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여 가라사대 -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상 중에 들은 말씀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상은 11:24에서 끝났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이후 계속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뜻한다(1:3). 이러한 표현 양식은 본장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다(1, 8, 17, 21, 26절). 이전에는(2-11장)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나 본장 이후에는(12-19장)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믿지 않고 경시하는 자에 대한 경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2:2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 족속들을 패역하고 완악한 자들로 규정하셨다(2:3, 6-8;3:24-26). 이것은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의 징계와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완고함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지적해주는 표현이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아니하나니 -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사건의 진상 즉 심판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특성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지혜롭게 하실 때에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하여 자신들의 완악함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진 완악한 상태에 거하므로 사건의 진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 상태로 있게 되었다. 이런 무분별하고 완악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신 29:3, 4;사 6:9;42:20;렘 5:21;마 13:13;막 8:18;행 28:27).
=====12:3
인자야 너는 행구(行具)를 준비하고 -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을 보여주시고 그 가운데서 말씀을 주심으로 그 이상과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1:1, 3, 4;11:25).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 자체를 말씀 전파를 위한 비유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 이것은 선지자의 말뿐만 아니라 행동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야 함을 암시해준다. 이와 같은 경우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서도 엿보여진다(렘 19:1-13). 한편 본 구절의 '행구'(* , 켈레 골라)란 문자적으로 '포로된 자의 소유물' 즉, 포로된 자들이 가지고 가는 소품을 뜻한다(baggage for exile, NASB, RSV).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시해 주는 비유이다(10-13절). 이사하라(* , 갈마타)는 문자적으로 '발가벗기다', '(포로들을) 끌고가다' 등의 뜻이다. 이는 단순히 한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창 20:1). 이것은 포로들이 대적에 의해 질질끌려가는 것처럼 비참하고 초라한 상태에서 이동해가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원어상 이 말은 '포로'(* , 골라)의 어근이다.
=====12:4
이사하는 행구(* , 켈레 골라)란 문자적으로 3절의 '행구'와 같은 표현이다. 저물 때에 - 도피자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몰래 움직일 수 있는 시기, 즉 어두워질 때를 가리킨다.
=====12:5
성벽을 뚫고 그리고 좇아 옮기되 - '성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르'(* )는 일반적으로 집이나 침실 등 방의 벽을 가리킨다(8:7;삼상 18:11;암 5:19). 그리고 성읍의 '성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마'(* )이다(26:4, 9;렘 39:8). 바벨론 지역의 집들은 태양에 말린 흙벽돌로 지어졌다(Cooke). 에스겔 선지자는 이 벽돌 집의 벽을 뚫고 밖으로 쫓겨나가듯이 나가야 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억지로 타의에 의해 그의 집에서 비참하게 쫓겨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곧 3절에 언급된 '행구'의 비유처럼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들의 집과 나라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 12절).
=====12:6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 이것은 하나님의 상징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재앙을 피해 도망갈 때 슬픔과 비통함을 느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행동이다(삼하 15:30;에 6:12;7:8;렘 14:3, Giesebrecht, Lange). (2) 하나님의 재앙의 심판으로 인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감추지 못해 취하는 행동이다(Calvin). (3) 12절과 연관해 볼 때 일반 포로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드기야 왕 즉 유다 왕국의 패망시 야반(夜半)에 도망가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눈이 뽑히고 보지 못하게 된 시드기야 왕에 대해 예시한 말이다(Cooke, Carley). 이중에서 (1)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에스겔의 비유적 행동은 한 인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기 원하신다(3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는 모든 외적인 행동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했다.
=====12:7
내가 그 명대로 행하여 -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 말은 후에도 몇 번 반복된다(24:18;37:7). 낮에 나의 행구를...메고 나가니라 -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이 밤중 은밀한 때 도피하게 되는 모습을 예시해준다. 유다의 패망시 예루살렘 성읍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3년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바벨론 군대들 몰래 성벽을 뚫고 은밀하게 도망가야만 했었다(왕하 25:1-4).
=====12:8
본절부터 주어진 계시는 이미 앞서 주어진 계시와 내용 면에서 연속적인 것이다. 낮에 밤에 에스겔의 행동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계시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아침에 다시 계시를 주셨다.
=====12:9
패역한 족속...하지 아니하더냐 - 이스라엘 족속은 에스겔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1:3;3:15) 이스라엘 장로들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던 관계 등을 미루어 보아(8:1;11:25;14:1) 에스겔의 근황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본 구절과 같이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진리에 대한 사모함 즉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 또는 조소어린 태도로 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패역한' 즉 '반역적인' 자들로 규정한 사실에 함축되어 있다(Calvin).
=====12:10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 - 여기에서 '예루살렘 왕'이란 여호야긴 왕을 계승해 즉위한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을 가리킨다(왕하 24:15, 17;25:1, 2;렘 39:4). 한편 유다 백성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족속들과 유기적으로 상호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에 동일시 된 것이다(2:3). 예조(豫兆)라 하셨다 하고 - 하나님께서 '예조'를 바벨론 포로된 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뜻을 알려주신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인 듯하다. 당시 바벨론 포로들은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을 받아 시련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완악하고 하나님께 대해 반역적인 자세를 취하였다(2, 9절). 그들은 포로로 잡혀오긴 하였으나 고국 유다 땅 즉 가나안 땅은 편안하고 안전하며 자신들도 그곳으로 되돌아 갈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그들을 징벌하시고 바벨론 포로들을 70년이 지난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5:11-14).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들 포로들에게 70년이 차기까지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도록 편지하기도 하였다(렘 29:1-23). 이런 배경하에서 에스겔 선지자도 바벨론 포로된 자들에게 유다 백성들의 죄악과 멸망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 같다.
=====12:11
나는 너희 징조라 - 6절 하반절의 반복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그의 말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의 인격과 행동 전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임을 암시한다.
=====12:12
무리가 성벽을 뚫고 - 유다 백성들과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군대의 3년 포위 생활을 못이겨 몰래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 도망감을 예시한다(왕하 25:1-6). 이는 유다 백성들과 왕의 처절함과 비참한 모습을 엿보게 한다.
=====12:13
내 그물을...내 올무에....죽으려니와 - '그물'과 '올무'란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 또는 그 도구를 상징하는 말이다(시 69:22;전 9:12). 본 구저른 바벨론 군대의 재앙을 피하여 도망가는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여 멸망케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군대의 침략시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생함으로써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왕하 25:6, 7;렘 39:4-7). 한편 하나님이 유다의 왕을 주시하여 그의 비참한 말로를 언급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된 지위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자이기 때문에(삼하 5:2;렘 23:1-6)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범죄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대표적인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이후(창 15:7-21;17:8;26:3;35:9-15) 그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출 3:8;6:8). 따라서 시드기야 왕이 이 땅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회복받지 못함을 암시해준다(4:13 주석 참조).
=====12:14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칼을 빼리라 -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이 의지하는 것들을 무력화시키시고 인간의 자아 노력, 자구책을 헛된 것으로 만드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스스로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벗어나거나 넘길 수 있는 자는 전혀 없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최선의 길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잠 28:13;요일 1:9). 한편 본 구절의 내용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성취되었다(왕하 25:4, 5).
=====12:15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알리라 - 이는 내용상 11절에 연관된다(Cooke). 이것은 그들이 고난의 징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공의의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음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4:13;6:7-10).
=====12:16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보호하시는 남은 자들을 끝까지 지키사 구원하신다(6:8;11:13 참조). 칼과 기근과 온역을 벗어나게 하여 - 남은 자들이 이 세 재앙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들이 바벨론 군대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의 멸망시 재앙에서 벗어나서 생존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이 세 재앙에 대해서는 5:1-12을 참조하라.
=====12:17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하나님의 두 번째 이상이 끝난 후(11:24) 12:1, 8에 이어 세 번째로 임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문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12:18
인자야 너는 떨면서...네 물을 마시며 - 3-7절의 비유적인 행동처럼 여기서도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 자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말씀의 뜻을 계시해주고 있다(3, 6절). 특히 '식물'과 '물'을 비유로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바벨론 군대의 침공시 심한 기근과 궁핍에 처할 것을 암시한다. 이는 19절에 의해 더욱 확증된다. 그리고 이런 기근과 궁핍 현상은 4:9-17에서 이미 예언되었으며 왕하 25:3에는 그 예언의 성취가 언급되고 있다.
=====12:19
이 땅 모든 거민의 강포...황무하게 됨이라 - 하나님께서 축복의 상징으로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족속의 불의로 인해 피폐해지고 황량해질 것이다. 이것은 곧 '젖과 꿀이 흐르는'(출 3:8, 17) 가나안 땅이 그의 풍성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궁핍과 황폐케 된 상태에 처하게 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이 행한 것처럼 불의를 행함으로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권고하셨다.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들은 불의를 행함으로 그 땅을 더럽혀 결국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레 18:24-30).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곳에서 불의를 행함으로 결국은 그 땅의 축복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범죄로 인해 땅이 황폐케 되는 것은 율법의 다른 곳에서도 예언되었다(레 26:15-20). 또한 이스라엘 족속들의 불의로 가나안 땅이 황폐케 되고 그의 풍성한 결실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곧 신약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범죄할 때 하늘의 풍성한 축복(엡 1:3)을 누리지 못하고 상실함을 예시해준다(히 3:7-4:11).
=====12:20
사람의 거하는 성읍들이 황폐하며 -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대적들이 쳐들어와 성읍들을 멸망시킴으로 그 성읍들이 사람 살기에 곤란할 정도로 황폐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범죄로 인해 형통하지 못하고 곤고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 대신 징벌이 가해진 전형적인 증표이다(시 1:1-6). 이런 사실은 19절의 경우와 같이 구약 율법에서도 이미 예언되었다(레 26:31-33).
=====12:21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이는 17절에 이어 네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의 것들과 다른 것이다.
=====12:22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어찜이뇨 -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예언된 징벌과 심판이 즉시 임하지 않자 그들의 완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그 예언을 멸시하며 조롱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의 방종 속에서 안일하고 평안만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태도는 당시 유다 땅에서 직접 사역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렘 5:13, 14;17:15). 유다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대항하여 평화만을 거짓도이 선포하기도 했다(렘 28:1-12).
=====12:23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응함이 가까우니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망령된 말들(22절)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예언된 진노의 심판을 이행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즉시 심판을 내리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의 표현이다(롬 2:4, 5;벧후 3:8, 9).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경고로서 선포되어지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멸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자초했다.
=====12:24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 - '묵시'(* , 하존)란 '주시하다', '보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보는 것' 또는 '계시'(렘 14:14)를 의미한다. 따라서 '허탄한 묵시'란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참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임의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복술'(* , 미크삼)이란 '제비뽑다', '점치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점'을 뜻한다. 당시 유다 땅에는 하나님의 참된 예언 즉 진노의 심판을 경고하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를 대적하여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들은 헛된 꿈이나, 요술, 점이나 자기 자신들의 거짓된 마음을 따라 스스로 예언하며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대신에 평화만을 선포하였다(렘 5:31;14:14;23:25-28;27:10;28:1-11).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통해 예언 즉 진노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됨으로 그와 같은 거짓 예언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12:25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 에니 야훼 에다베르)란 문자적으로는 '나 여호와가 말하리니'(I the Lord shall speak, NASB)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 위에(출 3:13-15) '나'라는 일인칭 주격을 첨가한 것은 현재 말씀하시는 당신의 권위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말씀대로 심판하실 것을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다.
=====12:26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네 번째 예언(21절)에 이어 다섯 번째로 임하신 말씀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네 번째 예언(22-25절)을 반복 강조한다.
=====12:2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하나니 - 이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의 말을 경시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들은 22절에 언급된 불경건한 자들 즉 선지자의 선포한 말씀을 응험이 없는 거짓된 것으로 취급하는 자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선지자로 알고 그의 말을 믿긴 믿되 이 예언이 당장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훗날에 성취되어질 것으로 믿고 그 예언을 안일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전히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고 경성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무사 태평하게 경시하는 자세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바벨론 포로들에게 '패역한 족속' 또는 '완악한 자'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2절;2:3).
=====12:28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 지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 하나님의 예언은 선포된 후에 더디 성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더딘 것이 아니라 곧 성취된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예언의 즉각적 성취를 선포하심으로 그들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과과 위엄 가운데서 소명을 받은 후(1-3장) 배것자들의 불순
종으로 인한 심판의 필연성과 임박한 멸망에 대해 상징, 설교, 환상 등 다양한 방법으
로 경고하였다(4-11장).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리라
는 거짓된 낙관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일련의 징조와 메시
지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강조하며, 그릇된 희망으로 포기하고 현실을 누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2-19장).
특별히 본 대목(12-19장)에서 저자는 11기의 징조들, 설교, 속담 등을 시작하면서
11번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라는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1,8,17,21
절;13:1;14:2,12;15:1;16:1;17:1;18:1). 유일하게 다른 부분은 마지막 19장뿐이다. 그
러나 19장은 전체 대목의 주제를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애가(哀歌)로서 결론적 언급으
로 보여진다. 결국 에스겔은 왜곡된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던 당시 백성들에게 예루살
렘의 함락이 하나님의 뜻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의 첫 부분에 해당되는 본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유다 백성
들을 향해 주어진 두 가지 행동 비유와 심판의 확실성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따. 에
스겔은 자신의 행구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의 패주를 예언했으며, 먹고 마시고
떠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기근과 궁핍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러나 거
듭되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속담을 인용하면서 심판의 메시지를 조롱하고 업
수히 여겼다. 선지자는 이처럼 패역하고 완고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
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임박한 사로잡힘을 알려주는 선지자의 두 가지 상징적 행동을
기술한 전반부(1-20절)와 (2)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두 가지 메시지를 소개하는
후반부(21-2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가) 행구를 옮기는 에스
겔(1-7절), (나) 에스겔의 행동의 해석(8-16절), (다) 이스라엘의 기근에 대한 예언
(17-20절), (라) 거짓 예언에 대한 책망(21-25절), (마) 예언의 조속한 실현을 확증함
(26-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고 돌이키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장에 드러난 바와 같이 비유적 행동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본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즉, 4:1-7;5:1-4;21:2;24:15-24;29:2 등이다. 이와 같
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비유적인 행동을 통해서 말씀을 계시하시는 것은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족속이 너무나 강퍅하고 완고하여 단순히 말씀의 선포만으로는 부족하기 때
문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은 좀더 자극적이도 도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완악한 마음에
충격과 도전을 전달하기 원하셨다(2절).
당시 바벧론 포로들의 영적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멀리는 B.C. 722년 북왕
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팔레스틴의 북부 메소보다미아 지방으로 포
로로 잡혀오고(왕하 17:1-6;18:9-12), 가까이는 B.C. 605년 여호야김 왕 3년(왕하
24:1-4;단 1:1,2)과 B.C. 597년 여호야긴 왕(1:2;왕하 24:8-16) 때 포로로 잡혀온 자
들로 구성되었다. 포로민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 바벧론으로 잡혀 왔으나, 자신들
의 죄악과 부족함을 회개하거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3:4-11)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는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2:3-7). 이들은 잠시 잘못되어 바벧론 이방땅으로 잡
혀 왔으나, 조만간 고국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가리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미
혹되어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렘 28:1-11). 사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들
이 무엇보다도 먼저 취해야 할 자세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다(오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족속들은 죄를 자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여전히 자신들의 강퍅한 심평 가운데 처하면서 진리와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그
러면서도 곧 하나님의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터무니 없는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거억하여 회개하도록 심판의 메시지
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은 범죄한 유다가 조만간에 패망할 것임을 알려주며, 바벧론 포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족속들에 대해 경고한
다. 사실 당시의 백성들은 조기 귀국과 예루살렘의 건재에 대한 거짓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Carley). 그러므로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말에 전혀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다. 본국에 있는 자들은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22절)라고 할 정도
로 하나님의 예언을 경시했으며,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해버렸다. 바벧론 포로
들도 본국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현혹되어(렘 28:2-4) 조기 귀환을 기정
사실화 하며 '심판이 임하려면 아직 멀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27절)는 헛된 평안
속에서 자만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벧후 3:4,5)라고 조롱
하며 주님의 재림을 경시하는 풍조와 동일하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들은 볼 눈이 있
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한다(2절)고 말했다. 그들은 메시지를
맏을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거절했으며, 불순종과 불신앙에 빠져 있
었다(신 29:1-4;사 6:9,10;렘 5:21;마 13:13-15;행 28:26-28). 그러므로 하나님은 임
박한 사로잡힘과 심판의 확실성을 거듭 강조하며, 잘못된 낙관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
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르도록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재림은 예기치 못한 순간
에 도적처럼 임한다(살전 5:2). 그러므로 성도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마 25:1-13)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1. 상징적 행위를 통한 경고(12:1-16)
본문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환상을 보았던(8-11장) 에스겔
이 바벧론 포로 지역으로 돌아와 선포한 첫 번째 메시지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포
로로 잡혀간다는 경고와 징조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해석함으로써 심판과 확실성과 필
연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 선포한 첫 번째
내용과 동일하다(4,5장). 다만 본 단락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포로됨에 대해 좀더 구체
적이고도 심도 있게 묘사했으며, 왕과 백성들의 포로됨을 구분해서 기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에스겔이 행구를 옮기는 행동을 묘사하는 전반부(1-7절),
(2) 에스겔의 상징적 행위를 해석해주는 후반부(8-1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
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임박한 진노를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기 이전에 경고와 징조를 미리 보여주신다는 사
실을 알려준다(1-7절). 에스겔은 짐꾸러미를 가지고 포로들이 끌려가는 것과 같은 처
량한 모습으로 처소를 옮긴다.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갈 때 여행 도구를 준비해야 된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래서 혹시
패역한 백성일지라도 자극을 받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벧후 3:9).
이처럼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여 징조를
보여줌으로써(민 22:2-30;삼상 12:17,18)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주시는 분이다.
(2) 본문은 특별히 유다 왕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해 알려준다(10절).
이처럼 선지자가 왕을 지목하여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의 독특한 위치와
연관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래서 성경은 왕을 '목자' 즉 하나님의 양된 이스라엘 백성들을(시 95:7;100:3) 푸른
꼴로 인도하여 양육하며 돌보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삼하 5:2;대상 11:2). 그런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백성들을 의와 진리 가운데로 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모
범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다(왕하 24:19). 결국 시드기야는
B.C.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눈앞에서 아들들이 살해되는 장면을 지켜본 후,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벧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왕하 25:1-12). 하나님은 사명을 맡은 자
가 임무에 소홀히 할 때 그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다.
(3)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길 때 가나안 땅에서 추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5절). 이러한 사상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예언되었다(레
26:33,36,38,39;신 28:63-65). 땅은 이스라엘 족속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다(창 12:7;13:14-18;15:7-21). 따라서 단순히 이스라엘 족속이 거주할 공
간적 처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온도계의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포로됨을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고 축복권에서 제외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 부터 오는 하늘의 축복, 안식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상실하는 것을 암시해준다(엡 1:3;히 3:7-4:11).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징계하신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신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수 1:8;시 119:106). (2) 만약 하나님의 말
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큰 불행
을 초래하게 만든다(신 32:25-29;왕하 18:11, 12).
2. 예루살렘에 임할 기근(12:17-20)
전 단락(1-16절)에서 행구를 옮기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포로됨을 드러낸 에스
겔은 본 단락에서 바벧론 군대의 포위와 공격으로 인해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 핍절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
용은 4:1-17에서 예루살렘 성읍이 바벧론 군대에 의해 포위되고 거민들이 열악한 상태
에서 음식을 먹으리라고 예언한 내용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본 단락은 먼저 포위와
기근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에스겔 선지자의 비유적 행동(18절)을
언급하고, 이어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포위와 기근의 핍절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되
는 배경(19, 20절)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문맥 형태는 전반부(1-16절)와 동일하다. 즉 앞에서 먼저 에스겔의
비유적 행동을 소개하고 뒤에서 비유적 행동을 설명해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에스겔은 우매한 백성들에게 오해없이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기근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이다.
사실 예루살렘 성읍과 유다 전역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인하여 기근을 당하리라
는 말씀은 이전에도 몇 번 언급된 바 있다(4:9-17;5;12,16;6:11). 그러나 특별히 본문
은 기근의 원인으로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강포(强暴)함을 거론하고 있다. 원래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17), '아름다운 땅'(출 3:8;민 14:7)이었다.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 때 그 땅은 풍성한 소출을 낼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황무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범죄에 대해 징계하신다는 의미이다(레
26:19,20,32;신 28:23,24). 실제로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지도층에 해당되는 유력 인
사들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했을 뿐만 아니라(8:3-17;렘 7:17,18;44:17,18) 압
제와 살육 등 불의한 죄가 성행하는 도시로 타락하였다(7:23;11:6).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벧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공포와 근심 중에 음식을 먹으며,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자들이 속
출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4:10,11:5:10). 하나님은 불의와 압제에 대해 정확히 심판
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이와 같은 본 단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하나님의 피
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형통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할 때는 고통과 환
난이 뒤따른다(신 28:1-19). (2) 사람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된다(욥 42:4,5).
3.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12:21-28)
본 단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여전히 거짓된 소망에 휩싸여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에스겔을 포함한 많은 선지자
들은 계속해서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사 22:1-25;렘
7:27,28;27:8). 그러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의 말에 현혹되어 심판을 부인하며, 참선
지자의 예언을 무시했다(렘 28:10,11;35:16).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밝히면서 심판의 조속한 실현을 강조하는 것이다(28절).
이러한 본 단락은 (1) 거짓 예언을 책망하는 전반부(21-25절), (2) 예언의 시급한
성취를 알리는 후반부(26-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별력을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다 백성의 심판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한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로운 법과 사랑의 총체로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
갈 것이니이다"(시 119:9).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롬
1:17;10:17).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해지도록 만들어준다(딤후 3:16,1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때 잘못된 행동 즉 우상
숭배나 살육, 압제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문제
점은 잘못된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2)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효청된
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신 잘못된 거짓 선지자들의 술수를 믿
고 따랐다. 유다에는 헛된 술법을 사용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성행하여 백성들을 미혹
하였다(렘 5:31;14:14;20:46;23:9-22). 이들 거짓 선지자는 유다가 바벧론 군대에 의
하여 멸망되지 않고, 오히려 이전에 바벧론 군대에 의해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
도 조속히 고국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28:1-11). 이러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참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면서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게 항복을 권유한 사실과 배치된다(렘 6:22,26;10:22;13:20;25:1-11;27:8-11; 32:1-5;38:14-23). 예레미야는 바벧론으로 잡혀간 자들에게 그곳에서 하나님이 정한 때(70년)까지 터전을 잡고 평안하게 살라(렘 29:1-14)고 권고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거짓 예언에 미혹되어 참된 선지자를 핍박하고 멸시하며(렘 38:6) 더욱 참담한 패망으로 이끌려 갔다. 하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판을 실행하심으로써 무엇이 올바른 말씀인지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하여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참된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생각을 뛰어넘는 오직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말씀을 재단하지 말고, 오직 겸허한 자세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임하여 가라사대 - 이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이상 중에 들은 말씀을 가리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상은 11:24에서 끝났다. 이 말씀은 에스겔 선지자가 선지자로 소명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한 이후 계속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음을 뜻한다(1:3). 이러한 표현 양식은 본장에서 무려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다(1, 8, 17, 21, 26절). 이전에는(2-11장) 하나님께서 패역한 이스라엘 족속의 멸망을 다루고 있으나 본장 이후에는(12-19장)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의 심판을 믿지 않고 경시하는 자에 대한 경고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12:2
네가 패역한 족속 중에 거하도다 -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도 바벨론 포로된 이스라엘 족속들을 패역하고 완악한 자들로 규정하셨다(2:3, 6-8;3:24-26). 이것은 그들 중 많은 자들이 바벨론 포로의 징계와 시련 속에서도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완고함 가운데 거하고 있음을 지적해주는 표현이다. 그들은 볼 눈이 있어도...아니하나니 - 이는 이스라엘 족속들이 마음의 완고함으로 인하여 사건의 진상 즉 심판의 의미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시는 그 특성상 하나님께 속한 것이므로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인간 스스로 깨달을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지혜롭게 하실 때에 비로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회개하여 자신들의 완악함을 버려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등진 완악한 상태에 거하므로 사건의 진상과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소경과 귀머거리 상태로 있게 되었다. 이런 무분별하고 완악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서는 성경의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나고 있다(신 29:3, 4;사 6:9;42:20;렘 5:21;마 13:13;막 8:18;행 28:27).
=====12:3
인자야 너는 행구(行具)를 준비하고 - 하나님께서는 이전에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상을 보여주시고 그 가운데서 말씀을 주심으로 그 이상과 말씀을 선포하게 하셨다(1:1, 3, 4;11:25). 그러나 본 구절에서는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 자체를 말씀 전파를 위한 비유나 도구로 사용하고 계신다. 이것은 선지자의 말뿐만 아니라 행동 전체가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는 도구가 되어야 함을 암시해준다. 이와 같은 경우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서도 엿보여진다(렘 19:1-13). 한편 본 구절의 '행구'(* , 켈레 골라)란 문자적으로 '포로된 자의 소유물' 즉, 포로된 자들이 가지고 가는 소품을 뜻한다(baggage for exile, NASB, RSV). 이것은 후에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갈 것을 예시해 주는 비유이다(10-13절). 이사하라(* , 갈마타)는 문자적으로 '발가벗기다', '(포로들을) 끌고가다' 등의 뜻이다. 이는 단순히 한 거주지를 다른 곳으로 이주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창 20:1). 이것은 포로들이 대적에 의해 질질끌려가는 것처럼 비참하고 초라한 상태에서 이동해가는 것을 암시한다. 그래서 원어상 이 말은 '포로'(* , 골라)의 어근이다.
=====12:4
이사하는 행구(* , 켈레 골라)란 문자적으로 3절의 '행구'와 같은 표현이다. 저물 때에 - 도피자들이 남의 이목을 피해 몰래 움직일 수 있는 시기, 즉 어두워질 때를 가리킨다.
=====12:5
성벽을 뚫고 그리고 좇아 옮기되 - '성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키르'(* )는 일반적으로 집이나 침실 등 방의 벽을 가리킨다(8:7;삼상 18:11;암 5:19). 그리고 성읍의 '성벽'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호마'(* )이다(26:4, 9;렘 39:8). 바벨론 지역의 집들은 태양에 말린 흙벽돌로 지어졌다(Cooke). 에스겔 선지자는 이 벽돌 집의 벽을 뚫고 밖으로 쫓겨나가듯이 나가야 했다. 이것은 에스겔 선지자가 억지로 타의에 의해 그의 집에서 비참하게 쫓겨나가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서 곧 3절에 언급된 '행구'의 비유처럼 이스라엘 족속들이 그들의 집과 나라에서 쫓겨나 포로로 잡혀가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11, 12절).
=====12:6
얼굴을 가리우고 땅을 보지 말지어다 - 이것은 하나님의 상징적인 행동이다. 그러나 이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견해가 있다. (1) 재앙을 피해 도망갈 때 슬픔과 비통함을 느끼는 것을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행동이다(삼하 15:30;에 6:12;7:8;렘 14:3, Giesebrecht, Lange). (2) 하나님의 재앙의 심판으로 인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감추지 못해 취하는 행동이다(Calvin). (3) 12절과 연관해 볼 때 일반 포로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시드기야 왕 즉 유다 왕국의 패망시 야반(夜半)에 도망가다가 바벨론 군대에 의해 붙잡혀 눈이 뽑히고 보지 못하게 된 시드기야 왕에 대해 예시한 말이다(Cooke, Carley). 이중에서 (1)이 가장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에스겔의 비유적 행동은 한 인물에 대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전체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너를...징조가 되게 함이니라 -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자로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기 원하신다(3절 주석 참조). 따라서 그는 모든 외적인 행동에서도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했다.
=====12:7
내가 그 명대로 행하여 -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 말은 후에도 몇 번 반복된다(24:18;37:7). 낮에 나의 행구를...메고 나가니라 - 이스라엘(유다) 백성들이 밤중 은밀한 때 도피하게 되는 모습을 예시해준다. 유다의 패망시 예루살렘 성읍은 바벨론 군대에 의해 3년 동안이나 포위되어 있었다. 따라서 백성들은 바벨론 군대들 몰래 성벽을 뚫고 은밀하게 도망가야만 했었다(왕하 25:1-4).
=====12:8
본절부터 주어진 계시는 이미 앞서 주어진 계시와 내용 면에서 연속적인 것이다. 낮에 밤에 에스겔의 행동을 통해 계시하신 하나님은 이제 그 계시의 의미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시기 위해 아침에 다시 계시를 주셨다.
=====12:9
패역한 족속...하지 아니하더냐 - 이스라엘 족속은 에스겔 선지자가 그들 가운데 거하고(1:3;3:15) 이스라엘 장로들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을 듣기 위해서 찾아왔던 관계 등을 미루어 보아(8:1;11:25;14:1) 에스겔의 근황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본 구절과 같이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에 대해 질문을 한 것은 진리에 대한 사모함 즉 하나님의 계시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심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 또는 조소어린 태도로 한 것 같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들을 '패역한' 즉 '반역적인' 자들로 규정한 사실에 함축되어 있다(Calvin).
=====12:10
예루살렘 왕과 그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온 족속 - 여기에서 '예루살렘 왕'이란 여호야긴 왕을 계승해 즉위한 유다 왕국의 마지막 왕인 시드기야 왕을 가리킨다(왕하 24:15, 17;25:1, 2;렘 39:4). 한편 유다 백성들을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한 것은 그들이 이스라엘 열두 지파 족속들과 유기적으로 상호 연합된 자들이기 때문에 동일시 된 것이다(2:3). 예조(豫兆)라 하셨다 하고 - 하나님께서 '예조'를 바벨론 포로된 자들에게 보이시고 그 뜻을 알려주신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인 듯하다. 당시 바벨론 포로들은 하나님의 징계와 고난을 받아 시련 가운데 있었으면서도 여전히 완악하고 하나님께 대해 반역적인 자세를 취하였다(2, 9절). 그들은 포로로 잡혀오긴 하였으나 고국 유다 땅 즉 가나안 땅은 편안하고 안전하며 자신들도 그곳으로 되돌아 갈 것으로 여겼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의 죄악으로 그들을 징벌하시고 바벨론 포로들을 70년이 지난 후에야 고국으로 돌아오도록 허락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렘 25:11-14). 그래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들 포로들에게 70년이 차기까지 그곳에서 집을 짓고 살도록 편지하기도 하였다(렘 29:1-23). 이런 배경하에서 에스겔 선지자도 바벨론 포로된 자들에게 유다 백성들의 죄악과 멸망을 선언하게 되었던 것 같다.
=====12:11
나는 너희 징조라 - 6절 하반절의 반복적인 표현이다. 이 말은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로서 그의 말을 통해서 뿐 아니라 그의 인격과 행동 전체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자임을 암시한다.
=====12:12
무리가 성벽을 뚫고 - 유다 백성들과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가 바벨론 군대의 3년 포위 생활을 못이겨 몰래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 도망감을 예시한다(왕하 25:1-6). 이는 유다 백성들과 왕의 처절함과 비참한 모습을 엿보게 한다.
=====12:13
내 그물을...내 올무에....죽으려니와 - '그물'과 '올무'란 하나님께서 심판을 내리시는 것 또는 그 도구를 상징하는 말이다(시 69:22;전 9:12). 본 구저른 바벨론 군대의 재앙을 피하여 도망가는 시드기야 왕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여 멸망케 된다는 뜻을 나타낸다. 시드기야 왕이 바벨론 군대의 침략시 예루살렘 성읍을 빠져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눈이 뽑히고 바벨론으로 끌려가 고생함으로써 이 예언은 성취되었다(왕하 25:6, 7;렘 39:4-7). 한편 하나님이 유다의 왕을 주시하여 그의 비참한 말로를 언급하신 것은 다음과 같은 연유에서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의 선택된 지위에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스리고 보살피는 자이기 때문에(삼하 5:2;렘 23:1-6) 하나님 앞에서 책임있는 존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범죄했을 경우에는 하나님의 특별하고 대표적인 징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 땅을 보지 못하리라 -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하는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언약을 맺으신 이후(창 15:7-21;17:8;26:3;35:9-15) 그 후손들에게 기업으로 주신 것이다(출 3:8;6:8). 따라서 시드기야 왕이 이 땅을 보지 못한다는 것은 곧 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회복받지 못함을 암시해준다(4:13 주석 참조).
=====12:14
내가 그 호위하는 자와...칼을 빼리라 - 이것은 하나님이 죄인된 인간이 의지하는 것들을 무력화시키시고 인간의 자아 노력, 자구책을 헛된 것으로 만드심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스스로의 수단으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을 벗어나거나 넘길 수 있는 자는 전혀 없다. 죄를 범한 사람에게 있어서 최선의 길은 자신의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다(잠 28:13;요일 1:9). 한편 본 구절의 내용은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할 때 성취되었다(왕하 25:4, 5).
=====12:15
내가 그들을 이방인 가운데로...알리라 - 이는 내용상 11절에 연관된다(Cooke). 이것은 그들이 고난의 징계를 받은 후에야 비로소 공의의 하나님께서 징계하셨음을 인식하게 된다는 뜻이다(4:13;6:7-10).
=====12:16
내가 그 중 몇 사람을 남겨 -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주권적인 은혜로 보호하시는 남은 자들을 끝까지 지키사 구원하신다(6:8;11:13 참조). 칼과 기근과 온역을 벗어나게 하여 - 남은 자들이 이 세 재앙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그들이 바벨론 군대들의 침략에도 불구하고 유다 왕국의 멸망시 재앙에서 벗어나서 생존한다는 뜻을 암시한다. 이 세 재앙에 대해서는 5:1-12을 참조하라.
=====12:17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하나님의 두 번째 이상이 끝난 후(11:24) 12:1, 8에 이어 세 번째로 임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전문과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말씀을 선포하시기 위하여 에스겔 선지자에게 말씀하신다. =====12:18
인자야 너는 떨면서...네 물을 마시며 - 3-7절의 비유적인 행동처럼 여기서도 에스겔 선지자의 행동 자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친히 자기 백성에게 나타내시고자 하는 말씀의 뜻을 계시해주고 있다(3, 6절). 특히 '식물'과 '물'을 비유로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징벌로 인해 바벨론 군대의 침공시 심한 기근과 궁핍에 처할 것을 암시한다. 이는 19절에 의해 더욱 확증된다. 그리고 이런 기근과 궁핍 현상은 4:9-17에서 이미 예언되었으며 왕하 25:3에는 그 예언의 성취가 언급되고 있다.
=====12:19
이 땅 모든 거민의 강포...황무하게 됨이라 - 하나님께서 축복의 상징으로서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이 이스라엘 족속의 불의로 인해 피폐해지고 황량해질 것이다. 이것은 곧 '젖과 꿀이 흐르는'(출 3:8, 17) 가나안 땅이 그의 풍성함을 나타내지 못하고 궁핍과 황폐케 된 상태에 처하게 됨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율법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가나안 족속들이 행한 것처럼 불의를 행함으로 가나안 땅을 더럽히지 말라고 권고하셨다. 왜냐하면 가나안 족속들은 불의를 행함으로 그 땅을 더럽혀 결국 그곳에서 쫓겨났기 때문이다(레 18:24-30).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곳에서 불의를 행함으로 결국은 그 땅의 축복을 상실하게 되는 처지에 이르렀다. 이와같이 범죄로 인해 땅이 황폐케 되는 것은 율법의 다른 곳에서도 예언되었다(레 26:15-20). 또한 이스라엘 족속들의 불의로 가나안 땅이 황폐케 되고 그의 풍성한 결실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곧 신약의 성도들이 주 안에서 범죄할 때 하늘의 풍성한 축복(엡 1:3)을 누리지 못하고 상실함을 예시해준다(히 3:7-4:11).
=====12:20
사람의 거하는 성읍들이 황폐하며 - 이는 이스라엘 족속의 대적들이 쳐들어와 성읍들을 멸망시킴으로 그 성읍들이 사람 살기에 곤란할 정도로 황폐해짐을 의미한다. 이는 범죄로 인해 형통하지 못하고 곤고한 상황에 처한 것으로서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 대신 징벌이 가해진 전형적인 증표이다(시 1:1-6). 이런 사실은 19절의 경우와 같이 구약 율법에서도 이미 예언되었다(레 26:31-33).
=====12:21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이는 17절에 이어 네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임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내용은 앞의 것들과 다른 것이다.
=====12:22
날이 더디고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어찜이뇨 - 이스라엘 족속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예언된 징벌과 심판이 즉시 임하지 않자 그들의 완악한 본성을 드러내어 그 예언을 멸시하며 조롱하게 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악의 방종 속에서 안일하고 평안만을 기대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을 달갑지 않게 여겼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런 태도는 당시 유다 땅에서 직접 사역했던 예레미야 선지자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렘 5:13, 14;17:15). 유다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들의 그러한 요구에 부응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대항하여 평화만을 거짓도이 선포하기도 했다(렘 28:1-12).
=====12:23
내가 이 속담을 그치게 하리니...응함이 가까우니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망령된 말들(22절)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예언된 진노의 심판을 이행하시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즉시 심판을 내리시지 않는 것은 그들이 회개하고 돌이키기를 간절히 바라시는 마음의 표현이다(롬 2:4, 5;벧후 3:8, 9). 그러나 이스라엘 족속들은 그들로 하여금 돌이키도록 하기 위해 경고로서 선포되어지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멸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더욱 자초했다.
=====12:24
허탄한 묵시나 아첨하는 복술 - '묵시'(* , 하존)란 '주시하다', '보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보는 것' 또는 '계시'(렘 14:14)를 의미한다. 따라서 '허탄한 묵시'란 당시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참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임의대로 보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복술'(* , 미크삼)이란 '제비뽑다', '점치다' 등에서 유래된 말로 '점'을 뜻한다. 당시 유다 땅에는 하나님의 참된 예언 즉 진노의 심판을 경고하는 예레미야 같은 선지자를 대적하여 거짓 선지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그들은 헛된 꿈이나, 요술, 점이나 자기 자신들의 거짓된 마음을 따라 스스로 예언하며 하나님의 임박한 진노 대신에 평화만을 선포하였다(렘 5:31;14:14;23:25-28;27:10;28:1-11).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통해 예언 즉 진노의 심판에 대한 예언이 성취됨으로 그와 같은 거짓 예언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12:25
나는 여호와라 내가 말하리니(* , 에니 야훼 에다베르)란 문자적으로는 '나 여호와가 말하리니'(I the Lord shall speak, NASB)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여호와'라는 당신의 이름 위에(출 3:13-15) '나'라는 일인칭 주격을 첨가한 것은 현재 말씀하시는 당신의 권위에 대한 강조적인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종들을 통해 선포되어지는 말씀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그 말씀대로 심판하실 것을 강력한 어조로 말씀하고 계신다.
=====12:26
여호와의 말씀이...가라사대 - 네 번째 예언(21절)에 이어 다섯 번째로 임하신 말씀이다. 내용에 있어서는 네 번째 예언(22-25절)을 반복 강조한다.
=====12:27
인자야 이스라엘 족속의 말이...하나니 - 이는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자들이 에스겔 선지자의 말을 믿지 못하고 그의 말을 경시하는 태도를 나타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데 이들은 22절에 언급된 불경건한 자들 즉 선지자의 선포한 말씀을 응험이 없는 거짓된 것으로 취급하는 자들과는 약간 다르다. 이들은 에스겔 선지자를 선지자로 알고 그의 말을 믿긴 믿되 이 예언이 당장 이루어질 것이 아니라 훗날에 성취되어질 것으로 믿고 그 예언을 안일하게 대하였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의 책망의 대상이 되긴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들도 여전히 말씀을 통해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고 경성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무사 태평하게 경시하는 자세로 대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런 바벨론 포로들에게 '패역한 족속' 또는 '완악한 자'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살펴보았다(2절;2:3).
=====12:28
나의 말이 하나도 다시 더디지 않을 지니 나의 한 말이 이루리라 - 하나님의 예언은 선포된 후에 더디 성취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선포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은 더딘 것이 아니라 곧 성취된다. 하나님은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고 안일한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예언의 즉각적 성취를 선포하심으로 그들에게 경고하고 계신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과과 위엄 가운데서 소명을 받은 후(1-3장) 배것자들의 불순
종으로 인한 심판의 필연성과 임박한 멸망에 대해 상징, 설교, 환상 등 다양한 방법으
로 경고하였다(4-11장). 그러나 유다 백성들은 여전히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으리라
는 거짓된 낙관주의에 함몰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지자는 일련의 징조와 메시
지를 통해 예루살렘의 멸망을 강조하며, 그릇된 희망으로 포기하고 현실을 누납하도록
권고하고 있다(12-19장).
특별히 본 대목(12-19장)에서 저자는 11기의 징조들, 설교, 속담 등을 시작하면서
11번이나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라는 구절을 사용하고 있다(1,8,17,21
절;13:1;14:2,12;15:1;16:1;17:1;18:1). 유일하게 다른 부분은 마지막 19장뿐이다. 그
러나 19장은 전체 대목의 주제를 요약적으로 제시하는 애가(哀歌)로서 결론적 언급으
로 보여진다. 결국 에스겔은 왜곡된 낙관주의에 물들어 있던 당시 백성들에게 예루살
렘의 함락이 하나님의 뜻임을 거듭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대목의 첫 부분에 해당되는 본장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유다 백성
들을 향해 주어진 두 가지 행동 비유와 심판의 확실성에 대한 메시지가 들어 있따. 에
스겔은 자신의 행구를 옮김으로써 이스라엘 족속의 패주를 예언했으며, 먹고 마시고
떠는 행위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임할 기근과 궁핍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러나 거
듭되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속담을 인용하면서 심판의 메시지를 조롱하고 업
수히 여겼다. 선지자는 이처럼 패역하고 완고한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
임을 분명히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본장은 (1) 임박한 사로잡힘을 알려주는 선지자의 두 가지 상징적 행동을
기술한 전반부(1-20절)와 (2)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하는 두 가지 메시지를 소개하는
후반부(21-28)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좀 더 세분하면 (가) 행구를 옮기는 에스
겔(1-7절), (나) 에스겔의 행동의 해석(8-16절), (다) 이스라엘의 기근에 대한 예언
(17-20절), (라) 거짓 예언에 대한 책망(21-25절), (마) 예언의 조속한 실현을 확증함
(26-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마음이 굳은 이스라엘
백성을 깨우치고 돌이키게 하려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편, 본장에 드러난 바와 같이 비유적 행동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본서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다. 즉, 4:1-7;5:1-4;21:2;24:15-24;29:2 등이다. 이와 같
이 하나님께서 선지자의 비유적인 행동을 통해서 말씀을 계시하시는 것은 말씀을 듣는
이스라엘 족속이 너무나 강퍅하고 완고하여 단순히 말씀의 선포만으로는 부족하기 때
문으로 보여진다. 하나님은 좀더 자극적이도 도전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완악한 마음에
충격과 도전을 전달하기 원하셨다(2절).
당시 바벧론 포로들의 영적 상황은 매우 열악했다. 그들은 멀리는 B.C. 722년 북왕
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의해 멸망당한 후 팔레스틴의 북부 메소보다미아 지방으로 포
로로 잡혀오고(왕하 17:1-6;18:9-12), 가까이는 B.C. 605년 여호야김 왕 3년(왕하
24:1-4;단 1:1,2)과 B.C. 597년 여호야긴 왕(1:2;왕하 24:8-16) 때 포로로 잡혀온 자
들로 구성되었다. 포로민들은 하나님의 징벌에 의해 바벧론으로 잡혀 왔으나, 자신들
의 죄악과 부족함을 회개하거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3:4-11) 여전히 하나님을
반역하는 강퍅한 상태에 있었다(2:3-7). 이들은 잠시 잘못되어 바벧론 이방땅으로 잡
혀 왔으나, 조만간 고국 이스라엘 땅으로 되돌아 가리라는 거짓 선지자들의 예언에 미
혹되어 낙관적인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렘 28:1-11). 사실 하나님 앞에서 범죄한 자들
이 무엇보다도 먼저 취해야 할 자세는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고 죄에서 돌이키는 것이
다(오일 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족속들은 죄를 자각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
라 여전히 자신들의 강퍅한 심평 가운데 처하면서 진리와는 반대되는 삶을 살았다. 그
러면서도 곧 하나님의 회복이 가능하리라는 기대를 가졌다.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터무니 없는 소망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심판을 거억하여 회개하도록 심판의 메시지
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장은 범죄한 유다가 조만간에 패망할 것임을 알려주며, 바벧론 포로
상황 속에서도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교만한 이스라엘 족속들에 대해 경고한
다. 사실 당시의 백성들은 조기 귀국과 예루살렘의 건재에 대한 거짓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Carley). 그러므로 예레미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의 말에 전혀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다. 본국에 있는 자들은 '모든 묵시가 응험이 없다'(22절)라고 할 정도
로 하나님의 예언을 경시했으며, 결코 일어나지 않을 일로 치부해버렸다. 바벧론 포로
들도 본국에 있는 거짓 선지자들의 메시지에 현혹되어(렘 28:2-4) 조기 귀환을 기정
사실화 하며 '심판이 임하려면 아직 멀었다. 아무 걱정하지 말라'(27절)는 헛된 평안
속에서 자만했다. 이러한 태도는 마치 '주님이 언제 오시느냐'(벧후 3:4,5)라고 조롱
하며 주님의 재림을 경시하는 풍조와 동일하다. 그래서 에스겔은 '그들은 볼 눈이 있
어도 보지 아니하고 들은 귀가 있어도 듣지 아니한다(2절)고 말했다. 그들은 메시지를
맏을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거절했으며, 불순종과 불신앙에 빠져 있
었다(신 29:1-4;사 6:9,10;렘 5:21;마 13:13-15;행 28:26-28). 그러므로 하나님은 임
박한 사로잡힘과 심판의 확실성을 거듭 강조하며, 잘못된 낙관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
시하고 하나님의 뜻을 다르도록 선포하고 계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최후 심판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된다. 재림은 예기치 못한 순간
에 도적처럼 임한다(살전 5:2). 그러므로 성도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주님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마 25:1-13) 올바른 신앙의 자세를 견지해야 할 것이다.
1. 상징적 행위를 통한 경고(12:1-16)
본문은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으로 예루살렘에 가서 환상을 보았던(8-11장) 에스겔
이 바벧론 포로 지역으로 돌아와 선포한 첫 번째 메시지이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포
로로 잡혀간다는 경고와 징조를 행동으로 보여주고 해석함으로써 심판과 확실성과 필
연성을 강조한다. 이러한 메시지는 에스겔이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후 선포한 첫 번째
내용과 동일하다(4,5장). 다만 본 단락은 예루살렘 거민들의 포로됨에 대해 좀더 구체
적이고도 심도 있게 묘사했으며, 왕과 백성들의 포로됨을 구분해서 기술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본 단락은 (1) 에스겔이 행구를 옮기는 행동을 묘사하는 전반부(1-7절),
(2) 에스겔의 상징적 행위를 해석해주는 후반부(8-16절)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
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임박한 진노를 경고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회개를 촉구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의 주도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본문은 하나님께서 심판을 행하기 이전에 경고와 징조를 미리 보여주신다는 사
실을 알려준다(1-7절). 에스겔은 짐꾸러미를 가지고 포로들이 끌려가는 것과 같은 처
량한 모습으로 처소를 옮긴다. 이러한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멸망하여
포로로 잡혀갈 때 여행 도구를 준비해야 된다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래서 혹시
패역한 백성일지라도 자극을 받아 죄를 깨닫고 회개하기를 바라는 것이다(벧후 3:9).
이처럼 하나님은 심판을 집행하기 이전에 여러 가지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여 징조를
보여줌으로써(민 22:2-30;삼상 12:17,18)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
해주시는 분이다.
(2) 본문은 특별히 유다 왕 시드기야가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해 알려준다(10절).
이처럼 선지자가 왕을 지목하여 언급한 것은 이스라엘에 있어서 왕의 독특한 위치와
연관되어 있다. 이들에게 있어서 왕은 단순한 통치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자이다.
그래서 성경은 왕을 '목자' 즉 하나님의 양된 이스라엘 백성들을(시 95:7;100:3) 푸른
꼴로 인도하여 양육하며 돌보는 자로 묘사하기도 한다(삼하 5:2;대상 11:2). 그런데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백성들을 의와 진리 가운데로 바로 인도하지 못하고 모
범을 보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말씀을 거부하였다(왕하 24:19). 결국 시드기야는
B.C. 586년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 눈앞에서 아들들이 살해되는 장면을 지켜본 후, 두
눈이 뽑힌 채로 바벧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다(왕하 25:1-12). 하나님은 사명을 맡은 자
가 임무에 소홀히 할 때 그 책임을 물으시는 분이다.
(3) 본문은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길 때 가나안 땅에서 추방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5절). 이러한 사상은 이미 모세의 율법에 예언되었다(레
26:33,36,38,39;신 28:63-65). 땅은 이스라엘 족속의 조상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기업이다(창 12:7;13:14-18;15:7-21). 따라서 단순히 이스라엘 족속이 거주할 공
간적 처소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온도계의 역할을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포로됨을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고 축복권에서 제외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으로 부터 오는 하늘의 축복, 안식의 은총을 누리지 못하고
상실하는 것을 암시해준다(엡 1:3;히 3:7-4:11).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더 이상
방관하지 않으시고, 철저하게 징계하신다.
이상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신앙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수 1:8;시 119:106). (2) 만약 하나님의 말
씀에 불순종하고 자기 고집대로 행하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큰 불행
을 초래하게 만든다(신 32:25-29;왕하 18:11, 12).
2. 예루살렘에 임할 기근(12:17-20)
전 단락(1-16절)에서 행구를 옮기는 행동을 통해 이스라엘의 포로됨을 드러낸 에스
겔은 본 단락에서 바벧론 군대의 포위와 공격으로 인해 성 안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이 핍절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내
용은 4:1-17에서 예루살렘 성읍이 바벧론 군대에 의해 포위되고 거민들이 열악한 상태
에서 음식을 먹으리라고 예언한 내용과 일맥 상통한다. 이러한 본 단락은 먼저 포위와
기근 상태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뜻을 나타내는 에스겔 선지자의 비유적 행동(18절)을
언급하고, 이어서 이스라엘 족속들이 포위와 기근의 핍절한 상태에서 음식을 먹게 되
는 배경(19, 20절)을 묘사하고 있다.
한편, 본문의 문맥 형태는 전반부(1-16절)와 동일하다. 즉 앞에서 먼저 에스겔의
비유적 행동을 소개하고 뒤에서 비유적 행동을 설명해주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에스겔은 우매한 백성들에게 오해없이 메시지가 전달되도록 하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본 단락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임할 기근에 대해 예언하는 내용이다.
사실 예루살렘 성읍과 유다 전역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으로 인하여 기근을 당하리라
는 말씀은 이전에도 몇 번 언급된 바 있다(4:9-17;5;12,16;6:11). 그러나 특별히 본문
은 기근의 원인으로서 이스라엘 족속들의 강포(强暴)함을 거론하고 있다. 원래 하나님
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기업으로 주신 가나안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17), '아름다운 땅'(출 3:8;민 14:7)이었다.이스라엘 족속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신실하게 살 때 그 땅은 풍성한 소출을 낼 것이다. 그런데 가나안 땅이 황무케
된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의 범죄에 대해 징계하신다는 의미이다(레
26:19,20,32;신 28:23,24). 실제로 당시 예루살렘 성읍은 지도층에 해당되는 유력 인
사들을 중심으로 우상 숭배가 만연했을 뿐만 아니라(8:3-17;렘 7:17,18;44:17,18) 압
제와 살육 등 불의한 죄가 성행하는 도시로 타락하였다(7:23;11:6).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요 수도인 예루살렘이 바벧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 인하여 비참한
상태에 빠지고, 공포와 근심 중에 음식을 먹으며,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는 자들이 속
출할 것이라고 선포하셨다(4:10,11:5:10). 하나님은 불의와 압제에 대해 정확히 심판
하시는 공의로운 분이시다.
이와 같은 본 단락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 하나님의 피
조물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때 형통하지만, 하나님을 거역할 때는 고통과 환
난이 뒤따른다(신 28:1-19). (2) 사람은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게
된다(욥 42:4,5).
3. 하나님의 심판의 임박성(12:21-28)
본 단락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고 여전히 거짓된 소망에 휩싸여 있는 유다
백성들에게 심판이 임박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지금까지 에스겔을 포함한 많은 선지자
들은 계속해서 심판을 경고하며 회개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사 22:1-25;렘
7:27,28;27:8). 그러나 백성들은 거짓 선지자의 말에 현혹되어 심판을 부인하며, 참선
지자의 예언을 무시했다(렘 28:10,11;35:16). 이런 상황에서 에스겔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밝히면서 심판의 조속한 실현을 강조하는 것이다(28절).
이러한 본 단락은 (1) 거짓 예언을 책망하는 전반부(21-25절), (2) 예언의 시급한
성취를 알리는 후반부(26-28절)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내용을 통하여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짓 예언에 귀를 기울이지 말고 참다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분별력을 소유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본문의 핵심적인 교훈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유다 백성의 심판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취급한 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공의로운 법과 사랑의 총체로서 사람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시편 기자는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
갈 것이니이다"(시 119:9). "내가 주께 범죄치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롬
1:17;10:17).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온전해지도록 만들어준다(딤후 3:16,17),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업신여길 때 잘못된 행동 즉 우상
숭배나 살육, 압제 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근본적인 문제
점은 잘못된 행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에
있는 것이다.
(2)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로 분별할 수 있는 영적 통찰력이 효청된
다. 이스라엘 족속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대신 잘못된 거짓 선지자들의 술수를 믿
고 따랐다. 유다에는 헛된 술법을 사용하는 거짓 선지자들이 성행하여 백성들을 미혹
하였다(렘 5:31;14:14;20:46;23:9-22). 이들 거짓 선지자는 유다가 바벧론 군대에 의
하여 멸망되지 않고, 오히려 이전에 바벧론 군대에 의해 바벧론에 포로로 잡혀간 자들
도 조속히 고국 땅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렘 28:1-11). 이러한 메시지는 하나님의 참선지자인 예레미야가 눈물을 흘리면서 범죄한 유다 백성들에게 항복을 권유한 사실과 배치된다(렘 6:22,26;10:22;13:20;25:1-11;27:8-11; 32:1-5;38:14-23). 예레미야는 바벧론으로 잡혀간 자들에게 그곳에서 하나님이 정한 때(70년)까지 터전을 잡고 평안하게 살라(렘 29:1-14)고 권고하였다. 그런데 백성들은 거짓 예언에 미혹되어 참된 선지자를 핍박하고 멸시하며(렘 38:6) 더욱 참담한 패망으로 이끌려 갔다. 하나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심판을 실행하심으로써 무엇이 올바른 말씀인지 보여주셨다. 하나님의 백성은 참과 거짓을 분별하는 지혜를 소유하여 사탄의 미혹에 빠지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참된 삶의 비결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지혜와 생각을 뛰어넘는 오직 유일한 진리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인간적인 판단으로 말씀을 재단하지 말고, 오직 겸허한 자세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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