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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26:1-3

   오늘 당신 앞에서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기옵나이다(2절 하반) - 바울이  "아
그립바왕" 앞에서 자기의 신상 문제를 말하게 된 것을 "다행히" 여겼다. 그 이유는 아
그립바가 유대인의 풍습을 잘 아는 만큼 그의 말을 잘 이해하겠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그가 이번 재판에서 자기의 신상 문제가 유리하게 해결되리라고 생각된  까닭이  아니
라, 그 재판석에 둘러 앉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바울이 그
리스도를 본받아서 자기 존재의 필요가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서만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빌 1:23-24참조. 그는 여기서 많은 고위층 인물들 앞에 섰지만 그들을 기쁘게
하려는 말은 한 마디도 발설하지 않고 하나님만 믿고 담대히 서서 복음 중심으로 말한
다.

 

 행 26:4,5

  내가 처음부터 내 민족 중에와 예루살렘에서 젊었을 때 생활한 상태를 유대인이 다
아는 바라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저희가 증거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좇아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고 할 것이다 - "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5절
상반). 바울의 이 말은 유대인들이 종교적으로 정죄할 아무런 흠을  자기에게서  찾지
못할 것이 당연하고 분명하다는 자기 변호이다. 곧, 유대인들이 자기의 개종 전  생활
을 밝히 알고 있는 대로 자기는 인생의 초기부터 이스라엘의 전체 사회 앞에서,  또는
이스라엘의 중심 도시인 예루살렘 사회 앞에서 율법에  충성하는  "바리새인"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자기는 유대인들에게 높이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대하여 증거할 말이 있다면 엄격한 바리새주의로  살았다
고 할 것 밖에 없을 것이고, 그것은 도리어 그들로서 기뻐할 만한 것인데  그들은  왜
핍박하는가? 이런 의문점에 대하여 유대인들은 답변할 밀이 없을 것이라고 바울은  담
대히 말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점에서 베스도나 아그립바도 유대인들의 바울 죽이고자
함을 부당하게 볼 수 밖에 없었다(30-32).

 

 행 26:6,7

  이제도 여기 서서 신문 받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조상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라는
까닭이니 이 약속은 우리 열 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하나님을 받들어 섬김으로 얻
기를 바라는 바인데 아그립바왕이여 이 소망을 인하여 내가 유대인들에게 송사를 받는
것이니이다 -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기타 족장들에게 약속하신 것은  메시야(그리스도)
중심한 "소망"(*              )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 소망을 죽은 자의 부활로  해
석하였다. 메시야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므로 그의 신자들도 마침내  죽었다가
다시 사는 축복에 참여하게 된다. 그러므로 메시야는 우리에게 부활이요 생명이  되신
다(요 11:25).
   바울은 여기서 자기의 당하는 소송이 부당하다는 이유도 진술한다. 곧, 자기는  이
스라엘의 선조들의 신앙 노선을 그대로 파수함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핍박한다는
것이다. 그 신앙 노선을 다른 것이 아니고 "약속"과 "소망"의 노선이라는 것이다. (1)
"약속"이란 말(*                 )과 "바라는"이란 말(*              )은 서로 관련
되어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약속"(메시야께서 오시리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소망"이(바라는 바)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신자들이 메시야로 말미암아서  세상
끝날에 부활의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다.
   "조상들"이란 말과 "열 두 지파"란 말도 중요하다. 부활 소망은 바울 혼자 가진 것
이 아니고 옛날부터 "조상들"과 "열 두 지파", 곧 택함 받은 이스라엘 전체가 그 소망
을 가졌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전통적인 이스라엘의 소망에 근거한 신앙 노선을 파수
하는데도 유대인들이 그를 핍박하며 소송함은 부당한 일이라는 것이다.

 

 행 26:8-16

  바울은 여기서 죽은 자를 부활시키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왜 믿을 수  없는가  하고
베스도와 아그립바에게 도언(挑言)한(8절) 뒤에, 자기 자신이 부활 신앙에 이르게  된
경위를 말한다. 곧, 그는 자기 자신도 예수님의 부활 종교를 반대하던 철저한  기독교
박해자였으나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본 후로는 회개하고 믿는다고 하였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14절 하반) - 9:3-4에 대한 해석 참조. 이
것은 밭 가는 소를 가시채로 때리면 소가 뒷발질함을 들어서, 바울의 핍박 행위를  비
유한 것이다. 소가 가시채에 뒷발질하면 더욱 찔리울 것 밖에 없다. 그처럼  그리스도
를 핍박하는 자는 그 자신이 손해를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곧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16절) - 주님께서 바울을  거꾸러뜨리
신 목적은 그의 겸손을 위함이셨다. 이제 그는 주님으로부터 일어서라는 명령을  받았
다. 누구든지 주님으로 말미암아 거꾸러뜨림이 된 자는 그로 말미암아 일으킴이 될 소
망이 있다. 그 이유는 그를 거꾸러 뜨리신 이가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그 소망은  오
직 주님께만 있다.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 부활하신  주님을
본 것이 사도의 자격 중 하나이다(고전 15:8-9). 주님은 바울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에
게 또 나타나셨다(고후 12:1).
 


 행 26:17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 이것은  주님께
서 "이스라엘"이나 "이방인"의 핍박에서 바울을 구출하여 그로 하여금 기어코라도  복
음을 전하게 하실 것을 말씀하심이다.

 

 행 26:18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 복음을
전함으로 듣는 자의 심령의 눈이 열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다.  그러
나 그가 사람들의 사역을 통하여 하시는 것인 만큼 그들이 복음을  전해야  된다.  롬
10:14-15 참조. 복음의 말씀은 그 듣는자를 "사단의 권세에서"놓이게 하여  "하나님께
로 돌아가게" 해준다. 그만큼 복음은 능력 있는 말씀이다. 그리고 이  귀절  말씀에서
또 한가지 주목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이 영생의 기업을 누리는 데 이르게 되는  비결이
사죄(*                             )와 신앙(*            )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에 "거룩케 된다"는 말이 첨부되었으나 실상 그것은 위의 두 가지(사죄,  신앙)읜
결과이다. 사죄와 신앙으로 되는 구원 운동이야말로 전적으로 은혜의 구원 운동이다.

 

 행 26:19,20

  아그립바왕이여 그러므로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리지 아니하고 먼저 다메
섹에와 또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 선전하므로 - 극도로 반대하던 자가 그 반대하던
내용을 변호하며 전파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확신을 얻은 증거이다.  바울
의 확신은, 다메섹 도상에 돌연히 나타난 객관적 사태(客觀的事態) 때문이었다.  그는
이 때까지 본 적이 없는 햇빛보다 더 밝은 빛과 또 공중에서 들린 예수님의 말씀 때문
에 확신을 얻었다. 이 계시는 어디까지나 객관적이었다. 그 빛은 바울만 아니라  함께
가던 사람들도 보고 엎드러졌다. 이와같은 현상은 주관적 심리의 산물일 수 없다.  그
것은 그로서 "거스리지"못할 진리와 사실이었다. 여기 이른 바 "거스리지 아니하고"란
말(*                                     )은 복종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때까지 예수님을 믿지 애고 대적하던 그가 이제는 그  불가항적(不可抗的)인
초자연적 계시(超自然的啓示)에 정복을 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확신을  얻은
그는 "다메섹"과 "예루살렘"과 "유다"와 "땅 끝까지"가서 전도하게 된  것이다(20절).
그는 그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다(고전 9:16).

 

 행 26:21-23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
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 유대
인들이 "성전에서" 바울을 "죽이고자" 하였던 사건은 21:27-30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
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은 사실은 21:31-36에 기록되어 있다. 그  때
에 하나님께서 천부장을 기계로 사용하셔서 바울을 구원해 주셨다.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신약은
예언 성취의 사실을 최고의 진리라고 전하고 있다. 신약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관련된 사건들을 소개한 뒤에는 그것에 대한 확증으로 그것이 예언 성취인 사실을  말
해준다. 우리는 예언 성취의 사건이 인간적 수준의 진리가 아니고 신적(神的)인  극치
(極致)의 진리임을 믿어야 된다.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예언들 중에서 한 가지 예를 들면, 그의 속죄적 죽음에  대
하여 예언한 사 53:1-9의 말씀이 얼마나 놀랍게, 또는 자세하게 성취되었는가 !  예언
성취에 있어서 우리가 특별히 놀랄 만한 것은 그것이 이렇게 자세하게 이루어지는  점
이다. 또 애굽의 경우를 들어 말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나라에 대하여는 특별히 자세
하게 예언하셨다. 예를  들면  그  나라는  외국인이  다스릴  것이라고  하였는데(겔
30:12-15), 이 말씀은 후에 그대로 이루어져서 과연 그 나라는 바벧론,  파사,  헬라,
로마, 아랍, 토이기, 프랑스, 영국 등의 지배를 받아 왔던 것이다.

 

 행 26:24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하여 가로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 베스도의 이 말은 현대  자유주의의  표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초자연적 사건을 믿지 않으려는 것이  자유주의  경향이
다. 현재의 과정 신학(Process Theology)도 자연에서 구분될 초자연적 사건은  없다고
한다. 이 때까지 정통주의가 말하는 기적이란 사실은 기적이 아니고 역시 자연의 일종
이라고 한다. 과정 신학자 파넨버그(Panenberg)는 말하기를, 모세가 호렙에서 본 떨기
나무에 붙은 그 불은 나무에 붙고 있으면서 나무는 타지 않았다고 했는데(출  3:2-3),
그 불도 일종의 자연적인 분이었으며, 그 시대에는 그런 불이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는 자연을 초월하는 기적이란 것은 없다고 한다. 이런 사상은 성경이 명백히 말하는
기적들(人力으로도 할 수 없고 자연의 힘으로도 할 수 없는 일들)을 부인하는 것이다.
   베스도는 바울의 부활신앙이 미친 사상이라고 잘못 말했다. 이 세상에 속한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어리석게 여기는 법이다(고전 1:18).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의 진리가
참 지혜이다. 고전 1:25참조.

 

 행 26:26,27

  여기서 바울은 두 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을 내세우면서 아그립바왕의 승인을 요
청하였다. 곧, (1)예수 그리스도에게 되어진 일은 유대인들에게 두루 알려진  것이니,
아그립바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과(26절), (2)선지자의 예언 성취를 아그립바도  모른
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27절). 예수님의 부활은 예언 성취의 사건이다. 선지자들을
믿는 자라면 그들이 예언한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지 않을 수 있으랴! 여기 "이 일"
이란 말(*          )은 위에 그가 벌써 말한 그리스도의 부활하신 사실을  가리킨다.
아그립바는 자기 조부(대헤롯)때부터 유대 땅에 큰 화제(話題)거리가 되어 온  그리스
도 예수님의 사건에 대하여 모른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다.

 

 행 26:28

  아그립바가 바울더러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 아그립바왕의 이 말은 바울의 전도에 대한 냉담이다. 그는 바울의  간곡한
전도를 일소(一笑)에 붙였다. 바울이 비록 죄인된 신분으로 법정에 섰지만 그는  아그
립바와 거기 둘러 있는 많은 사람들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불타는 마음으로  복음을
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아그립바는 이렇게 애타는 바울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적은 말"이라고 하며 냉소하였다. "그리스도인"이란 말(*                    )에 대
하여는 11:26의 해석을 참조하라.

 행 26:29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노이다 하니라 -  바울의 이 말은 그의 간절한 소원이 무엇임을 보여준다. 그는 간단한 말로든지 많은 말로든지 전도하여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사람이 주님께로 돌아오게 됨이 온전히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인 줄 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한다"(*    )고 하였다.

 행 26:30-32
   바울의 진술을 들은 베스도와 아그립바왕과 모든 사람들이 그의  무죄를  인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바울을 석방하지 않은 이유는 사도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겠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 때 바울의 중심에는 로마에 가서 가이사  황제에게 복음을 전할 영열(靈熱)로 불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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