학설은 또 다시 성경을 그릇되이 읽는데서 생겼다. 이 귀절들 곧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가르치신 교훈은 새 교훈의 출발이 아니고 이전에도 잔재해 있던
것을 이제 공개적으로 발표하기를 시작하신것 뿐이다. 그가 이때까지 자기가 메시야이
심을 공개적으로는 말씀하시지 않다가 이제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그리하시니 발달된
의식의 표시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가 공개적으로 그것을 말
씀하지 않은 것은 교훈상 계단과 순서를 따라 그렇게 된것이다. 그가 적당한 시기에
이르러서 그 벌써 가졌던 메시야 의식을 고조하는 것이 조금도 이상할것 없다.
마 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여기 "또 내가 "란 말은 원어로 카고(* ) 라고 하
는 데 직역하면 나도라고 하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기서 보수적으로 시몬을 칭찬
하는 기쁨을 나타내신다. "너는 나를 그리스도라고 바로 말하여 나를 존귀케 했으니
나는 너를 반석이라고 하여 포상하노라"(Klostermann, weil du mich geehrt, so will
auch ich...) 우리는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는 것 만큼 또한 그에게서 칭찬하심과 사
랑하심을 더 받는다. 너는 베드로라 - "베드로"는 "반석"이란 뜻이니 시몬이 신령한
"반석"이 된 이유는 그의 본래 천성이 견고해서 그리된 것이 아니고 그가 이제 고백
한 신앙 그것 떠문에 그리 된 것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 이것
은 베드로만이 교회의 반석이라는 뜻이 아니고 그가 사도인 고로 교회 건설의 초석들
가운데 하나라는 뜻이다. 모든 다른 사도들도 그와 동급의 초석들인 것을 이 말씀이
부인하지 않는다(계 21:14).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음부"는 사망 세계의
이름인데 그것이 권세가 참된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함은 교회가 사람의 지배 아래 있
지 않고 영생할것을 의미한다.예수님께서 "음부"란 말을 쓰실때에 이세상 권세를 이름
이 아니고 지옥을 의미하신 것이다(눅 16:23). 그러므로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
지 못하리라"라는 말씀은 교회에 참되게 속한 개인도 멸망치 않코 영생할 것을 뜻한다
고 볼수 있다. 열쇠 - 열쇠는 주관권세를 의미한다 사도의 직권은 그리스도의 대리 행
사로서 교회를 치리할수 있다. 귿르이 이렇게 땅에서 교회를 직접 치리 할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에게만 있었던 권세였다. 후대의 목사들은 사도들의 명한 말씀에 순종하여
교회치리에 사역행위를 할뿐이고 직접 치리권을 가진 것은 아니다.
마 16:19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것이요- 여기 맨다 함은 징벌을 베푼다는
의미이다.(마 18:18)
마 16:20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 - 왜? 이런 부탁을 하
셨을까? 그것은 민중이 아직 그리스도를 정치적 지도자로 오해할 정도에 있었기 떠문
이라고 하나 다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 부분의 끝에 있는 논설을 참조하라). 지
식은 필요하나 그것이 교육받는 자의 정형에 맞추어 가르침이 되어야 유익하다.
마 16:21
윗 부분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이신 사실과 보여주시고 거기에 뒤이어 그
의 수난에 대하여 공언 하시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순서이다. 그이유는 그리스도께
서 고난을 받으시므로 그 백성의 구원을 이루시기 떠문이다. 그가 고난을 받으시기는
그 때에 종교가들의 손에서 될 것으로 예언하였다.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여야 할 자
들이 어찌하여 그를 죽일 것인가? 그것은 이상스러울 것 없다. 종교가 부패하면 맛 잃
은 소금과 같아서 내어버림이 될 정도로 악한것이니 부패한 종교가들이 그리스도를 죽
이게 될 것이다.
마 16:22
베드로는 조금 전에 (16절)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진리를 말하였다. 그러나 이
제 와서는 그와 정반대로 사단의 충동에 의하여 비진리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좋지 않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와 같이 어느 순간
에라도 마귀의 충동을 받을 위험성이 있다.
마 16:23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 고난 받으실 필요 있
음을 깨닫지 못하고 도리어 간하였으니 그것은, 사단의 사상에 끌린 결과이다. 그러므
로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사단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가, 베드로의 인격 그것을
가리켜 사단이라고는 하지 않고 다만 베드로의 시험에 빠진 상태를 꾸지람 하신 것 뿐
이다. 예수님을 그리스도 라고 한 때의 베드로는 사단이 아니다.
마 16:24
자기를 부인하고 - 여기 "부인 한다는 말은, 거부한다는 뜻이니 자기의 사욕대로
행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을 기쁘시게 하려고 취하는 행동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 이 말씀은, 필경 이 세상에서는 죽음으로 끝나게 할 고난을 각
오하고 또 늘 고난 짐을 지고 있음을 이름이다.
마 16:25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것은 사람이 예수님을 위하
여 목숨을 잃은 공로로 인하여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따라서 예
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제
목숨을 잃은 이유는, 그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얻을 줄 알고 자기를 의뢰하지
않은 까닭이다.
마 16:26
목숨.- 이 말은, 영혼을 의미하는데 영혼의 가치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이 귀절의 의미이다. 그렇다면, 영혼 구원을 위하여 영혼을 구원하시는 유일하신 구주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서 무엇을 아까와 하랴! 위의 24절 해석 참조.
마 16:28
여기 섰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이것은 거기 있던 제자들 중에 주긱 전에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모양을 예표적으로 볼 자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이다. 그 뒤에 몇날 안되어 예수님은 그의 재림의 예표적 모양을 변화산에 나타내셨다. 어떠한 학설에 이것은 그가 (예수님께서 )그의 재림의 예표인 예루살렘 멸망을 마음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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