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
사도 행전 저자가 사울의 행동을 이렇게 자세히 기록한 목적은, 사울의 개종하던 때가
바로 그의 발악의 최절정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있다(22:4-6, 26:9-12). "위
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란 문구(* )
는 "협밥과 죽임을 붙어내며"(breathing threatening and murder)라고 번역되어야 한
다. 이 말씀의 뜻은, 그가 기독자들을 전멸하기 위해 그의 모든 활동을 전개시켰다는
것이다(A. Schlatter, Er setzt seine ganze Tatkraft daran, die Christenheit zu
vernieten.-Die Apostelgeschichte, 1948, p.108). 이렇게 행동하던 사람이 갑자기
회개하고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온 것은, 그리스도의 살아 계심을 명백히, 또는 힘있게
증거한다.
사울이 대제사장에게 간 목적은 기독자들을 체포할 권한을 받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대제사장이 주회(主會)하고 있었던 산헤드린 공의회는 종교 사무에 있어서만은
로마 정부의 간섭 없이 단독으로 사람을 체포하거나 감금할 수 있었다(A. Oepke,
Theol. Stud. U. Krit., 105, 4, 1933, p.387).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 "다메섹"은 팔레스틴 북쪽에 있
는 옛도시이다(창 14:15). 그 때에 로마 정부가 팔레스틴 밖에 있는 유대인 관할권을
산헤드린 공의회에 맡겼던 것이다(Lenski). 여기 이른 바 "그 도"는 기독교를 이름이
다. 사울은 기독교 신자를 모조리 없애버리려는 반기독 운동에 선봉자였다. 그가 회
개한 것은, (1) 기독교의 구원 운동이 순 은혜의 운동임을 알려준다. 그러므로 바울
이 말하기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며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
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하였다(딤전
1:15). (2) 그 뿐 아니라 사울의 심리가 이렇게 극도로 발악하던 중에 회개한 것은,
그 일이 순전히 기적으로 말미암은 사실은 우리에게 알게 한다. 일반적 경험에 의하
면 온유한 자가 강퍅한 자보다 회개하기에 용이한 법이다. 그런데 사울은 기독자들을
죽이려는 살기가 등등한 중에 회개의 은혜를 받았다. 이것은 보통 심리의 법칙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적이다.
사람이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진리는, 신구약의 진리 체계(眞理體系) 전체를
통하여 나타나 있다. 그 중에도 그 계시가 가장 현저한 토막은 바울의 신학이다. 바
울은 그 부르심을 받을 때부터 두드러지게 이 방면 체험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것이 은총의 성격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이적성(異蹟性)을 띠지 않을 수 없었다. 은
총은 이적성을 그 본질로 한다. 일반적인 사리(事理)는 모두 다 인과 법칙(因果法則)
의 성격을 띠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이 자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
혜로 된 것이니"라고 하였다(고전 15:10).
우리 일반 신자들은 어떠한가? 우리도 이렇게 은총으로만 되었는가? 우리의 경험
이 바울의 부르심 받은 체험과는 물론 다르다. 그가 예수님을 본 것과 꼭 같은 일은
우리에게 없다. 우리는 그런 체험을 하여야만 된다고 할 것도 없다. 그 이유는 사도
바울은 우리의 것이기 때문이다(고전 3:22). 우리는 바울로 말미암아 은혜의 복음을
받았으니만큼, 우리가 은혜로만 구원 받은 줄 알기만 하면 된다. 바울의 체험은, 복
음으로 얻는 은혜의 구원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는 특수 계시의 일부인 것이다. 이 계
시가 모든 사람들에게 거듭 나타나지 않을지라도 우리 모든 사람들은 은혜의 복음을
깨닫고 은혜로 된 구원을 받았으면 그만이다. 기독자들이여!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은
혜로만 된 것임을 인식하자! 우리는 실상 죽은 자와 같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롬 5:10). 이것이 은혜이다. 그러
므로 루터(Luther)는 은혜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것은 죽음을 죽이는 죽음이며, 죄를
죽이는 속죄이고, 독을 죽이는 독이다."고 하였다(It is the death of death, the sin
of sin, the poison of poison, and the imprisoning of imprisonment.).
행 9:3,4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이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
라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
하느냐 하시거늘 -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사울을 들러 싼 것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영광이다. 이처럼 빛 가운데 하나님(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 임하심은 진노
의 표현이 아니고 사울을 불러 사도(使徒)로 세우시기 위함이었다. 이는 마치 에스겔
이 선지자 직분을 받을 때에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나타나셨던 것과 같다(겔
1:28-2:2). 22:6-13, 26:12-18 참조. 클라우스넬(J.klausner)은 말하기를, "바울의
이와 같은 경험은 그의 간질병(epilepsy)으로 가졌던 심리 상태였다. 많은 위인들이
간질병으로 깨달은 바 있다. 마호멧, 베르나르, 사보나롤라, 뾔메, 스웨덴버그, 아우
구스티누스, 버나드, 케사르, 나폴레옹, 파스칼, 루소, 도스토예프스키 등이 그러했
다."고 하였다(From Jesus to Paul, Eng. tr., London, 1944). 브루스(Bruce)는 위의
클라우스넬의 말에 의하면 많은 위인들이 그 간질병 같은 심리 상태에서 깨달음이 있
었다고 하였는데, 그들의 깨달음은 인격 전체의 변화(바울의 경우와 같은 것)가 아니
었다. 순간적 깨달음과 인격의 영구한 변동을 같이 볼 수 없다."고 하였다(The New
international Commentary on the New Testament, The Book of the Acts, 1974,
p.195). 클라우스넬의 주장이 옳지 않은 것은 말할 여지도 없다. 바울의 회개 체험
은 결국 복음을 전한 것으로 열매를 맺었다. 그가 전한 복음과 도덕(그의 서신들의
내용)이 모두 다 진리이고 성결인데, 진리와 성결을 병적 심리의 소산으로 판단함은
언제나 망상이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이 질문에는 기독자들을 핍박함이 곧바로 그리
스도 자신을 핍박하는 것과 같다는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와 신
자와의 신비적 연합(mystical union)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진리를 처음 듣지만 예
수님의 원제자들은 일찌기 그에게서 많이 들었다(마 10:40, 25:40,45; 요 15:18). 그
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는 그의 몸이니(엡 1:22-23) 몸이 핍박 받을 때에는
하늘에 계신 머리 되신 분도 원리적으로 핍박을 받으신다. 그러므로 몸 된 교회는 땅
에서 핍박을 받을 때에도 고독을 느낄 필요 없다. 그 이유는 하늘에 계신 머리 되신
주님이 그 핍박에 동참해 주시기 때문이다(요 15:18). 신자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한
층 더 가까와지는 때는 그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때이다. 벧전 4:14 참
조.
행 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 공중에 들리는
소리에 대하여 문답식으로 말한 경험은, 신비주의자들의 생활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주조(Suso), 타울레르(Tauler), 마리아 테레사(Mary Teresa)등이 그런 체험을 하였다
고 한다. 그러나 이들의 체험은 주관적 심리의 영향도 받았다고 생각된다. 그런 체
험들이 흔히는 명상(冥想)과 같은 정신 집중에서 생겼다고 한다(Everlyn Underhill,
Mysticism, p. 275). 그러니만큼 그런 신비적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
라고 믿기는 어려운 요소도 포함한다. 그러나 사울의 다메섹 도상(途上)의 체험은 그
어느 면으로든지 철두철미 객관적 성격을 가진 것이고 하나님의 계시(啓示)로 말미암
아 된 것이었다. 이 증거는, (1)사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무슨 명상에 잠겼던 일도 없
고 도리어 정반대로 기독교 박해를 위하여 그 정신은 침착성 없이 부동(浮動)하고 있
었다. 신비적 체험이 이런 때에 일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될 수 없다. (2)동행자들도
그 때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이 들은 소리를 어느 정도 들었으니(7절), 이것이 한 개인
에게 국한된 심리 작용의 결과라고 할 수 없다. (3)그보다는 우리는 성경 말씀에 의
하여 그것이 하나님의 계시 역사인 사실을 확실히 안다(갈 1:16; 고전 9:1).
"주여 뉘시오니이까." 여기 "주여"라는 말(* )은 언제나 반드시 인간 상
대의 존칭으로만 쓰인 것이 아니다. 이 때에 사울은, 거기 나타난 초자연적 광경 때
문에 자기에게 말슴하시는 이가 천사이거나 혹은 하나님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의 지도를 따르기 위하여 "주여"라고 했을 것이다(Chrysostom). 그는 벌써 그 때 초
자연적으로 들리는 심문(審問), 곧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4절)란 말씀에
그 양심이 부딪혀 거꾸러졌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이 말씀은, 또 한 번
사울의 양심을 두드렸다. 특별히 "핍박"이란 말이 거듭 나왔으므로 사울의 가슴은 뜨
끔했을 것이다. 여기서 사울은 완전히 녹아졌다. 벴겔(Bengel)은 말하기를, "회개란
것은, 인간의 의지(意志)는 꺽어지고 녹아져서 하나님의 의지가 그 사람의 지도 원리
로 받아짐이다."고 하였다(Gnomon Vol. II, p. 593).
우리가 사울의 회개 사건을 보고 한 가지 주목할 것이 있다. 곧, 예수님이 사람에
게 나타나실 때에 그 사람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게 되며, 자신의 죄인 됨을 깨닫는
사실이다. 예수님(하나님)과의 접촉이 없이 자기 자신을 아는 인생은 없다. 작은 것
은 큰 것 앞에 서 보아야 작은 사실을 깨달으며,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 드러날 때에
그 피조성(披造性)을 깨달으며, 죄인은 거룩하신 예수님 앞에 서야 자기의 죄를 알고
바로 선다.
행 9:6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 이것은
예수님께서 사울을 사도로 임명하실 방침으로 주신 말씀이다. 이것을 보면, 그가 사
울을 사도로 세우시기 위하여 벌써 백방으로 준비하신 사실이 알려진다. 그리스도께
서 사울을 이렇게 불러서 그에게 사명을 주셨을 때에 사울의 인격도 크게 변동되었다.
딤전 1:12-14 참조. 이렇게 사울의 인격이 초자연적인 간섭으로 말미암아 변동 되었
으므로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진출하기에 용이하였다. 바르트(K.Barth)가 옳게 여겨
인용한 대로 키엘케골(Kierkegaard)은 말하기를, "사울이 사도 되기 위한 하나님의 부
르심은 하나의 역리적 사태(逆理的事態)니, 그것이 언제나 사울의 신분과 동격화(同格
化)될 수 없는 것이다."고 하였다(Der Apostelberuf ist ein paradoxes Faktum, das
im ersten und letzten Augenblick seines Lebens ausserhalb seiner personlichen
Idetitat mit ihm sellbst steht.-Karl Barth, der Romerbrief, p.3). 그러나 만일
바르트나 키엘케골(Kierkegaard)의 해석이 내포한 것과 같이, 사울이 사도직에 불리운
사건이 그의 신분에 역사적 의미 있는 변동도 수반(隋伴)한 것이 아니었다면 저런 세
계적인 대전도를 열매로 나타내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라
고 자천(自薦)한 것은(롬 1:1), 천재(天才)가 자기 자신의 생래적 소유인 창작력을 믿
고 뽑내는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다(Zundel). 바울이 사도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의 사명은, 그가 생각지도 않던 때에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지워주신 것이고, 또 그로 하여금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인격의 변화도 받게 하신 것
이다. 고전 15:9-10에 말하기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고 하였다.
행 9:7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 여기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란 문구는 22:9에 있는 같은 사건 설명과 다르다.
거기에는 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그러면 9:7의 "소리만 듣고"라는
말(* )은 음성을 들었다는 뜻이고, 22:9의 "소리
는 듣지 못하더라"고 한말(* )은 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9:7의 것은 사울의 동행자들이 그때에 사
울의 음성을 들었다는 뜻이고, 22:9의 것은 그들이 그 때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 예
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보다 첫째 해석이 옳다고 생
각된다. 요 12:29 참조.
여기서 주님의 기적적 간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울이 당했던 초자연적
경험의 일부는, 사울의 동행자들도 인식하였으니, 그 사건이 사울 개인의 주관적 심리
의 산물이 아니고 엄정한 객관적 사태였던 것이 명백하다JANG-WON (
행 9:8,9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라 - 여기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란 문구는 22:9에 있는 같은 사건 설명과 다르다.
거기에는 그들이 "소리를 듣지 못하더라"고 하였다. 그러면 9:7의 "소리만 듣고"라는
말(* )은 음성을 들었다는 뜻이고, 22:9의 "소리
는 듣지 못하더라"고 한말(* )은 소리를
알아 듣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다. 이에 대하여 어떤 학자들은 말하기를, 9:7의 것은 사울의 동행자들이 그때에 사
울의 음성을 들었다는 뜻이고, 22:9의 것은 그들이 그 때에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신 예
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해석보다 첫째 해석이 옳다고 생
각된다. 요 12:29 참조.
여기서 주님의 기적적 간섭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사울이 당했던 초자연적
경험의 일부는, 사울의 동행자들도 인식하였으니, 그 사건이 사울 개인의 주관적 심리
의 산물이 아니고 엄정한 객관적 사태였던 것이 명백하다JANG-WON (
행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 "제자"란 말(*
은 그 때에 일반 기독 신자를 가리킨 명칭이다. "환상"이란 말(*
)은 비죤(보여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꿈 가운데 있을 수 있고
(16:9), 혹은 비몽사몽 간(非夢似夢間)에도 있을 수 있다(10:3,10,17,19). 성경이 말
하는 환상은 불건전한 신비주의의 그것과 다르다. (1) 불건전한 신비주의는 필로
(Philo)나 몬타누스(Montanus)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인데, 하나님의 영께서 인간에게
오시는 때에는 인간의 마음의 작용은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원리로 생각된
환상에서는 그것을 보는 자의 심리적 자주성(自主性)은 없어진다. 우선 이 점에서 불
건전한 신비주의자들이 보았다는 환상은 성경이 말하는 그것과 다르다. 성경에 기록
된 환상은, 어디까지나 그 것을 보는 자의 심리적 자주성과 동반된 것이다. 보스
(Geerhardus Vos)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곧, "성경적 종교에 있어서는 환상의 사
역이 어디까지나 인간의 정신 차린 마음에서 된다. 선지자들은 환상을 보면서도 그것
에 대한 비판과 사색을 하였다."라고(And it is of the very essence of Biblical
religion that its exercise lies in the sphere of consciousness. The prophets
while in the visionary state, retained the facultyof reflection and
introspection.-Biblical Theology, p.245). (2) 그 뿐 아니라 불건전한 신비가들이
보는 환상들의 분량은 허대(虛大)하며 신빙성이 부족하다. 이 사실은 그들 자신도 인
정한다. 테레사(St. Teresa)는 말하기를, "이런 것들(환상들)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임이 확실하지 않은 한, 착각으로 될 우려가 있다. 그러므로 그것들이 오는 초
기에는 배척되어야 한다."고 하였다(Evelyn Underhill, Mysticism, p.281). 그와 반
면에 성경에 기록된 환상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
유는 그것들이 성경에 기록되었고, 따라서 성경의 권위를 가지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주님께서 이렇게 아나니아에게 환상으로 나타나 말씀해 주신 것은, 사울에게 또 다시
믿음을 더해 주었을 것이다. 그 이유는 사울과 관련된 초자연적 사건이 이렇게 아나
니아에게도 계시된(10절) 까닭이다. 동일한 사건으로 두 장소의 사람이 계시를 받은
것은 인간의 심리적 산물이 아니고, 엄격한 객관적 계시(啓示)인 것이 명백하다.
행 9:11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 "직가"란 말(* )은 곧다는 뜻
이다. "직가"는 다메섹 동쪽에서 서쪽으로 통한 넓은 거리인데 '델브 엘 머스타킴'
(Derb el-Mustakim)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유다 집"은 유다란 사람의 집
을 말함이라. "저가 기도하는중이다." 이 문구의 헬라어(*
)는 "왜냐 하면 볼지어다 저가 기도하는 중이기 때문이다"고 번역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언제나 기도하는 자들을 귀히 여겨 친히 보신다(Bengel, Jesus sees
those who are praying).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자를 보심은 그 사람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참되이 기도한다면, 그것은 그의 마음 속에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표이다.
행 9:12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
았느니라 하시거늘 - 아나니아가 사울을 방문할 것에 대하여 주님께서 계시로 사울에
게 미리 알려 주셨다.
행 9:13,14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
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
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 성경에는 주님의 사
명을 받는 자들이 얼른 응종하지 않고 예상되는 난관을 말한 실례(實例)들이 많다.
곧, 모세(출 3:11, 4:1), 예레미야(렘 1:6), 요나(욘 1:3), 사가랴(눅 1:18), 마리아
(눅 1:29,34)등이 그리하였다(Grosheide). 이것을 보아도 성경에 기록된 "환상"은 그
것을 받는 자의 자주 의식(自主意識)과 동반한다. 10절 해석의 (1)을 참조하라. 이
때에 아나니아의 의문은 하나의 공포심으로 나타난(26절) 불신앙인 듯하다(Calvin).
슐라텔(A. Schlatter)은, 여기 아나니아의 말이 공포심을 나타낸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의 공의를 문제시 함이라고 하였다. 곧, 그 말은 어떻게 사울과 같이 무서운 핍박자
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의아심을 표시한 것이라고 한다
(Erlauterungen zum Neuen Testament, I,p.906). 과연 아나니아는 극도로 악한 사울
이 복음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께서 주
시는 은혜의 구원이 얼마나 넓고 큰 사실을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유대인 기독
자인 아나니아로서 그 때에 그런 좁은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을 상대하고 임하신다. 딤전 1:15-16 참조.
우리는,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가기를 꺼린 것은 별문제로 하고, 다음과 같은 사실
을 본다. 곧, 그가 결국 주님의 말씀대로 사울에게 찾아 갔으니, 그 생각이 처음에는
곡선(曲線)을 가졌어도 순종의 열매를 맺었다는 것이다.
행 9:15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
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 여기에 "가라"는 명령이 두 번째(첫번은 11
절)나오면서, 아나니아의 머뭇거리는 태도를 교정시킨다. 아나니아가 안심하고 즉시
사울에게 갈 수 있는 근거는, 사울이 하나님의 "택한 그릇"인 사실에 있다. 그가 과
거에는 아무리 위험한 핍박자였을지라도 이제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으로 알려졌다면
누구든지 그에게 대하여 안심하고 교제할 수 있다.
사울이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이라고 함은, 우리 본문의 말씀과 같이 주님의 이름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됨을 의미한다. "전하다"는 말(* )은 무겁고
어려운 일을 담당한다는 뜻이다(Grosheide). 이 무겁고 어려운 일은 무엇보다도 이방
전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이방인과 임금들"이란 말이 먼저 나오고, "이스라
엘"이란 말은 그 뒤에 나온다. 사울이 이방인의 사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의
첫째 목적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도직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대하여는 전연 무관
한 것은 아니다(22:15, 26:17, 롬 1:13,14).
행 9: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 주님은, 사울이 과거에 주님의 일에 많은 손해를 입힌 데 대하여 원통함을 느끼는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울의 걸어갈 험한 길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사울이 앞으로는
주님의 일을 위하여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 "받아야 할 것"
이란 말씀(* )에 신적 필연성(神的必然性), 곧 하나님께서 사울로 하여금 수난자
(受難者)가 되도록 정하신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게 하시는 것을 인간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위한 그의 수난은 하나님께서 그를 사랑하
시는 증표이다(마 5:11-12; 행 14:22; 빌 1:28). 사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고
난에 대하여서는 고후 11:23-33에 여러가지로 기록되어 있다.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곧, 사울의 실행활에 이루어질 사건들에 의하여 그에게
보여주시겠다는 뜻이다(Bengel).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
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
만하게 하신다 하니 - 아나니아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사울을 찾아가 그에게 안수
하고 주님의 말씀을 전달했다. 그러면 아나니아는 사울의 선도자(先導者)이다. 그는
비록 드러나지 않은 작은 인물이지만 위대한 사도 바울을 내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안드레가 시몬 베드로를 주님께로 인도한 것도(요 1:40-42) 이와 유사한 실
례이다.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곧, 아나니아가 사울에게 안
수하는 행위가 사울로 하여금 다시 보게 하며, 또 성령으로 충만케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안수 행위 자체가 이런 기적을 가져온다는 것은 아니
고, 예수님께서 그를 사울에게로 보내신 목적대로(12절) 그렇게 이루어질 것을 선포함
이다. 주님의 명령을 그대로 순종하는 사역자들은 주님의 일을 만족하게 이룬다.
행 9:18,19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 여
기 "비늘"(* )은 의학상 술어라고 한다. 이것 역시 의사 누가가 사도
행전을 기록한 증표이다(W.K. Hobart, The Medical Language of luke, p.39). 야퀴에
르(Jacquier)는, 사울의 눈이 어두워진 것에 다메섹 도상에 나타났던 빛의 영향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그 영향이 사흘 동안이나 계속되었을까? 그보다도 우
리는 사울의 눈이 초자연적 역사로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한다(Grosheide).
"일어나 세례를 받고." 사울이 "일어난" 것은 길 가운데 "엎드러져" 있던 형편(4
절)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다. 그의 엎드러진 것이 그의 죄에 대한 심판을 의미한다면,
그의 일어난 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그리스
도의 의(義)로 말미암은 그의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롬 8:10 하반). 갈 2:20참조.
"세례를 받고." 할례를 자랑하던 바리새인이었던 사울이 세례를 받은 것은, 이 때에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를 순종하여 찾아온 아나니아의 집례(執禮)로 실시되었다. 그
세례는 물 세례였고 또 성령의 세례였다.
행 9: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 여기 "즉시로"란 말(*
)은 사울의 전도 행위가 기적으로 된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를 박해
하던 그가 어떻게 그렇게 돌변하여 그리스도를 전파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사람의 힘
으로 성립된 것이 아니다. 시기적으로 생각해 볼 때에 이 말("즉시")이 바울의 회개
후 얼마 동안을 가리키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19절에 밝혀진 대로 그가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었고, 21절 하반에 보면, 다메섹 사람들이 놀라서 말하기
를,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한 것을
보아 불과 며칠 동안을 의미했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의 아들." 이 성호는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啓示)하시는 하나님, 곧 메시야
를 가리킨다(시 2:7). 그는 아버지 하나님과 일체(一體)이시다(요 5:18, 10:30). 사
울은 다메섹 도상의 초자연적인 체험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그리스
도이신 사실을 확신케 되었을 것이다(갈 1:16). 그 뿐 아니라 그가 다메섹에서 아나
니아의 역사를 통해서도 "주"가 곧 예수님이신(17절) 사실을 알았다. 아나니아는 예
수님을 가리켜 "주"(여호와, 곧 하나님이란 뜻)라고 하였다. 구약의 70인역(LXX)은
구약의 여호와(* )를 "주"(* )라고 번역하였다. 사도들과 초대 교
회는 이 성호를 70인역의 의미(여호와, 곧 하나님이란 뜻)대로 예수님에게 사용하였
다. 따라서 아나니아도 그 성호를 그런 뜻으로 예수님에게 사용하였다(10, 13-14).
행 9: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
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
니냐 하더라 - 사도 행전 저자가 이 말을 기록한 목적은 사울에게 되어진 개종 사건이
기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그 사건이 기적적으로 된 것만큼, 그
개종자의 주위에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혹은 그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된 줄 알아 절대 신임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 이름"은, 그 때
에 화제였던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의 계시를 말한다.
행 9: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
시키니라 - "힘을 더 얻어." 이것은 영력(靈力)을 더 얻었다는 뜻이고 육체의 힘을
말함이 아니다. 하나님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자에게 특수한 영력을 주신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사울이 이 때에 영력을 더 얻은 원인은, 그가 아라비아에 가서
기도한 데 있다고 한다(갈 1:17). 주님의 위대한 종들은 사명을 받고도 얼마 동안 영
적 수양과 준비를 가졌던 것이다. 모세는 40년 동안의 영적 수양과 준비를 미디안 광
야에서 하였고(7:29-30), 세례 요한도 공적(公的)으로 나타나기 전에는 광야에서 거처
하였었다(눅 1:80). "증명한다"는 말은 "모은다", "비교한다", "증거를 내놓는
다"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여기서 바울이 구약의 말씀에 비추어 예수께서 메시
야, 곧 그리스도이심이 명백함을 지적하였다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구약의 말씀을 무
시하지 못하는 것인 만큼, 사울의 이와 같은 유력한 증거 앞에서 그들은 설복을 당하
였을 것이다. 언제든지 개인적 체험보다 성경 말씀으로 복음을 증거함이 효과적이다.
행 9:23-25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
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낯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
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 사울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메시야)라고 증거
하므로 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고 흉계를 꾸몄다. 여기 "여기 날이 지나매"란 말은
사울의 아라비아 생활의 3년 기간을 가리킨다(갈 1:17-18). 그가 다메섹에 유하는 동
안 기도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그러나 23절에 보면 그가 거기서 핍박을 받았다. 구
체적으로 말하면 그 때에 그를 박해하는 운동에는 다메섹에 살던 유대인들과 그 지방
을 다스리던 나바디아 왕이 합작하였던 것이다(고후 11:32). 나바디아 왕 아레다는
주후 9년부터 40년까지 다메섹 지대를 통치하였다. "그의 제자들"은, 사울의 전도를
통하여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들이다.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사울은 복음 전파를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도였다(20:24). 15:26, 21:13 참조. 그러나 그가 사명 완수를 위해서
는 무모한 희생을 피하여 생명 보존을 도모하였다. 이같은 피신은 이스라엘의 정탐군
들(수 2:15)과 다윗도 취한 바이다(삼상 19:12).
행 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 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일반 신자들)과 사귀고자 한 것은 그에게 의미심장한 일이었다. (1) 그가 그
리스도의 직접 계시에 의하여 섭취한 진리 지식이 땅 위에 계시던 예수님의 교훈과 일
치한 사실은,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알려질 것이었다. 그는 그들과의 교제에서 피
차 간 신앙이 견고해지는 은혜를 받을 것이다. (2) 그는 그들과의 교제를 통하여 피
차 간 위로와 격려와 기쁨을 얻으려고 하였다.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저자 누가는 또 다시 사울의 개종
(改宗)이 기적적으로 된 사실을 여기서 지적한다. 사울이 너무도 성도들을 악독하게
핍박하였기 때문에 그의 개종 사실은 사람들에게 얼른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과연
그의 개종은 기적으로 된 것이었다. 이 내막을 모르는 자들은 아직도 사울을 두려워
하였을 것이다.
행 9: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 "바나바"의 본래의 이름은 요셉이었으나 사도들이 그에게 "바나바"란 새 이름을 주
었다(4:36). 그것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그는 이 때에도 귀한 위로의 역할을
하였으니, 곧 고독하게 된 사울(유대인들은 그를 죽이려 하고, 예루살렘의 기독 신자
들은 그의 회개를 신임하지 않음)을 위로하며 예루살렘의 원사도들에게 그를 소개하여
그들의 신임을 얻도록 하였다. 사울은 이 때까지 대적하는 자들을 만났었으나 이제는
위로자를 만났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하는 성도를 반드시 위로
해 주신다. 바나바의 이와 같은 처사에는 (1) 사울의 인격을 바로 알아보는 밝음과,
(2) 오해를 무릅쓰고 의리를 세우는 용단과, (3) 교회의 발전을 위하여 유망한 일군을
포섭하는 비죤(vision)과, (4) 고립된 자의 실정을 깊이 느끼고 도와준 긍휼이 함께
작용한 것이다. 위의 네 가지 덕은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누
구든지 이런 덕을 소유하지 못한 경우에는, 그런 덕을 소유한 다른 사람을 존중히 하
는 처신을 해야 된다. 그가 그렇게 처신한다면 자기 자신도 그런 덕을 소유한 자가
되는 셈이다.
사울을 교계에 소개함에 바나바의 역할은 필요하였다. 교회에는 귀한 인재를 이해
시키며 신임 받게 하는 중재적 역할을 하는 인물이 언제나 필요하다. 바나바는 이 때
에 사울을 소개함에 있어서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말하였다. (1) 사울이 기적적으로
주님의 말씀을 듣고 회개하였다는 것과, (2) 그가 죽음을 각오하고 담대히 복음을 증
거하였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두 증인의 증거처럼 그의 회개의 확실성을 증명해
준다. 죽음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자는 반드시 기적적인 회개의 체험을 한 자이다.
행 9: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 이것을 보면, 사울이 계시에 의
하여 깨달은 복음을 원사도들의 복음과 비교해 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는 특별히
원사도들에게서 예수님의 역사적 행적들과 교훈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갈 1:18).
그는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무관심하는 불건전한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그의 복음
과 원사도들의 그것이 동일하였으니만큼 그는 독립적으로 복음을 전하면서도 그들과
충돌하는 일이 없었다(갈 2:6-10).
행 9:29,30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
니라 - 사울은 가는 곳마다 죽음을 각오하는 확신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
였다. 그가 얼마 전에는 다메섹에서 그렇게 증거하다가 죽을 번하였는데(22-23), 이
제는 예루살렘에서 또 다시 죽을 번한 경험을 가졌다. 바울에 대한 저자 누가의 이와
같은 기록은, 그가 개종한 후에는 얼마나 진리 확신에 강하였음을 지적하려는 데 있
다.
"헬라파 유대인들"에 대하여는 6:1, 9의 해석을 각각 참조하라. 사울이 예루살렘
에 머물면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담대히" 증거하며 스데반을 죽인 헬라파 유대인들
과 변론한 것은, 또 하나의 순교자가 될 각오로 그리했을 것이다.
행 9: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
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 무서운 핍박자 사울이 개종하고
보니 교회는 외적으로 평안하게 되었다. 사람은 평안하면 해이해지기 쉬운데, 초대
교회는 그렇지 않고 더욱 굳게 섰다고 한다. "든든히 서 가고"란 말(*
)은 건설되어 올라간다는 뜻이다. "주를 경외함"이란 말은 구약적 경
건(敬虔)으로서 히브리어 이레아드 예호와(* )에서 유래되었다. 이
말은, 신자가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행하면서 그의 뜻을 순종하려고 전심함이다
(Maclaren). "성령의 위로"는 신자에게 임하는 내적 평안을 말한다. 이 때에 교회는
이 두 가지, 곧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전진, 장성)하였다. 주님을 두려
워하는 생활이 더하여지는 동시에 영적 평안도 더해졌다. 그 뿐 아니라 그 때에 교회
는 신자들의 숫자도 증가하는 도중에 있었다. 이것은 교회 생활의 내적 생명이 풍성
해진 데 따르는 결과이다. 영력(靈力)이 빈약한 교회는 신자들의 수적 증가를 확보하
지 못한다.
행 9: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게도 내려 갔더니 -
베드로는 예루살렘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성도들을 심방하며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각처로 순회한 사실이 알려진다.
"성도들에게도 내려갔더니." 베드로가 신자들을 위로하며 가르치기 위하여 그곳에
갔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후엔 그 믿는 자들을 계속적으로 가르치며 권면
하여 굳게 서도록 하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이와 같은 목회적 사역은 후에 아볼로
가 행한 것과 같은 일이다(고전 3:5-6). 우리 한국 교회가 강조하는 가정 심방이 여
기 기록된 말씀에 근거하였다고 할 수 있다.
"룻다"(* )는 한 도시만큼 넓은 곳인데 예루살렘이 파괴된 후에는 학문의
처소가 되기도 하였다(Hamburger, Real-Encyclopadie des Judentums I., 5, p. 721;
Edersheim,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pp.155, 215, 479, 512). 그곳이 예루살
렘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만큼 그곳에는 교회가 일찍부터 설립되었을 것이다.
행 9:33,34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대 곧 일어나니 - "애니아라 하는 사람"이라고 기록한 것을 보아 우리는 그를 신자라고 단정하기 어렵다. 36절에 보면, "다비다"에 대하여는 그 신분을 "제자"라고 밝혀 놓았다. 그러므로 여기 룻다의 애니아는 신자가 아닌 듯하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여기 "중풍병"이란 병명(* )은 당시 의사들의 용어였다. 이것도 사도 행전의 저자가 의사임을 증거한다
(W.K. Hobart, The Medical Language of Luke, pp.6, 40). 이 질병에 걸린 자는 신경이 마비되어 누워서 일어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행 9:35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 - 이적의 목적은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인데, 애니아가 고침 받은 결과로 "룻다"뿐 아니라 "사론에 사는 사람들"도 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으니 기대 이상으로 성과를 거둔 것이다. "다"란 말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형편이 대성황이었던 사실을 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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