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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 11: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
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 "사도들과 그 형제들" 은 교회의 지도자들과 일반 교인
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들 중 어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먼저 모세의  율법을  지켜
유대인으로 귀화(歸化)한 뒤에야 비로소 그리스도의 축복도 받을 수 있다고 잘못 생각
하였었다. 그런데 이제 이방인들(고넬료의 일가와 친구들)이 그런 순서를 밟기도 전에
직접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다니, 그들은 그 소식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말씀"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키고, "할례자들"이란 말은 여기서는 예수 믿는  유대
인들을 가리킨다. 이 명칭이 여기 사용된 것을 보아서 사도 행전의    저자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대조시켜 말한 것이 분명하다.
   여기 "힐난한다"는 말(*                     )은  다툰다는  뜻이다.  서부  사본
(Western Text)에는 "힐난한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다음과 같은 긴  설명이  붙어 있
다. 곧,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그는  거기
서 형제들을 불러 견고케 하고 두루 복음을 전하고 가르쳤다. 그가 예루살렘 신자들을
만났을 때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보고하니 할례자들이 그로 더불어  다투었다."라
고.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지 못하도록 금지된 것은 율법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랍비들의 유전에 의한 것
이었다(Weber Tudisch Theol. pp.59-50: Eder sheim, Jewish Social Life, pp.26-28).
이런 유전에 의한 유대인들의 힐난은 실상 무가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
들의 힐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유 있게 답변하여 주었다.

 

 행 11:4-9

   이 부분 말씀에 대하여는 10:9-22의 해석을 참조하라.

 

 행 11: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 "구
원 얻을 말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의 영육(靈肉)이 아울러  종말관적  멸망에서
구원 받아 영생함을 가리킨다. 이 구원은 하나님의 말씀, 곧 복음을 받음으로  얻어진
다. 진시황(秦始皇)은 늙어 죽기 싫어서 불로초(不老草)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00
명을 삼신산(三神山)에 보냈으나 허사였다. 인간은 무슨 방법으로든 제 힘으로는 영생
을 못 얻는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만 얻는다.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 고넬료와  거기 있던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것은 이방인이 복음을  받
을 권리에 있어서 유대인과 동등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신  광경
은 오순절에 유대인들에게 임하시던 광경과 같았다.

 

 행 11: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 났노라 - 여기 인용된    "주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감람산에서  그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이다(1:5).  이 말씀은 두 가지 중요한 뜻을
내포한다. (1)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의 절대적 표준인데, 이방인 고넬료의 가족과  친
구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이 진리대로 이루어진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방인이
복음을 직접 받는 데 대하여 누구든지 힐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너희는  성령으
로 세례를 받으리라"고 하신 말씀의 "너희"란 대명사에는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복음을 받을 권리에 있어서  매일반이라는  것이
다.

 

 행 11: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
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 "선물"은 성령을
가리킨다. 2:38 참조.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을 순종한 것 뿐이다.  이방인
고넬료에게 이루어진 모든 일들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이었으니, 하나님의 종 된  베
드로로서 어찌 순종하지 않을 수 있으랴! 만일 그가 이 때에 순종하지 않았다면  그것
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막는 죄악이었을 것이다.

 

 행 11: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
방인들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 이것은    유대인 기독자들이 베드로
의 논증을 듣고 확신을 발표함이다. "생명 얻는 회개"는 복음을 믿고 주님께 돌아옴으
로 영생 얻는 회개를 말한다.

 

 행 11:19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란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
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 "베니게"  지방은 지중해 연안 지방인데
두로와 시돈 등의 도시를 가지고 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있는 섬인데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Philo, Legad, Caium, 36). "안디옥"은 소아시아에 있는 비시디아 안
디옥이 아니고, 팔레스틴의 북쪽에 있는 수리아의 안디옥이다. 이 도시는 그 때에  인
구가 50만이나 되어 로마 제국의 제 3도시로 꼽혔었다. 이 도시에 일찌기 헬라의 실루
시아(Seleucian) 왕조의 궁전이 있었고, 그 후 로마의 통치 시대에는  수리아  총독이
주재하였다. 이 도시가 오론테스(Orontes)강 안쪽으로 있으며,  그    항구는    실루시아
(Seleucian)라고 하는데 바울이 선교 여행할 때에 이 항구로 출입하였다(Lenski). "안
디옥"은 마침내 세계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13:1-3).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여기 "도"란 말(*         )은 "말씀"이라고  개역
되어야 한다. 스데반의 핍박으로 인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 때에 이방의 여러 지역
에서 "유대인에게만" 전도했다고 하니, 그 때 유대인들이 예수 믿은 후에도  이방인들
과 장벽을 두고 지낸 것이 확실하다. 순전하고 은혜 많던 초대 교회 교인들도 민족 문
제와 구약의 메시야 예언에 관하여 잘 깨닫지 못한 방면이 있었다. 이 어두움을  깨뜨
리는 데는 하나님의 직접 간섭(초자연적 간섭)이 필요하였다.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
금 고넬료를 찾아 가도록 하기 위해 계시해 주신 일들은 모두 초자연적  사건들이었으
며(10장), 이보다 앞서 빌립으로 하여금 에디오피아 내시를 찾아 가도록 하신 일도 그
러하다(8장).

 

 행 11: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
를 전파하니 - 하르낙(Harnack)은  이 때 안디옥 전도자들 중 "구브로" 출신은 바나바
이고, "구레네" 출신은 루기오(13:1)였다고 한다. 그러나 22절에 보면,  바나바가  이
일 후(20절이 말한 사실 이후)에 안디옥에 처음으로 파송된 듯하므로 하르낙의 학설은
자연스럽지 않다.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           )라는 칭호는 그때에 이교(異敎)에도  유
행하던 것이었다. 부셋트(Boussett)는 이 귀절에 근거하여 이 칭호가 안디옥에서 처음
으로 예수에게 채용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일찌기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라고한 사실(2:36)을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부셋트의 이 학설은  많은  학자들의
반대를 받았다(P. Althaus, Unser Herr Jesus neue Kirchl.,  Zeitschr.,  26,  1915,
pp.439, 513; G.Vos, The Continuity of  the  Kyriostitle  in  the  N.T.,  Princet
Theol.    Rev.,  15,  1,    Jan.  1917;  P.Wernle,    Jesus  U.Paulus,  Zeitochr.   f.
Theol.U.Kirche. 25, 1,2, Mat. 1915).
   "주"란 칭호는 실상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70인역)에서  유래되었다.  70인역
(LXX)에 "여호와"(*      )를 "주"(*           )로 번역하였다. 예수님은 실상  땅에
오신 여호와시니, 사도들과 초대 교회가 그를 "주"라고 한 것은  자연스럽다.  부셋트
(Boussett)가 말한 바 "주"란 칭호가 헬라의 이교에서 유래되었다고 함은 역설이다.

 

 행 11: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 여기서 "주
의 손"이란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의미하는 구약식 표현이다(출  0:3; 삼상  5:6;  시
80:17; 눅 1:66). 20절에서는 예수님을 "주"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하나님 아버지를 가
리켜 "주"라고  하였다.  이렇게  초대  교회는  예수님과  하나님을  동등시  하였다
(Grosheide). 저자 누가는 이 귀절 말씀으로 이방 전도 운동이 하나님의 뜻임을  증거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어떻게 성공하는 중에 있으랴? 그 뿐 아니라 이
말씀이 가르치는 또 한가지 뜻은 복음의 사역은 오직 하나님께서 도와주심으로만 결실
한다는 것이다(고전 3:5-7).

 

 행 11:22,23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저가  이르
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  권
하니 -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 나타난 영적 운동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였
다. 그것은 안디옥에서 수다한 사람들이 주님을 믿은 사실이다(21절). 대중이  그리스
도의 이름으로 움직인다고 해서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은혜에 속한다고 할 수는  없
다. 어떤 때엔 대중이 진정한 믿음은 없이 영적 허영심으로 움직이는 일도 있다. 그들
은 간혹 믿음 중심보다는 여러 가지 육체적 동기로 움직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본
문에 있는 대로 안디옥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고 움직였다. 그들은  주님을
전심(全心)으로 믿었다. 그것은 바나바의 태도를 보아서 알려진다. 곧,  그는  안디옥
교회의 은혜로움을 알아보아 인정하고 기뻐하였다. 남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
고 기뻐하는 자는 벌써 그 자신이 그같은 은혜를 받은 자임을 자증(自證)한다. 남들에
게 하나님의 은혜 있음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 자신에게 그런  은혜
받은 체험이 없든지, 아니면 그가 은혜를 받았으되 그것을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이용
하는 심리를 가졌을 것이다. 이런 자는 은혜를 전연 못 받은 상태와 같다.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붇어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이렇게 주님께 붙어 있어야 된
다는 주장을 가졌다. "굳은 마음으로"란 말(*                                     )
은 마음에 목적을 세워 가지고라는 의미이다. "주께 붙어 있으라"(*
           )고 함은 주님에게 머물러 있으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일시  동안
만 아니라 계속하여 주님과 함께 머무는 생활을 의미한다. 계속하여 주님과    동거하는
생활은 (1) 주님을 신앙하는 자라야 가지게 되며, (2) 주님의 계명을 계속적으로 순종
하는 자라야 그런 생활을 중단하지 않는다(요 14:23). 사람이 혹시 주님의 계명을  범
한 경우에라도 진실히 회개하면 다시 주님과 동거하게 된다. 기독교 신앙은 진리에 대
한 이론을 가지고 논쟁하는 데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진리에 대한 체계 정연한 지
식을 소유하는 것만도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생활로써 살
아 계신 주님과 동거함이다. 이것만이 산 신앙이다.

 

 행 11: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
라 - 여기  "착한 사람"이란 말은, 사람이 예수 믿은 후에 가지게 되는 신앙과 사랑의
덕을 가리키지 않고, 믿기 전부터라도 그    인품이    착하다는  뜻이다(Grosheide).  눅
23:50에도 역시 같은 뜻으로 이 말이 사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본문에  바나바
를 "착한 사람"이라고 한 것은 그가 그 때에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  천성적으로  가장
아량이 넓은 자였다는 뜻이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그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하였으니
만큼, 영적으로 풍부한 은혜의 소유자였다. 성령이 충많다 함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은사의 분량이 풍부함을 의미한다(Calvin,  Harmony  of  Matthew,    Mark,  Luke,  I,
p.18). 성령 충만은 그의 믿음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 본문에 "성령"이란 말  다음
에 "믿음"이란 말이 나온다(Calvin, Acts of the Apostles, I, p.470).
   이렇게 본래 착한 사람인 바나바로서 영적 은사까지 충만했으니 만큼 그가  목회하
는 임지에 교인들이 더욱 많아졌을 것이다. 버어마(Burma)에 초대 선교사로 갔던 저드
슨(Judson)은 토인들에게 천사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만큼 그는 선량하였고 또 성령이
충만하였던 선교사였다. 그가 선교한지 7년만에야 겨우 세례 교인 한 사람 생긴  정도
로 전도하기 어려운 백성 중에서 그는 끝까지 선교하였고 그가 별세할 때에는  그곳에
7,000명의 신자들이 있었다. 저드슨의 사적은 바나바의 안디옥 선교를  회상케  한다.
바나바의 착한 성격과 성령 충만한 인격은 많은 사람들을 주님께로 돌아오게 하였다.

 

 행 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 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
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 칼빈(Calvin)은  사우라에게 대한 바나바의 처신을 보고 그의
단순성을 칭찬하였다. 곧, 바나바는 자기가 예루살렘 교회의 중진 지도자 중 하나임에
도 불구하고 자기보다 위대한 사울을 등용하기를 기뻐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예수  그
리스도의 복음만 전파되면 그 이상 기쁜 일이 없는 줄 안 것이다. 우리는 바나바가 사
울을 방문한 사건에서 또 한 가지 그의 장점을 본다. 그것은 그가 사울이  받은  영적
은혜를 참된 것이라고 식별한 지혜이다. 23절 해석을 참조하라.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제자들"
이란 말은 그 때의 일반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이란 말(*
    )은 불신 이방인들이 예수 믿는 자들을 조롱한 명칭이다. 그 당시 불신    유대인들
은 기독 신자들을 가리켜 나사렛당이라 하고, 그리스도인이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
다. 그 이유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하지 않는데 그리스도와 관계된  명
칭("그리스도인")을 생각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Zahn). 이방인들이 신자들을 조롱하는
뜻으로 부른 이 명칭은 후대에 존귀한 이름으로 전환되었다. 이 사실은 순교자 이그나
티우스(Ignatius)와 폴리갑(Polycarp)의 서신들에게 발견된다(Rom.III:4,  Magn.  IX,
Eph. XI., 2; Mart. Polyc., X, XII. 1, 2). 이는 마치 예수님이 못 박히신    십자가가
후에 모든 신자들에게는 영광의 표지(標識)로 간주됨과 같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서 받는 능욕은 마침내 영광이 된다. 행 5:41; 벧전 4:14 참조.

 

 행 11:27,28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
니라 - 이  예언과 같이 과연 흉년이 들었다.  이    사실은    세속  문학인  수도니우스
(Suetonius)의 역사와 요세보(Josephus)사기도 알려준다. 이런 재앙에 대하여  하나님
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하신 목적은, (1) 그 예언이 이루어진 때에 신자들의  믿음
이 더욱 견고해지도록 하기 위함이며, (2) 사람들로 하여금 재앙이    우연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주재하에서 온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 어려운
때에 회개케 하려는 것이다.

 

 행 11:29,30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 이  말씀에서  우리는  초대
교회의 연보 행위를 배우게 된다. (1) 그들이 "힘대로 부조"한 것은 연보의  모본이다
(고후 9:6). (2) 그들이 그 연보를 하기로 미리 작정한 것은 그 연보가  그들의  자원
(自願)에서 된 증표니 그것도 연보하는데 고귀한 정신이다. (3) 그리고 그 연보한  물질을 믿을 만한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위탁한 것이 또한 잘 한 일이다.  교회의  재정취급을 두 사람 이상에게 맡김이 성경적이다. 6:3, 2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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